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이슬람의 종교적 관념이 빚어낸 커피와 커피 문화가 역사의 무대에 첫선을 보인 서아시아 지방의 "커피의 집"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그 후 런던으로 건너간 커피는 "커피하우스"로 변신하여 근대시민사회의 제도를마련하는 데 기여했으며, 파리에서는 프랑스혁명의 거점이 된 카페의 모습으로 자유, 평등, 박애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커피는 제국주의 열강의식민지 착취와 인종차별에도 깊이 개입했으며, 급기야 독일에서 시민사회의 돌연변이라고 할 파시즘을 낳고 만다. 커피에 매료된 저자는 이렇게,커피라는 상품의 역사를 현대 문명이 걸어온 길 위에 겹쳐 놓으며, 세계사의 흐름을 그려 보인다.
■ 저자 우스이류이치로
도쿄교육대학 독일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니가타대학 교양부 조교수를 지냈으며, 지금은도쿄대학 교양학부(종합문화연구과 언어정보과학 전공) 교수로 있다. 저서로 『네티 라드바니에서 안나 제거스로』 『바하오펜론집성』 『빵과 와인이돌고 신화가 돌고』 『말라버린 나무의 언어』 『기억과 기록』 등이 있다.
■ 역자김수경
중앙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요미우리신문사 서울지국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 에이전트와 번역가로 활동하고있다. 옮긴 책으로는 『청춘이란』 『여자 나이 50』 『기획서는 한줄!』 등이 있다.
■ 차례
제1장수피즘과 커피
아라비아 펠릭스 - 행복한 아라비아 | 커피의 탄생 | 메카 사건 | 커피의 집
제2장 커피 문명의 발생적 성격
아라비아 모카 | 카이로의 거상 | 레반토 상인 | 네덜란드 상인
제3장 커피하우스와 시민사회
커피하우스와 공공성 | 자유에 깨인 국민 | 시민의 영어회화교실 | 갓 볶은 숯검정의 패퇴
제4장 검은 혁명
루이 14세와 국제정세 | 커피 외교 | 카페오레 | 커피의 출현 | 행복한 마르티니크 | "니그로의 땀" | 배우의 첫 연기 | 한겨울의 파리 | 아지테이션카페의 성쇠기 | 검은 신주
제5장 나폴레옹과 대륙봉쇄
나폴레옹 | 프리드리히 대왕과대용커피 | 커피와 설탕의 세계사적 의의 | 베를린의 콘디토라이 카페 | 브라질 산지의 목소리
제6장 독일 동아프리카 식민지
식민지를찾아서 | 독일산 커피 플랜테이션 | 동아프리카의 임금노동자 | 마지마지 봉기 | 발터 라테나우 | 킬리만자로와 모카 | 커피 재배의 성과
제7장 현대국가와 커피
근대 전쟁과커피 | & 독일판 검은 혁명 | 광기, 암살, 폭동 | 초열지옥
마지막 장 검은 홍수
제2차세계대전 | 검은 격류 | 커피, 다시 돌다
지은이의 글
참고문헌
커피가 돌고 세계史가 돌고
수피즘과 커피
커피의 탄생
우리는 여기서 ‘커피의 탄생’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도 세계 각국에서 비슷한 울림으로 불리고 있는 커피라는 명칭의 원인이 된 아라비아어의 ‘카와(Qahwa)’라는 단어는 커피가 나오기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혼란을 감수하고 써보면, 카트도 카와이고, 와인도 카와다. 따라서 ‘커피의 탄생’이란 나중에 커피로 불리게 되는, 즉 아프리카의 ‘부누(bunnu)’라고 불리는 커피콩을 이용해 만든 음료가 아라비아어의 ‘카와’라는 명칭과 결합되면서 이슬람 문화권에 정착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럽의 사전에는 ‘커피(카와)’가 본래 와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의미로 ‘혐오’, ‘식욕이 없다’, ‘조심하다’ 등을 들고 있다. 게다가 카와란 커피이고 와인이고 카트이기도 하다고 덧붙인다. 아라비아어를 모르는 사람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도대체 카와란 무엇인가?
카와는 Q와 H와 W의 3개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어근이라고 하는데, 모음을 표기하지 않는 아라비아어에서는 어근이 어떤 특정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없애다, 적게 하다, 조심하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알코올인 와인도, 각성제 같은 카트도 그리고 커피도 한 가지 측면에서는 같다. 음식에 대한 욕망을 없애주는 것이다. 와인을 식전주로 이해하는 현대인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와인을 카와라 부르며 즐겨 마셨던 사람들은 오히려 식사를 피하려고 와인을 마셨다.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커피가 생기기 전에는 오랫동안 카와라고 하면 가벼운 백포도주를 떠올렸다. 그리고 새롭게 탄생한 커피는 일시적으로 카트와 경쟁을 한 끝에 카와라는 명칭을 점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실 번거로운 문제가 숨어 있다. 이슬람 세계는 이미 알다시피 와인을 금지한 사회이다.
실제로 이슬람 세계에서 커피가 정당성을 확보할 때까지 많은 곤란을 겪게 되는데, 이때 커피를 옹호하는데 앞장 선 것이 이슬람 신비주의 수도사, 수피들이었다. 커피는 참으로 별난 음료이다. 대체로 몸에 나쁘다. 마시면 흥분하게 되고 잠들지 못한다. 식욕도 사라진다. 그래서 살이 빠진다고들 하지만, 그런 커피의 네거티브한 특성을 그대로 포지티브하게 받아들여서, 세계로 전파되는데 기여하한 것이 바로 수피들이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면 몸에 나쁘다는 것은 딱히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하려고 커피를 마시고, 잠을 자지 않으려고 커피를 마시고, 식욕을 줄이려고 커피를 마신 것이다.
수피즘의 정신과 깊게 합치하여 수피즘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받은 커피는 대수롭지 않게 마셔버리는 음료가 아니다. 수피에게 있어서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이념의 카와를 받들어 누린다’는 뜻이다. 커피는 알라신의 백성이 숨겨진 신비를 보고 신의 계시를 받아들일 때 마시는 것이다. 커피는 소금과 빵처럼 신성시되었다. 소금과 빵은 예로부터 신성시되어 오면서 ‘소금과 빵’이라는 표현이 손님에 대한 후한 대접을 상징하게 된 데 반해, 역사에 새롭게 등장한 커피가 순식간에 그 위상을 나란히 하면서 손님에 대한 충성과 안전을 보장하는 후한 대접의 상징이 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즉, 어느 집에 초대되어 커피를 대접받은 손님은 반나절 동안의 절대 안전을 보장받으며, 서로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 커피를 같이 마시는 것은 동맹의 시작과 다름없다는 등 생활 속의 의미 부여가 이루어졌다. 이것이 진전되면서 유럽인이 와인을 마실 때 그러는 것처럼, 커피는 우선 주인 쪽에서 먼저 입을 대고 맛을 표현해야 한다든가, 혹은 마지막 커피는 길을 떠날 징조라는 식으로 일상생활 속의 예의범절이 성립하게 된다.
커피의 집
이집트 카이로에서 예멘의 수피들이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초였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는 1554년, 하쿰과 샴스라는 시리아인에 의해 두 곳의 ‘커피의 집’이 지어졌고, 그 수는 점점 더 늘어났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커피의 본성과는 모순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즉 현세 부정의 화신으로 비사교적이었던 수피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명명된 카와가 사교의 장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커피 본래의 ‘사명’은 모스크나 수도원의 숙소에서 밤에 성인들이나 세속의 신자들이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성스러운 시간에 마셔서 잠을 쫓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라비아에서 생긴 ‘커피의 집’이라는, 커피와 함께 유럽 시민의 생활에 중요한 흥취를 더한 이 제도 또한 지극히 이슬람적인 제도이다. 순식간에 아라비아 세계를 석권한 커피의 집이 하나의 산업으로서 널리 확산된 데는 이슬람 세계 사람들의 정신적, 정치적, 경제적, 그 외에도 다양한 요인이 있었다.
‘커피의 집’의 가장 큰 매력은 새로운 사교장으로서의 역할이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예부터 사교장으로 대표적인 것은 공동 목욕탕이었다. 하지만 아라비아의 공동 목욕탕이 아무리 자유로운 사교의 장으로서 매력을 가졌다고 해도, 한편에서는 ‘모의의 자유’, ‘마약의 자유’, ‘동성애의 자유’도 존재했기에 한결같이 호평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신참인 커피의 집에는 출입을 꺼릴 만한 악평은 없었다. 커피의 집은 공동 목욕탕처럼 공적이지도 않고 사적이지도 않은 독특한 공동 영역을 형성했고, 그곳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결국 커피의 집에는 종교계나 정계의 고위직 인사들도 드나들기 시작했고, 더불어 학자나 시인이 모여드는 ‘인식의 학교’가 되어 이슬람 사회 속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당한 제도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술에 취하지 않은 말짱한 정신으로 대화를 나누는 커피의 집에는 신분제 사회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유럽의 근대시민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새로운 공론의 무대가 되어야 할 제도가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었다.
커피하우스와 시민사회
커피하우스와 공공성
1652년, 런던의 한 구석에 첫 번째 커피하우스가 탄생했다. 레반토를 무대로 활약하던 상인 다니엘 에드워즈가 데리고 있는 시종인 시칠리아 출신의 파스카 로제는 주인을 위해 매일 아침 커피를 끊였는데, 그 신기한 습관은 많은 친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느라 반나절을 통째로 허비하는 날이 많았던 그는 시간을 잡아먹는 놀이에 종지부를 찍어보려고 로제에게 커피 가게를 열어주었다. 이후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순식간에 수를 불려갔다. 그렇다면 커피하우스 문화가 번성한 원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로제의 커피하우스 광고 카피를 보면 해결의 열쇠가 되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다. ‘공적으로(publiquely)’라는 단어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적으로’란 무엇인가? 스튜어트 왕조의 궁정에 공적으로 커피 드링크를 바친다는 의미도 아니고, 서민이 마시는 커피를 정부에서 세금을 써가면서 관리해준다는 의미도 아니다. 런던에는 새로운 공적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민적 공공성의 세계, 즉 시민사회이다. 로제, 아니 에드워즈는 이 새로운 공적 세계의 한가운데에 커피하우스를 던져 넣은 것이다. ‘공적으로 만들어 파는 커피 드링크’라는 광고 카피는, 커피가 이슬람 세계의 ‘검은 잠잠성수’에 필적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런 식의 시의적절한 문구였던 것이다.
대영제국은 일곱 군데 바다에서 네덜란드와 경쟁하는 상업자본주의 국가였다. 상인들은 인도 저편의 향료열도, 서인도제도, 남북아메리카 대륙 등과의 원거리 무역에 착수하면서 중상주의 시대를 열었다. 상업 활동은 세계 각지의 상품 가치의 차이를 전제로 한다. 상인이라면 세계 각지의 수많은 정보에 밝아야 한다. 하지만 정보를 얻으려고 해도 체계적인 시스템이 없었다. 17세기 후반, 아무것도 없던 영국은 없는 것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그것이 모두 커피하우스를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한 꼴이 된 것이다. 커피하우스에는 업무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최신 정보가 가득 실린 정기간행물, 우편물, 주식 중매인, 그리고 각계의 정보통과 런던의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이 커피하우스에 모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이 커피하우스의 전부가 아니다. 런던의 커피하우스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성격은 공론 형성의 장을 마련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원거리 무역은 이익은 크지만 다양한 리스크에 시달리게 마련이고, 그런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강력한 무력이 필요하다.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 그것은 곧 국가의 조세 조직으로서의 측면을 강화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왕권과 거대 독점 상인의 강고한 결합을 바탕으로 근대국가가 정비되어가고 있었다.
왕권과 거대 상업 자본이 기존의 ‘공적 세계’를 점유하고 있었던 데 비해, 산업 자본가는 ‘민간인’이었으며, 공권력 행사를 허락받지 못한 인간, 그런 의미에서는 개인이었다. 결국은 ‘아직도 제로’의 제3계급이었다. 그런 그들이 왕권과 상업 자본에 대해 투쟁을 전개하고 산업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공적 세계와는 다른 ‘공적 세계’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중세적인 ‘공중목욕탕’의 온탕에 몸을 담그고 있던 대중이 산업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에 의해 온탕에서 내몰려서는, 왕이나 정부의 ‘공권력’에 대항하는 근대적 권력 팩터로 동원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동원하려 해도 영국은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신문, 라디오, TV, 전화, 아무것도 없다. 상업 자본과 산업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대결은 팸플릿과 입소문을 통해 새로운 권력 팩터가 되어가고 있는, 판단하고 비판하는 대중을 어떻게 자기편으로 끌어들일지에 달려 있었다. 바로 그때, 새로운 공적 제도인 커피하우스가 생겨난 것이다. 공론의 장으로 되어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둔다는 점에는 근대시민사회의, 그리고 그 정치 형태로서의 국민국가의 이념이 있다. 대중의 의견은 ‘여론’이라는 새로운 권력 팩터이다.
갓 볶은 숯검정의 패퇴
약 반세기에 걸쳐 런던 시민생활의 중심을 차지한 커피하우스는, 어찌된 일인지 18세기 중반이 되면서 급격하게 쇠락한다. 커피하우스가 쇠락한 원인은 여러 가지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중 하나는 커피하우스의 사회적 기능이 다했다는 점이다. 커피하우스가 자유롭고 데모크라틱한 분위기였다고는 해도 긴 안목으로 보면 클럽으로 가는 가교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하다. 공개지향적인 커피하우스가 각각 특수한 고정 고객층을 확보하면서 폐쇄적인 클럽으로 변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커피하우스가 클럽으로 바뀌던 이 시점에 훨씬 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커피와 멀어지면서 찾기 시작한 것이 홍차다. 하지만 홍차가 본질적인 이유가 될 리는 없다.
무엇이 영국인을 커피와 커피하우스에서 멀어지게 한 것일까?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참고가 되는 자료가 있다. 1674년, 남편들이 허구한 날 커피하우스에 들락거리는 것에 애태우던 아내들이 모두 커피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자 발행한 진귀한 팸플릿이다. 전체 여섯 페이지에 달하는 이 팸플릿이 ‘아내들의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그려내고 있는 장면 중에는, 런던에서 커피와 여성의 관계가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여성 측에서 볼 때 커피하우스라는 제도에는 심각하게 우려되는 문제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경제적인 부분이다. 일단 커피하우스에 들어가면 서너 시간은 앉아 있고, 혹여 아는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두세 시간을 더 앉아 있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생업은 방치되고 만다. 1페니로 그만큼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는데다가 많은 지식이나 정보까지 얻을 수 있다면 정말 저렴한 비용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17세기 후반에 1페니가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었느냐이다. 이 팸플릿에서는 그 두 배인 2펜스만 있으면 하루 식비를 마련할 수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남편이 커피하우스에 들락거리느라 생업을 등한시한다면,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와 자식들의 생계는 직격탄을 맞게 될 수도 있다.
두 번째 문제점은, 커피하우스는 17, 18세기까지 런던의 시민생활을 화려하게 연출하는 데 기여한 바 크다. 하지만 커피하우스는 오로지 남성을 위한 제도였다. 커피하우스에서 아무리 자유로운 논의가 가능했다 해도, 여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성을 위한 화젯거리도 거론되지 않았다. 여성이 참여하지 않는 커피하우스의 생활은, 근대시민사회가 ‘남성 사회’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여성은 여전히 가정 영역에 갇혀버린 존재였다. 하지만 근대시민사회라고 하는 이익추구 사회의 성장기는 동시에 ‘가정’을 다시금 새롭게 ‘친밀 영역’으로 발견하는 시대이기도 했으며, 새로운 가정의 창조를 동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문제는 커피가 이러한 가정적 친밀 영역에 참가할 자격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이 팸플릿이 정면으로 언급한 ‘커피 임포텐츠 원인설’이 그것이다. 그런 이미지는 종족 보존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가정에서 마실 거리가 되는 데 치명적인 데미지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커피를 대신한 비알코올 음료가 순식간에 여성들을 사로잡았는데, 나중에 영국의 모든 가정을 점령하게 된 홍차였다.
커피가 국민 음료로 정착하려면 사회가 아무리 남성 사회라 해도 파트너인 ‘제2의 성’의 찬성이 불가피하다. 시대가 아무리 돌고 돌아도 남자는 어쩔 수 없는 남자, 커피보다는 여성이 훨씬 더 중요한 법이다. 런던의 커피 문화는 한때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동의를 얻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독일 동아프리카 식민지
식민지를 찾아서
우리의 관점에서 본 유럽 근대시민사회는 전체적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자유, 평등, 박애’를 노래한 사회이다. 하지만 유럽은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적 수준에 머물지 않고 시민사회의 돌연변이, 파시즘을 만들어냈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독일이다.
1883년, 독일은 앙고라 항에 최초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얻었다. 그 이듬해 1884년 3월 28일, 베를린에서 ‘독일식민지협회’가 발족했다. 원래 식민지 정책에 신중했던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독일 정부였지만, 아프리카의 식민지 획득에는 적극적인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명쾌한 이유가 있었다. 프로이센 융커(Junker, 근대 독일, 특히 동프로이센의 보수적인 지주 귀족층을 이르던 말)의 산물인 감자가 과잉 생산되어 그 판로를 확보해야 필요에 쫓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독일에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도시에서는 노동자 동맹파업이 계속되어 치안이 혼란한 상태였다. 사회주의자가 활개를 치고 다녔고 1878년에는 사회주의자진압법이 발포되었다. 한편,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공황으로 인해 농촌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게다가 독일은 인구가 계속 늘어났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보급되고 있던 피임기구의 개발이 독일에서는 결정적으로 늦어져서 인구가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었다. 인구와 ‘생활공간’은 비례 관계가 있다는 게 옳다는 독일적 이론이 버젓이 통했다. 그런데 뒤늦게 제국주의적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인에게는 식민지가 없다. 독일인은 ‘땅이 없는 민족’이다. 독일 제품에도 충분한 판로가 없다. 이렇게 산적한 문제들을 식민지를 획득하면 한꺼번에 해결될 터였다.
동아프리카의 임금 노동자
커피나무의 고향은 동아프리카이다. 커피는 ‘루주 빛의 바다’를 면한 항구 마을 모카에서 왔다. 동아프리카에 커피 플랜테이션을 구축하는 아이디어도 누가 생각해도 당연하다. ‘독일동아프리카협회’가 커피 플랜테이션으로 선택한 곳은 해안에 가까워 물도 풍부하고, 인구 밀도도 낮지 않은 동우삼바라의 구릉 지대였다. 하지만 동우삼바라의 커피 플랜테이션은 실패였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리는 기후 조건 이외에도 많은 플랜테이션이 밀집하면서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애를 먹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더 우려되는 문제는 노동력의 질적인 측면이다.
독일인은 커피 플랜테이션에 근대자본주의 시민사회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노사 관계를 도입했다. 이른바 임금 노동이다. 임금 노동은 유럽인에게는 ‘자연적인’ 것이었다. 자기의 노동력을 팔아 화폐와 교환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현실적 근거다. 자유와 평등의 자격으로 시민사회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이다. 흑인도 이 장점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흑인 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 노동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일단 노동과 여가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서로 법적인 주체로서 임금과 노동의 교환 계약을 했다는 것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흑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임금을 받아야 하는 사회적 이유가 없다. 임금 노동 또한 역사적인 성립 배경이 있다. 영국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났듯이,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민을 토지로부터, 즉 스스로의 생산 수단에서 떼어놓고는 다른 사람의 생사나 수단 밑에서 노동력을 파는 행위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하지만 흑인은 사실상 토지나 스스로의 생산 수단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흑인들은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든가 아니면 기존의 토지에서 일하든가,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선택 주체였다. 그런 흑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임금을 준다고는 하지만, 몇 푼 안 되는 화폐를 손에 쥐고 독일 팔고 싶어 하는 감자 브랜디를 살지 아니면 아프리카 전통주를 살기 고민해야 하는 상품교환 사회의 자유롭고 평등한 선택 주체가 되어야 하는 의무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흑인은 자신들의 밭을 가지고 있었다. ‘귀찮은 일은 휴가를 내서…’라든가 ‘업무를 마치고 나서 저녁에 한 잔…’ 하는 식의 느낌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럴 필요가 생기면 ‘직장’에 나오지 않으면 그뿐인 것이다. 노동 계약의 의미를 뚜렷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탓에 노동 시간을 파는 계약을 해놓고도 본원적인 자유를 행사한다. 따라서 독일인은 커피 플랜테이션에 임금 노동을 도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흑인들이, 예를 들어 베를린의 공장 노동자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10시간 혹은 12시간을 꼬박 일해 주겠지, 하는 기대는 애당초 환상이었다. 그들에게는 노동 시간이라는 개념은 통하지 않았다. 이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법적 개인으로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임금과 교환했다고 생각하는 독일인에게는 계약 위반이었다. 하지만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무턱대고 자를 수도 없었다.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으로 고민하던 우삼바라의 커피 플랜테이션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묘안을 짜냈다. 노동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노동일을 사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4개월에 30일 동안 직장에 출근한다는 계약이다. 그래도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그럴 때면 고용주는 해당 흑인에게 빈 날 채우기 노동을 강제했다. 플랜테이션에서 일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도로건설 현장에 내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직장에서 나와서 빈둥거리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징벌로 감옥에 처넣어 자유를 구속해 봐도 도대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체벌이다. 하마를 때리는 채찍으로 흑인들을 두들겨 팼다. 이 채찍은 체벌뿐 아니라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에서도 큰 효과를 발휘했다. 근대시민사회의 복잡한 사회 기구 속에서는 충분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회화 능력을 기르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근대시민사회의 일반 구성원이 그러한 능력을 몸에 익히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역사적 성과는 이미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그런 역사를 갖고 있지 않은 흑인은 ‘처음부터 하찮은 노동을 위해 창조된, 타고난 노예’로 간주되었다.
근대시민사회의 틀로써 임금 노동을 도입한 것은 완전히 정반대의 결과물을 낳았다. 근대시민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보증해야 할 임금 노동은 강제 노동으로 변질됐을 뿐이었다. 그래서 결국 ‘흑인은 노동을 알지 못한다’, ‘화폐를 알지 못한다’, ‘추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교육도 할 수 없다’,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천 년은 빠르다’고 폄하했다. 하지만 그것은 유럽인이 이해하는 문화이고, 법이며, 자유와 평등과 박애였다. 흑인에게는 흑인의 법이 있고, 흑인의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의 관념이 있다는 것을 무시한 처사다.
커피 재배의 성과
독일이 동아프리카 식민지에 기울인 노력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무위로 끝났다. 하지만 세상살이 모든 것이 시간과 함께 수포로 돌아가고, 허공에 절절하게 제행무상의 울림으로 남아 널리 퍼진다면 이 세상은 오히려 평안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노력한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나중에 엄청난 화근으로 남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 경영은 그 후 독일에 치유하기 힘든 화근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인종차별사상이다.
식민지는 인종의 도가니이며 그 인종 간의 차이점을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인, 독일인, 덴마크인,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벨기에인 등의 유럽 사람들만이 아니다. 몇몇 커피 플랜테이션에서는 현지인 노동력의 부족과 비능률 때문에 중국인이나 자바인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옛날 그대로 캐러밴의 길을 따라 출입하는 아라비아인, 페르시아인, 인도인도 있었다. 여기서는 누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끊임없이 의식한다. 인종에 의한 구별이 일상화되어 있고 배외주의가 횡행하고 있었다.
자신이 속한 인종을 ‘지배 인종’으로 지정한 후에 ‘지배 대상’이 될 ‘열악 인종’을 종족별로 ‘분류’해서, 위로부터의 명령에 고분고분하게 따르게끔 합리적으로 관리하면서 ‘열악 인종’인 ‘원주민’으로부터 최선의 노동력을 끌어내는 것. 이것은 아프리카 식민지를 잃은 후에, 중앙 유럽의 다른 민족을 어떻게 다룰지를 생각하는 나치스 독일의 ‘원주민 정책’과 다를 바가 없다. 독일인이 아프리카의 ‘원주민’을 다루었던 그 방법을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에 응용할 때, 인종차별주의는 국가의 관료 기구에 의한 합리적인 대량 살육으로 전개된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지 지배에서 찾은 것은 한나 아렌트였는데, 라테나우가 본 동아프리카의 독일인에게도 인종주의와 관료주의가 합체된 파시즘적 전체주의가 분명하게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다.
라테나우는 흑인의 땅에서 유럽인이 식민을 하는 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유럽인이 유럽의 모든 이념에 대해 깊은 책임을 가지고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라테우나가 말하는 의미의 ‘지배’의 결핍을 채우는 것은 관료 기구였다. 관료주의(Burearcracy)는 문자 그대로 ‘관리서(bureau)의 지배’(크라토스, cratos)이다. 옛날부터 국가라고 하면 으레 따르게 마련인 관료 기구라고는 해도, 한 국가가 해외 식민지에 많은 뷰로를 열고, 본국과 현지를 이어주는 공무원의 일은 현대적인 일이었다. 프로이센이나 독일 공무원의 강점은, 라테나우에 의하면 대대로 공무원을 배출한 가문 등에서 배양된 전통적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식민이라는 사업에 관해서는 우리 독일인은 어떠한 전통도 가지 못했고, 그것이 본래 유능한 독일인 관리 스태프가 이 영역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독일 식민지 정책의 체면을 더럽히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프리카의 독일인 공무원은 원래 다른 사기업에서 전입해온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공무원으로서의 기초 교육도 받지 못했다. 한편, 본국에서 보내온 경력자팀은 2년간의 식민지 근무를 ‘통과역’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현지 사정도 깊이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개인적인 이니시어티브도 발휘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인종 사정’은 인종별로 뷰로를 개설해서 개개인의 책임으로 일을 맡는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각각의 뷰로가 ‘개인의 결단과 인간의 지(知)와 이니시어티브와 책임’을 눈앞에 보여줘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테나우가 본 동아프리카의 독일인 공무원들은, 자신의 책임으로 확신을 가지고 지배하는 대신에, 위에는 복종하고 아래로는 명령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개인이 자신의 결단을 두려워하는 지점에서 횡행하는 것이 익명성의 지배이며, 개개인의 책임을 묻지 않는 ‘통일 이념’이었다.
?
커피를 마시는 시민사회는 전체적으로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지향하는 사회였다. 그리고 그 시민사회의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 원활한 상품 교환을 목표로 했던 식민지-그것은 또한 커피의 고향이기도 했다-의 지배를 전기로 자유와 평등의 정반대물, 즉 인종주의와 배외주의로 반전한다. 독일인은 새로운 인종 이념을 구축할 필요가 없었다. 선진 식민주의 국가 영국이나 프랑스에는 고비노의 「인류의 불평등의 기원에 대하여」 등 ‘배워야 할’ 인종론이 이미 생겨났으니까. 단, 독일인 스스로 식민지 지배를 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런 이론적 내실을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에도 체임벌린의 『19세기의 기초』와 같은 이론서가 생기면서 인종 이론은 독일의 교양 계층을 위한 공유 재산이 된다. 불행한 역전 현상은 제국주의적 식민지 획득 경쟁에 뒤늦게 뛰어든 독일이 발 빠르게도 인종주의를 관철하면서 선진적인 파시즘 국가가 된 것이다. 커피가 그 원래 고향에 도착하기 직전의 홈스트레치에서 연출된 놀라운 장면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성서의 우화를 이 땅에서 행하는 것 같은 역전극이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