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김정미
ǻ
아름다운사람들
   
16000
2011�� 04��



■ 책 소개
역사라는 수레를 끄는 한쪽바퀴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담당해 온 수많은 여성의 이름을 대변하는 33인의 여성 리더에 대한 기록이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전쟁과 혁명으로점철되어 온 세계 역사 속에서 여성들은 굵직굵직하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켜 왔다. 그리고 그 이름은 이제 사회의 어떤 분야에서든지 빼놓고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깊게 새겨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레이디 고다이버, 사포, 클레오파트라 7세부터 에멀린 팽크허스트, 마거릿 버크화이트, 마타 하리, 빌리 홀리데이, 마릴린먼로……. 이 책에 등장하는 서른세 명은 모두 남성들보다 빛나지 않는 자신의 자리에서 온전히 여성으로 살아가며 온 힘을 다해 여성의 자리를마련해 온 인물들이다.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에서는 이 여성들을 ‘혁명, 재능, 권력, 미모’의 네 가지 키워드로재조명했다.

■ 저자김정미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TV 드라마 작가와 다큐멘터리 작가를 거쳐 현재는 영화 시나리오작가로 활동 중이다. 역사 속 인물과 사건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 이와 관련한 연구와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전공한 이력 탓에 역사자료에 대한 접근이 용이한 편이라 그 속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인간 군상과 사건들을 보다 쉽고 재미있게 재가공하여 사람들과 공유하고 공감하는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대중매체 작가의 눈으로 역사 속 인물들의 캐릭터를 분석하고 파악하여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면서도 재미있는 사극을 쓰기위해 부지런히 자료를 모으고 글을 쓰고 있는 중이며, 특히 역사 속에 한 획을 그은 여성들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그녀들의 삶의 궤적을 글로 옮겨소개하는 작업을 재미있게 하고 있다. 

「주간한국」에칼럼 ‘역사 속 여성 이야기’를 연재하였으며,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공저하고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한 번에 읽는역사인물사전』『한 번에 보는 세계인물사전』『어린이 역사인물사전』『천추태후』『연애의 사생활』을 집필하였다. 최근에는 사극 시나리오 작업과 함께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인물과 역사&& 코너에 역사 속 인물을 소개하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nbsp&
■차례
머리말

1.세계사를 움직인 여성 혁명가
레이디 고다이버 - 이유 있는 누드 
잔 다르크 - 신이 보낸 소녀, 나라를 구하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 여성에게도 정당한 인간의 권리를! 
해리엇 터브먼 - 노예의 삶을 떨치고 
락슈미바이 - 인도 독립전쟁의 영웅, 인도의 잔 다르크
에멀린 팽크허스트 - 피와 땀으로 움켜쥔 여성 참정권 
로자 룩셈부르크 - 가장 순수한 혁명을 꿈꾼‘혁명의 붉은 장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 소비에트 정부의 ‘날개 달린 에로스’ 
레이첼 카슨 - 침묵의 봄을 깨우다

2.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적재능
사포 - 레즈비언의 시인 
힐데가르트 폰 빙엔 - 신의 계시를 받고 재능을 발휘하다 
쉬잔 발라동 -몽마르트르의 연인 
코코 샤넬 - 여성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패션 혁명가 
애거서 크리스티 - 추리소설의 여왕 
레니 리펜슈탈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버린 천재 
마거릿 버크화이트 - 역사를 기록한 포토저널리스트 
빌리 홀리데이 -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

3. 권력을 움켜쥔 철의여인
클레오파트라 7세 - 팜므 파탈? 혹은 지략가 
이사벨 1세 - 위기를 기회로 
카트린 드 메디시스 -권력에 사로잡힌 포로 
엘리자베스 1세 - 가장 불행했던, 가장 훌륭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 노회하고 전략적인 18세기적 정치가
예카테리나 2세 - 민초들의 피를 말린 헛된 열정 
빅토리아 여왕 -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소박한 과부 여왕 
서태후 -황제 위의 권력자, 사치와 향락으로 나라를 망치다 

4. 역사를 풍미한 미적 아이콘
서시 - 미인계의 원조 
양귀비 - 당나라의 근간을 흔든시대의 경국지색 
루크레치아 보르자 - 권모술수의 희생양 
마담 퐁파두르 - 사치와 애욕의 권력자 
마리 앙투아네트 - 화려하고무지했던 왕비 
마타 하리 - 여명의 눈동자, 혹은 이중간첩 
에바 페론 - 날 위해 울지 마요, 아르헨티나여 
마릴린 먼로 -20세기 대중문화의 상징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세계사를 움직인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 가장 순수한 혁명을 꿈꾼 혁명의 붉은 장미

타협을 모르는 불굴의 이상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가 살해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그녀가 몸담았던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획득했던 시기였다. 그녀를 살해한 군인들도 11월 혁명을 이끌어 제정을 무너뜨린 세력이었다. 얼핏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노선을 걷는 것처럼 보이는 세력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서둘러 체포하고 재판도 없이 무참히 살해한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인물이 가진 타협을 모르는 순수 사회주의 이상과 그녀의 폭발적 행동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집스러울 만큼 자신이 이론적으로 알고 있고, 또 믿고 있는 혁명을 백 퍼센트 현실에 제대로(!) 된 방법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이상적 혁명 달성은 공감하지만 과정의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선택한 우회적인 방법이라든가 혹은 시대가 변했으니 그에 맞게 이론을 새롭게 수정해야 된다는 주장에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에 맞서 순정한 혁명 정신을 부르짖었다.


그녀는 순수한 국제주의자였으며 평등주의자였고 민주주의자였다. 그러기에 그녀는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그녀의 조국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계급 해방의 노선을 택했고, 혁명 달성을 위해 직업적 혁명가의 독재를 정당화하던 레닌과 맞섰으며,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사회주의 이론을 수정,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할 것을 주장한 베른슈타인과 이론 투쟁을 벌였다. 그녀는 노동자가 스스로 만든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세계를 꿈꾸었으며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대다수 그녀의 동료들은 정치적 상황과 자기논리에 맞추어 변해 갔고 결국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그 존재를 부담스러워 했다.


결국 그녀가 독일 사회민주당과 결별해 독자적인 급진적 혁명당 스파르타쿠스단을 만들고 봉기를 일으키면서 위태로웠던 사회민주당과 로자 룩셈부르크와의 공존은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증오하고 두려워한 세력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적들과 한때 그녀의 동료들이 두려워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가 꿈꾼 세상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옥중에 있으면서 지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써놓았다.


인간다움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에요. 그것은 확고하고 명쾌하며 명랑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명랑하다는 것을요. 흐느끼는 것은 약하다는 표시예요. 인간답다는 것은, 꼭 그래야 한다면 자신의 전 삶을 운명의 거대한 저울에 기꺼이 던져 버리는 것을 의미해요.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화창한 날을 맞을 때마다, 아름다운 구름을 볼 때마다 그것들을 즐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스파르타쿠스단의 결성과 최후

급진적인 혁명파들의 중심에 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과거 로마 시대 노예 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딴 스파르타쿠스단(독일 공산당의 전신)을 결성하고 급진적 혁명을 위한 활동을 해 나갔다. 1918년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11월 혁명이 일어난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의 동료들은 이러한(순정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불완전한) 혁명 정국으로부터 단숨에 노동자 중심의 온전한 혁명 정국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1919년 1월 1일 스파르타쿠스단을 독일 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사회민주당을 돕는 우익 군인들의 손에 진압되었다. 많은 급진적 혁명가들이 체포되는 과정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베를린 경찰 최고직을 장악하고 있었던 보수적 의용단에 잡혔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체포된 후 심한 욕설과 함께 개처럼 끌려 다니다가 머리를 강타 당하고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 시신은 운하 속에서 잠겨 있다가 그해 5월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그녀의 동료들과 함께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무덤은 나치의 집권기에 한 차례 훼손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90여 년간 꾸준히 그녀의 이상을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2009년 베를린의 한 병원 지하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신으로 보이는 시신 한 구가 발견되면서 현재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이 그녀 본인의 것이냐는 논쟁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과 사상이 한물간 유행가처럼 들리는 지금 이 시대에도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품고 죽은 탁월한 혁명가로 기억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로자 룩셈부르크가 최후로 쓴 글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이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적 재능

코코 샤넬 - 여성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패션 혁명가

버림받은 고아 소녀

프랑스의 오르베뉴 지방의 소뮈르에서 태어난 코코 샤넬(1883∼1971)의 원래 이름은 가브리엘 샤넬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방 도시를 돌며 행상을 하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가브리엘 샤넬은 열두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자녀를 키울 마음이 없던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 가브리엘 샤넬은 언니와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고 우울한 성장기를 거쳤다. 가브리엘 샤넬에게 있어 어린 시절은 회고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청소와 바느질보다는 춤과 노래가 좋았던 그녀는 스무 살에 고아원에서 나와 인근 도시 물랭에서 유아용품의 판매원으로 취직하지만 곧 그만두었다. 조용하고 평범한 삶은 그녀의 불 같은 성정에는 맞지 않았다. 가브리엘 샤넬은 기병들이 드나드는 싸구려 바 로통드에서 댄서와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즐겨 부르던 노래 코코에서 이름을 따 코코 샤넬로 이름을 고쳤다. 어두웠던 과거를 상기시키는 이름인 가브리엘을 버리고 그녀는 새롭게 비상하기 위해 코코 샤넬이란 이름을 스스로에게 선사했던 것이다.


그녀를 성공시킨 두 명의 남자

샤넬의 초기 성공기에는 중요한 두 남자가 등장한다. 싸구려 바에서 최초로 샤넬을 건져 낸 사람은 상류층의 부유한 남자 에티엔 발상이었다. 기병대 장교였던 그는 싸구려 바에서 샤넬을 만났고 그녀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샤넬을 자신의 호화스러운 별장에 두고 그녀를 가꾸기를 좋아했다. 샤넬은 비참한 어린 시절 동안 배우지 못했던 상류층의 예절과 교양을 모두 이곳에서 배운다. 에티엔 발상을 통해 프랑스 상류 사회를 접하게 된 샤넬은 자신감 있는 옷차림과 개성으로 당시 최고의 미술가와 소설가, 시인, 배우, 스타일리스트 등 많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샤넬이 만들어 내는 묘한 개성에 매료된 상류 사회의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주변에 모였으며, 샤넬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꿈꿔 온 패션 사업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녀가 두 번째로 만난 남자는 영국인 부유한 사업가 아서 카펠이었다. 에티엔 발상과 헤어진 후 만난 아서 카펠은 샤넬에게 살롱과 의상실을 열 수 있는 돈을 빌려 주었다. 아서 카펠은 샤넬의 디자이너로서의 재능과 사업가로서의 능력을 알아차렸고 그녀를 적극 후원했다. 아서 카펠의 도움으로 1913년 노르망디의 아름다운 휴양도시 도빌에 문을 연 샤넬의 의상실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되고, 그녀만의 패션 감각과 뛰어난 센스가 발휘된 디자인으로 샤넬의 의상실은 도빌 최고의 숍이 되었다. 샤넬은 아서 카펠의 후원 하에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했고 결국 훗날 아서 카펠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단순하고 명료한 디자인

샤넬 디자인의 정수는 단순함과 명료함이다.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과감히 생략하고 이전의 여성미만을 강조한 옷들과 달리 독특하고 중성적이지만 그 안에서 여성성이 아낌없이 드러나는 디자인을 선호했다.


샤넬의 디자이너로서의 첫걸음은 모자 디자인부터였다. 샤넬은 일반 여성들이 쓰는 거추장스러운 모자를 거부하고 스스로 디자인한 검은 모자에 하얀색 리본 하나만을 두른 단순한 모자를 쓰고 다녔다. 이 모자는 당시 상류층 여인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샤넬의 간단한 모자 디자인에 많은 여성들의 마음이 쏠린 것이다.


코코 샤넬은 1910년 파리의 캉봉 거리에 샤넬모드란 여성용 모자 가게를 열었다. 영화배우와 연극배우들이 그녀의 모자를 앞 다투어 쓰기 시작하면서 샤넬이 디자인한 모자를 찾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고 샤넬은 일약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뛰어올랐다.


그녀는 모자 디자인에만 그치지 않고 의류 분야에까지 사업 영역을 넓혔다. 1913년 샤넬은 프랑스의 도빌에 새 부티크를 열고 저지 소재를 이용한 여성 스포츠웨어를 출시했다.


옷으로부터의 해방

1913년에 도빌에 연 샤넬의 의상실은 패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쾌거를 이루어 냈다. 역사적으로 서양 여성들의 옷은 코르셋을 입지 않고서는 입을 수 없는 옷들이 많았다. 샤넬은 여성 옷의 코르셋을 과감히 생략하였다. 그녀가 디자인한 옷은 여성성을 나타내는 약간의 곡선만 있을 뿐 전체적으로 헐렁하여 움직임이 자유로운 형태의 옷이었다. 이 옷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에 더해 샤넬은 1920년 이른바 샤넬 라인으로 알려진 무릎 밑 5~10센티미터까지만 오는 길이의 스커트를 선보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여성 옷에서 다리를 드러낸 것은 샤넬의 옷이 최초였다. 이 옷은 논란이 많았지만, 당시 터진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기능적이고 활동적인 옷을 선호하게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여성들은 스커트 길이에서도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여성의 옷에 주머니를 달고 여성이 입을 수 있는 재킷을 만들어 낸 것도 샤넬이었고 어깨에 거는 숄더백을 디자인해 핸드백으로부터 여성의 손을 해방시킨 것도 샤넬이었다.


패션을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

패션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라는 말은 샤넬이 남긴 중요한 말이다. 그녀가 디자인한 옷은 유행을 타고 사라질지라도 그녀가 만들어 낸 여성 옷의 기준은 영원히 남아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전해 오고 있다.



권력을 움켜쥔 철의 여인

엘리자베스 1세 - 가장 불행했던, 가장 훌륭했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공주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정치적으로 가장 훌륭한 여왕이었지만, 사적으로는 가장 불운한 여인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불행의 시작은 그녀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아버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는 사랑하는 정부 앤 불린이 임신하자 그녀가 낳은 아들을 적장자로 만들고 싶어 본처인 에스파냐 공주 아라곤의 캐서린과 억지로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얼떨결에 잉글랜드의 왕비가 된, 아름답고 가냘팠던 앤 불린이 낳은 첫째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사망하였고 정작 살아남은 것은 두 번째로 낳은 딸 하나, 즉 엘리자베스뿐이었다. 모든 무리를 감수하고 앤 불린에게 왕비의 왕관을 씌워 줬던 헨리 8세의 불타는 애정은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나는 순간, 그대로 식어 버린다. 그는 앤 불린을 간통죄로 몰아 왕비가 된 지 3년 만에 도끼로 목을 내려쳐 죽였다. 그 와중에 그의 세 살 난 딸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어머니 앤 불린과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함에 따라 졸지에 서출이 되었다. 비록 그녀가 열한 살이 되는 1544년, 의회의 결정으로 적법한 왕위 계승자로 복권되기는 하였지만 엘리자베스는 아라곤의 캐서린이 낳은 배다른 언니 메리 공주와 헨리 8세의 또 다른 왕비인 제인 시머가 낳은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 왕자 사이에서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불행하고 조심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엘리자베스는 사실 국왕의 지위와는 상당히 멀어 보이는 존재였다. 남동생 에드워드 왕자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는 일생을 헨리 8세의 사생아 공주로 살아갈 운명처럼 보였다. 그러나 헨리 8세가 그토록 원해 겨우 하나 얻은 아들 에드워드 6세는 헨리 8세 사후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즉위 6년 만인 열여섯 살에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한때 같은 서출로 공표되었던 언니 메리가 에스파냐의 국력에 힘입어 왕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에게 이것은 서출로 공표되었던 공주가 왕이 되었다는 선례로서는 좋은 일이었지만 에스파냐에 경도되어 열렬한 가톨릭 신봉자였던 메리의 등극은 치명적인 위협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통치 아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영국 국교회의 신자가 되었던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 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메리 여왕 앞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 개종으로 엘리자베스는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지만 곧이어 런던탑에 유폐되었다. 그리고 풀려난 이후에도 끊임없이 메리 여왕으로부터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메리 여왕은 이미 국교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영국 국교도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통치기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 메리 여왕에게는 블러디 메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과격한 메리 여왕도 사랑했던 에스파냐의 국왕 필리페 2세와의 결혼에 실패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만다. 이제 마침내 온갖 비운과 불운을 다 짊어지고 살아온 듯한 공주, 엘리자베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국가와 결혼한 여인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하지 않았다. 국민들과 많은 신하들이 그녀에게 결혼을 권유하였지만 번번이 이를 뿌리쳤다. 그러면서 그녀는 늘 자신은 국가와 결혼했다고 선언하였다. 그녀는 끝내 처녀왕으로 남음으로써 언제나 결혼의 여지를 남겨두어 이를 국제 관계에 이용했다. 그녀와의 결혼을 통해 국제 관계를 변화시켜보려던 유럽의 많은 강대국들이 잉글랜드의 눈치를 보았고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충분히 즐겼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여자로서의 행복한 인생보다는 정치적으로 성공한 인생을 선택했다. 결혼을 포기하는 대신 그녀는 남편에게 휘둘리지 않는 자신만의 오롯한 왕권을 유지하였으며 그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절제하며 훌륭하게 이용하였다. 이 시기 잉글랜드는 당대 최고의 함대라 일컬어지던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유럽의 해상권을 제패하였으며, 신대륙으로 길을 열었다. 가톨릭 국가를 대표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한 에스파냐의 무적함대에 맞서 엘리자베스 1세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하나님을 위해, 나의 백성을 위해, 나의 명예와 나의 가문을 위해, 나는 내 생명을 바칠 것이다. 나는 내가 작고 연약한 여자라는 걸 안다. 그러나 나는 왕다운 열정과 배짱을 가졌다."

 

그녀가 보여 준 용기와 열정은 잉글랜드 군대에 강력한 정신적 힘을 실어 주었고 결국 에스파냐를 이긴 잉글랜드는 이전의 섬나라 후진국에서 벗어나 다음 몇 세기의 번영을 약속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외부적인 전쟁 승리와 더불어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 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안정과 의회의 안정 등을 꾀하여 국내 상황을 호전시켰다. 또 이 시기에는 존 던, 크리스토퍼 말로, 에드먼드 스펜서 등 많은 문호들이 등장하여 잉글랜드 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가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셰익스피어도 이 시대 사람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를 45년간 통치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녀는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으며, 빈민 구제법에 의하여 토지를 잃은 농민의 무산화를 방지하였다. 이 시기 잉글랜드의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어 해외 식민지의 길을 열었으며 이후 잉글랜드는 해상권을 제패하고 식민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였다.


한 여인으로서 우여곡절 많고 불행한 삶이었지만 이를 불안하고 괴팍한 정치 운용으로 풀어 내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조심성으로 걸러 내 국가를 가장 부강하게 만든 여왕 엘리자베스 1세, 그녀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내면을 강철 같은 냉정으로 포장하고 개인의 삶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살아간 여인이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다음 세기 대영제국이 있었고 더불어 유럽 전체가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역사를 풍미한 미적 아이콘

서시 - 미인계의 원조

미인계라는 말의 뼈아픈 의미

미인계(美人計)를 이용한다는 말이 쉽게 쓰이고 있다. 미인계란 바라는 목적이 있을 때 아름다운 여인으로 상대를 유혹하여 뜻하는 바를 이루어 내는 것을 말한다. 미인계의 저속하지만 비슷한 말로는 성 상납이라는 말도 있다.


생각해 보면 참 치졸한 방법이다. 여기서 아름다운 여인은 단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할 때 쓰는 수단일 뿐, 여인의 인격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여인은 단지 임무와 사명만 가지고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를 유혹하고 때로는 몸을 허락하기도 한다. 게다가 여자를 팔아 얻은 승리에 남성들이 취해 있을 때, 정작 일을 성사시킨 여성들은 쓸쓸히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곤 했다. 연약한 여자를 이용해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약한 감정인 사랑을 기만하는 치졸한 수법으로 승리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 속에는 영웅호걸이라 불리는 남성들이 뜻밖에 미인계에 힘입어 일어서는 경우가 많았다. 공은 모두 그들에게 돌아가고 미인들은 쓸쓸히 사라지곤 하였지만, 그중에서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몇 명의 여인들이 있다. 그중 서시(?∼?, B.C. 5세기경)가 가장 유명하다.


월나라의 절세 미녀

때는 중국의 춘추 시대 말기. 월나라의 저라산 근처에 사는 땔나무장수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서시라고 불리는 여인이었다. 본명은 이광이었다. 당시 저장성 저라산 아래에 마을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동촌이고 또 하나는 서촌이었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施)씨 성을 갖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 시이광은 그중 서촌에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녀를 서시라 불렀다.


서시는 늘 여자 친구들과 포양 강변에 가서 빨래를 했다. 물 위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이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강 속 물고기가 그녀의 얼굴에 넋을 놓아 헤엄칠 생각도 잊고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다는 이야기가 생길 정도였다. 이때 서시의 아름다움을 두고 침어(浸魚)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또 서시는 어렸을 때부터 가슴앓이 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늘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는데 그 모습조차도 너무나 아름다워 동네 처녀들이 그 찡그린 모습을 흉내 내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효빈(效嚬)이라는 고사성어다.


서시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훗날 월나라의 수도로 뽑혀 가게 되는데 월나라 사람들이 모두 서시의 얼굴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와 그녀가 궁전에 들어가는 데 사흘이나 걸렸다고 한다. 월나라의 재상이던 범려는 서시의 얼굴을 보는 값으로 백성들에게 1전씩 받아 그 돈으로 무기를 사기도 하였다고 한다.


와신상담의 오나라와 월나라

서시가 살던 월나라는 춘추 시대 말기 지금의 저장성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다. 춘추 시대는 주나라를 명목상으로는 모시면서 각지의 제후국들이 서로 힘을 겨루던 시기였다. 월나라는 바로 인접한 국가인 오나라와 언제나 세력 다툼을 하였고 오랫동안의 분쟁은 두 나라를 원수의 나라로 만들었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어느 한쪽이 사라지지 않고서는 절대 전쟁을 멈추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미워하고 있었다. 특히 서시가 살던 즈음에 오나라와 월나라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먼저 월나라와의 전쟁으로 오나라의 왕 합려가 죽자 그 아들 부차는 월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가시나무 위에서 잠을 자며 그 원한을 되새겼다고 한다. 부차는 오자서와 『손자병법』의 저자 손자의 도움으로 나라를 크게 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월나라를 쳐서 굴복시키고 월나라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월나라의 왕 구천이 쓰디쓴 쓸개를 옆에 두고 스스로 해이해지거나 흐트러질 때마다 그 쓸개를 맛보며 오나라에 당한 굴욕을 되새기며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다.


서시는 바로 이 와신상담의 시기에 굴욕당한 월나라의 백성이었다. 월나라의 왕 구천은 오나라를 무찌르고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어떠한 방법이라도 감행할 만큼 깊은 원한에 젖어 있었다.


오나라로 간 서시

월나라의 재상이던 범려는 임금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이길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범려는 구천을 도와 월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큰 힘을 보탠 재상으로, 오나라에게 월나라가 패배하였을 때 또 다른 재상 문종과 함께 오나라 부차에게 뇌물을 바치고 구천의 목숨을 구해내기도 하였다. 그는 꾀가 많고 아이디어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일까. 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이 끝난 후 사라진 범려에 대해서는 그가 몸을 숨기고 살면서 많은 재산을 모아 훌륭한 상인이 되었다는 설이 많다.


범려는 오나라를 정식으로 쳐들어가기 전에 오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킬 방법을 생각했는데, 그중 하나가 아름다운 여인을 통한 적의 무장해제였다. 범려는 월나라 각지를 돌아다니며 절세미녀들을 뽑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월나라를 위해 자신의 감정과 목숨을 내놓게 할 교육을 시켰다. 그 속에는 갖가지 기예와 남성을 유혹하는 법, 그러면서도 절대 월나라를 저버리지 않을 사명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녀들의 임무는 오나라 부차를 유혹하여 그가 정치를 돌아보지 않고 주색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몇 차례 월나라 미녀들이 오나라에 공물로 바쳐지고 마침내 서시도 오나라로 가는 미인들 속에 끼게 되었다. 워낙에 미모가 출중했던 서시는 바로 오나라 왕 부차의 눈에 들었다. 부차는 충신 오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시를 옆에 끼고 정치를 잊었다. 이때 오자서가 "제가 들으니 상나라는 달기 때문에 망했고, 주나라를 포사 때문에 망했다고 합니다. 미녀란 모두 나라를 망치는 것이니 대왕께선 절대 저들을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충고했지만 부차는 이미 서시의 미색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오왕 부차는 서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켰고 링옌산에 화려한 관와궁을 짓고 온갖 보석으로 호화롭게 장식했다. 서시가 연못에서 배타고 노는 것을 좋아하자 무리하여 인공 못을 만들게 했으며 도성인 고소성에 춘소궁(春宵宮)을 짓게 하고 밤새 환락에 빠졌다. 아울러 서시를 위한 특별 무대를 만들어 그녀가 마음껏 춤을 출 수 있게 했다. 서시가 나막신을 신고 가는 허리를 흔들며 나풀나풀 춤을 출 때면 오왕은 마치 술에 취한 듯 깊이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오왕은 점차 생기를 잃어 갔고 투지도 사라져 정치가 황폐해졌다.


그러는 사이 오나라의 국력은 급격히 떨어져 갔다. 도처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친족마저 이탈하기 시작했다. 충신이자 명장이었던 오자서의 간언도 부차에게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부차는 오자서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자 자결을 명령했다. 부차의 명령에 분노한 오자서는 스스로 눈을 파내 나뭇가지에 건 다음 죽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부차가 패해 오나라가 망하는 꼴을 나뭇가지에 걸어 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겠다였다고 한다.


서시의 마지막

오자서의 우려대로, 범려의 계획대로 오나라의 힘은 약해졌고 그 기회를 노린 월나라는 오나라를 쳐서 이겼다. 부차는 산속으로 도망가 미인에게 속아 충신을 저버린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자결하였다. 월나라의 임금 구천은 원수를 갚고 승리하였다.


그러나 정작 오나라를 망하게 한 일등 공신인 서시는 이후 그 행방이 묘연하다. 일설에 서시는 오나라가 망하고 자신의 임무를 다하자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도 전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구천이 서시를 데려와 후궁으로 삼자 구천의 왕비가 매우 시기하여 서시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는 구천의 왕비가 시기한데다 월나라 백성들도 서시의 아름다움이 너무 지나쳐 구천마저 그녀의 품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나라를 망칠까 두려워하여 서시를 가죽부대에 싸서 강물에 던져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엇 하나 자신의 사랑과 인격을 포기하고 나라를 위해 산 공에 대한 처우로 마땅치 않다. 승리는 남성들에게 돌아가고 미인인 죄로 불행하게 살아야 했던 서시는 소외되었던 것이다. 서시의 이야기는 이후 많은 중국의 문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누대에 걸쳐 시인과 문인들이 그녀를 기렸고,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그녀를 칭송했다. 미인계라는 잔혹한 전술로 불행하게 살았던 서시는 결국 감상적인 중국 문인들 덕분에 고통스러웠던 삶을 조금이나마 보상받은 것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