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한국사

   
박선식
ǻ
베이직북스
   
15000
2008�� 09��



■ 책 소개
역사적 사료를 근거로 한 통치사적관점에서의 역사책으로써 5000년간 한민족 대외 정벌사를 연대기적 서술방식으로 저술한 기획서이다. 따라서 이 책만으로도 충분히 역사의 흐름을제대로 이해하고, 역사를 재평가함에 있어서의 근거 자료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한민족의 역동성과 적극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느껴보는 데역점을 두었다.

 


우리 역사를 단지 한민족의 역사로서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동아시아 속에서 한민족의 위상, 한민족의 역할, 한민족이 성취했던 업적들을 되새기며, 우리 배달민족이 파란만장한 동아시아 역사의 주체자인 동시에조정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 저자 박선식
단국대학교 문과대 사학과 전공,단국대학교 사범대 한문교육학과 전공,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한국학석사과정(한국고고미술사학 전공), 한국한겨레예술협회 학예담당위원 활동. 「한성기백제의 대외관계 주요사실 검토」「5세기 백제왕실에서 작성한 청병표 검토「5~6세기 고구려 및 북조 벽화에 보이는 불교적 소재와 비불교적 소재의융합」「조선시대 도검의 실측과 분석」 외 논문 다수. 『한국문화사 일반(서울시청 여성시민대학 강의교재)』『치세에 붓을 들고 난세에 칼을차니(연경문화사)』 외 저서 다수가 있다.


■ 차례
책머리에
목차


Chapter 01 상고시기 전설적 전쟁이야기
1.치우의 전설
2. 단군의 전쟁이야기


Chapter 02 눈부신 고구려 그리고 열전의삼국시대
1. 고구려 초의 이합집산과 대외 진출
2. 서방 진출에 나선 고구려와 백제
3. 신라의 왜지 출병과적극적인 왜 세력 깨부수기
4. 고구려와 백제의 약진과 한반도의 정세 변화 
5. 동아시아를 뒤흔든 고구려
6. 왜지를 진압한가야, 고구려 장수왕의 대외경략 전개
7. 신라와 왜의 끝없는 다툼, 백제의 월주 진출
8. 고구려의 유림관 및 태원, 유주 방면진격전
9. 발해의 당과 북방족을 향한 전쟁


Chapter 03 고려의 대외출병과 자주적 노선
1.고려의 북방족 압박과 그 전개과정
2. 김희제 부대의 우가하 세력 토벌과 고려 몽고의 일본 정벌전
3. 고려의 거듭된북벌작전
4. 고려의 대마도 정벌전


Chapter 04 조선의 대외출병과 소극적정책노선
1. 조선 초의 대마도 정벌전과 대북방 공방전
2. 4군 6진의 개척
3. 세조 및 성종 그리고선조대의 북방 경략
4. 조선의 청나라 공격 준비와 나선 정벌전

한민족의 대외정벌과 관련한 주요 군사활동 연표
에필로그





위풍당당 한국사


Chapter 01 상고시기 전설적 전쟁이야기
치우의 전설

- 역사 바로 보기, 참과 거짓을 밝히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것이 결국 역사가 되었고, 이성적인 고민의 문제가 결국 철학이 되었으며,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가 결국은 문학이 되었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문학이면서 역사적인 알맹이가 들어 있다면 과연 그것을 문학으로만 치부할 것인가, 아니면 과감하게 역사로 받아들일 것인가?


학계에서 위서로 분류되어 빈정거림을 사거나, 심지어 코웃음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대표적인 기록물이 『환단고기』이다. 『환단고기』는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에 계연수가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는 책이다. 중국의 사마천이 지었다는 『사기』에는 역사적 시원의 시기에 이른바 황제와 치우의 대격돌이 소개되어 있다. 황제는 덕을 드러낸 치자로, 치우는 반역을 꾀한 부도덕한 악한이자, 반적들의 우두머리로 다루어져 있다. 그런데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등에서 소개되는 치우는 우리 민족의 아주 오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그가 보여준 뛰어난 군사적 지휘와 활약은 대영웅 서사시를 방불케 한다. 이렇게 상반된 기록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치우를 과연 우리 선대 조상의 지도자로 봐야 할까? 아니면 그저 옛 중원의 땅에서 힘 겨루기를 하던 일개 영웅으로 보아 넘겨야 할까?


- 치우가 우리 조상이라면 그는 준비성이 강한 지도자였다
위서 혹은 진서로 분류되는 저작물들을 검토하면 치우가 황제와의 전쟁에 대비해서 마련한 무기체계가 실로 다양했으며 엄청난 군사적 대비책을 갖추었다고 전한다. 『환단고기』로 편집된 책 네 권은 계연수에 의해 묶여진 것으로 원래 각각의 저작으로 존재해왔다. 그중 조선조 연산군과 중종 때의 인물로 주장되는 이맥이 편찬한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에 따르면, 치우는 ‘10년 동안 헌원과 싸우기를 73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단순히 산술적으로 평균해보면 매년 대략 7.3회 꼴로 전쟁을 치룬 셈이다. 그것을 다시 4계절로 나누면 한 계절마다 1.5회 내지 2회가량 전쟁을 벌인 것이다.


- 치우가 중원으로 진출한 이유는 뭘까?
치우와 관련된 자료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전쟁의 원인이 무엇인지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피기는 어렵다. 다만 치우와 황제 헌원 두 세력이 맞부딪친 지역이 탁록이란 평원이며 그에 따른 전쟁장비들을 거듭 개발한 것으로 미루어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탁록은 당시에 곡물이 풍성히 자라는 기름진 평야지역이거나 소나 말 등의 가축을 키우던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북애자의 『규원사화』를 보면 당시 우리의 오랜 선조들이 중원 지역으로 이동한 것은 일종의 개척활동으로써 주거지역을 넓히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원 진출을 일종의 침략적 행위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은 당시 중원 지역의 실질적 점령자가 오늘날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한족이라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 「삼한관경본기」의 기록을 보면 치우의 헌원 토벌에는 또 다른 명분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치우는 헌원이 삼신일체(삼신의 신격에 부합해 하나가 된다는 뜻)의 원리에 태만한 것을 책망하며, 마음을 닦고 바르게 행동할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헌원과 치우는 같은 삼신일체의 원리를 따르는 추종 세력이었고, 같은 신앙체계에서 이탈하려는 황제 헌원을 치우가 응징했다는 종교전쟁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음을 헤아려볼 수 있다. 치우와 헌원이 이끈 두 세력은 탁록을 확보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무기개발을 꾀하는 가운데 장기간의 전투를 거듭했으며, 두 세력이 장기간 무력대결을 펼쳤던 것으로 보아, 이들의 정치군사적 역량과 대응방식이 엇비슷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우리에게 남긴 치우의 교훈과 가치
비록 위서의 시비 속에 있긴 하지만, 『태백일사』 등에서 치우가 황제 헌원 세력과 일전을 준비하기에 앞서, 황제에게 마음을 씻고 행동을 고치라는 선전전을 펼쳤다는 기록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치우는 광물자원을 찾는 일부터 제련과 병기 제작의 모든 과정을 철저히 관리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모든 점에서 준비하는 자로서 갖춰야 할 최고의 경영관리 수순을 따랐음을 짐작하게 한다. 



Chapter 02 눈부신 고구려 그리고 열전의 삼국시대
서방 진출에 나선 고구려와 백제

- 고구려, 현토성 정벌전에서 패하다
고구려는 일찍이 111년에 태조왕(이름은 궁宮)이 예맥과 더불어 한나라의 현토성을 다시 공략하고 118년에 현토성은 물론 화려성까지 연거푸 공략하는 등 대외정벌사업에 주력해왔다. 그런 와중에 한나라의 유주자사 풍환과 현토대수 요광, 그리고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에 대거 침공했다. 위기를 맞은 고구려는 태조왕의 아우인 수성이 군대를 이끌고나가 맞섰다.


수성은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고는 고구려 주력부대를 매복시켰다. 이어 적들이 공격권에 들어서자 3천의 부대로 현토와 요동의 2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수성의 승리에 뒤이어 같은 해인 121년 4월, 태조왕은 선비족 8천과 함께 요대현을 쳤다. 접전 중에 요동태수 채풍을 비롯한 여러 적장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그와 같은 고구려군의 승리는 고구려를 더 광대한 영토를 가진 강성한 나라로 발전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21년 12월, 고구려군이 12월의 혹한 속에서 현토성 정벌전에 혼신의 힘을 기울일 무렵, 부여왕이 그의 아들인 위구태와 2만의 원병을 보내 고구려군이 눈앞에 둔 승리를 가로막았다.


태조왕은 요하 일대의 군사작전에 주력해 146년 8월, 서안평을 습격해 그곳의 대방령을 죽이고 대방태수의 처자를 사로잡는 전과를 거뒀다. 그때 아우 수성의 모반이 임박했다는 보고가 궁중을 뒤흔들었다. 태조왕은 수성에게 조용히 왕위를 물려주었다. 수성은 차대왕이 되었다. 포악했던 차대왕은 재위한 지 20여 년이 지난 후 명림답부에 의해 제거되었다.


2세기 말 후한이 혼란에 빠지면서 한의 군현 세력이 극히 약화되어 고구려로서는 호기를 맞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공손씨 세력이 팽창하면서, 요동 일대가 공손씨의 손에 넘어갔다. 더욱이 고구려는 내부의 불안한 분위기를 해소하지 못해 당시 대외정벌보다 내치의 안정을 기해야 했다.


- 고구려와 위나라가 요하 지역으로 진격하다
당시 중원 땅에는 220년에 후한 왕조가 무너진 후 위나라가 섰고, 221년에는 촉한이, 222년에는 오늘날의 남경을 중심으로 오나라가 서 이른바 삼국시대를 이루고 있었다. 급변한 국제정세는 요동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공손씨 세력을 불안하게 했다. 228년에 공손씨 세력의 실력자였던 공손강의 아들인 공손연이 위나라로부터는 ‘요동태수’ 직을 받고, 오나라로부터는 ‘연왕’의 칭호를 얻어낸 것은 공손씨 세력이 그만큼 정치적으로 불안했음을 반증하는 단서이다. 그러던 공손씨 세력은 자신들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 오나라가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림으로써 233년에 찾아온 오나라의 사신을 죽여 위나라에 보냄으로써 위나라와 굳건한 연계를 맺고자 했다.


고구려 조정은 오나라와 대결 국면에 있던 위나라와 연합해 이웃한 공손씨 세력을 소탕하기로 작정했다. 238년 초 위나라의 사마의가 이끄는 군사가 요동 방면으로 이동하자, 고구려의 군 지휘부도 그에 따른 작전을 폈다. 238년 6월 고구려군과 위나라의 군사들은 요하와 혼하가 만나는 지점을 들이쳐 공손씨 세력을 압박했다.


양국의 협공을 맞은 공손씨 세력은 무려 20리에 걸친 참호를 활용하며 항전했다. 전투가 격렬해지자 위나라의 사마의는 군사들을 슬며시 남쪽으로 빼내는 척하며 공손씨 세력의 수도인 양평성을 쳤다. 고구려가 위나라와의 군사연합에 성공해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킴으로써 단군제정치체의 일부 영토인 요동 지역을 확보하는 위업을 달성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었다.


- 고구려군이 서안평을 친 까닭
고구려는 위나라와 연합해서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켰으나, 강력한 위나라와 접경을 마주하게 되자 위나라와 군사적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삼국지』 4권, 「위서」경초 3년(240년) 6월의 기록, 같은 책 정시 1년(240년)의 기록은 그 무렵 고구려와 위나라의 충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요동군 동답현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바다 건너 산동 지방의 여러 군의 경계 지방에 가서 살았다”는 내용과, “요동군의 문현과 북풍현의 백성들이 피난해왔다”는 내용이 있다. 이웃한 고구려와의 무력충돌 때문에 요동군에 거주하던 위나라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난 가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242년(동천왕 16년)에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안평은 평양 방면과 요동을 잇는 교통의 요지인 터라, 고구려로서는 반드시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고구려는 위나라와 오나라가 각축을 벌이는 정황을 활용해 서안평을 차지했다. 서안평을 확보한 이듬해인 243년에는 왕자 연불을 왕태자로 삼았고, 죄수들을 사면했다. 후계 체제를 굳혀 국가 발전에 주력하는 한편,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신라의 왜지 출병과 적극적인 왜 세력 깨부수기
- 신라, 국방력 강화 의지를 세우다
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왜는 신라에 대한 노략을 멈추지 않았다. 서기 261년 신라는 백제로부터 화친 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신라는 이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는 더 강력한 대왜구 정책의 일환으로 264년 3월에는 동쪽 바닷가를 순찰하는 적극적인 방어태세를 드러냈다. 266년 8월 백제는 신라를 침범해 봉산성 지역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봉산성의 성주 직선은 겨우 2백 명의 용사를 이끌고 백제군에 맞서 힘껏 싸웠다. 그 결과 백제군은 패주했다.


미추왕은 대규모 군사 검열을 실시하고 서쪽 성곽들을 직접 다니며 경계 태세를 확인하는 등 적극적으로 군사력 강화에 힘쓰는 한편 민심이 안정되도록 신경 썼다. 민심을 잃는다는 것은 곧 국방력에 손실이 생길 수 있을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미추왕의 뒤를 이은 유례왕도 국방정책을 중시했다. 유례왕 시기에도 왜구들의 노략질은 끊이지 않았다. 287년 4월경 왜인들이 일례부를 습격해 민가에 불을 지르고 1천여 명에 이르는 백성들을 붙잡아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신라 안팎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289년 5월에 왜적들이 또다시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졌다. 조정은 곧바로 전선을 재점검하고, 갑옷과 병기를 정비케 했다.


- 신라, 왜지 본토 정벌을 계획하다
292년 6월, 드디어 신라를 침입한 왜구들이 사도성을 함락시키는 등 변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신라군은 그간 정비된 군사체제를 움직여 곧바로 성을 탈환하고 적들을 무찔렀다. 조정은 왜구들을 격퇴시킨 후 사도성을 개축하고, 사벌주에 살던 호민 80여 호를 그곳으로 이주하도록 조치했다.


295년 봄, 유례왕은 군신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혔다. “왜인들이 번번이 우리나라의 성과 고을을 침범한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편히 살 수가 없다. 때문에 나의 생각으로는 백제와 더불어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쳐들어가서 아주 그 나라를 적멸시키는 일을 도모함이 좋을 듯하다. (이 의견이) 어떠한가?”


하지만 홍권이 다음과 같이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해전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위험을 무릅쓰고 원정을 하면 헤아리지 못할 위험한 일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또한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삼키려는 욕심을 가졌으므로 같이 (군사작전을) 도모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라고 염려됩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례왕은 그 의견에 “옳다”고 답했다 한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사료에는 신라가 왜지를 공략했다는 내용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가 왜구 세력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 신라의 명석포 상륙작전
적지 않은 역사기록물들이 신라가 왜지를 쳤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가장 첫머리에 등장하는 것이 명석포 상륙작전이다. 신라의 왜지 정벌에는 도박에 가까운 필사적인 국방 의지가 담겨 있었다.


? 『동사강목』(제2상, 을묘년, 신라유례왕 12년) : 왜황 응신 22년에 신라군이 명석포에 들어왔는데, 명석포는 대판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었다. 적간관의 동쪽에 한 구릉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인데, 신라군이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주기를 청하여 백마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고 한다”고 했다. 


? 『일본연대기』 : 이경직이 ‘일본연대기’에 실린 “응신 22년에 신라군이 멀리 일본국의 내해에까지 쳐들어와 서울인 대판에서 겨우 백 리 떨어져 있는 명석포에서 응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고 기록된 내용을 ‘부상록’에 옮김


? 『일본서기』: 응신 22년 무렵, 응신왕은 갑작스레 등장한 ‘어우별’ 세력에게 여섯 현을 떼어주었다는 내용이 주목됨


신라의 명석포 공격작전에서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점들을 헤아릴 수 있다. 첫째, 신라군의 적극적인 해상작전 능력과 그 우수성을 알 수 있다. 둘째, 신라군의 적지 내 침투공격 능력과 상륙전 능력의 우수성을 알 수 있다. 셋째, 왜 세력의 전투역량이 신라에 비해 미약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가 명석포 작전에서 승리한 후, 대략 3세기 말 이후로 왜구가 신라를 쳤다는 기록이 사라진 점은 두드러진 변화다. 오히려 왜는 친신라적인 태도로 돌아섰는데, 300년(기림 이사금 3년) 정월에 왜국과 사신을 교환했다든가, 312년(흘해 이사금 3년) 3월에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아들의 혼인을 청하므로, 왕이 아찬 급리의 딸을 보내 결혼시켰다는 기록들이 있다. 긴장 관계에 있던 두 나라 간에 혼사가 오간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돌연하게 바뀐 사태라 할 만하다.


그런데 『삼국사기』 등 관련 사서를 보면 혼담 이외에는 선물을 건넸다든지, 문화사절을 교환했다든지 하는 우호적인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신라나 왜 모두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상대방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석포 작전이라는 신라의 강경하고 적극적인 왜지 정벌은 약 50여 년간, 4세기 전반에 걸쳐 신라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Chapter 03 고려의 대외출병과 자주적 노선
고려의 거듭된 북벌작전

- 고려 말의 비운과 공민왕의 국세회복을 위한 몸부림
원나라의 수탈에 가까운 전쟁물자의 강요로 고려의 재정은 그야말로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고려가 극심한 재정 악화로 시달리고 있을 때, 북방에서는 또 다른 무리들이 고려의 국운을 갉아 먹으려고 꿈틀대고 있었으니 바로 합단적(원 제국의 쇠락기에 한반도 북변을 노략질하던 야인 도적떼)이었다. 합단적은 충렬왕 16년(1290년) 1월을 기해 노골적으로 고려에 침입했다. 심각한 경제문제로 어수선한 가운데 고려는 다시 전쟁국면을 맞아 대책 마련에 부심했고, 가까스로 합단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비운은 내부에서 더 큰 싹을 틔우고 있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김굉의 일화는 당시 썩을 대로 썩은 관료사회의 부패로 고려가 얼마나 일그러졌는지를 엿보게 한다.


김굉은 본래 의성현 사람으로 충혜왕대의 관료였는데, 어떠한 연유로 면직됐다가 왜적이 나주에 침입해왔을 때 목포 주민들을 이끌고 나가 싸운 점을 인정받아 다시 복직됐다. 김굉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백성들을 착취해 재산을 긁어모았다. 심지어 왜적 소탕에 쓰일 군량미까지 털어먹는 등 관료로서의 양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게다가 각 고을의 운송용 선박에 일정한 조세를 매겨 거둬들인 세금을 모두 자신의 집안 곳간에 쌓아두었다. 김굉은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활용해 중앙 정계의 부패한 관료들과 결탁했다. 그 덕에 김굉은 내포(지금의 충청남도 서해안 지역의 해안)에 들이닥친 왜적을 맞아 치룬 전투에서 패전하고도 조정으로부터 도리어 승전의 예우를 받기까지 했다.


1351년 8월, 여전히 왜구들의 노략질이 계속되는 가운데, 북방의 원나라 땅에서 한 고려인이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이후에 공민왕으로 즉위한 충숙왕의 차남인 왕전이었다.


- 고려의 강소성 파병과 의미
공민왕은 즉위 후 인사기관인 정방을 폐지하고 덕경부를 문예부로 고치고 노국대장공주(인덕왕후)의 지공을 담당할 숙옹부를 설치하는 등 부처 개혁을 실시했다. 공민왕은 변발(몽고나 만주족의 풍습으로 머리를 길게 땋아 늘이는 복식의 일종)도 금지했다. 공민왕은 원나라 문화의 종식과 함께 자주문화의 새 시대를 열고자 작정했다.


그러던 1354년 7월경, 공민왕은 원나라로부터 뜻밖의 요청을 받았다. 당시 원나라는 남방에서 창궐한 장사성의 반란군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군사력이 부족하단 이유로 고려에 파병을 요청했던 것이다. 고려는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파병부대에는 염제신과 최영 등 고려 말에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특히 최영은 강소성 반란군 토벌에서 무려 27회에 걸쳐 크고 작은 전투를 주도했다. 이들은 뚜렷한 공로를 세우고 돌아와 새로운 정치군사노선을 펼치는 실세로 급부상했다.


- 고려가 팔참을 치고, 전투장비를 개선하다
공민왕은 나라의 자주권을 회복하고, 정치체계를 바로잡고자 무척 애썼다. 당시 고려에는 여전히 왜구들이 들끓었으며 나라 안팎도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공민왕은 무엇보다 대내적인 임전태세의 확보가 중요함을 절감했다. 그는 재상부터 아전에 이르기까지 각자 활 1, 화살 50, 칼 1, 창 1을 갖추게끔 조치했고, 숭문관에서 이를 직접 검열하기까지 했다.


더불어 공민왕은 원나라가 쇠락해지는 틈을 활용해 자주화 정책을 강력히 추구하면서 국세회복에 나섰다. 1356년 5월, 공민왕은 우선 고려 내부에 득실대는 친원파 세력을 과감히 제거하고, 곧바로 압록강 서쪽의 팔참(한반도 북방과 원 제국 사이에 있던 8개의 군사적 요지)을 공격하게 했다.


고려의 팔참 공격은 서북방 요지를 방어거점으로 공고히 다진 후, 자주정책의 과단성 있는 추진을 예상한 군사행동으로 풀이된다. 특히 팔참이 갖는 중요성을 놓고 볼 때, 공민왕의 지략이 결코 범상한 수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은 팔참 공격전이 펼쳐진 그해 9월, 중신들을 모아서 서북면 방어의 무기를 검열하고 남쪽 언덕에서 총통을 발사하는 등 국방력 강화를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때 시행된 총통 발사시험은 최무선의 화약 및 화기개발에 앞선 조치란 점이 주목할 만하다. 


- 내우외환 속에 펼쳐진 고려의 자주성 회복 전쟁
공민왕 8년(1359년)에 3천여 명의 홍건적(원 말기에 한산동을 수장으로 뭉친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군)이 침입했는데, 같은 해 12월에는 무려 40,000명의 홍건적이 침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들은 곧 고려의 수도를 위협했고 공민왕은 궁을 떠나 급히 피난해야 했다. 공민왕은 본격적인 북방 야인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고려군은 이듬해 1월, 홍건적을 수도 개경에서 몰아냈고, 2만의 홍건적을 함종에서 궤멸시켰다. 하지만 홍건적은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지속되는 위기 속에서 신흥 무장인 이성계가 적극적으로 나서 홍건적을 대파했다. 그러나 1361년 12월을 기해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공민왕은 분노와 서글픔을 억누르며 복주로 피난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왕후의 음모가 꿈틀대고 있었다. 기왕후는 고려인 기자오의 딸로, 원나라 왕실에 진출했다가 원 순제의 눈에 들어 총애받았으며 황태자까지 낳은 고려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고려의 친원파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그녀는 공민왕의 친원파 제거 과정에서 기철 등 그녀 집안의 일족이 화를 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기왕후는 공민왕 노선에 반대 성향을 가진 최유 일당과 결탁해 공민왕을 제거하려 했는데, 김용 일파도 공민왕 제거 음모에 가세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 고려 말에 이룬 북벌작전의 성과
고려군은 두 해에 걸쳐 올라산성과 요동성의 공략에 성공했다. 공민왕이 그토록 꿈꾸던 자주적 북진정책이 현실화되었던 셈이다. 하지만 고려군은 그렇게 확보한 점령지를 뒤로 한 채 다시 남진해야 했다. 백성들이 왜구의 갖은 노략질에 신음하며 피투성이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이 적잖은 국력을 기울여 얻은 북방의 점령지 관리에 소홀하게 되자, 원나라의 쇠약한 틈을 노려 들어선 명나라가 이 지역에서 새로운 패자로 자처하고 나섰다. 명은 동북방의 여진을 복속시키고 엄연히 고려군이 진공하여 확보한 지역을 버젓이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에 묶어두려는 간교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고려 조정이 펼친 북방 군사활동의 성과는 결코 작지 않다. 다소나마 영역을 확대했는데, 그 현실적 성과의 하나가 강계만호부의 설치다. 강계는 압록강 중류에 자리 잡은 지역으로 고려는 그곳에 만호부를 두어 주변 지역 모두를 분명한 군사적 세력권으로 삼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 조정은 1391년(공양왕 3년)에는 갑산 지역에 갑주만호부를 추가했다. 앞서 설치한 강계 지역과 갑산을 잇는 분명한 북방 경계선을 확정한 셈이다.

 


Chapter 04 조선의 대외출병과 소극적 정책노선
세조 및 성종 그리고 선조대의 북방 경략

-  세조대의 군사체제 변화와 개선
세종조의 내치 발전과 강력한 대외정벌의 실현은 집현전이란 인재양성기관과 왕이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챙긴 기술력 양성사업을 축으로 그 바탕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상왕인 태종이 간섭세력의 방해를 사전에 제거한 정치적 배려가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음도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짧은 치세를 이었을 뿐이고, 단종마저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는 변란을 맞이했다. 수양대군을 세조로 등극시키기 위해 벌어진 계유정난은 숱한 공신세력을 양산해, 결과적으로 국가경제를 압박하는 한 요인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기득권을 거머쥔 공신 세력은 도전하는 신진세력의 발호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획책했고, 그 와중에서 절의를 내세운 유생들은 고려 말 성리학통을 이으며 향촌 질서를 장악하려는 등 악영향을 낳았다.


그런 와중에 남쪽에서의 왜구침략을 우려해 그동안의 군사체계를 군익도 체제(지방의 군대를 균형감 있게 배치해 방어효용성을 높인 군사시스템)로 바꾸었는데 각 도를 몇 개의 군익도로 나누고, 각 군익도를 중, 좌, 우의 3익으로 편성해 인근 여러 고을을 소속하게 만들어 하나의 군사 단위를 이루게 한 것이다.


세조 3년에는 주요 지역의 거진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진을 속하게 하여 하나의 진영으로 편성,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싸우는 독립된 군사 거점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진관체제가 확립된 점이 주목할 만하다.


- 세조대의 북방경략
세조는 역대의 골칫거리였던 여진족 때문에 노심초사하던 끝에 치밀한 방략을 마련코자 했다. 신숙주의 『북정록』을 보면 그에 대한 예방책이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경험 많은 맹장의 전진 배치   
둘째, 유화책과 강공책의 혼용
셋째, 인접한 간섭세력의 분리
넷째, 주요 중신들의 병략가화
다섯째, 국가 방어 역량의 내실화


특히 세조가 많은 대신들을 관사(임금이 참여한 상태에서 문무관리들로 하여금 황을 직접 쏘게 해 개인적인 전투능력을 관찰하는 군사적인 공식행사)라는 명목으로 소집해 훈련시킨 점은 주목된다. 세조는 신숙주를 함길도 도체찰사에 임명하고 변방 지역의 실태 파악에 나서게 했다. 그해 8월을 기해 신숙주를 중심으로 하는 토벌부대가 북벌에 나섰다. 조선의 토벌군은 여진족을 철저히 압박해 토벌에 성공했다.


그러나 조선은 다시금 내분에 휩싸였다. 1467년(세조 13년)에 발생한 이시애의 난이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혼란을 불렀다. 정쟁에 따른 후유증이 불거져 국력 소모를 불렀다고 풀이되는 대목이다. 그런 와중에 난의 진압을 빌미로 출세욕에 불타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조선이 이시애의 난을 가까스로 진압하고 나자, 명나라에서 파병을 요청해왔다. 명나라는 만주 지역에서 준동하는 야인 이만주 세력에 맞서 조선이 정벌군을 파병해 군사작전을 돕기를 바랐다.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을 거부하지 못하고, 결국 같은 해 9월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을 중심으로 북벌 파병부대를 보냈다. 조선군은 명나라군과 협공을 펼쳐 이만주 세력을 진압하는 데 뚜렷한 전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조선군이 거둔 북벌 파병의 성공은 일찍부터 쌓아온 북방 야인 정벌전의 소산이자, 쉼 없이 추구해온 군사력의 강화정책에 따른 성과물이었다. 하지만 여진족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무장들은 이후에 유자광 등의 정치 모리배의 술수에 넘어가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했다.

 

- 삼포왜란과 그에 따른 국력 소모
조선 조정이 취한 조선 남쪽 내 거주 왜인에 대한 통제책은 성종대 이래로 더 엄격해지는 경향을 띠었다. 그런데 이후 연산군대에 들어서 재정이 악화되면서 교류 왜인에 대한 접대가 소홀해지고 변경을 책임지던 관리들의 횡포가 거듭되는 등 적잖이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부패와 방탕으로 얼룩진 연산군대와 맞물려 적절하지 못한 처우를 당하는 왜인들의 불만은 점차 커져갔다. 결국 규정을 무시한 채 불법행동을 마다하지 않는 무리가 생겨났다. 그와 같은 사태는 중종대에 들어 더욱 심해졌다. 삼포 내의 왜인들은 어느새 무력적 반란을 꾀하여, 폭동활동을 지원해 달라고 대마도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1510년(중종 5년) 4월 4일에 시작된 삼포왜란은 단 사흘 만에 부산성까지 쳐들어와 노략질을 시작했다. 조선 조정은 전직 절도사 황형을 경상좌도병마사로 삼고 전직 방어사 유담년을 경상우도병마사로 삼아 군대를 급파했다. 더불어 전투지역의 확산을 방지하고 작전의 효과를 기하기 위해 전라도의 관찰사, 병사, 수사 등에게 삼포왜란의 상황을 전해 방어에 소홀함이 없도록 조치했다. 그 밖에 남방 왜인의 준동으로 서울 지역까지 악영향이 초래되는 것을 막고자, 서울 지역 내의 왜인들에게는 삼포왜란의 소문을 비밀에 붙이도록 조치하는 한편, 북방 지역의 강건한 무사들을 선발해 서울 방어에 참여시켜 변란에 따른 내부 치안 부문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남방을 횡행하는 왜구의 만행은 계속됐다.


조선 조정은 회유 차원에서 왜구들의 강화를 검토했으나, 무력토벌로 응징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유순정을 도원수로 삼아 육군부대는 3대로 편성해 약 5,000의 전투병력을 배정했고, 수군부대는 경상우수사 이의증과 부산첨절제사 이보를 동서로 분진시키는 방식으로 해상 봉쇄와 함께 육군작전에 협공토록 했다. 조선군은 왜구들의 본거지인 제포성 부근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조선 조정은 삼포왜란을 진압한 뒤, 왜인과의 관계를 강경방침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조선의 경제적 지원으로 겨우 연명하던 대마도인들은 몹시 고통스런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대마도인들은 자신들의 생존권을 모색하기 위해 조선 조정이 무역의 재허가와 삼포 거류를 다시 허락해달라고 애걸했다. 조선 조정은 왜인들의 눈물어린 호소가 끊이지 않자, 변란을 꾀한 폭력 왜구의 주모자들을 목을 베어 그 머리를 들고 나타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왜인들은 그 요구해 따랐고 다시는 반란을 꾀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임신조약을 맺어 가까스로 조선의 호의를 구하게 됐다. 임신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삼포에서의 왜인 거주를 불허함
둘째,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세견선을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함
셋째, 도주에게 주는 세사미 두량을 200석에서 100석으로 반감함
넷째, 도주 특송선 제도를 폐지함
다섯째, 도주 일족과 이외의 수직, 수도서인의 세견선과 세사미두를 폐지함
여섯째, 도주가 파견하는 선박 이외의 사송선은 적왜로 간주해 처단함
일곱째, 일본 본토의 일본인 중 수직, 수도서인을 정리함
여덟째, 포소와 해로를 제한함
아홉째, 국왕사를 제외한 상경 왜인의 무기 휴대를 금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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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한층 통제된 성격이 강화된 조약으로, 조선 조정의 강경함이 담겨 있다. 결국 왜인들은 계해약조 이후 강화된 조선의 방침에 항거한 까닭에 더 심한 통제책에 갇히는 꼴이 되었다. 그럼에도 대마도인들은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조정이 배려한 교린적 차원의 조치가 아니고서는 깊은 생활고를 벗어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