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세계사

   
그레이엄 도널드(역:이영진)
ǻ
현대지성
   
15000
2020�� 01��



■ 책 소개


허위와 날조의 기록부터 추악한 살인사건의 진상까지 
역사 속 28가지 미스터리의 진실을 밝힌다 

이 책은 단순하게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을 나열하지 않는다. 대신 섬세하게 미스터리한 사건들의 진상을 파헤쳐간다. ‘미스터리’라는 말을 들을 때 당신은 무엇을 떠올리는가?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거나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 혹은 스릴러와 추리가 뒤섞여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픽션? 대부분은 그런 것들을 떠올릴 테지만 미스터리한 일들이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 속에서도 우리가 알지 못한 미스터리한 일들이 많이 있다. 때로는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일들이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이야기들도 실은 미스터리 속에 그 진의가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많은 이들이 정사(正史)보다는 야사(野史)에 흥미를 느끼는 것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미스터리한 면모 때문일 것이다. 

역사에 절대적 진리란 없다. 새로운 기록이 발견되거나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전에 진실이라 믿었던 것들이 뒤집히기도 하고, 이전에는 옳다고 여겨졌던 신념이 고루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사 속에는 미스터리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담겨 있다. 이 책과 함께 이미 알고 있던, 지루한 상식을 넘어 충격과 반전의 이야기를 마주하다보면 짜릿한 흥분과 전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그레이엄 도널드 
그레이엄 도널드는 역사, 말의 의미, 일반적 편견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했다. 저서로 『지구가 평평했을 때When the Earth Was Flat』, 『역사 속 오늘On This Day in History』, 『세상을 바꾼 우연The Accidental Scientist』, 『세상을 측정하는 위대한 단위들The Long the Short of It』 등이 있다. 

■ 역자 이영진
고려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뒤 한국 몰렉스, 한국 쓰리콤에 재직하며 인력 관리, 마케팅, 영업 관리 분야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다국적 기업에서 여러 분야의 실무자로 근무했던 경험이 경영 및 자기 계발 분야의 전문 번역가로 거듭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옮긴 책으로 『성공한 리더는 자기 철학이 있다』, 『팀 매니지먼트』, 『스마트 비즈니스』, 『왜 똑똑한 사람이 멍청한 짓을 할까』(공역), 『나는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공역), 『뉴 노멀』, 『넥스트 리더십 3.0』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1. 허위와 날조의 역사 
 프랑스인들이 지어낸 국민 영웅 잔 다르크 
 드라큘라 백작 부인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진실 
 의사가 되기 위해 남자로 살았던 제임스 배리 
 19세기 영국에서 태어난 ‘닌자’의 실체 
 교황의 왕좌에 오른 여교황 요안나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여성, 도쿄 로즈 
 로빈 후드는 실화일까, 설화일까? 

2. 가짜 항해와 꾸며진 모험담들 
 중국에 관한 소문으로 쓴 『동방견문록』 
 아메리카 대륙에는 누가 처음 갔을까? 
 호주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누구일까?
 바운티호의 반란과 블라이의 실체 
 유령선 메리 셀레스트호의 미스터리 
 이스터섬의 모아이들이 걸었다? 

3부. 추악한 살인 사건들의 진상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모차르트를 죽인 것은 매독일까, 살리에리일까? 
 국가 기밀을 알고 있던 라스푸틴의 최후 
 크리펜이 정말 아내를 죽여 지하실에 묻었을까? 
 운명에 버려진 로마노프 일족과 러시아 혁명 
 투르 드 프랑스의 기원이 된 드레퓌스 사건 

4부. 의식과 종교를 둘러싼 미스터리들 
 기자 대피라미드는 누가, 왜, 어떻게 지었을까? 
 스페인 종교재판의 검은 전설 
 스톤헨지에 지붕이 있었다? 

5부. 전쟁과 재앙을 둘러싼 은폐와 윤색 
 탐욕이 지어낸 거짓말, 캘커타의 블랙홀 
 남아메리카와 스페인, 아일랜드의 삼각관계
 집안싸움이 번진 경기병 여단의 비극 
 시카고 대화재를 낸 것은 암소일까, 혜성일까? 
 전쟁을 통해 자살하고 싶었던 고든 장군 
 게르니카 폭파와 ‘쓰러지는 병사’ 사진의 조작 

 




미스터리 세계사


허위와 날조의 역사

프랑스인들이 지어낸 국민 영웅 잔 다르크

많은 이야기들이 잔 다르크를 15세기 초의 여성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백년전쟁에 참가하여 침략군인 영국-부르고뉴(Bourgogne) 동맹군에 맞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 마녀 혐의로 체포되어 루앙(Rouen) 시장터에서 화형당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는 프랑스인이 아니었고, 군대를 지휘하거나 전투에 출정한 적도 없으며, 마녀사냥으로 처형된 적도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그릇된 사실들이 모여 이 우상적 인물을 창조하게 된 걸까?


잔 다르크는 1412년에 프랑스 로렌(Lorraine) 지방 동레미(Domremy)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1766년까지 프랑스에 동화되지 않은 독립 공국(公國)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이름은 자크 타르체(Jacques Darce)다. 다르크스(Darx), 다르크(Darc), 타르체(Tarce)로 다양하게 표기되지만 적어도 다르크(d'Arc)는 아니었다. 그의 이름 안에 들어가는 아포스트로피(‘)는 15세기 당시 프랑스 이름에 사용된 적이 없고, 그의 출신지일지도 모를 아르크(Arc)라는 곳도 존재하지 않는다.


잔 다르크의 전체 전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자기 이름을 겨우 쓸 정도로 문맹인 16세 시골 소녀가 시농성으로 말을 몰고 가서, 그녀를 시험하기 위해 신하들 사이에 숨어 있던 샤를(Charles) 황태자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내고, 자신이 두 성녀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그들로부터 몇 가지 예언을 받았다고 얘기한 뒤, 전투 사령관이 되어 유유히 걸어 나오는 이야기를 믿어야만 한다. 황태자가 어수룩해서 그녀에게 군대를 내주었다고 해도, 전투 경험이 많은 군대들이 그녀의 깃발 아래 배속되어 전술과 무기도 모르는 그녀를 순순히 따랐다고 믿는 것이 현실적일까?


잔 다르크의 재판에 관한 전설에도 몇 가지 왜곡이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노트르담 기록에 따르면, 그 재판에는 장 르마이트르(Jean LeMaitre)가 피고의 유일한 대리인으로 참석하여, 잉글랜드 측 파견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재판이 법과 달리 엉망으로 진행되는 것에 대해 계속 이의를 제기했다. 성처녀의 죄목은 (마법이 아니라)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신명기 22장 5절에 위배되게 남성의 복장을 한 것이었다. 그녀가 갑옷 차림으로 군대를 이끌었다는 사실과 관련한 죄목도 있었다고 하는데, 14세기와 15세기에는 갑옷차림의 여성이 군대를 이끄는 일이 오늘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흔했기 때문에 이는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논점을 더욱 흐리는 일은, 성처녀가 루앙에서 화형당한 게 아니라는 일각의 주장이다. 루앙의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1439년 8월 1일에 당시의 관리들이 그녀에게 ‘오를레앙 전투의 복무’에 대한 대가로 210리브르를 지급하라고 지시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옥타브 델피에르는 『의혹의 역사(Doute Historique)』라는 소책자에서 잔 다르크가 마녀로 몰려 루앙에서 화형당했다는 이야기를 부인하고 있다. 그는 17세기에 비그니어(Vignier) 신부가 메츠(Metz)의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한 문서를 통해, 잔 다르크가 아르모이즈의 시외르(Sieur des Armoise)와 결혼하여 그와 함께 메츠에서 거주하면서 한 가족의 어머니로 살았음을 입증했다. 그 뒤에 비그니어는 가족 문서 상자에서 기사였던 아르모이즈의 로베르(Robert des Armoise)와 처녀라는 별칭의 잔 다르키 Jean D'Arcy(아르키의 잔) 사이의 혼인 계약서를 찾아냈다.


로빈 후드는 실화일까, 설화일까?

로빈 후드(Robin Hood)는 단연코 영국 대중문화 속 최고의 우상이지만, 이 전설 속 인물의 정확한 정체는 – 전설의 존재인데 그게 합성적 인물인지 아니면 순전히 가공의 인물인지 – 잡아내기 어렵다. 로빈은 1189년부터 1100년까지 통치를 했던 사자왕 리처드(Richard)의 충성스러운 군인 이미지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프랑스 태생인 리처드는 영어를 전혀 못했고, 그의 총 재임 기간 동안 영국에서 보낸 기간은 5개월도 안 되기 때문에, 이 둘의 만남은 어떤 식으로든 성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1450년에 처음 간행된 『로빈 후드와 수도사(Robin Hood and the Monk)』는 민간에 회자되던 발라드들을 엮은 것이다. 이 속에서 로빈은 노팅엄(Nottingham)에 감히 발을 들여놓았다가 예전에 그가 피해를 입혔던 수도사에게 발각되는데, 수도사의 고함소리를 듣고 쫒아온 노팅엄 장관(sheriff)의 부하들에게 몰리다가 붙잡힌다. 이를 알게 된 리틀 존과 방앗간 아들 머치는 그 부역자 수도사를 불러 세워 난도질하여 죽인 뒤, 그들의 소행을 목격한 아이마저 죽여버린다.


당시에 사람들은 자기 영웅들의 죽음에 대해 훨씬 느긋했다. 로빈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로빈 후드의 모험담(Gest of Robyn Hode)> 같은 초기 발라드는 건강이 악화된 로빈이 수녀원 부원장과 함께 성배를 찾아 떠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녀원 부원장은 효력이 천천히 나타나는 독약을 로빈에게 먹여 그를 배신한다. 이 수녀원 부원장은 희곡 <헌팅던 백작 로버트의 몰락(The Downfall of Robert Earl of Huntingdum)> 에서 커클리즈(Kirklees)출신으로 나오며, 커클리즈 수도원 (Kirklees Priory)부지에는 실제로 봉헌된 무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수도원은 노팅엄셔(Nottinghamshire)가 아닌 웨스트 요크셔(West Yorkshire)에 있다.


그러니까 본래의 로빈 후드는 중세 시대의 인물이었고, 그의 모험담은 그를 숭앙하면서 그의 잔인한 행동에 귀를 기울였던 똑같은 잔인함을 지닌 관객을 위해 쓰인 것이었다. 이것이 이후 다른 세기 사람들의 좀 더 섬세한 취향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빈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어디론가 숨어 버렸고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는 거의 잊혀졌다. 사실 현대 영화에 나오는 로빈은 16세기와 17세기의 로빈이 진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로빈은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바뀐 모습으로 등장하는 일시적인 캐릭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전설의 중심에는 어떤 실존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을까?


빅토리아 시대는 관광 산업이 급성장했던 시대였다. 노팅엄이 로빈 후드와 셔우드 숲의 관계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었지만 요크셔는 그런 노력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요크셔에는 데일즈(Dales)라는 국립공원이 있었고, 주요 명소인 해로게이트(Harrogate)온천도 있어서 돈벌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최근 들어 셔우드 숲 여행을 위해 노팅엄을 찾는 이가 연간 50만 명이 넘어서자, 요크셔는 자기 고장의 아들을 되찾기 위한 전투를 시작했다. 로빈 후드 전설의 중심에 실존 인물이 있다면, 그가 바로 이 요크셔 출신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많기 때문이다.


로빈 후드라고 불리는 사람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1225년 요크 아시즈(York Assizes)법원의 소송 과정기록이 나온다. 여기에는 로빈 후드 혹은 로빈 호드로 불리는 사람으로부터 성 베드로 교회의 영지에 갚아야 할 채무로 32실링 6펜스 가치의 재산을 몰수했고, 이후 그는 무법자로 추방되었다는 상세한 기록이 나와 있다.


왕립 역사학회(Royal Historical Society)의 연구원이자 중세 역사의 전문가인 데이비드 볼드윈(David Baldwin)에 따르면, 전설 속에서 요크 출신으로 여겨지는 로빈 후드는 1260년대 후반에 셔우드 숲에서 활동했다고 하는 무법자 로저 갓버드(Roger Godberd)일 수도 있다. 로빈 후드의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갓버드는 셔우드 숲을 통과하는 여행자와 교인들을 갖은 방법으로 약탈하고 살해했던 불한당 일당의 두목이었다. 그는 왕의 사슴을 밀렵한 죄로 노팅엄 장관에게 체포되었다가 탈출한 적도 있었다. 전설 속의 로빈은 사우스요크셔의 록슬리(Locxley)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록슬리의 로빈으로도 불렸다. 갓버드가 묻혀 있는 곳은 워릭셔(Warwickshire)의 록슬리이다. 이는 또 다른 혼란스러운 관련성을 제기한다.


중세 인물들과 그들의 운명에 관한 볼드윈의 주장을 참작하면, 갓버드가 주인공이어야 한다. 만일 요크셔가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다 해도, 로빈 후드에 관한 한 노팅엄과 셔우드의 대세는 계속될 것이다.



가짜 항해와 꾸며진 모험담들

호주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누구일까?

탐험가가 어떤 광활한 땅덩이에 최초로 발을 들여 놓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 특히 영국의 - 역사책들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은, 그곳에 도착한 최초의 백인이다. 아무나 붙잡고서 호주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거의 ‘제임스 쿡 선장(Captain Cook)’이라고 자신 있게 답할 것이다. 하지만 호주 대륙을 진짜 최초로 발견한 이들은 최소 4만 년 정도 앞서는 아프리카 여행자들이었다. 말하지만, 호주 토착민들은 고향을 떠나온 아프리카인들의 자손들이다.


그들의 DNA 안에는 원시적인 뗏목에 올라 인도, 말레이시아, 보르네오를 거쳐 호주의 북동부에 도착한 뒤 1,000km에 달하는 마지막 장정으로 티모르섬(Timor)까지 올라갔던 조상들의 흔적들이 뒤섞여 있다. 기원전 338년의 기록에 보면, 베이징의 황제 동물원에서 캥거루를 전시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호주의 동부 해안선 지도가 그려져 있는 2,000년 된 중국 화병도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고대 중국인들도 호주를 자주 방문했다.


유럽인들이 들어온 것은 한참 후였다. 그중 최초의 유럽인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빌렘 얀스존 (Willem Janszoon,1570-1630)이다. 이 네덜란드인은 1606년 2월 26일에 호주 북부에 있는 케이프 요크(Cape York) 서부 해안의 펜파더(Pennefather) 강에 잠시 닻을 내리려고 오늘날의 카펜테리아만(Carpentaria)으로 배를 몰고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 임시 주둔지를 만든 다름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선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결국 현지인들의 알 수 없는 적대감에 부딪혀 주둔을 포기해야 했다.


1644년에는 타스 마니아호(Tasmania)에 이름을 빌려준 네덜란드인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호주 북부 해안을 대부분 탐사하고 난 뒤 지도를 작성했다. 이 네덜란드인이 제임스 쿡(James Cook,1728-1779)이 태어나기 1세기 전에 벌써 뉴홀랜드(New Halland)라는 이 땅의 지도를 만들고 정착지를 구축한 것이다.


1768년에 중위 - 당시는 대위가 아닌 - 쿡은 왕립 학회(Royal Society)에 채용되어 타이티섬으로 가던 중 금성이 그 섬 위로 지나가는 장면 – 1769년 6월 3일로 예고되었던 – 을 기록했다. 그는 그곳을 지나 계속 남서부 방향으로 항해해 가다가 1642년과 1643년에 걸쳐 아벨 타스먼이 처음으로 뉴질랜드를 탐험하여 만든 지도를 확인한 다음, 그곳이 섬인지 대륙인지를 밝혀냈다. 쿡은 주의 깊고 세밀한 작업을 통해, 타스먼이 발견한 곳이 실은 섬이고 호주 대륙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냈다. 그 다음에, 쿡은 자기의 의지로 계속 항해하다가 1770년 4월 19일에 호주의 동남부 해안을 발견하게 되었다. 쿡이 용감한 항해자였고 꼼꼼한 지도 제작자였다는 사실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호주 발견에 대한 영예를 얀스존으로부터 빼앗아 갔는지는 미스터리이지 않은가?


당시 영국인들은 네덜란드인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자주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역사서들 안에 그저 ‘요리하듯’ 쿡을 최초의 발견자 자리에 집어넣고, 네덜란드인인 얀스존은 빼버린 것이다. 영국인들 중 다른 유일한 후보자는 오만불손한 해적 윌리엄 댐피어였지만, 그를 그런 자리에 앉힐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왕립 해군의 장교도 아니었다. 댐피어는 악명 높은 성격으로 『로빈슨 크루스 (Robbinson Crusoe)』(1719) 이야기에 영감을 주어 다른 쪽으로 유명해졌다.


1704년에 댐피어는 싱크포츠호(Cinque Ports)의 선장 토머스 스트래들링(Thomas Stradling)과 손을 잡고 세인트 조지호(St George)의 지휘권을 맡아 칠레 해안을 떠나 또다시 해적 길에 올랐다. 댐피어의 성미 때문에 이 둘 사이에는 불화가 생겼고, 결국 두 배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이후, 스트래들링의 배에서 그와 선원 알렉산더 셀커크(Alexander Selkirk)사이에 다시 싸움이 일어났다. 셀커크는 홧김에 다음 육지에서 내려 달라 말했고, 후안 펠난데스(Juan Fernandez)의 무인도에 도착해 여기에서 5년을 지낸다.


그 후, 1709년 2월 1일에 듀크(Duke)선의 우즈 로저스(Woodes Rogers) 선장이 담수를 찾아 이 무인도에 배를 댔다. 셀커크는 구조될 희망에 부풀었지만, 그 기대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듀크선의 구명정이 다가올 때 옛 친구 댐피어가 저편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셀커크는 자기 섬으로 되돌려 보내 달라고 요구했지만, 결국에는 회유되어 잉글랜드행 듀크선에 올랐다. 다니엘 디포(Daniel Defoe)는 이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로빈슨 크루소』를 쓰게 된다.



의식과 종교를 둘러싼 미스터리들

스페인 종교재판의 검은 전설

아라곤 왕국(Aragon, 스페인 북동부의 옛 왕국)의 페르디난드 2세(FerdinandⅡ)와 그의 아내 카스티야 왕국(Castile, 스페인 중부의 옛 왕국)의 이사벨라 1세(IsabellaⅠ)가 1478년에 설립한 카톨릭교회의 재판소는 16세기 말부터 시작된 잔인한 박해의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모두 한 번쯤은 모자달린 옷을 입은 성직자들이 벌거벗은 여자들을 고문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영화, 또는 종교재판 심문실을 그려놓은 수많은 브뤼헐(Bruegel) 풍의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 종교재판의 실제는 이와 매우 달랐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거짓말들을 왜 지어낸 것일까?


‘종교재판’이라는 단어에는 늘 ‘스페인’이라는 단어가 따라붙기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 스페인 재판소가 종교재판을 집행한 유일한 곳이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사실 스페인은 후발주자였다. 최초의 종교재판은 12세기에 프랑스가 이교도 카타리파(Cathars)를 처단하려고 상정한 것이다. 당시에는 포르투갈에서 페루에 이르기까지 모든 카톨릭 국가에서 종교재판을 실시했다. 그렇다면, 스페인 종교재판이 그중 제일 관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심한 비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16세기 당시 나머지 유럽 지역들이 스페인이 군대와 해상에서 패권을 잡는 것을 싫어했다는 사실과, 여교황 요안나의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리던 개신교 선전 운동가들의 파괴적인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서유럽인들은 스페인의 이름에 흠집을 내고 싶었고, 개신교 국가들은 자신들이 어떤 종교재판가도 눈물을 글썽이게 만들 정도의 고문과 화형으로 마녀들과 이단자들을 처벌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주의를 분산시키고 싶었다.


처음에 개신교인들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카톨릭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하지만 1547년에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의 손자인 찰스(Charles)에 의해 뮬버그(Muhlberg) 전투에서 참패하자 다른 방법을 써야함을 깨달았다. 이에 개신교인들은 스페인이 거의 막을 수 없는 무기를 가지고 공격했다. 바로 출판이었다. 그들은 스페인과 스페인 종교재판의 이름을 비방하기 위해 수천 판의 소책자와 암울한 동판화들을 찍어냈다. 그 책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에 배포되었다. 그때부터 스페인인들을 검은 전설(Black Legend)이라고 부르는 거짓된 이야기가 퍼지게 된 것이다. 지금도 그 책의 사본을 일부 온라인 서점에서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그 책의 영향을 가늠할 수 있다.


그들의 종교재판은 유대인이나 무슬림, 다른 신앙의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박해의 도구가 아니었다. 종교재판소는 카톨릭 교리에 대해 카톨릭 신자들을 상대로만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카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던, 그들이 서유럽 국가 중 가장 관대했다고 하는 측면은 당시의 통치권자들에게 매우 바람직한 대안으로 기능했다.


그렇긴 해도, 초창기의 스페인 종교재판을 살펴보면 중요한 사실이 발견된다. 종교재판이 가차 없이 들이댄 날카로운 이빨이 있었는데, 그것은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가 통일된 신앙의 스페인을 보고자 하는 바람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부 스페인 사람들은 많은 콘베르소들이 자신들의 진짜 신앙을 비밀리에 계속 믿으면서 말로만 천주교에 경의를 표시한다고 - 타당한 이유 없이 - 생각했다. 물론, 유대인들의 부에 대해 일반인들의 반유대주의 질투가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범죄에 유죄 판결을 받으면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같은 기간 동안 나머지 서유럽 지역들에서는 약 60,000명의 마녀와 이교도를 학살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영국의 헨리 8세가 아주 멋진 왕으로 승격되고 있지만, 그는 편집증적인 폭군이었다. 그는 37년의 재위 기간 동안 신앙이나 이단의 사유로 사형을 시킨 이들 외에도 수만 건의 일반적 사형을 실시했다.



전쟁과 재앙을 둘러싼 은폐와 윤색

탐욕이 지어낸 거짓말, 캘커타의 블랙홀

영국과 인도에서 매우 잘 알려져 있는 이 잔혹한 이야기는 기껏해야 단순히 부풀려진 사건, 혹은 아시아 대륙에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대중과 정부의 지원을 열망하던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EIC)의 악의적 음모로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1세가 1600년 12월 31일에 선포한 왕실 헌장에 의해 설립되어 18세기 무렵 거대 기업이 된 동인도 회사의 규모는 21세기의 모든 대기업을 왜소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 회사는 정부의 통제를 초월하여 모두가 염려할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영국 정규군을 뛰어넘는 독자적인 군대와 해군까지 보유했다. 1756년, 동인도 회사는 캘커타(현재의 콜카다 Kolkata)에서 위세를 떨치다가, 벵골의 나와브(Nawab of Bengal)였던 시라드 유드 다울라(Siraj ud-Daulah)와의 협정을 무시하고 내정을 간섭하게 된다. 동인도 회사가 벵골에 있는 군대 기지 윌리엄 요새(Fort William)를 대규모로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하자, 벵골의 나와브는 그 이유에 대해 근거 있는 의혹을 품고 그해 6월 20일에 요새를 공격했다.


동인도 회사의 군대와 지역 용병들은 대부분 탈주하여 달아났기 때문에 나와브의 군대가 그곳에 닥쳤을 때 요새에 남아 있던 병사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그곳 사람들이 블랙홀(Black Hole)이라고 불렀던 요새 감옥에 투옥된 유럽인들의 정확한 숫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나와브는 요새의 현장에 있던 동인도 회사 고위 관료 존 제파니아 홀웰(John Zephaniah Holwell)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을 거라고 즉각 통보하며, 그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들으면 요새의 감옥 안에서 방해받지 않고 지내게 해줄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나와브가 요새를 떠나자마자 유럽인들은 심술을 부리며 나와브의 부하들을 힘들게 했고, 나와브의 부하들은 그 주모자들을 – 그의 말이 신빙성이 있다면 홀웰까지도 – 혼내주려고 동인도 회사의 그 끔찍한 감옥에 처넣었다.


분노에 찬 홀웰은 런던으로 돌아와 동인도 회사가 캘커타 지역에 대한 권리를 회복하고 주변까지 영향력을 넓히게 하기 위해, 『블랙홀에서 억압받았던 영국 신사들과 어떤 이들의 비참한 죽음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를 펴냈다. 홀웰이 당시에 인도에 가지도 않은 동인도 회사의 임원들까지 집어넣어서 짜낸 이야기에 따르면, 146명이 토굴에 갇혔다가 다음날 아침 겨우 23명만이 비틀거리며 살아 나왔다고 한다. 그 사건이 벌어질 당시 그렇게 많은 수의 유럽인이 요새에 남아 있지도 않았고, 토굴의 크기도 겨우 높이 5.5m, 너비 4m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그만한 수의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 감옥은 아무 이유 없이 블랙홀로 불린 것이 아니다. 거기에 있는 창이라고는 조그마한 환기 구멍 2개밖에 없었는데, 이름처럼 깜깜한 그 어둠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볼 수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위대한 영국 국민들은 홀웰의 그런 싸구려 책에 대해 어떤 논리적 의심도 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은 벵골의 나와브를 때려죽일 필요가 있었다. 인도의 클라이브(Clive of India)라는 별칭의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라는 야수를 풀어놓을 때가 온 것이다.


가문의 땅인 쉬롭셔(잉글랜드 중서부의 주)의 마켓 드레이튼에서 태어난 클라이브는 길거리 싸움을 좋아하는 깡패로 유명했는데, 마을과 인근 지역에서 돈을 뜯어내며 살았다. 그가 18세가 되자 마켓 드레이튼 전체가, 그리고 특히 그의 가족이 그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를 동인도 회사에 취직시켜 인도로 보내버렸다. 이후 그는 동인도 회사의 군대에 들어갔다. 그는 이미 아편에 중독돼 있던 터라 자신과 타인의 안전을 거의 범죄적 수준으로 묵살했다.


클라이브는 나와브의 병력을 완파하여 윌리엄 요새를 다시 차지한 다음, 마켓 드레이튼에서 청소년 시절에 사용했던 전략을 써서, 다른 지방들이 동인도 회사의 휘하에 모이게 하는 일에 착수했다. 꼭두각시가 되어 동인도 회사에 협조하기로 한 이들은 미래의 적을 진압하는 데 클라이브의 군대를 사용한 대가로 두둑한 보상금을 챙겨 주었다. 클라이브는 그런 식으로 약탈하여 모은 뇌물 덕분에 큰 부자가 되어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에 대한 최초의 설득력 있는 반박은 1915년에 나왔다. 캘커타 역사 학회(Calcutta Historical Society)의 사무총장 J.H. 리틀(J.H. Little)이 『블랙홀 이야기 - 홀웰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The Black Hole – The Question of Holwell's Veracity)』에서 이 이야기를 반박했다.


마침내 1946년에 영국이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참담하게 물러났다. 인도의 군중은 영국이 인도의 잔인성과 배은망덕을 상기시키려고 세웠지만, 도리어 영국의 점령을 가장 모욕적이게 상기시켰던 블랙홀 기념비(Black Hole Monument)를 제일 먼저 허물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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