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훔친 황제의 금지문자

   
왕예린(역자: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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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북스
   
14000
2010�� 11��



■ 책 소개
문자옥(文字獄), 보이지않는 감옥의 역사 
“지식과 문화를 짓밟는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이 책은 문자를 통해 오해를 사거나 의도적으로 모함을 받아 억울한 일을 당한 중국 역사 속 사건과 인물들을 재미있게풀어 쓴 책이다. 아울러 역사 속 인물들의 인간적인 매력과 그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교훈까지 함께 담아내고 있다. 이를 통해문자가 가진 힘과 그 영향, 이를 지키려 혹은 빼앗으려 했던 인물들의 정치, 문화적 배경과 심리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왕예린
1946년 장쑤성(江蘇省) 장두(江都) 출생. 1967년 안후이성(安徽省) 허페이(合肥)사범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후안후이 성 당투현(當塗縣) 허동(河東)중학교에서 8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1978년 당투현 문화관으로 배속된 후 1989년부터는 안후이성우후시(蕪湖市) 정협(政協)에서 근무했다. 중국 서예가 협회 회원, 중국 시사(詩詞)학회 회원, 안후이성 산문 학회 회원 및 이사로 활약했으며,역사 소설, 산문, 수필 등 다양한 글을 저술했다. 

■ 역자 이지은 
중앙대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한중과 석사를 거쳐, 중국대련 요녕사범대학에서 수학했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이야기 경제학편』『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이야기 고대국가 편』『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진 여성들』『의문에 빠진 세계사 : 세상을 뒤흔든 뜻밖의 미스터리』『탐탐: 남다른 삶을 위한 자세』『조조에게 배우는 12가지 덕목』 등이 있고, 장석민의 『고급 HSK』에 공동 번역참여했다.

■차례
시작하면서 

지식과 문화를짓밟는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 시황제 외
한 왕조의 호족탄압정책에 희생되다 - 양운
백성을 위해 웅얼거리기라도 해주시오 -양송
순진한 문사, 옛것에 기대 절대권력을 조롱하다 - 공융 외
총애와 질투를 한 몸에 받았던 천재 시인의 운명 -설도형
‘문자옥’이 허물어지던 문인들의 태평천국 - 왕발 외
양날의 검이 된 송대 권신들의 당쟁과 암투 - 백거이 외
편지는기억보다 강하다 - 구양수 외
개혁과 보수가 격돌한 ‘오대시안’ - 소식
권력의 거센 물결을 피하는 자와 부딪히는 자 -이지의
노래가 된 황제의 사랑 - 주방언
충직함이 오히려 화를 부르다 - 진동
역사를 입맛대로 요리한 간신 - 진회
‘시를짓지 마라!’ 남송 시인들에게 내려진 ‘금시령’ - 사미원 외
곧아서 꺾이고 약아서 눌리다 - 곡단 외
지식은 위험을 부르고 경쟁은화를 부른다 - 장균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 주원장
현실이 냉엄할수록 빛났던 지식인들의 ‘시대정신’ - 방효유 외
추악한황실, 날뛰는 환관이 신하의 볼기를 치다 - 왕정진 외
속박을 참지 못한 문재, 감옥에 갇히다 - 이몽양
북경에서 점화된 천문학 논쟁- 탕약망
‘강건성세’의 허울, 사료를 잿더미로 만들다 - 김성탄
옛 무덤을 보며 『속금병매』를 태우네 - 정요항
가문의 영광이루려다 대학살을 부르다 - 장정롱
문풍은 시대를 따라야 하나니 - 대명세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는다 - 연갱요외
역모 이용해 반역의 씨를 말리다 - 여유량
붕당의 싹 말려버린 깊고 교묘한 함정 - 악이태의 자손들
글과 말을 막아도 마음을얻을 수는 없다 - 홍량길
새로운 세상을 꿈꾼 청년들의 ‘혁명’ - 장태염 외

마치면서

 





영혼을 훔친 황제의 금지문자

지식과 문화를 짓밟는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 시황제 외
중국 역사상, 가장 가혹하고 거대한 문자옥을 만든 사람은 진나라 시황제일 것이다. 그는 지식인의 글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들을 탄압하고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그가 저지른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중국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문자옥이다.


사실 분서와 갱유는 그 성질이 전혀 다르다. 분서를 일으킨 사람은 이사였고 갱유를 일으킨 사람은 시황제 자신이었다. 이사는 두 가지 이유로 분서를 일으켰다. 첫째, 시황제에게 흑백을 구분하고 최고의 존엄을 세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둘째, 자신의 기득권을 더욱 확고히 하려면 ‘다른 사람의 칼을 빌려’ 적대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다.


후대에 나온 이사에 관한 평가 중에서는 사마천의 평이 가장 공정하다. “이사는 육예(六藝, 고대 중국에서 교육한 여섯 가지 과목)의 귀결을 알면서도 군주의 결점을 보완하고 정치를 공명정대하게 펼치는 데 힘쓰지 않았다. 나라에서 주는 많은 국록을 탐하며 군주에게 아부하고 구차하게 영합하고 엄격한 형벌을 실시했다. 세상은 그가 충성을 다하고도 처형을 받았다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다. 그렇지 않다면 이사의 공이 어찌 주공, 소공과 같지 않겠는가?”


이사와 주공, 소공 모두 나라를 세우는 데 큰 힘을 쓴 중신이다. 하지만 주공과 소공은 모두 겸손하고 자신보다는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이사는 국록과 관직을 탐했다.


분서가 개인의 탐욕과 왕권 강화를 위해 오랜 세월 치밀하게 준비된 것과 달리 갱유는 그저 화풀이나 보복, 전제 정치에 대한 비방을 막으려는 단순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시황제 34년의 분서에 이어 35년에 일어난 갱유는 시황제의 명령으로 진나라 전역에서 자행되었다. 시황제는 애당초 유생이라는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시황제 26년, 봉선(封禪, 하늘과 땅에 지내는 제사-옮긴이)을 하기 위해 시황제가 태산을 찾았을 때 노나라와 제나라에서 온 유생 70명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의례를 들먹이며 앞다투어 상소를 올렸다.


“고대 제왕들이 태산에서 봉선을 올릴 때는 산에 있는 초목과 영험한 나무의 뿌리를 보호하기 위해 항상 갈대로 수레바퀴를 감쌌습니다. 또 땅을 치우고 제사를 지낼 때 천을 바닥에 깔았는데 지금의 것을 어찌 예라고 하겠습니까?”


설상가상 자신의 주요 업적이라 할 만한 군현제에 대해 유생들이 계속해서 케케묵은 옛 경전을 끌어들여 왕명에 대항하자 시황제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시황제는 나라를 어지럽히고 왕권을 약하게 한다며 유생 460명을 산 채로 땅에 파묻어버리라고 명했다. 시황제의 장자(長子) 부소는 이를 극구 말리다가 미움을 사서 몽염 장군이 있는 곳으로 좌천당해 만리장성 축조를 감독하게 되었다.


분서의 목적은 사상의 통제, 갱유의 목적은 왕권 수호였다. 이를 위해 이사는 시황제의 ‘권위’를, 시황제는 이사의 ‘계략’을 이용했다. 그들은 조용히 손을 잡고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을 만들어 자신들의 ‘사냥감’을 제거했다. 이 끔찍한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귀중한 사료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분서갱유를 일으킨 자들의 목적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갱유가 일어난 지 2년 후 시황제는 세상을 떴고, 천하를 호령하던 진나라는 그로부터 3년 후 멸망하고 말았다. 평생을 바쳐 세운 제국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줄 시황제는 과연 알았을까?


역사를 입맛대로 요리한 간신 - 진회
진회는 번방과 손잡고 악비를 박해한 간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문자옥을 더욱 진화(?)시킨 데 일조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먼저 남송 소흥 24년(1154년)에 있었던 하태와 관련한 사건을 통해 진회가 얼마나 대담하고 교묘하게 문자옥을 일으키고 활용했는지 살펴보자.


하태는 평범한 관리로, 남송 초기에 이름을 널리 알렸던 마신의 제자였다. 마신이 죽자 하태는 스승 마신의 생애와 업적을 자세하게 기록한 전기를 썼다. 책이 완성되자 진주통판이 진회에게 이를 보고했는데 책을 읽어본 진회는 크게 노하여 즉각 하태를 옥에 가뒀다. 대체 책에 어떤 내용이 있었기에 진회가 그토록 분노했을까?


진회와 그 당인들은 남송 왕조가 세워지기까지 자신들이 가장 큰 공로를 세웠다고 자부했다. 특히 진회는 자신이 금나라와 목숨을 내걸고 싸워 조씨 왕조의 명맥을 남겨두지 않았다면 어떻게 남송 정부가 세워지고 고종이 보좌에 오를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태가 쓴 마신의 전기에서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금나라는 변량을 포위하고 휘종과 흠종을 포로로 삼은 뒤 자신들의 명령을 받들 사람을 찾았다. 금나라로서는 언어와 문자가 판이하게 다른 송나라를 직접 통치하기가 무척 어려운 상태였다. 따라서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친금 정책을 실시할 수 있는 사람을 대신 세워 황하 이북땅을 다스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나라에는 단 하루라도 임금이 없으면 안 되는 법이라 누구를 황제로 세워야 할지 고심하고 있을 무렵, 황실에 충성하는 대신들은 당연히 조씨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금나라의 생각은 달랐다. 금나라 정부는 더 이상 조씨에게 황제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다른 성(姓)에게 황위를 건네주기로 결심한 터였다. 결국 금나라 정부는 장방창을 황제로 삼고 국호를 ‘대초’로 정했다.


장방창이 황제로 등극하자, 마신은 신중하게 사태를 관망하라는 내용을 딱딱한 어조로 눌러 담은 서신 한 통을 써 내려갔다. “하늘을 속일 수 없고 백성의 힘은 무서운 법이오. 그대가 만일 지금이라도 부족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려 한다면 화가 복이 될 수 있을 것이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순간에도 마신은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나, 마신은 결코 그대를 도와 송나라의 역적이 되지 않을 것이오. 그 마음을 알리는 뜻에서 먼저 엎드려 죽을 것을 청하는 바요.”


서신을 쓴 마신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뜻이라면 서명하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 하나 선뜻 이름을 적지 못했다. 진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마신 혼자 황궁으로 가 자신의 서신을 황제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도발적인 마신의 서신을 받고 마음을 한껏 졸인 끝에 장방창은 다음 날 먼저 철종의 황후인 맹씨에게 서신을 전했고 결국 조정 여야에 조씨 가문의 졸병이 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게 되었다는 것이 전기의 내용이었다.

진회는 자신을 겁쟁이로 묘사한 하태의 글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진회는 마신의 전기를 쓴 하태를 잡아들인 후 진양으로 쫓아냈다. 하태는 훗날 진회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임안으로 돌아와 원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소홍 12년(1142년) 호전이 화의에 반대하는 글과 함께 천하에 황제의 뜻을 알리는 뜻에서 진회를 본보기로 참수형에 처해야 한다는 상주문을 올렸다. 이 일로 진회의 화를 산 호전은 결국 신주로 유배되었다.


관원 장구성은 민간의 고사(鼓詞)를 불렀는데 그중에 진회를 비웃는 노래가 있었던지 삭탈관직 당했다. 뿐만 아니라 장구성과 평소 친분이 있던 종고라는 승려도 함께 끌려갔다. 태학생 장백린은 고종이 북벌하여 잃어버린 땅을 수복할 뜻이 없음을 알고 벽에다 “부차여, 월왕이 네 아비를 죽인 것을 잊었더냐?”라는 시를 썼다. 정부에 대한 실망과 원망이 담긴 시를 본 진회는 장백린을 잡아들여 심하게 매질한 후 변방으로 내쫓아버렸다. 진회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궁궐 안에서 자신과 관련된 모든 상주문이나 조서를 찾아내 전부 태워버렸고, 남은 글들은 아들 주희에게 붓을 쥐어주고 위조하거나 고쳐 쓰도록 했다.


진회가 세운 문자옥으로 조정에서만 80명이 연루되어 관직에서 쫓겨났다. 문자옥을 통한 문화 통제에 있어서 진시황제 이후 진회가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청출어람(?)이라고나 할까? 제아무리 주도면밀한 진시황이라고 해도 문서를 위조하고 역사를 제 입맛대로 요리하는 진회의 솜씨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문의 영광 이루려다 대학살을 부르다 - 장정롱
장정롱 사건은 강희 연간의 유명한 문자옥 중 하나로 손꼽힌다. 장정롱이 『명사』를 새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재물에 눈이 어두운 오지영이 장정롱이 글로 새기는 책의 내용 중에 청나라에 반역하는 증거가 있다고 고발했다. 이로 말미암아 장정롱은 물론이고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


장정롱은 사학자나 문학가가 아니라 그저 호주성에서 행세깨나 하는 집안의 자제였다. 아버지 장윤성은 조정에 몸을 담고 있었고 이복동생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의 이름이 장정월이다. 이복동생의 됨됨이를 알고 있던 장정롱은 동생들이 가업을 잇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가문을 세우기 위해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옆집에 명나라의 신하로 『명사』를 쓴 주국정의 후손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주국정이 쓴 『명사』「제신열전」이 ‘갑신지변(甲申之變, 1644년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을 함락하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목을 매 자살한 사건-옮긴이)’으로 미처 판각이 되지 못하는 바람에 『명사』는 미완성된 상태로 골방에 갇혀 있었다. 명나라 왕조가 멸망한 후 주씨 집안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그 후손들은 책을 펴낼 능력이 없었다. 명성을 얻을 생각에 장정롱은 곧장 주국정의 원고와 저작권을 모두 사들인 후 장인(匠人)을 집으로 불러 활판을 새기도록 했다. 그리고 많은 명사들을 찾아가 서문을 청했다. 그러는 사이 작가 이름 역시 어느 순간 장정롱으로 바뀌어 있었다.


판각 작업이 절반쯤 진행되었을 무렵 장정롱이 갑자기 눈이 멀며 심하게 발작하더니 얼마 못 가 죽고 말았다. 그의 이복동생인 장정월은 가만히 앉아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주색잡기와 도박에 눈이 먼 장정월은 『명사』의 각서 따위는 새까맣게 잊은 뒤였다.


당시 장씨 가문의 집 앞으로는 책을 파는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선박들이 자주 오갔다. 아직 다 새기지 못한 『명사』의 원고가 장씨 집에 있다는 소식을 접한 호사가들이 장정월을 찾아가 각서를 완성하라고 부추겼다. 게다가 이 책의 가치를 알고 있던 책장수들마저 앞으로 책을 완성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큰돈을 벌 것이라고 꼬드겼다. 그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진 장정월은 『명사』의 각서 작업에 다시 박차를 가했다. 그러던 중 주국정이 숭정제에 있었던 일을 미처 다 쓰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용이 누락되면 책을 완성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장정월은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사실 그에게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 따위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책을 완성해 큰돈을 쥘 생각뿐이었다. 장정월은 결국 제법 이름이 난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주국정이 미처 쓰지 못한 부분을 채워 쓰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장정월의 집에는 10여 명의 문사들이 모였는데 그들은 기회다 싶어 이민족(청나라)에게 가지고 있던 온갖 울분과 원망을 마음껏 쏟아냈다. 하지만 무지한 장정월은 그 내용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건 돈밖에 없다며 1,000자당 금 30냥을 주겠다고 떠벌리며 그저 글을 독촉하는 데만 바빴다.


그때 호주성에는 기관아문(機關衙門)이 설치된 오정현(烏程縣)과 귀안현(歸安縣)이 있었다. 귀안현의 현령(縣令) 오지영은 뇌물을 받고 법을 어긴 죄로 파관되어 옥살이를 했다. 출옥한 그는 ‘화려한 재기’를 꿈꾸며 이름을 알릴 기회를 찾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러던 중 누가 『명사』를 구실 삼아 장씨 가문을 협박하면 평생 써도 다 쓰지 못할 정도의 재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오지영은 판각이 완성돼 출판된 『명사』를 들고 장정월을 찾아가 협박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장정월이 꿈쩍도 하지 않자 결국 마지막 카드를 쓰기로 했다. 즉, 재물은 얻지 못하더라도 천하에 명성을 떨치겠다는 생각에 장정월을 관부에 고발한 것이다. 오지영은 먼저 장군 송괴에게 반청 색채가 짙은 『명사』를 보냈다. 책을 읽은 송괴는 순무 주창조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주창조는 독학 호상형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명했다.


『명사』가 관부에 고발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장정월은 놀란 마음에 한걸음에 관부로 달려가 조용히 넘어가자며 뇌물을 건넸다. 결국 관부에서는 책은 출판할 수 있으나 일부 내용은 삭제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역 죄인’을 고발한 충신이라는 명성이라도 얻으려 했던 오지영은 상황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돌아가자 판결게 불복하고 원본 『명사』를 가슴에 품고 북경으로 올라갔다. 일개 현령 출신인 오지영은 대담하게도 강희제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다.


아마도 강희제는 이 책을 직접 보았던 것 같다. “책 속에서 옛 명나라를 높이 받들고 우리 청나라 왕조를 비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태조(太祖, 청나라의 태조)를 ‘OO라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또 무엇인가? 상왕[상가희: 청나라의 무장으로 조선과 요서지방 공략에 종군하고 유적(流賊), 명나라의 계왕을 토벌했다]과 경왕(경정충: 청나라의 무장으로 권세를 누리다가 훗날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을 도둑놈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 청나라가 후금(後金)을 계승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또 무엇인가?”


강희제는 계속해서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강희제는 명나라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수많은 폐단을 조목조목 꼬집으며 답변을 요구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명사』와 관련된 자들은 강희제로부터 무거운 처벌을 받아야 했다.


애당초 이 일을 시작했던 장정롱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난데없는 벼락이 떨어졌다. 장정롱의 아버지 장윤성과 이복동생 장정월, 조카 등 18명이 전부 요참을 당했다. 전 예부시랑(禮部侍郞) 이령절은 『명사』에 서문을 달았다가 역시나 요참을 당했고 그의 네 아들도 요참을 면치 못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오지영은 평소 남심진의 부자 주우명을 몹시도 미워하고 있었는데 벼르고 벼르던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다. 오지영은 장정롱이 완성한 『명사』중에 구사 주씨라는 사람이 자주 평론을 발표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주우명이 바로 구사 주씨라고 포졸에게 고해 바쳤다.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을 늘어놓은 오지영 때문에 주우명과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참수형을 당했다. 장정롱 사건을 가장 먼저 보고받은 장군 송괴, 막료 정유번은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뇌물까지 받은 죄를 물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송괴는 다행히 죽음을 면했지만 관직에서 쫓겨났고 정유번은 연시에서 죽음을 당했다.


귀안현과 오정현은 모두 호주성의 관리하에 있었는데, 두 현에 있는 학관들도 장정롱의 역심을 알고도 이를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모조리 참수형에 처해졌다. 호주태수 담희민은 호주성에 부임한 지 반 년도 안 되어 추관 이환과 함께 은닉죄로 교수형을 당했다.

귀안의 모원석은 오지용, 오지명 두 형제와 함께 이 책의 교정 작업에 참여했다가 죽음을 당했다. 강초 지역의 여러 명사 가운데도 이 책 때문에 목숨을 잃은 자가 많았다. 판서나 인쇄, 수정뿐만 아니라 책을 보내는 일을 했던 사람들까지, 『명사』에 관련된 인물은 이유를 막론하고 모두 죽음을 당했다.


『명사』로 인한 대학살에서 유일하게 목숨을 보전했던 사람은 사계좌, 육기, 범양 세 사람뿐이었다. 장정롱은 자신의 가문을 빛내고자 당시 절서 지역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이 세 사람의 이름을 몰래 『명사』의 교정자 명단에 집어넣었다. 이를 알아챈 세 사람은 먼저 관부로 달려가 장정롱과 역서를 고발했다. 그리하여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이들 세 사람과 그들의 가족이 겪은 충격과 공포는 죽음에 못지않을 만큼 컸을 것이다.


글과 말을 막아도 마음을 얻을 수는 없다 - 홍량길
1799년 가경 4년, 중국 대륙을 60년도 넘게 통치했던 건륭제가 89세의 나이로 붕어하자, 인종 애신각라옹염이 그 뒤를 이었다. 건륭제가 세상을 떠난 그 달에 인종은 건륭제가 아끼던 권신이자 권력과 탐욕에 눈이 멀었던 화곤과 복장안을 처형한 뒤 글과 말로 죄인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첫 회초리는 상주 출신의 시인 홍량길이 맞았다. 홍량길은 유명한 시인인 황종칙의 절친한 벗이었다. 두 사람은 안휘학정인 주균의 막료로 일했는데 훗날 홍량길이 섬서독무 필원의 휘하로 들어갔다. 홍량길은 필원을 위해 고서의 문장을 다듬고 새겼다. 건륭제가 죽은 뒤 『고종실록』을 수정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 홍량길은 첫 원고를 완성한 뒤 그 내용을 확인하다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마도 원고의 대부분이 지나친 아부와 미사여구로 뒤범벅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곧 죽어도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던 홍량길은 충동적으로 당시 군기대신인 영성에게 실록의 문제점과 불만을 적어 보냈다.


영성은 중국 서예계에서 손꼽히는 인재로, 건륭제의 열째 아들이다. 가경제 즉위 초기, 영성은 호부(戶部)의 삼고(三庫)를 관리하는 엄연한 대신이었다. 모든 분야에서 골고루 실력을 드러낸 홍량길이었지만 그의 천진한 성격은 문제가 됐다. 당시 건륭제는 이미 붕어했고 그의 충신인 화곤까지 처형을 당한 상태였다. 게다가 기존의 정책들도 개혁을 표방하고 있었기에 홍량길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왔다고 생각한 듯하다. 아울러 가경제가 그러한 세상을 열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다. 홍량길이 영성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 내용을 살펴보자.


“지금 천자께서 다스림을 구하려는 마음이 급합니다. 허나 천하가 올바르게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더욱 급하고 급합니다. 아직까지 바뀌지 않은 상황들이 있으니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풍속이 나날이 문란해지고 있으며 상벌(賞罰)은 여전히 불명확합니다. 또한 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하나 열린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아직 제대로 열리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관리의 다스림 역시 날로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선제(先帝) 건륭제의 이미지에 흙탕물을 튀기는 것을 자식 된 도리로 어찌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량길은 영성의 불편한 심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부정과 비리가 난무한 사회적 분위기의 원흉이 바로 상류층이라고 지목한 홍량길의 뿐석은 청나라 내부의 문제를 정면으로 파헤쳤다. 밑바닥에서부터 성장해 온 홍량길이었기에 각급 관리들이 어떻게 뇌물을 받는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백성의 고충에 대해서도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했다.


“백성이 관아에 아뢰는 사건이 수천, 수백 가지라고 했을 때 그중 한 두 가지만 채택된다면 그 어려움이 어떨지 생각해보십시오. 다행히 흠차가 조금의 양심이 있어 임의로 법을 만들었다고 하여도 큰 손해를 보지 않게 할 뿐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흠차가 시찰을 나가면 그 피해가 성 전체, 백성에게까지 이르니 성으로 돌아올 때는 수레에 온갖 금은보화가 항상 한가득입니다.”


탐욕과 부패의 결과는 무엇인가? 홍량길은 서신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주현에서는 백성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으려는 심정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백성 역시 위를 움직이려면 결코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다는 점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격변(激變)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호북의 당양, 사천의 달주는 그 힘이 상당히 위험합니다.”


건륭제 시대의 심각한 부패 현상에 대해 홍량길은 거칠 것 없이 붓을 놀렸다. 거친 붓질에 황실의 곤룡포에 시커먼 먹물이 튀었다. 이 서신을 받은 영성은 놀란 마음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혼자 이 일을 처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영성은 즉각 가경제에게 서신을 올렸다. 홍량길의 통렬한 비난에 진노한 가경제는 관직을 박탈한 후 조정 대신들에게 그를 심문할 것을 명했다. 홍량길은 사형을 선고받을 뻔했지만 다행히 죽음을 면하고 천산 이북의 이리로 쫓겨났다.


제아무리 큰 문자옥을 세운다고 해도 민족적 갈등과 통치 위기라는 문제를 철저하게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예로, 만청 정부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정부의 탄압과 공포정치로 인해 중단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경 8년(1803년) 원명원에서 환궁하던 가경제를 어주 진덕이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쳐 능지처참을 당했다. 10년 후인 가경 18년(1813년), 휴주, 활현 등지의 팔괘교가 모반을 일으켜 장원, 산동 조현까지 세력을 일으킨 뒤 소식을 듣고 뜻을 함께한 현지 세력과 함께 경기 지역까지 압박했다. 같은 해 9월 15일 진상 등 수십 명이 자금성을 공격해 가경제가 머무르는 내궁까지 쳐들어갔고 월화문 성벽에서 황궁의 병사들과 대치하기도 했다. 계속되는 정변과 궐기에 놀란 가경제는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9월 15일, 황궁 안에 큰일이 일어났으니 이는 일찍이 다른 왕조에서는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다. 짐은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도다. 무릇 왕조가 바뀌면 화가 쌓인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나…….”


맞는 말이다. 여기서 말한 ‘화’라는 것은 강희제로부터 옹정제, 건륭제에 걸쳐 행해진 잔혹한 민족적 압제와 사상 통제로 인해 유발된 오랜 분노를 가리킨다. 가경제는 무력을 통해서는 자신만의 태평천하를 세울 수 없음을 깨닫고 정책을 바꿀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가경제는 홍량길 사건을 계기로 곤경에서 벗어날 핑계를 찾아낼 수 있었다.


“홍량길이 죄를 지은 후, 발언을 하는 이가 날마다 줄어들었다. 설사 있다고 해도 일상적인 이야기만 할 분, 군주의 덕이나 백성의 고민, 나라의 기쁨과 걱정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가 없었다. 홍량길의 처지를 보고서 누가 감히 다시 입을 열려고 하겠는가?”

이렇게 해서 가경제는 이리의 장군에게 홍량길을 석방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가경제의 조서가 하달되기 전 천하에 극심한 가뭄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는데 홍량길을 석방한다는 조서가 발표되자마자, 감로 같은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었다고 한다.


천문(天文)과 인사(人事)를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이 이야기는 ‘사필귀정’을 강조할 때 곧잘 쓰인다.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간단명료하다. 제아무리 큰 문자옥을 세우고 언론을 탄압해도 민심을 얻기는커녕 하늘도 등을 돌린다는 사실을 따끔하게 전하고 싶은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가경제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덕분에 이후로 가경제 치하에서 일어난 문자옥은 겨우 두 건에 그친다. 하나는 가경 10년 서양인들이 간행한 기독교 전도서적을 조사하여 금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경 13년 호남순무 선학령이 황손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표를 써서 파직당한 사건이다.


사람을 죽이지도 않고 가문을 무너뜨리지도 않고, 주살하지도 않고 무고한 죄를 덮어씌우지도 않았으니 건륭제 시대와 비교했을 때 가경제는 얼마나 관대한 군주인가!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