■ 책 소개
공부 중독은 세대의 문제가 아닌, 시대의 문제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서 폐허가 된 학교 현장의 뒷모습을 교사들의 목소리로 담아냄으로써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사회학자 엄기호. 《그렇다면 정상입니다》, 《심야 치유 식당》 등을 펴냈고 너무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문제들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고민해온 정신과의사 하지현. 2015년 8월, 두 명의 저자가 만났다.
다른 영역의 두 전문가가 만난 이유는 ‘공부’ 때문이었다. 강의실과 진료실, 각자 다른 현장에서 청소년들을 만나온 저자들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에 대한 걱정과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사회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공부에 중독된 아이들’, ‘공부 중독 사회’라는 현상이 그것이었다.
『공부 중독』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대담을 엮은 책으로 교육뿐 아니라 취업, 부동산, 노후, 경제 불평등까지 거의 모든 영역의 사회문제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공부라는 블랙홀이 2015년 현재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게걸스럽게 잠식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 저자
엄기호
사회학자. 1971년에 태어나 울산 귀퉁이에 있는 시골에서 쭉 자랐다. 2000년부터 국제연대운동을 하면서 낯선 것을 만나 배우는 것과 사람을 평등하게 둘러앉게 하는 ‘모름’의 중요성을 배웠다.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묻고 또 묻는 것이 이번 생의 이유라고 여긴다. 삶이 인과적으로 구성되어 분석될 수 있다기보다는 삶이란 우연이며 글과 말은 그 아이러니와 역설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는 학생뿐 아니라 두루두루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배우는 일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 『닥쳐라, 세계화!』『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단속사회』 등이 있다.
하지현
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모호할 정도로 책을 많이 읽는다. 대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 너무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문제들을 진단하고 그에 적합한 해결책을 고민해왔다. 비정상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많은 정상인들을 만나 시시비비를 가려주고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청소년과 부모를 상담하며, 읽고, 쓰고, 가르치고 있다.
펴낸 책으로 『심야 치유 식당』『그렇다면 정상입니다』『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도시 심리학』『청소년을 위한 정신 의학 에세이』 등이 있다.
■ 차례
대담을 시작하며 공부가 식민지가 된 삶에 대하여 _엄기호
1부 공부에 중독된 아이들
죄수의 딜레마
무한 루프, ‘공부 중’이라는 푯말을 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만능감
썸, 밀당, 관계는 어떻게 배우죠?
남들’의 부재
머릿속 세계의 완전성과 현실의 불완전성
결정적으로 의견 없음
정답을 찾아, 구경하는 공부
오직 매뉴얼
공정함에 대한 집착, 오버 퀄리파잉 사회에서 살아남기
2부 누가 공부에 욕심을 내는가?
486세대의 성공 판타지
1차 방정식에 고차 방정식으로
학교는 탁월한 아이를 만드는 곳이 아니다
상위 4.5퍼센트가 평균인 사회
공부적 방법론의 식민화
삶이 사라지는 공부
3부 중독에서 해독으로
공부 디톡스
대학 진학, 중산층 지식인들의 게임
절박한 자들의 정의롭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선택
아랍 왕자만 이길 수 있는 판
인풋 대비 아웃풋의 비참한 결과
중독에서 소외된 학생들의 또 다른 고통
삶의 테크네, 진정한 공부란 무엇인가?
다시 대학의 문제로
이 미친 드라이브에 브레이크를
대담을 마치며 공부라는 블랙홀에서 탈주하기 위하여 _하지현
공부 중독
대담을 시작하며 공부의 식민지가 된 삶에 대하여
나는 공부의 자식이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고, 공부로 지금에 이르렀고, 공부로 먹고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공부를 계속하며 살 것 같다. 공부를 싫어하지 않는다. 더 솔직히 말하면 공부하는 걸 재미있어하는 사람이다. 가르치는 걸 좋아하고 가르치면서 더 많이 배우고 그럴 때마다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는 기쁨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더하고 뺄 것 없는 공부의 자식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공부하는 게 재미없고 가르치는 게 고역이다. 책을 읽어도 별 감흥이 없으며 학생들에게 내가 배운 걸 이야기해줄 때도 쾌감이 없다. 배우고 가르치는 게 기쁜 일이 아니라 억지로 하는 일이 되었다. 공부가 이렇게 무의미하다고 느껴본 적이, 공부를 매개로 해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이렇게 지겹기만 한 적이 없었다. 그 살벌한 입시 경쟁을 치렀던 고등학교 때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이다.
내가 이런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은 공부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외려 삶을 질식시킨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다. 강의실에 들어서면 나는 한 마리의 똑똑한 원숭이가 된 느낌이다. 내가 펼치는 화려한 언변과 풍부한 사례에 학생들이 감탄한다. 그런데 그 감탄하는 눈동자들 속에서 배움과 성장을 찾기가 힘들다. 짝짝짝. 서커스 보고 박수치고 사라지는 느낌이다.
가르치는 내가 이런데 배우는 학생들의 입장은 어떨까? 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그들 역시 원숭이가 된 느낌이라고 한다. 배우긴 배우는데 뭘 배우는지 모르겠고, 배웠기는 배웠는데 할 줄 아는 건 없다. 배워서 알면 그 아는 것을 익혀서 할 줄 아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것으로 만드는 익힘의 과정은 공부에서 실종된 지 오래다. 그래서 나보다 잘난 원숭이가 떠드는 말을 머리에 쑤셔 넣고 경탄하고 끝난다.
이런 공부의 과정은 삶의 무능력자들만 체계적으로 양산하고 있다. 똑똑하되 멍청하며, 언변은 좋되 무능하다. 시험 문제는 잘 풀되 삶의 문제를 대처하는 능력은 형편없으며, 남을 품평하는 데는 날카로운 날을 세우되 자신을 성찰하는 데는 무디기 짝이 없다. 하나를 배워 다른 하나에 적용할 줄 하는 게 아니라 다른 하나가 내가 배운 하나와 다르면 멘붕하고 열폭한다. 그건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울수록 무능력해지고, 배울수록 화만 내는 처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하지현 선생과 이 대담을 하면서 이렇게 삶이 공부의 식민지가 되는 것, 즉 공부 중독 현상이 나만, 내 강의실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빠진 모순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더구나 문제가 심각해질수록 공부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더 심하게 중독되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회학자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상담이 아닌 공부가 지향하는 것이 개별성이 아닌 보편성이라고 한다면, 이 대담은 나로 하여금 내가 빠진 현실이 보편적인 것임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대담에서 오랜만에 공부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에서 하지현 선생과 함께 우리에게 공통의 것으로 주어진 동시대성을 공부의 화두로 찾아보려고 했다. 공부가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우리를 어떤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보려고 했다. 이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동시대성의 발견과 그 동시대성에 공동으로 대결하는 동시대인의 형성이기 때문이다.
공부에 중독된 아이들
무한 루프, 공부 중이라는 푯말을 들고
하지현: 공부 중독의 독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공부 중독 현상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지금 오로지 공부만 하고 있는 친구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습니다. 공부가 우리 사회에서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유예시켜주는 프리 패스가 되어버린 거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건 아직 시험을 안 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시험을 친다는 건 내가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 친구들은 시험은 안 봐요, 오직 공부만 해요. 타석에 서질 않는 거죠. 시험을 봐야 된다면 시험을 안 볼 백 가지 이유를 댑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다, 경쟁이 너무 심하다 등등…. 이렇게 되면 공부가 스탠바이(standby) 내지는 레디니스(readiness)일 뿐인 거예요.
시험을 안 보면 좋은 게 실제 내 능력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에요. 저는 이것을 요즘 아이들이 정신 승리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통해서 나는 여전히 가능성 있고 굉장히 잘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거예요. 자기애의 훼손 없이 말이죠. 그래서 "넌 언제 세상에 나가볼래?" 그러면 "모든 준비가 끝나면요", "아직은 준비가 덜 됐어요." 부모는 할 말이 없어요. 애가 준비가 안 됐다는데, 애를 믿어야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지금 공부 중이라는 푯말만 든 채 사회로 나가지 않고 그냥 머물러서 나이만 계속 먹어가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거죠.
엄기호: 그런데 이것을 사회학적 관점, 즉 통치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니까 너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라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좋은 이유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시민들에게 자리를 배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모두에게 자리를 배분하면 사회가 안정되죠.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란 게 자리를 배분하는 게 아니라 자리를 배분받지 못한 이들에게 네가 왜 자리를 배정받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설명이 네가 준비가 덜 됐다인 거죠. 두려움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주체와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줘야 하는데 그런 정도의 자리를 만들어낼 능력도 의사도 없는 사회 시스템이 절묘하게 만나서 기가 막히게 합의를 볼 수 있는 지점인 거죠.
하지현: 그런데 여기서 만약에 공부가 일이었다면 사정이 달라졌겠죠. 아직 학생이라면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죠. 그러나 만일 일을 하는 것이라면 다른 담론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겁니다. 일에 대한 숙련도가 떨어져서요, 전 아직 일할 준비가 안 되었어요라는 문제라면 다른 담론이 만들어질 수 있었겠죠. 사회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일을 해봐야 느는 것 아닌가요?", "내가 왜 이 정도의 보상밖에 받지 못하나요?" 이럴 것이고, 그러면 상대는 "네 일은 아직 이 정도의 보상밖에 받을 수 없어. 하지만 어쨌든 계속 해봐" 이러면서 뭔가 행동들이 뒤따를 텐데, 공부의 관점이고, 행위의 주체는 아직 배우는 학생이니 이 모양인 것입니다. 아무런 실질적 액션이 없는 거죠.
엄기호: 이게 공부의 문제가 되니까 노동을 시키면서도 노동이 아니라 그게 곧 공부다라는 식으로 손쉽게 착취할 수 있는 거죠. 열정 페이가 바로 그런 맥락이죠. 나아가 노동을 착취하는 것을 넘어서 더 성공한 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맞아, 나는 노동자가 아니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 아니야, 나는 지금 배우고 있는 중이야라고 생각하게 하는 거예요. 실수를 하면 역시 난 준비가 덜 되어 있어 하고 자학하면서 현재의 대우를 인정하게 되는 거죠. 참 묘하게 주체의 두려움과 통치의 협박, 유예하는 것과 아직 받아들여주지 않는 것, 이 두 가지가 공부라는 고리로 작동하고 있어요. 저는 솔직히 이게 우리 사회에서 학벌 사회의 공부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하지현: 지금 아이들은 항상 공부 중에 있어요. 그 이유는 0.9까지는 가능한데 절대 1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항상 0.9이죠. 그리고 0.9인 채로 산다는 것이 계속해서 내가 성인이 됐다는 느낌을 못 갖게 하죠. 마치 박사 과정에 있는 대학원생들이 갖는 느낌 있잖아요? 사십대 초반이 되고 아이들이 초등학교엘 다녀도 박사가 아닌 상태에서는 학교에 가면 그냥 애예요. 그런 것과 비슷하죠. 계속 공부하게 만드는 겁니다. 무한 루프. 공부는 종교이자 절대선이니까.
엄기호: 대학 졸업해서 취업할 때도 그런 양상이 나타나요. 졸업한 다음에 한 학기나 두 학기, 취직을 못할 수 있잖아요. 졸업한 상태에서 그렇게 1년이 넘은 뒤에 원서를 내면 회사에서 문제가 있다고 취급해요. 그런데 졸업을 하지 않고 1년을 휴학한 뒤 지원을 하면 문제 삼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학생은 공부 중이었으니까.
하지현: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대학에 남아 있어야 하는 거죠. 한 학년 학생이 4천 명이면 2천 명씩 졸업을 안 하는 학교도 있답니다. 심각한 문제죠. 대학 입장에서도 관리해야할 학생 수가 늘어나서 골칫거리이고. 하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죠. 졸업하면 끝이니까. 이력서에 결점이 없기를 바라는 거예요. 졸업 후에 공백 기간이 없어 바로 취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실제로 인사 담당자들이 그런 걸 바라는 것도 영향이 있겠고요. 역시 1인분이 되기 전까지는 공부 중, 학생 신분인 셈입니다.
엄기호: 공부 중독 사회인 거죠. 공부 중에 있으면 용서가 되고, 공부를 마쳤다고 가정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현업에서 뛰고 있어야 하는 거예요. 가차 없이 정글로 던져지는 거죠. 졸업을 유예하고 계속 공부 중에 있으면 어느 정도는 덜 불안해요. 그런데 졸업을 하고 나면 어떤 보호막도, 중력감도 없게 되죠.
누가 공부에 욕심을 내는가?
학교는 탁월한 학생을 만드는 곳이 아니다
하지현: 저는 학교의 가치, 역할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요. 학교라는 게 근대 교육, 즉 프러시아부터 시작된 2백 년쯤 된 교육이잖아요? 말 잘 듣는 훌륭한 신민을 만들기 위해서 시작된 균질화된 교육. 그전까지는 마이스터에 의한 1 대 1 교육, 도제 교육만 있었는데 산업혁명 이후에 글도 좀 깨우치고, 셈도 좀 가르치고, 남들 때리면 안 되는 거 가르쳐서 내보내니까 말 잘 듣는 신민이 되더라, 라는 사고 하에 만들어진 프러시아의 근대 교육 시스템이 지금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학교 교육의 기본이죠.
엄기호: 원래 근대 교육의 목적은 탁월한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평균을 높이는 것에 목적이 있었잖아요? 계속해서 평균적인 사람을 만들고 그 평균을 조금씩 높이는 것이 목적인, 그런 점에서 보면 굉장히 효율성을 강조하는 시스템이죠. 5퍼센트, 10퍼센트의 학생들이 탈락하는 것은 감수하고 간다는 거예요.
근대의 통치 자체가 확률론적 통치예요. 그런 근대의 통치가 가장 좋아하는 게 정규분포죠. 표준편차가 적은 정규분포를 그리는 것을 제일 좋아해요. 아주 똑똑한 천재 10퍼센트 나오고, 탈락하는 사람 10퍼센트 나오는 것을 정상이라고 보는 것이거든요. 대신에 가운데 평균을 어떻게 하면 조금씩 높일 수 있을까, 여기에 초점을 맞춰가지고 온 게 근대 교육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판타지 중의 하나가 학교에 가면 학생들이 탁월해질 거다라는 거예요. 예전에는 공부를 좀 잘하면 다 서울대 가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 판타지는 이전 세대에서 만들어진 거죠. 그런데 이제는 학교에서 아무리 공부를 잘해 봤자 서울대 갈 수 있는 학생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데, 학교의 목적이 똑똑한 학생 서너 명을 서울대 보내는 것에 맞춰져 있거든요. 그러면 그 학교는 근대 교육 기관으로서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온 것이잖아요? 한국에 근대 교육이 도입돼서 잘 작동하다가 망가진 계기 중의 하나가 이것이죠.
상위 4.5퍼센트가 평균인 사회
하지현: 또 하나의 문제는 평균을 높이는 것에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는 게, 지금 기대 평균치를 너무 높여놨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 공부를 하니까요. 공부에 대한 환상, 1차 방정식 때문에 말이죠.
우리나라 논술 시장에 두 가지 피크가 있는데요, 초등학교 저학년 논술 시장과 논술 시장이에요. 처음에는 다 자기 아이들이 서울대 갈 것으로 생각하고 엄청 공부를 시켜요. 그러니까 시험을 보면 웬만한 애들은 다 백점을 맞아버리는 거예요. 이러니 학교 입장에서는 변별력을 만들어줘야 하는 거예요. 일단 중학교부터 보면 특목고에 보낼 아이들을 찾아내야 하는 거죠. 특목고에서 변별력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거든요. 줄을 세워야 하는 거죠. 그래서 어려운 문제를 내면, 나머지 아이들도 풀고 싶죠. 기분 나쁘잖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몰라도 될 것들을 알기 위한 공부를 모두가 해야 하게 되는 거예요. 학원은 그걸 가르치고. 뛰어난 아이들은 쉽게 알 수 있을지 몰라도 평균의 아이들은 어떻게 해도 알기 어려운, 도무지 머릿속에 안 들어오는 것들을 해야만 해요. 악순환인 거죠. 서로 원하지 않는 가속이 일어나요.
엄기호: 학부모고 학생들이고 실제로는 최상인데 그것을 마치 중간값이고 평균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평균압입니다. 평균에 대한 압력이죠. 한국은 적어도 평균이 되어야 한다는 압력이 매우 높은 사회라는 뜻입니다. 평균이 되지 못하면 탈락이고 낙오이며 패배한 인생이라는 말이 돼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균이라는 건 절대 평균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무 높다는 거죠.
연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20대 기업에서 받는 연봉을 평균이라고 생각해요. 절대 중간값이 아닌 것을 평균이라고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판타지를 갖고 있어요.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게 평균이라고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판타지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압력이죠. 그리고 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엄청 배려해주죠. 안 건드리려고. 학교에서도 그러고, 또래 집단 안에서도 그러고. 왜냐하면 존중해줘야 하니까. 훌륭한 걸 선택했거든요. 어려운 길을 가는 친구니까 내가 최소한 방해는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지만 보통 학생들은 그런 생각을 하죠. 공부를 한다는 게 굉장히 특권화된 거예요. 1차 방정식에서 고차 방정식으로 바뀌고 난 후에는 이제 여러 변수 중의 하나로 작동할 뿐인데 여전히 특권화된 변수로 치고 있는 것이죠.
요즘 아이들은 다른 세대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건 곧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달라졌다는 얘기거든요. 룰이 바뀌고 구조가 바뀐 거예요. 그런데 이전 세대는 자기 경험을 가지고 이들을 보려고 하고 어떤 주체로 만들려고 해요. 여기서 삑사리가 나요.
486처럼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고, 성공까지는 못하더라도 자기 삶을 꾸려나갈 수 있고, 결국 모든 문제는 다 공부로 풀 수 있는데, 라고 생각하는 세대가 있죠. 그런데 지금 학교 다니는 학생들, 학생들도 다 알거든요. 그나마 공부가 제일 낫다는 건 알지만 공부 잘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어…" 이러고 있죠. 그런데 부모들은 하면 되는데 왜 안 하느냐, 이게 길이다, 라고만 하는 거고.
하지현: 그렇죠. 아이들은 몸으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담론이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차마 한 개인으로서는 이 구조에 저항할 수 없죠. 약간의 저항이라도 하는 순간 머릿속에서는 나는 마이너로 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죠. 공부를 열 개의 변수 중 하나로 인정하지 못하고, 그걸 제일 크게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공부에 저항하는 순간 그 친구는 이미 한번 꺾여 들어간다고 생각하게 돼요.
중독에서 해독으로
공부 디톡스
엄기호: 지금까지 선생님과 공부 중독이라고 말해왔는데 엄밀히 보면 교육 중독이죠. 교육 시스템과 공부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큽니다. 저는 교육공동체 벗에서 교육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쭉 해왔어요. 이 사회 전체가 더 이상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의미에서는 교육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이 가능할까를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 전에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두 트랙으로 나눠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첫 번째는 공부 중독의 진앙지인 중산층을 중심으로 이 상황을 막 돌파하려고 하는 그들의 노력에는 어떤 한계들이 있는가, 그런 한계들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노력이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는 걸 빨리 깨닫고 다른 탈출구를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중산층에 속하지 않는 그룹의 학생들이에요.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이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안들을 내놓고 있죠. 하지만 그것은 사실 중산층 학생들에게 집중되어 있어요. 우리가 온통 공부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것을 돌파해나갈 길을 모색해본다고 할 때, 공부 중독 담론에서 소외되어 있는 학생들도 같이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 도대체 이 학생들은 뭘 배워야 하는가, 이들에게 뭘 준비시켜야 하는가에 대하서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 학생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전략이 필요하거든요.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