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배신

   
도현신
ǻ
인물과사상사
   
13000
2015�� 02��



■ 책 소개

 

우리는 국가를 믿어야 할까?


실미도에서 세월호까지, 국민을 속인 국가의 거짓말을 다룬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정부의 무능과 거짓으로 인해 국민들이 피해를 본 사례라는 점이다. 세월호 참사에서는 보고 오류와 늦장 대처와 부처 간 책임 떠넘기기가, 담뱃값 인상과 연말정산 논란에서는 ‘증세 없는 복지’라는 난센스 공약을 억지로 이행하기 위해 정부가 꼼수를 쓴 것이 문제였다. 이런 식의 논란이 계속되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땅으로 떨어졌다. 신뢰를 상실한 국가의 피해자는 결국 국민이다.


이런 일들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종종 있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서울을 지키겠다’고 라디오 방송을 하고는 한강철교를 끊고 홀로 남쪽으로 도망을 갔다. 박정희 정권은 북파 공작원 부대인 실미도 부대를 창설하고는 대외 상황의 변화로 ‘김일성 암살’이라는 창설 목적이 무색해지자, 그들을 ‘무장 공비’로 둔갑시켜서 사살했다. 전두환 정권 때는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깡패 척결’이라는 명목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끌고 가 학대했고, 김영삼 정부 때는 국가 경제가 어렵다는 사실을 쉬쉬하면서 경제난을 키우다 끝내 국민들을 실업의 나락으로 빠뜨렸다.

 

최근의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 반대에 부딪히자 ‘4대강 정비 사업’이라고 이름만 바꿔서 이치에 맞지 않는 치수 사업에 막대한 국가 재정을 쏟아부었다. 『국가의 배신』은 국가가 국민을 배신하고 기만한 치욕의 역사를 차례차례 살피면서, ‘국가에 속고 살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 저자 도현신
순천향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다. 틀에 박힌 역사학계의 고루한 서술 방식을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과 문장으로 역사서 분야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는 젊은 글쟁이다. 2004년 장편소설 『마지막 훈족』(전2권)을 출간했으며, 단편소설 「나는 주원장이다」로 2005년 제4회 전국신인문학상 장려상을 수상했다. 2008년 『원균과 이순신』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역사 논픽션 저술에 뛰어들었고, 곧바로 『임진왜란, 잘못 알려진 상식 깨부수기』를 통해 임진왜란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했다. 역사적 사실을 단순 나열하는 것보다는 맥락과 흐름을 중요시하는 역사 서술을 추구한다. 역사를 포함한 인문 전반에 대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영국이 만든 세계』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장군 이순신』 『이순신의 조일전쟁』 『르네상스의 어둠』 『어메이징 세계사』 『어메이징 한국사』 『전쟁이 발명한 과학기술의 역사』 『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 『한국사 악인 열전』 『옛사람에게 전쟁을 묻다』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국가의 거짓에서 벗어나기


배신국가
대통령의 말을 믿었던 국민이 부역자로 몰리다 거짓 라디오 방송 chr(124)_pipe 국가에 속아서 끌려다니다 희생되다 국민방위군 사건 chr(124)_pipe 국가가 국민을 용도 폐기하다 실미도 사건 chr(124)_pipe 눈 가리고 아웅하며 혈세를 낭비하다 4대강 정비 사업


폭력국가
국가의 속임에 넘어가 학살되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chr(124)_pipe 죽은 빨갱이, 산 빨갱이 거창·산청 양민 학살 사건 chr(124)_pipe 무고한 국민을 깡패로 둔갑시키다 삼청교육대


무능국가
결정장애 국가의 최후 IMF 구제금융 사태 chr(124)_pipe 국가 공무원들의 도덕적 해이 저축은행 연쇄 부도 사태 chr(124)_pipe 국가의 적나라한 실체가 드러나다 세월호 참사


에필로그 신뢰와 숭배 사이에서




국가의 배신


배신국가

대통령의 말을 믿었던 국민이 부역자로 몰리다 거짓 라디오 방송

이승만이 거짓 방송을 하다

이승만은 전쟁 당일인 1950년 6월 25일에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령’을 발표했다. 이것은 북한군에 부역 행위를 했거나 혹은 그럴 혐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된 사람은 재판 없이 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이에 따라 ‘보도연맹원 학살’을 비롯한 수만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이 발생했다. … 전쟁이 일어난 바로 그날에 부역자 처단을 명령한 것은, 이승만이 전쟁 전에도 좌익 혐의자 처단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같은 날 오후 9시, 이승만은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John Joseph Muccio를 만나서 “내가 공산군에게 붙잡히면 안 되니까, 서울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라고 피난 갈 뜻을 밝혔다.


이승만은 1950년 6월 26일 오후 3시에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 다음 날인 1950년 6월 27일 새벽 3시(혹은 2시라는 설도 있다), 지금의 청와대인 경무대를 떠나 프란체스카와 그의 최측근 인사들만 데리고 서울역으로 가서 두 칸짜리 대구행 특별열차에 탑승해 4시에 떠났다. 공교롭게도 그날 새벽 국회에서는 서울을 사수할 것이냐 아니면 철수할 것이냐를 놓고 치열한 토론을 계속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 그러나 국회의 대표가 국회에서 서울을 사수하자고 결론이 났음을 알리러 경무대를 방문했을 때, 이미 이승만은 대전으로 열차를 타고 떠난 뒤였다.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은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방송을 해야겠어”라고 말한 뒤에 비서관인 황규면에게 연설을 받아 적게 하고는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서, 자신이 읽는 내용을 그대로 방송하게 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으며, 일선에서도 충용무쌍忠勇無雙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이 거짓말은 오후 9시부터 11시까지 세 번이나 연속으로 방송되었다. … 훗날 이승만은 서울로 돌아와서 북한군에게 협조한 부역자들 처벌에 열을 올렸는데, 정작 멀쩡한 서울 시민들을 부역자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왜 거짓말을 했을까?

추정하건대 이승만은 한국전쟁을 크나큰 기회로 생각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약 한 달 전인 1950년 5월 30일에 열린 제2대 민의원 선거(오늘날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여당인 대한국민당은 전체 210석 중에서 24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 이승만에 반대하는 무소속 의원들이 대거 국회로 진출했다는 사실은 이승만 정권이 국민들에게 지지를 잃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였다. 더구나 당시까지 대한민국은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직선제가 아니라,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였다. 그러므로 잘못하면 이승만은 대통령 재선에 실패할 수도 있었고, 최악의 경우 국회에서 탄핵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승만에게 위협적인 ‘적’은 누구였을까? 크게 두 그룹이었다. 첫째는 국회 내에 있던 이승만 반대 계열의 국회의원들, 둘째는 그 국회의원들을 뽑아준 국민들이었다.


이승만이 생각한 ‘공산주의자’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원칙적으로 북한군에 협조했거나 공산당 활동을 벌인 자들이야 한다. 그러나 이승만이 말하는 빨갱이란, 자신에게 반대하고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마음대로 붙이는 딱지였다. … 심지어 명백한 반공 활동을 한 우익 인사마저 이승만에게 맞서거나 미움을 사면, 곧바로 빨갱이 취급을 받고 처벌당했다.


국민을 분열시키다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1950년 9월 28일 북한군이 약 3개월 동안 점령하고 있던 수도 서울이 수복되었다. … 그는 자신이 정부와 국민을 버려두고 도망친 것이나, 거짓 방송을 내보낸 일에 대해 전혀 사과나 반성을 하지 않았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따로 있었다. 이승만이 한 말을 안 믿고 서둘러 피난을 간 사람들은 ‘도강파’로 분류되어 으스대고 다녔고, 반대로 이승만이 한 말을 그대로 믿고 서울에 남은 사람들은 ‘잔류파’로 몰려 처형당하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빨갱이로 몰려 핍박을 받는 일이 잇달아 발생했다.


국가에 속아서 끌려다니다 희생되다 국민방위군 사건

무엇을 위해 조직된 단체였나?

국민방위군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17일부터 시행된 제도다. 당시 전황은 매우 급박했다. 북한을 도와 참전한 중공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을 밀어내며 남진을 하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대해 우리도 인해전술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고, 국군 이외에 따로 청장년들을 조직해 별도의 군대를 편성했다. 국회에서는 17세에서 40세 사이의 남자들을 징병·모병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통과시켰다.


처음 국민방위군 관련 예산을 편성할 때 목표했던 인원수는 50만 명이었다. 그런데 막상 군대와 경찰이 각 지역에서 강제징집을 하고 보니 그 사람들의 수가 무려 100만 명이나 되었다. 이는 애초에 징집 대상이 안 된든 사람들까지 마구잡이로 끌고 간 결과였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미 국민방위군의 실패는 예고되어 있었다. 애초에 정해진 50만 명의 인원도 그 무렵의 정부 재정으로 다 먹여 살리기 어려운데, 실제로 그보다 두 배나 많은 수가 징집되었다면 보급의 어려움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수뇌부는 대개 일본군에 복무한 자들이었고, 자연히 일본군의 정신력 강조 문화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래서 한국전쟁 당시 국군은 보급을 소홀히 한 채 오직 정신력만 강조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토록 정신력을 목 놓아 외쳐도 한국군의 전투력은 우방인 미군에게조차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맥아더의 후임으로 한국에 파견된 미국의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부하들에게 “남한군은 아예 전력으로 넣지도 말라”고 말할 정도였다.


전후 상황들로 추측해 보건데, 국민방위군은 애초부터 적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다. 국민방위군은, 북한군이 신속하게 남진한 한국전쟁 초반에 서울 시민들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어, 그중 많은 수가 북한의 의용군으로 탈바꿈하는 일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를 달리 생각해보면, 국민방위군에 포함된 사람들은 애초에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공산군에게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들을 데려다가 몽땅 죽여도 상관이 없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국민방위군 병사들이 보급 부족으로 인해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병들어 죽은 것은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비참했던 죽음의 행렬

당시 한국 정부의 수뇌부들 사이에는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했다. 일례로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4·3 사건을 두고 “제주도 도민이 모두 없어지더라도 대한민국의 존립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제주도 도민 전부를 죽여서라도 공비들을 남김 없이 소탕하라!”고 했고, 당시 야당의 최고 지도자였던 조병옥조차 “대한민국을 위해 전도全島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조리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려라”는 발언을 할 정도였다.


짐짝처럼 버려지다

한편 ‘죽음의 행렬’에서 살아서 도망쳐 나온 병사들의 입을 통해, 국민방위군의 비참한 실상이 알려지자 여론은 분노로 들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이 문제를 국회에서 정식 거론하고 이승만 정부가 무계획적인 국민방위군 편성으로 수많은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강도 높게 정부를 비판했다.


대통령과 국방장관, 사령관의 거짓말 행진

국민 여론과 민주당의 공세에 더 이상 진실을 은폐하는 데 한계를 느낀 이승만 정부는 사건의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꼼수를 부렸다.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자신의 사위이자 심복인 김윤근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친구인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을 국민방위군 사건을 담당할 재판장으로 임명했다. 이선근은 불과 사흘 만에 국민방위군 부사령관 윤익헌에게 징역 3년 6개월이라는 가벼운 형을 선고했고, 나머지 간부들은 모두 무죄 처리했다.


이런 사탕발림식 판결에 민심은 더욱 분노했고, 민주당의 공세도 더욱 격렬해졌다. 민중과 야권의 거대한 분노 앞에서 전전긍긍하던 이승만 정부는 결국 고심 끝에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해임하고, 대신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와 절친한 사이인 박마리아의 남편 이기붕을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이기붕은 이승만의 의중을 잘 헤아려 국민방위군 재판을 다시 열었다.


1951년 7월 5일, 대구 동인초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육군고등군법 회의장에서 김윤근과 윤익헌 등 국민방위군의 최고 간부 5명은 그들이 저지른 공금 횡령 등의 비리가 드러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결국 대구 교외의 한 야산에서 전원이 공개 총살을 당했다.


김윤근과 윤익헌 등이 빼돌린 국민방위군 예산을 기생집에 몽땅 갖다 부었다고 당시 국회는 발표했는데, 이 이야기 자체가 믿기 어려웠기 때문에 횡령한 예산이 이승만의 사조직으로 들어가 정권 연장의 기반이 되었다는 음모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국민방위군 사건의 중심에 있던 김윤근이 서둘러 처형당하는 바람에 진실을 밝힐 기회는 영영 묻혀버렸다.


국가가 국민을 용도 폐기하다 실미도 사건

그들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실미도 부대는 뜻하지 않은 돌발 사태로 인해 창설된 조직이다. 1968년 1월 21일, 박정희를 암살할 목적을 가지고 북한에서 침투한 무장 공비들이 국군과 총격전을 벌인 일이 있었다. 공비들의 작전은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이 사건이 한국 사회에 준 충격은 실로 컸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은 “북한이 우리 대통령을 죽이려 특수부대를 보냈으니, 우리도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고 주장하며,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특수부대인 이른바 ‘실미도 부대’를 창설했다.


그들은 누구였나?

이러한 정황을 종합해볼 때, 북파 공작원들 중에는 전과 기록을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자원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중앙정보부가 약속한 높은 보상에 이끌려 자원했던 평범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왜 특수부대였을까?

1960년대 말엽의 한국군은 북한을 향해 전면적 보복 공세를 하고 싶어도 보급과 장비가 부족해서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남한의 경제력은 197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북한을 추월했다. … 또 한국 정부가 전쟁을 일으키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1·21 사태가 벌어지던 1960년대 한국군의 전시 작전권은 한국 정부가 아닌 미국 정부가 갖고 있었다. 미국의 허락이 없으면 한국은 독자적으로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작전을 지휘할 수도 없었다.


아울러 1990년대에 소련이 무너지고, 그로 인해 북한이 경제 지원을 받지 못해 큰 타격을 받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 이전까지, 북한군의 전투력은 한국군이 쉽게 넘보지 못할 만큼 튼튼했다.


불발로 끝난 실미도 부대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실미도 부대를 포함해 한국의 북한 공격을 지원해야 할 미국이 1968년 1월 23일 북한군에 나포된 함정 푸에블로호와 승무원들을 돌려받기 위해서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1968년 12월 23일, 납치된 푸에블로호 선원들이 풀려나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후에도 미국은 북한에 대한 압박에 소극적이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한창 치르고 있었는데, 베트남의 전황이 악화되다보니 상대적으로 북한보다 더 중요한 베트남에 집중해야 해서 북한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바로 실미도 부대를 탄생시킨 김형욱이 권좌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1969년 10월 20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박정희에 의해 해임되었다. 김형욱을 둘러싼 주위의 비난 여론을 의식해서였다.


셋째는 최종 결정권자인 박정희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 … 처음에는 그다지도 열렬한 관심을 보이던 박정희가 웬일인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박정희는 그때 이미 평양 당국과 비밀 교섭을 모색하고 있었다.”


무장 공비라고 둘러댄 정부

물론 암살 대상을 김일성에서 박정희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를 직접 만나 자신들의 가혹한 현실을 폭로하고, 처우 개선을 약속받으려는 절박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들은 버스를 빼앗아 타면서도 민간인들에게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고, 도리어 “놀라지 마라. 우리는 당신네들을 해치러온 게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높은 사람들이다”라고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한편 실미도 부대원들의 탈출과 도심 난입 사건이 처음 보도되나, 정부는 그들을 북괴 무장 공비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곧 장성 출신 야당 국회의원인 이세규가 실미도 부대원들이 국군 소속 특수부대원이었다고 폭로하면서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실미도 부대원들과 그 유족들에게 아무런 보상이나 후속 조치도 하지 않았고 실미도 사건은 금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폭력국가

국가의 속임에 넘어가 학살되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일제의 대화숙을 모방한 전향 단체

한국 현대사에서, 아니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사람이 가장 많이 죽은 때는 언제일까? … 바로 1950년과 1951년의 한국전쟁 때였다. 불과 3년 사이에 400~500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전부 북한군이나 중공군에게 죽은 걸까? 그렇지 않다. 남한 정부 역시 자국 내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국방부는 전쟁 중 남한에서 학살당한 민간인의 수가 106만 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유족들의 주장으로는 113만 명). 그중에서 가장 처참한 민간인 학살 사례가 국민보도연맹 사건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패망했지만, 그들이 만든 대화숙은 보도연맹으로 이어졌다. 1949년 6월 5일 당시, 남한 정부는 사회 전체에 팽배했던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들을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탄압하는 한편,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모아 가입시킨 후 반공정신을 고취시켰다. 그러면서 행여 좌익 계열 사람들이 정부를 의심해서 보도연맹 가입을 꺼릴까봐,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죄를 묻지 않고 관대하게 처분하겠다는 약속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과연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순순히 사면시켜주려는 생각에서 이 단체를 만들었던 것일까? 국가는 다르지만 중국의 마오쩌둥은 보도연맹 사건과 비슷한 일을 벌였다. 그는 백화제방百花齊放·백가쟁명百家爭鳴을 추진했는데, 이때 마오쩌둥은 공산당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마음껏 토로할 수 있도록 지식인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훗날 마오쩌둥은 측근에게 이 운동을 벌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그런 거북이 새끼들이 밖으로 나와서 노래하고 방귀 뀌기를 바란다. … 그런 다음 그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이다.”


전쟁 발발과 함께 시작된 민간인 학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불과 사흘 후인 6월 28일부터 강원도 횡성을 시작으로 남한 곳곳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학살을 저지른 쪽은 남쪽의 군대와 경찰, 서북청년단 같은 반공 우익 단체들이었다. 말 그대로 민民·관官·군軍이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살육하는 데 적극 가담했다.


그런데 2007년 7월에 『오마이뉴스』는 보도연맹 사건이 이승만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 헌병대 6사단 상사로 근무한 김만식은 충북도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헌병사령부를 통해 이승만이 내린 특명으로 남로당이나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무전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보도연맹 가입자들 중 공산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실은 보도연맹 사건이 종식되고 10년이 지난 1960년에야 각 신문들을 통해 밝혀졌다. 사건이 진행되던 1950년 당시에는 정부의 검열이 심해 언론이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밝힐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학살에 가담한 자들은 그저 순수한 반공적 열정만으로 움직이지 않았으며, 학살 대상자들의 가족들에게 뇌물과 금품 등을 받고 성 접대 같은 향응까지 챙겼다는 사실도 폭로되었다.


외국의 제지로 중단되다

가장 강력하게 항의한 국가는 영국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한국에 군대를 보냈는데, 민간인이 학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영국군이 이 사실을 본국에 알려 영국 의회에서 큰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 페너 브록웨이Fenner Brockway 의원은 “학살을 저지른 이승만을 체포해야 한다. … UN에 있는 영국 대표는 이승만을 부정하고 그의 정권을 끝내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비공산 계열인 영국의 『레이놀즈 뉴스the Reynolds News』도 “이승만과 그 도당이 우리가 지금까지 지키고자 했던 모든 명분을 완전한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다. … 이승만이 한국을 통치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만큼 UN이 한국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해, 한국 정부가 민간인 학살을 멈춘 결정적 계기는 바로 미국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한국과의 관계가 영국과 많이 달랐다. 우선 한국군의 훈련 임무를 맡은 군사고문단은 전적으로 미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미군이 보도연맹 사건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한국의 민간인 학살 문제가 서방 언론과 UN과 국제적십자 등 국제적 단체에서 공론화되자, 한국 정부의 후원자 역할을 하던 미국 정부도 여론의 압력에 밀려 더는 가만히 보고 있기가 어려워졌다. 미국 정부는 1950년대 말엽, 이승만 정부에 보도연맹원에 대한 처형을 중단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다.


무고한 국민을 깡패로 둔갑시키다 삼청교육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다

삼청교육대를 만든 것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였다. 이 조직은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은 10·26 사태 이후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의 모임이었다. 왜 이들은 삼청교육대를 만들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 정권을 쥔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세력에 겁을 주기 위함이었다.


애초에 삼청교육대로 보내는 사람들의 기준을 ‘인근 동네 주민들에게 미움을 받는 대상’으로 정해놓았고, 경찰들은 가벼운 경범죄 용의자, 심지어 평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마저 기회다 싶어서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길고 지옥 같았던 생활

삼청교육대를 관리하는 군부대 고위 관계자들은 교육생들을 더 가혹하게 다룰수록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진급할 수 있다고 믿어서(결코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일부러 학대하기도 했다.


삼청교육대에 쓸려간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가 없었다. 삼청교육대에서 교육생들에게 가르치는 수칙 제1조는 “선동을 하거나 도망치는 자는 사살한다”였다.


정부와 언론이 합작한 거짓말

사회의 진실을 밝히고 어두운 비리를 폭로해야 할 사명을 지닌 언론들은 삼청교육대의 끔찍한 참상에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을 뜨기는 했지만 오히려 진실을 정반대로 왜곡해 군부에 적극적으로 영합했다고 표현해야 더 어울릴 것이다.


1980년 8월 13일 신군부는 ㄴ각 신문사 기자들을 삼청교육대가 있는 육군 부대로 초청해, 직접 삼청교육대 훈련생들의 훈련 모습을 보고 듣고서 이를 기사로 내도록 지시했다. 이에 신문사의 기자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신문에 일제히 삼청교육대를 찬양하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무능국가

결정장애 국가의 최후 IMF 구제금융 사태

한보와 기아의 연이은 부도

몇몇 양식 있는 사람들은 “현재의 한국 경제는 빚이 지나치게 많고 대기업들이 회계를 조작하는 등의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상황인, 이런 현실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라는 경고를 했다. 실제로 1996년 한국의 대외무역수지적자는 230억 달러였고, 외국에 진 빚은 340억 달러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론은 온통 장밋빛 분위기였다.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국제화 정책에 따라 한국이 1996년에 경제협력개발기구인 OECD에 전격 가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해가 바뀐 1997년 1월 23일, 선진국 진입이라는 달콤한 환상에 젖어 있던 한국 사회에 충격적인 소식이 들렸다. 한보 그룹이 부도 신청을 낸 것이다.


끝없이 추락한 한국 경제

이 무렵 『조선일보』는 1997년 9월 4일자에 최운열 서강대 교수가 쓴 칼럼을 실었는데, 그 글은 “증시 상황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주가 붕락’을 우려할 정도의 심각한 상황이라고는 보지 않는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1997년 9월 11일자에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금융 기관의 외국인 책임자들 30명을 찾아가 인터뷰를 한 「한국은 외환위기가 아니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1997년 9월 18일자에서는 아예 IMF 총재 캉드쉬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같은 소리를 되풀이했다.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낮춘 바로 다음 날인 1997년 10월 28일, 미국의 국제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는 「아시아를 떠나라!」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아울러 모건스탠리가 보고서를 발표한 바로 그날, 한국의 주가지수는 500선 이하로 떨어졌다. 투자자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모건스탠리 보고서가 발표된 당일, 국회에서 “한국 경제는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 했던 정부

다음 날인 1997년 11월 17일, 프랑스의 경제 전문지인 『레 제코LesEchos』에서 IMF가 한국에 400~600억 달러를 긴급 지원하기로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그 발표가 나간 직후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 신청을 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며 발표를 부인했다.


왜 정부와 언론은 숨기려 했나?

IMF 구제금융이 있던 바로 그해인 1997년 12월 18일, 한국에서는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열릴 예정이었다. 당시 김영삼은 여당인 민주자유당 소속이었다. 반면 유력한 대통령 선거 후보인 김대중은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이었다. 이런 판국에 정부가 IMF 구제금융 신청을 했다는 정보가 일찍 새어나간다면, 여당은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을 야당에 빼앗길 게 불 보듯 뻔했다.


금모으기 운동 열풍의 허와 실

너무 많은 금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금값이 떨어졌고, 국제적인 금 공인을 받지 않은 채 금을 황급히 처분해서 원가보다 낮은 값에 금이 팔려나갔다.


이 와중에도 대기업들은 해외에서 비싼 돈을 주고 금을 사들였는데 낮은 원 환율 탓에 국내에서 모은 금의 수출가는 형편없었다. 반면 해외에서 사들이는 금에는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해서 한국 경제는 이중의 손해를 보았다. 게다가 금괴 수출을 했던 대기업들이 금을 불법 유통해 무려 2조 원의 세금을 횡령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 정부가 IMF에서 빌린 돈은 600억 달러였는데, 금모으기로 모은 금붙이들을 해외에 팔아 번 돈은 22억 달러에 불과했다. 이는 금모으기 운동의 목적을 생각할 때 그 실효가 의심스러운 결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금을 자선한 사람들 대부분이 서민과 중산층이었다는 사실도 금모으기 운동의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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