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중국사

   
장징(역:장은주)
ǻ
현대지성
   
12000
2021�� 02��



■ 책 소개


역사의 민낯을 알고 싶다면 그 나라의 음식을 보라! 

식생활은 한 나라의 문화 형태를 가장 잘 드러낸다. 복식과 의례, 건축과 같은 ‘전통’은 만들어낼 수 있지만 음식은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중화요리에는 서역이나 북방에서 흘러들어 온 갖가지 식재료와 향신료가 사용되는데, 이런 특징은 수많은 민족이 융합한 중국 역사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은 5천 년 중국 역사를 요리라는 주제로 관통하며 중국 문화와 중국인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특히, 비교문화사를 공부하고 일본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틀에 박힌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지금 중국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문화가 융합되어 왔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중국인들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과 달리 음식으로 보는 중국사는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 서역과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문화가 뒤섞였으며,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중화요리점이 그 문화 속에 융합되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런 ‘짬뽕 문화’가 중화요리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50권이 넘는 풍부한 사료에서 건져낸 역사적 진실에 저자의 재밌고 독특한 시각이 덧붙여진 이 책은 중국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다양한 민족의 다채롭고 흥미로운 음식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진짜 중국으로 당신을 안내하고 있다.

■ 저자 장징
중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활동하는 학자라는 독특한 이력을 바탕으로, 한·중·일 문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는 다양한 대중서를 썼다. 『사랑의 중국 문명사』로 요미우리 문학상을, 『근대 중국과 연애의 발견』으로 산토리 학예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미녀란 무엇인가』, 『하늘을 비상하는 심볼들』 등의 저서가 있다. 

1953년 상하이에서 태어나 화둥 사범대학을 졸업했다. 동 대학의 조교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 도쿄 대학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에서 비교문화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고쿠가쿠인 대학 문학부 조교수를 거쳐 현재는 메이지 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 역자 장은주
일본어 통번역 프리랜서로 활동하다가 활자의 매력에 이끌려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다. 옮긴 책으로는 『살이 찌기만 하고 빠지지 않을 때 읽는 책』,『일 잘하는 사람은 알기 쉽게 말한다』,『지적 생활 습관』,『인간력』,『최고들의 일머리 법칙』,『졸혼시대』,『혼자 있는 시간의 힘』,『일상을 심플하게』,『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잡담이 능력이다』등이 있다. 

■ 차례
서문 변화하는 중화요리 

제1장 공자의 식탁 ◆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1 2,500년 전의 주식 
2 공자는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3 회를 즐겨 먹다 
4 모든 것은 제사에서 시작되었다 
5 밥을 손으로 먹는다고? 

제2장 면의 연륜 ◆ 한대漢代 
1 알곡으로 먹은 밀과 보리 
2 가루의 등장 
3 한대 식생활의 여러 모습 
4 교자, 분식의 기적 

제3장 식탁의 빅뱅 ◆ 위진·남북조 시대魏晉·南北朝時代 
1 호병의 변천 
2 주식으로 등극하다 
3 유목 민족의 요리가 전해지다 

제4장 개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 수당시대隋唐時代 
1 개고기가 사라진 이유는? 
2 실크로드를 통해 향신료가 들어오다 
3 서역에서 온 음식 

제5장 양고기 대 돼지고기 ◆ 송대宋代 
1 천대받은 돼지고기 
2 일본요리 같은 중화요리 
3 문인의 취향과 미각 

제6장 젓가락이여! 너마저 ◆ 송원시대宋元時代 
1 젓가락은 왜 세로로 놓았을까? 
2 원의 요리와 조리법 
3 춘권의 내력 

제7장 아, 상어지느러미 ◆ 명청시대明淸時代 
1 진미를 발견하기까지 
2 매운맛의 혁명 
3 계속 진화하는 중화요리 

에필로그 
후기 

 




식탁 위의 중국사



공자의 식탁 -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2,500년 전의 주식

공자 시대, 기장은 귀한 곡식이었다

우리가 살펴볼 공자(孔子)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에 태어난 그 시대의 대표적 사대부로, 공자의 식사를 보면 중원지역 식문화의 대략적인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논어』제6편 ‘옹야(雍也)’에는, 공자가 노의 사법 대신으로 있을 당시 토지 관리를 담당하던 제자 원사(原思)에게 900두의 곡물을 주었으나 욕심이 없던 원사가 이를 정중히 사양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일화는 당시 생활비를 곡물로 지급했음을 보여준다. 화폐경제가 성립하기 이전에는 세계 어느 민족을 보더라도 식량을 지불 수단으로 사용했고, 그 식량은 대부분 주식용 곡물이었다. 후에 쌀이 주식이 되면서부터는 쌀이 공식 지불 수단이 되었지만 논어에서 말하는 곡물이 무엇인지는 글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논어』제18편 ‘미자(微子)’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여행 중에 한 은둔자를 만났다. 은둔자는 자로에게 간곡히 머물기를 청하며 닭과 함께 기장을 대접했다. 일반적으로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아무 음식이나 내놓지는 않는 법이다. 손님을 대접하는 데 사용되었으니 기장 또한 고급 식량이었을 것이다. 이 기장은 구체적으로는 ‘황미(黃米)’라고도 불리는 ‘찰기장’을 가리킨다. 점성이 있어 밥으로 지어 먹었으며 점성이 없는 기장은 술의 원료로 사용했다.


서민의 주식은 콩이었다

당시 식량으로는 벼, 기장, 조, 보리, 콩 등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콩은 하층계급의 음식이었다. 기원전 322년에서 269년까지의 일을 기록한『전국책(戰國策)』‘한책ㆍ양왕’에 한(漢)의 토지 상황을 다루는 내용이 나온다.


서민의 먹을거리는 대부분 콩밥과 콩잎국으로, 한 해라도 흉작이 들면 쌀겨조차 변변히 먹을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다. 이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150년에서 200년쯤 후의 일이지만 식량 사정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도 일부 지역의 서민들은 콩을 주식으로 먹었다는 이야기다. 『관자(管子)』제5권 ‘중령(重令)에는 ‘콩과 곡물이 부족하면 백성은 반드시 기아에 허덕인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도 콩이 서민 식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는 귀족이 즐겨 먹던 식량이었다

중원지역에서 쌀은 사치스러운 음식이었고 서민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콩을 먹었다. 보리는 항상 콩과 함께 다뤄지니 역시 소박한 음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조, 수수, 기장은 어떨까? 춘추시대에 이 세 가지는 비교적 유복한 자들의 음식이었다. 그중에서도 기장(찰기장)은 가장 좋은 식량으로 상류층의 사랑을 받았다. 고급 관료였던 공자 역시 조밥이나 기장밥을 주식으로 먹었다.


춘추시대 서적이나 조금 후대에 나온 서적에서는 지역에 따라 곡물의 종류가 광범위하고 주식도 일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현대와 같은 주식의 개념이 아직 없었다. 지금은 밀가루와 쌀이 각각 중국 북방과 남방의 주식이지만, 식량 생산이 기후 조건에 크게 좌우되고 규모가 작아 생산량이 불안정했던 고대에 지금처럼 넓은 지역에 걸쳐 같은 식량을 주식으로 삼기는 어려웠다.


또한, 같은 지역이어도 계층에 따라 주식이 달랐다. 중국 문명의 발상지인 중원지역에서는 귀족이나 관리 그리고 호상(豪商)이나 사대부만 고급 식량으로 여겨졌던 조, 기장, 쌀 등을 먹을 수 있었다. 다만, 쌀 보급률은 남방이 북방보다 좀 더 높았다.


회를 즐겨 먹다

회를 즐겨 먹던 시절

『논어』에 “밥은 정백이 좋고 회는 가늘게 썬 게 좋다”라는 말이 나온다. 『한서(漢書)』‘동방삭전 (東方朔傳)’ 편에도 “생고기를 회(膾)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회는 육류나 생선을 가늘게 썰고 초에 절여 생으로 먹던 요리다. 현재 중국에서는 지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육류나 생선의 회를 전혀 먹지 않는다.


그러나 춘추시대에는 생식이 매우 일반적이어서 공자도 육류 회를 즐겨 먹었다. 왜 날것을 그대로 먹으려 할까? 현대인은 미식을 추구하여 조림, 찜, 백숙, 튀김, 훈제, 꼬치구이 등 다양한 조리법을 두루 사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회 같은 생식이 맛있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고대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상황이 180도 달라진다.


철이 발명되기 전에는 음식을 가열하려면 손이 많이 갔다. 냄비, 쟁반, 사발이 다 도기여서 찌거나 졸이는 조리법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도기는 열전도율이 낮아 가열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농작업이나 수렵 혹은 전쟁처럼 촌각을 다투는 때에는 천천히 가열할 여유가 없었다.


육류나 생선을 잘게 썰어 적당히 소금만 뿌리면 날것 그대로 먹을 수 있다. 당초에는 아마 어쩔 수 없이 그런 간단한 조리법을 사용했겠지만,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더 맛있게 먹는 법을 찾는 게 사람의 심리다. 고대 생식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회, 즉 생선을 날로 먹는 습관은 이후 중국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으나 일본에서는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생선회뿐만 아니라 소고기, 말고기, 사슴고기, 닭고기도 날로 먹는다.



면의 연륜 - 한대

가루의 등장

면에 관한 기록

밀가루를 의미하는 ‘면(麵’)이라는 글자와 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든 음식을 가리키는 ‘병(餠)’이라는 글자 둘 다 한대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그보다 이전 문헌에서는 이런 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현대 중국에서 ‘병’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구운 납작한 빵을 가리킨다. 하지만 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모두 ‘병’이라 불렀다.


『한서』‘선재’ 편에 따르면, 선제(기원전 01~49년)가 즉위하기 전 저잣거리에서 ‘병’을 샀다는 기록이 있다. 『한서』가 편찬된 시대에 이미 ‘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이 기록이 맞다면 ‘병’의 성립은 더 윗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의 건원 建元 1년(기원전 139년) 장건이 처음 서역을 방문했다가 13년 후인 기원전 126년에 귀국했다. 이 사실로 분식이 장건에 의해 서역에서 들어온 게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고대에는 대맥(보리)이든 소맥(밀)이든 알곡으로 먹는 맥은 질이 낮고 거칠었다. 그래서 가격이 낮고 경제성도 없었다. 만일 소맥(밀)을 분식으로 먹는다면 다양한 조리법이 가능해진다. 분식이 등장한 이후 사람들은 밀가루를 즐겨 먹었다. 따라서 소맥의 수요가 늘고 가격도 올랐음이 분명하다. 농민들이 이유 없이 맥 재배를 꺼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면의 확대

후한 중기 이후에는 밀가루 식품이 더욱 급속하게 퍼져 민간에서도 일상의 음식이 되었다. 170년에 사망한 최식은 『사민월령 四民月令』에서 “입추에는 자병과 수요병을 막으면 안된다”라고 했다. 자병은 면의 원형으로 추정되고 수요병은 아마 수제비였을 것이다. 이 기록은 면이 낙양 부근 민간에까지 깊이 침투한 것을 나타낸다. 다만 그 무렵 밀가루가 주식이었는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양고기 대 돼지고기 ◆ 송대宋代

천대받은 돼지고기

천대받은 돼지고기

당시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동경몽화록』권2 ‘주작문외가항(朱雀門外街巷)’ 편에 “민간에서 도살한 돼지는 반드시 이곳 남훈문(南薰門)을 거쳐 도성으로 들어온다. 매일 저녁이면 몇 만의 돼지 무리를 불과 수십 명이 쫓아가지만 한 마리도 줄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라는 기록이 있다. 몇 만이라는 숫자의 신빙성이나 과연 그 돼지들이 모두 변경에서 소비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단,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었던 것은 거의 틀림없다.


소동파는 직접 돼지고기 요리법을 고안해 냈는데 그것이 지금의 동파육이다. 현대 중국에서는 돼지고기가 소고기와 닭고기를 잇는 고급 육류인데 왜 그때는 “진흙처럼 싸고” 신분이 높은 사람은 입에도 대지 않았을까?


송의 주휘가 지은『청파잡지 淸波雜志』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돼지고기는 천한 음식이었고 최고급 육류는 양고기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질이 낮다고 여겼기에 돼지고기의 가치는 진흙만큼 저렴했을 것이다.


양고기가 사랑받은 이유

육조시대에 들어 차츰 양고기를 많이 먹기 시작했다. 『제민요술』에 나오는 가축류의 가공 및 조리 용례를 보면 1위가 돼지인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양고기 사용이 크게 늘어나 돼지고기 조리 예가 37가지였고, 양고기도 31가지나 된다. 양고기는 돼지고기와 거의 막상막하이고 3위인 소는 크게 떨어졌다.


『동경몽화록』에는 12세기 초반 변경의 실정이 담겨 있다. 그 변경도 지금의 개봉시에 위치한다. 같은 도시임에도, 이전에는 돼지고기가 주요한 식용육이었는데 북송에 들어 양고기가 고급육이 되었다. 왜 이렇게 돼지고기의 지위가 떨어졌을까? 중국 북방에서는 옛날부터 양이 최상의 고기이고 돼지는 천한 고기였다고 하지만,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유목 민족인 흉노족의 남하가 하나의 간접 원인일 것이다.


11세기에서 12세기 초반에 걸쳐 중원에 양고기 문화가 정착한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다. 916년 중국 북부에 거란국이 수립되고 약 30년 후인 947년에 국호를 요(遼)로 고쳤다. 같은 해 요의 군대가 개봉에 입성했다. 요는 개봉을 오래 점령하지는 않았지만, 그 후 문화의 중심지 중원은 항상 거란족의 위협 아래에 있었다. 거듭 승리를 거두며 계속 남으로 진출한 거란족은 그들의 풍속과 습관을 중원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거란족은 원래 유목 민족으로 목축과 사냥, 고기잡이를 하고, 곡식 농사를 지었다. 평소에는 양고기와 유제품을 많이 먹었다. 그 습관은 중원에 들어와서도 바뀌지 않았고 집권 중에는 목축 전문 관직을 다수 개설했다.


‘제산의(祭山儀)’는 거란족 황족이 천지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중요한 종교 의례다. 제사에 사용된 제물은 수말, 소, 양이었다. 민속 의례에도 양고기가 많이 등장한다. 정월 초하루에는 흰 양의 골수 지방을 찰밥에 섞어 주먹 크기로 둥글게 쥐는 의례가 있었다. 동짓날에는 흰 양, 흰 말, 흰 기러기를 잡아 그 피를 수에 부었다. 명절 의례 음식이나 제사에 바치는 음식에는 민족의 식문화가 응축되어 있다. 양이 그러한 의례에 많이 사용된 것은 그만큼 생활 속에서 중요한 음식이었다는 증거다.


일본요리 같은 중화요리

기름이 적은 요리

중화요리는 일반적으로 기름지다는 인상이 강하다. 물론 중국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기름을 많이 쓰는 것은 틀림없다. 요리에 따라서는 완성된 요리에 또 참기름을 뿌리기도 한다. 찜에도 기름을 더하고 무침에도 샐러드유를 듬뿍 끼얹는다. 삶는 요리는 지방이 많은 육류를 사용하여 더욱 기름지다.


언제부터 이렇게 맛이 진한 요리를 먹었을까? 당의 위거한이 지은『식보』에는 58종의 요리명이 나오지만, 대부분 삶거나 구운 요리다. 『식보』에 끓는 기름으로 조리한다고 한 것은 ‘과문향(過門香)’이라는 요리밖에 없다. 실체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 튀김일 것이다. 『서양잡조』 ‘주식(酒食)’에는 127종의 요리와 과자가 나오지만, 튀김이나 볶음 요리는 찾아볼 수 없다.


볶음 요리의 변천

현대 중화요리에서 주메뉴는 항상 볶음 요리다. 이 볶음 요리는 언제 생겼을까? 육조시대부터 이미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설득력 있는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가장 오래된 볶음 요리 관련 기록은 북송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당 후기에 이미 볶음 요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송에 들어서도 볶음은 주요 조리법이 아니었다.


송이 금과의 전쟁에 패하여 남방으로 도읍을 옮긴 후 차츰 볶음요리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남송 후기의 책으로 추정되는『옥식비(玉食批)』에는 황제에게 진상하는 요리가 다수 기록되어 있는데, 메추라기 볶음이나 드렁허리 볶음 등 그때까지는 볼 수 없던 볶음 요리가 나온다.


단, 남송에 들어서도 볶음 요리는 아직 주요 조리법이 아니었다. 『산가청공』에 많은 요리가 올라와 있지만, 볶음 요리는 5~6종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남송의 『옥식비』에는 98종의 요리명이 나오지만, 메추라기 볶음, 개구리 볶음, 순무 게 볶음, 돼지 신장 볶음, 드렁허리 볶음 등 ‘볶음’이라는 이름이 붙은 요리는 5~6종뿐이다.


담백한 송의 요리

일본요리와 중화요리의 가장 큰 차이는 두 가지다. 첫째, 일본요리는 담백하지만 중화요리는 기름지다. 둘째, 일본요리는 연한 맛을 고급으로 치고 중화요리는 진한 맛을 고급으로 친다.


하지만『산가청공』등 송대의 요리책을 읽으면 당시의 요리에는 기름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가끔 그런 요리서의 조리법을 바탕으로 직접 당시의 음식을 재현해본다. 그런데 완성된 요리를 보면 놀랍게도 어떤 요리든 기름기가 적어 현대 중화요리와 전혀 이미지가 다르다. 오히려 일본요리처럼 담백하다.


일본요리는 죽순이나 표고를 조리할 때 기름을 별로 사용하지 않고 데치거나 쪄서 가공할 때가 많다. 교토의 한 음식점에서 죽순 요리를 먹은 적이 있다. 전채에서 후식까지 전부 죽순을 사용한 코스 요리였는데, 그때 죽순을 기름으로 볶거나 튀기는 것이 일반적이라, 데치거나 찐 죽순은 요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송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산가청공』‘버섯 술조림’에 일본음식과 비슷한 조리법이 나온다. 버섯에 물을 넣고 살짝 익을 때쯤 고급술을 넣어 졸여준다. 죽순을 더하면 더 좋다. 식용유는 사용하지 않는다. 현대에는 생각할 수 없는 방식이다.



아, 상어지느러미 _ 명청시대(明淸時代)

진미를 발견하기까지

상어지느러미 수프 vs 상어지느러미 찜

상어지느러미 수프를 한 번 맛보고 이 고급 요리를 다 안다고 뿌듯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유감스럽지만 상어지느러미 수프만으로는 상어지느러미를 먹었다고 할 수 없다. 진짜 맛을 알고 싶으면 찜으로 먹어야 한다. 가격은 약간 비싸지만 한번 맛볼 가치는 있다. 중화요리의 여러 특색이 이 요리 하나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어지느러미는 초승달 혹은 반달 모양이다. 특상 제품을 제외하면 가장 넓은 부분의 폭은 5~6센티미터 정도이며 이 부분만 찜에 사용한다. 나머지는 실 모양의 자투리다. 이 자투리는 주로 상어지느러미 수프에 사용한다. 상어지느러미는 분명하지만, 찜보다는 질이 떨어진다.


상어지느러미 찜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독특한 혀의 감촉이다. 젤라틴 같은 매끄러움, 야들야들함, 삶아도 남아 있는 연골의 탄력, 이 절묘한 조합은 혀와 이에 기분 좋은 자극을 준다. 또 하나는 농후한 맛이다. 상어지느러미를 찜으로 조리할 때는 질 좋은 육수가 꼭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토종닭이나 오리를 오랫동안 끓인 육수를 사용한다. 육수는 기름기를 제거해 진한 풍미는 살리면서도 담백하다. 이것이 맛의 비결이다. 상어지느러미 찜은 재료 본연의 맛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합성’한 풍미를 즐기는 요리다.


궁궐로 들어간 상어지느러미

해산물을 제외하면 건륭황제의 식습관은 한족에 가까웠다. 『청패류초』에 따르면, 건륭활제는 사복으로 강남을 시찰할 때, 절에서 낸 사찰 요리에 매우 흡족하여 “말린 사슴 고기나 곰 발바닥보다 훨씬 맛있다”며 대놓고 칭찬했다고 한다. 또 청의 궁궐에서 소주와 항주 요리가 유행한 것도 건륭황제가 강남 시찰에서 갖고 온 선물 때문이었다.


궁궐 요리사 중에는 한족이 많았기 때문에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황제들의 취향도 점점 한족을 닮아갔다. 실제로 광서황제와 마지막 황제 부의도 상어지느러미 요리를 먹었다. 특히 광서황제가 매우 좋아했다. 상어지느러미는 청 말기에 고급 연회의 메인 요리가 되었다.


청대 중기 이후에 상어지느러미 요리가 많아진 이유는 일본에서 수입하는 상어지느러미 양이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 마쓰우라 아키라의 고증에 따르면, 에도시대에 대량의 건해산물이 나가사키에서 중국으로 수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왜구를 제압하기 위해 명대에 해금령이 실시되자, 명일 무역은 엄격한 제한을 받았다. 그 후 중국 동남 연해 지역에 해적 및 밀수가 횡행했고 이를 단속하기 위해 명 말기까지 해금 정책은 계속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도 상어지느러미의 수입량은 계속 늘었다. 1852년 에도막부의관선 치토마세루가 상해에 입항했을 당시에는 무려 상어지느러미 1천 8백 근, 건해삼 2만 4천 근, 건전복 3만 6천 근 등이 수출품이 실려 있었다.


대만산 흰 상어지느러미는 삶으면 눈처럼 부풀어 올라 맛이 일품이었지만 고가여서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남양(아시아) 수입품은 퇴시(堆翅)라고 하여 한 번 익혀서 건조한 것이다. 소비량이 적어 가격은 안정적이지 않다. 이러한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18세기 중기에 들어 일본으로부터 수입량이 늘면서 상어지느러미가 중국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매운맛의 혁명

고추의 도래

원래 고추는 중국에서 나지 않고 명 말기에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대항해시대에 멕시코와 아마존이 원산지인 고추가 세계 각국으로 퍼져 재배된 것이다. 그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이견이 없다. 매운맛이 주를 이루는 사천요리도 옛날에는 고추를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고추가 외국에서 들어오기 전에도 사천성과 호남성 사람들은 매운 것을 좋아했다. 오래전부터 겨자를 조미료로 사용했고, 원대의 매명은『음식필지』에 양생의 관점에서 겨자의 효용을 소개했다. 고추가 중국에 들어온 후에도 겨자를 먹는 습관은 없어지지 않았다.


단, 주목해야 할 것은 고추가 언제부터 요리에 사용되고 널리 퍼지게 되었느냐다. 사실 중국에 들어온 즉시 요리에 사용된 것은 아니다. 아주 매운 요리가 나타나 식문화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상당히 나중 일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청대에 들어서도 겨자를 사용한 요리가 양적으로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식헌홍비』에는 고작 1종밖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 요리서가 청대 모든 요리를 망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등장하는 요리의 종류를 보면 상당히 대표성이 있다. 하물며 17세기 중국에서 고추는 식문화 중심에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18세기 중국은 어땠을까? 1798년에 82세로 생을 마감한 원매는 18세기의 산증인이다. 그러나 음식 백과사전인『수원식단』에서는 고추에 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고추를 채소로 사용한 기록도 없다.


원매는 항주 부근에서 태어나 강포, 강령(현재의 남경) 등의 지사를 역임하고 은퇴 후에 강령의 소창산 기슭에 수원(隨園)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그의 생활 반경은 줄곧 강소성과 절강성에 한정되어 있었기에 어쩌면 사천요리를 몰랐을 수도 있다.


고추의 등장

19세기가 되면 드디어 요리서에 고추가 등장한다. 1816년에 초판이 나온『수식거음식보』에서는 ‘랄가(辣茄)’라는 이름으로 고추를 소개한다. “종류는 하나가 아니라, 처음에 청색을 띠다가 적색으로 바뀐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매운 품종 같다. 고추를 채소로 먹었던 것도 아니지만, 어떤 요리에 조미료로 사용했는지도 명시하지 않았다. 같은 책에 고추를 사용한 요리는 하나도 없다.


당시 고추에는 많은 호칭이 있었다. 『수식거음식보』에 따르면, 고추의 별칭이 여덟 가지나 나오는 데다 지역별 호칭도 달랐다. 방언에 따른 호칭의 차이는 고추가 상당히 널리 분포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