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코드

   
브루스 커밍스 (역자 : 남성욱)
ǻ
따뜻한손
   
14500
2005�� 03��



 

■ 책 소개
한국 근현대사의 세계적 석학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내놓은 본격 북한 탐구서. 작년 미국에서 출간된 『북한 : 또 다른 나라(North Korea: Another
Country)』를 번역한 이 책에서 저자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한국전쟁의 역사적 교훈에서부터 북핵 위기와 김일성 신화,
김정일의 현실정치, 북한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역사와 사회를 폭넓고 예리하게 분석한다.

북한은 지난 10여 년 동안 핵 문제로 인해 미국과 갈등 관계를 지속하면서 미국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다수의 미국인들은 북한을 핵과 생화학 무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고, 심지어 미 서부 연안으로 운반할 강력한
미사일 운반수단을 가진 위험한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


저자는 현재 초미의 관심사인 북핵 문제를 부시가 만든 폭탄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북미 갈등의 원인이 한국전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미군은 당시 1백만 갤런이 넘는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의
범죄를 저질렀는데 이것이 오랜 북미 간 갈등의 원인이 된 것이다. 결국, 핵을 둘러싼 작금의 양자간 갈등은 반세기가 넘은 적대감에서 비롯되었고,
궁지에 몰린 쥐가 덤벼드는 cat-and-mouse diplomacy의 한 국면에 불과하다고 한다. 저자는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우선
북한에 대한 선입견을 버릴 것과, 북미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 재정립을 위한 로드맵이 필요하다는 주문을 하고 있다.


한편, 현 북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김정일 코드와 김일성, 북한의 일상생활 등을
냉철하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북핵 문제를 비롯한 북미 갈등에 대한 해결책을 평화에 대한 메시지로 전하고
있다.


■ 저자 브루스 커밍스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석학. 1943년에 태어나 1960년대 후반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온 것을 계기로 한국 역사와 한반도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오랜 동안 시카고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노스웨스턴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우리말로도
옮겨져 큰 반향을 일으킨『한국전쟁의 기원』『한국 현대사』등이 있다.

■ 역자 남성욱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 1959년에 태어나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미주리대학에서 북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0여 차례 북한을
방문했으며, 경제와 남북 간의 협력을 주제로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다. 저서로『현대 북한의 식량난과 협동농장 개혁』등이 있으며, 『김일성의
북한 : CIA 북한보고서』를 번역했다.


■ 차례
프롤로그
1. 김일성의 전설

2. 전쟁 : 새로운 과거
3. 세계 최초의 포스트모던 독재자
4. 핵 : 오래된 미래
5. 사람 사는 세상

6. 선과 악을 넘어 

 




김정일 코드


김일성의 전설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던 1981년, 우리가 방문했던 혁명박물관에서는 1912년 4월 15일부터 현대사가 시작된다. 그날은 북한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탄생한 국가적 경축일이다. 박물관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와 예술품은 김일성이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한 1919년 이래, 주요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모든 일의 선두에는 그가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허풍기와 자부심으로 가득한 북한의 신화, 동화, 불가사의한 이야기 또는 기적의 핵심에는 진실의 씨앗이 들어있다. 정치선전에는 으레 침소봉대식의 과장이 스며있지만, 이러한 내용 자체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위험한 시도다. 충(忠)과 효(孝)는 수천 년 내려온 한국 도덕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존귀한 권력과 엄정한 도의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은 5백 년 이상 유지된 왕조들의 전지전능함과 더불어 한국인들에게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는 주관적 바탕이다.


1912년 태어난 김일성은 질린에서 고교재학시절 지하조직인 마르크스주의 단체에 합류했다. 1929년 지하활동으로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감옥살이도 했다. 석방 후 게릴라 조직에 들어가 1940년 10월까지 투쟁했다. 김일성은 1932년 처음 게릴라 조직을 만들었으나 1933년 동닝 전투 전까지는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다. 중국 지도자들은 동닝에 대규모 공격을 가했는데, 이때 김일성이 이끄는 2개의 게릴라 부대의 도움을 받았다. 게릴라 부대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김일성은 고전적 로빈 후드와 같은 인물이 되었다.


한인들을 겨냥한 중국의 차별주의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만주에서 투쟁을 벌이는 동안 한국과 중국의 게릴라 사이에 협력관계를 재구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유창한 중국어 실력과 중국 게릴라 두목들과의 오랜 친분도 한몫을 했다. 한국전쟁 동안 게릴라들의 습격을 받았던 미군은 일본의 게릴라 소탕작전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 중에 관동군에서 대좌로 근무한 두 사람이 만주에서 김일성을 추격한 적이 있어, 자신들의 경험과 한국 게릴라에 대한 민족 차별적 판단을 미군들에게 브리핑했다. 이렇듯 적에게 뿐만 아니라 중국과 소련의 ‘동지들’에 의해 번갈아 체포되기도 했던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 독립과 자주가 훗날 김일성의 정책적 기조가 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KPA) 창군식에 일반적으로 김일성과 나란히 걸리던 스탈린의 초상화를 내리고 김일성의 근영만 게시한 것은, 인민군이 게릴라 부대의 전통으로부터 탄생했다는 점을 웅변하는 상징이었다. 김일성은 연설을 통해 독자적 군대를 보유한 자주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인민군 창설 1주년 기념식에서 김일성은 처음으로 ‘수령’이라고 불렸다. 북한 땅과 만주에 걸쳐 영토를 보유했던 고구려의 용어로, 최고이자 최상의 지도자를 의미하는 호칭이었다. 그때까지 그것은 스탈린에게만 부여된 영예였다. 그 이후 ‘수령’은 죽을 때까지 김일성의 칭호가 되었다.



전쟁 : 새로운 과거


네 적을 알라
한국전쟁 발발 당시 맥아더는 ‘한 손을 등 뒤에 묶어놓고도 승리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전쟁 발발 한 달 후 맥아더는 북한 병사들의 전투력에 놀랐다. 전 세계 언론들도 8월 들어서도 인민군이 여전히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소련의 가장 약한 위성국가가 우리를 이렇게 지독하게 괴롭힌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미국은 인민군이 중국군보다 ‘광신적인’ 전사들이었던 반면, 국군은 그다지 출중한 전사는 아니라고 인식했다. 항간에는 북한군이 마약을 복용했으리라는 추측도 있었다. 아시아인에 대해 사실은 백지상태이면서 자신들의 선입견이 옳다고 멋대로 확신한 미국인들이야말로, 야만인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미국의 경솔한 태도가 전쟁의 결과를 결정했다. 미군 병사들은 싸울 준비가 돼있지 않은 상태에서 보기 드물게 용맹스럽고 집요한 전쟁기술에 익숙한 적과 교전했다.


불타오르는 기억들
북한에 대한 미국 언론의 일관된 입장은, 워싱턴은 원래 결백한데 평양이 끈질기게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해 사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40년대부터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국의 행적을 살펴보면, 끊임없이 무기를 사용해왔으며 아직도 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은 미국 쪽이다. ‘잊혀진 전쟁’이란 알려지지 않은 전쟁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역사가로서 잊을 수 없는 사실은 바로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사용된 소이탄 - 주로 네이팜탄 - 을 비롯하여 핵무기와 화학무기의 사용 위협, 그리고 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종국에는 북한의 대규모 댐들을 폭파한, 엄청나게 파괴적인 미국의 대 북한 공습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역사가들에게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지난 10년간 북한의 핵문제에 대한 언론의 분석에서도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1950~51년 혹독한 겨울, 김일성과 그 측근들은 20년 전 그들이 처음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곳으로 돌아가 만주 국경 부근에 깊은 벙커를 팠다. 인천상륙 이후 3개월이 지나도록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자 미국은 B-29기들을 동원해 그 지역에 타존폭탄을 투하했다. 이전에는 전혀 탑재된 적이 없었던 1만2천 파운드 급(6천 킬로그램)급의 엄청난 신형 폭탄이었다. 이런 미국의 계속되는 무자비한 폭격으로 1952년 한반도 북부와 중부는 거의 다 파괴되었다. 북한 주민들은 주택, 학교, 병원 등 모든 생활을 지하에서 해야만 했다. 미국인들의 야만적인 공습은 마지막 단계에서 북한 식량의 75%를 생산하는 지역에 물을 대는 대형 댐들을 파괴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공격행위들이 세인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다.


잔혹한 점령
한국은 1950년 가을 무렵, UN의 이름 아래 북한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 영역에 진입하자 국무부 관리들은 점령의 정치적 측면을 관리하기 위한 제도적 방법을 고안했다. ‘피의 숙청’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국 군인들을 통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미국 내부 문서는 한국군의 잔혹 행위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미군 고문단은 국군이 학살을 계속한다면 북한 전역이 남한 당국의 출입통제구역으로 설정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미국은 북한 지역에서 정치적 숙청에도 관여했다. 미국은 남한당국이 조사나 재판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아이와 여자를 포함한 적들을 죽이고 있는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그런 행위를 승인하는 허가서까지 발행했다. 물론 북한 사람들도 전쟁 중에 대량학살을 저질렀지만 공산주의자임을 감안할 때, 그다지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바로 남한의 행위가 북한보다 더 심했고, 미국은 동맹국이 저지른 범죄를 50년 넘게 숨겨왔다는 사실이다.


과거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1950년 6월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고 미국은 이 평화를 파괴하는 난폭한 행위에 대항했다. 그러므로 1950년 이후 그 침략행위는 한국에서 미국이 어떤 무기를 사용하든, 또 미국이 북한을 얼마나 위협하든 미국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했다.  열전(熱戰)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1953년 종전 이후의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전략은, 북한이 미국을 좋아하거나 존중하는 사람들에 의해 통치돼 왔느냐, 또는 미국 지도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들에 의해 통치돼 왔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안 자체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미국이 미국의 이념에 따라 살아왔느냐는 것이다.


북한은 늘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이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제기해왔다. 전장에서의 도덕성은 언제나 적의 지도부와 그들이 이끄는 선량한 국민들과의 분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1950년대든, 아니면 2천3백만 인민이 북한이이라는 병영국가에 살고 있는 오늘이든 그것은 변함이 없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끊임없는 실패를 계속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포스트모던 독재자
김정일은 자신의 여러 거처에 완벽한 포스트모던적인 설비를 구비해 놓았다. 소니 텔레비전이 모든 방마다 놓여 있고, 위성방송으로 CNN과 MTV뿐 아니라 남한과 일본의 방송물까지 끌어다 본다. 그는 수천 개나 되는 전 세계의 비디오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것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김정일은 플레이보이도, 바람둥이도, 술 주정꾼도 아니고,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광신적 ‘악마 박사’도 아니다. 그는 그다지 사교적이지 않으며, 과음하는 편도 아니고, 집에서 파자마를 입은 채 비서들이 가져온 수많은 분야의 서류에 지시사항을 적어 넣는 가정적인 사람이다.


김정일은 북한 방문자들을 매혹시키는 호화판 공식행사를 주재하는 것보다 그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을 훨씬 선호한다. 김정일이 총애하는 아들 정남의 가정교사이자 놀이상대로 입양된 수양딸 이남옥에 따르면, 그는 엄청난 규모의 쇼를 지휘했으나 그것들을 보는 것은 눈물이 날 정도로 지겨워했다. 김정일은 모든 이들에게 모든 것에 대해서 충고한다.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믿으며, 대부분 자신이 그 답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친애하는 지도자의 문제는, 그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만 전달하는 아부꾼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김정일은 무엇보다도 정직성을 높이 사며, 자신에게 직언을 해 줄 사람들을 찾아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대체로 김일성의 보호를 받은 게릴라들의 자식들과 고아들은 김정일과 그의 친척들로 구성된 내부 핵심층과 함께 최고 엘리트로 자라났다. 1997년 현재에도 북한 최고위급 지도자 40명 중 오직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60세 이상이었다. 유일한 예외는 김정일이었으나, 그도 이제 환갑을 넘겼다.


그리니치 규모의 강제노동수용소
김정일은 정말로 강제노동수용소(gulag)를 가지고 있다. 이남옥에 따르면, 그가 즐겨하는 위협 중에 하나가 배반자들을 그곳으로 보내거나, 북한에 널려있는 원시적 상태의 광산에서 노동을 시킨다는 것이다. 강철완이라는 사람은 요덕 노동수용소에서 10년간 갇혀 있었는데, 대부분 다른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족들도 함께 수감되었다. 이것은 흔한 관습인데, 사회의 핵심 단위인 가족에 대한 북한이 가지고 있는 신념의 한 단면이다. 가족 구성원들의 상호협조가 많은 이들을 감옥의 시련에서 살아남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사회로 다시 돌아왔을 때, 강씨 가족은 처음에는 배척을 당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내 이들은 다시 공동체 속으로 받아들여졌다. 강씨가 저술한 『평양의 수족관』에서는 육친들과 10년간 감금당했어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포로수용소에서 10년간 수용된 전과가 평양 거주나 대학입학 그리고 엘리트 지위로 진입하는 데 반드시 장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했다.
 

핵 : 오래된 미래
최근의 북핵 위기를 둘러싼 이슈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부시의 시각으로 보면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돈을 주면서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것은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다. 돈을 주고 북한을 NPT조약에 복귀시키는 것은 ‘말 한 마리를 사면서 두 번 값을 치르는 것’과 같다. 북한은 허풍과 함께 위험한 고비까지 몰고 가는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고 있어 ‘레드라인(현재의 포용정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봉쇄정책으로 전환하는 기준선)의 경계에 서 있다’고 부시의 정부 관리는 말한다. 북한의 이라크 전쟁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북한이 기회를 놓치면, 이라크 전쟁이 재상영될 것’이라는 경고다.


미국의 핵 위협
소수의 미국인들은 상대방으로부터 파생되는 갈등 정도의 으레 있는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다수 미국인들은 아직도 주한미군이 4만 명을 헤아린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상황에서, 북한의 지도부는 매일 비무장지대에서의 첨예한 대치 상태와 마주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미국은 새로운 한국전쟁이 터질 경우 개전 초기에 전술적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방침 아래, 북한군이 비무장지대를 통해 대규모 침공을 한 시점에서 1시간 이내에 핵을 사용한다는 통상적인 시나리오를 마련했다.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부가 핵무장을 추진함으로써 더욱더 핵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박정희는 미국의 어마어마한 압력을 받고 핵무장 활동을 중지했지만, 핵 보유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잠재적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많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미군의 핵무기 철수에 화답해 1992년 이후 6차례 정기적인 핵사찰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의 강경론자들은 북한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욱 강압적인 사찰을 위해 압력을 넣었다.


1993년 3월에는 북핵 위기가 시작된 지 1년이 돼가면서 미국은 UN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북한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 결정은 북한 관리들이 서울에서 열린 회담장을 나오면서 “미국과 한국이 전쟁 위협을 계속한다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직후에 나왔다. 이 말은 실제 문맥을 많이 벗어난 것으로, 미국이 북한을 침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언급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불바다 발언은 언론 코멘트에 자주 등장하는 또 하나의 수사 문구가 되었다.


북한은 좋은 나라는 아니지만 이해 가능한 나라다. 물론 병영 국가에, 전체주의적 정치 외부세계에 대한 극심한 배타성 등 기형적 형태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자국의 주권 침해에 대한 예민한 반응도 가끔씩 지나칠 때가 있다. 북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동안 지속된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배, 그리고 그 다음 반세기 이상을 패권주의적 미국과 남한과 끊임없이 대치하면서 성장한 반식민주의 국가? 반제국주의 국가다.


햇볕정책
1998년 오랜 반체제인사로 지냈던 김대중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햇볕정책’을 선보이며 “북한과 화해 및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북한은 김대중의 결단을 테스트하기 위해 1년을 기다렸다. 강경파들은 그에게 미끼를 던지고, 잠수함과 간첩들을 침투시켜 남북관계를 훼손할 수도 있는 모험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다 1999년 중반에 접어들자 햇볕정책을 남한 입장의 중대변화로 여기는 것이 분명해졌다. 김대중은 미국이 북한과의 대치 대신 포용을 선택한다면, 북한은 미군의 지속적 주둔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은 김대중에게 주한미군의 계속적인 주둔을 꼭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직접 밝힘으로써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김대중의 정책은 현존하는 동북아시아 안보구조의 ‘테두리 안에서’ 남북의 화해를 모색한 최초의 진지한 시도였다.


더 큰 악마
1998년 초 집권한 김대중의 리더십에 의해 힘차게 추진돼온 남북한 화해과정의 진전을 고려할 때, 현재의 모든 상황은 정말 비극적이다. 10년 전에도 그랬듯이 무기력한 미국의 언론은 한반도의 위기에 대해 신중한 자체조사를 통한 심층보도 대신, 미국 정부가 그려준 캐리커처에 보조를 맞추었다. 오늘날의 북한은 또다시 스스로의 생존이 경각에 달렸다고 믿고 있다. 북한의 판단이 그른지 모르지만, 현재의 변덕스러운 국제관계에서 그 정도로 중차대한 문제를 놓고 북한이 위험을 무릅쓸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전쟁직전 상태인 현재의 긴박한 재난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2001년 이전의 상태로 조속히 귀환하는 것이다. 북한은 국가 주권을 생명 그 자체와 같이 소중하게 여긴다고 말하고는 한다. 이것은 야만적인 일본의 식민지로 수십 년을 수탈당한 뒤 북한을 건립한 이래 국가적 주제가 되어 왔다. 1950년 미국이 엄청난 인적 희생을 무릅쓰고 북한을 ‘해방’시키기 위해 거대한 작전을 시도했다가 중국 때문에 실패하게 된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반면에 부시는 국제관계와 세계평화의 핵심원칙을 함부로 다루고 있다. 타국의 주권에 대한 존중 대신 그는 암살ㆍ제거ㆍ정권 교체를 앞세웠다. 그리고 50년 뒤 그 국가는 여전히 미국과 더불어 존재하고 있다. 북한이 결국 핵무기를 가지게 된다면, 그 무기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시가 만들어준 무기(Bushs bomb)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


중추적인 70년대
오늘날의 북한은 기본적으로 1940년대의 모습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최초의 평양주재 스웨덴 외교사절인 에릭 코넬 대사는 1975년 북한에 도착했다. 코넬은 북한이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거둔 성취에 찬사를 보냈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많은 주택단지를 건축했고, 모든 사람에게 무상교육과 무료진료를 실시했으며, 1970년대 남한보다 생활수준이 높고 고른 것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남한에서 보이던 광범위한 가난과 무주택자도 눈에 띄지 않았다.


절규하는 80년대
코넬이 북한에 다시 돌아온 80년대 말에는 그도 다른 방문객들처럼 좀더 여유로운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인민들의 옷의 질은 나아졌고 색깔이 다채로웠으며, 외국인들이 주변에 있어도 편안하게 느꼈다. 새로운 가게들도 많이 들어섰는데 수입품이 진열된 틈으로 사람들이 붐볐다. 거리는 깨끗하고 걸인이 없으며 공중도덕이 돋보였다. 어린이들은 외국인을 만나면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사람들은 겸손하면서도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남한에는 90년대까지 길에서 외국인에게 손을 내미는 걸인들이 있어 당황스러웠던 점과는 대조적이었다.


북한에 대해 생소하고 무지한 면이 사실처럼, 또는 비유를 통해 하도 깊이 각인돼 있어,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이 여느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정상적인’ 또는 ‘보통’ 사람이라는 말만 들어도 놀라고, 심지어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황석영과 같은 저명한 소설가들은 북한이 오염되지 않은 소박하고 목가적인 곳이며, 잃어버린 한국의 과거를 되찾을 수 있는 순수한 곳으로 묘사한다.


나는 북한의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김일성과 그의 아들이 원하는 그대로의 모습일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의심이 든다. 북한의 정치는 대공황과 2차대전이 개시된 시기에 형성된 1930년대식 정치다. 그러므로 위기에 처해서는 제대로 대응하지만, 이웃들과 경쟁하는 일상의 단조로움이 오히려 힘든 것이 북한 인민들이다. 바야흐로 그들의 일상적 운명은 지난 세대에 동아시아를 변화시켰던 상업적 ‘일상’에서 막강한 번영을 구가해온 과거의 친구들과 무자비한 적들에게 포위돼 있다. 북한은 그야말로 이상하고, 쉽게 흥분하고, 시대착오적이며, 소심하지만 신랄한 국가다.


선과 악을 넘어
김일성 서거 이후 북한은 혹독한 위기가 잇달았다. 에너지 공급체계가 거의 붕괴돼 수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았고, 1995년과 96년의 유례없는 물난리, 이듬해 여름의 극심한 한발, 그리고 20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는 기아현상이 계속되었다. 1995년 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나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유교식 왕조 순환의 최후를 연상시키는 천재지변의 전형적 사례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북한 경제는 1990년대에 급격히 하락했다. 총국민소득이 1994년도 213억 달러에서 1998년도에는 126억 달러로 떨어졌다. 이후 2002년 7월 북한은 일단의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국제환율에 맞추기 위해 원화의 가치를 갑자기 대폭 하락시키고, 임금을 20배 이상으로 상승시켰다. ‘개인적 텃밭’의 규모를 크게 늘리고, 국가 할당량을 초과한 수확물은 농민들이 보관하거나 팔 수 있도록 허용했다.


선과 악을 넘어
북한 인민들은 하루하루를 폭력 속에서 살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끔찍한 가족독재로부터의 폭력, 밖으로는 한국전쟁을 끝내고 북조선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지 못한 미국의 50년 누적된 외교적 실패로부터 비롯되는 폭력이다. 아무래도 그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눈보라치는 허허벌판에서 총칼에 맞서면서도 격렬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무슨 짓이라도 하려고 덤빈, 그리하여 악마의 얼굴을 그대로 닮은, 도조와 동일한 파시스트들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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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북한의 한 대변인은 이렇게 언명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미국과 어떠한 관계를 맺지 않고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살아왔고, 미래에도 역시 그렇게 생존할 수 있다. 우리는 구조적으로 그러한 삶에 적응이 되었다. 이러한 학습이 실제 미국의 언론에 차츰 스며든 결과일까. 평양을 아홉 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 CNN인터내셔널 사장 이슨 조던은 1999년 하버드 대학의 청중들에게 이런 요지의 강연을 했다. “북한의 기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분별 있는 사람은 ‘그런 나라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지금 해오고 있는 방식대로 앞으로 수세기 동안 그것을 헤쳐 나갈 것이다. 미국이든 누구든, 그 정부의 붕괴를 강요할 수 있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