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

   
이중톈(역자: 심규호)
ǻ
에버리치홀딩스
   
29500
2010�� 01��



■ 책 소개
2000년 전 중국선진(先秦) 시대에 등장한 사상가 유가, 묵가, 도가, 법가 등과 이들이 벌인 논쟁을 압축하여 이르는 ‘백가쟁명’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세기의 논쟁이기도 하다. 유가와 묵가, 유가와 도가, 유가와 법가 등이 연합과 분열을 꾀하며 각자의 지혜를 잇달아 드러내면서 무궁한 매력을보여주었다.

 


이 책은 중국 문화의 무형적인 가치가 "백가쟁명"에서 비롯되었음을 역설하는책이다. 중국 CCTV <백가강단&&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고전의 대중화를 선도했던 이중톈 교수가 춘추전국시대 제자(諸子)들의 탄생부터각 파의 계승 과정, 현대에 미친 영향까지를 특유의 재담으로 알기 쉽게 풀이한다. 저자는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넘나들며 끊임없이 현재 시점에서균형 잡힌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해내고 있다. 무엇보다 어깨 힘을 빼고 쉽고 친절하고 자세하게 유가, 묵가, 도가, 법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풀어쓰고자 했던 작가의 노력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 저자 이중톈
1947년후난성 창사에서 태어났다. 우한대학을 졸업하고, 문학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았다. 현재 샤먼대학 인문학원 교수로 재직하고있다. 오랫동안 문학, 예술, 미학, 심리학, 인류학, 역사학 등의 분야를 연구하며 학제간 연구를 통해 탁월한 글을 써왔으며, 다양한 인문학분야를 통섭한 연구로 중국의 신 "르네상스맨"으로 불리고 있다. 2006년 CCTV의 "백가강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삼국지』를 강의하면서 일약중국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문심조룡 미학사상 논고』 『예술인류학』 등의 정통 학술저작은 물론,『이중톈 중국인을 말하다』 『이중톈 교수의 중국 남녀 엿보기』 『중국도시, 중국사람』『품인록』 『제국의 슬픔』 등 일반 독자들을 위한 빼어난교양서도 여러 권 썼다. & 


■ 역자 심규호 
한국외대중국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제주산업정보대학 관광중국어통역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중국사상사 - 도론』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문학론 - 구추백의 영향』 등이 있다.


■ 차례
옮긴이의말
머리말


제1장 공자에 대한 이야기
1. 공자는누구인가? 
2. 학문을 하면서 여유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
3. 군자는 진정 곤궁하다 
4. 최고의 교사
5. 누가 좋은학생인가?
6. 상심과 농담


제2장 유가와 묵가의 논쟁
1. 유와협
2. 공자의 처방
3. 묵자의 처방
4. 두 부류의 협사
5. 세 가지 차이점
6. 유가와 묵가의재평가


제3장 유가와 도가의 논쟁
1. 은사철학자
2. 양주에서 노장까지
3. 무위의 수수께끼
4. 도의 수수께끼
5. 노자와 장자의 차이
6. 유가와 도가의재평가


제4장 유가와 법가의 논쟁
1. 피에물든 사상
2. 모사의 철학
3. 횡행패도
4. 양면삼도
5. 문제는 인성이다
6. 유가와 법가의재평가


제5장 원인과 결과
1. 일에는 원인이있기 마련이다
2. 사람이 근본이다 
3. 거대한 한 가족
4. 운명은 변화를 부르고
5. 사인의 등장
6. 매력은어디에서 나오는가?


제6장 계승하여 발전하다
1. 회색의승선표
2. 묵자와 양주
3. 노자와 장자
4. 다시 법가를 말하다
5. 사랑의 외침 
6. 정의와자강




백가쟁명

제1장 공자에 대한 이야기
군자는 진정 곤궁하다

공자는 관리가 되는 것에 대해 ‘준비’, ‘생각’, ‘책략’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논어』에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하는 명언이 적지 않다.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 사람에게 신의가 없으면 설 수가 없다.”, “속히 하려 하면 제대로 하지 못하고, 조그만 이익을 보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자는 정치 참여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공자의 관점에 따르면, 관리가 되는 것도 마땅하고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도 마땅하다. 원칙을 견지하면 자신에게 손해가 될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가? 공자는 우선 “위험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혼란한 나라에는 거하지 말라(危邦不入, 亂邦不居)”고 했다. 다음으로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말을 정직하게 하고 행실을 정직하게 하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행실은 정직하게 하되 말은 공손하게 해야 한다(邦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孫)”고 했다.


공자가 40여 세에 노나라에 있을 무렵 노나라의 정치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조정은 삼가(三家) 대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는데, 이후에는 삼가 가운데 한 대부가 가신인 양화(양호라고도 한다)가 전횡했다. 대부는 국군(國君)을 도와 치국(治國)의 임무를 맡고, 대부의 신하인 가신은 대부를 도와 채읍을 관리하는 일을 하니, 제가(齊家)는 곧 그의 임무다. 당시 국정이 가신에게 장악되었다는 것은 예악의 붕괴를 의미한다. 군신의 자리가 뒤바뀌었으니 명분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언론이 순통하지 못했다. 당연히 공자는 이를 원치 않았다.

『논어』「양화」에 따르면, 양화는 자신이 집정하던 시절, 공자가 자신을 예방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공자를 자기 휘하에 관리로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화가 공자에게 삶은 돼지 한 마리를 보냈다. 당시 예절에 따르면 공자는 답례로 양화의 집으로 가서 감사의 말을 전해야 했다. 공자는 고민하던 끝에 양화가 없는 틈을 타서 사례하고자 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길거리에서 그와 마주치고 말았다. 결국 공자는 양화에게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보석 같은 재능을 가슴에 품고도 나라가 어지러운데도 내버려두는 것을 어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벼슬을 좋아하면서 매번 기회를 놓치는 것이 지혜롭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여기에 대답하지 않자 양화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해와 달이 흘러가니, 세월은 사람을 비껴가지 않소이다.” 결국 알아서 하라는 뜻이니 공자도 답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언젠가 저도 벼슬을 해야겠지요.” 물론 공자가 진짜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그가 출사한 것은 양화가 노나라를 떠난 이후다.


공자는 노, 위, 진나라에서 관직을 얻었다. 공자가 열국을 주유하면서 거쳤던 나라는 노, 위, 진 외에도 주, 제, 송, 조, 정, 채, 초 등 다양하다. 그 가운데 벼슬을 했던 나라는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이렇게 보면 관직에 있었던 시절은 오히려 적고 무시를 당하거나 배척을 당한 때가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벼슬을 하더라도 그 자신이 벼슬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세 가지, 즉 정치적 청사진을 펼치고 학술 주장을 실천하며 인생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나름의 목적 역시 달성한 적이 없다. 그래서 실망만 안은 채 떠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제2장 유가와 묵가의 논쟁
세 가지 차이점

맹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자기 집 노인을 공경하여 그 마음을 남의 집 노인을 공경하는 데까지 미치게 하고, 자기 집 아이를 사랑하여 그 마음을 남의 집 아이를 사랑하는 데까지 미치게 한다. 다른 나라를 자신의 나라처럼 보고, 다른 가문을 자기 가문처럼 보며, 남 보기를 제 몸처럼 보아야 한다.”


묵자의 ‘약시’와 맹자의 ‘이급’은 어떻게 다른가? 묵자의 ‘약시’는 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다른 사람의 가족을 자신의 가족처럼 여기는 것이다. 모든 이들을 한결같이 대우하니 사람마다 평등하다는 논리가 배경에 깔려 있다. 이것이 곧 ‘겸애’다. 맹자의 ‘이급’은 우선 자신의 친인, 즉 부모나 자식, 형제를 먼저 사랑한 연후에 이를 미루어 생각하기를 다른 사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모와 형제, 자식들이 있어 사랑을 받게 되니, 이것이 바로 사랑을 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맹자가 말하는 사랑은 등급과 차별을 지닌 사랑이다. 가까울수록 사랑은 커지고 깊어지며 멀수록 사랑은 적고 옅어진다. 이것이 바로 ‘인애’다.


이렇듯 유가는 차등적인 인애를 주장했고, 묵가는 무차별의 겸애를 주장했다. 유가와 묵가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묵가의 이상은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과연 현실에서 가능할까? 유가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위험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것은 ‘겸애’ 때문이라기보다 측은지심이라는 ‘천성’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행위의 규범이다. 이런 규범이 인성을 토대로 삼지 않는다면, 또한 상리나 상정, 상식을 도외시한다면 토대가 없어 실행할 수 없을뿐더러 심지어 ‘위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맹자는 가능성과 나름의 도리를 확보했다. 그러나 묵가는 도덕의 초월성을 확보했다.

 

묵가가 주장한 겸애에 대해 맹자는 불가능하다고 여긴 반면 묵자는 합리적인 계산, 공포 조성, 권력집중이라는 세 가지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해결 방법으로 인해 유가와 묵가의 주장은 또다시 세 가지 대별되는 개념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공리와 인의이고, 두 번째는 귀신과 천명, 세 번째는 군권과 민권이다.

 

첫 번째 방법부터 이야기해보자. 지금 누군가 겸애를 반대한다면 이는 겸애의 좋은 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손해를 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겸애는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닐뿐더러 가외의 이익을 얻는 기회이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을 돕는다면 다른 사람도 당신을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타산, 이것이 바로 묵자가 제시한 첫 번째 방법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겸애는 “일종의 투자이자 자기를 위한 사회 보험 정도가 될 것이다.” 인의는 공리와 서로 상충하지 않으며, 오히려 공리를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자 공리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묵자의 주장을 “인의가 바로 공리이다”라는 식으로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반면 맹자는 “인의는 인의일 뿐 공리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의(義)와 이(利)를 영원히 상용할 수 없는 물과 불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두 번째로, 묵자의 ‘귀신론’은 일거양득, 즉 일면 겸애를 실현하면서 다른 일면 유가를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유가는 천명을 주장하는 대신 귀신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묵자는 「명귀하」에서 귀신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현자에게 상을 내리고 난폭자에게 벌을 내리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묵자의 귀신론은 통치자들에게 겁을 주어 너무 지나친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런 위협도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묵자가 제시한 방법이 군주의 전정(專政), 즉 전제정치이다. 군주의 전정은 묵자에게 ‘상동(尙同)’의 의미이다. 모든 사상이나 관념, 주장이 위(上), 최종적으로 상천에서 통일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위에서 옳다고 하면 반드시 옳은 것이고, 위에서 그르다고 하면 반드시 그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천하통일, 군권지상, 절대복종이 바로 ‘상동’인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겸애와 전제가 과연 겸용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더군다나 묵자가 겸애를 주장한 것은 대중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니 이 또한 패러독스이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유가와 묵가는 군권이냐 민권이냐를 둘러싸고 또 하나의 갈림길로 접어든다.


제3장 유가와 도가의 논쟁
무위의 수수께끼

노장의 무위는 다음 네 가지 개념으로 개괄할 수 있다. 과욕(寡欲), 우민(愚民), 반지(反知), 부덕(不德). 노장이 생각하기에, 사회가 혼란스러운 데는 무엇보다 소란스러움이 가장 큰 원인이다. 사회가 소란스러운 이유는 욕망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명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익이다. 그래서 장자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공명(功名)의 우상을 만들지 말고, 지낭(智囊)을 채우지 말며, 중임을 맡지 말고, 총명을 자랑하지 말라.”


노자는 욕망이 사람을 해친다고 생각했다. “화려한 색깔은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고, 온갖 음악소리는 사람의 귀를 멀게 만들며, 갖가지 음식을 내놓으면 사람의 혀가 마비되고 만다. 치달리며 사냥을 하면 사람의 마음이 발광하게 되고, 얻기 어려운 재물은 사람의 행동을 어긋나게 한다.” 과욕을 부리지 않으면 천하는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먼저 통치자가 과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무위의 다스림인 ‘무위이치(無爲而治)’이다. 노자는 무위이치를 위해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원칙, 즉 삼불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어질고 능력 있는 이를 뽑지 말 것. 둘째, 귀중한 보물을 중시하지 말 것. 셋째, 욕망을 드러내지 말 것. 모든 욕망을 버리고자 한다면 지적 욕망도 버려야 한다. 그러니 과욕의 결과 필연적으로 우민이 되고, 우민의 결과 필연적으로 반지가 될 수밖에 없다.


도가가 꿈꾸는 태평성세는 순박하고 천진한 세상이지만 유가와 묵가는 “자연으로의 회귀”와 같은 이 같은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다. 맹자는 “아버지나 임금이 없는 것은 짐승이다”라고 했고, 묵자는 “천하가 크게 혼란하면 금수(禽獸)처럼 되고 만다”고 했다.

 

노자와 장자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우민의 결과는 우군(愚君)이고, 우군의 결과는 반지성이다. 그리고 반지성의 결과는 반문명이다. 문명을 반대하니 당연히 과학기술이나 지식, 지혜도 반대한다. 이 외에 반대해야 할 것이 있으니 도덕이다. 노자는 이렇게 읊었다. “총명함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이 백 배가 되고, 어짐을 끊고 의리를 버리면 백성들이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워지며, 교묘한 재주를 끊고 이로운 재물을 버리면 도적이 없어지니 이 세 가지는 모두 꾸밈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데 부족하다.”


장자는 인의도덕이란 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하면서 도둑도 그런 것쯤은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장자는 도둑이 따르는 것도 이른바 유가의 도덕이고 성인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서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성인이 생기니 큰 도둑이 일어난다.”,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 도둑이 그치질 않는다.” 인의도덕이 사라져야 천하태평이 실현된다는 뜻이다. 


제4장 유가와 법가의 논쟁
문제는 인성이다

한비의 논리는 물론 한비 자신의 것이지만, ‘성악’의 결론은 유학 대사, 순자의 영향을 받았다. 순자가 공자나 맹자와 가장 다른 것은 인성이다. 맹자는 “인성은 본래 선하다”고 성선설을 주장했고 순자는 “인성은 본래 악하다”고 성악설을 주장했다. 맹자는 추상적으로 인성을 논하지 말고, ‘사람의 천성’에 대해서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성을 인간의 자연성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맹자는 동정심, 수치심, 공경심, 시비심(시비를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은 누구나 지니고 있다고 여겼다. 측은지식, 수오지심, 공경지심, 시비지심이 그것이다. “구하면 얻을 것이고, 버리면 잃게 된다”는 맹자의 말은 선을 추구하려는 가능성을 버리면 악인이 되고, 반대로 그 가능성을 버리지 않으면 선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에게 선과 악이 있게 되는 원인이다. 맹자의 이런 주장은 유가가 주장하는 인의도덕에 인성의 근거를 확보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러나 사람이 교육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측은지심, 수오지심, 공경지심, 시비지심을 지닐 수 있겠는가? 여기에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 것이 순자다. 순자는 인성을 두 가지, ‘성(性)’과 ‘위(僞)’로 나눴다. ‘성’은 인간의 자연적 속성이며 ‘위’는 인간의 사회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적이고 천부적인 ‘성’과 사회적이고 인위적인 ‘위’가 어떻게 ‘선’이 될 수 있는가? 인위적인 ‘위’가 있어야만 ‘선’이 될 수 있다. 자연적이고 천부적인 ‘성’은 ‘악’일 따름이다. 순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단언했다. “사람의 성은 악이며 선한 것은 위이다.” 이것이 순자 ‘인성론’의 핵심이다.


순자가 ‘성위지분’을 강조한 것은 예악제도에 인성의 근거를 마련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성악」에서 순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선해야 하는 까닭은 사람의 자연적 속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존 능력은 동물보다 크게 떨어진다. 사람의 기력은 소만도 못하고, 속도는 말보다 떨어진다. 만약 사회가 해체된다면 사람은 소나 말보다 못하게 된다.


사람은 질서로 사회를 조직한다. 질서는 도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질서는 ‘분(分)’이고 도덕은 ‘의(義)’이다. 이러한 도덕을 체현하고 질서를 보증하는 것이 바로 ‘예’이며, 예의를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 심는 것이 바로 ‘악(樂)’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위(僞)’이다. 위는 허위의 뜻이 아니라 인위이자 개조의 뜻이다. 이런 개조가 없다면 사람은 동물성에서 벗어나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진정한 인성을 가질 수 없다. 맹자든 순자든 그들은 모두 유가의 입장에서 인성의 근거를 찾고자 했으니, 맹자가 인의에서 근거를 찾았다면 순자는 예약에서 찾은 것이 다를 뿐이다. 문제는 이것과 한비의 관계이다. 한비가 전적으로 순자의 관점을 받아들였다면, 그 역시 유가가 되었겠지만 그는 변신을 시도해 법가의 ‘집대성자’가 되었다.   


제5장 원인과 결과
사람이 근본이다

예악제도를 발명한 사람은 주공이다. 『상서대전』과 『예기』에 따르면, 주공이 섭정한 지 6년 만에 “예악이 제정되고”, 그 결과 “천하가 크게 복종했다.” 이는 주공이 군사적 승리를 얻은 후 진행한 정치와 문화 건설의 결과이다. 주공이 은상의 멸망을 보고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무왕이 은상의 마지막 주왕을 멸망시킨 것은 속전속결이었다. 연합군은 자월(정월) 말에 출발해 축월(2월)에 은나라 도읍지로 진격했고, 곧이어 주왕이 자살했다. 주왕이 파견한 군대가 전선에 도착하기 무섭게 창끝을 돌려 주 무왕의 선봉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왕의 군대가 자기편을 공격하게 된 것은 은상 정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살아 있는 사람을 순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 있는 사람을 제사에 바치는 것이다. 은상 정권이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이고 심지어 귀족까지 죽여 성대한 제사를 올리고 배장까지 했으나 황천의 상제는 그들을 보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나라의 통치자에게는 한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여기고 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仁)’이자 ‘인기인(人其人)’이다.


그러나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은 아직도 멀었다. 천명이 폐지되지 않았고, 귀신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명이 폐지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천명이 폐지되면 주나라 정권의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귀신이 사라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귀신이 없으면 주나라 통치 수단이 사라지게 된다.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무왕은 물론이고 주공 역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은상을 대체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황천 상제께서 그런 권리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천명’이다. 이것이 서주 정권의 합법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천명을 말하고 귀신이 필요하며, 제사와 상례 및 장례를 치러야 한다. 그런 데다 더 이상 은상시대처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신을 사람으로 삼는 것이다. 


그들은 신을 사람으로 삼고, 사람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문제는 사람이 다종다양하다는 점인데, 주나라 사람들이 숭배하고자 한 사람은 ‘성인(聖人)’이었다. 성인이란 역사적으로 한 민족에게 거대한 작용과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들은 때로 과거의 지도자(왕)이었기에 그들을 일러 ‘선왕(先王)’ 또는 ‘선성(先聖)’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왕이었던 것은 아니며 성인의 명단이 고정적인 것도 아니다. “인간에 대한 숭배”는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것”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위대한 공헌과 발명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역시 도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인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성인 숭배’는 사실상 ‘도덕 숭배’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을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인도주의를 체현하고 “신을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이지적 태도라고 한다면 “사람을 신으로 간주하는 것”은 도덕정신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도주의와 이지적 태도, 그리고 도덕정신 이 세 가지가 합쳐져서 “인간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된다. 
 

제6장 계승하여 발전하다
사랑의 외침

유가는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 공자는 무엇에 관심이 있었는가? 묵자는 사회, 장자는 개인, 한비는 국가에 관심이 있었다면 공자가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분야는 문화이다. 이것이 공자의 관점이자 공자가 위대한 이유다. 수천 년 동안 온갖 풍상에 시달리며 숱한 전란을 겪고 분열을 겪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쓰러지지 않고 흩어지지 않았던 것은 바로 공동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외 화교, 중국인이 갖은 고생 끝에 성과를 일구어 마침내 세계의 존중을 받게 된 것도 공동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후대에 대한 공자의 영향력은 모든 제자를 초월하며 유가의 영향력 역시 그러하다. 그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중국인은 왜 중국인이며, 중국인은 왜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는 중국인의 문화성격, 문화심리와 관련이 있다. 그중 60~70%는 공자와 유가가 조성한 것이고 나머지는 도가, 법가, 묵가 및 기타 민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가는 중국 사람들의 마음을 응집시키는 데 필요한 문화가치관을 제공했다. 중국인은 아무리 변해도 중국인이고, 문화민족은 아무리 변해도 중화민족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문화에 핵심 가치와 가치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몇몇 사람들의 공헌 덕분만이 아니다. 멀리는 주공부터 제자 더 나아가 전체 중국인들 모두가 창조자이며 공헌자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유가의 공헌이 탁월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한 한 유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유가가 중국문화에 제공한 핵심적인 가치관은 무엇인가? 인애, 정의, 자강(自强)이다. 인애는 유가의 범주로, ‘친친지애(親親之愛)’, ‘충서지도(忠恕之道),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그중 ‘친친지애’가 기초가 되고, ‘충서지도’가 방법이며, ‘측은지심’이 최저 기준이다. ‘친친’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친족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효도나 우애, 친족에 대한 사랑은 다만 인애의 기본일 뿐, 그것이 곧 인애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인애는 효도와 우애를 확산하고, 보편화시킨 상태이다.


죄가 없는데 죽는 모습을 참을 수가 없고, 고통을 받고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은 바로 현대사회의 법치와 인권을 위한 심리적, 인성적 토대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국제사회는 포로, 범죄자, 심지어 동물을 학대해선 안 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맹자가 주장한 ‘측은지심’과 ‘불인지심’을 엿볼 수 있다. 전통과 현대가 맥을 잇는 모습이다.


유가사상에는 현대사회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공자가 주장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기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긴다”라는 말이 그러하다. 현대 법률에서도 근친의 증언 거부권은 이와 유사하다. 형사 범죄가 발생했을 경우, 누구라도 혐의자에 대한 정황을 알고 있을 경우 국가기관에 신고하고 증언할 수 있다. 이는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그러나 현대 법학에서는 근친자의 경우 이를 제외하는 특례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의견이다. 인성과 인도에 부합하는 주장으로 이미 많은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인애’다. 그것은 ‘친친지애’이자 ‘충서지도’이며. ‘측은지심’이다. 이는 중화민족은 물론이고 전체 인류를 대변하여 공자와 유가가 주장한 사랑이니, 당연히 수용하고 또한 실천해야 한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