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2비사
그녀는 과연 누구의 아이를 낳았을까 - 정인숙 살인사건
우리가 권력자들의 스캔들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의 스캔들이 단순한 사생활의 범주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도덕적으로 타락하면 정권이 타락하게 되고 사회도 부패하게 된다. 권력자의 스캔들은 독재국가일수록 문제가 심각해지고, 언론을 통제하기 때문에 무수한 유언비어가 나돌게 된다.
군사독재 시절인 제3공화국의 암울한 시대에 일어났던 정인숙 살인사건도 이러한 스캔들 중 하나다. 이 사건은 오빠가 동생을 살해했다고 해서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정인숙이 낳은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의혹과 그녀와 관계를 맺은 고위 관리가 누구나 하는 의문으로 1970년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사건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을 은폐하는 데 급급한 권력자들은 국민들의 비난을 자초했다.
1970년을 뒤흔든 심야의 총성
1970년 3월 17일 밤 11시, 아직 밤바람이 차가운 강변로에서였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함박눈이 자욱하게 날리고 있었다. 택시 기사 노삼룡은 눈 때문에 강변로를 조심스럽게 달리다가 절두산 근처에 이르렀을 때 검은색 코로나 승용차가 한적한 길옆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승용차 뒤에 택시를 세웠다. 그러자 운전석에서 한 사내가 고통스러워하면서 살려달라고 소리 질렀다. 노삼룡은 재빨리 택시에서 내려 달려갔다. 사내는 왼쪽 하체가 피투성이였다. 노삼룡이 깜짝 놀라 사내를 부축하고 차에서 끌어내리자 그는 뒤에 있는 동생도 살려달라고 말했다.
노삼룡은 그제야 뒷자리를 살폈다. 그러자 뒷자리에는 20대의 젊은 여자가 얼굴과 가슴에 피를 흘리면서 맥없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무엇인가 큰 사건이 벌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여자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눈은 자욱하게 내리고 있었고 사내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택시 기사 노삼룡이 겪은 이 일은 정인숙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노삼룡의 신고를 받은 신촌파출소에서 서대문경찰서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기자들이 알게 되었다. 각 언론사의 기자들이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현장은 이미 경찰에 의해 치워져 있었다. 그들은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노고단파출소로 달려갔다. 노고단파출소는 형사들이 몰려와 부산해지고 있었다. 사건의 경위는 간단했다. 강변로에서 코로나 택시가 발견되었고 남자는 부상당했고 여자는 총상으로 죽어 있었다. 죽은 여자는 당시에 국회의원도 갖고 있기 어려운 회수여권과 거액의 달러를 소유하고 있었다.
여자의 이름은 정인숙(본명 정금지), 당시 26세였다. 기자들은 정인숙에 대해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세 살 된 아들이 있는 미혼모로 비밀 요정 선운각에서 활동하던 호스티스였다. 취재를 하면서 최근에는 고급 콜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기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정인숙의 집에서 발견된 그녀의 수첩이었다. 그 수첩에는 정관계 인사들 26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탤런트 장자연의 유서에 언급된 사람들의 이름에 촉각에 곤두세우듯 기자들은 그 26명이 누구인지 알아내려 했다. 그러나 그 수첩은 수사본부에 넘어간 뒤에 사라져버렸다.
형사들은 수첩의 존재를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발표는 하지 않았으나 개인적인 친분을 통해 질문하자 현직 국무총리를 비롯해 정관계 고위층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심지어는 청와대까지 거론되었다. 기자들은 1970년을 뒤흔들 대형사건이라고 짐작했다. 경찰은 즉시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언론에 발표했다. 사건이 한밤중에 발생했기 때문에 신문은 조간부터 사회면에 대서특필했고 방송은 시시각각 속보로 보도했다.
사건을 보도하는 기자들은 이미 권력형 스캔들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었다. 정인숙이 고급 콜걸이라는 신분이 밝혀지면서 1970년을 섹스 스캔들로 뒤흔들고 권력의 추악한 이면을 드러나게 했다. 특히 정인숙에게 세 살 된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냐는 의문이 증폭되면서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까지 소문에 휘말리게 되었다.
정인숙 리스트, 너랑 나랑 구멍동서
그녀가 한때 선운각을 출입하던 호스티스고 정관계 인사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여인이라는 사실이 취재 과정에서 속속 밝혀졌다.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해 권력의 핵심인사들의 정부(情婦)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정인숙의 수첩도 화제가 되었다. 그녀가 갖고 있던 수첩에는 박정희, 정일권, 이후락, 김형욱, 박종규 등 실세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자 검찰은 공안부에 사건을 배정해 직접 수사에 나섰다.
정인숙은 호스티스이면서 콜걸이었다. 아버지는 대구 부시장을 지냈고 그녀 자신은 대구 신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서울문리사대(현 명지대 국문과)를 1년 동안 다닌 뒤에 중퇴했다. 정인숙은 이때부터 학사기생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결국 직업여성의 길로 빠졌다. 오늘날에 ‘여대생 휴게텔’이나 ‘여대생 키스방’이 유행하듯 ‘학사기생’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유행했다. 그녀들은 대학생이면서 요정에 출입해 기생 노릇을 하는 여자들이었다. 남자들은 단순한 기생에 만족하지 않았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기 마련이다. 남자들이 여대생 기생들을 좋아하자 요정 등에서 여대생들을 기생으로 뽑았다. 이러한 풍속은 <학사와 기생>이라는 영화가 제작될 정도로 널리 퍼졌다.
정인숙은 학사기생들과 어울리다가 기생이 되었다. 학사기생의 공통점은 자신이 돈을 벌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이다. 정인숙도 돈을 벌어 가족들을 돕고 있었다. 정인숙은 미모가 뛰어난 여인이었다. 아름다운 미모를 찾아 남자들이 몰려들었다. 결국 그녀의 명성이 높아져 고위 관리들과 스캔들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비밀요정이라는 데는 안 나간 데가 없었고 서울에 있는 고급 호텔에 안 가는 곳이 없었다. 이 남자는 이 ‘호텔’ 저 남자는 저 ‘호텔’ 하는 식으로 따로 정해져 있다. 내가 운전을 하고 있는데도 뒷자리에서 미국인과 키스하기까지 했다.
경찰이 친오빠인 정종욱을 진범으로 구속했을 때 정종욱이 기자들과 1문1답을 하면서 밝힌 내용이다. 경찰은 사건 발생 7일 만인 3월 23일 수사를 종결하면서 범인을 친오빠 정종욱이라고 발표했다.
친오빠가 여동생을 살해했다고?
경찰은 사건 발생 99시간인 22일 새벽 2시쯤 세브란스병원 339호실에서 입원 중인 정 씨를 임상 신문한 결과 ‘평소 방종한 생활을 하는 귀여운 여동생에게 몇 번 충고했으나 오히려 멸시를 받은 데다 임신 7개월의 부인과 생활해 나갈 수 없어서 범행했다’는 자백을 받았다.
이날 사건을 지휘해온 서울지검 최대현 부장검사가 마포경찰서 서장실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정종욱은 정인숙에게 문란한 남자관계를 그만두라고 여러 차례 권고했는데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죽였다고 했으나 사람들은 그의 자백을 신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인숙의 스캔들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었다.
정인숙이 낳은 아들의 아버지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힘깨나 쓴 인물임에 분명하다. 정종욱이 구속되고 수사는 종결되었으나 스캔들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야당은 정인숙 스캔들을 부도덕한 정권의 추한 이면이라고 비난했다.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정인숙사건은 오랫동안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1970년에 박정희는 3선 개헌을 하여 대통령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선거를 앞두고 여당이 부도덕한 일을 벌인 것이 발각된다면 당선은 그림의 떡이 될 것이다. 정인숙 스캔들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청와대와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정인숙의 남자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힐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서둘러 이 사건을 베일로 가렸다.
5.16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은 절대권력을 갖고 있었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로 이어진다. 제3공화국은 경제발전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부패한 독재정권이었다. 부패한 정권에는 돈과 여자가 따른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요정문화가 휩쓸고 있었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요정에서 밀담을 나누고, 요정에서 정치하는 것을 풍류로 생각했다. 요정에는 술을 따르고 가무를 접대하는 기생들이 있다. 이들은 미모와 학식을 갖추고 있다. 1970년대의 한국 요정은 오진암, 삼청각, 대원각, 옥류장, 선운각 등이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오진암은 사토 일본수상도 찾은 곳이고, 남북적십자회담 때 서울을 방문한 북측 대표들도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 그러나 식사만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술과 기생이 있는 밤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국빈들이 방문할 때도 요정에서 접대를 했다.
밤에 피는 장미? 밤에 피는 악의 꽃!
기생들은 밤에 가무를 하면서 정치인들을 접대했다. 대원각에서 오래 일했던 한 기생은 자유당 정권의 정치인은 현금을 뿌렸는데, 5.16이 일어난 뒤의 주체 세력은 보증수표를 뿌렸다고 진술했다.
지금은 길상사라는 절로 바뀐 대원각에는 그 당시 약 1백 명에 가까운 기생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오후 4시가 되면 택시를 타고 성북동 골짜기에 있는 대원각으로 올라왔다. 출근할 때는 양장을 하지만 대기실에서 한복으로 갈아입는다. 화장하고 한복으로 갈아입은 뒤에는 손님들이 올 때까지 골짜기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눈다. 어스름한 저녁 빛이 내려앉는 골짜기에서 색색의 한복을 입은 젊은 여성들이 서 있는 모습은 마치 꽃이 핀 것 같다.
정인숙은 선운각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의 여인이었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이 그녀를 찾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선운각에서 만난 한 정치인의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낳고 조용히 살았으면 비명에 죽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녀는 콜걸이 되어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전전했다. 오빠가 운전하는 차에서 미국인과 키스하기도 했다. 그 돈으로 부유하게 살고 오빠에게 한 달에 2만 원씩 월급을 주었다. 가족들은 그녀가 몸을 팔아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1970년대의 군사문화가 피운 밤의 꽃이었다. 그녀는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미국에 한동안 외유 형태로 나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갑자기 귀국했다가 한강로에서 살해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친동생을 살해했다고 자백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정종욱은 1989년 5월 11일에 가석방으로 출감했다. 1970년에 수감되었으니 장장 19년 만의 일이다. “나는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20년 동안이나 복역했어.” 정종욱은 출감을 하자 정인숙을 살해한 인물이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수사관으로서 나는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범인은 정종욱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것만은 확고부동해.”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옥경석 형사의 진술이다. 사건의 열쇠는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쥐고 있다. 정인숙은 세 살 된 아들이 있었다. 아들의 이름을 정승일로 지었는데 훗날 개명해 정성일이 되었다. 정성일은 19세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해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낸 뒤에 한 달 만에 취하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으로 건너간 정성일은 2001년에 신용카드 도용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살고 2005년에 강제추방되어 귀국했다. 그리고 2007년에는 골프방 사장 납치사건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성일이는 정일권이 친아버지임을 확인했다. 아버지인 정일권을 살려야 가족이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소를 취하했다.” 정종욱의 말이다. 정일권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그는 생전에 정성일을 친자로 인정하지 않고 정종욱의 면담도 거절했다. 결국 정인숙 살인사건은 정성일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추정할 수 있지만 미스터리로 남게 된 것이다.
어르신은 왜 수청을 들라 했을까 - 청와대 총격사건
얼마 전에 노기자 몇 사람과 여행한 일이 있었다. 그때 한 기자에게 들은 이야기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으려니와 한낱 유언비어일 가능성이 더 클지도 모른다. 이러한 말들은 군사독재 시절에 비일비재하게 불거졌는데, 우리나라의 저명한 정치인들, 심지어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도 대부분 여자와 관련된 스캔들을 갖고 있다. 이는 자유당 시절부터 내려온 전통이기도 하다. 워커힐 부지는 대한전선그룹의 설경동 회장의 소실이 갖고 있던 땅이고, 대원각은 이재학 국회부의장의 소실이 갖고 있던 요정이다. 이렇게 명백히 드러난 일들이 있는가 하면 소문만 무성할 뿐 베일이 싸여 있는 유언비어들이 더 많다. 그중에 압권은 당연히 대통령과 관련된 스캔들이다.
유신정권 시절에 중앙정보부에서 채홍사가 어르신에게 여자를 상납했다는 사실은 10.26사건으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러자 국민들은 부패한 권력에 공분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소위 어르신과 관계했던 여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소문과 유언비어만 무성할 뿐 진실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러한 스캔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스캔들이나 유언비어도 하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캔들과 유언비어를 통해 그 사회와 권력자들의 도덕성을 살필 수 있다. 그러므로 스캔들은 그 정권이 얼마나 부패하고 비도덕적이었는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어르신의 세컨드야
어쨌든 노기자 L씨에 의하면, 군사정부 시절(L씨는 이것이 3공화국 시절인지 5공화국 시절인지 말하지는 않았다)에 보안사에서 어르신에게 여자를 상납했다.
“○씨, 여기는 보안사인데 ○월 ○일 ○시에 ○호텔 ○호실에 가서 샤워를 하고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불을 끄고 기다리시오. 어르신이 누구인지 묻지 말고 얼굴도 자세히 보려고 하지 마시오. 다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어르신을 잘 모시도록 하시오. 그러면 특별한 혜택이 있을 것이오.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누설하면 국가기밀 누설죄로 처벌할 것이오.”
어느 날, 탤런트 모 씨는 보안사로부터 이러한 전화를 받았다. 탤런트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모 씨는 전전긍긍했다. 어르신의 수청을 들라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도 없고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국가기밀 누설죄로 처벌한다고 했다.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이니 무슨 짓이든지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수청을 들겠다고 생각했다.
보안사 상사의 지시를 받은 그녀는 지정한 호텔로 갔다. 과연 호텔에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호텔 로비에서부터 방까지 올라가는 동안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알아보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까지 했다.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아무도 없었다. 방 안을 둘러본 그녀는 커튼을 치고 샤워를 했다. 긴장감이 전신을 엄습해 왔으나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뒤에 침대 위에 올라가 누웠다. 물론 옷을 입지는 않았다. 커튼을 두껍게 친 호텔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과연 어르신이 들어와서 일을 끝내고 돌아갔다.
그녀가 샤워를 하고 방을 나서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겉에는 금일봉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연예계에 은밀하게 소문이 퍼졌다. 탤런트 아무개 씨도 그와 같은 소문을 듣고 설마 그런 일이 있으려니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녀에게도 전화가 왔다. “○○호텔에 가서 옷을 벗고 누워서 기다리시오.”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일이 정말 있구나, 하면서 긴장감을 억누르지 못하고 지정한 호텔로 갔다. 전화로 지시받은 대로 샤워하고 불을 끈 뒤에 침대에 눕자, 과연 얼마 후에 어르신이 들어와서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그녀는 묘한 성취감이 일었다. 자신이 마침내 뉴스에서만 보던 어르신을 모셨구나, 하고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자신이 어르신의 두 번째 부인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가 어르신의 두 번째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르신의 두 번째 부인이라고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러나 비밀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목이 뻣뻣해졌다. 사람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오만하게 행동했다. ‘나는 어르신을 모신 사람이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는 아랫사람으로 보였다.
방송국에 들어가려면 출입증을 패용해야 한다. 방송국 출입증을 패용하지 않는 그녀가 들어가려고 하자 경비들이 가로막았다.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앞을 막는 거야?” 그녀는 화를 내면서 경비의 뺨을 때렸다. 방송국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방송국에서는 평소 얌전하던 그녀가 경비의 뺨을 때린 것이 의아해서 자초지종을 알아보았는데, 어르신을 모셨다고 했다. 방송국 직원들은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기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한낱 유언비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외국 국빈에게도 수청을?
외국에서 국빈이 오면 종종 요정에서 접대를 한다. 쉬쉬하고는 있지만 그와 같은 일이 관행처럼 벌어졌다. 이는 일제 강점기부터 자유당정권, 그리고 공화당정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한국의 이러한 관행이 미국까지 알려진 탓인지 존슨 대통령의 부인은 존슨 대통령이 요정에 가지 못하도록 한사코 막았다고 한다.
국빈에 대한 접대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국빈이 머물고 있는 호텔에 영화배우나 탤런트를 보내 수청을 들게 했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은밀하게 나돌았는데 아프리카 가봉 대통령과 여자 가수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그 여자 가수가 아들을 낳았는데 흑인이고 가봉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국빈 중에는 여자들도 있다. 대통령의 부인이나 여자 총리도 한국을 방문한다. 그런데 그녀들에게는 남자 배우들이 수청을 들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하루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독재자의 부인이 한국을 방문했다. 공식 일정이 끝나고 밤이 되자 이 여자에게 남자 배우를 상납해 수청을 들게 하려고 했다. 이 여자는 사치하고 부패한 것으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나중에 대통령 궁에서 여자의 팬티와 구두가 수천 벌이나 나왔다고 외신에 보도된 일도 있다. 그런 그녀가 국빈으로 방문했으니 남자 배우가 수청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마침 마땅한 남자 배우가 없었다. 어쩔 수없이 당시 경호실장이 그녀의 방에 들어가 수청을 들었다. 쉬쉬했으나 청와대 비서관들이 알게 되었고 경호실장과 사이가 안 좋은 문화수석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육사 출신으로 한때 절친했으나 틈이 벌어져 있었다. 문화수석이 그 같은 이야기를 듣고 늙은 여자에게 수청을 들었다고 경호실장을 놀렸다.
“이 새끼, 죽고 싶어?”
경호실장이 노발대발하면서 총을 뽑아들었다.
“좋아. 한 판 붙어보자.”
문화수석도 화가 나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두 사람은 으르렁대다가 청와대에서 결투를 하기로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이 황야의 결투를 벌이듯 총을 쏘았는데 문화수석이 팔꿈치를 맞았다. 총소리를 듣고 다른 비서관들이 뛰어나와 만류해서 사건은 그것으로 끝난 듯했다.
“경호실장이 아무개 여사의 수청을 들었대.”
“뭐라고? 늙은 여자의 수청을 들어? 그게 말이나 돼?”
“청와대에서 결투까지 했다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 사이에 그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고 당사자인 경호실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뭐야? 도대체 어떤 새끼가 그런 소문을 퍼트려?” 이 소문이 널리 퍼져서 어르신의 귀에까지 들어간다면 실로 큰일이다. 경호실장인 자신은 어르신을 지키기 위해서만 총을 뽑아야 할 처지가 아닌가. 그런 그가 다른 곳도 아닌 어르신이 계시는 청와대에서 총격을 벌였다는 말이 퍼진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게 뻔했다. 경호실장은 서린호텔에 방 세 개를 잡아놓고 기자들을 잡아다가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누구한테 들었어? 어떤 새끼한테 들었는지 대란 말이야?”
경호실 직원들은 기자들을 마구 폭행했다. 기자들은 매를 맞는 것이 두려워 관련이 없는 사람들까지 불었다. 많은 기자들이 서린호텔로 끌려가 매를 맞았다. L씨는 당시에 유력 일간지의 편집부장으로 있었다. 자신의 밑에 있는 기자가 서린호텔로 끌려가 매를 맞더니 L씨의 이름을 불었다. L씨는 서린호텔로 끌려가 매 맞을 것을 생각하자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청와대에 있는 친구인 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호실장이 기자들을 잡아 패고 있는 거 알지? 신문사 편집국에 와서 한 시간만 있어 보라고 그래. 독자들의 전화가 빗발 치고 있어. 시민들이 다 알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기자들을 그렇게 패서 어떻게 하자는 거야?”
L씨의 전화를 받은 비서관이 그 이야기를 경호실장에게 했다. “정말 그래? 시민들이 다 알고 있어?” 경호실장은 그제야 서린호텔에 있는 경호실 직원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어둡던 시대였다. 언론이 통제되어 있던 시절이라 이 같은 유언비어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청와대에서 비서관과 경호실장이 결투를 벌인 일은 3공화국 초기에 실제로 벌어졌다. 그러나 수청 문제로 결투를 벌인 것은 그 이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유포된 것으로 여겨진다.
진실을 은폐하는 시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하지만 이 말이 얼마나 지켜졌던가? 항간에 떠도는 ‘대한민국은 권력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청와대로부터 나온다’라는 말이 더 맞는 말이라 여겨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군사독재 시절에는 고문 행위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고문하다가 죽으면 이를 은폐해 의문사로 처리해버렸다. 진실이 은폐되니 추측과 추리가 난무하고 사소한 스캔들마저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시중에 떠돌게 되었다.
여배우 아무개 씨 사건도 그렇다. 그는 1970년대에 영화로 데뷔해 1980년대의 대표적인 여배우가 되었다. 그런데 한 권력자가 그녀를 좋아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여배우는 권력자에게 강제로 능욕당했고 권력자의 부인이 그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했다. 권력자의 부인은 그 여배우를 잡아다가 가혹하게 린치를 가했다. 심지어 그녀의 자궁을 드러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러한 소문이 삽시간에 전 국민에게 퍼졌다.
권력자가 물러가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그녀를 데뷔시킨 영화감독이 그녀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영화를 만들었다. 그 영화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여배우는 다시 한 번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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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영화가 한국의 여배우 아무개의 실화인가?” 일본인 한 사람이 영화감독에게 질문했다. “그렇다. 내 영화는 사실에 근거해 만든 것이다. 여배우 아무개가 실제로 당한 일이다.” 감독의 인터뷰가 국내에 알려져 여배우 아무개가 발끈했다. “미안하다. 내 말이 와전되었다.” 영화감독은 곧 자신의 발언을 취소했다. 영화배우 아무개를 둘러싼 소문은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