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고 잊혀진 여성독립군열전

   
신영란
ǻ
초록비책공방
   
16000
2019�� 08��



■ 책 소개


항일 투쟁에 거침없이 앞장섰지만 역사 속에서 지워지고 잊힌 여성들의 이야기
“독립운동은 애국지사들만의 몫이 아니었다.” 

2018년 제99주년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 중 한 구절이다. 이처럼 삼일절, 광복절 공식 석상에서 언급되어지고,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주목을 받으면서 영화 속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영화 속 배우의 이름을 먼저 떠올릴 뿐, 역사 속에 실존했던 그들의 이름이나 생애는 선뜻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해서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을 쓰는 내내 몇 번이나 일경에 쫓기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경 헌병과 맞닥뜨리는 순간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용쓰는 모습에 낭패감이 밀려들곤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35년, 이 책에 나온 이들은 모두 항일 투쟁의 최전선에서, 혹은 후방에서 감히 상상도 못할 삶을 살다 갔다. 만약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우리는 과연 그들처럼 살 수 있었을까? 이 책이 건네는 묵직한 질문이다. 

■ 저자 신영란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잡지사 기자를 거쳐 한겨레 문화센터 강사로 일했으며 출판기획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역사와 여성의 삶에 관심이 많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소통에 관한 글을 쓰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는 《제왕들의 책사》, 《엄마는 생일이 언제였을까》, 《여자, 사임당》, 《용을 삼킨 여인들》, 《퀴리 아줌마네 오두막 연구소》, 《피카소 아저씨네 과일가게》, 《셰익스피어 아저씨네 문구점》 등이 있다.  

■ 차례
1부. 총칼에 맞서 싸운 여전사들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곤륜산의 여전사 박차정 
 불의 여인 안경신 
 사랑의 힘으로 독립군 투사가 된 김마리아 
 서대문형무소 큰언니 어윤희 

2부. 후방의 애국혼 
 말과 글로서 민족혼을 일깨운 조애실 
 망국의 한을 비행기에 싣다 권기옥 
 청상의 여걸 조신성 
 독립군 아내 이애라 
 독립군의 큰할머니 왕재덕 
 송죽비밀결사단 초대 회장 김경희 

3부. 이름 없는 불꽃으로 타오를지라도 
 기생 만세운동 
 제주 해녀 항일운동 

 




지워지고 잊혀진 여성독립군열전


총칼에 맞서 싸운 여전사들

곤륜산의 여전사 박차정

죽은 지 50년 만에 부활한 이름

1939년 2월, 중국 강서성 곤륜산에서 중국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의용대와 합동 작전으로 일본 최강의 부대인 제5사단을 상대로 펼쳐진 이 전투는 무려 두 달 동안 지속되었다. 초반 전세는 수적으로 우세한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전투 후반에는 증원군 투입으로 전열을 정비한 일본군이 반격에 나섰고 연합군은 작전상 후퇴를 강행했다


결과적으로 누구의 승리도 아니었던 곤륜산 전투(창사 전투라고도 불린다)에서 일본군은 연합군의 추격에 실패하고 군대를 돌렸지만 양측 모두 많은 인명 손실을 입었다. 그곳에 서른네 살의 여성 항일 투사 박차정이 있었다.


조선의용대 부녀 복무단장으로 이 전투에 참여한 박차정은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섰다. 무관학교 교관을 지낼 만큼 사격 솜씨가 출중하여 전장에서 거칠 것이 없는 그녀였다. 기나긴 공방전에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며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는 이 여전사는 일본군에게 제1의 표적이 되었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낡은 군복은 피로 물들었다. 치명적인 총상이었다.


1944년 5월 27일, 박차정은 결국 곤륜산 전투에서 입은 총상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5년에 이르러서야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자로 그녀의 이름을 올렸다. 박차정은 여고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수차례 옥고를 치르고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국가가 그 공로를 인정한 건 사후 50년이 지난 후였다.


삼남매가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박차정은 1910년 경상남도 동래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이른바 ‘경술국치’라 하여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바로 그해이다.


동래는 특히 항일의식이 투철한 지역이었다. 그녀의 나이 여덟 살 무렵, 일제의 무단통치에 비분강개한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박문희, 박문호, 박차정 삼남매가 일찍이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어머니 또한 이 지역의 유명한 항일 가문 출신이었다. ‘태항산 호랑이’로 불렸던 김두봉과 사촌지간이었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으나 강인하고 올곧은 성품으로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민족 단체인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경서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큰오빠 박문희가 이 지역 청년운동의 구심정이 되었다. 둘째 오빠 박문호는 의열단원이었고, 박차정은 열네 살 때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어린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련 그리고 또 다른 출발

1927년 5월에 창설된 근우회는 전국적인 규모의 여성 항일 투쟁 연합 단체였다.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으로 올라온 박차정은 근우회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박차정에게 근우회 활동은 여성 운동가로서의 내공을 다지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근우회는 이듬해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항일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총력을 모았다. 그 중심에 박차정이 있었다.


광주 학생항일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 중학생들이 우리나라 여학생들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성희롱한 사건이 빌미가 되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광주고보 학생과 일본 학생들 간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런데 일경은 가해자인 일본인을 편들어 광주고보 학생 박준채를 구타하는 만행을 부렸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호남 지역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까지 들고 일어났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시위는 이듬해 1930년 5월까지 조선 팔도를 항일의 함성으로 물들였다.


박차정은 경성 지역 11개 여학교 대표들과 연합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 그녀가 스무 살 되던 해였다. 3개월 동안 그녀에게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차마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끝내 동지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큰오빠 박문희가 병보석을 신청해 가까스로 풀려났을 때 그녀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박차정은 평생 임신을 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출옥 후 꼬박 한 달을 병석에 누워 있었던 박차정은 박문호가 보낸 의열단원을 따라 중국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이곳에서 혁명 동지이자 평생의 반려자가 된 운명의 남자, 약산 김원봉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의로웠으나 외로운 죽음

1939년 2월, 일본군이 남방 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곤륜산으로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 이때 박차정은 목이 쉬도록 방송을 하고 평소보다 몇십 배는 더 많이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다 결국 일본군의 총에 맞았다. 어깨에 치명상을 입었으나 전장에서 제대로 치료받을 길이 없었다.


1941년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대원들을 팔로군과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간간이 몸을 움직일 정도가 되면 임시정부 특사 자격으로 라디오 방송에 출영하여 대(對) 일본 선전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1944년 5월 27일, 운명은 그녀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토록 바라던 해방을 목전에 두고 박차정은 끝내 목숨을 거두었다. 시신은 해방이 된 후에야 고국에 묻혔다.


해방된 조국에 두 사람이 설 곳은 없었다. 더구나 김원봉은 친일 경찰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에게 ‘빨갱이 두목’으로 몰려 온갖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뒤 항시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다. “여기서는 왜놈들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의열단 동지에게 이 말을 남기고 월북을 단행한 김원봉은 북한정권의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으나 1958년 숙청으로 생을 마감했다.


분단의 모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원봉의 아내라는 이유로 박차정의 이름을 50여 년간 독립유공자 명단에서 지워 버렸다. 조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으나 바로 그 조국에게서 철저히 외면당한 그녀의 공적이 세상에 알려진 건 1995년이 되어서였다. 정부는 그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녀가 죽기 직전 친구의 밀고로 일경에 붙잡힌 박문호는 강제 송환된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의열단 국내 비선으로 활동했던 박문희는 일경에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만기 출옥한 뒤 해방을 맞았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 가던 중 행방불명되어 생사를 알 길이 없다.



후방의 애국혼

독립군의 큰할머니 왕재덕

백만장자가 된 일자무식 촌부

1907년 7월 20일,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 삼은 이완용 내각의 협박으로 고중이 강제 퇴위당했다. 이날 어전회의에서 이완용보다 더 악랄하게 황제를 몰아붙인 자는 내무대신 송병준이었다. 고종에게 사태를 책임지고 자결하거나, 직접 일왕을 찾아가 사죄하거나, 이도 저도 내키지 않는다면 조선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과 마찰을 빚는 척 싸움을 일으킨 뒤 항복하고 사령관을 통해 용서를 빌든 셋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정미년, 고종은 결국 퇴위하고 어전회의 소식이 바깥으로 전해지자 백성들은 치를 떨었다. 이때부터 송병준은 이완용,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과 더불어 이른바 ‘정미칠적’으로 불리며 조선 사람들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이 되었다.


1910년 12월, 이른바 ‘105 사건’이 터졌다.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과 애국지사들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자금을 모집하다 일경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 사건이다. 안중근이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 바로 그해였다. 일제는 무관학교 설립 모금 활동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자금으로 둔갑시켜 전국적으로 600여 명의 관련자들을 잡아들였다.


황해도 신천에 사는 쉰두 살의 과부 왕재덕은 103인 사건으로 맏아들 이승조를 잃었다. 일제의 가혹한 고문으로 얻은 병이 끝내 아들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과 결혼한 외동딸 이정서는 그해 시댁을 따라서 러시아 망명길에 올랐다.


왕재덕은 안씨 형제들의 독립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후원자였다. 딸 이정서가 은밀히 국내로 잠입해 들어오면 미리 준비해 놓은 현찰 다발을 허리춤에 채워 보내곤 했다. 때로는 직접 러시아와 중국으로 군자금을 들고 기기도 했다.


황해도는 물론 경성에서도 그녀는 소문난 땅 부자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그녀를 ‘백만장자’로 소개한 기사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배 한 척 건조하는 데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모두 왕재덕이 부담했다. 독립운동을 위해서라면 거금을 푼돈처럼 쓰는 그녀였다.


왜놈에겐 단 한 뼘의 땅도 팔지 않는다

왕재덕은 열여덟 살에 혼인하여 스물아홉 살에 과부가 되었다. 남편은 당시 돈으로 2만 원 상당의 토지를 유산으로 남겼다. 경성에 있는 고급 주택 두 채 값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세 아이와 먹고 살 걱정이 없을 만큼 재산은 넉넉했지만 그녀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해서 억척스럽게 토지를 늘렸다. 토지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근검절약하는 습관은 집안 내력과도 관련이 깊다.


그녀는 1858년 황해도 부농 왕시권의 2년 중 차녀로 태어났다. 언니가 단명하는 바람에 외동딸로 자란 그녀는 아버지를 도와 집안 살림을 꾸려가면서 농사를 배웠다. 황해도는 이북을 대표하는 곡창 지대로 일제 강점기 양곡 수탈이 극심했던 지역이다. 왕시권은 미곡 수출이라는 명목 하에 애써 농사지은 쌀을 착취당하지 않으려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런 세상에서 농사를 지어 봤자 왜놈들 좋은 일만 시킬 뿐이다.” 평생 울분을 안고 살았던 왕시권은 죽기 전에 전답을 모두 팔아치웠다. 왕재덕의 항일은 그 토지를 되찾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남편의 유산은 대부분 토지 매입 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녀는 농사뿐만 아니라 사업에도 소질이 있었다. 돈이 모이면 가장 값이 헐한 황무지를 사들였다. 황무지를 사들여 개간한 땅이 열 평 스무 평 늘어나면서 ‘황해도 신천 일대에 왕제덕의 땅이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그 무렵 송병준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진 신천온천 인근 목초지에 눈독을 들였다. 마침 왕재덕의 전답이 이 목초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만일 송병준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자신이 손해를 감수해야 되는 건 기본이고 이웃 농민들의 한이 서린 땅이 매국노의 손에 넘어갈 판이었다.


왕재덕은 노발대발하여 송병준을 상대로 소유권 무효 소송을 걸었다. 그리고 몇 년에 걸친 재판에 승소한 뒤 그 땅을 모두 사들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자와 맞서 재판을 일으킨 것부터가 보통 배짱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사리원에서 신천까지 철도가 연결되었을 때 일이다. 조선철도회사가 신천온천에 철도호텔과 육군 전지요양소를 신축한다는 계획이 알려지자 사방에서 투기꾼들이 모여들었다. 그중 한 일본인이 이곳에 여관을 짓기 위해 공사를 벌였다. 그런데 일꾼 십수 명이 작업을 하고 있던 그 땅은 왕재덕이 팔지도 않은 땅이었다. “남의 땅에서 이 무슨 짓인가?” “안 그래도 조만간 땅 주인을 만나 볼 생각이었소. 값은 시세보다 후하게 쳐 드리리다.”


그녀는 일언지하에 그 제안을 묵살하고 공사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조급해진 일본인이 태도를 바꿔 두 배 세 배 땅값을 올려주겠다고 애걸복걸해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돈은 나도 가질 만큼 가졌고. 당신 같은 사람한테는 땅 한 뼘도 안 팔 것이니 그리 아시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당신네들 하는 짓은 어찌 그리 한결같소?” 왕재덕의 날선 호통이었다. 결국 상대는 공사비만 날리고 신천을 떠났다.


항심이 있어야 항산이 있다

왕재덕은 학문을 깨우치지는 못했으나 삶의 목표와 철학이 뚜렷한 여성이었다. 기억력이 비상하여 이치에 맞는 격언이 있으면 외웠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천석꾼이 되려면 열심히 노동하고 땅을 넓혀야 하지만, 만석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는 주머니를 조여야 한다.” 이것이 근면과 절약을 철칙으로 삼아 온 그녀의 생활신조였다.


이렇게 아껴서 모은 돈은 자신을 위해 쓰는 법이 없었다. 대부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다. 오죽하면 이 시기 ‘만주나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중 왕 부인의 신세 안 진 사람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왕재덕은 독립운동계의 거목들과 교류도 잦았다. 백범 김구와도 사돈지간으로, 그녀의 외손녀가 김구 선생의 맏며느리 안진생이다. 도산 안창호는 ‘105인 사건’으로 병사한 장남 이승조와 손자 이계천이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왕재덕은 그가 해외 망명해 있는 동안 생활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맹자는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했다. 백성이 잘살기 위해서는 꾸준한 생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야만 항상 같은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왕재덕은 이를 ‘항심 (恒心)이 있어야 항산(恒産)이 있다’로 바꿔 썼다. 아마도 재산을 소유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재산을 모으는 마음에 달려 있다는 뜻일 것이다.


경성에 일이 있어 나간 왕재덕은 YMCA 관계자들을 만났는데 덴마크라는 나라에서는 청년들에게 농업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으며, 그 나라가 부강해진 것이 농업 교육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순간 그녀는 무릎을 탁하고 쳤다. 왕재덕은 훌륭한 영농 인재를 양성하는 것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1929년 약 10만 평의 토지를 처분하여 신천군 북부면 서호리에 세워진 ‘신천 농민학교’는 왕재덕의 첫 번째 결실이었다. 이듬해 ‘신천 농업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고 학생 수가 늘어나자 학교 건물을 증축해야 했다. 왕재덕은 농사실험실을 갖춘 현대식 건물을 짓기 위해 당시 돈으로 20만 원을 추가로 투자하여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 유일의 5년제 사립 농민 학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장례식에 인파가 몰린 까닭

왕재덕의 도움으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안정근ㆍ이정서 부부는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에 터전을 잡았다. 왕재덕은 사업을 핑계로 세 차례나 국경을 넘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으나 상황은 점점 암울하기만 했다.


죽은 첫째 아들 이승조의 자녀들과 막내아들 이수극은 기독교도였다. 딸을 안씨 집안에 시집보내면서 천주교와 인연을 맺은 그녀는 말년에 전 재산을 기부하여 신천에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를 세웠다. 당시로선 대형 교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문을 연 그해 세상을 떠났다.


1934년 6월.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전국 각지에서 조문객이 몰려들었다. 때마침 장마철이라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고 땅은 움푹움푹 패어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었다. 경성도 아니고 황해도 산간의 작은 농천 마을에 많은 조문객이 찾아오고, 더군다나 조선 여성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사회장을 치른다는 것 자체가 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만일 그녀가 만석꾼 재산을 평생 끌어안고 살았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재덕은 가난한 소작농들이 경제적 독립을 이루도록 도왔고 농촌 청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열어줌으로써 정신의 독립을 도왔다. 그녀의 생애가 빛나는 이유는 전장에 나가지 않고도 생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독립에 힘썼다는 점이다.



이름 없는 불꽃으로 타오를지라도

기생 만세운동

사상기생이라 불렸던 그들

흔히 말귀를 알아듣는 꽃이라 해서 기생을 ‘해어화(解語花)’ 라 했다. 다르게 풀이하자면 ‘자연의 이치를 깨우친 여성’ 정도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많이 배우고 가진 게 많으며 제법 그럴듯한 허울을 쓰고도 사람 구실 제대로 못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신분으로 계급을 구분하는 조선시대에 기생은 하층민에 속했으나 대부분 풍류를 알고 예술적 감성이 빼어난 이들이었다.


남녀가 유별하고 상하 구분이 확실하던 시대에 ‘기생재상’ 혹은 ‘정승기생’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천한 신분의 여성이 고관대작의 참모 노릇을 하려면 그만한 포부와 재능을 갖춰야 한다. 때로는 남자 못지않은 배짱도 필요하다. 책으로 세상을 배운 소인배들보다 눈동냥 귀동냥으로 세상을 배운 그녀들의 열정이 빛을 발하는 건 이런 연유에서다.


의리와 기개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독립운동에 남녀가 따로 없었던 것처럼 3.1 만세운동 당시 망국의 울분을 지닌 채 거리로 뛰쳐나온 여성이 학생들과 교사, 양반집 가문의 지식인층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해 3월 3일은 고종 황제 국장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고종의 사망 사실이 전해지면서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간 고종 독살설은 일본을 향한 국민적 분노를 들끓게 했다. 국장일을 앞두고 월선과 월희를 비롯한 황해도 해주 기생 몇몇이 경성에 왔다. 약속을 하고 온 건 아니었으나 목적은 하나였다. 황제의 마지막 길에 절이라도 올리고픈 백성의 마음으로 무작정 행장을 꾸려 나온 길이었다.


3월 1일 오후 2시가 가까울 무렵, 일찌감치 숙소를 나서 시내 구경도 할 겸 탑골공원 앞을 지나던 월희는 갑자기 숨을 멎을 것만 같았다. “대한독립만세!” 우레와 같은 함성에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월희는 그 함성 한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월선과 그녀의 동료들이 시위대와 뒤섞여 만세를 외쳤다. 총성도 군홧발도 이 거룩한 대열을 완전히 흐트러뜨리지는 못했다.


전국적인 기생 봉기의 시발점이 된 해주 기생 만세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중에 그녀들이 만세 시위에 동참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일본 경찰이 붙여 준 수식어가 또 하나 있다. ‘사상기생(思想妓生)’


기생들의 인권운동을 겸한 만세 시위

토요일인 3월 29일은 수원 기생들이 자혜의원에서 정기 위생검진을 받는 날이었다.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침탈해 간 후부터 실시된 위생검진은 매춘 여성의 성병 유무를 진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마당에 칸막이를 설치해 놓고 아랫도리를 벗은 채로 받는 검사는 위생경찰의 주도하에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는 기생들의 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수원 기생조합 소속 김향화는 위생검진을 거부하자고 동료들을 설득했다. 김향화는 치마폭에 숨겨 간 태극기를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만세를 선창했다. 바로 옆에는 수원경찰서가 있었다. 김향화는 시위대를 이끌고 대범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무자비한 경찰에게 그녀들이 처참하게 짓밟히고 끌려가는 광경을 목격한 수원 시민들은 치를 떨었다. 그날 저녁 학생들과 상인, 노동자 수백 명이 기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 시위를 벌였다. 밤늦도록 격렬하게 이어진 시위로 관공서와 민가 여섯 채가 파괴되고 16명이 구속되었다.


수원 장날인 이튿날에도 거리 곳곳에 태극기가 넘실댔다. 수원 기생들의 시위로 촉발된 만세운동은 인근까지 확대되었다. 3월 31일 경기도 안성에서 변매화가 주도한 기생 만세운동은 1,000여 명의 군중이 호응하였다.


김향화는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 8호 방에서 복역하다 만기를 1개월 앞두고 가출옥했다. 가출옥 이후 김향화의 행적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출소 후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거나 어쩌면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거라는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망한 나라 백성으로 사는 죄

한편, 해주로 돌아간 월선은 월희, 해중월, 옥채주, 문현희 등 이 지역 기생들과 만세운동을 벌이기도 결의했다. 이미 탑골공원 시위를 경험했던 월선은 독립선언문을 떠올렸다. 의논 끝에 월희와 월선은 자신들이 한글로 지은 선언문 5,000장을 인쇄했다.


1919년 4월 1일, 광주리 가득 태극기를 채워 들고 기생들이 거리로 나갔다. 평소에 입던 화려한 색채의 옷은 벗어 두고 하얀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그녀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민들에게 선언문을 나눠주었다. 시위대가 해주읍성 남문 방향으로 향하자 기생조합 회원들과 견습생들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뛰쳐나왔다. 네거리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흰 옥양목 치마저고리에 비녀를 꽂은 여자들이 제일 먼저 표적이 되었다. 기생들은 피투성이 되어 끌려가면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고문 기술자로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나카무라 형사부장이 해주경찰서로 출장까지 나와서 그녀들에게 매일같이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나카무라는 배후가 있을 거라 여겼다. 술이나 따르고 웃음이나 팔 줄 아는 기생들이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나선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배후는 무슨 배후! 이 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도 죄란 말이오?”


월선, 월희, 해중월, 문형희, 옥채주는 끝내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지옥같은 6개월을 살고 나온 후 문형희는 폐병으로 단명하고, 월선과 해중월도 해방 전에 세상을 떠났다. 1919년 9월, 경성의 치안을 담당했던 일본 경찰 간부는 본국으로 떠나면서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보고서를 남겼다.


(경성에 있는 동안 내가 본) 약 800명의 기생들은 화류계 여자라기보다 독립투사였다. 이 기생들의 빨간 입술에서 불꽃이 튀어 놀러오는 조선 청년들의 가슴 속에 독립사상을 불러일으킨다. 간혹 일본인들이 놀러가도 냉랭하기가 얼음 같다. 이야기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는다. 잔을 내밀면 묵묵히 술을 따를 뿐, 때가 되면 묵묵히 사라지고 만다.…


1960년 3월 1일, 임흥순 서울시장이 주최한 삼일절 행사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초청되었다. 이 자리에는 기생 출신 독립유공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월희와 옥채주였다. 정부는 월선(본명 문응신)에게 건국 포장을, 월희(김성일), 이벽도, 옥채주(옥운경)에게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