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공유하라! 스포츠 한국사

   
김학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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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2��



■ 책 소개
한국 현대 스포츠 통사(通史)! 
김일, 차범근, 최동원, 미도파 배구단, 허재, 박찬호, 박세리,김연아까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울고 웃던 그들을 추억한다.

스포츠가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같이 숨쉬고 변화하고 살아왔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책.1940~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 이후로 나누어 그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생활상 모두를반영한 스포츠의 순간순간을 살펴본다. 시대의 이단자였던 홍수환, 80년대 세계 최고의 리그를 평정한 차범근, ‘우리도 다시 뛰면 할 수 있다’는자신감을 국민들의 마음속에 심어주었던 박세리, 한일월드컵의 4강 신화와 히딩크 감독, 한국 동계스포츠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낸 김연아, 세계를재패한 마린보이 박태환 등 50가지의 스포츠 한국사 이야기를 오롯이 담아냈다.

스포츠 한국사를 하나하나 조사하여 찾아낸 이야기들을 50개의 사진과 기록으로 만들었고 그 시대를 살고 같이 견뎌내고지켜봐온 관객이자 주인공인 우리들의 모습도 더불어 되살렸다.

■ 저자 
김학균
 -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졸업하고 신한금융투자와 한국투자증권을 거쳐 현재는 대우증권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1979년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손잡고 처음 야구장에 다녀 온 이후 스포츠를 보는 일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가 되었다. 늘 투자와 관련한 아이디어를 고민하며 분주한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야구장의 한갓진 외야에서 마시는 맥주 한잔에서 한숨 돌릴 여유를 찾곤 한다. 스포츠동아, 주간야구, 펀치라인 등 지금은폐간된 스포츠 잡지들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남정석 -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행정대학원에서 정책학을 전공한 후 광고회사인 대홍기획을 거쳐 스포츠조선에 입사했다. 스포츠팀에서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농구, 모터스포츠 등을취재하며 2002년 한일월드컵과 부산아시안게임, 2004년 아테네올림픽, 다수의 F1 그랑프리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문화레저팀에서는 등산과레포츠, 여행, 그리고 경제산업팀에서는 게임과 e스포츠를 담당했다. 현재는 스포츠팀에서 스포츠와 게임 산업을 함께 담당하며 ‘융합형 기자’를시도하고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정직한 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만나고, 가슴 뛰는 스포츠 현장을 누비는 것에 보람과 재미를 느끼며 살고 있다.

 -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고 한국일보, 코스닥위원회를 거쳐 머니투데이에서일하고 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때 프로야구 출범을 보며 환호하는 어린이였고 중학교 때 아시안게임, 고등학교 때 88올림픽, 직장인이돼서 2002년 월드컵을 경험했다. 연이어 창간한 스포츠신문을 보느라 성적이 떨어졌다고 핑계를 대기도 했고 오승환, 이상훈, 최동원(이상야구), 방수현(배드민턴) 선수와 동문인 것에 가끔 우쭐해지곤 한다. 이전에는 스포츠 스타와 경기 결과에 대한 관심이 주였다면 기자가 되고나서는 스포츠를 대할 때나 일을 할 때 ‘사람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일을 하자’고 스스로 다짐한다. 스타든, 팬이든, 스포츠든, 역사든 사람이주인공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차례
시작하며… 

1940~1960년대 - 스포츠는 눈물이자 희망이다
해방 후부터 60년대까지, 대한민국스포츠의 시작 
통증과 함성 속에 고유명사가 된 김일 
인생과 역사, 마라톤의 승자 마라토너 이창훈 
백인천 일본 프로야구진출, 한국 스포츠 해외 수출의 원조
김기수, 국가 주도 경제의 스포츠 버전
선진국 필리핀, 가난한 한국에 체육관을 선물하다
1966년과 2002년, 실미도 축구팀 양지를 아십니까?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축구 대회를 만들다-박스컵 
스포츠 저널리즘의시작, 일간스포츠 창간

1970년대 -스포츠는 감동이다
1970년 아시안게임 개최 반납,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남북 대치에 너덜너덜해진 스포츠 정신,‘져주기 게임’ 
한국 여성의 힘과 여자 탁구 세계 제패 
복싱 신인왕전, <슈퍼스타K&&의 권투 버전에 국민이 열광하다
진정한 무적함대, 여자배구 미도파 
홍수환, 스포테이너의 탄생 
남자들도 못 한 일, 한국 낭자들의 선전, 1976년,1984년 올림픽 
영원한 천하장사 김성률, 씨름판을 통일하다 
남자농구 이동균 스포츠 파동, 삼성vs현대 재벌 간 경쟁체제 돌입

1980년대 - 스포츠는즐거움이다
광주와 야구, 그리고 선동렬 
1980년 아시안컵 축구 4강전, 남북 축구 대결사의 결정적 순간
80년대 최고의 수출 상품 차범근, 세계 최고의 리그를 평정하다 
‘쎄울’ 5공의 첫 업적, 올림픽이 유치되다 
고교 야구의마지막 전성기, 선린상고의 불운 
‘1982년 프로야구 개막’ 3S 정책이 꽃피우다 
컬러TV의 등장과 천하장사 이만기
헝그리복서여서 더 슬펐던 김득구의 죽음 
목포의 눈물. 부산갈매기 노래 속 지역감정 골은 깊어만 간다 
정의사회 구현,항의하는 야구 감독 구속 
국기 태권도에도 배어든 분단의 흔적 
80년대, 스포츠광 대통령을 두다 
1988년 올림픽 개최,독재개발시대 최대의 활황을 맞이하다 
팔 빠지게 공을 던졌던 최동원을 추억한다 

1990년대 - 스포츠는 위로다
남북 화해의 상징.코리아팀 결성 
‘오빠부대’의 탄생, 농구 열풍을 이끌다 
한국야구의 전환점 메이저리거 박찬호 
LPGA를 제패한 ‘요술공주’박세리, IMF 시대의 아이콘 되다 
프로야구 해태의 9번째 우승과 KIA의 V10사이 
IMF 경제 위기와 허재의 불꽃 투혼

2000년 이후 - 스포츠는미래다
‘오 필승 코리아!’ 한일월드컵의 4강 신화와 히딩크 감독 
이종격투기 열풍, 왜 천하장사와 세계챔피언은한국을 떠났을까? 
칸첸중가에는 올랐나? 오은선 파문, 상업 등반의 명과 암 
여자 핸드볼, ‘우 생 순’ 신화는 눈물에서 싹텄다
IT붐과 e스포츠, 그리고 ‘테란의 황제’ 임요환의 등장 
F1(포뮬러원) 코리아 그랑프리의 개최, 국민 소득에 걸맞은 스포츠의탄생인가? 
김연아의 금빛 점프, ‘퀀텀점프’로 이어지다 
이영하의 좌절부터 김연아의 환희까지, 한국 동계스포츠 
조오련,최윤희, 그리고 박태환. 서말구, 장재근 그리고……. 
‘베이스볼 키즈’ 세대의 등장, 그리고 게임사 엔씨소프트의 9구단 창단
베팅한 대로 뛴다, 프로축구 승부조작 스캔들 
사라진 성동원두, 동대문의 추억 

스포츠와 대한민국의 역사





생활의 달인을 통해 대한민국 주부들

기억을 공유하라! 스포츠 한국사


1940~1960년대 - 스포츠는 눈물이자 희망이다

해방 후부터 60년대까지, 대한민국 스포츠의 시작

나라를 되찾으면, 간절한 소원을 이루면 신천지가 열릴 것 같았다. 식민지 국민의 설움으로 원치 않게 일장기를 달 수밖에 없었던 스포츠 선수들은 1945년 해방 뒤 그토록 원하던 태극기를 달 수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은 외형상 대한민국으로 국명만 바뀌었지 여전히 약소국인데다 정부도 없는 신생국가 신세였다.


처음 대한민국 선수로 올림픽 무대에서 태극기를 게양시킨 주인공은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역도의 김성집이었다. 정부 수립 이틀 전인 1948년 8월 13일이었다. 며칠 뒤 복싱에서 또 다른 선수, 한수안이 동메달을 땄지만 1호 메달 = 김성집은 흔들림 없는 진실이었다. 당시 28세의 휘문고 체육교사였던 김성집은 올림픽 시상식에서 태극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회고했다.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처음 참가해 첫 메달을 얻은 감격과 런던에 도착하기까지의 고생스러웠던 일정에 대한 서러움도 작용했으리라.


당시 60여 명의 런던올림픽 출전 선수와 임원진은 일본, 중국, 홍콩, 인도,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등으로 배와 열차를 갈아타며 무려 20여 일의 원치 않는 여행을 해야만 했다. 수월치 않은 일정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지원도 당연히 좋을 리 없었다. 당시 선수단은 한여름인데도 단복으로 가져간 두꺼운 겨울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고 뱃멀미에 무더위에 허리까지 다친 그는 악전고투 끝에 동메달을 따냈다고 회고한다. 이같이 박한 대우에는 빠듯한 자금 사정도 작용했다. 당시 막 출범을 앞둔 정부에서는 올림픽 출전 자금을 해결하기 위해 올림픽 후원회를 만들었고 올림픽 후원권을 발행, 판매해 8만 달러를 겨우 조달했다.


김성집은 4년 후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또 한 번 동메달을 따내 대한민국 최초의 2회 연속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는 감격을 누렸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졌고, 전란의 비극 속에서도 한국이 헬싱키 올림픽 출전을 결정한 가운데 나온 메달 소식이었다. 그는 1954년 필리핀 마닐라아시안게임 때도 금빛 바벨을 번쩍 들어올렸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나이였다. 그가 첫 올림픽 메달을 땄을 때인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 당시 대한민국 국민 평균 수명은 46.8세였다. 남자로 따지면 40대 초반에 세상을 뜨는 일이 드물지 않았을 때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는 현재 나이로 환산해 40~50대에 첫 메달을 딴 셈이 된다. 게다가 32세에 참가한 헬싱키올림픽에서도 바벨을 들어 올려 동메달을 땄고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선 36세의 많은 나이로 참가해 5위에 입상하는 노장 투혼을 발휘했다.


그는 현역 은퇴 후에는 대한체육회 이사와 사무총장을 거쳐 18년간 한국 엘리트 체육의 산실인 태릉선수촌 촌장을 맡아 태극전사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김성집은 2011년 9월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됐다. 해방 후 대한민국이 첫 출전한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인의 이름으로 첫 동메달을 따냈고 4년 뒤에 또다시 메달을 딴 공로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이후 영원한 현역의 체육인으로 체육 발전에 이바지한 업적도 평가받았다.



1970년대 - 스포츠는 감동이다

복싱 신인왕전, <슈퍼스타K>의 권투 버전에 국민이 열광하다

프로 스포츠가 활성화됐던 80년대 이전에도 국민들을 열광시킨 스포츠는 존재했다. 특히 국가대표팀 축구 경기, 고교야구, 프로레슬링, 프로복싱 등은 80년대 초까지 국민스포츠로 불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었다. 이들 인기 스포츠들 중 단연 으뜸은 프로복싱이었다. 복싱만이 명실상부한 세계 No.1이었기 때문이다.


청룡, 화랑 등으로 불리던 국가대표 1진의 축구 경기(요즘으로 치면 A 매치)도 큰 인기를 끌었지만 당시 한국 축구의 경기력이 세계 1류급은 아니었다. 냉정히 말하면 세계 1류는커녕 아시아 1류도 아니었다. 60~70년대 한국 축구에게 월드컵과 올림픽 아시아 예선은 난공불락의 벽이었다. 고교야구 역시 지방에서 올라온 도시민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역할 이상을 하지는 못했다. 프로레슬링 역시 김일의 박치기와 천규덕의 당수가 국민들을 열광시켰지만, 이미 당시에도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 재미는 있었지만 프로레슬링에는 진정성이 없었다.


그렇지만 프로복싱은 달랐다.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세계 최고였다. 요즘처럼 국제 복싱기구가 난립하는 것이 아닌 WBA(세계권투협회)와 WBC(세계권투평의회)라는 권위 있는 2개 기구의 세계챔피언만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80년대 초까지 한국에 세계 1등이 있었던가? 해외로 아이들을 파는 해외 입양 1위, 누이와 엄마가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잘라 판 가발 수출 1위라는 불명예 말고 당당히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는 우리에게 없었다. 아니 있었다. 주먹 하나로 세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철권들이 있었다. 김기수, 홍수환, 유제두 등의 복싱 세계챔피언은 범국민적인 영웅이었다. 이들이 외국 선수들과 자웅을 겨룰 때 서울의 거리는 한산했다. 80년대 중반까지도 복싱 세계타이틀매치가 벌어지면 다방에서 세계타이틀 매치 생중계라는 대자보를 붙이고 손님들을 모으던 시기였다.


맨 주먹 말고는 가진 것 없는 청춘들이 체육관으로 몰려들었다. 원진 체육관(김태식을 길러낸 곳), 동아체육관(박종팔, 유명우, 비운의 복서 김득구가 소속된 곳), 대원체육관(김철호가 소속된 곳), 와룡체육관 등이 인기를 끌었다. 복싱짐(체육관)의 전성기는 70년대 말~80년대 초였다.


복싱의 인기가 남다르다 보니 방송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MBC가 가장 먼저 나섰다. 이름하여 <MBC 전국 신인왕전>, 최근 가수 등용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었던 <슈퍼스타K> <위대한 탄생>의 프로복싱 버전에 다름 아니었다. 신인왕전은 1971년부터 시작됐지만,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것은 MBC가 중계를 하기 시작했던 1978년부터였다. MBC는 프로복싱의 인기가 시들해진 90년대 초반까지 늘 신인왕전을 중계했다. 4강과 결승전은 늘 생중계였다. 복싱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70년대 후반~80년대 초에는 한국과 일본의 신인왕이 겨루는 한일 신인왕 교류전도 개최됐다. 신인왕전이 인기를 끌자 KBS도 880년대 초에 <신인선수권>이라는 비슷한 대회를 만들었다. 케이블 방송에서 시작된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자, 공중파도 비슷한 프로를 만드는 요즘의 세태와 다르지 않다.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지원자의 대부분이 생짜 아마추어인 것처럼 명색이 프로복싱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신인왕전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어떤 경기는 막싸움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인왕전의 미덕도 많았다. 물불 가리지 않는 신인들의 파이팅은 화끈한 KO 승부를 많이 만들었고, 이런 점이 신인왕전의 인기를 지속시켰다.


신인왕전이 배출한 별은 많았다. 많은 선수들이 신인왕전을 통해 이름을 알린 후 세계챔피언까지 올랐다. 세계타이틀을 17차나 방어했던 유명우, 세계 복싱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장정구가 신인왕전 우승자 출신이다. 이밖에도 독일 병정 김태식, 강타자 박종팔, KO왕 백인철, 콧수염 김철호 등이 신인왕전이 배출한 챔프들이었다. 2008년에 링에서 목숨을 잃은 최요삼도 90년대 신인왕 출신이다.


지금 세상은 복싱과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은 권투를 하지 않는다. 복싱을 헝그리 스포츠라고 부르곤 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배고프지 않은 것 같고, 맞아가면서 돈을 벌 만큼의 절박함도 없는 것 같다. 이 차이는 국민소득 1000달러와 2만 달러의 차이일 것이고, 그리고 30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거리감일 수도 있다. 주먹 하나로 인생을 바꾸겠다는 복서의 절박함, 또한 그들에게 열광하고 웃고 울었던 우리들의 절박함, 복싱은 보릿고개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다지 풍요롭지는 못했던 시대의 거울이 아닌가 싶다.



1980년대 - 스포츠는 즐거움이다

80년대 최고의 수출 상품 차범근, 세계 최고의 리그를 평정하다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다. 노래 잘하는 가수들이 나와서 실력을 겨룬다. 무엇보다도 실력만큼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했던 가요계의 숨겨진 실력자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나 <나는 가수다>에 조용필이 출연한다면 대중들의 반응이 어떨까? 아마도 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가수에 출전하는 가수들의 실력은 분명 대단하지만, 조용필은 다른 가수들과의 경쟁이 필요 없는 레전드이기 때문이다. 조용필은 그냥 조용필로 충분하다.


스포츠에도 레전드는 존재한다. 야구의 선동렬, 고 최동원 등이 그렇고, 이승엽도 은퇴 후에는 전설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프로레슬링에는 김일이 있다. 축구에서는 박지성이 유력하다. 그리고 차범근이 있다. 감독으로서의 차범근에 대한 평가는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축구 선수로서의 차범근은 레전드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차범근은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다. 육상이나 수영 등과 같은 기록경기가 아닌 구기 종목에서 최고라는 평가는 주관적인 경우가 많다. 딱히 최고를 공인받을 수 있는 기준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축구팬들의 기억 속에서 차범근은 최고였다. 올드팬들은 1976년 박스컵 국제축구대회 한국과 말레이시아의 경기를 잊지 못할 것이다. 한국 축구대표 1진 화랑은 홈그라운드에서 말레이시아에 의외로 고전, 경기 종료 15분 전까지 1-4로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팀에게는 차범근이 있었다. 그는 막판 5분 동안 혼자 세 골을 넣으면서 홈그라운드에서의 치욕적인 패배를 막았다. 햇살 좋은 초가을 오후의 짜릿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물론 차범근이 한국 축구를 월드컵이나 올림픽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한국은 이란, 호주 등에 번번이 발목을 잡히면서 지역예선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 축구는 좌절했지만, 차범근은 거의 매 경기마다 날아다녔다. 차범근의 축구는 호쾌했다. 화려한 발재간은 없었지만, 압도적인 스피드로 수비수들을 농락했다. 공을 길게 툭 차 놓고 빈 공간을 달려 들어가는 역동적인 동작은 차범근의 전매특허였다. 아시아권에서는 차범근을 막을 선수는 없었다. 아니 세계적으로도 차범근을 막을 만한 수비수는 흔치 않았다. 차범근은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도 정상급의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다.


차범근은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이 끝난 후 서독(현 독일) 분데스리가로 진출했다. 입단한 팀은 당시 78~79시즌 분데스리가 최하위 팀이었던 다름슈타트68. 계약 기간은 6개월이었다. 차범근은 다름슈타트68을 징검다리로 해 더 좋은 팀으로 이적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고, 다름슈타트68은 미지의 나라 코리아에서 온 무명의 선수의 기량을 믿지 못했던 측면이 있어 양자 간에 단기 계약이 체결됐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차범근은 차범근이었다. 리그 데뷔전에서 왼쪽 공격수로 출전한 차범근은 두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독일의 축구 전문지 「키카」에 대서특필될 정도의 맹활약이었다.


그러나 차범근은 다음 경기를 치르기까지 6개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독일 진출 직전 차범근은 공군팀 소속이었다. 정상적인 제대 날짜는 1979년 5월 말이었지만, 대한축구협회는 차범근에게 의가사제대 조항이 적용된다고 판단해 1979년 1월부터 해외 취업을 허가했다. 그러나 국방부의 유권해석은 이와 달랐고,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르고 귀국해 남은 복무기간을 채워야 했다.


6개월 후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중위권팀인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했다. 차범근의 기량은 독일 무대에서도 통했다. 특히 자신보다 먼저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있던 일본인 오쿠데라와의 대결에서 완승을 거두며 아시아 최고의 선수는 차범근이라는 점을 입증했다. 차범근은 오쿠데라가 뛰고 있던 퀼른과의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맹활약했다.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 팀에 UEFA컵 우승을 안겼고,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후에도 팀을 UEFA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차범근은 독일에서 10년 동안 뛰었다. 그 기간 동안에 그가 넣은 골은 98골. 당시까지 기준으로 분데스리가 외국인 선수 최다 골이었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역대 외국인 선수 중 3위의 기록이다. 독일 언론에서는 그에게 차붐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말 그대로 붐을 일으켰다는 의미이다.


요즘의 독일 분데스리가는 세계 최고의 리그가 아니다. 독일 축구팀들은 클럽의 재정 건전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굳이 많은 돈을 투자해 해외 최고 선수들을 스카우트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인보다는 독일 선수들을 더 중시하는 게르만 순혈주의의 전통도 비교적 강하다. 2000년대 분데스리가의 지위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에 이어 유럽 4위권 정도의 리그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차범근이 활약하던 80년대에 분데스리가는 세계 최고의 리그였다. 무엇보다도 당시 독일 축구의 수준이 세계 최고였다. 독일 축구는 1974년 독일에서부터 1990년 이탈리아까지의 다섯 차례 월드컵에서 결승 진출 4회, 우승 2회라는 화려한 금자탑을 쌓았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2000년대 최고의 리그로 평가받고 있지만,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이 국제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아니다. 외국에서 수입한 용병들의 능력이 프리미어리그의 수준을 높였던 것이다. 그러나 차범근이 활약했던 80년대의 세계화 정도는 요즘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축구 리그 역시 해외 선수들에게 문호가 완전히 개방되지 않았다. 즉 당시에는 그 나라의 축구 실력이 곧 리그의 실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차범근은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인정받았던 최초의 아시아 선수였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차범근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었다. 경제적 자원이 빈한했던 60~70년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수단은 몸뚱아리밖에 없었다. 당시의 청춘들은 광부로, 간호사로 서독으로 떠났다. 남들 하기 싫어하는 궂은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들이던 시절, 차범근은 그들에게 자랑이고 긍지였을 것이다. 또한 고국에 있던 국민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요즘이야 반도체도 잘 만들고, 배도 잘 만들고, 야구도 잘 하지만, 70~80년대 한국 경제와 스포츠의 전반적 수준은 세계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건국 이후 올림픽 금메달은 양정모가 유일했고, 연간 수출은 갓 100억 달러를 넘어서는 정도였다. 외제는 무조건 국산보다 낫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어서 양담배를 몰래 피우는 것이 특권의 상징처럼 보이던 시대였다. 여자 테니스의 이덕희, 남자 탁구의 박이희 등 우리의 스타들이 해외에 진출했지만, 세계 수준과는 격차가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이런 때에 차범근이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맹활약했다. 차범근은 대한민국의 자랑이었다. 차범근이 전설이 되는 데는 차. 범. 근이라는 이름 석 자로 충분하다. 



1990년대 - 스포츠는 위로다

LPGA를 제패한 요술공주 박세리, IMF 시대의 아이콘 되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끝내 이기리라~ 순간 긴 침묵이 흐른다. 맨발로 물속에 들어간 한 골프선수는 연못 턱에 걸린 공을 신중하게 바라본 후 부드럽게 스윙을 했다.


"훅~" 공은 페어웨이에 안전하게 안착한다. 그리고 마침내 터져 나오는 함성. 이제 소녀티를 막 벗은 듯한 앳된 선수는 그제서야 함박웃음을 지었다. 연못을 빠져 나오는 그 선수의 발바닥은 까무잡잡한 피부색과는 달리 새하얗게 빛났다. 이런 자신감 넘치는 과단성 덕에 승부는 연장으로 접어들었고, 서든데스까지 가는 접전 끝에 결국 이 선수는 최연소 기록으로 US 오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한국인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이 순간은 이후에 가수 양희은의 노래 상록수를 배경음악으로 삼아 공익광고에 널리 활용됐다. 이제 만 21세에 접어들었던 이 선수는 바로 골프 여제 박세리였다.


이 명장면이 연출된 1998년 7월 7일은 박세리 본인뿐 아니라 한국 골프 산업과 문화,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 역사에 큰 이정표가 되는 날이었다. 사실 당시 한국 국민들은 IMF 경제 위기라는 시련에 빠져 있었다. 무자비한 구조조정으로 실업자는 쏟아져 나오고 환율은 천정부지로 오르며 주식과 부동산은 곤두박질쳤다. 세계 10대 수출 강국에 오르며 선진국 대열 합류가 멀지 않았다고 미리 터뜨린 샴페인은 거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해방 이후 압축 성장기를 보내며 앞으로 전진만 했던 대한민국이라는 뜨거운 엔진이 급속도로 식으면서, 한 번도 이런 위기를 겪지 못했던 국민들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렇기에 태평양 건너 들려온 박세리의 깜짝 우승 소식은 우리도 다시 뛰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민들의 마음속에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박세리는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서 뛰면서 연일 승전보를 날리던 박찬호와 더불어 국민들에게 큰 희망을 줬던 국민 남매이자 IMF 경제 위기를 벗어나는 데 공헌을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각본 없는 드라마인 스포츠가 개인의 영광을 뛰어넘어 사회 전반적으로 엄청난 파급 효과를 준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입증된 사례이기도 했다.


박세리의 스토리가 더욱 감동적인 것은 피나는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가 그대로 실현됐기 때문이다. 또래의 친구들이 한창 가꾸는 꽃 다운 나이에 박세리는 온 몸이 새까맣게 그을리고, 손바닥에 피가 나면서도 스윙을 그만두지 않았다. 골프 대디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 박준철 씨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도 큰 역할을 했다.


박세리는 이미 중3의 나이에 프로 오픈대회(라일 앤 스코트 여자오픈)에서 프로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고, 아마 무대에서만 30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런 가능성을 눈여겨본 삼성이 1996년 10년간 30억 원이라는 금액으로 스폰서를 하면서 박세리는 날개를 달았다.


미국 올랜도에 있는 레드베터스쿨에서 1년간 혹독한 레슨을 거쳐 1997년 10월 열린 LPGA 퀼리파잉스쿨에 수석으로 합격한 박세리는 이듬해 1월에 열린 첫 대회에서 공동 13위를 기록하며 무난한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중위권을 맴돌다가 그해 5월 18일 LPGA투어 맥도널드 챔피언십에서 데뷔 첫 우승을 일궈냈다. 자신의 생애 첫 우승을 메이저대회에서 그것도 1라운드부터 단 한 번도 선두 자리를 뺏기지 않으며 화려한 신고식을 한 것이다. 이어 7주 뒤에 메이저대회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US여자오픈에서 태국의 아마추어 선수 추아시리폰과 연장전에다 서든데스까지 가는 접전 끝에 또 다시 우승을 차지, 세계를 깜짝 놀래켰다. 92홀 만에 승부가 가려진 이 대회는 LPGA투어 역사상 가장 긴 승부로 남아 있다. 신인으로 한 시즌에 메이저 타이틀을 21번 차지한 것은 1984년 줄리 잉스터(미국) 이후 14년 만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 해 신인상은 박세리의 몫이었다.


1998년 4승, 1999년 역시 4승을 거뒀던 박세리는 2000년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는 침체기를 거쳐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전성기를 보냈다. 2001년과 2002년에 각각 5승, 2003년에 3승을 따낸 박세리는 2004년 미켈롭울트라오픈에서 통산 22승째를 거둔 후 2년 넘게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비워야 다시 채워지는 법. 박세리는 이 기간 중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로 산으로 놀러다니며 자유를 만끽했고, 태권도와 킥복싱을 배우며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박세리는 2007년 11월 투어 10시즌을 채우고 미 LPGA 명예의 전당과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최연소로 헌액되는 영광을 안았다. 동양인으로는 물론 처음이다. 박세리는 2010년 벨 마이크로 LPGA 클래식 우승을 차지하며 통산 25승을 기록한 이후 2011년까지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컷오프 통과도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20대 때처럼 박세리는 이제 우승에 대해 조급해하지 않는다. 골프를 즐기는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박세리의 행보는 한국에 세리 키즈 세대를 탄생시켰다. 박세리와 박찬호 이후 운동 하나만 똑 부러지게 잘해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했고, 이는 신지애, 최나연과 같은 세리 키즈의 대표 주자 배출로 이어졌다.


한국에서 골프가 직접 즐기는 스포츠로 자리 잡기에는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 분명 한계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관전 스포츠로는 완전히 자리 잡은 모습. 이 간격의 괴리를 요술공주 세리 박세리가 마법과 같은 스윙으로 메워준 덕분이다.



2000년 이후 - 스포츠는 미래다

베이스볼 키즈 세대의 등장, 그리고 게임사 엔씨소프트의 9구단 창단

1982년 개막한 프로야구는 2011년 어느새 30주년을 맞았다. 프로야구가 탄생한 해에 태어난 사람이 벌써 이립(而立)의 나이가 됐다는 얘기다. 30주년을 기념해 2011년 프로야구 30년 올스타 레전드 경기를 가질 만큼 수많은 스타들이 명멸하고 있다. 탄생 배경이 순수했다고 하긴 힘들지만 프로야구의 출범은 분명 한국 프로스포츠사에 한 획을 그은 일임은 분명하다. 자신의 실력에 따라 몸값이 책정되는 프로선수가 탄생했고, 지역 연고에 대한 의식이 커졌다. 또 스포츠 경기를 돈 내고 보는 문화가 뿌리내렸고, 스포츠 스타에 열광하는 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야외 활동에 적합한 봄부터 가을까지 계속되는 시즌 중에는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경기가 열리다 보니 특정일에 열리는 이벤트가 아니라 늘 공기처럼 호흡하는 생활 속의 스포츠로 자리잡게 됐다.


어릴 때의 기억은 무엇보다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층을 이루는 30~40대는 대부분 학창시절부터 프로야구를 보고 자라났고, 10~20대는 이미 프로야구가 문화로 뿌리내린 이후 태어났다. 한국에서도 바야흐로 베이스볼 키즈(Baseball kids) 세대가 탄생한 것이다. 이들의 등장은 야구 내외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야구 수준면에서 봤을 때 비약적인 발전이 이뤄졌다. 사실 야구는 환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즐기는 스포츠이기에 국제경기보다는 국내리그가 활성화돼 있다. 국제경기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야구월드컵(세계야구선수권대회) 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메이저리그의 역사가 100년이 넘는 미국, 7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훌륭한 선수를 배출하는 쿠바를 비롯한 중미 지역의 국가들에 밀려 한국 야구는 국제적으로 이렇다 할 성적으로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2006년 처음으로 시작된 제1회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한국은 아시아 야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을 두 번이나 꺾으며 3위에 올랐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선 미국, 일본, 쿠바 등을 차례로 꺾으며 9전 전승으로 금메달까지 거머쥐는 믿기 힘든 성과를 거뒀다. 이어 2009년 제2회 WBC에서도 비록 결승서 일본에 패했지만, 준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야구의 위상을 드높였다. 더 이상 야구의 변방국이 아니라는 국민들의 자긍심도 커졌다. 이는 어렸을 적 프로야구와 스타들을 보며 야구선수로서의 꿈을 키운 베이스볼 키즈들이 선배들과는 달리 이름값에 지레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이 가진 실력을 그라운드에서 마음껏 발휘하며 세계의 벽에 겁 없이 도전해서 이룬 성과이기도 하다.


야구 외적인 면에서도 이들 세대의 등장은 큰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베이스볼 키즈들이 이제 프로야구 구단주로 전면에 나서고 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일 가운데 하나는 게임사인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대표가 2011년 신생구단인 제9구단을 창단하겠다고 나선 것. 경남 창원을 배후 연고지로 하고 있던 롯데 자이언츠의 격렬한 반대도 있었지만, 어쨌든 엔씨소프트는 9구단 NC다이노스 주인이 됐다. 이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면서 2010년 총매출 7조 원이 넘는 거대 산업으로 성장했으면서도 게임 과몰입 등의 사회문제로 인해 여전히 부정적인 시선을 받고 있는 한국 게임산업에 대한 인식 제고라는 측면도 분명 고려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전형적인 베이스볼 키즈인 김택진 대표의 야구에 대한 로망이 큰 몫을 했다.


"야구만 생각해도 가슴이 떨린다"라는 김택진 대표는 어렸을 적 <거인의 별>이라는 소년만화를 읽으면서 야구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리와 팔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고 골목길에서 커브를 던지고 배팅 훈련을 하던 초중생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프로야구가 시작된 고교생 시절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 최동원 선수가 혼자 4승을 거둔 걸 보면서 내 마음속의 영웅이 됐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대학에 입학해선 글러브와 야구공 대신 컴퓨터를 만지게 됐지만, 창업 후 IMF 시절로 어려울 때 박찬호 선수의 선전을 보면서 큰 용기를 얻었다"며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2009년 제2회 WBC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야구가 얼마나 심장을 떨리게 하고 큰 감동이 되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고 창단을 결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마음속 영웅이었던 고(故) 최동원 감독이 떠난 자리를 이어서 대물림하겠다는 스토리는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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