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신동준
ǻ
에버리치홀딩스
   
22000
2010�� 10��



■ 책 소개
1840년 아편전쟁을시발점으로 태평성대의 청나라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트린 내분과 외침 속에는 사상은 달라도 존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 한 양무자강파와변법자강파, 그리고 혁명파가 있었다. 중국 근대사는 청대의 패멸에서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이 된 중국을 만든 임칙서, 증국번, 좌종당,이홍장, 강유위, 양계초, 손문과 원세개의 이야기다. 

책은 아편전쟁에서부터 태평천국의 난, 양무운동, 청불전쟁, 청일전쟁, 무술변법, 의화단운동, 신정개혁, 중화민국의 건국,군벌할거, 신문화운동과 5.4운동까지 중국 역사상 최고 격변기 속에서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나라를 지키려던 임칙서,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강유위, 양계초, 손문과 원세개를 재평가한다.

■ 저자 신동준
21세기정경연구소 소장 신동준은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의 길을찾는 고전 연구가이자 평론가다.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안목에 열정이 더해져 고전을 현대화하는 새롭고 의미 있는 작업을 계속 진행하고있으며, 이러한 작업의 일부를 정리해 책으로 펴내고 있다. 40여 권에 달하는 그의 책은 출간 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많은 독자에게 고전에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경기고 재학시절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의 대가인 청명 임창순 선생 밑에서 『사서삼경』과 『춘추좌전』『조선왕조실록』 등의 고전을 배웠다. 서울대 정치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조선일보」와 「한겨레」 등에서 10여 년간 정치부기자로 활약했다. 1994년에 다시 모교 박사과정에 들어가 동양정치사상을전공했고, 이후 일본의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을 거쳐 「선진(先秦)시대 정치사상 비교연구」로 모교에서 박사학위를받았다.

현재 21세기정경연구소 소장인 그는 격동하는21세기 동북아시대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기 위해 동양고전의 지혜를 담은 한국의 비전을 꾸준히 제시하고 있으며, 서울대&nbsp&한국외대&nbsp& 국민대 등에서 학생들에게 동양3국의 역사와 사상 등을 가르친다. 동양3국의 역대 사건과 인물에 관한 바른 해석을 대중화시키기위해 「월간조선」「주간동아」「위클리경향」「이코노믹리뷰」 등 다양한 매체에 꾸준히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차례
서문 
들어가는 글 


제1장 임칙서(林則徐)
제2장 증국번(曾國藩) 
제3장좌종당(左宗棠) 
제4장 이홍장(李鴻章)
제5장 강유위(康有爲) 
제6장 양계초(梁啓超)
제7장 손 문(孫&nbsp&文)
제8장 원세개(袁世凱)

지은이 후기
참고문헌 
부록1 청조 세계표 
부록2 청말민국 연표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임칙서

임칙서, 한간에서 민족의 영웅으로 부상하다

임칙서는 시골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총독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세계의 정세에 관한 많은 정보를 수집했고, 이를 토대로 청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심도 있게 모색했다. 청대 고관 중 그만큼 외국 문헌과 국제법에 밝은 사람도 없었다. 아편전쟁 당시 적대국인 영국조차 그의 재능과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


아편전쟁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동서양을 대표하는 대영제국과 대청제국이 사상 최초로 정면충돌한 사례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는 이때부터 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심에 바로 임칙서가 있다. 그는 청조에서 한조 최초로 고관이 된 인물로 근대화의 효시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가 그를 애국주의자로 부상시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난세에 태어난 최고의 선각자

임칙서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건륭제 치세가 조락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건륭 50년(1785) 8월 30일에 복건성 복주부(福州府) 후관현(侯官縣)에서 부친 임빈일(林賓日)과 모친 진질(陳帙) 사이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실패한 임빈일은 어린 학동을 가르치는 사숙(私塾)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임칙서는 4세부터 부친의 사숙에서 공부했다. 재능이 뛰어난 그는 13세에 생원시험에 합격했다. 가경 9년(1804)에 향시에 합격해 27세 때인 가경 16년(1811)에 회시에 합격에 마침내 진사(進士)가 되었다. 237명 중 7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그는 곧 최고의 학술기관이자 고관으로 영전키 위한 필수 코스인 한림원에 재직하면서 황제에게 조언하고 문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했다. 도광제가 즉위하기 전후로 소금 전매 업무와 세금 징수, 치수, 판관 등의 업무를 수행하며 순조로운 관직 생활을 하게 된 그는 도광 10년(1830)에 공자진 등의 문인과 의기투합해 선남시사를 만들었다.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조야로부터 신망을 얻은 그는 도광 17년(1837)에 마침내 호광총독으로 승진했다. 사실상 한족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셈이다.


임칙서가 호광총독이 된 지 1년 만에, 황작자는 상소문에서 비록 1년의 유예기간을 단서로 달기는 했으나 아편 흡음자를 가차 없이 처벌해야 한다는 초강경론을 전개했다. 이를 소위 사죄론(死罪論)이라 하는데, 사죄론은 아편 흡음자를 제국의 금령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종의 역도(逆徒)로 파악했다. 임직서가 황작자의 사죄론을 적극 지지하고 나선 것은 그 나름의 확고한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태어난 복건성은 아편을 피우는 습관이 최초로 퍼진 곳이고, 그의 동생도 아편으로 죽은 까닭에 그는 누구보다 그 폐해를 잘 알고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서양을 연구한 바 있는 그의 서구 인식은 극히 간단했다. 청국 스스로 서양의 기술을 배워 강국이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임칙서의 행보는 주목할 만했다. 그가 호광총독에 취임한 이후 호광 일대에서는 아편 금지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더구나 그가 올린 복주는 매우 구체적인 방안을 담고 있었다. 1년의 유예기간을 4기로 나눠 지도하고, 흡음자 외에도 흡음소 개설자를 비롯해 판매자와 연구(煙具) 제조자까지 모두 일괄 처벌하자는 게 골자였다. 도광제는 그에게 즉시 상경할 것을 명했다. 11월 15일 그는 흠차대신에 임명되었다. 도광제가 그에게 당부했다.


"흠차대신의 관방(關防 : 칙서에 준하는 효력을 지닌 인장)을 수여한다. 향후 광동에 상주하며 항구의 사건을 조사해 처리토록 하라. 해당 성의 수사(水師)를 겸해 지휘 관할토록 하라."


흠차대신 임칙서가 아편을 소각하다

임칙서가 광주에 도착한 것은 도광 19년(1839) 1월 25일이었다. 그는 이관과 가까운 월화서원을 숙소로 삼았다. 도착 9일째 그는 2통의 유첩(諭帖)을 보냈다. 한 통은 콩홍의 중국 상인, 다른 한 통은 외국 상인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아편 밀매를 중계해온 중국인 상회에 대한 유첩의 내용은 매우 강경했다. 아편을 들여오는 사람은 사형을 당하고, 화물은 모두 몰수한다는 내용이었다. 외국 상인에게 보낸 편지도 강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서신에서 특히 아편 무역의 비인도성을 크게 책망했다. 그리고 팔리지 않아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아편을 모두 관에 제출하고 조금이라도 숨겨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서약서의 제출을 엄명한 이유다.


그러나 외국 상인들은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 살펴볼 요량으로 아무런 회답도 보내지 않았다. 일부 영국 상인들은 임칙서 역시 광동의 관원과 마찬가지로 뇌물의 액수를 올리기 위해 이런 수작을 벌이는 것으로 간주했다. 영국이 흠차대신의 명을 어기고 기한 내에 아편 공출과 서약서 제출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어떤 조치도 가한다는 게 임칙서의 생각이었다. 그는 관례에 따라 곧 콩홍의 오소영에게 유첩을 내렸다.


"황포에 정박하고 있는 외국선에 봉창을 해 매매를 정지하고 화물의 양륙을 금한다. 각종 공구와 선박, 가옥 등을 오랑캐에게 임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위반자는 외국과 사통하는 자로 간주해 처벌한다."


임칙서는 자신의 명령이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곧 1000명의 병사를 풀어 13항가를 포위케 했다. 그는 호문의 광장에 튼튼한 목책을 설치한 뒤 100상자씩 쌓아 올리면 20평의 면적에 높이가 100미터에 이르는 막대한 양의 아편을 모두 호문에 모았다. 그리고 해변의 높은 곳에 인공 연못을 파게 했다. 아편은 소금과 석회에 약했다. 아편의 소각은 대량의 소금을 투입하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아편을 소금물에 반나절 담가두었다가 다음 날 소석회 덩어리를 대량 투입하자 화학반응을 일으켜 하얀 연기를 내며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이어 썰물 때에 맞춰 수문을 열고 바다로 흘려보냈다.


영국의 억지 주장과 아편전쟁

당시 영국은 이런 상황을 방치할 수 없었다. 막대한 무역 적자를 아편 밀매로 단숨에 호전시킨 마당에 이를 순순히 포기할 리 만무했다. 영국은 개전의 구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들은 청국에 무역의 자유 제한과 사적인 재산을 몰수했다고 비판하면서 아편은 술보다 해독이 심하지 않다는 황당한 이유를 들어 반드시 청국을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대 파견의 명문을 찾아내기 위한 억지 주장이었다.


결국 의회에서 표결이 이뤄진 지 한 달 뒤에 함대가 싱가포르에서 발진했다. 이들 함대는 광동의 방비가 임칙서에 의해 강화된 점을 감안키도 했으나 일거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생각으로 광동을 지나쳐 절강의 주산열도로 직항했다. 주산을 점령한 영국 함대 일부는 다시 북상을 시작해 백하(白河)의 하구의 천진 방면으로 향했다. 영국 함대가 천진 앞바다에 나타나자 청국 조정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를 기회로 목창아 등이 임칙서를 탄핵하고 나섰다. 임칙서의 과격한 대응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게 탄핵의 골자였다. 청조는 마침내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시키기 위해 영국이 가장 증오하고 있을 임칙서를 파면 조치했다.


양무운동의 효시가 되다

임칙서는 영국군이 빅토리아 여왕의 생일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공세를 가한 도광 21년(1841) 여름에 신강으로 유배를 떠났다. 신강은 건륭제 때 무력으로 정복한 이후 중죄인의 유형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당시 그는 투병 중이었다.


임칙서는 도광 25년(1845)에 유배가 풀려 상경하게 되었다. 2년 뒤인 도광 27년(1847)에 운귀(雲貴)총독을 역임하던 중 건강상의 이유로 고향인 복건성으로 돌아와 요양케 되었다. 도광 29년(1849) 말에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이듬해 초 흠차대신에 제수되었다. 그는 조정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노구를 이끌고 현지로 가던 중 이내 병사하고 말았다. 아편 추방의 선봉에 섰던 그는 결과적으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그러나 그가 남긴 영향은 지대했다. 그의 사후 증국번을 비롯한 수많은 한족 관원이 청조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부국강병을 꿈꾸던 그의 치열한 개혁 정신은 강유위 등 변법자강파로 이어졌다. 그는 훗날 침략에 대한 저항, 반제국주의의 선구자라는 이미지가 강조되면서 중국 근대사의 효시로 불리게 되었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와 그의 애국사상이 크게 부각되어 역사 교육의 표상이 되었다.



이홍장

태평천국의 난과 회군의 창건

이홍장은 도광 3년(1823)에 안휘성 합비현에서 향신(鄕神)인 이문안(李文安)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23세가 되는 도광 24년(1844) 향시에 합격한 뒤 부친의 명을 받고 북경으로 올라와 증국번의 문하생이 되었다. 상경 당시 그의 흉중은 장차 천하의 명사들과 사귀어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웅대한 포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상격 이듬해인 도광 27년(1847)에 곧바로 회시에 합격해 한림원 서길사가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리고 도광 30년(1850)에 치러진 산관(散官 : 관원 임용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최고의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는 한림원 편수에 제수되었다. 이후 무영전(武英殿) 국사관 협수(協修) 등을 역임했다. 그가 예비 대관(大官)의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이해 말에 문득 천하를 진동시킨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함풍 3년(1853) 초 월비(粤匪)로 통칭된 태평군의 세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그 또한 증국번과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단련(團練)을 조직해 태평군을 토벌하라는 조명(朝命을)을 받게 되었다. 그는 단련대신으로 임명된 공부시랑 여기현(呂基賢)을 좇아 귀향했으나 얼마 후 여기현이 전사하면서 안휘순무 복제(福濟)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홍장이 군사들을 지휘해 소현을 비롯한 2개 현을 탈환하자 그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한 장령들이 그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병법을 모르는 안휘순무 복제는 이들의 말만 듣고 이홍장을 멀리했다. 이 사이 태평군의 기세가 더욱 올라 안휘 일대가 커다란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이홍장이 지키던 영채도 함락되었다. 그 와중에 그는 부친과 처자식을 잃고 말았다.


고든과의 갈등과 상승군의 해산

원래 이홍장은 유가의 전통을 이은 까닭에 서양인을 매우 싫어했다. 그는 내심 태평군보다 선진 군사기술을 앞세운 서구 열강의 무력 침공을 더 우려했다. 그러나 조속히 태평군을 진압키 위해서는 부득불 영불 연합군인 상승군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서양인들을 충분히 이용하되 그들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기본 방침을 정했다. 이에 그는 영국 군대와 상승군지휘협약을 맺어 영불 군대와 공동작전을 승낙하면서 반드시 자신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삽입했다. 이에 상승군은 상해 공관에 고용되어 강소순무의 통제를 받는 용병부대가 되었다.


당시 태평군은 남경과 소주, 항주를 3대 본영으로 삼고 있었다. 이홍장은 등뼈에 해당하는 소주를 탈환키 위해 병력을 집중했으나 무리한 공격 끝에 모왕(慕王) 담소광(譚紹洸)의 반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이후 회군은 태평군의 강절지역에 대한 방어가 허술한 틈을 타 영불 간섭군 및 상승군과 연합해 가정을 함락하고 곤산과 태창 등을 위협했다. 소주와 항주에 남아 있던 태평군은 적극적인 방어책을 세워 공격 위주의 수비를 펼쳤다. 이홍장은 이들의 전략을 읽고 즉시 상승군과 회군의 병사를 규합해 이들의 공세를 물리쳤다.


이해 10월 회군과 상승군이 여세를 몰아 소주의 성문 밖에서 맹공을 펼쳤다. 당시 담소광을 제외한 납왕(納王) 고운관(郜雲官)과 비왕 오귀문, 강왕 왕안균, 영왕 주문가 등 소위 4왕4천장(四王四天將)으로 불린 8명의 장수들은 투항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야심한 밤에 소주성 동북의 양등호(陽澄湖)에 떠 있는 작은 배 위에서 정학계는 고든의 입회 하에 고운관과 왕안균을 만났다. 정학계는 이들에게 담소광을 죽이고 투항하면 2품 무관에 봉하겠다고 약속했다. 쌍방은 고든을 증인으로 삼고 화살을 꺾어 맹세했다.


며칠 후 고운관 등 8명의 장수가 담소광을 암살한 뒤 성문을 열어 정학계 부대를 영접했다. 그러나 고운관 등은 여전히 회군에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정학계가 보니 상황이 미묘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그날 밤 성을 나와 비밀리에 이홍장을 찾아가 상의했다. 8명의 장수는 믿을 수 없으니 마땅히 빠른 시일 내에 주살해야 한다고 말했다. 8명의 장수가 얼큰히 취했을 무렵 손에 관모와 관복을 든 무관 8명이 자리에 들어왔다. 이들이 무릎을 꿇으면서 옷과 모자를 갈아입을 것을 권하자 8명의 장수는 의기양양하게 일어나 자신의 손으로 머리의 노란 띠를 풀었다. 이 틈을 타 8명의 무관이 관복 밑에서 예리한 비수를 꺼내 이들의 목을 찔렀다. 이내 8개의 머리가 이들의 손 안에 떨어졌다. 정학계는 즉각 소주로 돌진해 성안의 쌍탑사 정원에서만 태평군 3만 명을 죽였다.


동치 3년(1864) 5월 회군과 상승군이 상주를 함락한 것을 계기로 이홍장은 상승군을 해산할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판단했다. 청조 역시 절호의 기회로 생각해 이홍장에게 형세가 유리할 때 속히 해산시키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때 그는 정예병을 제외한 상승군의 3분의 2를 해산하면서 12만여 위안을 해산비로 책정하는 외에 따로 6만 위안의 포상금을 나눠주었다. 이들이 지녔던 무기 등의 장비는 모두 거둬들였다. 8명의 항장을 죽이고 적시에 상승군을 해산시킨 것은 그의 비정함과 과단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후 그는 상승군을 자신과 회군의 일부로 삼아 2년여 동안 100여 차례에 이르는 전투를 수행해 50여 개의 성을 수복했다. 이해 6월 16일 마침내 남경이 함락되자 이홍장은 증국전과 함께 1등 백작에 봉해졌다. 이후 태평군의 잔당이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했으나 사실상 태평천국은 종언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본격적인 양무운동의 개시

동치 11년(1872) 정월 증국번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조정 내에서 양무운동에 의구심을 표하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에 이홍장이 곧바로 상소했다.


"외국과 평화를 유지하는 가운데 중국을 지키려면 그에 대한 방비가 있어야 합니다. 사대부는 장구지학(章句之學 : 고루한 유학을 상징)에 갇혀 있어 시세에 우매한 까닭에 창포윤선(槍怉輪船)과 근세의 입국지본(立國之本)을 모릅니다. 국가경비는 절약하는 것이 마땅하나 오직 양병과 방어시설, 창포윤선의 제조비용만은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 그는 양무운동을 군무(軍務)에서 상무(商務) 쪽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해 이를 관철시켰다. 그 구체적인 결과가 바로 이해 11월 상해에 설립된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이다. 윤선초상국은 양무기업(洋務企業)의 효시에 해당한다. 윤선에서 시작한 양무기업은 이후 방적과 방직, 광산, 항운, 철로, 기선, 전신, 전보 등 각 분야로 확대되었다. 당시 군사 부분은 완전 국영인 관판(官辦)으로 이뤄졌으나 양무기업은 민간이 자본을 투자해 경영을 전담하고 관은 감독만 하는 관독상판의 형식을 띤 까닭에 여러 면에서 현대 기업과 닮아 있었다. 이는 이홍장이 고금을 막론하고 국강(國强)은 반드시 국부(國富)를 이룬 뒤에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통찰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런 인식 하에 동치 9년(1870)부터 군수공업과 동시에 관독상판 형식의 양무기업을 집중 육성했다. 그러나 관독상판의 양무기업은 양무자강파 인사들이 적잖은 투자를 한 데다 관원들이 경영에 깊이 개입한 까닭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훗날 그가 부정축재의 장본인으로 몰린 이유다.


당시 청국은 해군 업무에 관한 통일된 지휘기관이 없었다. 구식 군대인 각 수사 역시 현지 독무가 관할한 까닭에 합동작전을 펼치기 어려웠다. 청조가 근대적인 해군을 창설할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서구 열강이 보유한 선견포리(船堅砲利 : 선박은 튼튼하고 포는 날카로움)에 대한 충격에서 비롯되었다. 광서 4년(1878) 이홍장은 영국으로부터 4척의 군함을 들여온 후 거래처를 독일로 옮겼다.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최신 전함을 확보코자 한 것이었으나 이이제이의 차원에서 두 나라를 상호 경쟁시키고자 하는 게 진정한 속셈이었다. 이듬해인 광서 5년(1879) 그는 이이제이 책략의 공을 인정받아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제수되었다.


광서 6년(1880) 이홍장의 건의로 천진에서 상해에 이르는 전신선이 설치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신선이 기왕의 육로전선과 연결되어 사상 처음으로 광동에서 발생한 모든 소식이 곧바로 북경에 전달되었다.


이홍장에 대한 재평가

동양의 비스마르크 이홍장은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달리 시종 굴욕적인 매국조약의 원흉으로 지목된 까닭에 이후 근 100여 년 동안 한간(漢奸)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나아가 그는 청검한 삶으로 일관한 스승 증국번과 달리 생전에 뇌물수수 및 부정축재 의혹으로 숱한 비난을 산 바 있다. 실제로 그는 죽는 순간까지 나라를 과분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나라는 이미 골수까지 병들어 있었던 까닭에 그의 이런 노력은 아무런 빛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한간이라는 불명예만 안겨주고 말았다.


사실 당시 서구 열강은 무차별적으로 중국을 침공하고 있었다. 한 나라가 일을 벌이면 여러 나라가 뒤따라 이를 선동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홍장은 대담하게도 청국이 비록 현재는 많은 손실이 뒤따를지라도 스스로 문호를 열고 세계와 교역하면 언젠가는 부강을 이뤄 천하를 호령할 날이 올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던 선각자를 당시 중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이홍장이 구사한 이이제이의 책략은 패망 위기에 처해 있던 다시 청국의 피폐한 상황에 비춰볼 때 나름 평가할 만하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이 21세기에 들어와 이홍장을 새삼 주목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원세개

명문가 원씨 집안의 서자로 태어나다

원세개는 함풍 9년(1859) 9월 16일 하남 항성현(項城縣)에서 선비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원세개의 아버지 원보중은 평생 향신으로 지냈으나 그의 동생 원보경은 과거에 급제해 도원(道員)의 벼슬까지 올랐다. 원보중은 본처가 아들 하나를 낳고 죽자 이내 첩으로 있던 유씨(劉氏)를 후실로 맞아들여 모두 5명의 아들을 낳았다. 원세개는 유씨 소생 5명의 아들 중 셋째였다.


영아 때부터 식욕이 왕성했던 원세개는 모친의 젖이 모자라 숙모 우씨(牛氏)의 젖을 먹고 자랐다. 아들을 두지 못한 원보경이 조카인 원세개를 친자식처럼 귀여워하자 원보중은 원세개를 동생에게 양자로 내주었다.


원보경이 동치 12년(1873) 7월 문득 콜레라로 급사하자 당숙인 원보항이 원세개를 북경으로 데려왔다. 이때 이부상서의 아들과 약혼했다가 약혼자의 병사로 위패(位牌)와 결혼한 뒤 시부모를 모시고 있던 그의 둘째 누이가 그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원세개가 배운 글을 외우지 못하면 밥도 굶기는 등 엄하게 단속했다. 원세개는 그녀를 크게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했다.


출세의 디딤돌이 된 조선의 임오군란

광서 7년(1881) 11월 문득 양부 원보경의 의형제인 오장경으로부터 속히 산동 등주(登州)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이홍장이 이끄는 회군의 통령(統領)으로 있던 오장경은 그를 공부시켜 의형의 우의에 보답할 생각으로 그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다. 그는 원세개가 오자 곧 문서작성을 맡기면서 장건과 주가록 등으로 하여금 문장을 고쳐주며 스승 역할을 하게 했다. 문장력 향상을 통해 과거 합격을 도모한 것이다. 그러나 무예에 관심이 많은 원세개는 오히려 사격을 연마하여 무재(武才)를 과시했다. 이를 눈여겨본 오장경이 곧 그를 영무처(營務處)로 보내 군무를 돕게 하자 그는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는 모습을 보였다.


광서 8년(1882) 6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발했다. 이때 천진에 와 있던 조선의 김윤식과 어윤중이 북양대신대리 장수성에게 구원을 청했다. 청국 조정은 장수성의 건의를 받아들여 곧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과 참모 마건충에게 명해 먼저 군함 3척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게 했다. 당시 오장경은 원세개에게 명해 영무처를 지휘해 군수품 공급을 책임지고 행군노선을 탐사케 했다. 군공을 세워 입신양명할 생각에 불타 있던 원세개는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임무를 수행해 오장경의 칭찬을 받았다. 그는 조선인의 재물을 약탈하고 여인을 겁탈하는 병사를 과감히 처단해 군기를 바로 세움으로써 조선 조정으로부터도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원세개는 군란 가담자 제거의 명이 떨어지자 곧 대원군의 맏아들로 병권을 쥐고 있던 훈련대장 이재면을 감금한 뒤 김윤식을 불러 군란 가담자 제거를 청하는 고종의 명을 받아오게 했다. 이는 청군 출병을 합리화하려는 조처였다. 그는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의 난군 토벌작전에서 170여 명을 체포한 뒤 이 중 10여 명을 동관묘 앞에서 참수했다. 오장경은 군란이 진압되자 곧 원세개의 무공을 기리는 상주문을 올렸다. 이에 원세개는 정5품인 동지(同知)에 제수되었다.


청조를 무너뜨리고 초대 총통이 되다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 재품의 장남 부의가 광서 34년(1908) 12월 2일에 즉위했다. 그가 청조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다. 그러나 선통제는 불과 3세의 영아에 불과했다. 생부인 순친왕이 감국(監國) 섭정왕이 되었다.


순천왕은 생활비 등을 대준 장익이 원세개에게 실각을 당한 적이 있어 그에게 사적인 원한을 갖고 있었다. 이제 섭정왕이 된 만큼 능히 구실을 대어 그를 숙청할 수 있었다. 순천왕은 선통 원년(1909) 1월 그에게 모든 직무에서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회적 처분을 내렸다. 칙명을 받은 이상 북경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1월 6일에 그는 기차를 타고 북경을 떠났다. 이미 은거를 각오하고 있던 원세개는 자신의 많은 부하들이 요직에 있으면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에 큰 기대를 걸었다.


원세개는 이런 모습으로 2년을 보냈다. 그 사이 장강 납북의 각 성에서는 농민들이 곡물세 거부와 미곡 쟁취 투쟁을 일으켰고, 손문이 이끄는 혁명당은 광주에서 두 차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입헌파 인사들은 네 차례나 전국적인 국회청원운동을 이끌었다. 호북과 광동, 사천 등지에서도 철도를 지키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런 혼란은 원세개의 재등장에 결정적인 빌미로 작용했다.


일본의 만주 침탈이 노골화하자 선통 3년(1911) 4월에 이르러 혁광을 위시한 관원 10여 명이 원세개를 동북 3성의 총독으로 임명할 것을 주장했다. 순친왕의 동생인 해군 대신 재순도 그의 등용 필요성을 인정했다. 열강들도 그의 등용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차분히 후일을 준비했다. 그는 대세가 어느 정도 기울어져야 자신이 등용될 수 있지만 너무 기울어지면 그 또한 수습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원세개의 재등장을 부른 신해혁명

선통 3년(1911) 10월 10일 무창에서 신해혁명을 알리는 총성이 터져 나왔다. 섭정왕 순친왕은 젊어서 경험이 없었고, 총리대신 혁광은 어리석고 탐욕스러워 봉기를 진압키 어려웠다. 순친왕은 총리대신 혁광과 협리대신 나동, 군기대신 서세창 등과 대책을 논의했다. 3인 모두 원세개 사람이었다. 나동과 서세창은 원세개를 다시 등용할 것을 강력 주장했다. 혁광은 세인들의 지적을 피하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순친왕은 혁광에게 원세개로부터 황권을 보장한다는 서약을 받도록 명했다. 이해 10월 14일 원세개가 호광총독에 임명되었다.


상황이 태평천국 당시보다 훨씬 심각했다. 당시 민심은 청조의 패망을 예상하고 있었다. 관군과 혁명군의 대치가 지속되는 와중에 1912년 1월 1일 손문이 남경에서 임시총통에 취임해 중화민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그는 청조 타도를 전제조건으로 원세개를 초대 총통에 추대할 뜻을 내비쳤다. 이에 고무된 원세개는 곧 국무대신들과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려 선통제의 퇴위를 압박하고 나섰다. 결국 융유태후가 이해 2월 11일 선통제 퇴위조서를 선포함으로써 260년간 중국을 통치한 청조는 마침내 막을 내렸다.


이해 3월 원세개는 중화민국의 임시총통에 취임한 뒤 수도를 다시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반년 뒤인 이해 10월 그는 정식으로 초대 총통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꿈은 황제 등극이었다.


원세개에 대한 재평가

당시 원세개가 황제의 꿈을 버리고 총통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다면 역사의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의 삶은 난세 속에서 일개 무부(武夫)가 몸을 일으켜 지존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세인들의 지탄 속에 죽음을 맞이한 비극에 해당한다. 그러나 최근 이런 판에 박은 평가에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태평천국이 결코 민중을 위한 정권도 아니었고, 원세개의 무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조기에 열강에 의해 과분되었을 공산이 컸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비록 세인들의 비난과 조롱 속에 삶을 마치기는 했어도 예리한 상황 판단과 능수능란한 처세술로 난세의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 밑에서부터 시작해 지존의 자리에 오른 그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다. 21세기 동북아시아 시대를 맞아 그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것은 그의 행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새로운 동북아질서의 기본 틀을 찾고자 하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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