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김종진 - 고려대 문학박사,중국현대연극전공, 영동대 교수
민경삼 - 남경대 문학박사, 중국고전시가전공, 백석문화대 교수
박종학 - 북경사대 문학박사,중국고전문학전공, 우송정보대 교수
송원찬 - 북경사대 문학박사, 중국고전문학전공, 한양대 강사
이규일 - 북경대 문학박사,중국고전시가전공, 영동대 교수
이기면 - 고려대 문학박사, 중국고전비평전공, 배재대 교수
이선희 - 대만동오대 문학박사,중국고전시가전공, 배재대 교수
임승권 - 대만정치대 경제학박사, 중국토지경제전공, 청운대 교수
정윤선 - 남경대 문학박사,중국언어학전공, 숙명여대 강사
조득창 - 북경사대 문학박사, 중국현대연극전공, 협성대 교수
조영현 - 남경대 문학박사,중국현당대문학전공, 서울여대 교수
조정래 - 중국사회과학원 철학박사, 중국미학전공, 한림대 교수
최우석 - 고려대 문학박사,중국고전시가전공, 우송대 교수
함은선 - 대만보인대 문학박사, 중국고전소설전공, 숙명여대 교수
■ 차례
01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02 중국어와 한자문화
03 여행을 떠나자
04 중국인은 무엇을 먹고 마실까?
05 중국인의 다채로운 생활풍경
06 중국인의 여가선용과 체력단련
07 중국인의 발명, 동서교통
08 중국의 사상과 종교
09 중국의 회화예술
10 중국의 극예술
11 중국의 현대문학
12 중국의 대중문화
중국 문화의 즐거움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부르는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이다. 건국일은 1949년 10월 1일이며 수도는 베이징이다. 전체 면적은 약 960만㎢로 한반도의 44배에 달하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국가다. 국경선의 총 길이는 20,280㎞이며 한국, 러시아, 몽골, 중앙아시아 3국,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네팔, 부탄,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등 14개 국가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 홍콩, 마카오 및 타이완 지역을 포함한 중국의 총인구는 약 13억 명이다. 대부분이 한족이고 55개 소수민족이 약 1억 634만 명으로 총인구의 8%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 우리 민족인 조선족은 192만 명 정도다(2000년 기준). 공용어는 중국어이지만 소수민족 자치구에서는 해당 소수민족의 언어를 함께 사용한다. 대표적인 국정 공휴일은 위안단, 춘제, 랴오둥제, 궈칭제 등이다. 종교는 표면적으로는 불교, 도교, 회교, 기독교 등을 승인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무신론에 입각해 있다.
?국가의 상징
중국의 국기는 ‘오성홍기(五星紅旗)’로써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직전인 1949년 9월 30일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서 채택하였다. 국기 속의 붉은 바탕은 ‘혁명’을, 황색의 다섯 개 별(五星)은 붉은 대지로부터 밝아오는 ‘광명’을 상징한다. 그 중 가장 큰 별은 ‘중국공산당’을 상징하고 주변의 작은 별 네 개는 노동자, 농민, 소부르주아, 민족부르주아 계급인 ‘중화인민’을 상징한다. 즉 중국공산당(큰 별)을 중심으로 모든 중국인민(4개의 작은 별)이 조화를 이루며 단결한다는 뜻이다.
?공산당 중심의 정치 형태
중국의 정치체제는 노동자계급이 영도하는 농공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전정의 사회주의 국가(1993년 신헌법 제1조 규정)다. 형식적으로는 8개의 정당이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공산당 일당 통치 체제다. 의회는 전국인민대표대회라는 단원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것이 주요 정책이다. 1국 2체제 방식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과 타이완 간의 국가통일을 주장하고 있고, 패권주의에 반대하며 세계평화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1971년 10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행정구역
중국은 22개의 성과 4개의 직할시, 5개의 자치구, 2개의 특별행정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타이완을 23번째 성으로 여긴다. 특별행정구인 홍콩은 1997년 7월 1일 영국으로부터 인수받았고, 마카오는 1999년 12월 20일 포르투갈로부터 인수받았다.
?중국의 민족: 다양한 민족이 어루러져 살아가는 터전
현재 중화민족은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을 포함하여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55개 소수민족의 인구는 1990년 제4차 인구 조사에서 9,120만 명으로 나타났다. 각 소수민족의 인구수는 그 차이가 상당히 크다. 오늘날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은 좡(壯)족으로 1,500여 만 명이고, 인구가 가장 적은 민족은 뤄바족으로 2,300여 명에 불과하다. 인구 100만 명이 넘는 소수민족은 17개이며, 10만~100만 명은 15개, 5~10만은 4개, 1만~5만은 12개, 1만 이하는 7개가 있다.
중국은 다민족 국가다. 따라서 각 민족의 단결과 국가의 통일, 안정을 지키는 데 중요한 의의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신중국 정부는 첫째, 민족평등을 견지하고 민족차별과 억압을 반대한다. 소수민족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민족평등에 관련된 일련의 정책과 법령, 조치들을 제정하여 소수민족이 평등한 입장에 설 수 있도록 보장하고, 국가 사무관리에 참가시키며 각급 정치권력 중 평등권을 누리게 했다. 그리고 민족지역 자치를 실행한다.
그리고 둘째로 민족지역 자치를 실행한다. 민족자치란 국가의 지도 아래 소수민족의 집단 거주 지역을 기초로 지방자치정부를 설치, 소수민족 스스로 민족 내부의 지역적 사무를 관리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 소수민족 간부 양성에 힘쓴다. 이는 민족자치 실현에 있어 중요한 사항이다. 정부는 신중국 성립 후 신속히 소수민족 간부양성 시행 방안을 공포하고 전국 각지에 12개의 민족대학을 설립했다. 넷째, 소수민족이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지지한다. 중국의 헌법은 각 소수민족이 고유한 언어와 문자를 사용할 자유가 있음을 규정해 놓고 있다. 다섯째, 소수민족의 풍습을 존중하며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 중국의 헌법은 소수민족이 자신의 풍습을 유지, 개혁할 자유가 있고 타인은 이에 간섭할 수 없음을 규정하고 있다. 소수민족에게 있어서 종교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각 소수민족의 경제, 문화 및 풍속, 습관 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인은 무엇을 먹고 마실까?
중국인과 중국차
중국인에게 있어 ‘차(茶)’는 단순한 음료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인은 귀한 손님이 오면 반드시 차를 대접했고, 차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결혼식 때 신랑과 신부는 어른에게 술과 함께 차를 올리기도 했다. 심지어 ‘여자가 청혼을 받아들이는 일’을 “차를 마시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근세 중국의 문인 린위탕은 “중국인은 차를 즐긴다. 집에서도 차를 마시고 차관에 가서도 차를 마신다. 회의를 할 때도 차를 마시고 다투며 이치를 따질 때에도 차를 마신다. 아침식사 전에 차를 마시고 점심식사 후에도 차를 마신다. 맑은 차 한 주전자만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하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중국인에게 있어서 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품인 것이다.
차는 찻잎의 발효 정도와 색깔로 분류된다. 먼저 발효의 정도로 분류한다면, 발효시키지 않는 불발효차, 10~65% 정도 발효시킨 반발효차, 85% 이상 발효시킨 발효차, 차의 효소를 파괴시킨 뒤 미생물 번식을 유도해 다시 발효가 일어나게 하는 후발효차의 4종류로 나뉜다. 또한 색깔에 따라서는 녹차, 홍차, 청차, 백차, 황차, 흑차, 화차로 구분할 수 있다.
2. 중국의 음식
유구한 역사와 넓은 국토에 걸맞게 중국의 요리 역시 그 역사와 종류가 매우 깊고 다양하다. 하나라의 걸왕이 ‘주지육림’으로 망했다는 역사 기록에서 보듯 중국 요리는 일찍부터 발달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각종 조리법이 발달했는데, 직화구이 ‘번(燔)’, 꼬치구이 ‘적(炙)’, 진흙 등으로 싸서 굽는 ‘포(?)’, 쪄서 먹는 ‘증(蒸)’, 삶아 먹는 ‘팽(烹)’, 날로 먹는 ‘회(膾)’ 등의 방법이 널리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나라에 들어서는 면(麵), 만두 등의 분식과, 떡이나 곡류를 가루로 내어 먹는 방법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수대에는 남북 대운하가 건설되어 남장의 풍부한 쌀이 북방으로 유입되어 화북지방의 식생활이 크게 개선되었다.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수차(水車)가 보급되어 제분업이 발달하였고 이에 따라 분식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도시와 시장이 발달하는 송대에 이르러서는 음식의 종류와 재료가 오늘날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게 된다. 원대 시기에는, 유목민이 세운 국가답게 사슴, 돼지, 염소, 말 등의 고기를 구워먹는 습관이 크게 유행한다. 명대에는 옥수수, 감자, 고추 등이 전래되고 백설탕 등이 등장하며 식탁을 풍성하게 하였다. 청대는 삭힌 오리알인 피단과 베이징오리구이가 유행하였던 시기로, 황실의 식탁에서 그 화려함의 극치를 맛 볼 수 있다.
중국인의 다채로운 생활풍경
한국과 중국의 세시풍속 유람
- 중국의 4대 명절
?춘제: 중국에서는 음력 1월 1일 설을 ‘춘제’라 부르며 우리가 ‘신정’이라 부르는 양력 1월 1일은 ‘위안단’ 또는 ‘신녠’이라 부른다. 설을 전후로 해서 입춘이 시작되므로 중국인들은 설을 ‘봄이 오는 절기’라는 뜻에서 ‘춘제’라 부른다. 춘제 무렵이 되면 거리와 상점에는 새해 음식을 준비할 재료와 설빔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집집마다 대청소를 하고 춘롄[春聯, 빨간 종이에 대구(對句)를 적어 문이나 기둥 등에 붙이는 풍속]과 녠화(年畵,중국 민화)로 집 단장을 하며, 복이 들어오라는 의미로 붉은색 종이에 ‘복’자를 거꾸로 써서 문이나 창문에 붙인다. 춘제 전날인 섣달 그믐밤, 즉 ‘제석’에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가올 새해를 기원하며 밤을 지새운다. 이를 중국에서는 ‘한 해를 지킨다’는 뜻으로 ‘써우쑤이’라 한다.
?위안샤오제: 음력 1월 15일인 정월대보름을 중국에서는 위안샤오제라 부른다. 중국 위안샤오제의 대표적인 풍습은 곳곳에 ‘등’을 달아 장식하고 밤에 형형색색의 등불을 감상하는 것이다. 위안샤오제가 되기 며칠 전부터 거리와 공원, 사찰 등지에는 각양각색의 등을 설치해 어두운 밤을 화려하게 밝힌다. 이 때문에 위안샤오제를 ‘덩제’라고도 부른다. 중국인들은 위안샤오제 아침에 ‘위안샤오’를 먹는다. 위안샤오는 찹쌀가루를 반주해서 그 속에 설탕이나 깨, 혹은 팥이나 고기 등의 소를 넣어 동글게 만들어서 쪄낸 음식이다. 외견상으로는 우리들이 팥죽에 넣는 새알과 모습이 똑같다. 이외에도 위안샤오제에는 공원이나 거리를 중심으로 용춤, 사자춤, 높은 나무다리를 타고 걷거나 춤을 추는 ‘차이가오차오’ 등 다양한 민속놀이가 행해진다.
?두안우제: 음력 5월 5일은 ‘두안우제’로 부르는 단오절이다. 두안우제 행사로는 용선 경주와 쫑쯔를 먹는 풍습이 있다. 용선 경주는 굴원의 자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나와 굴원의 시신을 찾아 헤매던 것에서 기원했다. 오늘날에는 용머리 모양의 긴 카누 같은 배를 타고 강에서 시합을 벌인다. 또한 쫑쯔는 굴원의 시신을 해하지 말라고 물고기에게 던져준 대나무 통의 찹쌀밥에서 유래했다. 이 밖에도 타이완과 홍콩 같은 남부 지역에서는 문에 쑥과 같은 약초를 걸어놓거나 약초 향이 나는 향주머니를 몸에 지니는 풍습이 남아 있고, 또 일종의 광물질로 만든 웅황주를 마시는 풍습도 있다.
?중치우제: 우리에겐 추석이 설과 더불어 가장 큰 명절이다. 중국에서도 ‘중추절’을 ‘중치우제’라고 부르며 ‘춘제’와 더불어 가장 뜻 깊게 보낸다. 중국의 중치우제 풍습은 ‘바이웨’. ‘상웨’, ‘웨빙’ 등으로 대표되는데 바이웨나 상위에는 모두 ‘달’과 관련이 있다. ‘바이웨’는 달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고, ‘상웨’는 달을 감상하는 것이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달맞이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추석 때 송편을 먹는 것처럼 중국 사람들은 ‘웨빙’이란 전통 과자를 먹는다. 송편이 반달 모양을 띠는 것과는 달리 웨빙은 간혹 정사각형 모양도 있지만 대부분 보름달처럼 원형이다.
중국의 극예술
중국의 극예술은 중국문명만큼이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중국의 극예술은 처음에는 서양의 극예술처럼 종교 의식과 관련되어 발생했으나 점차 종교 의식과 멀어지면서 오락과 예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중국의 극예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경극(京劇)일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는 경극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까지 외국인인 우리가 쉽게 접촉하기 어려운 극예술들이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극예술은 크게 경극을 비롯한 각종 전통극과 서양 연극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화극(話劇)’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외에도 그림자극(피잉시)과 나무인형극(무어우시) 등이 있다.
중국의 전통극은 노래와 춤을 매우 중시한다. 이런 점에서 서양의 연극보다는 오페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통극은 중국어로 ‘희곡’이라고 하는데, ‘희’는 놀이를 뜻하며 ‘곡’은 노래를 뜻한다. 즉 놀이와 노래가 결합한 형식이다. 중국의 전통극은 고대 그리스의 희비극, 인도의 범극과 더불어 세대 3대 고전극의 하나로 세계 연극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경극은 천카이거 감독이 만들고 장궈룽이 주연한 영화 <패왕별희>를 통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베이징의 전통극이라는 뜻이지만 베이징 지역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서 가장 성행하는 전통극이다. 하지만 중국에는 경극 외에도 지역에 따라 여러 종류의 전통극, 즉 ‘지방희’라고 부르는 지방극이 존재한다. 현재 중국 전역에서 공연되고 있는 지방극의 종류는 300여 개가 넘는데 그 중에는 영화 <변검>에 나오는 ‘가면 바꾸기’ 기술을 보여주는 쓰촨성의 천극, 쑤저우 일대의 곤극, 상하이 일대의 우러극, 광동 및 홍콩 등지의 월극 등이 있다. 그러나 중국의 전통극은 19세기 말 서양 연극의 영향을 받아 크게 변화한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구문명을 도입하여 중국의 기존 질서를 혁신시키고 국가를 중흥코자 했다. 이들 근대 지식인과 연극인은 어렵고 복잡한 전통극 양식 대신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말을 사용하고 사실적으로 무대를 꾸민 서양 연극에 경도되었다. 이들은 연극을 계몽과 구국의 수단으로 삼고 서양 연극을 도입하여 전통극을 현대화시키고, 서양 연극을 그대로 모방한 ‘화극’을 제작했다.
‘화극’의 경우 처음에는 그 수준이나 내용이 미숙했지만 점차 개선되고 발전된 양식으로 정착되어 갔다. 특히 항일전쟁 시기에는 항일을 선전하고 홍보하는 선전극 역할을 하면서 중국 공산당 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화극’은 전통극에 비해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우수한 극본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창작도 이루어지지 않고 공연도 하지 못해 침체되었다.
전통극과 ‘화극’을 비롯한 중국의 모든 극예술은 문화대혁명이 종결되고 덩샤오핑에 의해 개혁혁명이 천명되자 정치적 족쇄로부터 벗어나 문화대혁명 이전의 지위를 회복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인들의 경제 수준이 향상되고 텔레비전, 영화, VCD 같은 영상매체가 널리 보급되면서 중국의 극예술은 갈수록 관객을 잃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는 문화적 다양화와 다원화, 신세대의 탈정치화 경향과 개인주의의 확신 등 새로운 시대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시기다. 이러한 문화적 격변기를 맞이해 중국의 연극인은 아직 현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연극이 시련과 도전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비록 중국 극예술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중국 극예술에는 중국인의 정서와 문화가 녹아 있다. 따라서 중국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극예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다.
중국의 대중문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 중 순수한 한국문화는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실로 다양한 곳에서 수입된 문화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떤 한 나라의 문화란 다른 나라들로부터 전해져 온 여러 문화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버무려 새롭게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국 대중문화의 실체를 알려고 할 때 중국만이 지니고 있는 그 무엇을 발견하려고 해선 힘들다. 그보다는 비빔밥을 상상하자.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는 식당마다 공통되는 것도 있고, 서로 다른 것도 있다. 맛 역시 재료의 종류나 비율에 따라 달라진다.
중국의 대중문화는 예전에는 범 중화권인 타이완, 홍콩을 포함하고 최근에는 한국과 일본까지 포함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재료를 취한 비빔밥과도 같다. 이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의 배합 비율은 시대마다 다르지만 비빔밥이라는 본질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중국의 대중문화는 국경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개방적이다.
?중국인의 노래
한국이나 중국 모두 19세기말부터 시작된 근대화 이전에는 전통문화를 향유하며 살았다. 그러다 서구 열강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고, 서구문화를 수용한 결과 오늘날의 문화를 이루게 되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음악, 특히 노래는 대단히 일상적이어서 각 시대, 지역을 살았던 민초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먼저 근대화 직전에 중국의 민초들이 불렀던 노래, 민가부터 살펴보자.
중국은 참 넓다. 그런 만큼 민가 역시 지역마다 다르고, 다양하다. 중국민가는 오늘날에도 새로운 음반이 나오고 있는데 전통 민가에서 분위기만 빌려왔을 뿐 악곡의 기본 형태는 서양식 음계 구성을 따르고 있어 사실 전통 민가와는 많이 다르다. 중국의 전통 민가를 들으면 낯설고 어색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체로 으뜸음이 없고(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발성법과 반주 악기가 특이하다는 점 등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다 근대에 들어와 중국음악은 서양과의 접촉이 잦아지고 서양의 악곡이 전해짐에 따라 서양식 음계를 기초로 한 근대적 악곡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약 17년간은 마오쩌둥이나 혁명에 대한 찬양이 주류를 이뤘지만 그 와중에서도 다양한 가곡들이 창작, 유통되었다.
10여 년 동안 광장에서 비판운동을 벌이고 어록가를 부르도록 강요받았던 중국인들은 문화대혁명이 끝날 무렵에는 정서적으로 대단히 황폐해지고 지쳐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중국인의 정서를 달래준 사람은 타이완 출신의 작은 체구의 여가수 덩뤼진(등려군)이었다. 정치 권력에 의해 강요된 어록가를 부르던 중국의 대중은 스스로 덩리쥔을 선택했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일종의 반발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대륙의 사회주의 중국에서 덩리쥔의 노래는 최초의 대중가요였다.
?중국의 영상문화
- 한류와 중국의 대중문화
한류를 생각하기에 앞서 약 100여 년 전 한국의 근대화시기를 잠시 돌아보자. 심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면이 있겠지만 당시 한국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통로는 일본이었다. 이 말은 한국의 근대화가 일본에 종속되어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은 한국의 입장에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결국 같은 문물이라 해도 나라마다 받아들이는 양상이 같을 수만은 없다.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에 있는 나라라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때는 그 나라만이 가진 독특한 여러 배경들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영향을 준 쪽이라고 해서 우쭐하여 다른 나라를 깔보는 것은 적절치 못한 행동일 것이다.
한류 역시 그러하다. 한류 붐을 처음 일으킨 것은 아마도 TV 연속극 <사랑이 뭐길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연속극에서 한국과 중국의 시청자들이 주목했던 것은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이후로도 한국의 최고 스타와 중국에서의 한류 스타가 일치할 때도 있었지만 서로 다른 사람인 경우가 더 많았다. 만일 한국의 대중문화 그 자체가 그대로 중국에 심어지는 형태였다면 이런 현상은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중국인들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한류를 선택했던 셈이다. 다시 말해 문화 판매자인 한국이 다양한 상품을 제시하면 문화 구매자 중국이 골라서 샀던 것이다.
한국인에게 한류는 분명히 가슴 뛰는 일이다. 그러나 한류의 원인을 한국의 대중문화가 우월하다는 것에서 찾는다면, 그 관점에서 꿈꿀 수 있는 한류의 미래는 기껏해야 중국 등 다른 나라에 대중문화를 계속해서 팔아 부가가치를 얻는 정도를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동아시아인의 문화적 공통성과 이를 소통 가능하게 만든 미디어의 발달 등 좀 더 객관적인 것에서 한류의 원인을 찾으려 할 때 한류 역시 동아시아인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가 될 것이고, 한국은 그 제공자로서 더 높은 세계사적 의의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인들에게 두루 존경받는 고전 『맹자』는 첫 구절부터 "어째서 이로움을 말하는가. 역시 어진 것과 옳은 것이 중요할 뿐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