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 이야기

   
사이먼 하비(역:김후)
ǻ
예문아카이브
   
20000
2016�� 10��



■ 책 소개

 

낭만과 반역 그리고 권력의 역사
교역 금지품 7세기 역사로 밝히는 세계사의 이면

 

그동안 한 번도 다뤄지지 않았던 주제의 책이 나왔다. 주인공은 ‘밀수’다. 15세기 대항해 시대부터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밀수’를 키워드로 세계의 변화와 흐름을 설명한다. 대항해 시대의 실크·향신료·은에서부터 제국주의 시대의 금·아편·차·고무를 거쳐 현대의 코카인·헤로인과 아프리카의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이르기까지 7세기 동안의 광활한 여정이 펼쳐진다.

 

이 책에서 다루는 밀수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뿌리째 뒤흔든다. 역사의 은밀한 주역 ‘밀수’를 통해 세계 무역의 변화와 문명의 확산, 패권의 향방을 추적해나간다. 세상 모든 곳을 비춘 ‘가장 어두운 것에 관한 탐험’이자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또한 인류의 진보와 세계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가 한편으로 어떻게 이뤄지게 됐는지 살피면서 역사를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얻게 된다.

 

이 책에는 다양한 밀수품과 더불어 수많은 ‘밀수꾼’이 등장한다. 그 중에는 우리가 ‘위대하다’고 여겨온 인물들도 많이 있다. 그들이 왜 밀수꾼의 길을 걷게 됐는지 살피는 것도 흥미로운 체험이다.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무역 전쟁의 비사와 드라마틱하게 구성된 풍성한 이야깃거리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세계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깊은 지식도 얻을 수 있다.

 

■ 저자 사이먼 하비
저자 사이먼 하비Simon Harvey는 노르웨이 트론헤임대학교(University of Trondheim) 역사학·미술사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Goldsmiths College)에서 미술사학을 강의하고 있다.

 

학부 시절부터 역사적 유물과 골동품 예술 작품에 관심이 많아 주의 깊게 살피던 중 세계 유수 박물관에 전시된 대다수의 유물이 약탈과 밀수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사실에 주목하고 본격적으로 밀수를 연구하게 된다. 이후 2005년 런던대학교(University of London) 대학원에서 밀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이 분야에 관한 연구를 심화해오면서 학계로부터 “교역 금지품의 역사를 새로운 학문으로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6년에는 런던 컨소시엄(London Consortium)에서 ‘국가를 범죄로 몰아가는 밀수(Smuggling the State into Transgression)’라는 내용으로 발제한 바 있다.

 

이 책은 사료 조사와 분석에만 머물지 않고 하비 교수가 직접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서인도 제도, 남중국해, 동인도 제도, 인도차이나 반도, 북아프리카 등을 취재하면서 밀수의 발자취를 추적한 결과물이며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 중이다.

 

■ 역자 김후
역자 김후는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대우그룹 기획조정실 및 대우조선과 대우통신에서 일했다. 이후 인문·역사 독립연구가로서 역사·철학·문화·정치·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바탕으로 저술 및 번역 활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활이 바꾼 세계사』(제43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수상작)와『불멸의 여인들』 『불멸의 제왕들』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전쟁 연대기』(전2권)와 『몬스터 스토리』(전5권) 등이 있다.

 

■ 차례
이 책을 읽기 전에
들어가며 낭만, 반역, 권력

 

제1부: 밀수와 탐험
제1장 위대한 야망_대항해 시대의 밀수
탐험이 된 밀수|밀수의 카리브 해|식료품의 왕, 후추의 지배자|포르투갈의 헛된 노력|뛰는 스페인, 나는 밀수|메넨데스와 호킨스|존 호킨스의 밀수 모험|해적 사냥꾼

 

제2장 독점_향신료 제도와 남중국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얀 피터스존 쿤|향신료 제도의 네덜란드인|잉글랜드인들의 활약|런 섬 이야기|독점이라는 맥락|남중국해의 캡틴 차이나

 

제3장 밀수의 바다_카리브 해와 은의 강
네덜란드의 소금 밀수|프랑스의 밀수꾼들|영국 제국의 밀수 사업|모험 이야기의 주인공들|불법 담배|은 그리고 세계 경제의 탄생|독점 체제의 삼투 현상|밀수되는 사치품들

 

제4장 밀수의 사막_스페인 제국의 영토
과히라 반도의 문학 상륙|표류와 기회|새로운 밀수품 지도|석탄과 소금|있어도 없는 밀수|전설의 밀수꾼들|밀수가 만들어낸 문화

 

제5장 밀수품의 맛_전세계로 불어오는 밀수의 바람
밀수품에 열광하는 부르봉 왕국|말뿐인 법령들|라이벌들|파라과이 주식회사|브라질 연결망|몰려드는 밀수선|대륙을 넘나드는 밀수|피에르 푸아브르의 업적|또 다른 옮겨심기

 

제6장 혁명과 저항_밀수가 전한 사상들
밀수와 혁명|검은 책들|사상의 밀수|밀수의 품격|밀수의 페르소나

 

 

제2부: 밀수의 제국
제7장 해적과 애국자_영웅이 된 밀수꾼들
밀수꾼 애국자|왕실의 비호|정부의 이중성|신세계가 가져다 준 기회|바라타리아의 지배자|기회주의적인 애국심|실패한 유토피아

 

제8장 통상적인 사업_나폴레옹의 대 영국 밀수 작전
기니 런의 꼼수|밀수 도시|영리한 전술|가끔 우러나는 충성심|존경받는 밀수꾼들|양다리|기니 런의 반전

 

제9장 밀수로 채워지는 세계_라플라타에서 홍해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프러시아의 왕|무기 밀수꾼 랭보

 

제10장 어둠의 제국_아편에 중독되는 중국
양귀비의 눈물|중무장 자유무역|아편 밀수의 최전선|몸부림치는 중국|전쟁 준비|제1차 아편 전쟁|일상이 된 사업|제2차 아편 전쟁

 

제11장 복원과 저항_너무 많은 아편, 너무 적은 차
손댈 수 없는 곳|인도의 아편 밀수|아편 배달원|차 한잔의 반향|차만 가져온다면|이식되는 차

 

제12장 산업 혁명_노예, 기나나무, 고무, 제조업
불법적인 미국의 산업 혁명|노예무역과 제조업|기나나무 밀수 프로젝트|이식되는 나무|고무 왕국|헨리 위컴의 고무 여행|이식되는 고무|밀수와 제조업

 

 

제3부: 밀수하는 세계
제13장 문화의 밀수_약탈당하는 보물들
유물 밀수꾼|자랑스럽게 전시되는 도굴품|강박관념과 특권의식|트로피 여단

 

제14장 나리들의 탈출_인간 밀수의 흑과 백
혜성 작전|F 통로|게슈타포 탈출 작전|또 다른 나리들|어둠의 전파|스위스의 진정한 중립|로마의 길

 

제15장 암시장_가격만 맞으면 무엇이든
백마장 호텔|고매한 약탈품|가짜들의 반란|세계화의 일부|시스템 D|전세계의 암시장들|비공식 경제가 공식 경제를 만날 때

 

제16장 남쪽에서 남동쪽까지_하늘을 나는 마약
하늘에 세운 밀수의 회랑|황금의 삼각 지대|공수되는 마약들|아편항공|베트남 공군의 마약 밀수|라오스의 마약 수송기|1967년 아편 전쟁|무엇이든, 어디든, 언제나 실어 나르는 항공사|비밀 전쟁|에어아메리카

 

제17장 냉전 시대의 밀수_중앙아메리카의 폭풍 속으로
아메리카에 차려진 마약 밥상|실뜨기 놀이와 콘도르 작전|범죄 조직의 항공 연결망|콘트라 반군|미국의 계획|마약 기지|그 비행기에 그 마약|다시 찾아온 마약-게릴라의 유령

 

제18장 밀수품 전쟁_미국의 사업과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밀수로 만든 나라 미국|독립 전쟁의 밀수|남북 전쟁의 밀수|다이아몬드 밀수꾼들|지역의 문제에서 세계의 문제로|다이아몬드가 나오는 저주|썩은 국가 타락한 개인|피 흘리는 아프리카의 뿔

 

나오며_끝나지 않은 거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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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이야기


밀수와 탐험

위대한 야망_대항해 시대의 밀수

탐험이 된 밀수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 선장은 1488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희망봉을 돌아 오늘날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속하는 그레이트 피시(Great Fish) 강에 도착했는데, 이는 그가 원래 목표로 한 콘트라코스타(Contra Costa)보다 수백 킬로미터 더 항해한 셈이었다.


그런데 이때 디아스 선장의 진짜 목적은 바로 밀수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 항해는 당시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인도 서부의 구자라트(Gujarat), 말라바르(Malabar), 이집트의 맘루크(Mamluk), 베네치아의 굳건한 아성을 흔들기 위함이었다.


밀수와 탐험이 겹쳐질 때 단기적 이익만을 탐한다는 시각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밀수와 탐험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 때문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것'을 찾아내거나 시도하려는 욕망이다.


초기의 밀수 행위는 통제되지도 않았고 투기적이었으며 위험한 것이기도 했지만, 정부와 권력기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밀수는 세계 질서가 새롭게 세워지는 가운데 독점 체제를 구축하는 것에 대한 대응 세력으로서 밑바닥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밀수 효과는 잠재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결정적일 수 있는지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밀수는(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경제적 측면에서 결정적인 교역 금지품의 은밀한 재분배 과정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품목에는 향신료뿐 아니라 은, 아편, 차, 고무, 다이아몬드 등이 포함돼 있었으며, 여기에 예술 작품과 과학 기술까지 추가돼 전 세계의 지정학적 환경을 변화시켰다.


식료품의 왕, 후추의 지배자

포르투갈은 프랑스인들이 '식료품의 왕(Grocer King)'이라고 불렀던 마누엘(Manuel)의 섭정 시대에 재빠르게 움직여서 자신들 선박 화물칸에 향신료를 가득 채웠으며 그들의 왕은 곧 '후추의 지배자(Pepper Potentate)'라는 별명도 얻게 됐다.


포르투갈로서는 향신료 경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끝까지 저항한 캘리컷(Calicut)을 제외하고 인도 말라바르 해안에 위치한 항구 코친(Cochin), 칸나노르(Cannanore), 퀼론(Quilon)을 굴복시킨 때인데, 이후 450년 동안 지속될 식민지를 고아(Goa)에 세웠으며 알폰소 드알부케르케(Alfonso d'Albuquerque)가 1505년에 말라카를 들이쳐 정복했다.


경쟁은 끝났거나 끝난 것처럼 보였다. 1522년 포르투갈은 북부 몰루카 제도의 정향, 남부 반다 제도의 육두구와 메이스, 인도 및 스리랑카와 그 동쪽의 모든 계피에 대한 독점권을 선언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향신료 경쟁이 끝나고 이 지역에 끼어드는 다른 세력들의 밀수(탐험) 선박에 대해서 압류권을 행사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독점은 1539년까지 겨우 17년 동안 지속됐으며, 더구나 초기부터 구멍이 많이 뚫려 있었다. 포르투갈이 자신들의 가까운 라이벌인 스페인을 초기에 앞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을 초강대국으로 만들게 될 아메리카 대륙의 금과 은이 그때까지는 세비야 항구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밀수의 바다_카리브 해와 은의 강

밀수는 위험천만한 사업이었으며, 스페인인들은 잉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밀수꾼들에 대한 비정한 박해자들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라틴아메리카 주민들은 이때까지도 밀수품 교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밀수꾼들이 만사니요에 입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점잖은 밀수의 형태는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불과 몇 년 만에 공식적 교역 금지품 거래라는 밀물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스페인 세비야로부터의 앙갚음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중에도 어떻게 해서 카리브 해가 비공식적인 교역의 거대한 연못으로 변화할 수 있었을까? 이야기는 소금으로부터 담배를 거쳐 은으로 이어지는데, 은이라는 품목이 추가되면서 밀수는 지역적인 규모에서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은 그리고 세계 경제의 탄생

16세기 스페인 출신의 사업가이자 발명가 바르톨로메오 데 메디나(Bartolomeo de Medina)가 수은을 사용해 은 광석으로부터 은을 분리해내는 아말감법(amalgamation)을 개발한 이후 은은 세계적인 중요 상품으로 떠오르게 된다. 1571년 은의 공업적 생산이 이뤄지자 생산성은 열 배 이상 뛰었고, 남아메리카 볼리비아 남부 포토시(Ptosi)에 있는 은광은 마치 엘도라도처럼 신화적인 부의 원천이 됐다. 그러나 이 역시 네덜란드의 향신료 독점 체제와 마찬가지로 '밀수'가 즉각적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은의 수요 곡선은 가파르게 치솟았다.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은 동아시아를 향한 제국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며, 은은 이제 국제 통화가 되기에 이른다.


은 밀수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그리고 소문은 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유통을 자극했던 유태인들이 연결망을 확보하고 있었다. 1558년부터 공식적으로는 독점 체제에 속하지 않은 포르투갈인들이 아메리카로부터 은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인들은 브라질을 경유해 포토시와 거래했고, 네덜란드인들로부터 구입한 각종 도구와 상품을 은과 교환했다.


그렇다면 밀수로 거래된 은이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이고 물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1697년에만 300톤가량의 은이 비공식적 경로, 즉 밀수로 멕시코 아카풀코(Acapulco) 항을 출발해 마닐라를 거쳐 인도와 중국으로 들어갔다. 16세기 동안 아메리카에서 생산된 은의 약 70퍼센트 정도가 스페인이 아닌 어딘가를 거쳐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서 유통됐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 인해 각국의 국제 수지가 굉장한 충격을 받았지만, 어쨌거나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경제(global economy)'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밀수되는 사치품들

카리브 해에서 밀수의 파도가 높아진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필요' 때문이었으며, '야생의 해안'에서 벌어진 담배 밀수나 네덜란드인들의 소금 밀수가 이에 해당했다. 소금의 경우 네덜란드의 상인들에게 필요했을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시급한 문제였으며, 밀수가 국가의 정책과도 연결돼 있다는 증거를 여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1599년부터 1606년 사이에 가속도가 붙은 금수품 교역은 1619년에 이르러 총량 기준으로 밀수를 허용한 아메리카의 교역량을 앞서기 시작했다. 카리브 해에서의 밀수 물량이 적법한 교역을 앞서는 상황은 18세기 중반까지 지속됐다.


밀수품의 맛_전세계로 불어오는 밀수의 바람

그런데 어떻게 해서 밀수가 전세계적인 현상에까지 이르게 됐을까? 이 이야기에는 늘 그렇듯이 권력과 영향력에 관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자유방임주의의 원리에 따라 경쟁 논리를 명분으로 내세운 이윤 창출을 위한 정책이 밀수 사업을 지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밀어줬다.


밀수품에 열광하는 부르봉 왕국

상인 길드 콘술라도는 불법적인 태평양 교역 배후의 원동력이었다. 고급 옷감과 의류, 가구, 보석류는 희귀한 생활용품과 함께 태평양에 면한 멕시코 아카풀코 항구로 흘러들었다. 1730년대에 페루 북부 피우라의 항구인 파이타(Paita)는 과야킬과 함께 이 지역 밀수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페루 왕국의 지배계급인 귀족들은 동양과 프랑스를 흠모해서 중국산 실크, 프랑스산 의류와 보석과 레이스 세공품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밀수는 이제 자기과시적 행위와 세련된 연기의 혼합체가 됐다. 한편으로는 현란함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밀수품의 과시 형태가 약삭빠르게 축소‧은폐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초기에 유행했던 은으로 만든 세공품 '쉐비시크(shabby-chic)'의 경우 은에 부과되는 스페인 제국의 세금을 회피할 목적으로 낡고 헤진 듯 보이게 가공했는데, 두들기거나 불에 그슬려 마치 낡아빠진 것처럼 만들었다.


페루의 18세기 밀수 역사는 이를 금지하는 일련의 오만한 법령들이 존재했다는 특징도 갖고 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 땅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이 밀수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파라과이 주식회사

밀수는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Asuncion)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 파라과이의 독재자였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Alfredo Stroessner)는 '파라과이 주식회사(Paraguay Incorporated)'를 위해 일하는 장군들을 통솔했다. 무기에서부터 주류, 자동차,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밀수품들이 파라과이를 경유했다.


18세기 내내 라플라타 강은 페루까지 이르는 밀수 산업의 거대한 깔대기였고, 반대 방향으로는 대량의 은을 강어귀 지역에 쌓아놓았다. 특히 포르투갈인들이 이 밀수 은을 유럽 전역에 실어 날랐으며 이곳에도 지역적인 밀수망을 확보하고 있었다.


브라질 연결망

라플라타 강 유역에서 온 가죽제품, 곡물, 식용유, 육류 등이 동쪽에서 온 브라질산 담배와 교환됐다. 포르투갈 산 주류도 거래 테이블을 차지했다.


아마존(Amazon) 지역에서도 밀수는 일찌감치 시작됐다. 17세기가 시작될 무렵 카르타헤나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상인이 스페인 마을에 밀수품을 공급하기 위해 아마존 강을 따라 엄청난 거리를 이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부자와 가난한 식민지 주민 모두가 밀수로부터 혜택을 입었다.



밀수의 제국

통상적인 사업_나폴레옹의 대 영국 밀수 작전

나폴레옹은 영국의 밀수꾼들을 일컬어 '끔찍한 인간들'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만약 16세기와 17세기에 인도네시아 바타비아(Batavia)나 아체(Aceh)의 소규모 정착지에 매달려 있던 영국 상인들(네덜란드가 통제하던 향신료 교역에서는 밀수꾼들)이었던 이들이 나폴레옹 1세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1810년 6월 15일 영국의 밀수꾼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하지만 소문은 사실이었다. 프랑스 제국의 칙령에 따라 됭케르크 항구가 활짝 열렸다. 곧이어 1811년 11월 30일에 나폴레옹은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적이던 이 '끔찍한 인간들'을 위해서 그라블린(Gravelines)에 있던 외국인 거주지에 '밀수 도시'를 세워줬다. 나폴레옹은 이른바 '기니 런(Guinea Run)'이라는 이상한 세계를 만들었다. 영국 금화로 자신의 용병들에게 급여를 지급한 것이다.


기니 런의 꼼수

나폴레옹이 영국의 금화, 그 중에서도 기니를 원했던 까닭은 프랑스의 외자 상환 능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며, 특히 대규모 용병 부대에 지급되는 비용을 감안하면 절실한 문제였다. 하지만 부수적으로는 제조업과 은행업을 성장시키면서 영국 경제에 타격을 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영국은 주기적으로 겪는 금화 수요 폭증에 대비해 금 보유량을 지키려고 했다.


그럼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은화 같은 통화 말고 하필이면 기니를 선호했을까? 우산 프랑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영국과 스페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 은화 공급이 원활치 못했다. 반면 기니는 이보다 확보하기가 용이했고, 18세기 말에 이 전쟁 때문에 각국 통화가 평가절하되긴 했지만 금의 함량이 높은 기니는 여전히 안정적이고 가치 있는 통화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밀수꾼들이 기니를 공급할 준비가 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다양한 밀수 문화가 형성돼 있던 터라 기니 런에 대해서는 수익률이 높은 편이었다.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황제가 더욱 기니 런에 의존했기 때문에 조건은 더욱 좋아졌지만, 초기부터 영국이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관세를 올리는 바람에 밀수에 대한 성과급이 이미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1810년 양국 경제가 함께 곤두박질치자 프랑스는 와인, 브랜디, 실크를 팔기 위한 영국 시장이 필요해졌다. 영국 역시 전쟁에도 불구하고 반강제적으로라도 수출 확장 정책을 밀고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는 밀수 시장이 어느 정도 용인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810년까지 영국 밀수꾼들은 프랑스의 많은 항구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으며 고향의 바다에서는 추적당하는 신세였다. 그들은 이런 항구를 피해 저지대 국가로 우회하거나 해협에서 중립국 선박에 밀수품을 옮겨 실었다.


존경받는 밀수꾼들

밀수꾼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 사회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세관만 피하면 그만이었다. 집단적인 밀수 문화의 미묘함은 꽤 난해하기는 하지만 전혀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며, 그 안을 잘 들여다보면 애국심이 우왕좌왕하는 인간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밀수꾼의 이미지가 '존경할 만한' 또는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경우의 참맛을 느끼려면 아이작 걸리버보다 더 나은 예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역사에서 걸리버는 '좋은 밀수꾼(good smuggler)'으로 기억되고 있다. 일단 그는 누구도 죽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전형적인 밀수꾼다운 영리함이 있었는데, 킨슨에 있는 세인트앤드류(St. Andrew) 교회 탑을 밀수품 창고로 활용했으며 묘지 한 군데도 이런 용도로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말년이 비참했던 다른 밀수꾼들과는 달리 백만장자가 돼서 은퇴했고 신자들을 대표해 교구를 이끌었으며 그 사회의 기둥이 됐다.


어둠의 제국_아편에 중독되는 중국

영국의 작가 마틴 부스(Martin Booth)는 《아편(Opium)》에서 아편 밀수꾼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들의 정부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사업을 하던 이 무역업자들은 사실상 비밀스러운 첩자이자 외교관이었다."


처음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떠다니는 거대 창고로서의 모습을 난폭하게 드러냈다.


아편을 중국으로 밀수하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 말엽이다. 1830년대에 이르자 사업은 엄청나게 팽창해서 주강(珠江) 어귀 깊숙이 뚫고 들어갔다. 광동은 중독됐고 보다 넓은 중국 시장으로 나가는 문의 빗장이 풀렸다. 아편 밀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 1805년 3,000상자 정도였던 물량이 1839년에는 4만 상자가 됐다. 1840년 무렵에는 약 1,000만 명 정도의 중독자가 생겼다.


결국 중국이 이에 반응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광동의 구석에 위치한 유럽인 거주지 '양귀 마을'에 있는 교역 시설을 포위하고 교역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어떤 제재도 정부에서 개입하는 밀수의 거대한 힘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제1차 아편 전쟁

전쟁의 첫 번째 작전은 상해(上海)에서 남쪽으로 약 16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주산(舟山) 제도의 가장 큰 섬인 정해(定海)를 급습하는 것이었다. 찰스 엘리엇은 이 지역에 아편 밀수선이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지만 밀수꾼들이 미래 고객들인 잠재적 중독자들에게 특가로 아편을 판매하는 것은 제지하지 않았다.


몇 번의 일방적인 공격이 벌어지다가 1841년 1월 천비(穿鼻)에서 벌어진 학살극으로 정점을 찍었다. 전쟁의 진정한 속성과 어울리는 행동으로 영국군 파견 함대가 보그 제도의 앤슨스베이(Anson's Bay)에 있던 세관을 함포로 날려버렸다. 같은 해 2월 보그 제도에 위치하고 있던 여러 개의 요새에서 몇 번의 전투가 더 벌어지고 난 다음 3월에 휴전이 발표됐다.


전쟁 자체가 체급이 맞지 않는 대결이었다. 영국의 현대 무기와 전투 기술도 그렇지만, 아편이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대제국을 병약하고 무기력한 노제국으로 바꿔놓았다는 점이 컸다.


일상이 된 사업

격렬한 전쟁도 아니었지만 오히려 전쟁 기간 동안 교역이 증가하기도 했다. 영국군이 광동을 포위하자마자 자딘매디슨은 사업을 집약시켰다. 북쪽에서 전투가 벌어진 틈을 타 재빨리 6,000상자의 아편을 밀수했으며 그 중 절반 이상을 선박의 화물칸 안에 보관한 채 대기했다. 상황이 예전 시절로 신속히 되돌아가면서 시장도 폭주했다. 막 다시 들어오기 시작한 엄청난 아편 물량으로 가격이 곤두박질쳤는데도 모든 사람들이 많은 이익을 냈다.


전쟁으로 인해 다른 분야의 밀수 사업이 부수적인 효과를 보기도 했다. 노예를 아프리카에서 브라질과 미국 남부로 수송하던 밀수꾼들은 서아프리카 해안 대부분의 세관선들이 중국으로 파견된 덕분에 약간의 회복 기미를 보였다. 광동 가까이 위치한 홍콩은 번영하기 시작했다. 홍콩은 불법적인 아편 교역의 새로운 중심지가 됐을 뿐 아니라 소금 밀수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아편 수입은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했고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중국 성인 세 사람 중 한 사람 꼴로 중독돼 있었다. 이제 이 교역은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의 대제국은 은 보유고뿐 아니라 그 생명력마저 빨리고 있었다.


산업 혁명_노예, 기나나무, 고무, 제조업

불법적인 미국의 산업 혁명

이유야 어찌 됐건 미국 산업 혁명이 거둔 대부분의 성공 사례는 엄연히 밀수로부터 나온 것들이었다. 밀수를 통해서 기계를 들여왔고 밀수를 통해 그 기계를 사용하는 지식을 얻었기 때문이다.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토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이렇게 사인방이 전략적 밀수 행위의 중심에 있었다.


그들이 회피하려고 한 것은 보호무역주의의 영국 정부가 기술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던 일련의 무역 제한 조치였다. 1749년 실크와 모직물 생산 장비의 수출 제한 조치가 시행됐고 1774년에는 면직물과 마직물 기계 종류에 대한 제한 조치와 더불어 관련 기술자들의 이민도 금지됐다.


산업 스파이 게임을 가장 먼저 주창한 사람은 조지프 헤이그(Joseph Hague)였는데 그는 소면기(梳綿機/carding machine)를 밀수해 필라델피아로 들여왔다. 하지만 부품과 설계도를 훔치거나 기계를 통째로 밀수해서 빼내온다고 해도 이를 작동시키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결국 직공들을 산업 스파이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블 뷰얼(Abel Buell)은 위조범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뛰어난 직공이었다. 토머스 디기스(Thomas Digges)는 조지 워싱턴의 특별 임무가 있었다는 이유로 고용됐다. 역사에서 드러난 많은 사례들처럼 이번에도 밀수꾼과 정치인이 실용적인 거래를 성사시켜 자원의 효율적 재분배와 지정학적 권력 구조의 변이가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미국의 산업 혁명은 가속도를 더해갔다. 영국은 이민 금지 정책이 실효성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1824년 이를 해제했다. 이제 일부 기계는 수출이 합법화됐으며 다른 기계들도 상표만 합법적인 것으로 바꿔 붙이면 문제없었다. 1825년까지 미국은 영국이 1760년대와 1770년대에 앞장서서 이룩한 면직물 생산 산업의 모든 발명품들을 제작하고 가동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노하우를 확보했다. 영국의 위대한 혁명이 송두리째 도둑맞은 것이다.


기나나무 밀수 프로젝트

기나나무의 밀수(절도) 임무를 지휘할 책임자는 퇴역 해군 장교로 인도 총독부의 중간관리자로 있던 클레멘츠 마컴이었다. 이 밀수 임무는 멸종 위기에 놓인 종의 보존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됐지만, 실제로는 식민지에서 말라리아를 퇴치하는 게 목적이었으며 나아가 제조업 원자재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마컴은 왕립 식물원의 원예사 존 위어(John Weir)와 함께 페루 남부 티티카카(Titicaca) 호수의 북쪽 카라바야(Carabaya) 지역으로 가서 황색 껍질의 기나나무를 찾아 가져오려고 했다.


최초 이들은 안데스 산맥의 산디아(Sandia) 마을에서 노골적으로 식물을 훔치다가 잡힐 뻔했다. 씨앗들을 움켜잡고 가까스로 도망쳐 존 위어는 북쪽으로 클레멘츠 마컴은 남서쪽으로 각기 흩어졌다가 해변에서 조우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아일리(Islay)라는 작은 항구 마을에서 세관원들의 검문에 걸렸다. 다행히(?) 리마의 장관에게 제공한 뇌물이 효력을 발휘해 식물 수출을 금지하는 칙령이 철회됐고 공식 허가서가 발급됐다. 마컴 일행은 씨앗을 무사히 런던 왕립 식물원까지 가져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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