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평전

   
이창호
ǻ
벗나래
   
15000
2016�� 03��



■ 책 소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는 총성과 함께 한 장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 그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는 그대로 쓰러졌다. 장부는 곧바로 러시아 공안에 체포되어 일본 정부로 인도되었고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결국 1910년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바로 우리 민족의 횃불 같은 정신으로 남은 영웅 안중근이다. 우리는 그를 단지 독립운동가로 기억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것이 전부일까? 그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숨겨진 면모를 알아보자.

 

■ 저자 이창호
대한명인(연설학) 겸 대한민국 신지식인(교육)으로 이창호스피치리더십연구소 대표로 있다. 스피치학 분야의 국내 최고 전문가로 연간 300회 이상의 강의와 강연을 통해 개인의 고유 브랜드 ‘이창호스피치’를 구축해왔다. 국정교과서 초등학교 6학년 읽기 도서 및 고등학교 국어(下) 교사용 지도서에 글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다양한 칼럼과 TV, 라디오 방송활동을 비롯해 한국청소년봉사단연맹 부총재, 안중근정신실천 전국웅변대회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반도의 ‘통섭 리더십’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이순신 리더십』 등 30여 권이 있으며, 자원봉사 지도로 대통령 표창, 세계언론평화대상 인권대상을 받은 바 있다.

 

■ 차례
머리말 : 영웅 안중근, 그 정신적 계승을 위하여

 

1장 - 북두칠성을 등에 새긴 아이
1.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아 태어나다
2. 폭풍 전야의 조선 정세 속, 폭풍의 눈 같던 아이
3. 안중근의 명망 높은 가계
4. 상무적 기상이 남달랐던 어린 시절

 

2장 - 동학농민운동의 횃불 아래
1. 아버지와 함께 동학군에 맞서다
2. 갑오의려의 선봉에 선 안중근
3. 구국운동의 씨앗을 품다
4.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5. 가문에 드리운 검은 기운
6. 백범 김구와의 깊은 인연
7. 호방했던 청년, 안중근

 

3장 - 신의 이름으로
1. 천주교를 접하다
2. 천주교 대학 설립의 꿈
3. 해서교안으로 인한 탄압
4. 정의와 의협심으로 불타오르던 사나이
5. 안중근 가문의 천주교 입교와 이율배반

 

4장 - 나라 잃은 슬픔을 배우다
1.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의 국권 침탈
2. 계몽운동에 뛰어들다
3. 조국을 위해 망명 계획을 세우다
4. 상하이에서의 실망
5. 본격적인 구국운동

 

5장 - 의병투쟁을 벌이다
1. 일제에 의한 한국 군대의 해산
2. 조국 해방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다
3. 머나먼 여정에서 만난 동지, 그리고 희망
4. 대한제국 의병 창설

 

6장 - 의병활동과 단지동맹
1. 국내 진입 작전
2. 만국공법 정신의 수호와 의병들의 반발
3. 단지동맹을 맺다

 

7장 - 코레아, 우라!
1. 빼앗은 100원
2. 거사의 결단
3. 동지를 만나다
4. 의기를 높이다
5. 10월 26일의 거사

 

8장 - 하얼빈에 울린 구국의 총성 소리
1. 영웅, 심문을 받다
2. 일제의 치밀한 재판 준비
3. 의거의 목적
4. 의거에 대한 반응들

 

9장 - 감옥 안에서 탄생한 동양평화론
1. 옥중 서신
2. 동양평화론 서문
3. 동양평화론 전감

 

10장 - 나의 소원은 동양 평화입니다
1. 동양 평화를 위하여
2. 동양평화론의 배경
3. 미루어진 동양 평화

 

맺음말 영웅, 안중근을 기리며

 

부록
1. 동양평화론 관련 유묵
2. 인심결합론(人心結合論)
3.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편지
4.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께 드린 유서
5. 안중근 의사가 분도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6. 홍 신부님 전상서
7. 대한국인 안중근 유묵
8. 안중근 의사 연보

 

참고문헌




안중근 평전


북두칠성을 등에 새긴 아이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아 태어나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는 신성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 한 사내가 집 뜰을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안태훈이었다.


"왜 이리 아무 소식이 없단 말인가?"

안태훈은 두 손을 모아 비벼대며 연신 중얼거렸다.

"벌써 몇 시간째인데......"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벽으로 향하는 밤하늘은 총총하게 빛나는 별빛으로 인해 영롱한 기운마저 서려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한참. 그를 향해 다급히 하인이 달려왔다.


"나리, 아드님이십니다!"

안태훈의 얼굴에 금세 반색이 돌았다.

"그래? 마님은 좀 어떠하시더냐?"

"마님도, 도련님도 모두 건강하십니다."

안태훈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 모두가 하늘이 도운 것이로구나. 그래, 참으로 잘 되었다."


하인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것이 말입니다요, 도련님 가슴과 배에 이상한 것이......"

안태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이냐?"

"도련님 가슴과 배에 이상한 점이 7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양이 마치 북두칠성을 닮아 있었습니다."


안태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북두칠성 모양의 7개의 점이라......"

그는 천천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반짝이며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것이로구나. 오늘 태어난 이 아이는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것이다. 하늘의 기운을 받은 것이야."

안태훈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번졌다.

"장차 이 아이는 큰일을 할 인물이 분명하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으니, 이 아이의 이름을 응할 응, 일곱 칠을 써서 응칠로 지어야겠다."


이렇게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아이가 바로 안중근이었다. 응칠은 안중근의 아명으로 북두칠성의 기운을 따른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훗날 하얼빈 역에서 민족의 적,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은, 뒷날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의 성은 안이요, 이름은 중근, 어릴 때의 이름은 응칠이다. 나의 타고난 성질이 가볍고 급한 듯하여 이름을 중근이라 짓고, 가슴과 배에 7개의 검은 점이 있어 어릴 적 이름을 응칠이라 하였다 한다."

이렇듯 안중근은 하늘의 뜻을 온몸에 새긴 채로 태어났던 것이다(박은식, 1979).



나라 잃은 슬픔을 배우다

계몽운동에 뛰어들다

국내외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을 안중근은 무거운 마음으로 예의 주시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국운이 기울어 가는 국망지추에 안중근은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안중근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과 미국에서 발행된 「공립신문」 등의 논설을 통해 국내외 정세의 변화를 주시하는 한편, 『태서신사』를 비롯해 각국의 역사책을 탐독하면서 민족의 진로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을 지켜보던 안중근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안중근은 신문과 세계 각국의 사정이 담긴 책을 통해 국내외 정세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이 전쟁의 목적이 한국을 가운데 놓고 서로 먹겠다고 벌이는 쟁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빌렘 신부 또한 한국의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염려했다.


"이 나라의 미래가 매우 위태롭군요."

"왜 그렇습니까?"


안중근은 현재의 상황에 대한 빌렘 신부의 의견을 듣고 싶어 물었다.


"러시아가 이기면 러시아가 한국을 소유하려 할 테고, 일본이 이기면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려 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어떤 경우라도 한국은 좋지 않은 결과를 보게 될 겁니다."


빌렘 신부의 말을 들은 안중근은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 신문을 읽으며 생각했던 바와 빌렘 신부의 말이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이 전쟁이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가 한국을 두고 벌이는 싸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안중근은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펼치는 것에 대해서만 염려하고 있었다. 그동안 서양의 다른 나라들도 한국을 침략하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그중 제일 위험한 것이 러시아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러시아가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 가운데 유일하게 우리나라와 영토를 맞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펼치면 한국은 위험해질 것이 분명했다.


청일전쟁 와중에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비롯한 부일배들이 일본의 승리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들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대하며 일본군에 군수품 운송을 지원하는 등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대중에게 영향력이 컸던 면암 최익현 등 유림계의 거두들도 일본군을 지지하면서 러시아 세력을 물리쳐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중근은 자신도 모르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당시 러시아가 영토에 대한 야욕을 보이면서 한반도를 위협하자 민심이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쪽으로 기운 것이다. 안중근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특별히 배일사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10/26의거 뒤의 심문조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심문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실제 한국 인민은 일러 전역 전까지는 호개의 친우로 일본을 좋아했고, 한국의 행복으로 믿고 있었다. 우리들 따위도 결코 배일사상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안중근의 배일사상은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 야욕을 꿰뚫어 보면서 싹트기 시작했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도발한 것이 결코 한국을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을 집어삼키고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것임을 간파한 것이다.


일제의 한국 침략 야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1904년 6월, 일본은 한국 정부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했다. 한국에 온 일본인들의 횡포도 갈수록 심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러시아의 침략을 우려해 일본에 우호적이던 여론이 반일로 돌아섰다. 이 무렵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일부 유지들이 보안회를 창립했다. 보안회는 1907년 7월 13일, 심상진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다.


안중근은 보안회의 취지에 찬동하고 입회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보안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신분을 밝히고, 보안회 간부들에게 한국 침략의 선도자인 하야시 곤스케 대리공사와 부일배를 처단할 것을 제안했다. 안중근은 일본의 침략에 위기감을 느끼며 마침 뜻을 같이할 것으로 보이는 보안회를 찾아가 의거를 제안했지만 보안회 수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안중근은 혼자서라도 목숨을 걸고 부일배와 일제 침략자들을 처단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기회를 엿보기 시작한다. 그는 이미 뜻을 함께하는 결사 부하 50명도 거느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열투쟁사의 효시다.



코레아, 우라!

10월 26일의 거사

마침내 역사적인 1909년 10월 26일의 새날이 밝았다. 김성백의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안중근은 새벽 6시 30분경에 일어났다. 새 옷을 낡은 양복으로 갈아입고 권총을 휴대하고 7시경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지난밤에는 권총을 꺼내 깨끗이 닦고 소원의 성취를 기원했을 것이다. 안중근은 일본인처럼 환영식장으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많은 일본인과 러시아인들이 입장해 별다른 제재나 검색 같은 것은 없었다. 일제는, 사건예방을 위해 동양인들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검문 요구를 일본인의 출입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이런 연유로 안중근도 아무런 제재 없이 역내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천우신조, 그야말로 하늘의 도움이었다.


"정거장에 이르러 살펴보니 러시아 고관들과 군인들이 많이 나와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찻집에 앉아 차를 두세 잔 마시며 기다렸다. 아홉 시쯤 되어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도착했다.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찻집에 앉아 상황을 살펴보며 언제 저격하는 것이 좋을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나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렸다. 군대가 경례를 붙이고 군악대 연주가 하늘을 울리며 귀에 들어왔다. 그 순간 분한 기운이 터지고, 삼천길 업화가 뇌리를 때렸다. 어째서 세상일이 이렇게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도다. 이웃나라를 강제로 빼앗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저렇게 날뛰고 도무지 거리낌이 없는데, 왜 죄없고 어질고 약한 민족은 오히려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국적 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탄 기차는 9시 15분에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역전에는 러시아 경위병, 각국 영사단, 일본인, 구경 나온 러시아인 등 수천 명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때를 맞춰 군악대의 환영곡이 울려 퍼지고 일장기를 높이 든 일본인들의 만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정대시 코코프체프의 안내로 동청철도 총재 등 귀빈들의 영접을 받으며 러시아군 수비대의 열병과 사열을 받고자 의장대의 정면을 우측에서 좌측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한국독립운동사』, 1999).


안중근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권총을 틀어잡은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그러나 그의 예리한 눈길은 순초도 왜놈들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 늙다리가 키 큰 재정대신과 나란히 맨 앞에서 사열하고 있다. 군악대의 환영곡 소리가 귀 따갑게 울렸다(『안응칠 역사』, 1979).


"저 늙은 놈이 틀림없다. 아, 민족의 원수놈을 이제야 만났구나! 네놈만 쏴버리면......"


안중근의 눈앞으로 연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곳에서 손을 높이 흔들며 달려오는 딸 현생, 아들 분도의 모습이 저 멀리에 나타났다. 그 뒤로 웃음을 머금은 아려가 보였다.


"아, 내 이제야 저 혈육들의 품으로......"


순간 그들의 허상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바람이 휘몰아쳤다. 천봉산의 굽은 노송이 비바람을 맞아 무섭게 설레고 있었다.


"왜 바람이 부는가, 제발 불지 말아다오. 제발......"


그는 속이 편안치 않아 이맛살을 찌푸리고 앞을 내다보았다. 안개 걷힌 그의 눈앞에 여전히 사열하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와 러시아 재정대신의 덥두룩한 모습이 들어왔다. 이토 히로부미가 제법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코코프체프와 무엇인가 간간이 이야기하면서 의장대 앞을 긴 외투를 입고 지나간다.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몰골이 눈앞으로 확 안겨왔다. 안중근은 주머니 속에 권총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지금 쏠까?"


그는 잠시 망설였다. 숲처럼 빼곡이 정렬한 의장대 사이로 총을 쏘기에는 불리할 것 같았다. 주머니 속에 틀어잡았던 권총을 놓고 손을 다시 뽑았다. 그리고 안중근은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뚜벅뚜벅 걸어서 용기 있게 앞으로 나가 군대의 대열 바로 뒤에 이르러 앞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운명의 순간, 하늘이 마련해 준 순간이 다가왔다.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를 받으며 맨 앞으로 누런 얼굴에 희고 긴 수염의 조그만 늙은이가 염치도 없이 감히 하늘과 땅 사이를 누비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것이 틀림없이 늙은 도둑 이토 히로부미일 것이다라고 생각한 안중근은 곧바로 권총을 뽑아 들고 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통렬하게 세 발을 쏘았다. 그러나 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의아심이 크게 일어났다.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쏘았다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뒤쪽을 향해 다시 총을 겨누었다. 걸어 나오는 일본인들 중에서 가장 위엄이 있어 보이는 앞장선 자를 향해 세 발을 쏘았다. 그리고 만일 죄 없는 자를 쏘았다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우르르 달려온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통렬하게 세 발을 쏘았다. 이때 손 총탄은 세 발이었다. 안중근은 재판장의 심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러시아 병대의 대열 중간쯤의 지점으로 갔을 때, 이토 히로부미는 그 앞에 열을 지어 있던 영사단 앞에서 되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병대의 열 사이에서 안으로 들어가 손을 내밀고 맨 앞에서 행진하고 있는 이토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향해 십보 남짓의 거리에서 그의 오른쪽 상박부를 노리고 세 발 정도를 발사했다. 그런데 그 뒤쪽에도 또 사복을 입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닌가 생각하고 그 쪽을 향해 세 발을 발사했다. 그리고 나는 러시아 헌병에게 잡혔다."


안중근이 먼저 쏜 총탄은 세 발이었다. 한국 침략의 원흉, 동양 평화의 교란자 이토 히로부미는 이렇게 안중근의 의탄을 맞고 현장에서 쓰러졌다. 세 발의 총탄은 어김없이 이토 히로부미의 복중에 명중했다. 안중근이 갖고 있던 권총은 7연발짜리 브라우닝 m-1900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세 발을 쏘아 명중시킨 안중근은 이어서 일본인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모리 야스지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 등 세 사람을 연달아 쏘아 이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박은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권총 여섯 발을 연달아 쏘았는데, 헛방 없이 모두 명중시켰으니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이는 중근의 담력과 사격술이 천하에 둘도 없이 뛰어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적도들이 쓰러지는 것을 지켜본 안중근은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불렀다"고 『안응칠 역사』에 기록했다. 안중근은 국적 이토 히로부미와 그 수하들을 포살하는 일이 하늘의 뜻이라고 믿었다. 안중근은 자신의 의거를 하늘에 고하는 심경으로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큰 소리로 코라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쳤던 것이다.



나의 소원은 동양 평화입니다

동양 평화를 위하여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교수형이 집행되기 직전 행한 마지막 유언에서 "나의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형을 집행하는 관리들도 앞으로 한일 간에 화합하여 동양 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은 동양 평화였던 것이다. 그가 30여 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면서 남긴 마지막 유언인 동양 평화는 안중근의 삶의 의미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정수이며, 그가 존재했던 이유였다.


그는 왜 그토록 동양 평화를 갈망했을까? 안중근은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유를 "이토 히로부미가 생존하는 한 동양의 평화는 무너질 뿐이어서 나는 동양의 평화를 위해 그를 제거하기에 이른 것"이라며, "이는 결코 사사로운 원한이 아니다"고 진술했다. 안중근의 옥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상 중 14번째로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를 적시하고 있다. 안중근은 자신의 행동이 동양 평화를 깬 일본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며, 이토 히로부미는 이런 정책을 고안하고 집행한 인물이기 때문에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안중근은 자신의 구상인 『동양평화론』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서문과 4개의 본문인 전감, 현상, 복선, 문답 중 서문과 첫 부분인 전감까지만 쓰고,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면서 미완성본으로 남겨두게 되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기 위해 스스로 사형집행일로 자청한 예수의 승천일인 3월 25일에서 약 15일 정도 집행 연기를 일본 법원에 청하였으나 묵살당했다. 그러나 그 대강의 내용은 1910년 2월 14일 일본인 히라이시 우지히토 뤼순 고등법원장과 행한 면담 기록인 청취서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안중근은 본문의 전감에서 동양 평화가 깨진 주된 이유를 일본에게서 찾았다. 1904년 일본은 러일전쟁 선전포고문에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려 한다"고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전 후 진행된 러일 강화조약문에 일본의 한국에 대한 우월권을 삽입한 것은 정작 일본을 도운 한국과 청나라 양국의 인사들의 소망을 절단 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7년에는 한일신협약으로 한국의 황제를 폐위하였으며, 마침내 군사권마저 박탈하였다. 그리하여 안중근은 동양 평화를 깨는 전략을 수립한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암살하여 일본이 침략적 대외정책을 수정하도록 충격을 주고,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일본인에게 서양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동양 삼국이 서로 협력하여 동양의 평화를 지켜낼 수 있도록 새로운 방책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안중근이 일본에게 제시한 동양 평화를 위한 새로운 방책은 히라이시 고등법원장과 진행한 청취서를 분석해 볼 때, 『동양평화론』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골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은 뤼순 지역을 중국에 돌려주고 중립화하여 그곳에 한/청/일 3국이 공동 관리하는 군항을 만들고, 이들 3국이 대표를 파견하여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도록 한다. 재정 확보를 위하여 회비를 모금하면 수억 명의 인민이 가입할 것이다. 각국 각 지역에 동양평화회의의 지부를 두도록 한다.


그리고 원만한 금융을 위하여 공동 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이 함께 쓰는 공용 화폐를 발행하도록 한다. 각 지역에는 은행 지부를 둔다. 3국의 청년들로 공동의 군단을 만들고, 그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을 높인다. 한/청 두 나라는 일본의 지도하에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한다 한/청/일 세 나라의 황제가 로마교황을 방문하여 협력을 맹세하고, 왕관을 받는다. 세계 민중의 신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안중근의 이와 같은 동양평화론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3국 정치공동체를 창설하자

안중근은 "새로운 정책은 뤼순을 개방하여 일본, 청국, 그리고 한국이 공동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고,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해 상설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한 뒤 이를 공표하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뤼순은 일단 청국에 돌려주고 그것을 평화의 근거지로 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안중근은 동북아 국제분쟁의 발원지인 뤼순을 국제사회에 개방하고 평화회의체 설치를 통해 3국의 정치공동체 창설을 제안하고 있다(이승령). 안중근이 제안한 정치공동체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안중근의 정신을 오늘에 이어받는다면 남북한, 일본, 중국, 미국과 러시아까지 아우르는 정치공동체를 꾸준히 논의하고 노력해봐야 할 것이다.


3국 경제공동체를 창설하자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일본의 재정 확보가 시급함을 말하며, 이를 위해 "뤼순에 조직될 동양평화회의에서 회원을 모집하고 회원 한명 당 회비로 1원씩 모금"하면, 자연스럽게 "일본과 청국, 그리고 한국의 인민 수억이 가입"할 것이고, 이에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이 공용하는 화폐를 발행하면 신용이 생기므로 금융은 자연히 원만해질 것"이라며 공동 중앙은행의 설립과 공용 화폐 사용을 통한 3국간 경제공동체 창설을 주장하였다. 한/중/일은 역사적으로는 물론 앞으로는 더욱더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선각자 안중근의 이러한 주장은 최근 한/중 FTA로 상당 부분 이루어지고 있다. 한/중/일이 FTA 등을 통한 경제공동체로 발전해간다면, 안중근의 염원처럼 한/중/일은 동양 평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3국 평화유지군을 창설하자

안중근은 한/중/일 3국의 평화유지군을 주장하였다. 이 얼마나 위대한 주장인가? 안중근은 동양 평화에 필수적인 "뤼순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본은 군함 5,6 척만 계류해 두면 되지만", 이에 반발하여 "일본을 노리는 서양열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세 나라의 건장한 청년들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는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이 높아지도록 지도하자"며 오늘날 NATO와 같은 군사공동체 창설을 주장했다.


이는 생각하면 할수록 위대하고 선지적인 개념이다. 한/중/일이 동양 평화를 위해 평화유지군을 창설했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아시아의 평화는 물론, 세계 평화의 분수령이 될 것이다. 안중근의 염원처럼 한/중/일 3국이 꾸준한 군사적 협력을 통해 평화유지군이 창설될 날을 기대해본다.


3국 경제협력체를 창설하자

안중근은 경제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청과 한국 두 나라는 일본의 지도하에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일본을 선두로 청과 한국이 따라가는 3개국 경제 발전 모델을 제안했다. 이러한 조치를 하게 되면 "일본은 수출이 많이 늘게 되고 재정도 풍부해져서 안정을 누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안중근은 일본을 머리라고 표현하면서 일본의 선도적 역할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거사 목적이 일본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이 아시아의 최고 문명국으로서 제국주의 침략을 막고 동양의 평화를 위해 책임을 다할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안중근의 제안처럼 이미 한/중/일은 다양한 경제적 협력을 해오고 있다. 안중근의 염원처럼 서로 윈윈하는 경제적 협력이 한/중/일 간에 이뤄진다면 동양 평화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3국 공동체에 대한 국제적 지지

안중근은 이와 같은 새로운 방책에 대한 국제적 지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세 나라의 황제가 로마교황을 만나 이를 맹세하고 관을 쓴다면 세계는 이 소식에 놀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오늘날 존재하는 종교 가운데 3분의 2는 천주교이다. 로마교황을 통해 세계 3분의 2의 민중으로부터 신용(신뢰, 지지)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대단한 힘이 된다"며 3개국 평화협의체에 대한 국제사회의 보편적 지지가 중요함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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