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 조선

   
박재광
ǻ
글항아리
   
18000
2009�� 02��



■ 책 소개
전통시대 핵심 전쟁무기들이 펼치는 화력의향연! 우리 민족이 가장 장기로 여기는 활과 국가적 사업으로 개발돼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화약병기, 다연장로켓의 원조인 화차, 해상에서의탱크 거북선, 조선 최고의 전함 판옥선, 신관 장치로 자체 폭발하는 비격진천뢰 등 고구려부터 조선까지 전통시대를 대표하는 첨단무기들을 열전형식으로 다루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2008 우수저작출판지원사업 당선작으로, 지난 10여 년간 진행해온전통무기 및 전쟁에 대한 연구를 집약함으로써 전통시대를 대표하는 무기들이 개발되고 사용된 역사적 배경, 작동원리, 파괴력, 활용 실례 등을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활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화력 무기를 위주로 다룸으로써 최무선의 화약병기부터 대원군이 개발한소포?중포까지의 발전사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 책은 조선시대의 무기 개발과 관련된 움직임들을 상세히 소개함으로써 바깥으로드러나는 정치사회사적인 흐름과는 달리 내부적으로 조선의 운영자들이 어떤 고민과 전망 속에서 외세에 맞서고자 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새롭게등장하는 무기들의 과학적 원리를 설명하고, 관련 도판과 도표를 통해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써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넘어 전통무기의 역사와 과학을독자의 뇌리에 깊이 있게 각인시킨다.


■ 저자 박재광
1964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건국대 사학과를 거쳐 성균관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0년부터 지금까지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으로 일하고 있으며,성균관대·건국대·중앙대·한국외대 등에서 한국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전쟁과 전술, 무기 발달을 바탕으로 한우리 민족의 대외 항쟁사와 이순신·권율 등과 같은 전쟁 영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그동안 발표한 논문으로 「임진왜란기 일본군의 한성 점령과 노원평전투」「임진왜란기 朝·明·日삼국의 무기체계와 교류」「여말선초의 화약·화기 제조에 대한 일고찰」「전쟁과 문화: 전쟁을 통한 동서양의 문화교류」 등이 있고, 공저로는 『충무공이순신』『임진왜란과 한일관계』『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망암 변이중 연구』『우리나라의 전통무기』 등이 있다. 앞으로도 여러 문헌자료를토대로 우리의 역사를 흥미롭고 사실감 있게 재구성해 독자들과 만날 계획이다. 


■ 차례
화약 개발을 둘러싼 모험 - 최무선에서 세종대기술 혁신까지 
세계 해전사의 흐름을 바꾼 최무선 - 대형 화포와 해전술 
사거리 1300보 대형 화기의 개발 - 임진왜란에서 조선을구한 무기들 
휴대용 대포의 출현 - 세총통부터 승자총통까지 
일본의 조총 기술을 따라잡다 - 진화하는 조총 
달리는 불, 나는창 -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 주화와 신기전 
대량살상 무기의 탄생 - 우리나라 최초의 다연장 발사기, 화차 
별처럼 흩어지는 무서운쇳조각들 - 조선의 최첨단 무기, 비격진천뢰 
스페인에서 건너온 고성능 신식 화포 - 전란 극복을 위해 도입된 신무기, 불랑기
달리는 말 위에 서서 3연발을 날리다 - 연발식 권총의 원조, 삼안총 
단조 기술이 이뤄낸 포신의 혁명 - 신제작 기술이 적용된화포, 쌍포 
대원군의 국방 강화 의지가 만들어낸 신무기 - 고도로 실용적인 중포?소포 
물의 압력을 이용한 시간 지연 기폭장치 -조선판 수중 기뢰, 수뢰포 
온몸이 무기인 돌격 전함 - 해상의 탱크, 거북선 
신비의 전함을 둘러싼 쟁점을 해부한다 - 용머리,철갑선 내부 구조 
조선은 왜 바닥이 평평한 배를 만들었나 - 조선의 주력 전함, 판옥선 
포위된 진주성으로 날아든 구원의 행글라이더-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기, 비거 
물소의 뿔을 반대로 휘어 만든 고탄력 - 한민족 최고의 장기, 궁시 
“내가 투구를 겨냥해 맞춰벗겨지면, 재빨리 면상을 쏘게” - 조선의 궁시 
당나라 황제가 욕심낸 신라의 쇠뇌기술 - 활의 또다른 변형, 쇠뇌 
여자도 쏠 수있는 10연발 수노 - 조선시대의 쇠뇌 




화염 조선

세계 해전사의 흐름을 바꾼 최무선
대형 화포와 해전술

최무선은 고려 말 화약병기의 개발자이자 왜구 소탕의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그가 어떤 전투에 참여했었던가를 상세히 밝혀내긴 어렵지만, 몇몇 전투에서 그의 활약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진포해전이었다. 고려 우왕 3년(1377) 10월, 최무선은 화약병기를 제조해 빈번하게 침범해오는 왜구를 격멸하려는 의지를 나타냈고, 이를 위해 화기 제조기술을 보완하기 위한 화통도감을 설치하자고 건의했다. 그리고 바로 이 화통도감에서 대장군?이장군?삼장군?육화석포?화포?신포?화통 등 18종의 화기를 제조해냈다.


이 화기 대부분은 화약의 폭발적 힘에 의해 화살이나 탄환 등 발사물을 날려 보내는 장약폭발식 화포이다. 이들 대부분은 크고 육중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런 까닭에 초기에는 주로 이동의 필요성이 적은 고정포로서 요새나 성곽 방어에 사용됐다. 특히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의 자연 조건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촉진시켰다. 하지만 해상에선 달랐다. 크고 무거운 화약병기도 일단 선박에 거치시키면 그 이동에 따라서 이동성을 갖게 돼, 지상 전투에는 그다지 효용성이 없던 대형 화포가 해전에서는 훌륭한 성능을 발휘했다. 특히 당시 화포에서 쏘는 발사물로는 대형 화살을 사용했기 때문에 모두 목선(木船)이었던 군선(軍船)들은 화약 병기에 의해 쉽게 파괴되었고, 해전의 성격상 멀리 떨어져 있는 적선을 먼저 공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작용했다.


화통도감을 통해 무기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해갔다. 최무선은 화기를 적제하고 활용할 전함을 직접 건조하기도 했다. 고려는 일찍이 일본 정벌을 통해 전함 건조 실력을 인정받았고, 공민왕대에 이미 전함을 건조해 화통을 발사한 적도 있었지만, 최무선은 기존의 고려 전함이 지닌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해 새로운 전함인 누선(樓船)을 건조했던 것이다. 고려의 배는 돛을 단 평저선(平底船)이라는 점이 특징이었다.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우리나라 해안에서는 썰물 때 배가 옆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폭이 넓고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배에서 화포를 발사하면 폭발 반동력에 의해 큰 충격을 받아 배가 한쪽으로 기울며 흔들린다. 특히 재료가 나무로 돼 있고 배수량이 일정한 규모일 경우 더 심한 진동을 받게 된다. 이러한 점은 배의 안정성뿐 아니라 화포의 명중률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데, 평저선은 포 사격시 발생하는 진동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결국 최무선은 화포 운용에 적합한 선박을 건조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시켰던 것이다.


1380(우왕 6)년에 일어난 진포해전, 그로부터 3년이 지나 남해에서 발생한 관음포 해전에서 화기로 무장한 고려의 전함은 왜구에 그 위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1380년 8월, 왜구는 5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전라도 진포를 거점으로 삼아 내륙에 침입했다. 당시 고려 수군은 전선이 왜선에 비해 5분의 1밖에 안될 정도로 열세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화포가 있었기에 무기 체계 면에서는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고려 수군은 예전이라면 왜선의 위세에 눌려 감히 근접할 엄두도 못 냈겠지만, 화포로 무장한 덕에 초대형 선단을 향해 대규모 화포 공격을 가할 수 있었고, 곧 적선 500척을 전소시켰다. 이 전투는 기존 해전에서 기본 전술이었던 당파전술(撞破戰術)에 한 차원 높은 함포전술이 가미되어 새로운 변화를 이뤄냈다. 고려는 승리를 이끌어내 자신감을 되찾았고, 이를 토대로 해상 방어를 적극화하여 정지 장군을 해도원수로 임명하고 해상 초계도 강화했다. 특히 화포를 운용함에 있어서도 시험적인 수준을 넘어서 응용 단계에 도달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맞닥뜨린 또 하나의 전투가 1383년에 벌어진 관음포해전이었다. 진포해전에서 대패한 왜구는 보복을 가하기 위해 120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곧 다시 남해를 침입해왔다. 여기에는 정지 장군이 출정해 화포와 궁시를 사용함으로써 적선 17척을 불살랐다. 이 해전에서 보여준 함포의 전술적인 운용은 진포해전보다 진일보한 것이었다. 진포해전의 경우 정박돼 있는 고정 표적에 대해 함포 공격을 가한 것이라면, 관음포해전은 해상에서 이동하고 있는 표적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달랐다.


이후 고려는 해전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수세적인 작전에서 적극적인 공격 전략으로 전환했고,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론이 대두하기까지 했다. 결국 1389(창왕 원년)에 경상도 원수 박위가 전함 100척으로 출정해 대마도를 정벌했다. 당시 고려군은 대마도 해안에 정박해 있던 적선 300여 척을 소각하고, 연안에 있던 주거 시설을 모조리 불태웠다. 이후 왜구가 침략해오는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달리는 말 위에 서서 3연발을 날리다
연발식 권총의 원조, 삼안총

화약병기의 흐름을 살펴보면 소총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해왔다. 14세기의 핸드캐넌(Hand Cannon)을 소형화한 이래, 때로는 소총 이상의 스피드로 발전을 가속화해온 것이 권총이다. 특히 화승총은 발화 방식이 불편해 기병용으로는 적당치 못했다. 그런 까닭에 기병임에도 사격 시에는 말에서 내려서 발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발화 장치가 개량되면서 기병용으로 활용이 점차 늘었는데, 특히 19세기 초에 뇌관식 격발 장치가 발명되자 활용 폭이 더욱 넓어졌다. 바로 이때에 연발총 개념을 적용한 획기적인 발명품이 등장했다. 1832년 개발된 새뮤얼 콜트의 리볼버 연발총이 그것으로, 1862년 리처드 개틀링의 기관총과 함께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로 명성을 떨쳤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연발총 개념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화약병기가 있는데, 삼안총 혹은 삼혈총으로 불리는 화기가 그것이다.


삼안총은 기본적으로 불씨를 손으로 점화해서 탄환을 발사하는 지화식 화기의 일종이지만, 세 개의 총구멍 또는 총신이 하나의 손잡이에 묶여 있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 때문에 ‘삼안총’, ‘삼혈총’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보통 인마(人馬) 살상이 주 목적이었지만 전투나 훈련시에는 소리를 이용한 신호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에서의 삼안총 제조 시기는 그 기록이 명확하지 않으나 1593년경으로 추정된다. 『선조실록』1593년 12월 2일조 비변사 장계에서 그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나오고 있다. 당시 비변사는 전투에 가장 필요한 화기가 조총이고, 그 다음이 삼혈총이라면서, 조총 제조는 제작 공정상 지극히 어려워 숙련된 장인이 아니면 완성품을 얻기가 어렵지만, 삼혈총의 경우는 어렵지 않기에 지방의 병사들에게 철물을 이용해 제조하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후에도 훈련도감 군사들이 부족한 조총 대신 삼안총?승자총통을 가지고 훈련하고 있다는 기사나, 조정에서 중앙의 화기 제조가 수요에 미치지 못하자 지방에서 조총?삼안총 제조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는 기사가 실록에서 발견된다.


기본적으로 삼안총은 당시 일반 총들과는 달리 연발총 개념이 적용된 화기로서 구조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차별되는 점이 다관식 화기라는 것이다. 기존의 총들은 모두 하나의 총신으로 구성돼 있고, 화약과 발사물 또는 탄환을 총구 쪽에서 장전한 다음 심지에 불을 직접 점화하여 발사하는데, 재장전 후의 발사도 동일한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자연히 사격 속도는 느려졌고, 재장전 시 적의 공격에 노출되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이 노력한 결과 세종 때에 ‘일발다전법’ 기술이 완성됐던 것이다. 이후 발사물이 화살에서 탄환으로 대체되면서 기존의 총신 세 개를 병렬로 연결함으로써 더욱 효과를 높이고자 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 삼안총이다.


우리나라 삼안총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동시에 주조된 하나의 총신에 총구 세 개가 뚫려 있는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세 개의 총신을 각각 주조하여 횡으로 붙인 형식이며, 나머지 하나는 세 개의 총신을 붙이되 그 외부에 죽절(마디)을 부착하여 파열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런 형태들은 기본적으로 중국제와는 다른 것이다.


삼안총이 지니는 두 번째 특징은 총신이 매우 짧고 가벼워 기병용으로 사용하기에 편리하다는 점이다. 1605년 순변사 이시언은 선조에게 “삼안총이 말 위에서 쓰기에 아주 좋으며 적을 두렵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고했다. 기병은 상대적으로 화기 사용에 있어서 제약이 많았다. 따라서 한꺼번에 세 개의 총신에 장전한 후 세 차례에 걸쳐 연속 사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삼안총은 기병 전술 운용에서 매우 유용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 무예교범서인 『무예도보통지』의 마상재(馬上才)에도 바로 삼안총이 사용되었다.


현재 삼안총은 상당히 많은 수량이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삼안총으로 보물 884호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명문이 확실히 명기된 삼안총으로는 최고에 속하는 국방과학기술 문화재로 평가된다. 화약병기 발전에서 조총은 매우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이에 따라 전투 양상도 새로운 형태를 띠어갔다. 그러나 조총 역시 장전 및 발사과정이 간단치 않아 일정 시간 내에 사격할 수 있는 횟수가 활보다 오히려 더 적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여러 개의 총신을 하나로 묶어놓아 연발 사격이 가능하도록 다관식 연발총을 제작한 것이다. 따라서 연발총의 원조는 삼안총이라 할 수 있다.


온몸이 무기인 돌격 전함
해상의 탱크, 거북선

거북선이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한 것은 조선초기다. 1413년(태종 13년)에 “국왕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했다”(『태종실록』권 25, 태종 13년 2월 계사)는 구절이다. 또 1415년(태종 15)에는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올린 상소 중 병비(兵備)에 대한 내용에 “거북선은 많은 적과 충돌해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히 결승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태종실록』권 30, 태종 15년 7월 을미)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초기에 거북선에 대한 구상이 있었던 듯하나, 그 형태와 규모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다. 그후 180여 년간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이순신이 쓴 임진왜란 당시의 『난중일기』 2월 8일 기사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베 29필을 받다”라는 기록이 있고, 이후 3월 27일에는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으며, 4월 12일에는 식수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현자포를 쏘아봤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순신이 해전에서 승리한 후 올린 장계 등에도 거북선에 대한 언급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거북선은 충무공 이순신이 건조한 전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굴된 문헌에 등장하는 거북선은 일반적인 외부 형태와 전투력에 관해서만 기록되고 있을 뿐, 실제 건조에 필요한 세부적인 치수는 나와 있지 않다. 따라서 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이 말한 거북선의 관계도 확실히 알 수 없고, 단지 임진왜란 때 거북선이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서 군관 나대용 등이 실제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정도다.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돌격 전선으로서 기능을 발휘함에 따라 전란 후에는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는 거북머리로 되고, 치수도 일반적으로 장대해졌다. 임진왜란 후 200여 년이 지난 1795년(정조 19)에 정조의 명에 따라 이순신과 거북선에 관한 자료를 총망라해 정리한 『이충무공전서』에 ‘전라좌수영 거북선’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적인 치수가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 이는 거북선의 연구에 있어서 가장 상세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거북선의 전함으로서의 우수성을 든다면 내부 전투원을 보호할 수 있다는 점과 화포 및 방호력의 강력함을 꼽을 수 있다. 거북선은 전투 개시 후 적 함선 대열에 뛰어들어 돌격전을 벌임과 동시에 대포를 쏘아서 적의 전열을 무너뜨리는데, 이를 위해 두터운 재질로 제작되었으며, 적의 침입으로부터 승무원을 보호하고자 개판을 씌우고 송곳을 꽂아놓았다. 또 전후좌우에 14개의 화포가 장착되어 있어서 적선에 의해 포위된 상황에서도 공격이 가능했다. 특히 『난중일기』를 보면 거북머리의 입에 포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어 전면 화포 공격까지도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개판에 철판이 씌워져 있어 방호력이 우수했기 때문에 적선이 접근전을 펼쳐도 쉽게 침입할 수 없어 거북선이 맹렬히 돌진하여 닥치는 대로 포를 쏘고, 용두를 이용함으로써 당파전술을 펼칠 수 있었다. 즉 해상에서의 탱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거북선에 관한 연구는 유물 발굴과 정확한 모양 및 기능의 규명과 복원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됐다. 전자는 거북선이 침몰했다면 나무는 썩어 없어지고 철물은 부식돼 조류에 휩쓸려 사라졌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아직까지는 비관적이다. 따라서 거북선에 관한 논의는 문헌 해석과 유추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아직까지 논란 중이지만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판옥선과 더불어 운용해온 돌격전함이었고, 사천해전에서부터 투입되어 한산대첩, 부산해전 등 왜선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숙종대까지 5척이었던 거북선은 1782년(정조 6)에는 무려 40척에 달했다. 그 이후에는 척 수가 점차 줄어들어 1809년(순조 9)에는 30척, 1817년에는 18척의 거북선을 보유했다. 한편 고종 때까지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어 앞으로 관련 자료의 새로운 발굴을 기대해본다.


물소의 뿔을 반대로 휘어 만든 고탄력 무기
한민죽 최고의 장기, 궁시

활은 대나 나무를 반달 모양으로 휘어서 두 끝에다 시위를 걸고 화살을 활 위에 걸어 당겼다 놓으면 줄의 탄력을 받아 화살이 튀어나가는 원거리 무기 중의 대표적인 것이다. 전투 무기이면서 사냥 도구였던 활은 선사시대부터 화약병기가 출연한 이후까지도 사용해온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장기라 할 수 있다. 민족의 별칭이 활과 관련된 단어에서 나왔을 만큼 우리는 예로부터 활과 인연이 깊다. 고대 한민족의 별칭인 동이족(東夷族)의 이(夷)는 큰 활을 의미하는 대(大)자와 궁(弓)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다. 우리나라 활의 전통은 고조선시대부터 시작됐다. 중국 사서에 고조선에서 사용한 활을 단궁(檀弓)이라고 기록한 것이 있다. 박달나무로 만든 활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단군 조선에서 만들고 사용한 활이라고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기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삼국시대의 활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활 쏘는 무사의 모습이라든가 기마수렵도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고구려의 맥궁(貊弓)은 중국 역사책인 『삼국지위지동이전』에 “고구려에서 맥궁이라 불리는 좋은 활이 산출된다”고 소개될 정도로 유명했다. 당시의 활은 길이가 긴 장궁(長弓)과 짧은 단궁(短弓)으로 구별됐다. 단궁은 말 위에서 쏘기에 적합한 기마용의 활로 길이가 1미터를 넘지 않는다. 몸체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활이 굽는 부분에 짐승의 뼈를 얇게 다듬어 덧붙여 탄력성을 높였다. 이 때문에 합성궁(合成弓) 혹은 각궁(角弓)이라 불린다. 또한 활은 모양에 따라 직궁(直弓)과 만궁으로 구분한다. 직궁은 탄력이 좋은 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양쪽에 줄을 걸어 약간 휘게 만드는 단순한 형태다. 이에 비해 만궁은 본래 굽은 활채를 그 반대쪽으로 강하게 밀어 굽혀서 시위를 건 것으로서, 시위를 벗기면 활채는 시위를 걸었을 때의 굽은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굽어진다. 이 만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소뿔, 참나무, 소 힘줄, 실 등의 여러 재료를 복합해서 만든 각궁이었다. 독특한 기술로 제작한 각궁은 그 탄력성이 외국의 활에 비해 탁월했다.


각궁은 물소의 뿔로 만들어진다.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는 살지 않으므로 지금의 태국이나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듯 구하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기본 재료로 삼은 것은 활채 안쪽에 붙여서 활을 당겼을 때, 당시의 다른 어떤 재료보다도 탄력이 좋고 오래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공하기도 좋고 활채의 한쪽 마디를 이음매 없이 댈 수 있을 정도로 길이가 길었다. 물론 각궁의 강력한 힘의 비밀이 반드시 무소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활채의 바깥쪽에 소의 힘줄을 붙이는데 이 힘줄은 활을 당겼을 때 강한 인장력으로 활채를 당겨서 활이 부러지는 것을 막고 복원력을 극대화시켜준다. 이처럼 각궁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크기가 작아 다루기가 편리한 데다 위력이 대단해 널리 사용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활이 우수한 이유는 우선 사계절이 뚜렷하여 탄력성 있는 활대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산재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전투 방식에서 기마전(騎馬戰)과 수성전(守城戰)이 널리 유행한 것에 있다. 삼국시대의 전투 방식은 보병과 기병이 합동전술을 펼치는 보기전(步騎戰)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기본적인 전투는 보병이 전담했으나, 승패를 판가름하는 것은 결국 기동성을 바탕으로 하는 기병의 몫이었다. 이런 까닭에 말을 타면서 전투를 치르는 기사(騎射)가 중시되었고, 그에 부응하여 기사용의 활, 즉 단궁이 발달했던 것이다. 한편 삼국의 전투는 산성을 공취하고, 이를 방어하는 수성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수성전에서는 단병접전(칼이나 창 따위의 단병으로 적과 직접 맞부딪쳐 싸움)보다는 원거리 공격을 최우선으로 한다. 이러한 공격에 적합한 병기는 장궁이었고, 이는 다시 활쏘기와 활의 발달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게 했다. 이런 이유에서 고구려의 활은 맥궁, 호궁, 각궁 등으로 불리며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울러 삼국시대에는 관리의 등용 수단으로 활쏘기가 널리 활용되었으며 고구려의 경당에서도 기사를 가르쳤고, 이후의 무인 선발에서도 궁술을 기본적인 시험 과목으로 채택했다. 『삼국사기』를 보면 군왕의 기질로 기사를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 역시 삼국시대에 이를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시했던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기사를 중시했던 까닭은 활쏘기와 말 타기가 전투능력과 바로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