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EY 화폐의 역사

   
캐서린 이글턴 외(역자: 양영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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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글빛냄
   
29000
2008�� 09��



■ 책 소개
"돈(Money)"의 총합적인 역사를소개한 책으로, 화폐의 역사를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였다. 영국 대영박물관 큐레이터인 저자들은 역사 속에서 돈의 전파와 발전에중요한 역할을 했던 유럽과 미국의 시각에서 벗어나, 전 세계 모든 지역의 돈을 객관적이고도 폭넓게 탐구했다. 최초에 글씨로 적어 사용했던 화폐의등장에서부터 2007년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화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인류 문화의 발생지이자 돈의 발생처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돈을 시작으로 그리스와 로마,중세 유럽, 이슬람 세계,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국 화폐를 해설한다. 중국의 화폐에 대해서는 그 영향을 받은 주변국가의 화폐들까지 소개하였다.여기에 돈과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를 추가했다. 그리고 근대와 현대 화폐의 변화상을 살피고 미래 화폐의 변화를 예측한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인간은 왜 돈을 만들었으며, 돈이 어떻게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는지, 돈으로 인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변해왔는지 등을 알 수 있다.


■ 저자 캐서린 이글턴· 조너선 윌리암스 외
영국대영박물관 큐레이터들로 근대 화폐, 로마 화폐 및 철기시대 주화를 전문으로 담당하고 있다.


■ 역자 
양영철 -일본 도키와대학 커뮤니케이션 학과를 졸업하고 시카고 드폴 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다년간 번역 업무에 종사해왔다. 현재 PLS 대표이다. 역서로는『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시리즈』『워렌 베니스의 리더십 원칙』『당신도 때로는 미칠 필요가 있다』『신화가 된 전설적인 서비스』『도요타식 최강의사원 만들기』『기획서·제안서 작성법』『리포트·보고서 작성법』『성공노트술』『워렌 베니스의 리더십 원칙』『뇌 맵핑 마인드』『신화가 된 사람들』 등이있다. 


김수진 -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만들어진 역사』『20대, 정답은 없다』 등이 있다.


■ 차례
1.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고 그리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 주화와 불리온 | 은의 시대 | 화폐와 신용 | 결론 
부록: 주화와 도시 국가 | 헬레니즘식 인물 묘사


2. 로마의 세계 
초기의 로마 | 로마세계의 주화 |부귀와 타락 | 황제의 통치 | 화폐와 인플레이션 | 후기 로마제국 | 결론: 변화와 연속성 
부록: 초기 로마 통화제도의 발달 | 3세기후반에서 4세기 초까지의 화폐제도 재정비 

3. 중세의 유럽 
로마의 흔적이 남은 화폐: 서기450~750년 무렵 | 페니의 시대: 서기 750~1150년 무렵 | 비잔티움 | 서유럽의 중세 후기: 서기 1150∼1450년 무렵
부록: 화폐의 사용 | 바이킹 


4. 이슬람의 세계 
종교와 화폐의 힘 | 주화와 초기이슬람 | 이슬람 세계의 화폐 원료 | 일상생활과 교역에서의 화폐 | 제국들의 세계 
부록: 이슬람 주조화폐의 기원 | 아름다운 서체와장식 


5. 인도와 동남아시아 
제임스 프린셉과 인도의 화폐| 인도에서 주조화폐의 시작 | 그리스의 큰 영향력 | 화폐와 국가 | 화폐와 종교 | 화폐와 시장 | 인도 통화제도의 확산 | 결론
부록: 인도 초기 주조화폐의 발전 | 동남아시아의 주괴 통화 


6. 중국과 동아시아 
화폐의 기원과 주화의 발달 |주화의 도안 | 화폐의 사용 | 지폐 | 부적과 유통 목적이 아닌 화폐 | 화폐에 대한 담론 | 근·현대의 화폐 
부록: 동아시아에서청동화폐의 발달 과정 | 중국 최초의 은 달러화 지폐 


7. 근대 초기 
새로운 금은지금(金銀地金), 새로운세계 | 국가와 주화 그리고 인플레이션 | 은행권과 지폐 | 결론 
부록: 주조화폐의 제작 | 식민지 미국의 통화 


8.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소금과 주화 문화 |흥미로운 화폐 | 화폐와 인종학 | 변모하는 화폐 |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화폐 
부록: 아프리카의 현대 화폐 | 아프리카의 구리


9. 근·현대기 
신용화폐와 태환성 | 근대의 혁명과전쟁 | 19세기의 미국 | 지적인 변화 | 세계대전과 케인즈 경제학 | 전후 세계와 통화주의 | 동과 서, 북과 남 | 주머니 속의 화폐 |결론 
부록: 영국의 규제시대, 1797년~1821년 | 혁명과 전쟁 속의 화폐 | 현대의 지폐 도안 | 플라스틱으로 지불하기


연표 




MONEY 화폐의 역사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고 그리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귀한 금속을 돈으로 사용했던 역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BC 3천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돈의 사용은 유럽에서 시작되어 중동과 남아시아로 전해지면서 수천 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후 서양의 식민 정책과 근대 산업사회의 발전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돈의 역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었다고 해서 이를 화폐의 기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시작해서 지중해와 근동, 인도 지역에 금?은?동 주화가 화폐의 형식으로 널리 퍼지게 된 BC 250년경의 역사를 살펴보자. 주화는 BC 7세기 말에야 등장하지만 귀한 금속, 특히 은을 화폐로 사용하는 전통은 메소포타미아에서 BC 24세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화폐 사용에서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이 주화가 아닌 은괴(덩어리)를 무게로 달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각 상황에 따라 지불할 때 사용되는 금속의 가치는 천칭(저울)에 달아 계산했다.


통화 현상의 발생을 고대 근동과 이집트 경제생활의 전반적인 정황에 두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는 상품이 인구에게 분배되는 기본 과정을 일컫는 용어인 ‘중앙집중식 재분배’라는 체계를 상징한다. 이것은 시장 활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료, 왕, 사제들이 상품과 농산물을 거둬들인 후 사람들의 신분과 직업에 따라 재분배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사회의 경제생활에서 중앙집중적 권력이 확연히 드러났어도 은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화폐의 기능을 했다. 메소포타미아의 법과 정의를 기록한 왕실 및 신전 고문서와 여러 도시의 유적 점토판과 돌 등이 유적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귀한 금속이 돈으로 사용되었던 사회적 구조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다.


실행되는 법규가 아닌 정의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던 왕의 성명서인 ‘법전’에는 은의 무게에 따른 광범위한 지불방식이 문서화되어 있다. 일부 법전은 무게의 단위를 정하는 일을 왕에 뜻에 따르도록 하고 있으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기존의 무게 단위에 왕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재산에 해를 입히는 것에 대한 벌금도 주로 은으로 산정되었다.


그렇다면 은을 표준단위로 한 이 방식은 어떻게 활용되었을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돈을 지불해야 할 때 -법에 정해져 있는 금액에 따라 벌금 또는 거래대금- 은을 저울에 달아 그 양으로 지불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의 은 저장소를 살펴본 결과 은덩어리를 큰 은괴, 작은 조각 또는 가느다란 줄 모양으로 만들어서 정확한 무게를 달 수 있도록 했으며 문서 기록에 따르면 일정한 무게로 은고리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메소포타미아에 산재한 신전들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금융기관으로 돈의 유통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은은 그 자체로서 일반적인 화폐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왕과 신전들은 무게표준을 제정하고 특정 상품에 대한 은의 가치를 명각(銘刻)으로 나타냈고 상황에 따라 벌금, 이자, 임금 등 지불해야 하는 은의 양을 공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은을 공급하는 것까지는 관여하지 않았다. 은에 대한 화폐 ‘유통’은 왕과 신전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적 관습이었으나 그들이 직접적으로 관리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은은 분명 주변 지역에서 유입되었을 것이며 세금과 공물, 약탈을 통해 왕과 귀족 그리고 신전이 많은 양을 독차지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은은 왕족, 부귀 나아가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으며 금고에 쌓아둔 것을 제외한 나머지 은은 화폐로 사용이 가능했다.


고대 이집트도 비슷한 방식으로 은을 특정 사람들이 독차지했지만 누비아에 금이 가장 풍부했고 나일강 유역에서 발달한 농업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집트 신왕조(New Kingdom, c.1295~BC 1609년)의 문서에는 표준무게가 자주 언급되는데 이 기준에 따라 메소포타미아와 동일한 방식, 즉 지불에 대한 직접적인 수단 및 상품의 가치를 나타내는 단위에 금속이 돈으로 사용되었다.


로마의 세계
로마세계의 주화

로마시대의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주화를 사용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령 이집트의 파피루스에 현존하는 문서나 문학작품 등의 사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대의 문서들은 대부분 매일의 실생활에서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예외적으로 신약성서에는 마태오, 마르코, 루가라는 매우 뛰어난 세 개의 복음서가 있다. 이들은 우화와 예수가 들려주는 여러 이야기들의 총체로 팔레스타인의 하층 계급민의 삶에서 얻어진 경험들, 특히 화폐에 연관된 이야기들이 종종 등장한다.


복음서의 많은 일화들은 돈을 지불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성서의 이러한 언급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들으러온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화폐는 일상생활에서 친숙한 물건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로마령 이집트에 남아 있는 영수증이나 편지 또한 성서에 못지않게 분명한 증거가 된다. 이것들 역시 아무리 작은 거래에서도 화폐가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욱 발전된 신용거래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즉 값을 지불하는 데 있어 실물 화폐를 교환하는 것이 필요치 않은 경우도 있었다.


주조화폐의 사용이 대부분의 로마세계에서 관습이 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로마에 정복되거나 로마령이 된 영토를 아우르는 단일화된 통화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해다. 오직 데나리우스 한 종류만이 로마인의 관리에 있는 영토 내에서 생산된 주조화폐였다. 이미 주조화폐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지중해 지역으로 세력을 뻗어 나가면서 로마는 실용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기존에 있던 주조화폐를 계속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중앙집권적인 강요에 복종시키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체제를 허용해 로마의 체제 안에 합병시키는 것이 다문화제국을 통치하는 로마인들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그것은 행정상, 재정상의 편제였다. 그리하여 로마의 정복 이후에도 원래의 조세제도는 계속 이어졌고, 통화제도의 기능과 주화 자체도 로마의 주화와 공존하면서 계속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로마는 BC 133년에 아시아 지방에서 편입된 페르가몬과 BC 30년에 옥타비아누스에게 정복된 이집트왕국에서 이전 통치자들에 의해 운영된 통화제도도 그대로 두었다. 두 나라 모두는 주변 지역에서 유통되는 같은 가치의 주화보다 은의 함량이 적은 주화를 만들어냈다. 페르가몬과 이집트의 왕은 자신들의 영토 안에서는 그들이 만든 은화만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통화라는 것을 명문화했고, 그 동전은 너무 가벼워서 국경을 벗어나면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역업자들은 이 지역 영토로 들어오거나 나갈 때 환전을 해야 했고, 정부는 이를 통해 이익을 낼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제국의 단일화라는 명분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편리한 제도를 폐지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합병한 영토의 통화제도에 대해서는 현상유지를 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로마의 대응책이었다면, 로마인들은 극단적인 상황에 강제적으로 개입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BC146년, 카르타고와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전쟁의 말기에 카토 장군의 강렬한 표어 ‘카르타고를 멸하자!’에 자극을 받은 로마인들은 도시를 모조리 파괴하였고, 카르타고의 화폐를 유통에서 제외시키고 모두 녹여버리는 방법으로 현지의 주조화폐를 말소시켰다. 카르타고의 주조화폐는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서 한 세기가 넘도록 로마에 골칫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이슬람의 세계
일상생활과 교역에서의 화폐

헤브론 언덕의 사무아에서 발견된 머리장식
이슬람세계에서 돈의 사용과 그 기능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동화들은 매일의 생활에서 기본이 되는 통화로, 15세기에 역사가 마크리지가 화폐에 관해 쓴 논문에 그 핵심이 강조되어 있다. 그는 “팔스(동화)는 비싼 물건을 사는 데는 사용되지 않고 지역간의 거래에서만 사용될 뿐이다”라고 말한다. 다른 어느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세계에서도 부자와 가난한 자의 수입과 그들에게 주어진 권력에는 넓은 간극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11세기 이집트에는 하인들의 한 달 수입이 1디나르라고 했을 때, 재판관의 수입은 100디나르가 되었다. 당시 1디나르로는 100kg의 밀을 살 수 있었고, 다미에타 지역의 특산품인 수가 놓여진 고가의 코트를 사는 데는 1,000디나르가 들었다.


이슬람교도의 단식 기간인 라마단의 마지막 날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는 통치자들이 부조(扶助) 명목으로 국민들에게 주화를 기부한 것으로 보인다.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에서 칼리프는 특별히 10,000개의 카루바(쥐엄나무 열매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작은 금화)를 주조하여 ‘렌틸의 목요일’이라는 축제날에 관리들에게 하사하였다. 현재의 이란에서는 결혼식에서 종종 동전 모양의 대용화폐를 뿌린다. 또 동전에 구멍을 뚫어서 여성의 옷이나 머리장식으로 매다는 경우도 많았는데, 동전의 종류와 양은 여성의 가족에게 지위의 상징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동전들은 전적으로 여성 개인의 소유물로서 그녀의 의지에 따라 추가하거나 처분할 수 있었다.


세금의 징수, 특히 하라지 또는 토지세의 징수는 이슬람 국가들의 세입의 주 원천이었다. 토지세는 국가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고, 적어도 이슬람시대 초기에는 세출의 주 항목이었던 군비의 지불을 가능하게 했다. 하라지를 거두는 것은 보통 농부들이었는데, 그들은 수고의 대가로 거둬들인 세금의 일정 비율을 받았을 것이다. 중세시대에 일단 거두어진 주화들은 봉인된 가방 안에 보관되었다. 역사가 마수디는 세금 내기를 거부한 10세기 이스파한의 국민들에 대해 잔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스파한의 관리들은 이단자를 참수하여 그 머리를 자루 안에 넣고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세금을 잘 내도록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개인들과 국가 모두에게 또 다른 부의 원천이 된 것은 교역이었다. 정부는 항만 사용료나 관세의 형식으로 상인들에게서 대규모의 세금을 거두었다. 1420년대에 예멘에서는 라술 왕조의 술탄 알-나시르 치세기에 아덴 항에 도착하는 원양선박들이 들여오는 재화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바람에 선박들이 아덴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고 제다로 직항하는 일이 벌어졌다. 압바스 왕조의 치세 동안에는 인도양으로 나가는 장거리 항해가 중국과 이슬람세계 사이에서 규칙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페르시아 만의 관문인 시라프 항에서는 중국의 주화들도 발굴된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화폐와 시장

『자타카』에서 언급한 화폐 사용처의 대부분은 종교적이거나 사회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일용품의 구매에 대한 약 20개의 언급들은, BC 2세기에 이르러 시장에서의 거래가 일상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고대 인도에서 종교와 시장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서기 1세기에 인도 서부의 크샤트라파 왕조의 영토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그에 대한 일부 증거를 제공한다. 크샤트라파의 왕 나하파나(40~78년경)의 사위인 라바다타는 나시크의 비문 두 개에 그가 승려 집단에 동굴을 제공하고 받은 4,000카르샤파나로 밭을 사서, 거기서 나오는 식량을 지역의 마을에 공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또한 승려들의 구제를 위해 2,000카르샤파나를 기부하기도 했다.


고바르다나에서는 직조공들의 단체에 돈을 예금하고, 예금한 사람들에게는 승려들의 옷을 사기 위한 1%의 이자를 매달 지불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일화를 통해 고대 인도에서는 이슬람이나 기독교의 세계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종교와 화폐가 마찰을 빚는 일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비문들에서는 라바다타가, 전쟁 뒤에 자신의 의식을 정화하기 위해 제식에 참가한 승려들에게 사례금으로 3,000두의 소를 지불했다는 기록도 있다. 베다 문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고대 인도의 지도자들은 오래된 전통을 유지하는 것에 매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소를 지불수단으로 사용하는 관습이 남아 있었다.


『자타카』에 등장하는 매매에 대한 기록과 라바다타에 의해 만들어진 예금과 이자에 대한 복잡한 협의는 모두 고대 인도에서 대다수의 상업적 거래가 화폐로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역 또한 화폐 사용의 복잡성을 확장시키는 데 한 몫을 했다. 예를 들어 『쿨라카-세티 자타카』에는 화폐가 사회의 모든 계급에 침투한 것으로 여겨지는 삽화가 실려 있는가 하면, 다양한 현물거래의 사례와 함께 화폐의 지불과 연관 있을 법한 활동의 범위를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천민에서 출발해 부유층에 오른 한 청년의 출세 이야기를 보자.


처음에 그는 죽은 쥐를 발견하고, 여인숙의 고양이에게 먹이라며 구리동전 한 닢에 그것을 팔았다. 그는 이 동전으로 꿀을 샀고, 꿀을 탄 물을 꽃장수에게 팔고 꽃을 받았다. 그 후에는 꽃을 팔고 그 수입을 이용해 8카르샤파타를 모을 때까지 싼 물건을 매매하는 일을 반복했다. 청년의 다음 모험은 어린이들에게 꿀을 주고 장작을 모으는 일이었다. 그는 옹기장이에게 그 장작을 파는 것으로 16카르샤파나와 단지 몇 개를 얻었다. 그리고는 다시 물을 파는 일을 시작해 이번에는 풀 베는 사람에게 물을 팔고 몇 다발의 목초를 받았다. 그것을 1,000카르샤파나에 말 거래상에게 사료로 팔았다. 그의 영업활동은 이제 큰 규모로 발전했고 그는 8카르샤파나를 지불하고 사륜마차를 하나 구입해 항구로 가서 신용을 담보로 새로 도착한 배가 실어온 뱃짐을 샀다. 평소처럼 이 뱃짐을 사기 위해 상인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젊은이를 거쳐야만 그것을 살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젊은이는 재산을 200,000카르샤파나로 늘렸다.


이 우화는 석가가 직접 말한 것으로 『자타카』에 기록되어 있는데 “가장 초라한 출발과 하찮은 자본으로도 영리하고 가능성 있는 사람은 부를 일굴 것이다”라고 하여 젊은이의 행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과 동아시아
주화의 도안

“주화 하나에서 우리는 하늘과 땅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주화의 형상은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대에 중국인들은 지구는 사각형이고 하늘은 둥근 지붕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은 천명(天命)을 통해 땅과 교감하고, 그 대리인인 황제는 백성들을 위해 통치를 하고 화폐를 발행했다. 그래서 백성들을 위해 하늘과 땅의 모습을 모두 반영하는 화폐를 만들 때, 황제는 천지와의 상징적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었다. 옥으로 만든 종(琮)을 비롯해 의식에 사용되는 물건들도 대부분 둥글고 각진 특징을 살려서 만들어졌다. 또한 한나라 때부터 고대 중국의 철학은 음양오행설에 중점을 두고 발전했다. 이 학설에 따르면 주화는 각각 양면(음과 양)을 가지고 있고, 다섯 방향(동, 서, 남, 북, 중앙)을 구체화하는 완벽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사각형 구멍은 생산이나 유통 면에서도 기능적인 것이었다. 수천 개의 주화가 다층의 거푸집에서 한 번에 주조되었고, 완성된 동전을 떼어내면서 다듬어지지 않은 가장자리를 매만져야 할 때도 편리했다. 주화를 제자리에 고정시키기 위해 사각의 금속 막대를 네모진 구멍에 넣으면 더 빨리 다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화가 한 번 발행되어 유통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이 사각 구멍을 이용해 100개나 1,000개 단위로 주화를 실에 꿰어 사용할 수 있었다.


주화에 새겨진 명문은 황제의 치세기와 화폐의 가치, 그리고 때로는 유통의 범위까지도 나타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중국 주화의 명문은 전통적인 서예체로 새겨졌는데, 보통 해서, 초서, 전서, 행서의 네 가지 활자체 중 하나였다. 중국의 사료들은 종종 활자체를 고안한 서예가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이 황제의 자필일 경우 특히 더 그렇다.


가끔은 제조 장소를 나타내는 글자들에서 간과하기 쉬운 미묘한 차이들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동전의 앞이나 뒤에 작지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시들이 종종 더해지기도 했다. 중국의 전설에는 이러한 작은 표시 중 하나가 바로 당나라에서 가장 미인으로 꼽히는 양귀비의 손톱 흔적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가장 눈에 띄는 표시는 특히 만주 지역 주조소의 이름이 들어간 동전의 뒷면과 청나라(1744~1911)의 주화들에 있는 중국어 활자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이러한 주화들은 1633년에 처음 발행되었을 때는 뒷면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 1678년, 화폐의 발행 권한이 50개가 넘는 관청들에 분산되면서, 각 기관명의 첫 글자나 두 번째 글자를 뒷면에 넣게 되었고, 1742년부터는 용광로와 일련번호도 첨가되었다.


서구의 주화들과 달리 전통적인 중국의 주화들은 어떤 형식의 그림 도안도 넣지 않았다. 명문만이 화폐의 도안이자 식별 수단이었다. 중국 예술의 초기 역사에서는 왕족과 귀족들의 등장을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동아시아의 주화에서 나타난 최초의 초상은 중화민국이 설립된 1912년에 만들어진 난징의 달러화에 등장한 중국의 초대 대통령 쑨이셴의 초상이다. 통치자의 초상을 넣는 서구의 전통에 오랫동안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중국 통화 전통의 연속성과 그 보전에 대한 확고한 선언이다.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흥미로운 화폐

아프리카, 북미, 아시아, 호주와 태평양 일대에서 주화를 쓰지 않는 사람들과 마주친 유럽 여행자들과 상인들은 소금과 여타 금속들 이외에도 화폐로 쓰이는 넓은 범위의 물건들을 묘사했다. 그들은 거대한 바윗돌, 나무 조각, 깃털과 심지어 해골에 이르기까지 돈으로 여겨지리라고는 미처 예견하지 못한 많은 물체와 조우했다. 이에 대한 최초의 보고는 15세기 아프리카와의 직접 교역로를 열었던 포르투갈 항해사, 무역상들이 서아프리카에서 쓰인 구리반지, 옷감, 조개껍데기와 나무 조각을 언급하면서부터였다.


조개껍데기 화폐는 북미의 많은 지역에서 묘사됐다. 이런 것들은 금은 대신 화폐와 장신구로서 기여했다. 유럽 정착민은 대합껍데기로 만든 장신구를 웜펌(Wampum)이라고 불렀다. 중앙아메리카의 스페인 초기 정착민들은 그들의 정복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멕시코 토착민들이 거래에 작은 구리 도끼와 코코아 열매를 사용한다고 언급했다. 남아시아의 주화는 거의 유럽만큼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유럽 여행자들은 현지에서 조개껍데기가 지불수단으로 쓰이는 것을 발견했다.


7~12세기까지 동남아시아에서도 역시 동전이 쓰였지만 외국 여행자와 무역상들은 많은 다른 종류의 지불수단과 맞닥뜨렸다. 주화를 사용한 무역상과 여행자들이 마지막으로 탐험한 지역은 호주의 섬들과 태평양이었다. 많은 섬들은 이렇다할 지불수단이 없었지만 다른 지역, 특별히 마이크로네시아와 멜라네시아를 일찍이 방문한 유럽인들은 조개껍데기, 천, 깃털, 이빨과 돌을 포함해 화폐로 규정되는 복잡한 물품들을 발견했다. 서양인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지불방법은 산타크루즈와 뱅크 열도, 더 나아가 태평양 일대에서 쓰였던 깃털화폐의 다양한 형태였다.


여행자와 무역업자가 아프리카, 미주대륙, 아시아와 호주 일대에서 발견한 익숙지 않은 형태의 화폐에 대한 반응은 모두 우리의 돈에 대한 선입견을 반영한다. 주화(그리고 나중에는 지폐)는 유럽인, 중국인, 회교를 믿는 아랍인들 모두에게 표준이 되는 돈의 형태이고 지불방식이었다. 이들 주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주화나 지폐가 쓰여야 할 상황에서 소금, 조개껍데기, 옷감, 깃털, 돼지 등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 결과 방문객들은 이 물품들을 주화 대신 사용하는 화폐의 원시적인 형태로 정의 내렸다. 


근?현대기
주머니 속의 화폐

국제경제적 관심사에서 대중의 주머니 속으로 화제를 옮기던 20세기는 화폐의 일상적인 사용에 있어 중요한 변화를 목도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귀금속이 마침내 일상적으로 유통되는 모든 통화의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것이다. 신용발행의 구리화폐가 19세기에 이미 일상화됐으나 20세기에는 유통되는 모든 통화가 신용발행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귀금속은 현대 원형 화폐의 모양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간 단위의 화폐는 주로 은색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반면 유통되는 가장 높은 가치의 주화로 1983년 도입된 영국의 1파운드 주화는 눈에 띄는 금색의 니켈-놋쇠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주화는 단지 금속의 내용이 바뀌고 내재한 가치가 감소했을 뿐 아니라 이에 따른 결과로 역사상 가장 큰 소매결제의 비율에서 점차 증가하는 생산과 지폐 사용 앞에 길을 내주었다.


20세기 동안 많은 서양 국가들의 대규모 상업 그리고 금융거래에서 더 이상 현금을 쓰지 않는 일이 증가했고, 대신 신용기관, 수표 그리고 전자화폐가 사용됐다. 점차적으로, 이런 발전은 일상생활에 있어 화폐의 사용에 영향을 미쳤고, 은행계좌는 더 많은 비율의 인구에 더 보편적이 됐다. 은행과 소매점으로부터의 신용 접근성은 훨씬 더 많이 확산됐다. 기술적인 발전은 현금의 사용 없이 거의 모든 거래를 완전하게 처리하는 신용카드, 현금카드와 같은 발명을 낳았다.


20세기 중반 미국과 대영제국의 국민들은 다양한 구매와 지불을 위해 수표를 쓰는 것에 빨리 익숙해졌다. 반면 독일과 다른 유럽 대륙의 국가들은 전후시대 동안 거의 모든 일상적인 목적에 현금을 고집했다. 화폐의 국제화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아마도 그 때문에 독립주권의 상징으로서 국가통화를 유지하는 것은 정부와 국민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게 남아 있었다. 유럽연합의 통합 화폐인 유로를 창설하는 동안, 어떤 상징이 새로운 주화와 지폐에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지폐는 유럽의 통일과 협력을 장려하고자 전 유럽에 걸쳐 동일한 디자인을 쓰기로 결정됐다. 그러나 주화는 각 나라마다 뒷면 디자인을 다르게 하기로 했다. 어떤 나라는 왕가의 모습을 유지하기로 했고, 반면 다른 나라는 예술적이고 역사적인 상징을 선택했다. 이처럼 모든 나라는 그들의 주화에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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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들은 유로에 동참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다. 영국의 유로 승인에 반대하는 운동가들은 경제적 관련, 그리고 국가 정체성과 주권 모두에 초점을 맞췄다. 어떤 면에서 현대세계는 화폐가 발행되고 사용되는 방법에 있어 많은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비슷하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