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이의 유랑투쟁기

   
박성수
ǻ
한티재
   
15000
2014�� 12��



■ 책 소개

 

번뜩이는 재치와 해학으로, 지구와 미래에 대한
우리 모두의 책임감에 경종을 울리는 한 방랑자의 목소리

 

평범한 정착민으로 살던 저자가 지구의 하소연을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고 ‘유랑족’으로 거듭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벌인 환경 캠페인과 사회 현실에 참여하고 실천한 기록을 엮어 ‘유랑투쟁기’를 썼다. 2006년 8월 처음 뗀 발걸음을 시작으로 2014년 12월 현재 9년째 고행 중인 저자가 길 위에서 쓴 3천여 페이지의 글과 2만 장이 넘는 사진 중 일부를 추려 엮은 것이다.

 

잘 먹고 잘사는 게 첫 번째 가치가 된 ‘야만의 사회’가 지구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도외시하게 만들기 때문에 유랑을 결단했다는 저자. SNS에서 저자를 ‘팔로우’하는 지지자들과 적지 않은 후원자가 생겼다는 것은 같은 길을 꿈꾼 이들이 꽤나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8년 동안 대한민국의 길 위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그의 유랑기를 따라가다 보면 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그리고 지구인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책임감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 저자 박성수
전북 군산에서 4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연과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풍부했다. 덕분에 대자연을 벗 삼아 뛰어놀 소중한 시간을 책상 앞에서 공부하는 데 허비하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실천을 겸비할 만한 학문으로서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대학 생활 중에는 각종 자원 봉사와 질서캠페인, 환경캠페인, 엽기적 퍼포먼스 등을 하며 학내 요주의 인물로 명성(?)을 날렸다. 졸업 후 사회복지시설과 환경단체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제도권 활동의 한계와 일상적 삶에 회의를 느끼고, 2006년부터 9년째 전국을 유랑하고 있다.

 

■ 차례
들어가면서

 

제1장 길바닥 삶
장거리 이동에 맞는 신발
‘가출 청소년’의 비애
파란만장한 밥 이야기
찜통에서 버티기
삶을 잘산다는 것은
목욕과 빨래 전쟁
둥글이가 ‘희망의 씨앗’을 나눠주는 이유
초죽음의 행군
만족의 공백을 다루는 기술
지구 기후변화를 온몸으로 직면하는 둥글이
태풍 몰아치는 다리 밑
앞서간 선배들의 발걸음
야밤의 추격전과 ‘내가 밟은 똥’
캠페인에 대한 과격 반응
혹독한 겨울 유랑
사람 구실 못 하는 떠돌이
맞지 않으면 소용없는 ‘튼튼한 신발’
둥글이 유랑일지의 비밀
설사의 행군! 멈출 수 없다
캠페인에서 챙긴 전리품
그러면 내가 상처받잖아
도심에서 잠잘 곳을 찾는다는 것
배를 버리지 않는 선장, 둥글이
캠페인 중에 쫓겨나며
나그네의 눈물
유랑 캠페인의 전략과 전술
맨밥의 청춘
모기의 최후
배낭을 짊어진 삶

 

제2장 길 위의 만남과 이야기
존경스러운 개님
아이들을 만나야 한다> 괴승과의 만남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둥글이의 성전
구정물을 먹고 난 후의 깨달음
산 자, 죽은 자, 태어나지 않은 자와의 인연
비오는 날 밤, 객사의 처마 밑에서
어른이 아이들에게 줘야 할 것
이 사람, 성철이형
방황하는 아이들 이야기
도인과의 조우
신의 자비를 체험하며
정겨운 초등학교의 밤
아이들로부터 받은 대접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어머니들의 세월
동정하지 말고 싸워야 하는 이유
백의종군로를 걸으며
행락객 예의범절
문명의 충돌
평화의 낮잠
강원도 화천 가는 길
우리는 부자다
여행을 떠나온 자의 미덕
나도 명색이 혁명가다! ㅠㅡ
아름다운 공생
모래알의 기쁨
개의 온기

 

제3장 길 위의 죽음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사회
서민의 피눈물을 담보로 한 개발과 산업화
현대문명이 자유를 줬는가
안양의 슬픈 이야기
느리게 살도록 놔둬라
대중소비사회의 함정
합법적 강도의 천국, 대한민국
그들이 서민을 갈취하는 법
전직 어부의 뒷모습
빼앗은 철새들의 땅
절망 위에 우뚝 선 그들
핵폐기장을 지나며
진도, 그리고 밀양과 청도까지
제주 4·3과 강정(1)
제주 4·3과 강정(2)
세월호 사태가 더욱 아픈 이유
소외와 공포가 불러오는 사회적 병리
100년 전 만들어진 근대화의 길을 걸으며
버려진 죽음
이 사진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가
능동적 저소득의 삶
소유의 사회

 

제4장 그리고……
내가 얻고 있는 것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채움의 세상
무한의 공간과 영원의 시간 가운데에서
너는 네 갈 길을 가라
시간의 복도 끝으로
두 개가 한 세트
인생의 난제를 해결하다
공허의 바리케이드 너머
나는 바람에 떠도는 유랑자다

 

둥글이의 유랑기를 읽으며
김광철
나무 같은 사람
최진




둥글이의 유랑투쟁기

길바닥 삶

삶을 잘산다는 것은

몇백 년 전에는 소박한 밥상에, 국난에 휩싸이지 않고, 벼슬아치들의 횡포에 시달리지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가족이 오순도순 밭 몇 마지기 일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덕망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행복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과거와 달리 ‘남보다 잘사는 것’이 그 기준의 한 덕목이 되어 있는 듯하다. 현대 자본주의사회 체제의 특성이 ‘남보다 하나라도 더 갖고 높아지려는’ 경쟁 원리가 기반이기 때문이다. “그냥 소박하게 살면 되죠”라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최소한의 체면을 살릴 수 있는 집 평수, 자동차 크기 및 저축액이 책정되어 있을 터, 그들이 말하는 ‘소박함’이 이삼백 년 전의 그 소박함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렇게 남 눈치 보는 데 바쁜 삶에 ‘잘’이라는 수식이 붙는 것은 우리 생의 모욕이 아닐까?


개중에는 이러한 세계사적 파국의 책임을 몇몇 권력자와 자본가들만의 탓으로만 돌려서 자신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의 책임을 회피해버리곤 한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기껏해야 수박 겉핥기 식의 분리수거, 재활용 운동일 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 너무 잘 적응한 결과이다.


우리가 지구사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까지를 전제해서 ‘잘사는 길’을 찾고자 한다면, 그 첫 시작은 우리가 그 속에서 착한 양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성으로부터의 탈피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한 실천이 없다면, 그 어떤 대안적 삶, 인간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진 삶,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삶, 평화와 진리를 추구하는 삶도 기실은 현대 대중소비사회의 변종이자 아류일 따름이다.


도심에서 잠잘 곳을 찾는다는 것

부산 연산역 주변에서 야영지를 찾기 위해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노고를 겪어야 했다. 부산의 중심가이자 주택가가 밀집한 지역에서 텐트 칠 곳을 찾는 심정은 발가락으로 젓가락질을 해서 콩자반을 집어 먹는 그것이었다.


한 치의 공간까지 조각을 내고 구획을 나눠 ‘내 것, 네 것’에 대한 경계를 분명히 하여, 풀 한 포기 자라날 여유도 없게 만든 도심의 공간. 이미 인구 포화 상태를 넘어선 사람들이 이중 삼중으로 겹치고 접혀진 채 비좁은 공간에서 구겨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곳.


여유로운 생존의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압착되다시피 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심리적인 공간마저 짓눌려진 상태이다. 그래서 공간에 대한 집착과 열망은 병적이기까지 하다. 공간 결핍증을 가진 이들 앞에 작은 공간이라도 생기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숨 막히는 쟁탈전이 벌어지는 것은 생존본능 같다. 누군가 자신들의 공간에 한 발이라도 들여놓았을 때 민감히 저항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여 이곳 부산은 나그네에게 텐트 칠 공간은커녕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한숨 돌릴 공간도 찾기 힘든 곳이었다.&


배낭을 짊어진 삶

보통 사람들은 나이가 먹을수록 사회적 지위가 공고해지고 노련해지며 품격이 배어나지만, 내 본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일상의 공간으로부터 떨어뜨리고, 현대사회에 다시 적응하기 힘들게 만들며, 한 살 더 먹을수록 노쇠하는 몸과 함께 나를 점점 더 할딱거리는 개로 만든다.


반면, 배낭을 짊어진 삶이 주는 축복이라면 본의 아니게 ‘능동적 저소득 ․ 저소비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나라고 양말 두 켤레와 빤스 두 개 가지고 몇 년을 버티는 것이 좋겠는가. 여분의 식량과 생활용품을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먹을 것, 입을 것, 갖고 싶은 것에 욕심이 생겨서 그것을 배낭에 쑤셔 넣으면, 그로 인해 늘어난 무게의 대가는 내 팔다리가 지게 되는 바, 나는 어쩔 수 없이 간소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돌이켜보건대, 그 잉여적 욕망을 충족하지 못했음은 결핍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풍요로 되돌아온다. 그런 잡다한 것들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은 만큼 나는 올바로 나를 대면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는 능동적 저소득의 삶(자발적 가난의 구체적 지침)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삶임을 믿는다. 내가 바라는 이상향을 내가 지금 이렇게 일궈나가고 있는데, 즉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살고 있는데 무엇이 부족하랴.



길 위의 만남과 이야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던 중 멀리 보이는 큰 교회의 십자가를 보자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니!” 나만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인근에서 가장 큰 교회로 향했다.


신도들이 다 빠져나가고 사무실에는 당회원들로 보이는 이들이 예닐곱 명 남아 있었다. 인사를 하고 사정 얘기를 하면서 교회 한쪽에서 하루 묵어 갈 수 있을까 하는 바람을 비쳤는데, 몇 마디 말이 끝나기 전부터 한 사람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고, 또 다른 이는 경보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아침에 그 청년이 틀림없이 “놀이방에 이불이랑 있으니까 그 공간에서라도 잘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벽닭이 울기 전에 방황하는 나그네가 쉬어갈 공간이 있음의 사실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신도들에게 ‘비움의 미덕’, ‘낮춤의 미덕’을 전할 여력도 없고 관심도 별로 없다. 좀 더 스펙터클한 공연으로 신도들 정신을 홀려 교회의 부흥을 이루려면 갖가지 영상 ․ 음향 ․ 조명 ․ 인테리어 장치가 있어야 하기에 그러한 ‘감성공학’을 극대화할 고가의 장비를 비치해야 하고, 이의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문을 굳건히 걸어 잠그고 방범 장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후에 인간들에게 “만물을 잘 경영하라”고 명하셨다. 여기서의 ‘만물’이란 자연의 모든 생물 ․ 무생물은 물론 인간까지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부추기는 성장주의, 승리주의, 개발과 발전, 성공에의 열망은 지구 파괴에 일익을 담당하고, 사회적 약자를 더욱 소외시킨다. 지구적 파국에 대한 고민 없이 오히려 이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교회의 반생태적 발전주의는 그 어떤 토건 재벌들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4대강사업, 새만금사업에 앞장서 찬성하고, 미국의 이라크전쟁을 극렬 지지했고,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자처했다. 거기에 경쟁적으로 벌이는 교회의 대형화 사업은 저들이 믿는 것이 과연 신인지 돈과 권력인지 의아하게 만든다.


둥글이의 성전

종종 예외는 있었지만, 나그네를 박대하는 절과 교회, 성당의 모습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유랑 초반에는 예수의 사랑과 부처의 자비를 구하러 절이나 교회, 성당을 찾아다녔지만, 반복되는 박대를 버티지 못하여 그 후로는 아무리 잘 곳이 없어도 교회와 절, 성당은 찾아가지 않았다. 가진 것 없는 나그네는 더 이상 그런 곳에서 예수와 부처를 찾기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재산이라고는 배낭 하나밖에 없는, 말 그대로 ‘길을 떠도는 거지’가 이 시대 예수의 사랑과 부처의 자비를 느낀 곳이 어디였을까? 교회도 절도 아닌 곳에서 예수의 사랑과 부처의 자비를 느낄 수 있을까? 있었다. 둥글이가 체험한 그곳은 바로 ‘공중화장실’이다.


그곳은 유랑자가 생리 현상을 해결할 수 있고, 물을 얻을 수 있으며 그 옆에 텐트를 칠 수도 있다. 공중화장실을 지날 때 (직업병인지 몰라도) 왠지 모를 경건함과 신성(?)이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교회와 절은 사람을 차별해서 받아들이지만, 공중화장실은 별 볼일 없고 낮은 자라도 차별 없이 받아들인다. 똑똑하고, 있어 보이고, 전도를 많이 하고, 헌금과 시주를 많이 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공중화장실은 차별하지 않는다. 또한 믿음이 없다고 혐오하지도 않고, 들어온 순서대로 쌀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차별과 억압이 존재하지만, 단 한 곳 공중화장실에서만큼은 예외라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화장실은 떠돌이 나그네에게 신성한 곳이 되었다. 아마 예수와 부처께서도 자신을 믿는다고 말로만 떠벌리는 신도들의 박해를 피해, 그곳 공중화장실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위해 팔을 벌리고 계실 듯하다.


결국 이렇게 공중화장실은 유랑자 둥글이의 성전이 되었다. 부디 공중화장실처럼만 살게 하소서……. 화장렐루야~. 나무화장보살~.


동정하지 말고 싸워야 하는 이유</P>>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소외계층에게 따뜻한 겨울을’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모금 활동을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저소득층 겨울 난방비 지원 500억 원을 삭감했었다. 백날 천날 수천의 사람들이 떨면서 모금 활동을 하고 다녀도, 위정자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예산조정 하면 수백 배 더 큰 부정적 파급력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며 규탄했던 단체들은 이명박 정부로부터 단체보조금마저 삭감당했다. 박근혜 정권 들어서는 이러한 수법이 더욱 교묘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의 지속은 단순히 재벌 위주의 정책, 사회 불평등을 조장하는 몇몇 정치인과 관료들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온정주의적 시각’으로밖에 세상을 살필 여력이 없는 국민 여론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온정주의적(혹은 감상주의적) 시각은 종합적이고 비판적으로 사회 문제를 살필 여력을 빼앗음은 물론이거니와 그러한 ‘비판적 활동’ 그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의 표어는 “좋은 게 좋은 거야”이고, 집합주의는 그 형제이다. 이렇기에 온정주의에 찌든 많은 국민들은 국가에서 추진하는 정책이나 제도를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 반감이 유난히 높다.


하여간 사회소외계층에 대해 ‘실질적’ 관심을 가지려거든, 그들을 불쌍히 여기거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인) 자기만족적 자선 활동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소외된 이웃 전반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해줄 수 있는 제도 정착에도 힘써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동정 남발하는 것을 그치고, 나서서 비판하고 싸워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부자다

길 한쪽에 산딸기가 풍성히 열려 있다. 목이 타던 차라 걸음을 멈추고 정신없이 털어 먹는다. 물 받을 곳이 막막한 산길에서 이렇게 갈증을 해소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스스로를 내주는 산딸기가 너무 고맙다.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씨가 씹히지 않도록 혀로 눌러서 즙만 터뜨려 먹는다. 그리고 20여 미터 벗어난 풀밭 사이에 씨를 뱉어낸다. “퉤이~ 퉤이~!”


나는 그 달콤함을 맛봐서 좋고 산딸기는 자신의 종족을 좀 더 넓게 퍼뜨릴 수 있으므로, 서로 남는 장사를 한 것이다. 더군다나 내 뒤를 따라올 이들도 내 덕에 그 달콤함을 맛볼 수 있음에랴. 자연을 쥐어짜서 그 엑기스를 통장에 쑤셔넣으려 혈안이 되어 있지 않는 한, 이렇게 우리는 자연 안에서 함께 부자다.



길 위의 죽음

현대문명이 자유를 줬는가

자동차로 인해서 예상치 못한 시간상 ․ 재산상 ․ 인명의 피해가 발생하는 바, 국내에서만 하루에도 천여 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열다섯 명이 죽고 천여 명이 부상과 장애를 당한다고 한다. 현대사회의 문명이 인간에게 편리를 제공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과연 그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득이 되는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사람들은 자동차가 주는 혜택으로 “땅 끝에서 한양까지 걸어가려면 몇 달이 걸렸는데 지금은 대여섯 시간이면 떡을 친다”고 말한다. ‘속도’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동차의 할부금을 내려면 일주일에 5~6일은 죽도록 일을 해야 한다. 하여 자유롭게 이동 가능한 장비인 자동차를 갖추기는 했어도 그 자동차를 끌고 기껏해야 집과 직장, 가까운 공원을 오갈 뿐이다. 더군다나 그 와중에 외제차라도 들이받으면 인생 종친다. 곰곰이 따져보면 좀 더 자유를 얻기 위해서 자동차를 구입했다기보다는 자동차산업의 부흥을 위해서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반면 운전면허증도 없는 터벅터벅 둥글이는 전국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돌아다니고 있다. 사고 나서 보험료 할증될 일도 없고, 외제차 들이받고 신세 망칠 일도 없다. 누가 더 자유롭고, 누가 더 빠른가?


물질문명과 소유물들이 주는 혜택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 효과를 착각하면 안 된다. 세상의 그 어떤 편리도 그 뒤에는 기회비용이 잠재해 있고, 이를 살필 명징한 정신이 없으면 우리는 대중소비사회의 부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느리게 살도록 놔둬라

4대강사업으로 만들어진 제방을 따라 경남 합천을 향해 걷는 중, 한산한 농촌 풍경에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껄끄러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불법경작금지’ 푯말.


MB정부 시절 정치인들과 건설업자들의 최대의 향연 ‘4대강사업’. 현재 속속들이 그 불법과 사기, 야합과 부정이 드러나고 있는 4대강사업 현장이었던 것이다. ‘단군 이래 건설 재벌들의 최대 이권사업’을 추호도 방해받지 않기 위해, 호미 들고 깔짝대는 힘없는 서민들을 멀찌감치 쫓아냈던 것이고, 저렇게 공식협박장을 세워둔 것이다. 그 둑 너머로는 중장비로 흉측하게 파헤쳐진 강변 습지가 드러나 보였다.


제정신이 10퍼센트만 채워져 있으면 누구라도 문제가 되는 사업임을 알 수 있지만, 건설업자들과 정치인들의 모의만 있으면 이러한 사업은 기꺼이 반복된다. 그 과정은 지극히 단순하다.& 비싼 중장비 썩히지 않고 건설업체를 부도내고 싶지 않은 재벌들이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해서 대규모 토목사업을 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면 정치인들은 ‘국토개발’ 운운하면서 필요도 없는 간척 ․ 개간 ․ 도로공사 안을 입법한다. 거대 국책사업의 경우 국회의원들이 입법할 것이고, 자잘한 지자체 사업은 자치단체장들과의 교감 하에 자치단체 의원들에 의해서 이뤄진다.


사업 중간에서 빚어지는 다양한 부정과 비리, 기준 미달, 환경 파괴 등의 문제는 행안부 ․ 건설교통부 ․ 환경부 ․ 감사원 등에서 벽을 쳐준다. 그들 역시 그렇게 충실히 건설업자들의 뒤를 봐주면 뇌물 내지는 승진, 훈장의 기회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불법부당하게 추진되는 사업에 대해 양심 있는 시민과 단체들이 나서서 객관적인 자료 증거를 들이대며 고소 ․ 고발 조치를 취할라치면 사법부(검찰, 법원)는 면죄시켜준다. 법원에서는 4대강사업 관련해서 “불법적인 요소가 있으나 공사를 중단할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판결도 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판검사들 상당수도 재벌들의 로비를 받고 움직이는 장학생이었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입법 ․ 사법 ․ 행정 관료들이 부패해 있는 판에, 다른 선진국과 달리 건설 경기로 20퍼센트의 경제부양 효과를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난개발이 끊이지 않는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선진국은 건설경기로 인한 경제부양 효과가 5퍼센트 미만이라고 한다.)


그들이 서민을 갈취하는 법</P>새만금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으로, 갖은 종류의 물고기들과 갯벌 생물들이 숨쉬던 곳이다. 이곳은 어민들의 일터일 뿐만 아니라, 가난한 할머니들의 생존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렇게 자연과 서민이 자유롭게 공존하던 이곳에 정치와 국가, 건설업자가 개입한다. 국립공원에 서 있던 산 하나를 박살낸 돌들을 바다에 던져 넣어 방조제를 세우고 물길을 막아, 말라가는 갯벌 위에 농지와 공장을 조성한단다. 새만금 부지 위에 세워질 농지와 공장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권력 없고, 돈 없고, 빽 없는 이들은 꿈도 꿀 수 없다. ‘단군 이래 최대의 간척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기업들이 하나같이 대형 건설사들인 것처럼, 그 농지와 공장은 기업농, 재벌, 투기꾼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거대 국책사업에서 국가가 한 일이라고는 뭇 생명과 서민들이 공유하던 생명의 공간을 강탈해서 건설업자들과 투기꾼들의 사적 소유 공간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이렇게 정부가 강도 역할을 하고 있던 십수 년 동안, 정치인들은 허울뿐인 ‘천지개벽 새만금의 꿈’을 부풀려 각자 재선의 입지를 공고히 했고, 대박의 꿈에 취한 가련한 이들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 달콤한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연이 주던 현실적인 일자리와 소득보다는 ‘바닷속으로 막대한 세금이 수장되는 길’을 택한 이들은 아직까지도 ‘새만금’이라는 단어 하나에 화색이 돈다. 이렇게 없는 자들의 것을 빼앗아 있는 자들에게 퍼주는 망국 사업에 박수치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분별력을 잃고 새만금을 종교로 추앙한 결과이다.


핵폐기장을 지나며

독일은 핵발전 중단 정책을 실현하면서 이에 맞춰 에너지절약과 대안에너지 정책을 입안해서 추진하고 있으며, 재생에너지 비율을 높이기 위한 각종 실험들도 계속하고 있다. 후손들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핵의 위험으로부터 후손들을 지키고 기후변화에 대비하기 위한 각종 대안에너지 정책을 추진하는 독일의 정치인과 행정가들에게는 절로 존경심이 샘솟는다. 그런데 그들보다 위대한 이들이 독일 국민들이다. 에너지 절약 정책 등을 공약으로 내걸며 성장과 개발에 제동을 거는 정치인들을 뽑아주는 이들이 바로 그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 사회는 “제가 우리 지역을 잘 먹고 잘살게 해드리겠습니다”, “이 지역 발전은 저에게 맡기십시오!”, “대박 나는 개발 사업으로 여러분들을 부자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따위의 공약이 아니면 지역에서 시의원도 해먹을 수 없다. 잘 먹고 잘살 욕망에만 빠져 있는 국민들의 무지와, ‘핵마피아’라고 불리는 이권사업자들과 정치인들의 삼박자는 한국 핵에너지 정책의 트라이앵글이다. 이렇기에 한국에는 십 년간 10기의 원전을 추가 증축하려는 세계 최대의 핵발전소 확대 정책이 입안되어 있는 것이다.


제주 4․3과 강정

해군은 화순과 위미 때와는 달리 사전에 군 간부들을 시켜 마을회 임원과 생활이 어려운 해녀들에게 몇억 원씩의 보상금을 줄 것이라고 꼬드긴다. 그리고 당시 강정마을회장의 주도로, 강정마을 1,050명의 유권자 중 사전 모의한 87명만이 마을회관에 모여 투표도 아닌 박수로 ‘해군기지 유치 결정’을 내린다. 2007년 3월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후보지로 거론된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그 직후 마을에서 비상대책위가 꾸려져 당시 마을회장을 해임하고 새로운 마을 대표인 강동균 회장을 뽑아 다시 주민투표를 하였다. 참여자 900여 명 중 94퍼센트가 반대하여 ‘해군기지 유치 철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해군 측은 자신들의 공작으로 이뤄진 ‘87명의 박수 선거’가 법적으로 효력이 있다며 사업을 밀어붙였다. 물론 여기에는 삼성과 대림건설의 이권도 맞물려 있었다. 하여간 이로 인해 완전히 분열된 강정마을 주민들은 형제지간끼리도 멱살잡이를 하는 원수지간이 된 채로 7년간의 지난한 투쟁을 해오고 있다.


유네스코가 생물권보전지역으로도 선정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강정마을은 어떤 개발사업도 할 수 없는 절대보전지역이었다. 이곳에 공사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한나라당은 2009년 12월 제주도의회에서 절대보전지역 해제를 의결했다. 의결 정족수도 차지 않은 날치기였다. 이에 2011년 3월 제주도의회에서는 강정 주민들에게 깊이 사과하고, 해군기지 공사의 전제가 되었던 절대보전지역 해제 ‘동의취소’를 공식 의결했다. 하지만 해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업을 강행했다.


이런 식으로 강정마을에서는 여태껏 600명이 사법 처리되고 40여 명이 구속되었으며 수도 없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 이렇다 보니 2012년 유엔에서 파견된 인권조사관들마저도 “강정마을에서의 국가폭력 ․ 사법폭력이 심각”하다고 공표했다. ‘제2의 4․3’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얻고 있는 것

이런 과정의 연속에서 이제 차츰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이 유랑을 통해서 진정 얻는 것은 ‘한 차원 진화된 강건한 인간으로 태어남’이 아닌, ‘끊임없이 요동치는 삶 속에서의 내 자신의 존재 규정과 해체의 반복’임을. 내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창조와 파괴야말로 이 삶의 진수라는 것을. 이는 일상의 안정을 포기한 이가 치러야 할 실존적 대가이자 보답이라는 것을. 이는 자본 제일주의가 전체주의와 맞물려 지구를 파국으로 밀어붙이는 획일적 일상에 대한 궁극의 저항이라는 것을. 이것이야말로 “내 삶을 스스로 규정한다”는 말의 실질적 체현이고, 내가 유랑의 길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자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존재 가치는 가진 것의 양과 지위를 통해서 규정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각각의 개인들이 더 소유하고 더 높아지는 것에 혈안이 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며, 자연을 파괴한 대가로 자신의 주머니에 이익을 챙겨 넣는 것은 상식이 된다. 정치인과 공무원, 사회와 국가는 이러한 야만을 지극히 합법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 대중은 이에 부합한다.


이렇게 자연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인간의 오만은 스스로를 자연을 정복한 존재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이런 인간적 착각은 이미 치유할 수 없는 전염병이 되어 인류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인데, 자연은 이러한 인간적 독단에 대해 혹독한 교훈으로 되갚고 있다.


너는 네 갈 길을 가라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채우고 높이려는 욕망을 자연스레 주입받으면서,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면서 그 목적에 일생을 바치는 것을 자유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이 대중소비사회의 질서 속에서 다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열심히 경쟁할 자유’를 마음껏 향유하고 있다.


‘일상에 적응해서 경쟁할 자유’는 온갖 차별과 억압을 만들어내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의 결핍을 발생시키며, 환경을 파괴시키고 후손의 존립 자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이 ‘공멸의 전조’를 눈치 채지 못하는 이유는, 잘 짜인 질서 안에서는 그 질서가 내포하고 있는 야만과 억압을 살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서로 열심히 경쟁하면서 공멸을 향해 함께 부지런히 나아가는 것뿐이다. 우리가 익숙한 삶으로부터 떠나서 자신의 발로 대지에 서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 사회의 이 모든 야만과 폭력,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해서 한탄해본 적이 있는가?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지 알 수 없어 무참히 절망해본 적이 있는가? 혹은 수동적으로 끌려가며 사는 삶에 대해서, 타인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규정되어야만 하는 삶에 대해서 진저리를 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런 삶에 동조하여 그들과 함께 전체의 행렬을 늘이는 역할을 멈추고,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자.


너는 당당히 네 갈 길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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