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지닌 사람들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끔찍하고도 명백한 실수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히 장군, 왕, 대통령들이 저지른 실수 중에서도 가장흥미롭고 충격적인 실수만을 모아 놓았다. 어떤 실수는 세계사에 극적인 변화를 일으켰으며, 어떤 실수는 흥미로울 뿐 아니라, 어떻게 그런 일이일어났는지 뒤늦은 의문을 가져다준다.
치명적인 의사결정,그리고 이따금씩 일어났던 스캔들 모두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실수를 되돌아보게 되면 사소한 판단이나의사결정으로 인해 역사가 뒤바뀐 순간들이 많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멋지게 세운 계획과 풍부한 영감을 제공해주는 지도자들의 조언을따른 결과에 못지않게 우리가 엉뚱하게 저질렀던 실수들에도 원인이 있다. 주변을 둘러보고, 신문 기사제목을 읽어보라. 과연 모든 일이 의도한 대로일어난 것일까?
■ 저자 빌포셋(Bill Fawcett) & & & &
대학 교수이자 작가, 롤플레잉 게임 회사의대표이다. 『It Seemed Like a Good Idea… A Compendium of Great HistoricalFiascoes』『You Did What?』『How to Lose a Battle』『Oval Office Oddities』『It LookedGood on Paper』『How to Lose a War』 등 전쟁이나 전투의 역사에서 나쁜 결정을 내린 사례를 찾아 수십 권의 책을집필했다.
■ 역자권춘오
「DBR(동아 비즈니스 리뷰)」에서 해외 Bestseller Preview 섹션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수년간 활동하고있으며, 「이코노믹 리뷰」「월간 이코노미」 등에 고정 칼럼을 써왔다. 지은 책으로 『明日からは兵士』(PHP연구소)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의사결정 불변의 법칙』『세스 고딘 보고서』『유능한 관리자의 비밀노트』『지금부터 10년 글로벌 트렌드』『실험경제학』『10년 후 부의미래』『역사를 바꾼 100가지 실수 1』 등이 있다. 동국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주)네오넷코리아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차례
서문
1. 모든 것을 잃음 - 불멸 BC 259년, 중국
2. 개인의 야망 - 전쟁을 사랑한 알키비아데스BC 431년, 그리스와 시실리
3, 4, 5, 6. 계획 부족 - 왜 거기에 알렉산드리아 왕국이 없었는가? BC 356년, 마케도니아와페르시아
7. 비겁함 - 10초 안에 제국을 잃는 방법 BC 331년, 페르시아
8. 목숨을 넘어선 오만함 - 카르타고는 멸망되어야한다. BC 264, 로마 공화국
9. 지도자의 균형감 부족 - 중대한 실수 BC 218년, 알프스 산맥
10. 자존심이 야기한오해 - 아픈 시저가 자리에 앉다 BC 44년, 로마
11. 균형감을 잃자 모든 것을 잃었다 - 마크 안토니의 유언 BC 41년, 로마와이집트
12. 쉽지 않았던 해결책 - 왕의 초대 5세기, 영국
13. 왕국을 넘어선 자기의식 - 해럴드 2세 1066년, 영국
14. 무시와 강한 자존심 - 역사상 가장 멍청한 패자 1216년, 사마르칸트
15. 바다에 있을 때는 바다만을 생각하라 -쿠빌라이 칸의 사라진 함대 1281년, 일본
16.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결정 - 돌발적인 종교 개혁 1509년, 영국
17. 적이누구인지 알기 - 몬테수마, 콘키스타도르를 환영하다 1519년, 멕시코
18. 상대편을 과소평가하다 - 성급한 성향과 오래 가는 국회1627∼1629년, 영국 &
19. 뜻밖의 결과 -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사람을 다루다 1640년, 영국 &
20. 적에 대한 잘못된 판단 - 행운의 발사 1687년, 파르테논, 그리스
21. 작은 것을 아끼다가 식민지를 잃다 - 세금인상으로 어떻게 영국령 미국을 잃게 되었는가 1770∼1773년, 식민지 시대의 미국
&22. 자만심 - 배은망덕과 야망1776∼1780년, 미국 독립 혁명
23. 세상과 소통하지 않음의 결과 - 보잘 것 없는 노력 1793년, 프랑스
24. 묵살된제안 - 증기선은 없다 1802년, 파리
25. 죽음을 불러온 제스쳐 - ‘버-해밀튼’의 결투 1804년, 뉴저지
26. 친구를벌주기 - 제퍼슨의 출항금지법 1807년, 미국
27, 28. 뜻하지 않은 것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군대 - 나폴레옹의 러시아공격1812년, 러시아
29. 지체가 불러온 패배 - 철수는 늦어지고 식량은 바닥나다. 1812년 12월, 모스크바
30. 자존심에현실을 등한시하다. - 최선의 제안 1813년 8월, 프랑스
31. 최악의 타이밍 - 이 전쟁을 대체 왜 시작한 거야? 1812년, 워싱턴D.C.
32.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 소탐대실: 작은 것을 탐하다가 오히려 큰 것을 잃게 되다 1814년, 프랑스
33.허울뿐인 타협 -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1854년, 미국 &
34. 수수방관한 대가 - 용기가 없던 제임스 뷰캐넌 1856년,워싱턴 D.C. &
35, 36. 잘못된 전략 - 남부 연합 1861∼1865년,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
37. 결단력 없는장군 - 기회를 잃다 1862년, 버지니아
38. 네 부하를 알라 - 잘못된 시작 1863년, 게티즈버그
39. 실리보단 영광을- 기마병의 정보 없이… 1863년, 게티즈버그 &
40. 지나친 자신감의 대가 - 피켓의 돌격 1863년 7월 3일,게티즈버그
41. 정치적 인물을 선택한 대가 - 앤드류 존슨의 타협안 1865년, 미국
42. 관직을 주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그는 부통령이 되었다 1900년, 뉴욕
43. 패배자 리스트 - 타이타닉 호 1912년, 북대서양
44. 낭비 - 쓸데없는낭비 1916년, 독일
45. 하지 말았어야 할 말 - 침머만 전보사건 1917년, 멕시코
46. 대가를 치르게 하여 또 다른전쟁을 불러일으키다 - 베르사유 조약 1918년, 프랑스
47. 본질을 벗어난 문제 - 국제 연맹의 실패 1918년, 네덜란드,헤이그
48. 강요된 사회 변화 - 금주 법: 실패한 실험 1919년, 미국
49, 50. 양다리 - 영국의 약속 1921년,팔레스타인 &
51. 친구 잘못 둔 죄 - 이런 친구라면… 1922년, 워싱턴 D.C. &
52. 아무 일도 한 게없어요. - 허버트 후버와 대공황 1929년, 미국
53. 잘못된 결정의 원천은 리더의 두려움 - 막대해진 히틀러의 권력 1932년,독일 &
54, 55. 회유책 - 나를 속이다니, 부끄러운 줄 알도록! 1936년, 독일 라인 지방
56. 더 많은 회유책- 나를 두 번이나 속이다니, 알아채지 못한 내가 이제 부끄럽군 1938년, 주데텐 지방과 독일
57. 피해망상의 대가 - 장교들의 무덤1935∼1939년, 러시아
58. 한 번 통했다고 언제나 통하진 않지 - 히틀러, ‘후퇴는 없다.’ 1940∼1945년,독일
59. 지나친 자신감 - 작전 연기로 큰 타격을 받다. 1940년 5월, 크레타 섬 &
60. 뒤틀린 명령 체계 -중지 명령 1940년, 케르크
61. 전쟁은 복수가 아니야 - 나를 유대인이라고 불러도 좋소. 1940년 9월, 브리튼 전투
62. 자기 기만 - 예스맨 1941년 9월, 러시아
63. 사라진 기회 - 그냥 승리를 선언하세요 1941년, 10월, 베를린
64. 과소평가된 반항 - 불명예의 날 1941년, 하와이 진주만
65. 끝나지 않은 임무 - 토라 토라 토라, 그러나 너무부족했던 작전 지시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66. 맹목적인 지시 엄수 - 지시에 복종할 뿐 1942년 6월, 미드웨이제도 &
67. 자신감의 치명적인 상실 - 패배의 인정 1942년, 싱가포르
68. 고집스러운 자존심 -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년 9월∼1943년 2월, 러시아
69-78. 최악의 적 - 패배를 부른 히틀러의 열 가지 결정 1939년∼1945년, 유럽
79.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었다 - 얄타 1945년, 크림
80. 현실성이 없는 국가적 해결책 - 대약진정책1950-1960년대, 중국
81. 더 신중히 당신의 친구를 선택하라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잘못된 우정 1953년, 이란
82.옳지 않은 지도자를 지지하기 - 대중들의 전폭적인 지지 1954∼1972년, 미국과 베트남
83. 체면을 지키기 위한 비싼 대가 -가톨릭 교회의 성폭행 스캔들 1960∼2012년, 바티칸
84. 성에 사로잡힌 어리석음 - 전형적인 영국 스캔들 1960년대, 영국
85. 대통령 집무실에서 전쟁을 지휘하지 말라 - 린든 존슨, 베트남 전쟁을 확대시킨 대통령 1964∼1968년, 미국과베트남 &
86. 현실을 넘어선 이데올로기 - 해결을 위한 해결 1966-1976년, 중국
87. 영국의 더 많은 성추문 -램튼 사건 1970년, 영국
88. 쓸데없는 위험감수 - 워터게이트 1972년, 워싱턴 D.C.
89. 마지막을 향한 묘책 -‘이란-콘트라’ 사건 1986년, 워싱턴 D.C.
90. 잃기 위해 모든 것을 가졌고 모두 잃어버린 남자 - 개리 하트와 도나 라이스1987년, 워싱턴 D.C.
91. 소극적인 공격성, 그냥 수동적일뿐 - 마이클 듀카키스는 맞서 싸우지 않았다 1988년,미국 &
92. 과민반응 - 천안문 광장 1989년, 중국
93. 끝내지 못한 일 - 사담에게 남겨진 권력 1990년,이라크
94. 지키지 못할 약속 - 내 말을 들어라 1992년, 미국
95. 모두가 지는 게임 - 메이저리그 야구 파업1994년, 미국
96. 틀린 차이 만든 사람 - 네이더 1996년, 미국
97. 비극적 약점을 정의 내리기에 따라 - 모니카르윈스키와 파란 드레스 1995∼1997년, 워싱턴 D.C.
98. 정보 공유의 실패 - 벽에 또 다른 벽돌 하나를 2001년, 워싱턴D. C.
99.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 카트리나의 미숙한 대처 2005년, 미국 멕시코
100. 최악의 경우 발생 - 핵발전소멜트다운 2011년, 일본
마지막으로 생각할 거리 &
역사를 바꾼 100가지 실수 2
지도자의 균형감 부족 - 중대한 실수 BC 218년, 알프스 산맥고대 군사 역사에서 가장 대단한 성취는 동시에 가장 멍청한 실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둘에 모두 해당되는 것은 바로 한니발 바르카가 코끼리를 데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은 것을 말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대단했던 수송력과 지도력의 결과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카르타고 군대가 치른 노력을 따진다면 완전히 쓸데없는 노력이었다.
BC 218년 한니발 바르카는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쟁을 이탈리아로 옮겨가기로 결정했다. 로마가 해상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한니발은 그의 군대를 이탈리아로 진군시켰다. 군대를 이동하기 위해 한니발의 군대는 호전적인 갈리아인들과 북부 이탈리아인들을 지나가야 했다. 한니발은 여름이었더라도 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을 생각은 없었다. 산맥의 꼭대기와 높은 고도에 위치한 길은 일 년 내내 눈이 쌓여 있고 얼어 있었기 때문이다.
초반에 한니발은 술책을 잘 써서 갈리아인들이 그의 길목을 막으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여름의 막바지에 한니발은 론강에 다다랐다. 로마는 그제야 위협을 느꼈고 한니발을 막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한니발의 군대 규모는 3만 8,000명의 보병과 8,000명의 기병, 그리고 37마리의 전투용 코끼리였다. 그런데 이 코끼리가 문제였다.
추운 길을 통해 이탈리아에 갈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카르타고 군대는 낮은 기온과 미끄러운 길에 대비해 옷도 갖춰 입지 않고 있었다. 알프스 산맥의 어떠한 길도 한니발의 군대가 지나가기에 맞지 않았다. 카르타고의 군사들은 산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한편, 그들이 갈 길을 터야만 했다. 한니발의 군대는 진군하며 즉석에서 대응해야만 했다.
얇은 옷으로 추위를 견딜 수 없었던 병사들 때문에 알프스 산맥을 넘는 여정은 종종 중단되었다. 나머지 군사는 맨 앞에 가는 병사들이 군대가 모두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트는 만큼의 빠르기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항상 진눈깨비나 눈을 걱정해야 했다. 이후 한니발에 의하면, 그의 군대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간 것은 7∼8일 정도가 걸렸어야 했다고 밝혀졌다. 그러나 실제로 한니발의 군대가 그 길을 지나는 데는 2주가 넘게 걸렸다. 코끼리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길을 넓게 텄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게 통과시간이 오래 걸렸던 주원인이었다. 사람과 전차는 1내지 1.5미터 너비의 길이면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전투용 코끼리는 훨씬 더 넓은 길이 필요했기 때문에 길을 만드는 데 추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이 들었다. 아마도 그 시간이 몇 주였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얇은 옷의 병사들은 추위에 고통스러워했고 저체온증으로 죽어갔다.
한니발과 그의 군대가 따뜻한 북부이탈리아의 계곡에 도착했을 때는, 2만 명의 보병과 4,000명의 기병 그리고 몇 안 되는 전투용 코끼리가 남았을 뿐이었다. 군대의 절반이 알프스 산맥을 넘는 동안 사망한 것이다. 그리고 코끼리도 전투에 쓸 만큼 충분히 남아있지도 않았다. 모든 시대의 많은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한니발도 역시 그의 야심찬 무기였던 코끼리에 너무 기대를 걸고 있었고, 이에 눈이 멀어 코끼리를 알프스 산맥 너머로 이동시키는 데 들어갈 병사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묵살된 제안 - 증기선은 없다 1802년, 파리미국의 발명가 로버트 풀튼은 찾아오지도 않는 나폴레옹과 청중을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몇 해 전에 황제를 만났고, 황제가 그의 인력 잠수함에 관심을 갖도록 노력했다. 나폴레옹은 전혀 관심 있어 하지 않았다. 때는 잠수함이 실제 사용될 수 있는 무기가 된 것보다 75년 전이었다. 너무 일렀기 때문에 풀튼은 나폴레옹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풀튼을 만나지 않은 것은 나폴레옹의 손해였다.
풀튼은 프랑스에 있는 미국 대사의 성원에 힘입어 나폴레옹에게 보여줄 실제 배를 이미 제작하였다. 증기로 가는 외륜선은 시속 약 4킬로미터가 넘는 속력으로 센 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게 바람 없이 항해를 할 수 있는 배를 보여줄 수 없었고, 또한 프랑스 정부에 있는 어느 누구의 관심도 끌 수 없었다. 결국 풀튼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의 발명품인 증기기관과 이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배를 미국에서 개발했다.
1805년 영국과 프랑스는 한 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영국 해협의 해안가에는 10만 명이 넘는 프랑스 병사가 영국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 군은 대부분의 군대와 말, 대포를 옮길 수 있는 평지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병력은 약 3만 명 정도였고, 대부분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았다. 프랑스 군대가 영국 해안에 다다랐다면 영국 전체를 휩쓸었을 것이다. 그리고 런던은 아마도 며칠 안에 함락되었을 것이다.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영국해협을 안전하게 건너야만 했다. 하지만 영국군은 나폴레옹 항구정박을 막았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가 트라팔가 해전에서 허레이쇼 넬슨 제독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프랑스의 영국 침략 계획은 실패했다. 프랑스군은 동쪽으로 전진했고, 영국은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 어떤 침략 공격을 받지 않았다.
영국 해협은 다소 거칠 수도 있으며 그 바람은 예측하기가 쉽지 않았다. 영국의 숙련된 항해사라 할지라도 편동풍 때문에 항구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때때로 영국 해협은 바람이 한 점도 불지 않아 모든 배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이때 미국에서는 풀튼의 증기선이 개발되어 운하와 강을 시속 8내지 9킬로미터로 항해할 수 있었다. 만약 나폴레옹이 풀튼을 만나 증기선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의 군대는 바람이 불지 않는 해협을 건널 수 있었을 것이고 그 여정은 단지 몇 시간에 불과했을 것이다. 단지 풀튼의 배를 이용한 것만으로도 영국의 함대는 프랑스의 공격을 경계하기 위해 모든 항구를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그들이 출항하는 순간 프랑스의 영국 침략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바지선 대신 풀튼의 증기선이 있었다면 나폴레옹은 영국을 정복했을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에 맞서는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영국의 금전적인 지원이 없이는 프랑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어야 했을 것이다. 스페인에서 영국군을 이끌던 웰링턴이 없었다면 25만 명의 프랑스군은 사라지거나 볼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황제에 저항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나폴레옹이 풀튼의 증기선을 지원했다면 지금까지도 프랑스의 왕이 존재하고, 나폴레옹 역시 그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패배자 리스트 - 타이타닉 호 1912년, 북대서양리더십 실패 사례를 다룬 책에서 타이타닉 호 침몰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일로 선박안전 표준에 관해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는 등, 긍정적인 방안들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사건이 해상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라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않는 이가 없다. 타이타닉 호 침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교훈을 얻었다.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헛된 희망이었다. 2012년 1월,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가 이탈리아의 서부 해안가에서 전복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타이타닉 사건을 떠올리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찌 보면 사람들이 두 사건을 비교하는 것이 당연했다.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와 타이타닉 호 모두 호화로운 여객선이었으며 선장의 중대 과실들로 침몰된 배였다. 타이타닉 호의 선장은 대서양 횡단 신기록을 세우고 싶어 했다. 그래서 빙산이 있다는 경고를 무시했다. 콩코르디아 호의 선장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하는 수석 웨이터들을 위해 해안 가까이 배를 운항했고,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배의 안전에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비슷한 점은 여기까지이다. 비참한 사건이긴 했지만 콩코르디아 호의 사상자는 십여 명에 불과했다. 반면 타이타닉 호에서는 1,500명 이상의 승객이 바다에 목숨을 빼앗겼다. 사실 타이타닉 호 사건이 역사상 가장 사상자가 많았던 해양 사고는 아니지만 가장 유명한 사건이라고는 할 수 있다.
타이타닉 호에서 무분별하게 생명이 죽어나간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경제·사회적 계급 차이에 따라 구명보트가 달리 배분된 점과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이 자만으로 가득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불쾌감을 금치 못했다. 그는 빙산 경고를 무시한데다가 영국 선박 회사 화이트 스타라인은 충분한 구명보트를 규정대로 장착하지도 않았다. 배가 진수되기 전, 타이타닉 호는 침몰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근거 없는 믿음을 전문가들이 제대로 감지할 수 있었더라면 이와 같은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해상 안전 규제는 강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타이타닉 호는 1912년에 완성됐다. 전화 시설, 이발소, 도서관, 최고급 요리와 고가의 가구들까지, 그 호화로움에 있어서는 타이타닉 호와 견줄 배가 없었다. 하지만 타이타닉 호에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었다. 바로 구명보트의 수였다. 4,000명이 넘는 사람을 수용하려면 규정상 64척의 구명선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화이트 스타 라인은 타이타닉 호에 단지 20척의 구명보트만 싣겠다는 결정을 한다. 20척이라는 숫자는 영국 상무원(Board of Trade)이 의무로 규정하는 최소한의 구명보트 수를 만족하는 숫자였지만 타이타닉 호 수용 인원의 약 1/3만 대피할 수 있는 규모였다. 위급 상황의 경우에는 구명보트를 관리하는 책임자만 추가적으로 배치하면 되었다. 때문에 배의 규모가 큰 타이타닉 호라고 해서 의무적으로 최소한 장착해야 하는 구명보트의 수까지 많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화이트 스타 라인의 J. 브루스 이즈메이 상무이사는 예산을 절약하는 방법으로 구명보트를 충분히 장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결정은 타이타닉 호에 탑승했던 1,500명의 사망 증명서에 사인을 한 것과 마찬가지의 결정이었다.
타이타닉 호 사건이 안전 규제 개정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고, 스미스와 이즈메이 같은 사람들이 저지른 실수가 글과 영화로 영원히 남게 됐다. 어떤 선장도 타이타닉의 스미스 선장처럼 인생을 마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콩코르디아 호의 선장 프란체스코 스게티노도 2010년 콕 집어서까지 얘기하면서 자신은 절대 ‘타이타닉 호의 시나리오’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타이타닉 호 사건은 바다 위 무능력한 리더십을 보여준 대표적인 선례로 아직까지 남아있기 때문에 어떤 선장도 타이타닉 호와 비교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스게티노는 스미스 선장과는 달리 배와 함께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 또 승객들이 구조되는 동안 배에 남아있지도 않았다. 스미스 선장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장엄히 받아들인 결함 있는 영웅인 반면 2010년판 타이타닉 시나리오의 선장은 물 밖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잘못된 결정의 원천은 리더의 두려움 - 막대해진 히틀러의 권력 1932년, 독일아돌프 히틀러에게 실제로 힘을 준 인물은 사실 나치 당원이 아니었다. 히틀러에게 권력을 실어준 두 명의 인물 중 한 명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존경받는 지휘관이자 전쟁 영웅인 파울 폰 힌데부르크 육군 원수였다. 많은 국민들이 그를 독일 정부의 대통령이 되었으면 할 정도로 독일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 힌데부르크였다. 독일 국민과 군대 모두 그를 신뢰했다. 그는 또한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에게 힘을 실어주는 데 실질적 움직임을 취한 사람이기도 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얻는 데 도움이 된 다른 한 명은 프란츠 폰 파펜으로, 많은 타협을 주재한 중도주의의 정치인이었다.
전후는 독일과 독일 국민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다. 물가 상승은 실질 임금을 깎아 먹고 있었고, 연합국은 계속해서 전쟁 배상금을 요구했다. 독일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오직 그들에게는 패전국이라는 비통함만이 존재했다. 이 불만족스러운 상황에서 독일에는 두 과격파와 그에 대립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과격파 중 하나는 국가 사회당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 공산당이었다. 이 두 당은 12개가 넘는 독일의 정당 중 규모와 세력이 가장 크고 강력한 당이었으며, 독일 제국 의회에서 서로 경쟁하는 당이었다. 각 정당 모두 자신만이 독일의 문제에 대해 유일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결국 독일 정부에게 득이 되는 정당은 없었다.
1932년, 대통령과 제국 의회원을 뽑는 선거가 시작됐다. 힌데부르크 49.6%, 히틀러 30.1%, 에른스트 탈만 13.2%, 테오도어 뒤스터베르크 6.8% 순으로 득표가 이뤄졌다.
힌데부르크가 0.5%만 더 득표했더라면 제2차 세계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고 그해 4월 득표를 많이 차지한 순으로 세 후보가 선정되어 결선 투표가 시행되었다. 두 번째 투표에서 힌데부르크는 53%의 득표로 승리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36%의 득표를 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선거에서 패배하자 나치당은 거리에서 폭력을 행사하며 혼란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다른 정당이 여는 모임은 모두 나치 당원의 공격 대상이었다. 특히 공산당의 모임은 더욱 그랬다. 독일 경찰 대부분은 이 문제에 개입하거나 극우파를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다. 경찰들은 스탈린에게 충성하는 나치 당원이 공산당에 대적할 유일한 집단이라고 생각했다. 반대 세력의 대표자는 살해되거나 공개적으로 폭행당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일은 나치당이 선거에서 형편없이 패배하자 발생한 일이다. 나치당의 폭력사태는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졌다. 결국 위협을 느낀 독일군은 ‘나치 돌격대’의 집회를 모두 금지했다.
힌데부르크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이 사태를 통제할 수상의 자리에 강력한 지도자 히틀러를 앉히지 않고 있었다. 힌데부르크는 오토 폰 마이스너 보좌관에게 그 이유를 털어놓았다. 나라의 상황이 이렇게 좋지 않은데,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새롭고 경험 없는 나치의 손에 정부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힌데부르크는 첫 번째로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많은 지지를 받진 못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적도 없는 독일의 천주교계 당 정치인인 프란츠 폰 파펜을 새로운 수상으로 임명한 것이다. 독일의 수상은 정부의 그날그날 업무를 수행하는 자리였다. 파펜은 곧 자신이 모든 측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특히 나치당의 압박은 정도가 더 심했다. 나치당을 회유하려는 노력으로 파펜 수상은 나치 돌격대 집회 금지를 철회한다. 그리고는 나치당이 프로이센에서 선출된 사회 민주당 정부를 강제 퇴출하게 해주었다. 수상의 이런 회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치당은 여전히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온건파를 파펜과 떨어뜨려, 파펜이 수상직에서 스스로 물러나도록 한다. 이 일로 전직 수상은 아돌프 히틀러와 개인적 동맹을 맺게 된다.
새 정부의 배후에는 육군 원수 쿠르트 포노 슐라이허가 있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슐라이허 수상은 제국 의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나치당 때문에 나라가 혼란해져 예상보다 훨씬 적은 지지를 받게 된 것이었다. 세 번째 선거가 열렸고, 나치당도 제국 의회에서 34의석을 잃게 된다. 하지만 물가가 거칠게 치솟고 폭력이 난무한 나라 상황에서 제국 의회는 계속 교착 상태였기 때문에 나치당의 의석수가 줄더라도 의회에 큰 변화는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슐라이허가 수상으로 임명된 지 57일이 지난 이후 그는 수상직에서 사임한다. 독일군의 우려는 더욱 커졌고, 국민들도 위협을 느꼈다. 한편 당파싸움으로 의회는 계속해서 휴정이 되었다. 이제는 국가 사회주의자가 다 된 프란츠 폰 파펜은 히틀러와 나치당만이 독일을 붕괴로부터 막아낼 수 있는 좋은 카드라며 힌데부르크를 설득시켰다. 그러면서 자신이 부 수상으로서 히틀러의 정책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독일 정부의 수상으로 임명된다. 수상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히틀러는 자신의 손에 있는 모든 권한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독일 옛 의회였던 제국의회의 건물이 2월 27일 불에 연소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나치당이 의회 건물에 불을 지르고 유대인에게 책임을 돌린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과 나라의 보호를 위한 법’이라는 법령을 공표하도록 힌데부르크를 설득하기에 이른다. 이 법령은 기본적으로 시민의 자유를 중단시키고 제국 의회에게 히틀러의 독재 권력을 승인하도록 하는 법령이었다. 히틀러는 법령의 승인을 위해 의원들을 극도로 압박했으며, 이 법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급작스럽게 실종되면서 법령은 1933년 3월 23일 국회를 통과하게 된다. 441명이 이 법령에 찬성했고 반대한 의원 수는 단지 84명에 불과했다. 세 번 선거에서 패배한 이력이 있는 히틀러였지만 이제 그는 독일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폴 폰 힌데부르크는 그 후 곧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히틀러의 권력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제 독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프란츠 폰 파펜은 오스트리아의 대사가 되었고, 그 후 터키의 대사로 재임했다. 그는 1945년 뉘른베르크에서 개인적 부를 회복해 1969년 5월 사망하는 순간까지 편안한 삶을 누렸다.
독일 의회에서 나치당은 608의석 중 230석 이상은 결코 차지하지 못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시기에도 전체 1/3 이상의 득표를 얻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힌데부르크와 파펜이 내린 잘못된 결정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여전히 독일 전체의 통제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현실성이 없는 국가적 해결책 - 대약진정책 1950∼1960년대, 중국 누구에게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마오쩌둥은 많은 사람을 죽인 폭군이거나 훌륭한 선지자가 될 수 있다. 중국의 많은 사람들은 무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정책, 지방의 교육 질을 높이기 위한 정치, 그리고 여성의 지위를 개선시키기 위한 마오의 노력을 예로 들며, 당이 시키는 대로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만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비전이 지나쳐 폭력적이라고 하는 서양의 비평을 기준으로 삼아 마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마오는 대약진 정책을 통해 중국의 농업과 산업에 활기를 불어 넣을 방법을 찾고 있었다. 2차 5개년 계획은 중국 경제의 현대화 추구였다. 마오의 대약진 정책으로 중국의 경제가 흔들렸고 그 결과 엄청난 기근이 발생했지만, 마오의 정책은 어찌되었든 미래를 향한 것이었다. 중국의 대기근은 아마도 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인재이고, 마오쩌둥주의의 결점을 적나라하게 밝히는 사건일 것이다. 마오의 유산은 그의 서툴렀던 결정과 만행에 의해 죽은 수백만의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생각될 수 없다.
1958년 중국은 서양의 산업경제에 맞추기 위해 고전하고 있었다. 마오는 급속한 산업화를 위해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으려고 시도했다. 그의 첫 번째 계획은 중국의 철강 생산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마오는 비현실적이긴 했지만, 중국이 15년 안에 철강 생산국으로서 영국을 뛰어넘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는 1년 안에 철강 생산을 두 배로 늘리려는 터무니없는 목표를 세웠다. 동시에 마오는 현대적 기술자나 현대적인 자비에 지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대신 뒷마당에 용광로를 설치하고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 노동자들은 숙련되어 있지 않았으며 고철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 생산물은 쓸모가 없는 저품질의 선철이었다.
1959년 후반 마오가 경제적 이윤이 전혀 없는 데 급여를 지불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 계획은 쥐도 새도 모르게 중단되었다. 철의 생산은 계획이 실시되고 처음 몇 해 동안 성장했지만, 1961년 급격히 줄어들었다. 계획의 성공을 위한 모두의 노력은 얼마 되지 않는 결과를 위한 지나친 투자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중국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말하는 대약진 정책의 기간은 정책이 실제로 진행되었던 1953년에서 1983년까지의 기간에서 단지 몇 해만을 말한다.
대약진 정책의 잘못 판단된 계획이 중국 산업의 성장을 막았다면 중국 경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농업은 산업보다 더 심각하게 피폐해졌다. 1950년대에 농부들은 수십 개의 가정으로 이루어진 농업공동체에서 거주했다. 강제 주거 이전의 일환으로 전체 지방의 30~40퍼센트의 개인 주택은 붕괴되어 비료가 되었다. 이 조치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부동산의 파괴였다. 새로운 공동체에서 마오는 소련의 사이비 과학자 트로핌 리센코가 주장하는 농업 기술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리센코는 비옥한 땅에 작물을 빽빽하게 심는 것이 적당히 심는 것보다 좋다고 믿었다. 이 기술은 같은 종류의 씨앗을 촘촘하게 심으면 같은 종의 식물들은 경쟁하지 않고 자란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나온 ‘짧게 베기기술’이었다. 그의 그릇된 견해는 수백 년간 농부들에 의해 전해졌지만, 비판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마오쩌둥주의의 방식을 따르거나 시달렸다. 이 기술은 작물 성장을 저해했고 생산을 둔화시켰다. 또 다른 농작법은 ‘깊이갈이’였다. 마오는 가장 비옥한 토양은 표면에서 몇 미터 아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깊이갈이를 실시했다. 토지가 얕은 지역에서 이 농작법 때문에 바위와 모래를 휘젓게 되었고 이는 표면의 표토를 묻어버리고 토질을 떨어뜨려 농작물의 수확량을 줄어들게 했다.
잘못된 정책으로 환경재난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며 더욱 심각해졌다. 1958년 메뚜기 떼가 농촌의 농작물을 모두 먹어치웠다. 메뚜기의 수는 보통 참새와 같은 천적에 의해 억제되었지만 마오의 근시안적인 참새박멸 지시로 거의 모든 참새를 죽였기 때문에 메뚜기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1959년에는 황하 홍수로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다. 1960년에는 중국의 농업지대의 60퍼센트에 달하는 면적에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는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또한 풍작이어도 때의 농작물은 모두 수확되지 않고 썩도록 남겨졌다. 마오가 많은 농사꾼들을 철강 생산지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농촌의 일손은 부족했다. 줄어든 노동력 때문에 곡물의 생산은 급격히 떨어졌다.
그 결과 대기근이 시작되었다. 마오쩌둥주의의 관료 체제에 따라 정책의 실패는 관리들의 생사문제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대기근이 시작되고도 얼마 동안은 당의 지도자들이 그 위험의 정도에 대해 알 수 없었다. 지방 정부는 수확량이 적힌 가짜 보고서를 상관에게 보고하고, 그 상관은 숫자를 과장하여 또 다시 바꾸어 다음 상관에게 보내는 것이 반복되었다. 중앙 정책 기획자들은 이 부풀려진 숫자에 따라 곡식을 배급했다. 그 결과 지방의 농민들은 굶주리는 반면, 과도한 양의 곡식이 도시 거주자들에게 가거나 수출용으로 보내졌다.
중국은 소련에 진 빚을 갚는 수단으로 곡식을 수출하였다. 체면을 살리기 위해 중국 지도자들은 일본과 같은 곳의 원조 제안을 거절했다. 고위 간부들은 기아에 대한 보고를 무시하기 일쑤였고, 곡물저장고에 비축되어 있는 곡식을 풀지 않았다. 그들은 실수를 인정하기보다 농민들이 곡식을 숨기고 있다는 죄목으로 고소했고, 농민들은 부지기수로 고문당하거나 살해되었다. 펑더화이 장군과 같이 정책을 비판한 당의 간부들은 ‘부르주아지’로 분류되어 숙청되었다.
기아, 자살, 혹사 그리고 정부의 횡포 때문에 대약진 정책 기간 동안 적어도 1,500만 명이 죽었다. 이 수는 당시 중국 정부가 발표한 실제보다 적은 추정치이다. 실제로는 3,000만 명이 죽었을 가능성이 있고, 인구 통계학자들은 그 수가 4,500만 명에 가까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가적인 위기는 정치적으로 마오를 약하게 했고 그는 국가주석의 자리에서 강제로 밀려났다. 이후 그는 공산당의 총서기로서 위치를 유지하고 문화대혁명 시절에 이 지위를 이용해 권력을 되찾았다. 마오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종종 잔인하게 처벌되었기 때문에 개혁은 거의 불가능했다. 당의 원로인 류사와치는 그 참사를 “30퍼센트는 자연의 책임이고, 70퍼센트는 인간의 책임”이라고 표현했다. 마오에 대한 사오치의 솔직한 비판은 마오가 그의 권력을 완전히 되찾았을 때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사오치는 1969년 자본주의에 물든 반역자로 낙인찍혀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 이러한 예가 마오를 실패에 민감한 사람으로 표현하여 비판한 사람들에게 숨통을 죄어오는 경고로 작용했다. 마오는 생명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고, 반체제 인사의 의견을 묵살했기 때문에 그의 비현실적이면서 그릇되었지만 항상 야망이 넘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마도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마오의 태도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수백만 명의 죽음을 야기한 가장 큰 실수일 것이다.
마지막을 향한 묘책 - ‘이란-콘트라’ 사건 1986년, 워싱턴 D. C.새로운 적을 만들기 위한 쉬운 방법 중 하나는, 지독한 보수주의자들 앞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평판을 더럽히는 것 말고 더 빠른 방법은 없다. 자, 한 번 그렇게 해보자. 레이건은 정치인 시절 그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하였고, 어떤 비난에도 끄떡없는 대통령이었다. 오늘날 레이건은 공화당의 정신적 지주이다. 미국의 40번째 대통령은 그의 친기업 세금 정책과 공산주의에 맞선 강경 노선으로 대중에게 좋게 기억되고 있다. 반면 비평가들은 그를 행정부와 긴밀하지 않았던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이란-콘트라 사건만큼 이를 설명해주는 좋은 예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은 레이건 대통령의 실망스럽기만 한 판단 부족을 증명하는 국제적인 망신거리가 되었다. 이 사건에 레이건이 얼마나 개입했는지를 둘러싸고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많지만, 대통령이 그의 참모들을 더 잘 관리했어야 했다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다.
콘트라는 니카라과의 전투적인 반공단체였다. 사회정당인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1979년 니카라과 혁명 이후 니카라과를 지배하고 있었다. 레이건은 콘트라를 “미합중국 건국의 아버지들과 동등한 도덕성을 지녔다”며 지지했다. 미국은 1982년 의회에서 민주당이 볼랜드 법안을 통과시킬 때까지 전폭적으로 이 반군의 활동을 지지했다. 그 법안은 니카라과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콘트라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결정은 부분적으로나마 미국을 국제법의 틀에 맞추려는 것이었다. 콘트라가 미국으로의 마약 밀반입에 연루되어 있었고, 강간이나 고문 및 납치를 포함하는 폭력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법안은 주로 미국과 콘트라와의 연결을 단절하려는 목적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레이건은 그가 아껴 마지않는 콘트라가 패배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고, 국가안보보좌관인 로버트 맥팔레인을 책망했다. “나는 당신이 콘트라가 연명할 수 있도록 도울 무엇이든 하길 바란다.”
그 사이 미국은 이란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79년 인기는 없었지만 친서방 성향의 왕을 몰아낸 이란의 혁명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팽팽해졌다. 카터 행정부의 끝자락에 있었던 이란 인질사건에 대해 대통령 당선자 레이건은 “미국은 결코 야만인과 타협하여 납치된 사람을 위한 몸값을 지불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이때 맥팔레인은 레이건에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미국이 ‘온건한’이란 파벌에게 무기를 판다면 미국은 미국인 인질을 석방하는데 그들과 연결된 인맥을 이용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이었다. 이후 월시 이란-콘트라 보고서에서 이란의 중도파는 없었고 단지 무기만이 이란으로 갔다고 설명했다. 레이건은 인질을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에 이 거래는 그가 야만인이라고 언급했던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 온건주의자를 상대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안심시켰다. 레이건은 무기와 인질의 교환을 허가했다. 이스라엘을 통해 미국은 이란에게 1,500개 이상의 대전차용 무기와 대공 미사일을 팔았다. 3명의 인질이 석방되면서 3명의 미국인이 그들을 대체하기 위해 사로잡혔다. 거래는 반 서구 국가에 무기를 전달하는 것보다 좀 더 큰 문제가 되어버렸는데, 미국의 거래는 이웃나라 이라크와 전쟁을 하고 이란에게 무기를 전달한 꼴이 되어버렸다.
맥팔레인은 1985년 말 사임하였고, 존 포인덱스터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포인덱스터는 올리버 노스 중령이 콘트라 반군과의 거래로 생긴 자금을 사용하도록 허가한다. 거래로 받은 약 300억 중 180억은 볼란드 법안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밀리에 콘트라를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1986년 11월, 이 합의는 무기의 공수 작전용 비행기가 니카라과에 추락하는 바람에 드러났다. 이란 정부는 같은 달에 그 사건을 확인했다. 노스가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수많은 문서를 제거하고 나서 노스는 해임되었고, 포인덱스터는 사임했다. 이 사건에 레이건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모두 사라졌다.
레이건은 즉시 존 타워 상원의원이 주도하는 전문 위원단을 꾸렸다. 타워 위원단은 레이건이 상세하게 거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정황을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냈고, 대통령이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간부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해 대통령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1987년 레이건은 미국 국민에게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사건이 벌어졌다는 이유로 나 역시 많이 분노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활동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 몇 달 전 나는 미국 국민들에게 인질과 무기를 거래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의 진정한 마음과 최선의 뜻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하지만 사실과 증거들은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가리킨다”고 하였다. 노스는 후에 레이건이 거래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의심했고, “대통령이 거래에 대해 열렬히 환영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밝혔다. 단지 14퍼센트의 국민만이 대통령을 믿었던 것처럼 대부분은 레이건이 혐의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꽤 회의적이었다. 레이건의 지지율이 67퍼센트에서 46퍼센트로 급락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인기는 떨어졌지만 늘 그렇듯이 레이건은 논란으로부터 다시 벗어났다.
결국 노스, 포인덱스터, 맥팔레인은 모두 은폐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노스는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유죄 선고를 받은 반면, 나머지 사람들은 레이건의 다음 대통령인 조지 H. W. 부시에 의해 사면되었다. 사건의 영향이 국내 정치적으로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미국에 대한 신뢰도는 큰 타격을 입었다. 니카라과는 국제사법재판소에 고소하여 승소했다. 그러나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지위를 이용해 어떤 형태로든지 평결의 집행을 차단했다.
이 사건을 통해 미국은 인질범의 요구에 응한다는 것은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는 또한 미국이 국제 분쟁에 간섭하기 좋아한다는 인식을 강화시켰다. 제국과 같은 나라인 미국은 인권을 보호하기보다 공산주의에 맞서는 것에 더 관심있어 했다. 그리고 레이건의 명성이 대단한 보수주의자로 끈질기게 이어지는 동안, 이란-콘트라 사건은 그의 업적에서 오점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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