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왕을 꾸짖다

   
신두환
ǻ
달과소
   
19500
2009�� 08��



■ 책 소개
이 책은 우리나라 역사상유명하고 중요한 상소를 골라 해설과 함께 엮었다. 열다섯 살 난 평안도 기생 초월이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해 시대의 폐단과 임금의 잘못을생생하게 적어 올린 상소, 어린 임금에게 치국의 방책을 올린 퇴계 이황의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나 율곡 이이의 「만언봉사(萬言封事)」를 통해그들이 민족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유와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마지막 부록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일본에보냈던 사대하는 표(表)와 소(疏), 그리고 국서를 소개한다.

 


상소문은 사라진 왕조시대의 사장된 글이 아니라 그 서슬 퍼런 정의감과 직설의정직함은 오늘을 살아가는 데도 절실히 필요한 정론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간했으며, 도끼를 들고 들어가 알렸으며, 벼슬을 버리면서 직간했다.정의를 위해 외치고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 온몸으로 울었고, 자결을 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 이것이 바로 선비가 가야 하는 우국애민의길이었다. 


■ 저자 신두환(申斗煥)
1958년 경북의성 출생.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 한국한문학 전공 졸업 문학박사. 성균관대, 서울시립대, 서경대 등 강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인.칼럼니스트. 현재 국립 안동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저서로는 『조선전기 민족예악과 관각문학』『남인 사림의 거장 식산 이만부』『국역우담집(공역)』외 다수가 있다. 


■차례
서문
1.「상진평왕서(上眞平王書)」 - 김후직(金后稷)
2.「화왕계」 -설총(薛聰)
3.「지부상소(持斧上疏)」 - 우탁(禹倬)
4.「황제시여 제발 고려에서 어린 소녀들을 빼앗아오지 마십시오」 -이곡(李穀)
5.「언문(諺文) 창제의 부당함을 아뢰옵니다」 - 최만리(崔萬理) 
6.「북방 경비에 대한 열 가지 방책(備邊十策)」 -양성지(梁誠之)
7.「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이황(李滉) 
8.「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조식(曺植)
정묘년에 사직하면서 승정원에 올린 상소문(丁卯辭職呈承政院狀)」 - 조식(曺植)
무진봉사(戊辰封事)」- 조식(曺植)
9.「노릉(魯陵)을 복위시키고 사육신을 복작시키며 종친을 서용하기를 청합니다」 -김성일(金誠一)
10.「만언봉사(萬言封事)」 - 이이(李珥)
11.「지부상소(持斧上疏)」 -조헌(趙憲)
12.「진오폐소(陳五弊疏)」 - 신봉석(申鳳錫)
13.「관기 초월의 상소」 - 초월(楚月)
14.「화의(和議)를배척하는 소」 - 최익현(崔益鉉)
 「병인의소(丙寅擬疏)」 - 최익현(崔益鉉)
15.「을사보호조약에 분개합니다」 -종석(郭鍾錫)
 「한일협상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십시오」 - 곽종석(郭鍾錫)
16.「사직상소(辭職上疏)」 -유길준(兪吉濬)
17.「한일합방성명서」 - 이용구(李容九) 
「한일합방을 건의하는 상소」 - 이용구(李容九) 


부록
사대(事大)하는 표(表)와소(疏)
인국(隣國)에 준 국서





3선비, 왕을 꾸짖다

서문
상소문은 문장의 정수로서 관각문학의 꽃이라는 위상을 가지고 동양사 속에서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소문은 왕에게 올린 정치적인 글로서 문학의 범주에서 다룰 만한 것이 못 된다는 편견 때문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상소문 중에는 이사의 「축객서」, 제가량의 「출사표」, 이밀의 「진정표」등과 같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들도 상당량 존재하며, 이 글들은 명문장으로서 후대의 독자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사랑을 받아온 명작으로서, 동양 고전문학사에서 우뚝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한유의 「불골표」를 비롯하여 구양수와 육지 등의 상소문은 당송 고문의 전범으로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 상소문에는 문장에 대한 구성논리와 설득을 위한 비유, 당대 사회에 대한 현실인식 등 문예적인 내용들이 들어있으며, 오랜 역사를 두고 계승 발전되어온 상소문 문체에는 장중하고, 사실적이며 전아한 문체를 구사해야 한다는 문예 미학적인 성격이 들어 있다.


상소문은 분명하고 진실하며 독실하고 정성을 근본으로 한 논리적인 글이다. 신하가 임금 앞에 올리는 글에 잘못이 있을 수는 없다. 사실을 분석하고 통찰하여 강직한 충성심으로 뜻을 세워야 책임을 완성할 수 있다. 현재의 정치상황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잘못을 비평하고 넓은 식견으로 비교하고 선택하여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옛 신하들의 관례와 격식을 전범으로 삼아서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이해하며 번잡한 사건도 조리 있게 진술하여 문제의 핵심을 잡아서 풀어내는 장치가 바로 상소문의 성격이다.


황제시여 제발 고려에서 어린 소녀들을 빼앗아오지 마십시오 - 이곡(李穀)
오늘날 세상에 이렇게 임금과 신하가 있고 백성과 사직이 있는 곳은 오직 고려뿐이옵니다. 따라서 고려의 입장에서 헤아려 본다면, 당연히 밝은 조서를 받들어 선조가 행한 대로 따라 정교(政敎)를 제대로 닦아 밝히고 조공을 제때에 행하면서 나라와 함께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에 내시와 같은 무리들로 하여금 나라 안에 근거지를 두고서 그 도당을 번성하게 그냥 두었으니, 황제의 은총을 믿고 의지하는 고려에게 거꾸로 본국을 뒤흔들게 만들었는가 하면, 심지어는 황제의 어명이라 사칭하고는 다투어 역마를 급히 치달려 해마다 계속해서 어린 소녀들을 빼앗아 수레에 싣고 오게 만들었습니다.


대저 남의 딸을 빼앗아 윗사람에게 아첨하며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게 한 이 일이 비록 고려가 자초한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일단 황제의 지시가 있었다고 칭했고 보면 이 또한 어찌 국조(國朝)의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제왕이 한 번 명령을 내려 시행할 때마다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 바라보며 덕택을 입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명령을 일컬어 덕음(德音)이라고 하게 된 것이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차례에 걸쳐 이런 지시를 내려서 남의 집안의 딸을 빼앗아 오게 하오니, 이는 너무나도 옳지 않은 일입니다.


고려의 풍속을 보면, 차라리 아들을 별거하게 할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으니, 이는 옛날 진(秦)나라의 데릴사위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봉양하는 일은 전적으로 딸이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딸을 낳으면 애정을 쏟고 근실히 돌보면서 얼른 자라나 자기들을 봉양해 주기를 밤낮으로 바라 마지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딸을 품 안에서 빼앗아 사천 리 밖으로 내보내고는, 그 발이 한번 문밖으로 나간 뒤에는 종신토록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그 심정이 지금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일이 한 해에 한두 번씩 일어나기도 하고, 한 해 건너 한 번씩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렇게 해서 데려가는 어린 소녀의 숫자가 많을 경우에는 4, 5십 명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일단 선발이 되면 부모와 친척이 서로 모여 통곡하면서 울기 때문에 밤낮으로 곡성이 끊이지 않으며, 급기야 국경에서 떠나보낼 적에는 옷자락을 부여잡고 땅에 엎어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서 울부짖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비통하고 분개한 심정에 우물에 몸을 던져 죽기도 하고, 목을 매어 자결하는 자도 나오며, 근심과 걱정에 혼절하여 쓰러지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다가 실명(失明)하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일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당당한 우리 천조(天朝)에서 후궁이 뭐가 그리 부족하기에 굳이 외국에서 데려온단 말입니까? 비록 아침저녁으로 은총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부모와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지극한 정리라고 할 것인데, 지금은 궁중에 가둬두고는 꽃다운 시절을 다 놓친 채 헛되이 늙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간혹 궁중 밖으로 내보내어 관리에게 시집을 보내기도 합니다만, 끝내 후사도 없이 생을 마치는 경우가 열에 대여섯이나 되니, 그 원한의 기운이 화평한 기운을 상하게 하는 것이 또 어떠하다고 하겠습니까?


일에 폐단이 조금 있더라도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경우라면 한 번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도 일에 폐단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에는 아무 이익도 없고 먼 지방 사람들에게 원망만 사는 일로서, 그 폐단이 결코 적지 않은 일을 가지고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황제께서는 덕스러운 명령을 반포하시어 감히 황제의 명령이라고 사칭하며 위로 성왕을 모독하고 아래로 자기의 이익을 꾀하여 동녀를 취하는 자 및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처첩을 취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금하는 법률 조목을 명시하시어 앞으로는 그들이 기대하는 마음을 아예 끊어 버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누구에게나 똑같이 어짐으로 대하는 황제의 덕화를 밝게 드러내어 의리를 사모하는 위로의 심정을 위로해 주는 동시에, 원망의 기운을 소멸하고 화평한 기를 불러들여 만물이 제대로 자라나게 해 주신다면, 더 이상의 다행이 없겠습니다.


해설
이 상소는 가정 이곡이 원나라 몽고가 고려에서 강제로 어린 소녀들을 공출해 감으로 이를 보다 못하여 중국의 언관(言官)을 대신해서 원나라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1337년, 충숙왕 복위 6년에 이곡이 청한 대로 고려의 어린 소녀를 데려오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곡은 이제현의 제자로서 원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였다. 이때 중국의 많은 학사들과 교유하였으며 원나라 황제에게 이런 상소문을 올릴 수 있는 지식의 배경이 된다. 이 상소는 고려판 정신대로 불리는 공녀(貢女) 제도를 폐지시킨 역사상 가장 가치 있는 상소이다. 상소문의 애절한 사연을 읽고 원나라 황제는 감동을 받았다.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조식(曺植)
을묘년에 사직하는 상소문, 1555년(명종10년) 10월 11일
선무랑(宣務郞) 단성 현감(丹城 縣監)에 새로 제수된 조식(曺植)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 전하께 소(疏)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선왕(先王, 중종)께서는 신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시고 처음에 참봉(參奉)에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이으신 뒤에, 주부(主簿)로 제수하신 것이 두 번이었는데, 지금 또 현감으로 제수하시니 떨리고 두렵기가 언덕과 산을 짊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감히 황종(黃琮) 한 자쯤 되는 땅(임금이 있는 대궐을 가리킨다. 황종은 황색의 서옥으로 옛날 제사지낼 때 사용하던 것이다. 「주례(周禮)」)에 나아가서 하늘의 해와 같은 은혜에 사례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쓰시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시는 책임 때문입니다. 제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니, 감히 그 큰 은혜에 머뭇거리며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을 끝내 측석(側席, 임금이 자신의 자리 옆에 어진 선비를 대우하기 위해 비워두는 자리로 곧 어진 사람이 임금에게 나아가는 자리를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아래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신의 나이는 예순에 가깝고 학문은 어두우며, 문장은 과거시험(過擧試驗)의 끝자리에도 뽑힐 수 없고,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을 제대로 해내기에도 모자랍니다. 또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은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이반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백 년 동안 벌레가 그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버린 큰 나무가 있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입니다.


자전[慈殿, 임금의 어머니를 일컫는 말로 여기서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말한다]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외로운 아드님이실 뿐이니, 천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민심을 어떻게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이런 때를 당해서는 비록 재주가 주공(周公), 소공(召公)을 겸하고, 지위가 정승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한 보잘것없는 몸으로 초개와 같은 재주를 가진 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위로는 만에 하나도 위태로움을 붙들 수 없고, 아래로는 털끝만큼도 백성을 보호할 수 없으니, 전하의 신하 노릇하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조그만 헛된 이름을 팔아서 전하의 관작을 얻어 그 녹을 먹으면서도 그 녹에 맞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또한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써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점으로 삼으시고, 몸을 수양하는 것으로써 사람을 쓰는 근본으로 삼으셔서 왕도(王道)의 법을 세우십시오. 왕도의 법이 왕도의 법답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못합니다. 밝게 살피시길 엎드려 바라옵니다. 신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전하께 아룁니다.


해설
이 상소는 조식을 조선 선비사회에 일약 스타로 만들어 놓은 상소이다.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외로운 아드님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민심(民心)을 어떻게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라는 과격한 구절 때문이었다.


당시 실권을 휘두르고 있던 문정왕후에 대한 비판은 조정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문정왕후는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모후로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남동생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大尹)이라고 하는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윤원형과 문정왕후의 사주를 받고 있는 조정의 권력가들도 조식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가 벼슬을 던져버리고 은거의 뜻을 내세우며 올리는 상소였고, 선비의 상소를 가지고 문제 삼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관기 초월의 상소 - 평안북도 용천(龍川) 기생 초월(楚月)의 상소, 헌종12년(1846년)
가선대부승지 겸 예조참판, 사간원대사간 심희순(沈熙淳)의 첩이요, 평안도 청북 용천기생 초월이 엎드려 올리나이다. 신의 일생 기구하고 팔자가 궁박하여 신의 어머니 뱃속에 밴지 칠 삭 만에 아버지가 죽고, 낳은 지 한 해 만에 또 어머니마저 잃어 기저귀 찬 적자(赤子)로 젖맛도 모르고 형제도 없이 고고히 단신 무의무탁한 처지가 되어 곧 외사촌 댁에 수양녀가 된지 어언 십여 년이 되었나이다. 그 무정세월 속에서도 차츰 몸이 닦여져 온 터에 천만 꿈밖의 일로 집 어른인 심희순이 병오년 봄에 서장관(書狀官)을 봉명(奉命)받사와 중원 땅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신을 첩으로 삼았던 것이옵니다. 신의 그때 나이 열다섯 살로 백 가지 가운데 하나 취할 것이 없고, 천 가지 가운데 웃지 않을 것이 하나 없으며, 사람됨이 미련하고 둔박하며 행실이 경망한 주제에 명문거족의 가문에 몸을 담게 된 것이옵니다.


더욱이 전하께옵서 일개 창녀의 몸에 성애를 과람이 내리사 숙부인(淑夫人)이란 직첩이 새긴 홍패(紅牌)마저 내려주셨으니, 이를 받들던 날 모골이 송연하고 먹고 자는 일이 안정이 안 되어 마치 살얼음을 밟는 듯한 느낌이었사옵니다. 전하께서 재삼 생각하시와 직첩을 다시 거두어주시면 은혜는 기위 입은 것이오니 엎드려 따르겠나이다.


전하의 성은을 입는데 어찌 남녀가 있겠습니까. 군신부자지간은 목을 베는 도끼 앞에서도, 또 천 가지 뒤집히는 일이 있더라도 매사를 깔아 문대서는 안 되오며 상세히 주달하는 것이 신하된 자의 직분이요 백성의 도리가 아니오리까. 신은 분하고 억울함을 이길 길 없어 일백팔십 조목의 민간병폐를 세세히 글씨로 박아 받들어 고함으로써 천지부모일월 앞에 삼가 이를 밝히나이다.


전하께옵서는 귀를 스치는 바람처럼 신의 말을 스쳐듣지 마시기를 바라옵니다.


먼저 신의 부군(夫君)이 지은 죄부터 아뢰겠나이다. 재상의 손자요, 사족의 아들로 사람됨이 덜하고 가난한 선비를 업수이 여길 뿐 아니라 옛글을 배우지 않아 콩과 보리, 어(魚)와 로(魯) 자를 분별하지 못하옵니다. 지각이 없고 소견이 어두워 의사가 통하지 않으니 밥그릇이 높으면 생일인줄 알고 동녘에 해가 뜨면 날이 바뀐 줄 알뿐입니다. 이 같은 위인이 마음 둔 데는 높아 스무 살도 못 되어 과거에 급제하고 채 백날이 못 차서 대간 옥당(玉堂)에 올라 성은이 망극함에도 다만 국록만 탐내고 부모의 길러준 은혜는 돌보지 않으면서도 축첩만 일삼아 집안에 음률(音律)이 그치지 않고 건달 가객(歌客)과 벗 삼아 성찬으로 밤낮을 가릴 줄 모르옵니다. 재상 심상규의 손자로 벼슬이 하늘처럼 높으니 아무도 감히 당해낼 수야 없지만 나라가 위태로운데 세간의 질고도 도무지 모르고, 크고 작고 무겁고 가벼운 일과 옳고 그르고 길고 짧고 먼저 해야 할 일 뒤에 해야 할 일에 전연 몰지각하옵니다. 국록을 축내는 큰 도적이 비단 이 한 사람 뿐이오리까? 지아비의 죄는 천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고,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으며, 천만 번 칼로 찌르고, 만 번을 귀양 보내도 오히려 못 다할 듯 하온데 이 어찌하오리까?


어사출도에 대해서 말씀드리옵니다.


어사란 해진 옷을 입고 찌그러진 갓을 쓰고 종적을 감추고 곳곳을 몰래 다녀 탐관오리가 백성의 피와 기름을 빠는 것과 간사한 향임(鄕任)과 간악한 아전이 국고를 도둑질하는 것과 젊은이가 노인을 업수이여기는 것과 불효하고 우애 없는 것과 그른 일로 송사를 일으키는 것과 터무니없는 이득을 노린 장사치와 노름꾼, 불량배를 낱낱이 살펴서 출도 후엔 죄줄 것은 죄주고 벌줄 것은 벌줘서 큰 죄인은 먼저 베고 뒤에 보고를 올리는 선참후계(先斬後啓)가 당연한 법이었사옵니다. 그러나 요즈음 어사는 역마를 타고 포졸을 거느리고 마패를 노출시키고 본색을 드러내 뭇사람이 알게 하옵니다. 강산누각과 기암절승지, 이름난 절간을 찾아 활개를 펴고 놀이를 일삼으니 가는 길마다 그 고을에서 알아차리고 극진히 대접하니 이러한 어사는 보내지 않는 것보다 못하고 백성들에게는 도움은커녕 해만 끼치옵나이다.

고을의 일만 번거롭게 만들고 볼기나 때려 본관으로 데려간다고 으름장을 놓아 재물을 빼앗으며, 정작 억울한 일이 있어도 송곳 꽂을 땅도 없이 가난한 사람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큰 허물이 있어도 일백금만 가지면 죽을 사람도 곧 살려낼 길이 어사로 통한다는 것이 상식이옵나이다. 부자는 면제되고 가난한 자만 재앙을 입게 되니 이런 원통한 일이 있사오리까?


해설
초월의 상소문은 2만 1천여 자의 방대한 것으로 천한 몸에 내린 숙부인의 직첩이 과분하다 하여 반려하는 상소문에 곁들여 당시의 시폐를 뼈저리게 서술한 것이다. 신변에서 직접 겪은 일들이기에 사실감이 있고, 나이 어린 여자의 서술이라 솔직하며, 천한 여자이기에 반사회적이며, 반상에 때 묻지 않았기에 애국적이며, 나이나 신분에 비해 신랄함이 비길 데 없이 매섭다.


이 상소문은 그 내용의 구성이나 당대의 시폐를 묘사한 서사와 진솔하고 과감한 표현으로 한 시대를 울린 초선 말기 최고의 문제작이다. 자기의 남편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출발하여 임금에 이르기까지 조정의 모든 관료들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비판한 당대 최고의 사회고발 상소이다.


한일합방을 건의하는 상소 - 이용구(李容九)
대체로 국민이 나라와 함께 살고 나라와 함께 죽는 것은 본디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존망이 문제로 되는 위급한 때를 자주 만났으나 한 번도 황제의 조칙으로 정확하게 국민에게 선포하여 사수하도록 한 사실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때는 너무 멀어서 말할 것이 못되지만 두 나라의 역사를 상고해보면 그 종족을 둘로 가를 수 없게 된 지가 오랩니다. 일본 군사가 우리나라의 백마강에서 당나라 군사와 싸워서 패배하게 되자 백제도 마침내 망하게 되어 한국과 일본은 마침내 각각 자기 영토를 지켜왔으나 사신들은 서로 왕래하였고 농업과 상업을 서로 교류하였습니다.


근래에 와서 일본의 천황폐하는 하늘이 낳은 사람으로서 나라를 창시하는 운수를 받아 안고 만대를 한 계통으로 내려오는 조상의 덕을 빛내고 2,500년을 계승해오는 공덕으로 건국의 큰 사업을 물려받아서 그 믿음과 의리는 태산(泰山)과도 같고 북두성(北斗星)과도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청나라에 망하지 않은 것이 어찌 천황의 덕이 아니며,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먹히지 않은 것이 또한 어찌 천황의 인덕으로 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왜인을 배척하는 기풍이 없어지지 않고 있어서 매번 은덕을 원망으로 갚으면서 일본을 배척하는 것만 일삼고 있으니 돌이켜 생각해본다면 어찌 짐승 같은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지금 합방해야 한다는 것으로 우리의 여론이 기울어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백성들의 양심이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라고 점차 깨닫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일본 사람들이 해마다 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단지 다 자기 본토와 연계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우리나라 사람들과 이해관계가 서로 통하는 고리가 날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정치와 경제에 대한 운용도 모두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함께 살면서 다른 정치를 하는 형세로 6, 7년이 지나가면 앞으로 점차 우리 한국 땅 위에 새 일본이 서게 될 것인데 우리 한국 백성들이 무슨 힘으로 그들과 맞설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들 2천만 동포가 감히 폐하를 뒤에 놓고 자기의 이해관계를 앞세우자는 것이 아니며 또한 임금을 경시하고 백성을 중하게 여기는 생각에서도 아닙니다. 대체로 대한국이 대한국 노릇을 하지 못하는 것은 제 집의 보물을 보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자체를 반성하고 그 근본으로 돌아가서 예의와 신의를 순전히 한 군데에만 쏟아 부어야 할 뿐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의 일본 황실은 천지가 생겨난 이래 한 계통으로 이어져 왔으니 이것은 사실 세계의 어느 나라도 짝할 곳이 없습니다. 우리 황실이 다행히 특별한 대우를 받아 일본 황실과 운명을 함께 한다면 500년 만에 끊어지게 된 제사를 다시 이어나가서 만대토록 빛날 것이고 일본과 함께 하늘이나 땅처럼 무궁할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올 재앙을 더 없는 큰 복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신들은 생각하기를 합방을 이룩하는 것은 단군, 기자 이래로 4천년 동안 없어지기 않은 대전(大典)을 추켜세우기 위한 것이고 신라, 고구려의 삼천리강토에 바꿀 수 없는 태산 같은 터전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대체로 협약의 겉치레 글을 교묘하게 만들어 날로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못에 저절로 밀려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을 신들은 취하지 않습니다. 사건이 나기 전에 미리 대책을 세우지 않고 머뭇거리면 후회막급하게 될 것이니 폐하께서는 2천만 백성들의 운명을 위하여 속히 결단을 내려서 큰 일을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신 이용구 등은 학수고대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들은 황송하게 죽음을 무릅쓰고 머리를 찧으며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이 상소를 올립니다.


해설
우리가 알고 있는 친일파들에게도 선진적인 각성은 있었고, 그들은 한결같이 국제정세에 밝은 자들이 많았다. 일본의 강제 침략이 없었더라도 군함 한 척 없는 나라로서 강대국의 식민지를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이들의 상소는 한결같이 강력한 전함을 앞세운 뛰어난 과학기술과 선진적인 문명을 보면서 도저히 우리 독자적인 힘으로는 저 강대국들의 힘에 대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와는 반대로 강대국 맞서서 개화를 반대하고 쇄국을 고수하며 상투를 틀고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내 머리는 자를 수 없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다.


이 상소문은 당시의 친일파들과 잘못된 지식인들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한일합방을 분개하던 선비들의 글과 비교해서 어떠한가? 이 암울한 시대에 절망한 선비들은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을 한 선비들이 속출하였지만, 이용구의 상소문은 친일 내각에 힘을 실어 결국은 한일합방을 이루게 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