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라시 한국사

   
김재완
ǻ
쌤앤파커스
   
16800
2018�� 02��



■ 책 소개

 

관점을 바꾸면 ‘다른’ 역사가 보이고,
관심을 가지면 ‘진짜’ 역사가 보인다!

 

남녀노소, 상하좌우, 친문반문까지 생생하게 즐길 수 있는 맛깔난 ‘진퉁’ 한국사 이야기. 승리자, 지배자, 남자 중심의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난 비범하고 유쾌한 역사 이야기 한 마당이 펼쳐진다. 실력으로 기득권 사회를 뒤흔들었던 여성들, 패배자로 기록되었지만 정의로써 시대정신을 이끌었던 영웅들, 모두가 외면했으나 불굴의 의지로 시대를 위해 헌신한 의인들, 그리고 한낱 ‘백성’이라고 표현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를 지탱할 수 있게 만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저자는 가면을 쓰고 양반 사회를 조롱했던 마당놀이의 이야기꾼 초랭이가 되어 ‘한국사’라는 맛깔난 상을 차려놓고 한 편의 질펀한 마당극을 펼친다. 자긍심 넘치는 역동의 고구려에서 즐거울 일이라곤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망국의 구한말까지,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고 너무 어렵게만 바라봤던 ‘역사’를 마치 한 편의 드라마로 엮어냈다.

 

■ 저자 김재완
저자 김재완은 16년차 노비이자 ‘역사 덕후’, ‘뒷골목 역사 보부상’. 1974년 곶감의 고장 상주에서 태어났다. ‘회사에 다니기 싫어서’ 생전처음 써본 역사 이야기가 〈딴지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되면서 ‘덕후몰이’ 중이다. “업로드 기다리다 현기증이 날 지경”이라는 독자들도 부지기수다. 2016년 1월, 새해 첫 출근 날부터 회사에서 좌천통보를 받고 강제로 새 인생 출발선에 놓였다. 그해 5월 제주 자전거 일주 여행기를 시작으로 겁도 없이 역사 글을 쓰기로 결심해, 우연히 가입한 재테크 카페에 역사 이야기를 올리며 소심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간을 보기 시작했다. 우연히 글을 본 독자 딱 한 사람이 올린 “온라인 판 설민석의 재림”이라는 칭찬에 도취되어 ‘오늘의 유머’에 글을 투척했으며, 올리는 족족 ‘베오베(베스트 오브 베스트 게시글)’로 선정되었다. 이듬해 2월 스스로 글쓰기에 상당한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책 출간을 결심했다. 아이폰 하나로 ‘집구석’에서 녹음한 ‘찌라시 한국사’도 비슷한 시점에 시작해, 팟빵 역사 분야 베스트에 오르는 등 청취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현재 의리의 아내와 “우리의 소원은 베스트셀러”를 외치며 퇴사 프로젝트를 본격 가동 중이다.

 

■ 차례
프롤로그 _“역사에 무관심한 대가는 저질스러운 권력에 지배받는 것이다”

 

제1부 * 【싸움의 달인】 전쟁과 외교
광개토대왕은 어떻게 성군이 되었나 _ 소금과 철, 그리고 백제
최전성기를 이끈 ‘균형외교’의 달인 _ 장수왕과 정복사업
살수대첩에는 ‘수공(水攻)’이 없었다 _ 을지문덕 장군과 고구려의 항쟁
고구려의 ‘스파르타쿠스’ _ 대조영과 발해의 번영
서희에게는 세계를 읽는 ‘눈’이 있었다_ 서희와 낙타전쟁
‘풍찬노숙으로 얻어낸 동북 9성 _ 별무반과 윤관
그것도 알고 싶다, ‘고려 미제 살인사건_’ 몽골 사신 저고여의 죽음

 

제2부 * 【모략자들1】 권력과 암투
“그놈의 분열이 문제유~” _ 백제 부흥운동의 남모를 속사정
‘기득권 킬러’에서 ‘그냥 킬러’로 _ 강한 남자, 고려 광종
권력에 눈이 먼 악녀인가, 당찬 여장부인가_ 고려의 걸크러시 천추태후
두 이모와 결혼한 꼭두각시 왕_ 이자겸의 독재와 몰락
‘다큐 3일’, 이유 있는 반란_ 무신정변, 그 피의 기록
권력의 파수꾼인가, 백성의 충신인가 _ 삼별초의 두 얼굴
‘부끄러운 권좌’를 위한 부자의 혈투_ 원나라와 그 부역자들
신돈은 공민왕의 ‘아바타’였나_ 공민왕과 신돈

 

제3부 * 【모략자들2】 왕의 사람들
“가족은 무슨 가족? 인정사정 볼 것 없다!”_ 로열패밀리 단종 잔혹사
어둠의 서막, 연산군 비긴즈 _ 인수대비의 인생 역정
연산군과 ‘흥청망청’의 역학 관계 보고서_ 연산군과 임사홍
조선판 간첩 조작 사건, 기축옥사_ 송강 정철의 두 얼굴
극한 직업, 광해의 이복동생으로 살아가기_ 광해와 그 형제들
반정공신의 ‘이유 있는’ 반란 _ 이괄의 난

 

제4부 * 【팩트 체크1】 반전의 야사
메이드 인 신라, 최종 병기_ 구진천의 노(弩)
“신사임당, Who? 나 허초희야!” _ 천재 시인 허난설헌
《토정비결》의 원작자는 누구인가 _ 토정 이지함과 애민정신
만약 임꺽정이 ‘BJ’가 되었다면 _ 임꺽정의 투쟁
우리가 ‘차카게’ 살아야 하는 이유_ 조선의 200년 난제, 종계변무
“나는 세상과 타협할 수 없다!”_ 어쩌면 기인, 허균의 일생

 

제5부 * 【팩트 체크2】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
이런 재벌이라면 얼마라도 좋다 _ 탐라의 거상 김만덕
‘월드클래스 명작’이 살아남는 법 _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새드 엔딩’으로 끝난 조선판 신데렐라 스토리_ ‘안동 김씨 공화국’의 불행
조선판 ‘프랑스 혁명’은 왜 좌절되었나_ 동학농민운동의 시작과 끝
르뽀, 급박했던 46시간의 기록 _ 갑신정변의 주역들
명성황후에게도 비선 실세가 있었다 _ 무당 진령군
우리에게, 이토록 위대한 자 있으랴_ 안중근 의사를 기리며
조선에도 ‘잔 다르크’가 있었다면 _ 정정화 지사의 회고

 

에필로그 _ 기록 이면에는 ‘다른’ 역사가 있습니다  




찌라시 한국사


전쟁과 외교

살수대첩에는 ‘수공(水攻)’이 없었다 _ 을지문덕 장군과 고구려의 항쟁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612년)은 수나라의 병사들이 강을 건너려고 할 때, 고구려군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둑을 터트려, 30만 대군을 수장시킨 전쟁으로 알고 있잖아.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포크레인 같은 건설장비도 없이 그 엄청난 양의 물을 담을 댐이나 보를, 게다가 전쟁 도중에 만들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아.


‘살수’라는 이름 자체가 왠지 물을 이용해서 죽였다는 의미가 포함된 거 같지만, 살수(薩水)는 단지 지명일 뿐이야. 결정적으로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으로 30만 대군을 수장시킬 수 있는 강폭도 수심도 갖고 있지 않아. 게다가 겨울이었으니 얼어붙기까지 했겠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력의 대군을 이긴 데에는 자연의 힘을 이용한 신묘한 전술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어.


이런 추측을 하게 된 배경에는 국내에서 이순신 장군급 네임 밸류를 가진 미스터리한 남자, 을지문덕 장군의 뛰어난 전쟁 수행 능력도 한몫을 했을 거라고 봐. 을지문덕 장군이 왜 미스터리하냐고?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지만,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조차 기록이 없어. 심지어 어떤 관직을 수행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으니 말 다했지.


이번 이야기의 악역을 담당한 수나라는 약 400년 가까이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해 왕조를 막 세운 상황이었어. 주위에 모든 나라들이 수나라에 머리를 조아리고,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는데 단 한 나라 고구려만이 도도하게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로 버티고 있었던 거야. 이때 고구려의 왕은 영양왕인데, 수나라에게 고개만 숙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바로 턱밑인 요서지방에 대한 선제공격까지 감행해. 여기에 수나라가 100만 대군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장면이 등장해.


수나라는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특히 돌궐족의 통제와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어. 왜냐고? 만만치 않은 군사력을 가졌으니까. 수 양제가 관리 차원에서 휘하 돌궐 지역에 순방을 했을 때였어. 암행 순시 차원에서 들른 돌궐 청사에 고구려 외무부 장관이 와 있는 걸 수 양제가 목격을 한 거지. 신경 쓰이는 만만찮은 둘이 모여서 쑥덕거리고 있으니 짱일지라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야.


수나라의 전투병만 100만 명이야. 고대 지상전에서는 보급부대가 반드시 따라와야 해. 전투도 해야 하지만 생활도 해야 해. 여기에 공병대에 운송 부대원까지, 전투병 100만 명이 이동하려면 뒤를 받치는 인력도 엄청나게 필요했다고 해. 저 당시 고구려 인구가 300만 명으로 추산되니, 작은 나라 전체가 움직인 거야.


그들은 엄청난 위용을 뽐내며 요하강 앞에 이르러 부교를 설치해 도강한 후 요동성 앞에 불개미 떼처럼 도열을 해. 그런데 말이야. 이 요동성이 100만 대군 앞에서도 함락이 되지 않아. 거기에는 고구려의 기가 막힌 작전이 있었어. 그 작전이란 다름 아닌, 수나라 공격에 대해 어느 정도 방어를 하다가, 항복 선언을 해버리는 거였어.


“이보라! 수나라 장군. 우리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다. 항복할 테니 고만하자.”

“고뤠? 잠시만 기대리라 해. 우리 황제한테 가서 여쭤보고 오겠다 해. 근데 처소까지 가는 데 3일, 오는 데 3일 걸리니 딱 일주일만 기다리라 해.”

“알았으니 날래 갔다 오라우.”


수 양제의 재가를 받고 수나라 연락병이 다시 돌아왔는데, 고구려가 말을 싹 바꿔버려.

“이보라, 우리 너네 황제 전갈 기다리는 동안 맘이 바뀌어버렸어. 다시 앙칼지게 싸우기로 했으니 항복 취소야. 지금 이 시점부터 다시 전쟁 개시야. 화살 날아가니 날래 잘 피하라우.”


전쟁이 다시 시작되고, 고구려군은 힘이 떨어질 만하면, 다시 위장 항복을 반복해. 참으로 비효율적인 과정을 서너 차례 더 반복하고 이런 공방전이 석 달이 넘어가니 제 풀에 지친 수나라군은 요동성 함락을 포기해버려. 이제 수나라는 ‘플랜 B로 급격하게 방향을 선회해. 바로 30만 별동대를 조직한 거지. 수도 평양성을 타격하기로 한 거야. 근데, 보급부대 없이 순수 전투병력만 가게 되니, 전투요원이 식량을 메고, 이고, 지고 가는 상황이야. 진군속도도 당연히 느려졌어. 기록에 따르면 군장의 무게가 80킬로그램 가까이 되었다고 해. 이러니 평양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탈영병이 속출하고, 병사들이 굶어 죽거나 과로사할 판이야.


이렇게 어렵게 평양성에 도착한 수나라의 별동대는 통곡의 벽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벽은 바로 을지문덕 장군이야. 을지문덕 장군은 요동성을 지켜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치고 빠지는 전술을 시현하셔.


“이보라우. 니들도 명분이 있어야 철군을 할 테니, 우리가 항복하는 퍼포먼스를 해주갔어. 그러니 날래 고구려 땅을 벗어나라우.”


이건 그야말로 말이 항복이지 마지막 경고나 다름없었어. 수나라군은 굴욕적으로 을지문덕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철군을 시작해. 하지만 이대로 적을 보내면 재정비 후 다시 돌아올 것은 삼척동자도 예상 가능한 일이야. 고구려군은 사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패잔병들을 추격하여 살수에까지 이르렀어. 사방이 탁 트인 강 주변에서 충분한 시야를 확보하고 도강하는 수나라 병사들을 공격하니 30만에 이르던 별동부대원 중 2,700여 명만이 살아서 수나라로 돌아갔다고 해. 우리 역사에 남을, 아니 세계 전쟁사에 한 획을 그은 어마어마한 승리야.



왕의 사람들

극한 직업, 광해의 이복동생으로 살아가기_ 광해와 그 형제들

1602년, 선조(재위 1567~1608)는 51세의 나이에 19세 신부 인목대비를 맞이해. 선조는 후궁들에게서 낳은 자식들은 많았지만, 정작 정비에게서 낳은 자식이 없었어. 하지만 그의 주치의가 누구야? 바로 허준이야! 그래서일까? 선조는 51세의 나이에 허니문 베이비를 만들었고, 이에 온 조정의 희비가 교차해. 선조는 마냥 신났고, 인목대비 라인은 광해군 측의 눈치를 보면서 숨죽여 기뻐했어.


당시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인 29세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개고생은 혼자 다 했는데 적장자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지위가 흔들린다는 것이 몹시 짜증나는 일이었을 거야. 이런 어수선한 와중에 인목대비가 첫 아이를 무사히 출산하던 날, 양쪽의 희비는 엇갈려.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명공주(貞明公主)가 태어났기 때문이야.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은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고, 싱글벙글 웃으며 “경하드리옵니다, 마마!”라는 진심(?)어린 축하를 보냈다고 해.


3년이 지나 선조는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드디어 왕자를 보게 되었어. 정명공주의 친동생 영창대군이 태어난 거야. 광해군 진영에서는 난리가 났어. 혹시라도 왕위 계승 자리를 빼앗길까 봐 두려웠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어.


1608년, 그러니까 정명공주가 여섯 살, 영창대군이 세 살이 되던 해에 선조는 재위 41년 만에 승하하게 되었어. 임종 시에 그가 광해군과 7명의 최측근 대신에게 남긴 유언은 광해군의 인내심을 임계점에 이르게 했어.


“세자는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하라.”

“대신들아, 영창대군이 너무나 어려 걱정이 많아 내가 눈을 감을 수 없구나. 니들이 광해로부터 잘 지켜주기 바란다. 이상.”


광해군은 자신보다 어린 아버지의 정실부인 인목대비와 그녀의 자식들인 영창대군, 정명공주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의 15대 왕으로 등극을 했어. 이날을 기점으로 갑과 을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었지. 그때부터 인목대비는 살아남기 위해 어린 남매를 데리고 광해군에게 문안 인사를 갔다고 해. 아래 일화는 인목대비의 측근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계축일기>에 나오는 내용이야.


“전하! 영창대군, 정명공주가 문안 인사 드리옵니다.”

“오셨습니까? 대비마마. 이런 정명공주가 그사이 참으로 많이 컸구나. 이리 와보거라.”


광해군은 인목대비에게는 최소한의 예의만 갖추고, 정명공주는 얼굴도 쓰다듬어주며 참으로 예뻐했다고 해. 반면 영창대군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자 인목대비가 어린 영창대군을 슬쩍 광해군에게 떠밀어. 하지만 광해군이 냉담한 눈길만 주니 어린 영창대군은 급기야 울음을 터트리고 말아.


“으앙~ 주상 전하는 어찌하여 누님만 예뻐하십니까! 어머니, 저도 다음 세상에는 형님의 사랑을 받게 여자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는 인목대비는 얼마나 불안했겠어? 한편으로는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어린 동생에게 풀어야만 하는 광해군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을 것 같아. 하지만 이들은 로열패밀리잖아.


결국 일은 터졌어. 살얼음판 같은 긴장관계가 이어지던 1613년 3월, 조정에 역모가 보고되었어. 그런데 역모의 주모자가 정명공주의 외할아버지, 즉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계남이라는 보고가 입수되었어. 보고가 접수되자마자, 광해군은 관련자를 처벌하고 바로 이듬해 여덟 살이 된 영창대군을 귀양지에서 가차 없이 죽여. 연이어 인목대비는 후궁으로, 그렇게 예뻐하던 정명공주는 심지어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덕수궁에 유폐시켜버려.


그래도 두 모녀는 어찌어찌 살아가고,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정명공주가 스물한 살이 되던 1623년 음력 3월 어느 날, 한 무리의 군사가 야심한 밤에 이 모녀의 집에 들이닥쳐.


“대비 마마, 안심하십시오. 저희는 능양군의 명을 받들어 대비 마마를 궁으로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어서 궁으로 납시어 광해군의 폐위에 결재 도장을 찍어주십시오.”


그랬어. 이 밤의 소동은 능양군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인조로 즉위하는 그 유명한 인조반정이야. 인조는 그녀가 대비로 복귀하면, 왕실의 어른 자격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새 왕으로 지명할 수 있었던 형식적인 결재권을 가지고 있었어. 인목대비도 아들에 대한 복수도 하고, 자신의 자리도 찾게 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그런데 인조가 즉위 4일 만에 한 일이 뭔지 알아? 그건 바로 정명공주 시집보내기야. 인조는 명분 없는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인목대비에게 온 정성을 다했어. 새 임금이 눈에 불을 켜고 쪼아대니 담당자들은 팔도를 이 잡듯 뒤지면서 부마 찾기에 나섰어.


성명 : 홍주원

나이 : 18세. 요즘 대세인 연하남. 정명공주보다 세 살 연하

아버지 :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

외모 및 학력 : 트렌드에 꼭 맞는 꽃미남에 명석한 두뇌를 갖춘 엄친아

단점 : 이미 정혼자가 있음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서 인조가 잠시 망설이는 눈빛을 보였지만 못 들은 척 하며, 혼례를 진행하라고 해. 인조는 혼수 토탈 풀 패키지와 함께 궁 옆에 살림집을 차려줬다고 해.


호화로운 결혼으로 유년시절의 불행을 보상받은 정명공주에게 또 다시 위기가 닥쳐와. 그것도 하나가 아니야. 어머니 인목대비가 인조 10년인 1632년에 49세를 일기로 운명을 달리했어. 두 번째 불행은 인조의 건강 악화로부터 시작돼. 인조는 건강이 갑자니 나빠지면서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어. 내가 강탈한 왕좌를 누군가 또 강탈하지 않을까?


인조는 인목대비 사망 후 본격적으로 정명공주를 달달 볶았어. 인조의 등쌀에 정명공주는 정치에 대해 어떤 욕심도 없다는 의사 표현으로 일체의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집에서 오직 바느질과 살림에만 열중했다고 해. 바로 자신의 자식 7남 1녀를 지키기 위해서였어.


불행의 결말은 인조가 먼저 숨을 거둠으로써 마무리되었어. 오래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란 것을 몸으로 증명한 정명공주. 정명공주는 이 작은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인조 사망 후 36년을 더 살고 83세에 숨을 거두셔. 압도적인 그녀의 승리야. 이로써 조선 시대 최장수 공주의 타이틀 홀더는 정명공주가 된 거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

우리에게, 이토록 위대한 자 있으랴_ 안중근 의사를 기리며

우리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알고 있나? 걸 그룹 멤버들의 ‘긴또깡’ 발언에 대해 한숨만 쉬고 앉아 있기엔 사태가 너무나 심각해. 많은 어린아이들이 윤봉길 의사와 기억을 믹서기로 돌려. 안중근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진 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고 해.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공부해야 하고, 모든 걸 버리고 희생한 분들을 제대로 공부해서, 그들의 넋이라도 달래드려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자주 접하게 되는 안중근 의사의 생전 사진은 감옥에 계실 때이니 100년도 전의 사진이야. 그렇게, 수척하고 피곤해 보이는 사진을 보고, 안중근 의사께서 가난한 집안에서 독립운동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기 쉬워.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셨어. 할아버지가 곡식 도매업을 크게 하셔서, 3대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해.


아버지가 무관 출신이었던 영향도 있겠지만, 안 의사님은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다고 해. 사냥꾼들 사이에서도 명사수로 유명하셨다고 하니, 100년 전의 구식 권총으로도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성공하신 거겠지! 도마 안중근의 ‘도마’란 칭호가 세례명 토마스의 한문식 표기라는 걸 아는 사람이 의의로 많지 않아. 사실 안중근 의사를 약간 배우 마동석 느낌의 행동파로 아는 분들도 있는데, 한학은 물론이고 외국 신부들을 통해 국제 정세에 대해서도 그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계셨어. 조선의 백성들이 많이 배워야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 사업에도 많은 투자를 하셨어. 돈은 이렇게 쓰는 거란다.


게다가 안중근 의사는 뛰어난 명필이셨어. 감옥에 계신 짧은 기간 동안, 감옥의 간수는 물론이고, 그를 호송하던 호송병 포함 일본의 부자들이 안중근 의사의 글씨를 한 점 받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하니 그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만해. 믿기지 않겠지만 일본 간수가 받아간 글 중엔 독립이란 글씨도 있었다고 해. 일본인이 이런 글도 좋다고 받아갈 정도로 명필이었던 거고, 양심적인 일본인은 그 뜻을 아니까 더욱 소중히 간직했던 거야. 이 글을 간직한 일본인은 정부에 걸리면 사상범으로 처벌받았겠지만, 그래도 글씨 하나 더 받아가려고 난리였다니, 이분의 능력치는 어디까지인 건지.


그런데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우리나라에는 가묘만 있는 거 알고 있나? 안 의사의 이토 저격은 이 당시 전 세계적인 이슈였고, 조선 백성들에겐 이순신 장군급 인기와 명성을 그에게 안겨주었어. 그런데 일본 입장에서 이런 분의 유해를 조선에 돌려주고, 묘지가 세워진다면? 그곳은 명동성당이나 광화문 광장 같은 상징적 의미가 부여될 게 뻔한 거였지. 일본은 두려웠던 거야. 죽은 안중근조차도.


여기서 안 의사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가 누군지 살짝 보는 것도 좋을 듯 해. 이토의 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가 하급 무사 집안의 양자로 신분 세탁을 하면서, 자동적으로 신분이 상승했어. 그는 21세가 되던 해에 영국으로 유학을 갔어. 귀국 후에는 통역가로 활동하며 입지를 넓혀갔어. 29세에는 미국의 화폐와 은행 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3년간 떠났어. 마침내 40세에는 1인자로 올라서게 되고, 그 더러운 야욕을 본격적으로 실행해. 이 인간은 일본 제국주의의 선봉장으로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전체를 침략하기로 결심했어. 한마디로 일본판 히틀러였던 거야.


때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 1번 출구. 이토가 VVIP급이잖아. 그의 주변은 경호도 삼엄했고, 다음 이동 경로도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어. 그래서 암살 팀에서는 여러 가지 일정 변경과 동선의 변수에 대비를 해야 했어. 이에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기다리고, 부하인 우덕순은 만일을 대비해 차이차우 역에서 가슴에 권총을 품고 기다렸던 거야.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순간 기차는 차이차우 역을 그대로 지나치고, 이토가 안중근 의사의 손바닥으로 기어들어온 거지. 안중근 의사는 히틀러급 인물의 암살을 거의 혼자 힘과 돈으로 준비하셨다고 해.


마침내 안중근 의사께서 이토를 저격하고, -도시락 폭탄 아닙니다- 스스로 의연하게 직접 자수하려고 하셨으나, 근처에 있던 일본 군인들이 무지막지한 구타 후 연행했다고 해. 이후 그는 감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를 꾸짖으시면서 너무도 의연하게 대처를 하시니, 일본 정부를 포함한 세계가 그 기백에 혀를 내둘렀다고 해. 하시는 말 모두가 이치에 맞으며, 박식한 지식에서 나오는 논리 정연한 주장에 일본인 법관조차 놀라 자빠졌던 거지.


안중근 의사가 사형 집행 전 품속에 가지고 있었던 것은 태극기가 아니었어. 실망했나? 태극기 대신 가지고 있던 건 부인 김아려 여사와 두 아들의 사진이었다고 해. 안중근 의사는 타고난 부와 그 부로 인해 남들보다 조금 더 배울 기회를 얻었지만, 자기 가족의 안위보다 더 많은 조선 백성들의 삶을 위해 꽃길을 버렸어. 하지만 그도 인간이기에 부인과 아들이 눈에 밟혔던 거야. 자신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걸 알고, 다시는 아들과 부인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대의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잖아.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무명지(왼쪽 넷째 손가락)가 없는 안 의사의 손 사진은 단지 동맹을 결성하시고 나온 결과물이야. 이건 감옥에 계시기 전의 일이야. 본인 포함 11명의 사람들과 손가락을 자르고, 그 피로 ‘대한 독립’을 쓰셨다고 해. 동맹의 베스트 11 라인업은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 태생이 비밀 결사였고, 안 의사가 모진 고문에도 단 한 명의 이름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야.


안 의사의 이런 기개는 모전자전이란 말로 설명이 가능할 듯해. 모친 조마리아 여사께서 안중근 의사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를 끝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해. 조마리아 여사님도 독립운동 투사였고, 마리아는 세례명이야. 편지 내용으로 유추해서 인생 살 만큼 사신 할머니가 무덤덤히 쓴 편지라고 생각하지는 마. 조 여사님은 18세에 결혼했고 장남 안중근의 사형일을 눈앞에 두셨을 때, 본인 나이도 49세에 불과하셨어.


아들에게.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로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