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립다

   
유시민 외
ǻ
생각의길
   
15000
2014�� 05��



■ 책 소개 


스물두 가지 빛깔로 그려낸 희망의 미학, 


노무현 5주기 기념 출간 『그가 그립다』 





안될 것을 알지만 그른 것에 대항하는 용기, 인간에 대한 예의와 가치를 수호하는 정의로움, 그 무엇보다 사람을 위해 불의를 참지 않겠다는 소신을 관철시키려 했던 사람, 노무현. 그의 삶과 정신 속에서 찾아낸 희망의 불씨를 스물두 가지의 빛깔로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의 불씨를 간직한 채,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리라는 굳은 다짐 역시 활자 위에서 피어나고 있다. 그렇게 그는 우리 곁에 없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독자들이 책의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게 한정 수량의 북 테마앨범이 CD로 제작되었고, QR코드를 이용하여 인터넷에서 음원을 내려 받을 수도 있다. 이 테마앨범은 조관우가 부르는 동명의 노래 ‘그가 그립다’를 타이틀곡으로 한다. 





■ 저자 


유시민 


2013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내면서 정계를 은퇴했다. 대학 시절 감옥에서 쓴 ‘항소이유서’로 널리 이름을 알렸고 『거꾸로 읽는 세계사』로 작가로서도 유명해졌다. 참여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지금은 글을 쓰면서 강연과 토론 그리고 책으로 여러 사람과 교감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청춘의 독서』『기억하는 자의 광주』『후불제 민주주의』『국가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조국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에서 활동했고, 2007년부터 2010년까지 국가인권위원으로 활동했다. 법학자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사회적 연대를 추구하는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성찰하는 진보』『조국, 대한민국에 고한다』등이 있다. 





신경림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되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농무』『새재』『가난한 사랑노래』 등과 산문집으로는 『시인을 찾아서』 전2권, 『민요 기행』 등이 있다. 2014년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고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정여울 


문학평론가이자 작가이다. 한겨레신문에 ‘내 마음속의 도서관’을 연재하고 있으며 KBS1라디오 ‘책 읽는 밤’의 ‘마음의 서재’ 코너에 출연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마음의 서재』등이 있다. 




이이화 


역사학자이다. 2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역사 연구와 저술에 몰두해 왔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고 역사의 대중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사 이야기』 전 22권, 『인물로 읽는 한국사』 전 10권 등과 우리 역사와 관련된 많은 저술들이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걸어 다니는 한국현대사’로 불릴 정도로 현대사에 관한 저서를 활발히 쓰고 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민간위원 등을 역임했고 쓴 책으로는 『유신』『대한민국史』『한홍구의 현대사 다시 읽기』 등이 있다. 





서민 


단국대학교 교수이다. 의과대학 재학 시절 선택과목으로 기생충학을 선택했다가 기생충이 어릴 적 못생긴 외모로 고생했던 자기 모습처럼 느껴져 본격적으로 기생충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경향신문에 글을 연재했고 EBS 다큐프라임 ‘PARASITE 기생 寄生’, KBS ‘아침마당’ ‘컬투의 베란다 쇼’ 등 다양한 방송 활동도 했다. ‘기생충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자신의 최종 목표이다. 지은 책으로는 『서민의 기생충 열전』 등을 펴냈다. 





정철 


절반은 카피라이터, 절반은 작가이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30년 가까이 광고 카피를 써 오고 있으며 지금은 ‘정철카피’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내 머리 사용법』『불법사전』『머리를 9하라』『인생의 목적어』『나는 개새끼입니다』 등이 있다. 





노경실 


그 유명한 58년생으로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과 동화 부문 입상을 계기 삼아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의 어린이·청소년에게는 물론, 제자와 자식 걱정으로 가슴이 조여드는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에게 사랑받는 작가이다. 백 마디 구호 대신 한 줄 한 줄 글로 마음과 배가 고픈 사람들에게 치유의 작업을 쉼 없이 하고 있다. 





김갑수 


시인이자 문화평론가이다. 1984년 『실천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음악 칼럼리스트로도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지금은 방송인으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텔레만을 듣는 새벽에』『나의 레종 데트르-쿨한 남자 김갑수의 종횡무진 독서 오디세이』 등이 있다. 





유시춘 


국어 교사와 작가로 활동하다가 1985년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등 여러 민주화운동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을 역임했다. 소설집으로 『안개 너머 청진항』『우산 셋이 나란히』 등 여러 권이 있으며, 민주화운동사를 대표 집필한 『우리 강물이 되어』『6월항쟁을 기록하다』 등이 있다. 





김윤영 


드라마 작가이다. 방영된 드라마로는 MBC에서 방송한 청소년 드라마 ‘나’, SBS의 ‘카이스트’와 저녁 일일 드라마인 ‘미우나 고우나’, KBS의 ‘학교 2’와 아침 드라마 ‘두근두근달콤’ 등이 있다. 





김형민 


방송 PD를 업으로 삼고 있는 나이 마흔다섯의 시민이다. SBS ‘리얼코리아’ 및 ‘긴급출동 SOS24’ 등을 연출했으며 현재 한겨레신문 토요판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을 연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그들이 살았던 오늘』이 있다. 





류근 


시인이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등단 후 18년 만인 2010년 자신의 첫 시집 『상처적 체질』을 발표했다. 고 김광석에 의해 불린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그가 대학교 때 쓴 노랫말이다. 현재 2인 동인 ‘남서파 술꾼’으로 활동 중이다. 그 외 산문집으로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가 있다. 





정주영 


여의도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면서 대통령 노무현의 머리를 깎은 우연한 기회로 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청와대를 출입하고 해외 순방까지 함께하며 전속 헤어디자이너라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김상철 


한국기자협회, 경향신문에서 10년 남짓 기자 생활을 했다. 2005년 4월부터 임기 마지막까지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에서 행정관으로 근무했다. 2011년부터는 노무현재단에서 노무현사료연구센터 책임연구원으로서 노 대통령 생애, 정책, 철학 등에 관한 자료를 수집·정리·공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신충진 


요리사이다. 제주에 있는 신라호텔에서 총주방장으로 일하다 대통령 노무현과 인연이 닿아 청와대에서 요리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서양 요리 전문이지만 지금은 서울 어느 대학 앞에서 자그만 치킨집을 운영하고 있다. 





노항래 


꽤 긴 나날을 노동단체 실무자, 노동조합 상근간부 등을 역임하다가 노무현 열풍 속에 그의 대선캠프 노동국장을 맡아 일했다. 그 후 오랜 기간 정당 활동을 했고, 지금은 자서전을 쓰는 일을 돕는 전기작가로, 협동조합 은빛기획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김태수 


연출가이고 ‘극단 완자무늬’ 대표이자 서울연극협회 감사이기도 하다. 주요 연출작으로 ‘락 스트리트’ ‘팽’ ‘금관의 예수’ ‘콘트라베이스’ ‘늙은 창녀의 노래’ ‘의자는 잘못 없다’ 등이 있다. ‘극단 완자무늬’ 창단 30주년 기념 공연으로 ‘천안함 랩소디’를 무대에 올렸다. 





박병화 


독문학자이며 대학에서 독문학을 가르쳤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미로』『다시 카프카를 생각하며』 등이 있고 번역한 책으로는『소설의 이론』『수레바퀴 아래서』『공정사회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시윤희 


삼십 대 중반까지 간호사로 일했다. 복지와 빈곤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현재는 성공회대학교 사회복지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사회제도와 사회문제 간의 상관관계를 다양한 범위에서 깊이 들여다보고 싶어 여러 문화권을 찾아다니며 비교 관찰하는 중이다. 





조세열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참여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위원으로서 친일 재산 국가귀속 업무를 진행하기도 했다. 한국 근현대 과거사 청산과 통일시대의 역사문화운동이 주요 관심 분야이다. 





■ 차례 


머리말 


정여울 - 뚫고 싶다 | 오랜 자폐를 털고 


김윤영 - 깨고 싶다 | 어떤 개가 이길까 


정철 - 꺾고 싶다 | 날개에 대한 지나친 고찰 


조국 - 찾고 싶다 | 호모 엠파티쿠스 


노경실 - 웃고 싶다 | 다시는 울지 말자 


김형민 - 풀고 싶다 | 귀신은 살아 있다 


유시민 - 닮고 싶다 | 변호인이 된다는 것 


류근 - 날고 싶다 | 몽롱한 베스트셀러 잡문가의 나날 


정주영 - 보고 싶다 | 당신의 전속 이발사 


김상철 - 되고 싶다 | 진짜이고 싶은 


신충진 - 잡고 싶다 | 식사하세요 


김갑수 - 심고 싶다 | 나쁜 취향 


신경림 - 살고 싶다 | 눈길 


유시춘 - 닿고 싶다 | 가장 아름다운 문서 


서민 - 갚고 싶다 | 베드로는 멀리 있지 않다 


이이화 - 넘고 싶다 | 알다시피 


한홍구 - 묻고 싶다 | 그리움의 방법 


노항래 - 막고 싶다 | 사소하고도 기나긴 


김태수 - 서고 싶다 | 다 마찬가지다 


박병화 - 믿고 싶다 | 나도 좀 타고 가자 


시윤희 - 알고 싶다 | 지금의 내가 아닌데 


조세열 - 열고 싶다 | 다윗의 돌팔매 




그가 그립다


정여울 - 뚫고 싶다 | 오랜 자폐를 털고

날씨를 피할 수 없듯이, 민주주의의 가뭄을 피할 방법도 없다는 것을, 저는 당신이 떠나신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숨어 살면 될 줄 알았습니다. 추위를 피해 집 안에만 웅크리고 있는 게으른 아이처럼요. 저도 민주주의의 한파를, 민주주의의 가뭄을, 민주주의의 고사 상태를 피해 보려 했습니다. 소박하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제 작은 보금자리 안에 꽁꽁 숨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겁 많고 소심하며 정치의 정 소리만 들어도 몸서리를 치는 저 같은 사람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요.


1980년 광주나 1987년 6월 같은 뜨겁고도 무서운 시기에 그저 철모르는 꼬마였을 뿐인 저는, 민주주의란 물이나 공기처럼 아주 당연하게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 생각했지요. 민주주의가 생필품이나 의식주처럼, 때로는 그보다도 훨씬 더 우리에게 절박한 그 무엇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떠나신 후 몇 년간, 저는 하루하루 마음속에서 한없이 낯선 모습으로 탈바꿈해 가는 민주주의의 악전고투를 참담한 심경으로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면부지의 타인과도 마음을 나누는 따뜻한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제가, 어떻게 타인과의 소통을, 민주주의의 따뜻한 봄날을 포기할 수 있겠는지요.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프게 배워 나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한파 속에서는 내 생각을 남이 인정해주는 자유나 남의 생각을 내가 인정해 주는 혜량을 넘어선 그 무엇, 그러니까 내 머리로 내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유까지 빼앗길 위험이 잇다는 것을요.


저는 얼마 전에 생활 속의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아주 무서운 힘을 휘두르는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은 저에게 어떤 글감을 찾는가가 가장 소중한 자유임을 깨닫게 해 준 사람들이기도 하지요. 저는 한 도서관 소식지에 영화에 대한 칼럼을 연재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청소년들을 주요 독자로 삼는 잡지였습니다. 저는 고심 끝에 변호인을 택했지요. 변호인을 통해 저는 제가 살아 보지 않은 세상까지도, 제가 겪어 보지 못한 고통까지도, 생생하게 지금 이 순간의 저 자신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변호인을 관람한 후 지금까지 제게 용기가 없어서, 혹은 제 스스로의 준비가 부족해서 말할 수 없었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청소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글을 쓰려다 보니, 제가 하고 싶은 말과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실감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진짜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터졌습니다. 편집 작업까지 모두 끝나 이제 잡지가 곧 나오겠구나 짐작하고 있었는데, 원고 게재 불가 메일이 온 것입니다. 잡지 관계자들이 영화 변호인은 청소년을 위한 도서고나 잡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15년 동안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살아오면서 제 원고가 이런 식으로 반려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좀 더 밝은 내용의 작품, 청소년들에게 맞는 작품을 선정해 달라는 것이 관계자의 요청이었습니다. 자기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관계자라는 명목 뒤에 숨어서 타인의 글쓰기를 쥐락펴락하려는 사람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변호인이라는 영화 안에 담긴 그 무엇이 그 사람을 불편하게, 혹은 두렵게 했던 것일까요. 분명 15세 이상 관람가로 상영되는 이 영화가, 도대체 어디에 청소년에게 맞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일까요.


제가 쓴 원고가 반려당한 후, 저는 마음이 가는 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지요. 그리고 민주주의의 이 기나긴 가뭄을 더욱 부채질하는 사람들은 이름난 정치인이나 권력자들만이 아니라, 이렇게 소소한 일상 속에서 타인의 자유를 야금야금 탈취하는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지요.


저는 오랫동안 민주주의의 자폐증에 걸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작은 커뮤니티 안에 웅크린 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나 또한 필요 이상의 관심을 받지 않기를 빌며 조용히 엎드려 살아야지 했습니다. 남보다 더 잘 상처받고, 남보다 더 자주 겁에 질리는 저 같은 사람에게야말로 민주주의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저는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무서울 때마다, 사람들이 무서울 때마다, 더 깊이 저만의 누에고치 속으로 숨었던 저는 잊고 있었지요. 겁 많고 소심하고 힘없는 사람에게도 지켜야 할 민주주의, 지켜야 할 인간의 도리, 지켜야 할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이제 저는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 내기 위해 아주 작은 용기부터 내 볼 작정입니다. 제게는 부당한 일을 당하면 마치 그 일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어떻게든 잊으려고 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지요. 이제는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세상에 알리려고 합니다. 여전히 민주주의가 안타까운 숨소리로 연명하며 희망이라는 가녀린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지금, 저 또한 작은 힘을 보태어 그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도 아닌, 민주주의의 변호인이 되고자 합니다. 영화 속의 당신처럼, 아니 수십 년 전 당신이 냈던 그 용기를 떠올리며 말이지요. "제가 하께요, 변호인. 하겠습니더."



정주영 - 보고 싶다 | 당신의 전속 이발사

노무현 대통령님, 저 기억하시겠어요? 정주영입니다. 당신의 전속 이발사입니다. 어느덧 5년의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제가 모셨던 당신이 더 멀리 달아나기 전에 당신과 함께 했던 기억이라도 추스르려고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제가 대통령님과 가깝게 된 것은 민주당 후보 경선 시절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민주당 당사가 여의도에 있었던 탓에 이때는 자주 저를 찾아 주셨죠. 그때 당신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사장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의자에 앉으시면 이발하는 다른 직원이 있어도 "사장님이 해 주세요." 이렇게 말씀하셨죠. 머리를 어떻게 해 달라는 주문은 없었습니다. 그냥 제가 하자는 대로, 해 주는 대로 편안하게 이발을 맡기셨습니다. 후보 경선이다 보니 텔레비전에 모습이 많이 비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신 머리의 이발이 잘되었다는 애기를 주위에서 들으면 그 얘기를 제게 전해 주곤 하셨지요. 그때는 기분이 아주 좋았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당신은 대통령 후보가 되셨고 이때는 저도 이발사로서 당신에게 도움을 준 것 같아 무척 기뻤답니다. 그리고 진짜 대통령에 당선이 되어, 그 이튿날 오셔서 "사장님 덕분에 됐습니다."라고 하셨을 때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져 본 감정 중에 감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처음 느껴 본 순간이었습니다.


대통령님. 당신이 청와대에 들어갈 즈음 제게는 대통령 전속 이발사라는 별칭이 생겼습니다. 그때는 저도 속마음으로 혹시나 내게 머리를 해달라고 맡기지 않으실까?하고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었답니다. 솔직히 그러고 싶었고요. 그런데 실제로 제의가 왔고, 저는 이것저것 따져볼 것 없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이발사가 되는 순간이었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주위에서 제 손을 황금손이라고 하며 만져 보자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고 축하도 정말 많이 받았답니다.


저는 대통령님 재임 기간 5년 동안, 그러니까 임기의 시작과 끝을 같이 했습니다. 대통령님, 제가 관저에 처음 들어간 날을 기억하시는지요?

"정 선생, 어서 오세요." 손을 번쩍 드시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답니다. 어느덧 저에 대한 호칭이 사장님에서 선생으로 바뀌어 있었고요. 시간이 조금 지나고 저한테는 선생이라는 호칭이 낯설고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그냥 편하게 말씀 놓으셔도 됩니다."했더니 "그게 잘 안됩니다. 그냥 갑시다." 하셨어요. 동갑내기인 저에 대한 배려를 당신은 그렇게 하셨던 건데 지금 생각해도 당신의 따뜻한 성품과 성격이 이 호칭에 담겨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대통령님. 돌이켜 보면 당신은 격의 없는 참으로 편안한 분이셨습니다. 이발을 하러 오실 때는 일부러 크게 인기척을 낸다든가 콧노래를 부르면서 상대방의 긴장을 풀어 주곤 하셨어요. 그리고 유난히도 큰 목소리로 "오셨어요. 어서 오세요."라며 반기셨고 끝나고 돌아갈 때는 "수고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해 주셨지요. 그 목소리가 지금도 제 가슴에는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습니다.


대통령님. 이제 당신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인기척 소리며 웃음소리며 아직도 그때의 기억들은 생생한데, 지금도 손을 번쩍 들어 "정 선생, 어서 오세요."라고 하실 것만 같은데 당신은 지금 다른 세상에 가고 없습니다. 저를 최고로 만들어 주시고, 꿈을 이루어 주신 분이 당신인데 그런 당신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대통령님! 그때가 무척 그립습니다. 저는 지금도 가위와 빗을 들고 제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제가 모셨던 당신은 없다는 것이 이리 마음 아프게 합니다.



김상철 - 되고 싶다 | 진짜이고 싶은

노무현 대통령 생애, 정책, 철학 등에 관한 자료를 수집·정리·공개하는 사료편찬사업 가운데 하나가 구술 기록 수집이다. 노 대통령 생전에 공적으로, 사적으로 관계했던 인사들을 만나 노무현과 함께했던 인연과 기억을 구술로 받아 정리하는 일이다.


나처럼 구술을 받는 처지에서 소중한 건 나름 유명 인사 외에도 일반 시민을, 정확하게는 노무현과 인연을 간직하며 일반 시민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겹친다. 그들이 기억하는 노무현 이야기, 노무현을 기억하는 그들의 이야기. 그 두 가지 이야기는 만날 때마다 새삼스럽고 때로 가슴을 친다. 아래 이야기는 그들이 기억하는 노무현 이야기의 몇 장면을 추린 것이다.


1964년 가을, 고등학교 2학년인 한 학생에게 운동장에 나와 있는 두 명의 동기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쟈들은 점심시간에 밥 안 먹고 뭐하나. 한번은 운동장에 나와 있던 그 친구에게 직접 물었다.

"니는 와 나와 있는데?"

"뭐, 밥 다 먹고 그냥 심심해서 나와 있다."

점심시간이면 같이 운동장에 있던 또 한 친구에게 밥 다 먹고 심심해서 나와 있다던 그 친구의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도시락 안 싸 왔으니까 나가 있는 거지. 내도 배가 너무 고파서 맹물 마시고 있는데 무현이도 오더라. 같이 물 마시면서 무현이가 그러데. 야,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배고프고 어렵지만 꼭 성공해서 다음에는 한번 삐까뻔쩍하게 잘살아 보자.고."


삐까뻔쩍하게 잘살아 보자던 그 학생은 1966년 2월 졸업을 앞두고 농협 입사 시험을 봤다. 시험 준비를 하면서도 자신만만했다. 친구들에게 내 아니면 걸릴 사람 아무도 없다고 큰소리쳤다. 하숙비로 가져온 돈도 친구들끼리 막걸리를 사 먹으며 다 써 버렸다.

시험 당일. 과연, 시작했다 싶더니 오래지 않아 시험장을 나왔다. 기다리던 친구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나오나? 어려워서 포기한 거 아이가?"

"이거야 뭐, 학교에서 시험 치는 거보다 더 쉽다. 암만해도 전국에서 내가 톱(top) 하겠다 싶으다."

그러고는 보기 좋게 낙방했다는 결과를 받아들었다. 친구가 물었다.

"무현아, 니 우찌 된 건데? 그렇게 잘 쳤다면서 왜 떨어졌냐?"

"내도 모르겠다……."


9년 뒤인 1975년 3월 청년은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1977년 만 서른하나의 나이에 대전지법 판사가 됐다. 초임판사는 길지 않은 법원 생활을 정리하고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다. 변호사 업무 분야가 전문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 그는 등기와 조세 등으로 특화해서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다. 삐까뻔쩍하게 잘살아 보자던 다짐은 마침내 현실이 됐다. 아마도 그의 생애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하아, 요즘 같아선 하늘은 나는 새라도 불러서 밥 먹자고 하고 싶어."

날아가는 새한테도 밥 사주고 싶을 만큼 잘나간다는 얘기였다. 자기 집 전세보다 비싼 차를 몰고 다닌다며 깨알자랑도 했다.


그렇게 잘나가던 세속의 변호사는 1981년 9월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 민주화운동의 길로 뛰어들었다. 이후 그의 궤적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다. 소외 계층, 특히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의 연장으로 의정 활동을 시작했고 1990년 3당 합당을 겪으며 지역 구조와 분열의 극복, 국민 통합을 위한 지난한 정치의 길로 접어들었다.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참여정부 5년을 일궈 내고 고향 봉하로 돌아가 영원한 시민으로 남았다.


이제 내가 품고 있는 한 장면을 이야기해야겠다. 2011년 장마 초입에 부림사건 관계자 구술 인터뷰를 위해 부산에 내려갔다. 이십 대 피 끓는 나이에 서른다섯의 변호사 노무현을 처음 만났던 그들은 오십 대가 됐다. 이 얘기, 저 얘기, 그 얘기가 술과 함께 오가던 중 한 분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우리도 노변처럼 진짜가 되고 싶었잖아. 깜은 안 돼도 그래도 진짜가 되고 싶었잖아."


그랬다. 노무현은 진짜였다. 그 전에 스스로 진짜가 되려고 노력했다. 가난에서 세속의 성공까지, 앞서 소개한 노무현 이야기는 충분히 통속적이다. 굳이 노무현만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다. 그런 노무현은 부림사건으로 처음 접한 국가의 폭력에, 3당 합당에서 겪은 불의와 반칙에 솔직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지역 구조와 분열의 극복, 국민 통합의 길로 일관했다. 그리하여 가까이서 일한 사람들은 노무현과 멀리서 지켜본 사람들이 아는 노무현이 다르지 않은, 진짜가 되었다.


노무현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노무현을 투영해 자신도 뭔가 진짜이고자 했던 것 아니었을까. 노무현에 대한 기억이, 혹은 노무현이 아니라 그를 아는 내가, 그를 기억하는 우리가 진짜이고 싶은 마음 말이다.



신충진 - 잡고 싶다 | 식사하세요

노무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세상 사람들은 나를 대통령 전속요리사라 부르기도 하고, 청와대 총주방장이니 청와대 셰프라 부르기도 했다. 관저와 공관의 식사, 연회, 만찬, 귀빈, 식음료 행사 등 청와대의 음식을 관장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청와대 셰프라 불렀지만 대통령 내외분은 나를 신 부장이라 부르셨다. 사람을 대할 때는 격의 없이 편안하게 대했던 평소의 성품 때문에 신 부장이라 부르는 것이 편하셨던 모양이다.


당시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한 것은 "대통령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나요?"였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선생님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나요?" 되물어 보곤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통령은 일반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삼계탕이나 붕어찜 정도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랄까. 그저 평범한 우리 한국 사람들의 입맛이었다. 된장, 고추장 등 토속적인 것들을 좋아하셨다. 라면과 김밥 그리고 일명 모내기국수도 좋아하셨다.


모내기 국수는 잔치국수 비슷한 것인데 물국수에 부추를 얹은 것을 모내기국수라 한다. 농부들이 들에서 일을 할 때 즐겨 먹는 경상도 지방 음식이다. 가난했던 옛 추억이 있던 분이라서 모내기국수를 좋아하셨던 모양이다.


해외 순방을 나가면 현지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그 만찬이 끝나고 호텔 숙소로 돌아오면 대통령은 가끔 라면을 특별히 찾으셨다. 권 여사님은 현지 음식에 잘 적응하셨던 것 같은데 대통령님은 어지간한 한국인 체질이셨던 것이다. 한번은 해외 순방 중에 봉지 홍삼즙을 드렸는데 "이건 비싸 보이는데 얼마나 하나?"하고 물으셨다. "네, 아주 비싼 겁니다." 했더니 "그래, 그럼 남기지 말아야지." 하시고는 쫙쫙 짜서 드시는데 옆에 있는 사람, 나의 기분을 그렇게 좋게 만들어 주셨다.


청와대 관저의 식사 시간은 아침 7시, 점심은 12시, 저녁은 6시 반이다. 대통령은 이 시간만큼은 누구라도 철저히 지키게 했다. 이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 힘들지 않게 하려고 아들 내외 가족이라도 밖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주방 식구들이 서서 대기하거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서서 대기하면 허리에 무리가 가니까 절대 그러지 말라고 하셨다.

"신 부장, 나라도 이 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인터폰을 하게."

대통령께서도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는 한 이 시간만큼은 솔선수범 지키려고 엄청 노력하셨다.


음식이라는 것은 더운 건 더운 대로 찬 건 차가운 대로 음식이 차려진 그 시간에 먹어야 효과가 있고, 그 음식을 만든 사람도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니만큼 식사 시간을 지킨다는 것은 주방을 총괄하는 나로서는 매우 기쁜 일이었다.


어쩌다 집무 때문에 30분 정도 늦으신 일도 있었다. 나는 감히 인터폰을 해서 "식사하세요."라고 할 생각을 못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를 안 하실 때는 미리 연락을 주셨기 때문에 늦는 것뿐이지 틀림없이 오실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께서 허겁지겁 식당으로 들어오셨다.

"신 부장, 인터폰을 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날은 많이 미안해하면서 식사를 하셨다.


사람의 입맛은 매양 똑같은 장소, 매양 똑같은 재료, 매양 똑같은 사람의 손맛에서 나오는 음식을 아무리 길어도 1년 정도 먹다 보면 질리게 되어 있다. 아무리 길어야 1년 6개월을 넘지 못한다. 실제로 전직 대통령들의 셰프들은 지금까지 그런 이유에서 1년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교체되는 것이 일반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나도 그때가 오면 청와대를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것 때문에 불안하거나 불편해하지는 않았다. 요리사로서 최고가 되어 대통령을 모셨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청와대 셰프를 바꾼다는 얘기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길 3년 반 정도 되었을 즈음이었다. 대통령께서 나를 조용히 불렀다.

"신 부장, 말들이 많지? 그냥 늘 있는 일이라고 여겨. 여기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트레스 받으니까. 알겠지. 딴 생각 하지마."


어깨를 툭 쳐 주셨다. 모르긴 해도 주방장 교체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께서 그 말씀을 하셨던 게 아닐까 하고 여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주방장 교체와 관련된 그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고 대통령께서 퇴임하는 날까지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 셰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나는 청와대에서 시작과 끝을 같이한 몇 되지 않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



서민 - 갚고 싶다 | 베드로는 멀리 있지 않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인 송우석이 했던 대사 중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저 대사가 유난히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저 대사가 살아생전 노무현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노무현은 살아생전 비슷한 절규를 내뱉곤 했었다.


첫 번째 기억은 1989년 마지막 날 있었던 전두환 청문회 때였다. 자신은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에 전혀 책임이 없다는 얘기만 하는 전두환에게 노무현은 단상으로 나와 이렇게 외친다.

"발포 쟁점부터 밝혀! 살인마 전두환! 국민의 비난을 누가 책임질 겁니까?"

신경 쓰지 않는 듯 퇴장하는 전두환에게 노무현은 명패를 집어 던진다.


세 번째 기억은 인천에서 있었던, 2002년 대선주자를 뽑는 민주당 경선이었다. 기존 정치판에 저항하는, 그러면서도 대선 유력주자로 올라선 노무현을 보수 언론은 증오했다. 이인제와 이회창이 대선에서 맞붙는 구도를 꿈꿨던 보수 언론은 걸핏하면 색깔론을 입히려고 들었고, 경박하고 불안한 후보라는 쪽으로 몰아붙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그날 경선에서 노무현은 단상에 올라 이렇게 일갈했다.

"조선, 동아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라!"


그때만 하더라도 언론이 정치판에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커서, 정치인들은 어떻게 하면 언론에 기사라도 한 줄 나 볼까 굽실거리던 시절이었기에, 언론에 맞서는 정치인이 있다는 건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노무현은 위와 같은 일화에서 보듯 권력이 아무리 세도 할 말은 하는 정치인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는 정말 극 중 그 상황에서 노무현이 했음 직한 대사가 아닐까? 모두가 불의에 침묵할 때마다 빛이 나던 그의 절규를 이제는 더 들을 수 없다는 게 아쉽다.


3당 합당 후 노무현은 자신의 정치적 스승인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무자비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후 출마하는 거의 모든 선거에서 패배한 것. 199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허삼수에게 패했고, 4년 뒤에는 종로에서 이명박에게 진다. 가장 가슴이 쓰라렸던 선거는 2000년 국회의원 선거. 여론조사에서는 노무현이 줄곧 앞섰기에 모두 이번만큼은 그가 도전에 성공할 것으로 믿었지만, 결과는 1만3천 표 차이의 패배였다.


일개 지역구민들의 선택이긴 했지만, 그 결과에 난 좌절했다. 저렇게 괜찮은 정치인이 저열한 지역감정에 의해 국회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면,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기야 외환 위기라는 큰 재양을 일으킨 한나라당에 천만 표를 몰아 준 유권자들에게 대체 뭘 기대한단 말인가? 하지만 절망의 끝에서 오히려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노무현의 거듭된 좌절에 분노한 이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던 것. 그들은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를 결성한다. 대전의 한 PC방에서 시작된 노사모가 정치판에 소용돌이를 일으킬 줄은 그들 자신도 몰랐으리라.


문제는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민주당원들이 이인제 대신 노무현을 선택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돌파구는 국민 경선이었다. 당원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야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택할 수 있게 한 이 제도는 노무현 돌풍을 불러일으킨 원동력이었다. 노무현은 광주 경선에서 1위를 하면서 그를 지지한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을 불어넣는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노무현의 5년은 실패로 돌아갔다. 적대적인 언론 때문일 수도 있고, 매사에 딴죽을 걸었던 한나라당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통령을 힘들게 했던 건 우리의 지나친 기대였던 것 같다.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은 절반가량의 유권자들은 증오심에서 대통령을 욕했고, 노무현을 지지한 나머지 절반은 지나친 기대감에서 대통령을 욕했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이 최고의 유행어가 된 걸 보면, 노무현은 아마도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욕을 많이 들어먹은 대통령일 것이다. 민주당이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고 한나라당에 정권을 넘겨준 것은 노무현이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방증이었다.


그 뒤에 집권한 이명박을 보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노무현이 참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을. 기대가 있어야 실망도 있다는 명제를 거짓으로 만들면서, 이명박은 자신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던 사람들마저 절망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거기에 더해 이명박은 시골로 낙향해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던 노무현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2009년 5월 23일, 토요일이었던 그날, 노무현은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더한 짓을 한 정치인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살고 있는 걸 보면, 다른 정치인들이 다 가지고 있는 후안무치의 유전자가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노무현이 봉하마을로 내려간 뒤 두 달 동안, 봉하마을을 찾은 방문객이 무려 23만이었단다. 물론 이들이 다 노무현의 지지자는 아니었다. 노무현 역시 이 점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한다.

"대통령 할 때는 욕만 하더니 일 안하고 노니까 좋대요."

이런 뒤늦은 노무현 사랑은 두고두고 한스럽다. 노무현이 세상을 등진 뒤에도 봉하마을은 여전히 관광객으로 북적이지만, 그게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국민들이 이명박의 뒤를 이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걸 보면 말이다.


어느 토론회에서 당시 유시민 의원이 한 말이 기억난다.

"노무현 대통령은 시대정신이 낳은 미숙아다."

즉 노무현은 우리 시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 그 가치를 체현하고 있는 정치인인데, 그런 시대가 오기 전에 먼저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실수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그 나라 국민들의 수준을 반영하기 마련이지만, 노무현은 지금의 우리 국민이 갖기에는 지나치게 수준이 높은 대통령이었고, 그로 인해 시대와의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왜 항상 50퍼센트를 넘는지 아는가? 우리 국민의 수준에 딱 들어맞는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국민 수준이 갑자기 확 올라갈 리도 없으니, 당분간 우리는 이전 아니면 현재 대통령과 비슷한 대통령을 모시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언제쯤 돼야 우리 국민의 수준이 노무현과 비슷해질까? 30년? 40년? 어쩌면 그보다 더 먼 훗날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시기를 앞당기는 방법은 없을까? 젊은 세대들이 열심히 책을 읽는다면, 그래서 다른 이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능력을 기른다면, 그 시기는 좀 더 빨리 올 수 있다. 하지만 책보다는 자기계발서에 몰두하고, 잠깐의 짬을 스마트폰을 보는 데 투자하는 젊은 세대를 보면서 그 시기가 빨리 오기는커녕 더 늦춰지지나 않을지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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