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유전자

   
에릭 두르슈미트(역자: 이상근)
ǻ
세종서적
   
25000
2010�� 09��



 책 소개
불과 수십 년 전 공산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만해도 서양 세계는 중국을 스스로 빗장을 잠근 나라쯤으로 생각했다. 뛰어난 기술로 생산된 비단과 도자기에 매료된 유럽인들이 수세기 동안 중국과교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자는 용"이라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 그러나 사실 그 모습에는 평화로운 꿈보다는 악몽으로점철된 고통스러운 역사가 감추어져 있었다. 

종군기자출신의 저자가 베이징과 워싱턴, 서울과 평양, 도쿄, 바그다드 등 중국이 다른 나라와 충돌한 현장을 찾아다니며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칭기즈칸의 유라시아 정복 전쟁에서부터 21세기 중화인민공화국의 우주 공정까지를 섬세한 필치로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중국의 전쟁사와 식민모험주의 및피비린내 나는 정치의 발자취를 더듬어본다.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이 거대한 나라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살펴보고, 경제 및 군사강대국으로 등장한 중국을 통해 세계의 불안한 앞날을 예측한다.

■size=2 &> 저자 에릭 두르슈미트(ErikDurschmied)

1930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사춘기 때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에 대한 깊은의문을 가진 그는, 1958년 쿠바의 산속에서 은신하던 "미지의 반란군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그에 관한 최초의 기사를 씀으로서종군기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1960~1972년에 BBC에서, 그 뒤 CBS에서 종군기자로 일했다. 베트남에서 10년간 활동했고,테헤란에서는 "인질 위기"를 취재했으며, 바그다드에서는 이라크와 이란 사이의 소모적인 살육전을 보도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의혼란상을 보도했으며, 캐나다 텔레비전 팀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마오쩌둥이 지배하는 중국의 현실을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적나라하게 서방에전달했다.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 『날씨가 바꾼 전쟁의 역사』를 비롯해 15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들은 18개 언어로 번역되어 28개국에서출간되었다. 

■역자 이상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부자』『수학자, 증권시장에 가다』『마오』(공역),『대륙의 딸』(공역),『점성술로 되짚어보는세계사』『할리우드 영화사』『머니 앤드 브레인』(공역),『인도로 간 붓다』를 비롯하여 다수가 있다. 
 


■차례
독자들에게
연대표
머리말

제1부 동방으로부터의 우렛소리 1218~1348년
1 늑대의 분노 | 2 기독교도들에게내려진 징벌 | 3 레그니차 대전투 | 4 지옥으로 안내해준 무명의 기사 | 5 프레스부르크의 기적 | 6 독수리들의 요새 | 7『아라비안나이트』의 불타는 종말 | 8 나사렛의 승리 | 1348년 연대기 : 황색 재앙 

제2부 포함 외교1405~1911년
1 거대한 용의 함대 | 2 문을 두드리는 악마들 | 3 린쩌쉬의 비망록 | 4 주장 강의 뇌조 사냥| 5 인일 인시 | 6 값비싼 대가 | 7 태평천국의 광기 | 8 차이니스 고든 | 9 외인부대의 항전 | 10 불평등한 해전 | 11태워라! 태워라! 태워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 1911년 연대기 : 태후마마가 승하했다! 

제3부 용의 수난 1911~1949년
1 새로운중국의 태동 | 2 피의 토요일 | 3 난징 대학살 | 4 "식초 조"와 "땅콩" | 1949년 연대기 : 서양이 중국을 잃던 날

제4부 동방은 붉다1949~1997년

1 진먼 섬의 곰들 | 2 더 큰 쇼를 위한 예행연습 | 3 냉담한 거부 | 4 동풍이 서풍을 압도하다| 5 계속 죽여라! | 6 핵 옵션 | 7 피가 흐르는 우수리 강 | 8 미·소·중의 삼각관계 | 9 교착 상태 타개 | 1997년 연대기: 홍콩을 돌려받던 날 

제5부 떨쳐일어나는 용 현재와 미래
1 자유의 외침을 분쇄하다 | 2 난폭하고 건방진 비행기 | 2008년 연대기 : 금메달감인올림픽 준비 

끝맺는 말

감사의말
참고 문헌
옮긴이의 말
색인
 

 





용의 유전자

제1부 동방으로부터의 우렛소리 1218~1348년
늑대의 분노

역사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길 운명을 안고 태어난 사람들이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어린 테무친도 예외가 아니었다. 몽골과 러시아 사이의 국경선을 형성하는 오논 강 부근의 돌룸볼다그에서 1162년 또는 1167년에 태어난 테무친이 아홉 살이었을 때, 유목 생활을 하는 보르지진 족의 일파인 키야트 부족의 족장이었던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같은 타타르 부족원에 의해 독약이 섞인 음식을 먹은 뒤 사망했다.


독살당한 아버지가 사망하기 직전에 몸을 활처럼 구부리고 입으로는 거품을 내뿜으면서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숨을 거두는 모습을 목격한 테무친은 그런 충격적인 광경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테무친의 어머니 호엘룬은 부족으로부터 쫓겨나 추방자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녀와 10대의 아들들은 수년간 대초원 지대를 떠돌아다녔다. 큰아들이었던 테무친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온 가족이 들쥐, 풀뿌리, 딸기, 마유(馬乳)로 허기를 채웠고, 때로는 테무친이 사냥한 새를 먹기도 했다. 테무친이 불같은 성격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그는 열두 살 때 뇌조(雷鳥)를 놓고 이복형제와 싸웠는데, 그 싸움은 자신이 활을 쏘아 잡은 뇌조를 이복형인 벡터가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테무친은 그를 활로 쏘아 살해한 뒤 태연하게 그 자리를 떴다. 열다섯 살이 된 테무친은 해가 높이 떠오르자 아버지의 부족민들이 모여 살던 부락을 향해 급히 말을 몰았다. 그가 달리는 말의 옆구리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쏜 화살은 아버지를 독살시켰던 암살자의 목을 관통했다. 다른 사람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그는 급히 말을 되돌려서는 다시 부락 안으로 달려들어 암살에 참여했던 두 공범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쓰러뜨렸다. 테무친의 복수극은 순식간에 끝났다.


테무친의 용맹스런 복수극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부락의 원로들은 투표를 통해 그를 부락의 새 우두머리로 추대했다. 그는 이웃 부족의 보르테라는 소녀와 결혼함으로써 두 부족을 통합할 수 있었다. 그는 우선 로마 제국 시대 이후 가장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전투 조직을 갖추기 시작했다. 칭기즈 칸이 자신의 기마 군단에 합류하도록 선발한 사람들은 강인하고 잔인했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적들보다 한 발 앞서 행동했다. 그들의 정찰 활동은 최고로 우수했다. 몽골인들의 작은 말은 하루에 20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었다. 칭기즈 칸은 전통적인 ‘대열을 갖춘’ 공격 방식을 버리고, 작전 행동과 기만술 및 속도전을 적절히 결합시킴으로써 몽골 군에 비해 더 무겁게 무장한 적군을 갈팡질팡하게 만들 수 있었다. 병사들이 지켜야 할 복무 규정에 따르면 영웅심을 발휘하여 단독으로 각개전투를 벌이는 것은 절대금물이었다. 그 대신 그들은 초원 지대의 늑대들처럼 무리를 지어 공격했다. 칭기즈 칸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며 누구나 그를 두려워했다. 곧 그는 몽골 밖에서도 공포의 화신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칭기즈 칸은 1214년 겨울에 7만 5천명에 달하는 몽골 기병들을 이끌고 지난 15세기 동안 어느 군대도 돌파해본 적이 없었던 장벽인 만리장성을 넘어 남쪽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금나라와 서하, 그리고 송나라를 멸하고 폐허 위에 원나라를 세웠다. 1218년이 되는 해의 10월 14일, 투르크멘의 병사들은 사마르칸트 부근의 실크로드 위에서 매복한 채 450명의 몽골과 타타르 상인들로 구성된 대상(隊商)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병사들은 호라즘, 코레즘, 트란스옥사니아 및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제국의 셀주크 투르크족 술탄이면서 잔인하고 탐욕스런 독재자로 소문난 샤 알라우드-딘 무함마드 2세 앞으로 이 불운한 상인들을 끌고 갔다.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자가 없다고 믿었던 샤는 상인들을 참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타타르 상인만은 본국으로 돌아가 칭기즈 칸에게 모욕적인 메시지를 전하도록 살려주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몽골의 칸은 “복수하자!”라고 외쳤다.


그는 몽골의 성산(聖山)인 부르한 찰둔에 올라 기도를 드린 다음 서하 왕국을 정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채 기마 군단의 맨 앞에서 말을 몰아 서쪽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1219년 봄, 칭기즈 칸의 휘하에 있던 제베와 수부타이는 3만 명의 기병들로 구성된 3개 투먼을 이끌고 훼르가나 계곡으로 이어지는 옛 대상들의 통로를 따라 진군했다. 그들은 쿠드준드 고개 부근에서 페르시아인과 투르크인들로 구성된 20만 명의 연합군과 대적했다. 협곡 속의 고개가 너무나 비좁아 자신의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발휘할 수 없는데도 무함마드 2세는 병사들을 깔때기 모양의 협곡 안으로 몰아넣었다. 어찌나 빽빽하게 몰아넣었던지 그이 병사들은 시루 속 콩나물처럼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협곡 위에 매복해 있던 몽골 군은 적들의 머리 위로 철제 살촉이 붙은 팔처럼 긴 화살을 쏟아 부었다. 제베의 궁수들은 화살대 끝에 깃털이 꽂힌 장거리용 화살을 우박처럼 쏟아 부어 적들을 몰살시켰다. 사기가 꺾인 술탄은 수많은 병사들의 주검을 뒤로한 채 전장을 벗어나 목숨만을 부지한 채 도주했다.


도망친 술탄을 잡기 위해 몽골 군 두 개 투먼이 서쪽으로 진격을 계속하자 헤타르, 니샤푸르, 하다만이 초토화되었다. 2만 명의 몽골 군이 드넓은 카스피 해에 도달했을 때 제베는 술탄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추격전을 계속하던 제베의 군사들은 그루지야에 있던 러시아 귀족 폴로비치아 대공의 영토를 침범했다. 1222년, 볼가 강의 제방 옆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몽골 기병들은 그루지아 군을 밀어붙이고 약탈을 자행한 후 수도 아스트라한을 불태웠다. 그 후 폭설이 내려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가는 통로가 막혔기 때문에 제베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더욱 서쪽으로 더욱 진격하는 것이었다. 제베는 키예프로 열 명의 평화사절을 파견했다. 하지만 므스티슬라프 대공은 그들을 죽여 그 시체를 그들이 타고 왔던 말 뒤편에 묶은 다음 그들의 진영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에 수부타이는 고도로 훈련된 1만 6천 명의 엘리트 몽골 기병대와 함께 키예프 공국의 영토로 진군했다. 차가운 분노로 가득 찬 그가 러시아 군에게 가차 없는 공세를 퍼붓자 그들은 상대가 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5월 31일, 양측은 아조프 해 부근의 칼카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몽골 군으로부터 비 오듯이 날아오는 살인적인 화살 앞에서 러시아 군은 도륙을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므스티슬라프 대공은 살아남은 기사들의 선두에 서서 몽골 기병들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을 시도했다. 칼카 강의 전투는 몽골 군의 1차 유럽 침공을 종결시켰다. 몽골 사절단 열 명을 참수시킨 사건으로 말미암아 동서양 문명의 충돌은 현실이 되었다.


제2부 포함 외교 1405~1911년
린쩌쉬의 비망록

1637년 봄,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 웨델 선장이 지휘하는 선박 메이클즈필드호가 광저우에 닻을 내렸다. 그의 목적은 유럽 시장에서 새롭게 인기를 끌던 상품을 구입하기 위한 교역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 상품은 중국 산간 지방에서 흔히 자라는 녹색 잎으로, 끓여서 엽차로 만들면 향과 맛이 일품이었다. 차에 대한 유럽인들의 수요는 하루아침에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중국에서 선적되는 차의 양은 매년 두 배씩 증가했다. 동인도 회사가 취급한 상품은 차뿐만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품목은 아편이었다. 영국이 중국으로 밀수해 들여오던 아편의 양은 엄청났으며, 점점 더 증가했다. 중국의 아편 수입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옹정제는 1729년에 어떤 용도로도 마약을 사용할 수 없도록 금지령을 내렸다),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재배한 양귀비를 그곳의 공장에서 가공하여 만든 엄청난 양의 아편을 자신들의 선박을 이용하여 중국 시장으로 몰래 들여왔다. 황제는 백성들이 머리를 혼미하게 만드는 몹쓸 아편 반죽에 더욱 더 의존하게 되는 것이 걱정스러운 나머지 1796년에 칙령을 공포하여 아편 수입을 전면 금지하면서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물론 황제의 칙령만으로는 아편이 청나라의 아편 중독자들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막대한 이익이 보장되는 장사를 막아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현금 뭉치를 뇌물로 받은 광저우의 관리들이 눈을 감았기 때문에 아편 수입은 ‘해볼 만한 밀수업’이 되었다. 매년 더 많은 아편이 주요 강들을 따라 올라올수록 그들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모든 대도시에는 기본적인 위생 시설도 갖추지 않은 범죄 소굴이라 할 수 있는 아편 흡연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관리, 상인, 선원 등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아편을 피우기 위해 나란히 나무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 모습이 마치 그들이 자기 파멸의 길을 가기 위해 대로변 집결지에 모인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다음에 빨아댈 담뱃대에만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있어야 했다. 아편은 전적으로 남성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여성들 역시 환각을 일으키는 마약에 중독되었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어린 나이에 그렇게 되었다. 만사를 잊어버릴 수 있는 아편을 더 구입하기 위해 소녀들은 매춘도 서슴지 않았다. 중독자들은 더 많은 아편을 갈망했으나 공급이 미처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중독의 대가는 비싸졌다. 아편 가격이 최고에 달하자 은의 가격도 덩달아 올랐으나, 정부가 발행한 지폐의 가치는 하락했다.


런던에서는 양심 있는 국회의원들이라도 나서서 아편의 해악과 관련한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인도 회사가 불법 무역에서 거둬들이는 이익에만 귀를 기울일 뿐 20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이미 아편에 중독되었다는 뉴스에는 귀를 막았다. 1836년 영국 정부는 자국 제품의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네이피어 경을 단장으로 하는 상인과 외교관으로 구성된 공식 무역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했다. 중국의 지방 관리들이 강 상류까지 항해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는 사절단의 요청을 거절하자, 어리석은 네이피어 경은 주장 강 어귀에 있는 후먼 요새를 포격하기 위해 영국 해군 프리깃함 두 척의 출동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두 척의 군함은 중국 정크 함선들이 설치한 쇠사슬에 걸리는 바람에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네이피어 경은 치욕적인 퇴각을 해야만 했다. ‘네이피어의 패배’는 중국인들에게 자신들의 정크 함선이 유럽 전함에 맞설 수 있으며, 향후 어떤 해상 도발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었다.


성공을 거둔 네이피어 사건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도광제는 중국에서 아편 사용을 끝장내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강직하고 부패에 물들지 않은 관리인 흠차대신(欽差大臣) 린쩌쉬가 현장에 나타났다. 그는 처음부터 어느 중국인이건 아편을 거래하다 붙잡히면 재판 없이 즉결 처형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국제 외교무대에서 주목할 만한 문서인 『린쩌쉬 비망록』을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마약 밀수 박멸 작전에 착수했다. 이 문서는 주권 국가의 법을 설명하고, 아울러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이 문서가 영국의 무역 이익에 반하는 보복으로 위협했기 때문에 충격에 빠진 영국 외무부는 즉각 행동에 들어갔다. 결국 이 문서는 빅토리아 여왕에게는 전달되지도 못하고 도중에서 차단되었다. 영국으로부터 회신을 받아보지 못한 린쩌쉬가 다음 조치를 취할 것임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1839년 3월 10일, 그는 포고문을 발표한 뒤 광저우에 있던 영국 조차지 대표에게 사본을 보냈다. 그 내용은 아편 수입이나 매매를 엄금하며, 위반자에게는 무거운 벌금을 부과할 것이고, 재범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외국 상인들이 마약 추방 포고문에 변변히 대응하지 못하던 사이에 양측 간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포고문 선포 일주일 후 린쩌쉬는 자신이 포고문에서 밝혔던 금지 사항 위반자를 처벌하기 위해 어려 명의 ‘건드리기 어려운’ 부유한 중국인들을 체포하여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했다. 1839년 3월 27일, 린쩌쉬는 병사들에게 외국인 공장 단지를 습격하도록 명령하는 돌이킬 수 없는 조치를 단행했다. 병사들은 문을 때려 부수고 창고에 뛰어들어 상인들 몇 명을 체포했다. 그는 영국 상인들에게 창고에 있던 2만 1천 상자에 달하는 아편을 중국 측에 넘기라고 했다. 린쩌쉬는 커다란 연못을 판 다음 바닷물을 채우고 외국 상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편을 거기에 쏟아부었다. 그런 다음 유럽인들을 자신의 공관으로 데리고 가서 다시는 아편 거래를 하지 않겠으며, 위반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조건이 포함된 각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풀이 꺾인 외국 상인들은 짐을 싸서 가까운 마카오에 있는 포르투칼 조차지로 피신하듯 떠나갔다.


광저우를 떠나 런던으로 항해하던 찰스 엘리엇은 외무장관 파머스턴 경에게 편지를 띄워 중국에서 영국의 국익을 보호하기 위해 신속히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영국 언론이 중국을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비난하고 나서자 전쟁의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쟁을 하기로 결정한 영국의 조치는 앞으로 반세기에 걸쳐 무력으로 중국을 착취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아편 전쟁은 서양과의 무역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분쟁과 같은 두 나라 문화의 충돌은 결코 아니었다. 아편은 수면 아래에 숨은 원인이었고, 직접적인 원인은 놓칠 수 없는 이익이었다.


제3부 용의 수난 1911~1949년
새로운 중국의 태동

1911년 19월 9일, 열두 명의 군인들과 학생 지도자들이 완전히 썩어빠진 시장을 내쫓을 목적으로 폭동을 준비하기 위해 회합을 가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몇 달에 걸쳐 현지의 무기고에서 수류탄을 비롯한 그 밖의 폭발물을 조금씩 도둑질하여 모았다. 우한 항구의 한 허름한 창고에 폭발물을 쌓아두던 중 수류탄 한 개가 선반에서 떨어지면서 폭발했다. 폭음을 들은 경찰관들이 달려왔다. 현장에서 체포된 한 군인은 고문을 당한 끝에 그다음 주로 예정되었던 폭동 계획을 자백하여 지하 조직의 시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1911년 10월 10일 저녁, 폭동 계획에 연루된 열두 명의 일반 장교들은 자신들의 무기고가 이미 발각되어 곧 체포당할 것이 두려웠던 나머지 우한의 무기고를 점령한 후 총격전을 벌였다. 그들은 리위안홍 시장의 관저로 달려가 정문을 부순 후 그의 경호원 한 명을 살해했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바닥에 떨어졌던 수류탄 하나의 폭음은 하늘의 명령에 따라 4천 년간 지속되었던 중국 황실의 몰락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다.


이날 시작된 쌍십 혁명(雙十革命)으로 인해 중국의 식민지 세력의 지배력뿐만 아니라 황실의 통치력도 와해되었다. 텐버에 있는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던 한 젊은 중국인은 미국 콜로라도에서 발행되는 「뉴욕헤럴드」지에서 중국에 쌍십 혁명이 터졌다는 기사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쑨원은 하와이에서 교육받았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바뀌는 시기에 조국으로 돌아와 군주제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혁명회(革命會)를 결성하고, “중국인들이 수립한 중국이 진정한 중국이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쌍십 혁명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신세대 인사들이 곧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창사에서는 한 17세 학생이 지방 신문에 실린 대중 운동이 탄생을 알리는 기사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 학생의 이름은 마오쩌둥이었다.


비록 자신들의 별난 운명을 믿는 몇몇 군인들이 혁명의 선봉에 나서기는 했지만, 영리한 쑨원은 중화민국의 수립을 선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선언문을 준비했다. 1911년 12월에 그는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난징에 입성했고, 1912년 1월 1일에는 중화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해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어린 황제인 선통제, 즉 푸이의 퇴위식이 열렸다. 그 퇴위식과 함께 4천 년 동안 지속되었던 중국 제국의 막이 내렸다.


그러나 중국은 독군(督軍)이라고 불리는 잔인하고 부패한 독재자들이 지역을 분할하여 지배하는 ‘군벌(軍閥)들의 천국’이 되면서 분열되었다. 쑨원이 1925년에 사망하자 통일된 민주주의 국가 중국을 건설하려던 그의 꿈은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통일된 중국이라는 쑨원의 비전을 광적으로 지지했던 유능한 청년 장군 장제스가 구원자로 나섰다. 1925년 3월 12일, 쑨원이 사망하자 장제스는 그의 사망 소식을 제일 먼저 듣고는 지체 없이 궁정 쿠테타를 일으켜 국민당의 지도자 자리를 차지했다. 장제스 총통은 치열한 전투를 통해 난징을 수도로 정하고 민족 통일 전선을 확립했다. 이제 중국은 최초로 진정한 공화국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는 두 명의 지도자가 있었다. 민족주의자 장제스와 공산주의자 마오쩌둥 모두 영민하고 똑같이 무자비했다. 마오쩌둥은 1893년 12월 26일 중국 남부 후난 성의 사오산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오쩌둥의 청년기에 대한 설명은 수많은 거짓말로 각색되어 있다. 확실한 것은 단 하나, 그가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일어나던 시기에 태어났다는 점이다. 그는 학교교육을 통해 중국의 오래되고 폐쇄적인 계급 사회 제도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법은 코미디였다. 유전무죄이고, 무전유죄였다. 마오쩌둥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신청년 연구회’라는 학생 민병대를 설립했으며, 1921년 관광객으로 가장하여 호수의 유람선을 빌려 타고는 선상에서 중국 공산당을 창당했다.


1927년 4월 12일 이른 새벽, 장제스는 내무 음모를 분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중국 공산당을 숙청하기 위한 ‘상하이 학살’을 명령했다. 수만 명에 달하는 공산당원들이 체포되어 트럭에 실려 간 뒤 공개된 장소에서 총살당했다. 일부 당원들은 강물에 던져져 익사하거나 증기기관차의 아궁이 속으로 던져졌다. 마오쩌둥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용케 도주할 수 있었다. 1931년 11월, 스탈린이 파견한 코민테른의 대사가 중국 홍군(紅軍)을 소련의 세력권 안에 묶어두고 모스크바의 감독을 받게 하려고 했다. 그러자 마오쩌뚱은 그와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고, 자신이 초대 정치 위원이 되면서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장시 성과 쓰촨 성에서는 이제 2천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공산당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몇 차례의 좌절을 겪었고, 극복이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시련까지 겪으면서도 마오쩌둥은 자신의 게릴라 전술이 궁극적으로는 인민들의 봉기를 유도하여 승리를 안겨줄 것으로 확신했다.


전선에서 전진하는 장제스의 부대는 바로 뒤로는 그의 정치 위원들이 뒤를 따르면서 그가 지시한대로 농민들을 몰인정하게 괴롭히고 억압하는 조치를 취했다. 1933년까지 ‘중국의 공산화 위협’이 증가하고, 유럽과 아시아를 볼셰비키 세력이 장악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확산되자 서양 열강들이 대응하고 나섰다. 그들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고 봉쇄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영국과 미국은 장제스 정부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고, 나치 독일도 군사 고문단을 파견했다. 장제스가 공세를 취하고 나섰다. 장제스는 100만 명의 병사와 150대의 비행기 및 다수의 대포를 동원하여 장시 성 산악 지역에 있던 홍군의 주요 기지를 벙커와 철조망으로 치밀하게 포위했다. 그러나 서양 열강의 원조를 받는 장제스는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증오하는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과 손을 잡았다는 오점을 스스로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은 두고두고 그를 짓누르는 멍에가 되었다.


제4부 동방은 붉다 1949~1997년
냉담한 거부

스탈린은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자 미국이 재빨리 그리고 단호하게 대응한 것에 충격을 받았으며, 모스크바가 대담한 조치를 취하면 미국과 소련 사이의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질 수 있음을 걱정했다. 소련은 미국이 한반도의 맹주가 되도록 허용할 수 없는 노릇이므로, 이런 상황은 두 초강대국 사이의 직접적인 대결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이 기발하게 고안한 해결책이 중국군을 지상전에 개입시키는 것이었다.


중국으로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아직도 중국 전역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상황을 개선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중국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면서 해외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라도 어떤 대담한 행동이 요구되었다. 영광스런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중국의 대외적인 목표였다면, 반대파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마오쩌둥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것은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3개월에 걸친 힘든 협상 끝에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상호 방위 조약을 포함하는 동맹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에는 러시아가 중국에게 공중 엄호를 제공한다는 조항이 특별히 삽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중국 병사들이 모든 전투를 수행하면서 미 공군의 네이팜탄과 폭탄 세례를 받아 죽어가고 있었을 때에도 소련은 뒤편에서 방관만 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소련의 이런 배신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핵 옵션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 미 합동 참모 분부는 중화민국(타이완)과 중국 본토 사이의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섬들을 중국이 다시 공격해온다면 중국 본토에 핵무기를 사용할 것을 건의했다. 소련 정보망은 용케도 이 비밀문서를 ‘입수했다.’ 이 문서를 본 소련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러나 베이징은 미국의 위협을 귀담아듣지 않으려 했다. 1958년 8월 23일 오전 5시 30분, 중국 본토의 샤먼 부근에 있는 수백 문의 대포가 포문을 열었다. 수천 발의 포탄이 폭 10킬로미터의 해협을 날아 작은 진먼 섬에 있던 중화민국 수비대를 때렸다.


베이징의 공격이 중국의 적들을 놀래켰지만, 소련은 중국의 공격으로 더욱 크게 놀랐다. ‘진먼 섬 포격’은 중국과 소련이 최종적으로 분열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이 핵이라는 몽둥이를 흔드는 가운데 중국이 다음으로 들고 나올 조치에 대해 극도로 불안을 느낀 호루쇼프는, 외무 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베이징으로 보내어 그의 상대방인 저우언라이를 만나 진먼 섬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시했다. 저우언라이는 “우리는 저들을 절망적인 상태로 몰아붙이고 싶을 따름입니다. 우리의 공격이 길어질수록 미국의 어려움은 커질 겁니다.”라고 말했으나, 그로미코는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의 의도에 대한 불신은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냉각시켰다.


피가 흐르는 우수리 강
모스크바 시민들이 평화롭게 잠들어 있던 동안에도 크렘린의 전등은 켜져 있었다. 아무리 줄잡아 말한다 해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던 3월의 어느 날, 논 덮인 세상에 백색 위장복을 입은 병사들이 나타났다. 다만스키 섬(중국 이름은 전바오 섬)에 있던 전방 감시 초소의 소련 육군 소대장 스트렐니코프 중위는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난 이 병사들을 목격한 순간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중국군이다!” 소련군이 가장 두려워했던 상황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슬로건을 외치는 한 무리의 중국군이 얼어붙은 우수리 강[중국 이름은 우쑤리(烏蘇里)강으로 아무르 강의 지류] 중앙에 있는 소련 영토인 섬을 향해 다가왔다. 중국군 2개 중대 병력을 소련군 병사 40명이 가로막았다. 300명에 달하는 중국군이었다. 중국군 한 명이 고함을 지르자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시작되자마자 이내 중지되었고, 다시금 혹한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화약 냄새가 나는 눈 위에 쓰러진 소련군 병사 열아홉의 시체들이 혹한 속에서 얼면서 일그러졌다.


중국군 소부대 몇 개가 경비가 허술한 우수리 강 지역의 소련 국경을 침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상황은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1969년 3월 15일, 소련군은 중국군을 공격하기 위해 다수의 대포와 무장 헬리콥터를 준비한 다음 그 지역에서 위장된 철수를 단행했다. 어둠 속에서 자이퉁 중교(中校, 중령)가 지휘하는 인민해방군 소총 대대의 병사 800명이 공격 준비를 갖췄다. 자이퉁 중교는 자신의 상관인 정치 위원에게서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 밀집 대형을 유지한 채 숲속에서 나온 중국군 병사들이 강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목격한 소련군 경비병이 즉각 신호탄을 발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러시아 군의 130밀리미터 구경의 대포가 날카로운 굉음을 냈다. 우수리 강 맞은편 강안은 백황색 섬광이 일면서 혼란에 빠졌다. 일제히 발사된 132밀리미터 굵기의 카츄샤 로켓이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 밀집해 있던 중국군을 갈가리 찢었다. 포탄과 총탄들이 단단하게 얼어붙은 바닥에 부딪쳤다가 튀며 날아가다 중국군 병사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한 똑똑치 못한 정치 위원의 명령에 따라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인민해방군 1개 대대가 완전히 궤멸당했다. 그다음 날에는 대지와 얼어붙은 강 위로 눈보라가 몰아쳐 바람에 날린 눈이 나무 높이만큼이나 쌓였다. 전날 전사한 중국군의 시체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대학살 현장을 하얀 수의로 덮어놓은 듯했다.


제5부 떨쳐 일어나는 용 현재와 미래
자유의 외침을 분쇄하다

중국 공산당에서 만연하는 족벌주의와 부패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항의 소리에 답하는 메아리가 들려 왔다. 6월 3일 한낮이 되자 텐안먼 광장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학생 시위대에 일반 통행인들 수만 명이 가담하면서 군중은 몇 시간 동안 착실하게 불어났다. 인상적인 광경은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열띤 토론이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을 여러 해 동안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사람들로부터 분출되는 대화의 폭발이었다. 언론의 자유가 유보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이런 광경은 참으로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모두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고위 당 간부들 중 강경론자들은 덩샤오핑이 “너무나 물렁물렁하게” 행동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몰아낼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가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인민이 권력을 탈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경론자들은 덩샤오핑에게 행동을 취하도록 강요했다. 1989년 6월 3일, 그가 취한 행동은 전차를 동원한 진압이었다. 정확한 사망자의 수는 결코 밝혀지지 않겠지만, 전차의 캐터필러가 시위자들의 살과 접촉한 순간 희생자는 많을 수밖에 없었다. 성난 군중이 운전병과 병사들을 끌어내려 짓밟아 죽이자 사건은 곧 총격을 불러왔다. 무장한 병사들이 곤봉 대신 소총 개머리판으로 닥치는 대로 가격하면서 흥분하고 비명을 지르는 군중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병사들은 자동소총과 트럭 위에 장착된 기관총으로 군중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사람들이 고통과 분노와 공포 속에서 비명을 지르자 도로는 삽시간에 피바다가 되었다. 인민해방군 병사들은 부상당한 수많은 시위자들을 임시 구호소에서 연행해갔다.


이 사태는 1948~9년에 있었던 내전 이래 베이징에서 발생한 최악의 폭동이었다. 인민해방군은 그들이 말하는 ‘해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으며, 그들이 정치적 결정에 얼마든지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군대의 야만적인 공격은 학생 운동을 마비시켰고, 대중에게는 정신적인 충격과 혼란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텐안먼 광장 학살 사건을 심리하는 자리에서 “국가의 적들”을 살해한 병사들이 임무를 완수한 용감한 병사들로 간주되었다. 단 한 명의 병사도 젊은 남녀 동포들을 총으로 살해한 데 대해 재판을 받지 않았다. 중국 언론은 자의적인 체포와 강요된 자백 및 때로는 처형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켜 진실을 매장하거나 왜곡시켜 설명했다. 학생들은 자본주의의 꼭두각시들, 다루기 힘든 무뢰배들, 사회와 인연을 끊은 부랑자들, 벽보를 붙여 선동하는 자들로 매도되었다. 외신 뉴스 방송은 중국 젊은이들의 시위를 용기 있는 행동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칭찬하면서, 당국에 의해 극심한 압박을 받았을 때에만 젊은 시위자들은 자신들이 설정했던 자제의 경계선을 넘어 행동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공포의 하룻밤이 지나가 외부 세계는 젊은 용이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용은 바로 중국의 내일을 거머쥘 젊은 세대였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