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13월의 태양이 뜨는 나라

   
이해용 글·사진
ǻ
종이비행기
   
15000
2010�� 11��



■ 책 소개
천상의 세계를 닮은 자연과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곳, "에티오피아". 7년 동안 세 번이나 에티오피아로 날아가, 우리나라와 에티오피아를 잇는 다리가 되기 위해 그곳의아름다움을 찾는 여정을 기록한 책이다. 책에서 만나는 에티오피아는 3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며, 인류 조상으로 추측되는 화석이 발견된곳이기도 하다. 또한 로마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번성했던 악숨 왕국이 세워진 곳이다. 
한국 전쟁 참전용사들의 가난한 삶과, 에티오피아에서 희망의 싹을 틔우는 커피까지저자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에티오피아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참전용사들의 정착촌인 코리언 빌리지에서 시작해최고의 커피로 인정받는 커피 생산지 이르가체페와 하라, 시다모 등의 멋진 풍경과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순수한 일상을 아름다운 사진으로담아냈다.

■ 저자이해용

1968년 비무장지대(DMZ) 인근에서 태어나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1996년 연합뉴스 취재기자로,중동부 전선 비무장지대 주변의 이야기와 사라지는 풍경을 기록해 오고 있다. 비무장지대에 대한 오해와 ‘생태계의 보고’라는 허상을 바로잡기 위해『DMZ를 찾아서』『DMZ 이야기』를 출간했다. 

2004년 에티오피아를 처음 다녀온 이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에티오피아를 방문해 그곳 사람들의 위엄과 미소, 착한 품성,풍경을 담기 시작했다. 특히 2009년부터 한국인이 처음으로 에티오피아에 주춧돌을 놓은 시골 초등학교에 벽돌을 올릴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이책을 집필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이 책의 수익일부는 공부할 교실이 부족해 하루하루를 걱정하는 에티오피아의 시골 초등학교를 지원하는 데 보탤 예정이다. 
size=2 &>dmzlife@naver.com
http://blog.yonhapnews.co.kr/dmzlife
■ 차례
여는 글 - 잊혀진 땅을 찾아서

1부 한국인에게 잊혀진 땅 에티오피아
머나먼 에티오피아 
아프리카의 코리언 빌리지 
참전 기념 회관 주춧돌을 놓다 
한국에 젊음을 바친참전용사들 

2부 먼 나라 한국 땅의혹독한 추위와 전쟁 
미지의 땅 한국으로 떠나다 
긴박한 전쟁터와 살을 에는 추위 
포성이 끊이지 않은 철의삼각지대 
최전선을 지킨 칵뉴 부대 
참전 영웅들의 이야기가 되살아나다 

3부 희망의 싹을 틔우는 커피 
낯선 음료 커피를 마시다 
휴전선을지키는 커피 
커피콩을 고르는 사람들 
무지개가 뜨는 이르가체페 
거친 땅이 선물한 하라 커피 

4부 ‘아프리카의 스위스’ 에티오피아 
‘새로운꽃’ 아디스아바바 
로마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악숨 제국 
천사가 바위 속에 만든 랄리벨라 
아프리카에서 만난 신비의 궁궐

5부 희망을 찾아온 에티오피아의망명객들 
한국 전쟁 격전지로 돌아오다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망명 신청 
하늘나라로 떠난 이탈렘

6부 에티오피아를 잇는 희망의 다리
다시 찾은 아디스아바바 
책임과 배려가 필요한 원조 
가난을 이기는 기적, 한국에서 찾다 
에티오피아의미래를 여는 교육 
오지에 세워진 시골 학교의 기적 

맺는 글 - 7년간의 여정을 마치면서




에티오피아, 13월의 태양이 뜨는 나라


여는 글 - 잊혀진 땅을 찾아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요!" 비무장지대(DMZ)를 찾은 남자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며 무표정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어서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한국전에서 전사했어요." 남자는 그가 아주 어렸을 때 한국 땅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사연을 털어놨습니다. "한국에 가면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요.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남자의 아버지는 한국 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의 군인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데스타 하고세(65) 씨를 만난 건 중부 전선 비무장지대였습니다. 아버지를 찾아 나선 남자의 얼굴에서는 실망과 당혹스러움이 엇갈리고 있었습니다. 전사한 아버지를 한국에 온다고 갑자기 떠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날 또 다른 캐나다의 남자 레오 씨도 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아왔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한국 전쟁에서 전사했습니다. 레오 씨의 여생의 목표는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삶의 흔적을 오롯이 복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레오 씨는 부산의 유엔공원에서 근무하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집필 중입니다.


레오 씨는 아버지의 삶을 조만간 책으로 내놓을 목표를 세웠지만 에티오피아의 남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담담했습니다. 그가 잠시 신발을 벗었을 때 드러난 구멍 난 양말은 그의 가슴에 뚫린 아버지에 대한 기억처럼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삶은 평생 가난과의 전쟁으로 이어졌던 모양입니다.


대체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에티오피아는 어떤 나라일까요. 에티오피아에 대해 알고 싶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조차 없이 살아가는 에티오피아의 한 남자에게 아버지와 함께 머나먼 한반도로 떠나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한국과 에티오피아 사이의 사라진 길을 잇고 싶었습니다.


저를 비롯해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에티오피아를 모릅니다. 한국 전쟁 당시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지상군을 파견했다는 역사를 아는 사람이 더러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은 그 땅이 가난과 기아의 대명사라는 것밖에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티오피아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잃어버린 길을 찾겠다는 것이 무모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씨의 아버지 같은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들이 싸워서 지켜낸 이 땅에서 사는 저로서는 조금이라도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습니다.



한국인에게 잊혀진 땅 에티오피아

아프리카의 코리언 빌리지

지구에는 너무나도 다른 두 개의 코리언 빌리지(Korean Village)가 있다. 하나는 전 세계 부의 상징인 미국에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가장 가난하다고 소문난 에티오피아에 있다. 미국 LA의 코리언 빌리지는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몰려든 한국인으로 붐비는 미국 속 한국 마을이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 시내 외곽의 언덕에 자리한 코리언 빌리지에는 한국인이 전혀 살지 않았다. 아디스아바바 시내에서도 가난한 곳으로 꼽히는 이 마을은 한국 전쟁에 참가했던 참전용사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출입문은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좁고 낡았다. 문 옆에 놓아둔 깡통에서는 페인트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 에티오피아 한국 전쟁 참전용사 협회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한때는 황제의 근위대로 한국 전쟁에 참가했지만 지금은 빈민층으로 전락한 전사들의 현주소였다.


참전용사 협회 엠넬루 회장과 게타쵸 부회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협회 사무실 벽에는 에티오피아와 한국인의 우정이여 영원하라!는 문구가 걸려 있었다. 그 아래로는 이들이 전투에 참가했던 지역의 대형 지도가 걸려 있었다. 3년간 전쟁을 벌인 강원도 화천과 양구, 철원 지역이 지도에 표시돼 있었다. 그들은 경기도 가평에 본부를 두고 최전선을 오갔다.


엠넬루 회장에게 궁금했던 이야기를 물었다.


"한국 전쟁에서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나 부상당했는데, 참전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참전했던 것이 오히려 자랑스럽습니다. 우리가 지켜낸 한국이 잿더미에서 일어나 세계적인 무역 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젊음을 바친 보람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지금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때와 같은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사무실을 나오는 길에 한 노병이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보여 줬다. 참전 당시 찍은 것으로 보이는 흑백 사진이었다.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는 아주 소중한 사진처럼 보였다.



희망의 싹을 틔우는 커피

무지개가 뜨는 이르가체페

세계적으로 유명한 에티오피아의 커피 생산지 이르가체페로 가는 길은 천상과 지상의 반복이었다. 커피의 본고장을 찾아가는 여정은 밤잠을 설치게 할 정도로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혀끝으로 다가오는 이르가체페 커피의 부드러움은 출발하기 전부터 기대감을 갖게 했다.


아디스아바바의 새벽을 깨우는 것은 도심의 목동이었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절대로 볼 수 없는 진기한 풍경이 에티오피아 도심의 목동이다. 도심의 목동은 가축을 이끌고 인도나 중앙 분리대를 지난다.


목동은 자동차와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는 화석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깨에 지팡이를 얹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목동은 예전에는 아디스아바바 구릉에서 자유롭게 뛰어놀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디스아바바 드림을 꿈꾸는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오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목동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도심을 벗어나자 도로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도심 외곽은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가난한 자와 부자,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에 상관없이 태양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빛을 주었다. 그러나 아침의 태양을 온전하게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들이 아닐까. 그 순간 아침 햇살을 매일 맞을 수 있는 행복감에 잠시 젖어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걸어가는 골목길과 하늘은 모두 파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사람들은 파란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대지의 아침을 흐리게 한 주범은 다름 아닌 스모그였다.


동부 아프리카 고원의 도시 아디스아바바에서 아침마다 파란 안개가 피어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도시는 우리나라로 치면 백두산 높이의 고지대인데 이렇게 높은 지대에서는 차량의 연료가 완전 연소되기 어렵다고 했다. 만약 파란 안개만 없다면 이 고원의 아침 공기는 어느 곳과도 비할 수 없는 최고일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디스아바바의 스모그에는 선진국들이 한몫했다. 환경 규제가 강화되는 선진국에서 이 나라로 수출하거나 인도주의 명목 아래 지원하는 차량들은 모두 중고차였다.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먹고 마시는 공기를 더럽힐 수 없기에 수출이라는 국제 경제 시스템을 빌어 폐차들을 아프리카로 보내고 있었다. 더운 밥 식은 밥을 가릴 형편이 되지 않는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중고 차량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제대로 정비하기도 힘들다 보니 스모그 제조기나 다름없었다.


에티오피아의 남부로 가는 길에는 어른 5∼6명이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는 나무들이 계속 등장했다. 거목들은 마을 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대상이자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나무 아래에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염소도 걱정을 잊고 졸고 있었다.


드디어 시다모(Sidamo) 지역에 들어왔다. 세계적으로 고급 커피로 유명한 시다모 커피는 이 고장의 지명을 딴 것이다. 시다모 커피는 숲에서 키우는 포레스트 커피(Forest Coffee)이다. 구릉과 계곡 사이를 따라 커피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대단위 플랜테이션 농업에 의해 생산되는 다른 열대 지역의 커피와는 달리 가장 야생에 가까운 조건에서 생산되다 보니 고급 커피로 유명해지게 됐다. 아직 커피를 수확하기에는 이른 시기여서 커피 체리는 풋열매에 가까웠다.


이르가체페로 들어가는 길은 비에 젖어 있었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뒤여서 바닥에서는 풋풋한  흙냄새가 올라왔다. 땅은 비에 젖어 붉은 색을 띠었고 하늘은 마치 한국의 가을날처럼 깨끗했다. 이러한 천혜의 자연 조건이 최고급 커피를 키워 내는 것이었다.


새소리에 깨어난 이르가체페의 새벽은 안개 바다였다. 아침 햇살이 피어날 무렵 물통을 든 젊은이들이 한두 명씩 도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들은 가축을 이끌고 들판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년은 쇠바퀴 하나를 빼고는 모두 나무로 만든 달구지에 광주리를 얹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오늘도 주어진 하루를 소중하게 받아들이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르가체페를 빠져 나갈 무렵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았다. 그때 나무와 흙으로 만든 주민들의 전통 가옥 위로 노란 햇살이 뻗쳤다. 그리고 파란 하늘과 흰 구름 사이로 무지개가 등장했다. 무지개가 떴으면 좋겠다고 무심코 말을 건넸던 마을에서 오늘 아침 기적같이 무지개를 만났다. 이르가체페는 향기로운 커피와 함께 작별 선물로 내게 무지개를 선물했다.



아프리카의 스위스 에티오피아

새로운 꽃 아디스아바바

아디스아바바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 이름이다. 암하라 어로 새로운 꽃이라는 의미이다. 1886년 에티오피아의 테이투 황후는 자신이 머무르고 있던 지역에 아디스아바바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프리카라고 하면 밀림과 정글, 무더위를 연상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1980년대 에티오피아를 휩쓴 세계적인 가뭄으로 굶어 죽어가던 아이들이 텔레비전과 신문을 도배하면서 사람이 살기 힘든 삭막한 곳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아디스아바바 아침의 거리는 시원하고 상쾌하고 낮에도 습도가 높지 않아 땀을 흘리는 일은 거의 없다. 거기에다 햇살은 마치 지중해 연안처럼 따사롭다. 그래서 습도가 높은 날씨에 지친 유럽인들은 에티오피아를 아프리카의 스위스라고 부른다. 적도 근처이지만 무덥지 않은 이유는 수도가 해발 2,300m 고원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디스아바바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곳에 들어선 수도이다. 그래서 천국과 가장 가까운 것 같이 느껴지는 도시이기도 했다.


에티오피아는 최근 기아 상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인류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1974년 11월 24일 미국의 고고인류학자 도널드 요한슨 교수는 에티오피아의 하다르 지역의 한 언덕에서 발굴 작업을 벌이다 여성으로 보이는 원시 인류의 화석을 발견했다. 자그마한 팔꿈치 뼈와 두개골, 엉덩이뼈 등 전체의 40%에 해당하는 뼈를 모아 놓자 320만 년 전 여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요한슨 교수는 당시 인기를 끌었던 비틀즈의 노래 <저 하늘의 다이아몬드를 가진 루시(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를 듣고 화석에 루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공식 명칭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였다. 루시는 턱이 튀어나오고 이마는 뒤로 밋밋한 경사를 이뤄 유인원을 떠올리게 했지만 직립보행을 한 인류 초기의 조상이었다.


루시는 20여 년간 최초의 인류로 대접을 받다 최근 이보다 더 오래된 화석이 발견되면서 인류의 직계 조상일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1992년 에티오피아 아와시 강 주변에서 발견된 하석 아르디(Ardi)가 루시보다 120만 년이나 앞서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볼 때 에티오피아가 인류의 요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디스아바바의 서쪽 외곽 지역인 암보로 가는 길은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웠다. 아디스아바바 시내뿐만 아니라 길 외곽으로 빠져 나가는 도로변은 대부분 유칼립투스가 심어져 있었다. 유칼립투스 가로수 옆에 차를 세우고 장미 농장으로 들어섰다. 아디스아바바에서 남부로 가는 길에도 끝없이 비닐하우스가 벌판에 펼쳐졌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것은 수출용 장미였다. 대규모 비닐하우스 안은 온통 장미 꽃밭이었다. 빨간색과 노란색 장미가 눈길이 미치지 않는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장미 사이를 움직이는 것은 벌이 아니라 오로모 족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은 장미를 자른 뒤 통에 옮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수줍어 하는 여성들은 처음이었다. 그녀들은 이방인이 카메라를 꺼내자 얼굴이 장미보다 더 붉어지더니 꽃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장미 바구니를 나르는 여성들도 고개를 숙이거나 꽃 뒤로 얼굴을 숨겼다.


수확한 장미들은 모두 집하장으로 모였다. 꽃송이를 색깔별로 구분한 뒤 크기별로 나누면 출하 준비가 끝난다. 장미는 아디스아바바 시내에 공급되는 것도 있지만 주로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에티오피아에서 생산된 장미는 인기 있었다. 일부 장미는 일본까지 수출된다고 했다.


농장을 나오는데 장미 바구니를 옮기던 한 여자가 분홍색 장미 뒤에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꽃 아디스아바바에서 끝없이 펼쳐진 장미 물결은 눈이 부셨다. 게다가 장미를 수확하는 여성들의 얼굴 표정은 꽃보다 더 화사했다. 그녀들의 얼굴에서 기아와 가난이라는 그늘은 찾을 수 없었다. 아디스아바바는 지금 아름다운 꽃 장미로 세계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에티오피아를 잇는 희망의 다리

에티오피아의 미래를 여는 교육

흙더미와 돌멩이가 나뒹구는 골목길 끝에서 아이들이 글을 읽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학교로 들어서니 학생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창문을 넘어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아디스아바바 코리언 빌리지 안에 있는 히브렛 피레 초등학교였다. 이 학교는 한국 전쟁 직후 서울의 판자촌을 떠올리게 하는 코리언 빌리지에 들어섰다. 한국 측에서 최근 건립한 공립학교로,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한국 전쟁 참전용사들의 후손이나 이 지역 주민의 자녀들이었다.


교실의 풍경은 우리의 옛날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아이들은 좁은 책상 하나에 3명이 함께 앉아 공부를 했다. 교과서는 갱지로 만들어진 조악한 것이었으며 가장자리는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동자만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도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비교적 사정이 좋은 편이었다. 에티오피아에는 학교에 다닐 기회조차 얻지 못한 아이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교정을 빠져 나오는데 왁자지껄한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교실 앞에서 아이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벽돌과 양철지붕이 학교의 전부였지만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보금자리였다.


2008년 6월 24일 에티오피아 한국 전쟁 참전용사의 손녀 등으로 구성된 어린이 합창단 에티가 한국을 찾아왔다. 합창단은 7∼12살 어린이들이 주를 이뤘다. 음악적 소질은 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합창단에 참여했다. 이날 저녁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첫 내한 공연이 펼쳐졌다. 공연은 박수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성공이었다. 합창단은 계룡대와 청와대에서도 공연을 하고 아디스아바바로 돌아갔다.


이해 9월 아디스아바바에서 만난 공연장 관계자는 뒷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해외 공연이 아이들 마음에 문화적인 충격을 준 것 같아요. 그동안 아이들은 한 번도 다른 나라의 문화를 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그게 가장 큰 소득이었어요. 한 어린이는 돌아와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다음에 대통령이 되어서 다시 청와대를 방문하고 싶다고. 청년 반기문이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만난 뒤 꿈을 키워 유엔 사무총장이 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교육은 가난한 에티오피아의 아이들의 가슴에 꿈을 심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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