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중국은 5천 년의 장구한세월을 거치며 수많은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했고, 600여 명의 황제가 번갈아 가며 중원을 호령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진정한 유언을 남긴황제는 30여 명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유언은 시시콜콜한 일상을 언급하는 내용도 있지만 대부분은 후계자 문제와 왕조의 비전을 담고 있어서 현실정치에 민감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의 유언은 대부분 반대파에 의해 왜곡되거나 분실되었다.
이 책은 개국 제왕과 중흥 군주부터 난세 효웅과 태평성대 천자까지, 오늘날의 중국역사를 대표하고 완성한 황제 12명의 깊은 통찰과 혜안을 엿볼 수 있는 유언을 담고 있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 진시황제를 비롯하여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 청나라의 태평성대를 이끈 강희제 등 총 12명의 황제가 등장한다.
■ 저자 허무펑
1970년 북경 출생. 인민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고,역사학계에 주목받는 젊은 학자다. 전통적인 역사적 시각에서 탈피하여 문학적 필치로 역사의 세세한 부분까지 복원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있다. 또한 과거사에 생명을 불어넣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 묘사에도 뛰어나다. 역사를 평론하는 데 있어서는 통속적이면서도 역사적 정취가 느껴지며붓 가는 대로 쓰면서도 역사적 진실을 존중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역대 황릉의 운명을 파헤치다』『역사의 전환점-중국 역사를 바꾼 18가지우연한 사건』『그들은 왜 황제가 되지 못했을까?』 등이 있다.
■ 역자 류방승
성균관대학교 중어중문과를 졸업했다. 현재 중국어 전문번역가로 활동중이며, 편집 일선에서 중국의 좋은 책을 소개하는 데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천고의 명의들』『다 빈치의 두뇌 사용법』『수완』 등이있다.
■ 차례
서문- 죽음을 앞두고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1장 2세 황제가 뒤바뀐 사연은? - 진나라 시황
올해 "조룡"이 죽네! | 영원을꿈꾸는 제국 | 후계자 문제, 수렁에 빠지다 | 불로장생약이 있다고? | 등 돌린 "삼인행" | 제국의 빛과 그림자 | 조작된 유언, 어떻게가능했을까?
2장 영원한 유씨 천하를만들어라! - 한나라 유방
유씨 천하를 위한 두 번째 유언- 인사 안배 | 팽팽한 견제, 후당과 상당 | 어찌하면 용사를얻어 사방을 지킬까! | 또한 어찌하면 용사를 제거할 수 있을까! | 유씨 천하를 위한 첫 번째 유언- 백마의 맹세 | 한나라 400년 역사의버팀목
3장 한 무제, 곽광에게 그림을선물한 이유는? - 한나라 무제
그림 속에 담긴 비밀 | 왜 곽광이어야만 했을까? | 무고의 화, 황실의 비극 | 잘못을깨닫고 고치는 것보다 훌륭한 일은 없다 | 수성의 후계자, 유불릉 | 한 무제와 진시황의 다른 점은?
4장 절망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선택 - 촉나라 유비
관우를 잃다 | 뼈 있는 유언 | 유선은 바보 황제가 아니다! | 제갈량이 권력을 넘겨주지 않은 이유는? | 수포로돌아간 유비의 계산 | 최선의 선택, 제갈량의 한계
5장 조조, 시시콜콜한 일상을 언급하다 - 위나라 조조
영웅이 하늘로 돌아가다 |천하는 이미 조조의 손아귀에? | 어긋난 후계자 구상 | 최후의 후계자는 누구? | 후계자 책봉은 정권 탈취용 | 조비, 아비의 꿈을 대신이루다
6장 "정관의 치세"에서 "영휘의치세"로! - 당나라 태종
막 내리는 "정관의 치세" | 『제범』, 황제의 정치 교과서 | 태자를 위한 각종 안배들 |유약한 태자, 측천무후의 기회 | 장자가 아니어도 황제가 될 수 있다! | 유언에 담긴 태종의 깊은 뜻 | "영휘의 치세", 그 찬란한서막
7장 중국 최초의 여황제가 황제의시호를 버린 까닭은? - 주나라 측천무후
강제 퇴위 사건 | 황제가 아닌 황후로 남아야 했던 사연 | 아들과 조카, 누구를후계자로 세울 것인가? | 이씨와 무씨의 맹세문 | 한 차례의 정변, 물거품이 된 계획 | 공과는 후대 사람들이 평가하도록하라
8장 송나라를 지탱한 가법을 세우다- 송나라 태조
갑작스런 죽음 | 태조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들 | 동생에게 황제 직위를 물려준 이유 | 촛불 그림자와 도끼소리 사건 | 형의 기대와는 어긋난 행동 | 금궤의 맹세 | 사대부와 상소를 올려 말하는 자를 함부로 죽이지마라
9장 신앙과 단결, 해가 지지 않는제국의 힘! - 몽골 제국 칭기즈칸
형제들이 결정한 후계자 | 세 가지 유언 | 살인과 약탈을 멈추라 | 권력싸움보다는 세계 정복이 우선 | 오고타이, 아버지의 유지를 실현하다 | "장생천"의 영광과 몰락
10장 가장 실패한 정치적 유언 - 명나라 주원장
주씨 강산을 향한 꿈 | 손자를 후계자로 세운 이유는? | 실패로 돌아간 유언 | 공신의 제거, 친왕의득세 & | 무용지물이 된 『황명조훈』 | 패배가 정해진 싸움
11장 이 유언을 누구에게 전할꼬! - 명나라 숭정제
역적을 물리칠 비책 | 의미없는출정 | 절대 천도는 없다 | 최후의 몸부림 | 이자성에게 남긴 당부 | 짐이 망국의 군주가 아니라 대신들이 망국의신하이다
12장 본심은 다른 곳에 있다- 청나라 강희제
자질이 뛰어난 손자 | 치열한 후계자 쟁탈전 | "든든하고 믿을 만한 아들" | "강건성세"의 숨은 주역| 청나라의 최고 전성기를 열다
저자 후기 - 황제는 죽어서도 인간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다
역자 후기 - 제국의 흥망성쇠를가르는 마지막 당부, 혹은 명령
황제의 유언
2세 황제가 뒤바뀐 사연은? - 진나라 시황
영원을 꿈꾸는 제국
진시황 26년(기원전 221년)에 진시황에게 고민이 생겼으니, 바로 6국의 부활이었다. 당시 ‘황제’는 그의 발명품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가 천하를 통일하기는 했지만 6국은 그를 천하를 대표하는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6국의 사람들은 그에게 창끝을 겨누었다. 시황 26년 일찍이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형가(荊軻)와 한패였던 고점리(高漸離)가 악기로 진시황을 시해하려는 사건이 벌어졌다. 진시황은 이 사건 이후 6국의 귀족들과 열혈 청년들에게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제국이 절대 무너지지 않고 대대어 이어가게 하려던 그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은 적어도 100가지는 될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그중에서 가장 잘못된 방법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여 영원한 제국을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자객의 암살로 맞는 죽음, 노쇠하여 맞는 죽음, 나라가 망하여 맞는 죽음, 이 세 가지 죽음의 위협이 항상 진시황의 머릿속을 뒤덮고 있었다. 진시황은 첫 번째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6국의 인사들과 귀족들을 탄압하고, 출행할 때는 삼엄하게 경호 조치를 취했다. 두 번째 위협에 대해서는 서복을 파견해 불로장생약을 구해오도록 했다. 세 번째 위협에 대해서는 6국의 성곽을 허물고 모든 제방을 무너뜨려 6국 사람들의 근거지를 없애고, 만리장성을 축조해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후계자 문제, 수렁에 빠지다
진시황에게는 20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사서에 자주 언급되는 이는 장자 부소와 막내아들 호해였다. 이 두 사람이 황위를 이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부소는 장자였으니 이치상 당연했고, 막내아들 호해는 진시황이 가장 아끼는 아들이었으므로 인정상 가능했다. 그러나 진시황은 이 두 아들이 전혀 눈에 차지 않았다.
등 돌린 ‘삼인행’
시황 37년 7월 서늘한 수레 안에서 이미 반죽음 상태에 있던 그는 중거부령(中車府令)이자 옥새를 관장하고 기밀 사무를 담당하던 조고에게 명하여 장자 부소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함양에 모여 나의 장례를 거행하라.” 이것이 곧 진시황의 정치적 유언이 되었다. 장례를 명분으로 부소에게 제위를 이으라는 뜻이었다.
뒤이어 진나라에는 아주 유명한 ‘삼인행(三人行)’이 등장한다. 바로 조고, 이사, 호해이다. 조고는 본래 조나라 귀족의 먼 자손이었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한 후 그는 거세를 당해 진나라 궁궐의 종으로 충원되었다. 조고는 학문을 좋아하고 힘이 장사여서 점점 진시황의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거부령에 발탁되고 호해에게 형벌에 대해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진시황 사후 조고는 이사, 호해와 입을 맞춘 후 부소에게 줄 조서를 위조하고 그 위에 황제의 옥새를 찍어 봉했다. 조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내가 천하를 순행하며 각 지역 명산의 신령에게 장수를 빌며 기도와 제사를 올렸다. 현재 부소와 장군 몽염이 수십만 군대를 거느리고 국경에 주둔한 지 이미 십여 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국경 밖으로 진군하지 못한 채 죽고 다치는 병사들만 속출해 조그만 공도 세우지 못했다. 부소는 자식된 자로서 불효를 범했으니, 검을 내려 자살을 명하노라! 장군 몽염은 신하된 자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함께 자살을 명한다.” 부소는 조서를 다 읽은 후 목숨을 끊었다.
제국의 빛과 그림자
호해를 제위에 올린 조고는 진 제국의 중심이 서자 가장 먼저 호해를 속여 조정과 신하들을 멀리하게 했다. 뒤이어 그는 성격이 제멋대로인 호해를 부추겨 가혹한 진시황의 형벌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게다가 황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신들의 음모를 의심한다며 진시황의 열두 공자와 열 명의 공주를 모두 사형에 처했다.
각지의 농민들이 연일 반란을 일으킬 때 제국의 위대한 장수들이 잇달아 조고에게 죽임을 당했다. 잠시나마 제국의 명맥을 지탱하던 몽염, 장함 등이 죽자 제국의 중추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진나라는 멸망을 향해 한발 더 나아갔다. 진시황이 30여 년 동안 천하를 경영하며 남긴 것은 통일된 강산뿐 아니라 제국을 지탱하는 데 꼭 필요한 문무 대신들도 있었다. 그러나 조고는 3년이란 짧은 시간 안에 이 모든 것을 파괴했다.
진시황이 죽은 지 일 년 만에 제국은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핍박받던 수많은 백성들이 무장하여 이 제국을 공격했고 안에서는 조고가 이 제국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이 두 가지는 비록 방법은 달랐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조조, 시시콜콜한 일상을 언급하다 - 위나라 조조
영웅이 하늘로 돌아가다
건안 25년 정월 23일, 위왕 조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종 직전에 사람들을 불러 유언을 남겼다. “내가 군중에서 법을 집행한 것은 대체로 옳았는데, 작은 분노가 큰 잘못을 범한 점은 본받을 가치가 없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고대의 장례 예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 나는 두통이 있어서 일찍부터 두건을 썼다. 그러니 내가 죽은 후 장례복은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하라. 백관들은 대전에서 열다섯 번만 곡을 하고, 안장을 마치면 모두 상복을 벗도록 하라. 각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장수와 병졸들은 주둔지를 절대 떠나지 말고, 관리들은 자기 직무를 다하도록 하라. 입관할 때는 평상복을 입고 업(?) 땅의 서쪽 언덕, 서문표(西門豹, 중국 전국시대의 위나라 정치가)의 사당과 가까운 곳에 장사 지내고 금과 옥 및 진귀한 보물을 묻지 마라.”
유언은 계속 이어졌다. “쓰다 남은 향은 부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내 제사에 쓰지 말도록 하라. 생계가 막막한 측실들은 신발 짜는 기술을 익혀 팔아 살도록 하라. 내가 관직을 지내며 얻은 인수(印綬)들은 모두 창고에 보관해두어라. 내 남은 옷가지들은 따로 모아두는데, 보관이 불가능한 것은 너희 형제들이 나누어가져라. 내 비첩과 예기들 모두 애쓰고 고생했으니, 동작대(銅雀臺)에 모여 살게 하고 잘 대해주어라. 침실에는 여섯 자 되는 침대를 깔고 고운 휘장을 설치하며 아침저녁으로 마른 고기와 마른 음식을 대접하라.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휘장을 향해 가무를 벌이고, 너희들은 항상 동작대에 올라 내 묘지인 서릉(西陵)의 묘전(墓田)을 바라보도록 하라.”
조조는 분명 안심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오래 전에 후계자 문제를 마무리 지었기 때문이다. 그의 후계자인 조비는 그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상의 신분으로 한나라 정권을 찬탈하고 위나라를 수립했다. 영웅이란 칭호에 부끄럽지 않았던 조조의 죽음은 담담했다.
천하는 이미 조조의 손아귀에?
조조는 후계자에게 매우 가치 있는 유산을 남겨주었으니, 그것은 바로 수많은 인재들이었다. 가후, 유엽, 장료, 조인, 장합, 서황, 문빙, 조홍, 사마의, 조진, 조휴 등 세대를 아우르는 인재들이 넘쳐났다. 여기에 외부로 확장해나갈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과 방대한 영토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이 있었다.
위나라 외에 두 나라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조조가 죽기 일 년 전인 건안 24년(119년) 가을에 유비가 성도에서 스스로 한중왕에 올랐다. 이때 유비는 표면적으로 인사, 지리, 군사 모든 면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의 수하에는 제갈량, 관우, 장비, 법정, 마초, 이엄, 위연, 황충, 조운, 황권 등 인재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법정은 일찍 죽었고, 이엄은 사사건건 분란을 일으켰다. 유비는 조운의 실력에 의심을 품어 중용하지 않았으며, 위연은 이제 막 발탁되어 독자적인 명성과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황충은 너무 연로했고, 마초는 이미 여러 차례 주군을 배반한 경험이 있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형주 문제를 놓고 서촉의 유비와 동오의 손권이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조는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일은 그가 예측한 대로였다. 유비와의 전쟁을 끝으로 동오도 서촉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어긋난 후계자 구상
조조는 모두 13명의 부인을 두었고 그 사이에서 스물다섯 명의 아들을 낳았다. 초창기에 조조가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아들은 환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조충이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그는 다섯 살 때 이미 어른도 부끄럽게 할 만한 지혜를 지녔다고 한다. 그러나 조충은 건안 13년에 열세 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조조는 이에 비통해 마지않았고, 조비 등 다른 아들들이 그를 위로하러 왔을 때 차갑게 말했다. “이는 내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너희에게는 행복한 일이 아닌가.”
조조는 시대의 반역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태자 책봉에 대한 생각 역시 당시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적서나 장유를 따지지 않고 오직 정치적 재능을 중시했다.
후계자 책봉은 정권 탈취용
조조는 일단 조식을 후계자로 임명하면 동시에 그와 대립하는 세력이 나타날 것임을 깨달았다. 반대로 조비를 태자로 삼으면 조식 측은 조비와 대항할 힘이 전혀 없었다. 이로써 결과는 분명해졌다. 조비가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조식과 그의 지지자들이 결코 조조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조의 조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식이 비록 힘은 미약했지만 주변에 수많은 모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모사들의 힘을 등에 업고 지금의 위치에까지 오른 조조는 이를 우습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건안 24년 그는 ‘계륵’을 빌미로 조식의 지지자인 양수를 죽여버렸다. 양수의 죽음은 조식에게 거대한 손실이었다. 이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조비와 겨룰 힘을 잃고 말았다.
조비, 아비의 꿈을 대신 이루다
조조는 양수를 죽이고 반년이 지난 건안 25년 정월에 세상을 떠났다. 조비는 조조의 승상, 위왕 등의 관직을 계승하고 신정권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해 10월 조비는 ‘선양’의 방법을 통해 한나라 헌제로부터 제위를 빼앗고 위 왕조를 건립했다. 일 년 후에는 유비가 제위에 올랐고, 2년 후에는 손권이 스스로 오왕이라 칭함으로써 삼분천하의 국면이 마침내 형성되었다. 조비는 단번에 동한 시대에 환관과 외척이 조정을 쥐고 흔들었던 국면을 일소했다.
사실 조비는 마음속에 큰 뜻을 품었지만 머리는 이에 미치지 못했다. 조비는 7년간 황제 자리에 있었다. 그는 어쨌든 한나라 정권을 탈취하여 위나라를 건립하고자 하는 조조의 이상을 실현했다. 훗날 그가 남긴 유언은 아버지인 조조의 유언과 비슷했다. 그는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으며, 파헤쳐지지 않은 무덤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박장(薄葬)을 부탁했다. 조비의 유언은 조조가 죽을 때 강조한 근검절약 정신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조조는 일생 동안 황제를 칭하지 않았다. 조조 같은 영웅에게 황제라 칭하는 것은 반드시 천하통일을 이루어야만 하는 압박감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임무를 후계자에게 넘겼고, 후계자는 그의 도움 없이 임무를 완수했다. 조조는 임종 전에 천하가 이미 손아귀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송나라를 지탱한 가법을 세우다 - 송나라 태조
갑작스런 죽음
개보 9년(976년)은 송나라 개국 황제 조광윤의 집정 마지막 해였다. 북쪽으로는 요나라가 건재했고 서남쪽에는 대리, 토번이, 서북쪽에는 고창, 서하 정권이 송나라 판도 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요나라는 마침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니, 통일 대업은 솔직히 너무 요원해 보였다.
조광윤은 요나라의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 아래 놓여 있던 도성 개봉의 안전 문제 때문에 도읍을 낙양으로 옮기려 했으나 그의 동생인 개봉부윤(지금의 서울시장과 같은) 조광의가 반대해 무산되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10월 18일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다. 당시 조광윤은 태감 왕계은을 건륭관에 보내 신령에게 빌고 점을 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이날이 10월 19일이었는데, 밤에 조광의가 황제의 친필 조서를 받기 위해 궁으로 들어갔다. 조광의가 조광윤의 처소로 들어간 이후 모든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태조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들
조광윤은 술을 목숨처럼 좋아했다. 그는 술을 매번 곯아떨어질 정도로 마셨지만 술 때문에 절대 국가 대사를 그르친 적은 없었다. 976년 10월 19일 밤도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조광의가 찾아오자 형제는 처소에서 술을 진탕 마셨다. 조광윤의 몸이 많이 안 좋아 동생이 술을 조금만 마시라고 권했으나 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처럼 과음을 했다. 술이 꽤 여러 순배 돌자 이를 이기지 못한 조광의가 먼저 쓰러졌다. 역시나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마신 조광윤이 바깥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동생이 집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는 동생이 자는 모습을 보고 비틀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와 옷을 벗고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때 궁에서 황제의 시중을 들던 태감과 궁녀들은 천둥이 치는 듯한, 황제의 코고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새벽이 되자 황제의 침소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한 시간 후 누군가 송황후의 처소로 다급히 달려가 황제가 붕어했다고 알렸다.
조광윤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었다. 첫째는 조덕소이고, 둘째는 조덕방이었다. 조광윤과 송황후는 미리 태자를 세우지 않았는데, 이유는 그들이 조덕방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송황후는 왕계은을 불러 궁 밖에서 조덕방을 찾아 오게 했다. 그는 가는 길에 곰곰이 따져보기 시작했다. 지금 송나라의 권력은 공백 상태였다. 누구든 실력만 있으면 황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단 의미였다. 그는 말머리를 돌려 개봉부로 향했다. 조덕방이 황제가 되면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질 것이나 조광의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는 능력이나 도성에서의 영향력 모두 조덕방보다 몇 배는 뛰어났다.
그는 조광의에게 황제의 붕어 소식을 알리고 급히 궁으로 들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권유했다. 조광의는 궁을 향해 달려갔다. 왕계은이 돌아온 것을 보고 송황후가 다급히 물었다. “조덕방을 데려왔느냐?” 왕계은이 고개를 돌려 뒤를 가리켰다. “진왕(晉王)이십니다.” 송황후는 대세가 이미 결정되어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걸어들어오는 조광의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우리 모자의 목숨은 모두 관가(官家, 황제의 별칭)에게 달렸습니다!” 조광의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가 정사에 실린, 조광의가 황제가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조광의가 언제 개봉부로 돌아갔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고, 또 그날 그가 정말 개봉부로 돌아갔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조광윤은 960년 황제의 보위에 올라 976년 10월 20일 새벽에 유명을 달리했다. 총 16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었으며, 향년 50세였다. 그는 제업이 흥성하고 전도가 유망한 시기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후세에 그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남겼다. 그는 왜 자식이 아닌 동생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었을까?
촛불 그림자와 도끼 소리 사건
개보 9년(976년) 10월 19일 조광윤은 내시를 개봉부로 보내 동생 조광의를 불러오게 했다. 조광의가 도착한 후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 밤 궁궐 사람들은 도끼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창문으로 두 사람이 싸우는 그림자를 보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조광윤이 붕어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광윤이 죽은 것은 조광의 탓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추측에 불과하다. 조만간 황제 자리는 자기 차지가 될 텐데, 그렇게 조바심을 낼 이유가 있었을까?
또한 조광의가 유언에 따라 제위를 계승한 과정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황제가 후계자를 정할 때 반드시 따르는 규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뒤를 잇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규정을 위반하고 조광의가 황제가 되었는데도 반대나 의문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조광의의 황제 즉위를 모두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조광의는 젊었을 때 조보 등과 모의하여 진교역(陳橋驛)에서 조광윤에게 만취하도록 술을 먹이고는 정신을 잃은 그에게 황포(黃袍)를 입혀 강제로 황제로 추대했다. 조광윤은 조보, 조광의 등의 추대에 못 이기는 척하며 개봉에 입성해서 일곱 살 난 시종훈(柴宗訓)에게서 황제 자리를 선양받아 송나라를 건국했다. 이를 ‘진교병변(陳橋兵變)’이라 부른다. 조광의는 개국공신으로 인정받아 동평장사(同平章事), 개봉부윤의 자리에 올랐고, 태조가 친정을 나갈 때는 수도를 지키는 중책을 맡아 지위가 높고 권력이 막강했다.
당나라 말기에서 송나라 초기까지 100년 가까이 태자 제도는 거의 폐지된 상태였다. 후계자는 대부분 친왕이나 경윤(京尹, 서울시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광의는 본래 친왕인데다 개봉부윤을 맡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그를 후계자로 인정했다. 조광윤도 자신의 아들들이 성인이 됐는데도 모두 왕으로 봉하지 않았다. 이는 조광의의 위치를 묵인한다는 의미였다. 조광의가 바로 태조 시대에 실질적인 후계자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태조가 죽은 후 순조롭게 유조를 받들 수 있었던 것이다.
가장 실패한 정치적 유언 - 명나라 주원장
손자를 후계자로 세운 이유는?
주원장은 아들 대신 손자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주원장은 아들을 제쳐두고 1392년 9월 자신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태자 주표(홍무 25년 병사)의 차남인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임명했다(주표의 장남은 요절했다). 주윤문은 주씨 집안에서도 별종에 속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본성이 착하고 효성스러우며 우애도 깊었다. 이후 명나라에는 그처럼 인자한 황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주원장은 1380년 ‘호유용의 옥’과 1939년 ‘호람의 옥’, 두 번의 옥사 사건으로 개국 이래의 공신과 장수들을 거의 제거했다. 이로써 명나라 황제의 독재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주원장은 공신들을 죄다 죽이고 아들들도 멀리 변방으로 내보낸 후에야 뒷일에 대해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실패로 돌아간 유언
홍무 31년(1398년) 6월 24일 일흔한 살의 노황제는 서궁의 침상에서 영원히 숨을 멈추며 피비린내 나는 강압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임종 전 그는 모든 후궁을 함께 순장하라고 명하고, 장미인(張美人)만 네 살 난 딸 보경공주를 키우라며 살려두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짐은 천명을 받아 31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마음속에 늘 걱정과 경계심을 가지고 매일 부지런히 일하며 태만하지 않아 백성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힘썼다. 내 출신이 빈한하고 미천하여 옛사람의 너른 지식에 못 미치고, 선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싫어하는 마음 또한 그들만 못하다. 내 죽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만물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니, 절대 슬퍼하지 마라. 황태손 주윤문은 어질고 명철하며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어 천하의 민심이 그에게로 향하니, 마땅히 제위에 오를 만하다. 조정 안팎의 문무백관들은 한마음으로 정사를 보필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라. 상례에 사용하는 기물들은 절대 금과 옥으로 만든 것을 쓰지 마라. 내가 묻힐 효릉(孝陵) 산천은 원래 지형 그대로 보존하고 절대 손대지 마라. 전국의 신하와 백성들은 사흘간 곡한 후에 모두 상복을 벗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데 전혀 방해받지 마라. 모든 왕들은 자신의 영지 안에서 통곡하고 절대 도성으로 들어오지 마라. 봉국에 소속된 문무 관원과 병사들은 일률적으로 조정의 예법을 따르라.”
그는 주윤문이 제위를 순조롭게 계승할 수 있도록 유언에서 두 가지 조항을 규정했다. 첫째는 여러 왕들이 말썽을 일으킬까 염려되어 경성으로 조문 오는 것을 불허했고, 둘째는 봉국의 관원들을 모두 조정에서 관할하게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그가 죽기 전 가장 걱정했던 일이 몇 달 후에 일어나서 그의 계책은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권문 원년(1399년) 7월 연왕 주체는 황제 주윤문이 보낸 신하를 참수하고, 주원장이 『황명조훈』에서 말한 “조정에 바른 신하가 없고 궁에 간악한 무리들이 득실하면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서 그들을 토벌해 군주 곁을 깨끗이 하라”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이끌고 도성인 남경(南京)으로 진격했다. 3년 후 주체는 남경을 함락시키고 황제가 되었다.
무용지물이 된 『황명조훈』
『황명조훈』은 치국의 도를 전하는 황실의 가훈으로, 주원장은 명나라가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에 이 책을 편찬했다. 이 책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을까? 요약해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첫째, 중서성(中書省)과 승상 제도를 폐지하고 황제가 직접 정무를 다스려라. 둘째, 조선, 일본을 포함한 주변 15개 나라를 공격하는 대외 확장 정책을 중지하라. 셋째, 제위는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잇고, 자식이 없다면 동생에게 양위하라. 넷째, 황제는 몸가짐을 조심하고 국정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제사 지내는 날을 엄격히 지켜라. 다섯째, 출입할 때 주의하고 후궁들을 조심하며 환관의 내정간섭을 금지하라. 여섯째, 황제와 친왕의 관계에 있어서 황제가 먼저 예를 다하여 친왕의 지위를 격상시켜주고, 친왕은 군대를 훈련시켜 명을 기다리다가 천자의 조서를 받으면 즉시 간악한 무리를 처단하라. 신하와 백성들은 친왕을 존중하고, 풍헌관(風憲官, 법도와 기율을 감찰하는 관리)은 사소한 잘못으로 친왕을 고발하지 마라. 친왕이 만약 중죄를 범했다면 황족과 내관을 보내 궁으로 부르고, 아무리 죄가 커도 서인으로 강등하는 형벌 이상을 내리지 마라. 일곱째, 예의와 전장(典章)에 필요한 규정을 만들라.
주원장은 주윤문에게 이 책을 건네며 자신이 이미 규정해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친왕에게 너무 심하게 굴지 말라고 당부했다. 또한 그는 이 책에 이미 정해진 법도를 한 자도 바꾸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주윤문은 황제에 오른 후 주체의 세력이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막강해지자 결국 할아버지의 훈계를 따르지 않았다. 그는 등극하자마자 봉지 삭감을 시도했다. 그러나 주체도 이를 빌미로 “조정에 간신이 있으면 친왕이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처단하라”는 주원장의 유조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켜 제위를 찬탈했다.
패배가 정해진 싸움
주윤문은 확고히 다져진 중앙집권 국가의 군주였고 주체는 일개 번왕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주체는 대의명분이 없었으므로 주윤문이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주윤문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 원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주원장의 『황명조훈』을 따르지 않고 번왕의 봉지를 삭감한 것이다. 주윤문의 근본적인 목표는 주체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세력이 약한 다섯 왕의 봉지를 먼저 삭감함으로써 주체에게 모반을 일으킬 시간을 벌어주었다. 두 번째 실수는 주윤문의 유약한 성품에서 기인했다. 마지막으로 주윤문은 이경륭을 기용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는 병법을 모르는데다가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해 유능한 장수를 모두 내쳐버렸다. 싸우는 족족 주체의 군대에 패한 그는 주체가 남경까지 밀고 내려오자 적과 내통하여 성문을 활짝 열고 적군을 맞아들였다. 이로 인해 결국 남경이 함락되고 말았다.
주윤문은 『황명조훈』의 가장 중요한 조항을 어겼으면서도 환관에 대한 당부만큼은 철저히 지켰다. 주원장은 태감이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는데, 주윤문은 태감을 엄격히 관리하여 그들의 발과 입을 완벽히 통제했다. 그러니 주윤문에게 원한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들은 주체가 거병한 후 조정의 모든 정보를 낱낱이 그에게 보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경을 공격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주윤문의 실패는 물론 그 자신의 잘못이 가장 크지만 여기에 주원장도 한몫을 했다. 주원장은 다음과 같은 점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집안의 우환거리를 내쫓고 그들을 벤 칼을 친척에게 주고서 정원을 지키게 했다. 그는 이렇게 하면 집안의 안전이 확실히 보장될 것이라고 여겼지만 뜻밖에도 친척 중의 하나가 집안으로 들어와 그의 후계자를 그 칼로 베고 말았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