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거상

   
김영수
ǻ
매일경제신문사
   
17000
2018�� 05��



■ 책 소개


천년을 넘어 중국의 권력이 된 상인들의 이야기

 

세계가 중국, 특히 중국 경제에 촉각을 곤두세운 지 이미 오래다. 중국 경제와 중국 경제인의 동향이 세계 경제와 경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시대다.

 

중국은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 국가다. 하지만 경제관념이나 돈에 대한 인식은 자본주의를 비웃을 정도로 철저한 면이 많다. 그래서 혹자는 “중국은 공산주의를 실행한 지는 100년이지만 자본주의를 실행한 지는 5천 년이다”라고 말한다. 실제 역사 기록을 봐도 중국식 경제 이론이 정립된 것은 무려 2천 년하고도 수백 년 전이다.

 

현대 중국의 발전은 수천 년 중국 경제사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중국 경제의 위상 및 중국인 특유의 상도를 역대 상인들을 중심으로 짚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임이 틀림없다. 이 책에 나와 있는 고대 상인들이 보여준 합리적이고도 지혜로운 실천 사례들이 현대 경영에도 그 나름의 교훈과 통찰력을 선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저자 김영수
저자 김영수는 중국 역사가 사성(史聖)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불멸의 역사서 『사기(史記)』 연구가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대 한·중 관계사로 석사·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전 영산원불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 중국 소진학회 초빙이사, 중국 섬서성 사마천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기』 전문가로서 1998년부터 사마천의 고향인 섬서성 한성시 서촌마을을 꾸준히 방문하여 그곳의 학자들, 사마천 후손들과 교류하고 있으며, 2007년부터는 사마천 장학회를 설립해 후손들을 돕고 있다. 20년 넘게 중국을 다니며 중국사의 현장과 연구를 접목해 남다른 영역을 개척해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저술과 양서 번역, 강의 활동을 통해 중국, 중국인, 중국사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2007년 EBS 특별기획 ‘김영수의 『사기』와 21세기’를 총 32회에 걸쳐 강의했으며, 이후 기업체와 공공기관, 도서관 등 에서 사마천과 『사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인간관계의 통찰, 리더십과 경영의 지혜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역서로 『난세에 답하다』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사기를 읽다』 『사마천과의 대화』 『1일 1구』 『36계』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 『백양(柏楊) 중국사 1, 2, 3』 『사마천 사기에 대한 모든 것 1, 2』 『간서』 『첩자고』 『역사의 경고-우리 안의 간신현상』 등이 있다.

 

현재 『사기』 완역본 대장정에 나서 2,000여 년 전 사마천처럼 역사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입체적 작업으로 『완역 사기-본기(本紀) 1, 2』 『완역 사기-세가(世家) 1』을 펴냈다. 

 

■ 차례
시작하며 l 역사를 통해 미래 중국의 행보를 예측하다

 

1부. 상인, 신분과 계층을 넘어서는 경제 전문가가 되다
강태공, 정치와 경제를 최초로 결합한 경륜가
관중, 부민부국이 답이다
관중, 이민과 부민의 전제 조건
현고, 나라를 구한 상인
등석, 역사상 최초의 경제 전문 변호사
공자, 빈부보다 분배가 중요하다
공자, 유상 출현을 뒷받침한 가치관
자공, 2,500년 학파를 일으킨 유상의 원조
자공, 유가 학파의 기반을 다지다
계연, 경영에서 이윤과 윤리는 별개가 아니다
범려, 인생 삼모작을 성공으로 이끌다
범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시작
백규, 전국시대 거상을 탄생시킨 경영 철학

 

2부. 상인, 시대의 거상을 키워낸 치부법과 경영 이론을 말하다
춘추시대 후기 본격적으로 등장한 거상들
<화식열전>, 2,100년 전 살았던 부자의 기록
<화식열전> 속 거부들의 치부법
청, 진시황이 존경한 여성 사업가
역대 중국 10대 거부, 유근, 화신, 송자문, 오병감
역대 중국 10대 거부, 등통, 양기, 석숭, 심만삼
여불위, 정경유착을 넘어 권력 자체가 된 상인
탁문군, 사업으로 완성시킨 사랑 이야기
도가, 묵가, 농가로 살펴보는 제자백가의 경제관
제자백가를 대표하는 유가와 법가의 경제관

 

부록 l 중국 진출을 위한 성공 전략을 배우다
01 중국 시장, 우리 기업의 무덤인가 대박의 요람인가
02 중국 진출을 꿈꾸는 자, KFC에게 배워라
03 락앤락의 성공 전략, 중국 역사를 공부하라

 

마무리하며 l 지식과 경제의 결합체, 유상의 원형을 찾아서




대륙의 거상


상인, 신분과 계층을 넘어서는 경제 전문가가 되다

관중, 이민과 부민의 전제 조건

예의와 염치를 아는 부가 진정한 부다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고,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해야 영예와 치욕을 안다.”


다시 인용해보는 이 명언의 주인공이 바로 관중이다. 이 명언은 무려 2,700년 가까이 전 세계에서 두루 인용되고 있다. 이 말의 이면에는 ‘가난한 백성을 국가가 통치할 수 없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백성을 못살게 해놓고 나라에 충성하길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관중은 나라가 백성들의 의식주와 문화 수준을 어느 정도까지 끌어올리는 정책을 실행할 수 있어야만 백성들이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통치를 따른다고 봤다. 이렇게 되면 나라를 떠받치는 네 기둥, 즉 ‘사유四維’가 세워진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예禮, 의義, 염廉, 치恥다.


‘예’란 도를 넘지 않는 자세와 태도를 가리킨다. ‘의’란 스스로 잘난 척하지 않고 이치에 맞게 행동한다는 뜻이다. ‘염’이란 자신의 잘못된 점을 숨기지 않는 깨끗함이고, ‘치’는 남의 잘못된 언행을 따르지 않는, 다시 말해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이다. 이렇게 관중은 이 ‘사유’의 기본 전제를 넉넉한 물질적 생활로 본 것이다.


관중은 민심에 따르는 ‘순민심順民心’을 백성을 이롭게 하고 부유하게 하는 ‘이민利民’과 ‘부민富民’의 전제 조건으로 봤다. 이렇듯 그에게 경제와 정치는 결코 둘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자동차 앞뒤 바퀴와도 같은 관계였다.


공자, 빈부보다 분배가 중요하다

2,500년 만에 시진핑이 주목한 공자의 사상

2013년 11월 12일, 중국 공산당 전체회의(전회全會)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당의 제18기 3중전회 정신으로 사상을 확실하게 통일하자’는 제목의 강연에서 “전회의 정신을 관철하기 위한 몇 가지 요구와 함께 제시한 여섯 항목 중 다섯 번째인 ‘사회의 공평과 정의를 촉진하고 인민 복지를 증진’할 것을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삼아야 한다. 경제 발전을 이루고 나서 공평성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파이를 계속 확대하는 동시에 그 분배도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시진핑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명구를 인용했다.


“재부가 적다고 걱정하기보다는 분배가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고不患寡而患不均, 가난을 걱정하기보다는 불안을 걱정한다不患貧而患不安”_『논어』 계씨季氏


이 구절은 분배의 불공정과 불공평이 불안을 가져오는 주된 요인이라는 점을 지적한 명구로 꼽힌다. 분배의 균형이 나라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보수주의자인 공자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나라의 정책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이나 관리학 등 모든 분야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으로 꼽힌다.


공자, 유상 출현을 뒷받침한 가치관

‘이’와 ‘의’의 결합과 유상의 출현

공자는 이익 추구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利를 보면 의義를 생각하라’고 했다. 즉, 이익이 눈앞에 보이면 그것이 정당한지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이것이 저 유명한 ‘견리사의見利思義’, 또는 ‘견득사의見得思義’라는 구절이다(『논어』 헌문 편). 부와 이익을 추구하되 정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정통 유가에서는 ‘선의후리先義後利’와 ‘이의제리以義制利’를 주장한다. ‘의리가 먼저이고 이익이 나중이며’ ‘의리로 이익을 통제하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유가 특유의 의리관義利觀이 탄생했다. 이 유가 특유의 의리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신信’이란 개념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은 가치관들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신근우의信近于義: 믿음은 의리에 가깝다

근이신謹而信: 정직함과 믿음

언이신言而信: 말과 믿음

언필신言必信: 말은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유가의 ‘신信’은 경제와 상업에서 ‘신용信用’으로 정착했다. 이렇게 유가의 의리관과 신용은 상인으로 하여금 함부로 아무 이익이나 추구하지 않고 자율자제自律自制할 수 있는 도덕적 관념으로 정착했다.


계연, 경영에서 이윤과 윤리는 별개가 아니다

양식의 가격이 안정되어야 시장이 활성화된다

계연의 경제 모략 사상은 거시적 통제를 대단히 중시하고 있으며, 경제의 현실 상황을 주의해서 조사,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대책과 방침을 제기한다. 그는 월나라의 경제 현상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이를 기반으로 물가가 평형을 이루어야 하고, 생산(농업)과 유통(상업), 두 방면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식량 가격이 한 되에 20전이면 농민의 이익에 손해가 나고, 90전이면 상인이 손해를 본다. 상인의 이익에 손해가 나면 교역이 정체되고 돈이 돌지 않는다. 농민이 손해를 보면 생산성이 떨어지고 농지가 황폐해진다. 따라서 식량의 가격은 한 되당 최고 80전을 넘지 말아야 하며 최저 30전 밑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상인과 농민 모두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식량 값이 안정을 유지하면 다른 화물의 평등한 교환이 뒤따르고 시장 교역과 관세 등도 따라서 활기를 띤다는 뜻이다. 농업 본위의 사상이 주도하던 상황에서 계연은 ‘말석’에 위치한 상인의 이익과 그 작용을 간파하고 중요성을 강조했다.


극에 이르면 비싼 것은 싸지고 싼 것은 비싸진다

계연은 물자 교환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이익을 남겨 돈을 벌고 재부를 축적할 수 있는지를 아주 철두철미하게 연구했다. 물품은 교환을 통해 가치가 커진다고 주장했고 상인은 교환 과정에서 얻어야 할 이윤을 취한다고 했다. 그가 제시하는 재화를 축적하고 돈을 버는 방법에는 대단히 실질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경제 철학과 학문이 담겨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재부를 축적하는 이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화물의 질을 중시해야 한다. 둘째, 자금이 유통되지 않고 쌓이는 것을 막아야 한다. 물건을 사고팔 때 쉽게 부패하고 변질되는 물품은 제때에 내다 팔아야 지 더 나은 가격을 받겠다고 묵혀두는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


계연의 경영 사상이 보여주는 높은 수준은 상품 가격에 따른 변증법적 관계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다시 말해 상품 가격은 시장에서 교환과 공급, 수요의 변화 상황에 따라 유동적 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철저하게 간파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상품의 과잉 공급이나 부족한 상황을 연구하여 물가가 오르고 내리는 기본적 규칙과 이치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한다. 그는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대쪽으로 이동한다는 원리와 시장 교환의 일반적 규칙에 근거하여“비싼 것이 극에 이르면 헐값이 되고, 헐값이 극에 이르면 비싸진다”는 과학적 결론을 얻어냈다.


백규, 전국시대 거상을 탄생시킨 경영 철학

남이 내다팔면 나는 사들이는 전략

이는 백규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 사상이자 돈 버는 수단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백규는 간단한 물물 교환으로 상품을 교역했다. 즉, 서로에게 있고 없는 물건을 교환하여 사회적 수요를 만족시키고자 했다. 백규가 뛰어난 점은 시장 돌아가는 상황을 통찰했다는 데 있다. 다른 사람은 물건이 남아돈다고 생각하여 내다팔 때 그는 대량으로 사들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부족하다고 여겨 사들일 때 그는 급히 필요로 하는 곳에 내다팔았다. 쉽게 말해 쌀 때 사들이고 비쌀 때 내다팔아 이익을 얻고 재부 축적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이는 시장 경제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다.


요컨대 백규는 ‘시간이 곧 돈’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일찍 깨우쳤으며 재물이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본 축적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노복들과 고락을 같이했다. 거친 음식이라도 달게 먹었고 하고 싶은 것을 자제할 줄 알았다.


그는 화물 교역과 유통을 생산 발전과 긴밀하게 연계시켜 경영상 자본이 축적되고 생산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그는 많은 것으로 모자란 것을 보충하거나 구제할 것을 주장했다. 즉, 각종 상품이 서로 교환되고 유통되면서 서로 생산과 발전을 촉진하도록 돕게 하고, 경영 무역과 화물 교환이 진정으로 경제와 생산의 지렛대로 작용할 수 있게 했다.



상인, 시대의 거상을 키워낸 치부법과 경영 이론을 말하다

화식열전, 2,100년 전 살았던 부자의 기록

사마천이 소개하는 31명의 거상들

춘추 후기에서 전국에 이르는 동안 천하의 경제는 큰 변화를 겪었다. 그 주된 변화상은 상업 자본과 거상의 출현으로 요약된다. 사마천은 화식열전에서 이런 거대한 흐름과 변화를 춘추에서 한나라 초기까지의 거상 30여 명이 보여준 치부법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사마천은 이들 거상의 치부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위의 사람들은 부호 중에서도 매우 두드러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작읍이나 봉록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고, 교묘한 수단으로 법률을 이용하고 나쁜 짓을 하여 부자가 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모두 사물의 이치를 추측하여 거취去就를 결정한 것으로, 시운에 순응하여 이익을 얻고, 상업을 하여 재물을 얻고, 농업에 힘써 재산을 지켰다. 즉 그들은 강력한 무武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얻었고, 점잖은 문文의 방법으로 재산을 지켰던 것이다.”


화식열전 속 거부들의 치부법

거부를 탄생시킨 다양하고 독특한 치부법

먼저 오지 지역의 나씨는 목축업으로 치부했다. 그는 변방이라는 지리와 당시 진나라 북방의 흉노라는 세력에 주목했다. 나씨는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여 말과 양을 기르는 데 능한 유목민족인 이민족(주로 흉노)들에게서 말과 양을 사서 기르는 한편, 그들에게는 양식과 옷감 등 중국에서 나는 생필품을 팔아서 크게 이윤을 남겼다. 또 변방에서 키운 양과 말 등은 비싼 값으로 중국 각지에 팔아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


사사는 유통업을 주로 하되 오늘날의 프랜차이즈 개념을 도입했으며 필요하면 다단계 방식까지 취했다. 대규모 포장마차를 끌고 이동식 기업을 경영했는데 자신의 사업에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임씨는 농·목축업으로 거부가 된 인물로, 원산지 산물을 중시했다. 교요도 가축과 곡식을 교역하여 치부했는데 변경을 개척하면서 종자 사업에 착안하여 큰돈을 벌었다. 정책과 지역에 맞추어 사업 아이템을 개발한 경우였다.


무염씨는 자신이 보유한 자본을 정치판에 투자했는데, 한나라 초기 오초 7국의 반란 때 자금이 필요한 조정 편에 서서 거금을 대출했다. 결과적으로 조정이 난을 진압하여 무염씨는 원금과 함께 어마 어마한 이자를 돌려받았는데, 그 부가 관중의 부와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질씨는 칼을 가는 사업으로 치부하여 제후에 버금가는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고 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바로 이 칼 가는 사업이다. 전국시대 이래 남성들 사이에서는 몸에 멋진 긴 검劍과 짧은 도刀를 차고 다니며 뽐내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상대에게 자신의 검과 도를 자랑하려면 늘 번쩍번쩍 빛나게 갈아야만 했다. 질씨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 칼 가는 사업을 시작하고 아무 때나 칼을 갈 수 있는 사업장을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대 중국 10대 거부, 유근, 화신, 송자문, 오병감

뇌물로 반백 년 국가 재정에 맞먹는 재산을 치부한 유근

유근은 명나라 초의 거물급 간신이자 환관이었다. 그는 6세라는 어린 나이에 성기를 자르고 궁궐에 들어가 환관이 됐다. 환관 유근의 치부는 모두 황제의 권력을 빙자한 간행을 통해 거둔 뇌물이었다.


유근은 자신과 패거리의 권력을 강화하여 국정을 농단하기 위해 고문·살인을 전문적으로 일삼는 동창東廠과 서창西廠을 창설했다. 무자비한 탄압 기구였다. 억울한 사건을 수없이 날조해 많은 사람을 모진 고문과 살인으로 죽여 없앴다.


이런 형벌에는 예외 없이 엄청난 돈이 뒤따랐다. 걸려든 사람의 가족과 친지들은 전 재산을 갖다 바쳐야 했다. 유근은 뇌물과 형벌을 빙자한 갈취를 일삼아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던 것이다.


생전에 매관매직과 뇌물 등으로 받아 챙긴 돈만 황금 33만 킬로그램, 백은 805만 킬로그램에 이르렀다(재산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훗날 명나라를 멸망시킨 농민봉기군의 수령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에 진입하여 숭정제崇禎帝 때 1년 동안의 재정 수입을 조사해보니 백은 20만 킬로그램이었다고 한다. 기타 수입 등을 고려하여 이를 기준으로 단순하게 비교해보면, 유근이 부정하게 축재한 재산은 적어도 한 나라의 수십 년 재정에 맞먹는다.


송자문, 횡령으로 치부한 송씨 왕조의 왕자

셋째인 송자문은 당시 정계의 핵심 인물인 손중산과 장개석을 처남으로 둔, 이른바 ‘양조국구兩朝國舅’라는 신분으로 중화민국 재정부 장관이라는 요직을 장기간 담당하면서 국가 재정을 주물렀다.


송자문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경제위원회, 중국건설은공사, 중국은행 등을 이용해 민간 상공업과 금융업 관련 기업들을 지배하고 합병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는 무서운 속도로 자신의 가족이 핵심인 관료 그룹을 기반으로 시장독점을 취해 재산을 축적했다.


송씨 집안의 가족 자본을 둘러싼 폭로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46년 중국의 유명 정치가이자 문학가인 진백달陳伯達이 쓴 『중국 4대 가족中國四大家族』이란 책의 한 구절이다. “4대 가족이 탄탄한 권력을 배경으로 금융, 비즈니스, 공업, 토지, 부동산에서 독점한 중국 내 재산과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외국 예치금, 부동산, 공장 등을 모두 합하면 최소 200억 달러(한화 약 23조 원)는 될 것”이라는 내용의 폭로다.


송자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그가 소위 ‘꽌시’를 이용해 국가를 팔아 호의호식 한 매국노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혼란스러운 시기에 요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군비 확대, 국가재정 개혁, 긴급 차관 문제 해결 등 굵직한 업적을 냈다는 평가도 있다.


오병감, 아편으로 치부하여 외채를 갚은 거상

월스트리트 저널이 상인 출신으로 당시 세계 최고의 갑부로 꼽은 인물이 바로 오병감(1769~1843)이다. 오병감은 본적이 복건성으로, 그 선조가 강희제 때 광동으로 이주하여 장사를 시작하며 상인 집안이 됐다.


사업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그는 광저우廣州 상업계를 이끄는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이후 오병감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맞추어 부동산, 임대업, 국제 무역과 건설 사업 투자, 대출업(영국 동인도회사가 가장 큰 대출자였다) 등 다양한 사업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아편 수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로써 오병감은 중국은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지명도가 높은 상인 대열에 올랐다. 서양 학자들은 그를 ‘세계 최고의 부자’라고 불렀다.


상인으로서 오병감의 생애에 가장 큰 오점은 역시 아편 밀수였다. 아편 금지와 소각 조치가 취해지자 오병감은 온갖 방법으로 처벌을 피하고자 애를 썼다. 1843년 청 정부가 ‘남경조약’에 따라 300만 원의 외채를 상환하려고 했을 때 오병감이 혼자 100만 원을 떠안을 정도였다.


사업가로서 오병감의 사업 기반은 누가 뭐라 해도 이화행이었다. 18세기 서양과 통상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항구였던 광동에는 무역을 중개하는 무역 회사들이 설립되었는데, 이를 행行이라 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열세 군데를 광동 13행이라고 했다. 물론 이화행이 그 선두였다. 이화행은 특히 다국적 기업으로서 그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다양한 사업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도가, 묵가, 농가로 살펴보는 제자백가의 경제관

전국시대에 전성기를 맞은 제자백가

춘추에서 전국으로 넘어가면서 상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상인의 비중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상업과 상인이 사회 각 방면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제자백가의 저술에도 상업에 대한 나름의 관점이 반영됐다.


대체로 정리하면, 제자백가의 경제 사상과 상업관은 도가가 상업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데 반해 묵가墨家, 유가, 법가는 일단 상업의 객관적 작용을 긍정했다.


먼저 유가는 경제 정책에서 자유 방임을 주장하면서 개인이 자유롭게 상업에 종사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법가는 국가가 경제와 관련한 정책에 관여해야 한다면서 관영 상업은 발전시켜야 하지만 개인의 자유로운 상업 종사와 발전은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법가는 전기와 후기가 다르게 나타난다. 법가의 시조로 보고 있는 관중은 경제와 상업이란 점에서 결코 법가의 원조가 될 수 없다. 관중은 상공업을 장려했고 경제적 부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기 때문이다. 묵가는 상인의 작용, 상품의 가격과 화폐의 관계에 대해 비교적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농가農家는 상품의 직접 교환과 자급자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상인의 상행위를 사기로 규정했다.


상업을 부정하고 자연경제로의 회귀를 주장한 도가

잘 알다시피 ‘무위無爲’는 노자 사상에서 으뜸가는 원칙이다. ‘억지로 일삼지 말라’는 무위 사상은 경제 사상에서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줄이라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노자는 욕심을 줄이라는 ‘과욕寡慾’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작은 나라 적은 백성, 즉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주장으로 발전시켰다.


장자는 노자에 비해 훨씬 더 염세적이다. 시비도 없고, 성공과 실패도 없고, 생사도 없는 일체 허무를 주장한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극단적 방임이자 극단적 소극으로 요약된다. 이 사상은 경제와 상업에 그대로 반영되어 “상인에게 시장의 볼일이 없으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일체의 적극적 경제 활동을 부정했다. 그러면서 “재물이 모이기 때문에 다툼이 벌어진다”고 했다.


상인의 작용과 화폐의 교환가치를 인정한 묵가

묵가는 상품 교환과 상인의 역할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모든 물자는 상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유통될 수 없다고 봤다. 따라서 교통 발전을 통해 멀리 있는 물자까지 운반하여 백성의 편의를 돌봐야 한다고 했으며 이에 상인이 이익을 추구하는 심리를 긍정했다. 다만 묵가는 “남에게 손해를 끼쳐 자기가 이익을 얻는” 것에는 반대하면서 ‘교상리交相利’, 즉 ‘서로에게 이익이 돌아가게 하자’고 제창했다.


후기 묵가의 경제 사상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점은 상품 가격과 화폐 간 관계에 대한 인식이다. 묵가는 곡식을 예로 들고 있는데,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 곡식 값이 올라도 비싼 것이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법으로 정해진 화폐 가치는 불변이지만 곡식 가격이 그 해의 풍흉에 따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곡식에 대한 화폐의 구매력 또한 그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요컨대 묵가는 상품 가격의 높고 낮음은 상대적이며 화폐 그 자체도 상품으로 본 것이다. 이는 화폐를 교환의 매개로만 보는 인식에 비하면 한결 깊이 있는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제자백가를 대표하는 유가와 법가의 경제관

상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주장한 맹자

맹자는 산업에서 분업과 교환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이 문제를 소극적으로 긍정하는 유가의 인식에서 한 걸음 더 발전한 것이다. 이런 맹자의 입장을 ‘통공역사通功易事’로 압축하는데, ‘서로 일을 나누어 하고, 있고 없는 것을 서로 교환한다’는 뜻이다. 이런 맹자의 관점은 앞서 살펴본 농가와의 논쟁에 잘 반영되어 있다. 자신의 주장을 적극 개진하기 위해 “만 호나 되는 나라에 그릇을 굽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다면 일이 되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즉, 맹자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물품 생산의 수량과 이를 필요로 하는 수요의 수량이 적당하게 비례해야만 비로소 사회생활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맹자는 이를 위해 상인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여 경제적 이익을 돌봐줘야 한다고 했다. 상인세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 대표적인 주장이다. 세금이 줄면 상인이 물품 운반에 드는 비용을 줄일 수 있으며, 이는 상품 판매 확대로 이어져 상업의 이윤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맹자가 상인의 이익만을 내세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상업을 투기 목적으로 삼는 투기상과 무조건 이익만 올리려 드는 탐욕스러운 상인 ‘탐고’를 배척했다. 또 교묘하게 가격 담합 따위로 폭리를 취하여 시장을 농단하고, 이를 통해 얻은 부정한 돈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차지하여 농민을 파산시키는 상인을 철저하게 배격했다. 이 부분은 맹자의 상업관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대목이다.


‘농본공상말’의 구호로 상인을 억제한 한비자

경제 사상이란 면에서 한비자의 인식은 비교적 좁다. 그가 제기한 견해들은 대단히 예리하지만 때로는 일방에 치우쳐 있다. 특히 상업과 상인을 보는 그의 관점이 몹시 두드러지는데, 특히 ‘오두’로 대변되는 상인에 대한 천시가 그렇다. ‘오두’란 다섯 종류의 좀벌레, 즉 해충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한비자는 ‘농본공상말農本工商末’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는데, 이는 한비자가 가장 먼저 내건 것이다. 말 그대로 ‘농업은 근본이고 공상업은 말단’이라는 뜻이다. 이 구호 아래 한비자는 말업인 상업과 상인을 억제해야 한다는 ‘억말抑末’과 ‘억상抑商’을 외쳤다.


큰 사상가로서 한비자가 이렇듯 상공업과 상인을 격렬하게 공격했지만, 그렇다고 상업의 사회적 기능을 완정한 부정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상업 유통의 작용, 그리고 타지에서 온 상인의 역할과 그 작용을 긍정했다. 또 수공업과 상업이 재정 수입을 늘리는 관계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주목할 점은 한비자가 제창한 ‘자리론自利論’이다. 이는 인간이 거의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계산 심리’를 인정한 것이다. 그는 ‘군주와 신하의 이익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일종의 매매관계와 같다고 인식했다. 이는 전국시대 상품과 화폐 관계의 발전이 이미 인간의 상호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를 반영하는 것으로, 따라서 한비자의 ‘자리론’에는 상품 경제의 흔적이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상공업 발전을 바라보는 한비자의 이런 편향되고 격렬한 비판은 주로 농업을 버리고 상업으로 내달리는 당시 풍조를 막아보기 위한 착안이었다. 여기에 법가의 선배 상앙이 진나라에서 실천한 농사와 전쟁을 병행하여 국가의 부강을 꾀한 경험을 충분히 본받은 결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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