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비들은 통치 집단의 중요 인물로 그녀들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후궁과 왕조,심지어 한 시대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몇몇 후비들은 개인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권력을 총동원했고 총애를 받으려 서로 질투하고다투는 등의 문제로 때론 왕조와 그 시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의 중심에 섰던 여치, 무측천, 자희태후 등 몇몇 황후들이 비록후세에 악녀 혹은 잔혹한 살인자라는 최악의 평가를 받았지만, 그녀들이 행한 수많은 악행과 삐뚤어짐은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몸부림이었다고 평가한다.
살아남기 위하여 황제를 차지하고 권력에 서는 것을 그 목적대상으로 했던 후비들의 행적을통해 중국의 봉건제도와 그 시대의 정치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책이다.
■ 저자 샹관핑
섬서성 기산인으로 난주대 중문과한어어문학교를 졸업했다. 중앙당학교 정법을 전공했으며 감수성 잡문학회회원으로 잡지사 『홍기』 『민주와법제』 『해방군일보』 『중국청년일보』 등에각 분야의 글 100여 편을 발표했다. 저작으로 『제왕종횡』이 있다.
■ 역자 한정민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중국지역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국어 통 번역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韓國國際旅遊業的發展』 『關于中美知識産勸糾紛的背景與影向硏究』 등의글을 발표했다.
■ 차례
서문
1장 중책을 맡아 나라를 일으킨 여걸들
대의를 세우고그 이름을 남기다 - 사사로운 정을 돌보지 않은 후비
국정을 도와 현명하게 군주를 보좌하다 - 공을 세운 후비
직접 변란에 맞서싸우다 -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후비
중책을 맡아 나라를 일으킨 여걸들 - 섭정을 한 후비(1)
권력욕에 사로잡혀 나라를위태롭게 만들다 - 섭정을 한 후비(2)
위기에서 천하를 구해 위엄을 보이다 - 섭정을 한 후비(3)
2장 절세미인이 한순간에 신분이 바뀌어 야심을 품다
한순간에 귀한 신분으로 바뀌다 - 궁녀 출신의 후비
비천한 집안의 아리따운 여자는 궁에서 야심을 품는다 - 신분이 낮은 후비
절세미인 자매가 한 제왕을 섬기다 - 자매가 한 제왕을 섬긴 후비(1)
총애를 얻었으나 참혹한 결말을 맞다 - 자매가 한 제왕을섬긴 후비(2)
망한 나라의 공주로 원수의 후비가 되다 - 황족 출신의 후비(1)
권력투쟁에 말려들어 팔려가다 - 황족 출신의후비(2)
3장 젊음을 희생시켜 저승의 노리개가 되다
변란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두 황제를 섬기다 - 두 황제를 섬긴 후비
젊음을 희생시켜 저승의 노리개가 되다 - 순장되는 후비
눈앞에닥친 치욕에 자살로 맞서다 - 자살한 강직한 후비
권력을 탐하여 인격을 잃고 늑대처럼 잔인해지다 - 잔인했던 후비
풍파에 빠져여생을 포기하다 - 강요에 못 이겨 자살한 후비(1)
총애를 잃고 황천길로 뛰어들 수밖에 없구나 - 강요에 못 이겨 자살한 후비(2)
후비로 살다 황제가 죽자 평민의 삶으로 돌아가다 - 재가하는 후비
4장 총애를 잃어 냉대를 받으니 붓으로 달랠 수밖에 없구나
추한 용모에 제왕도 어찌 도리가 없다 - 못생긴 후비
욕정을 절제하지 못하여 후궁을 어지럽히다 - 음란했던 후비
서화와장기에 능하구나 - 다재다능한 후비
술을 탐하여 자신을 해치고 나라에 재앙을 가져오다 - 술에 빠진 후비
넘치는 재능으로 간언하고정으로 망국의 한을 표현하다 - 시와 정이 넘친 후비(1)
넘치는 재능으로 고독한 후궁의 풍경을 남기다 - 시와 정이 넘친 후비(2)
총애를 잃어 냉대를 받으니 붓으로 달랠 수밖에 없구나 - 시와 정이 넘친 후비(3)
역자 후기
부록 - 역대 중국황제
중국사 열전 : 후비
국정을 도와 현명하게 군주를 보좌하다 - 공을 세운 후비
역대 후비들은 무수히 많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여인들이다. 그러나 소수의 총명한 여인들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동시에 지혜로서 부군을 성군으로 이끈 현명한 내조자였다. 이들은 부군과 환난을 같이하며 왕조의 안녕을 걱정했고 직접 정책 결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비록 그 동기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였음을 부인하기 어렵지만 그들의 정치 참여가 왕조의 안녕을 유지하는 데 커다란 공로가 되었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요나라의 건립자 태조 야율아보기의 황후 술률평도 보통의 여성과는 달랐다. 술류평의 선조는 위구르인으로, 부친 술율월완은 요련씨 부락에서 요직을 역임했고 모친은 아율아보기의 고모였다. 따라서 술률평과 야율아보기는 사촌남매지간이었다. 서기 897년을 전후로 술률평과 야율아보기는 결혼한 것으로 추측된다. 서기 907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칸(중세기 선비, 돌궐, 회골, 몽고 등 종족의 군주의 칭호)에 오르자 28살의 술률평도 황후가 되었다.
결단력이 있었던 술률평은 황후에 올라 야율아보기의 유력한 군사 참모가 되었다. 요나라가 군사 행동을 할 때마다 그녀는 야율아보기와 함께 중요한 정책 결정을 했다. 한번은 야율아보기가 당항을 공격하며 술률평에게 후방을 지키게 했다. 그런데 이때 황두, 취박 등 두 부락이 야율아보기가 출정나간 틈을 타서 후방을 급습했다. 그러나 술률평은 남은 인원을 이끌고 반격하여 이들을 대파했다. 그로부터 술률평은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그 이름만으로도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술률평은 고도의 군사적 재능뿐만 아니라 명석한 두뇌의 여성이었다. 중요한 문제에 부딪치면 그녀는 넓은 식견으로 야율아보기의 황당한 행동들을 제지했다. 서기 908년, 당시 후당에서는 태조 이극용이 죽고 그의 아들 이존욱이 황위를 계승한다. 제위에 오른 이존욱이 당시 스스로 유주노룡군절도사(유주는 지금의 북경)라고 칭하고 있던 유수광을 공격하려고 하자, 유수광은 군사 참모 한연휘를 사절로 보내 야율아보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요나라에 온 한연휘는 특사의 신분임을 내세워 야율아보기에게 무릎을 꿇어 절하기를 거절했다. 이에 노한 야율아보기는 그를 억류하여 말을 기르게 했다. 특사에 대한 이러한 대접에 술률평은 옹졸하다고 생각하고 야율아보기를 찾아가 간언했다. “비록 구원을 요청하러 온 자인데도 저 얼마나 절개와 의리가 있습니까? 이러한 자를 대함에 있어 마땅히 예로써 대해야지 저렇게 실례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녀의 충고에 한연휘를 다시 만난 야율아보기는 요나라에 남아 자신을 도와 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깊이 감복한 한연휘가 이를 수락하자 야율아보기는 그를 중용했고, 얼마 후에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중용된 한연휘는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항과 실위(거란의 일족)를 공격하여 복속시키니 모두 한연휘의 계략에서 나온 것이었다.”『요사(遙史), 74권』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의 술률평의 안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얼마 후 발생한 일은 술률평의 비범함을 보여준다. 당시 오주 이변(후에 남당의 열조가 됨)이 야율아보기에게 맹화유(석유)를 바친 적이 있었다. 야율아보기는 이 기름의 위력을 전장에서 시험해 보기 위해 특별히 삼천기병을 선발하여 당시 유주를 점거하고 있던 유수광부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술률평이 나서며 경솔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말렸다. “어찌 기름을 시험하려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는 행장 앞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야율아보기에게 물었다. “저 나무가 껍질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뜻을 몰랐던 야율아보기는 껍질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냐고 대답했다. 그러자 술률평은 “당신이 그러한 도리를 안다니 다행입니다. 유주의 백성들은 땅에 의지하여 생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나무의 껍질과 같습니다. 만약 그들의 땅을 빼앗는다면 나무에 껍질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만약에 패하기라도 한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우리의 안위마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야율아보기는 크게 깨달아 즉시 그 황당한 출병을 취소했다.
서기 921년, 후당의 이존욱은 진주의 장문례를 포위하자 정주의 왕처직은 매우 두려웠다. ‘진주와 정주는 입과 입술의 관계이니 진이 망하면 정이 고독해지니 아들 왕욱을 거란에 보내 진주를 구해달라 청했다.’『거란국지(契丹國志)』 사자로 온 왕욱은 진주의 많은 미녀들을 미끼삼아 야율아보기의 구원병을 얻고자 했다. “진주에는 미녀가 구름과 같이 많고 금과 비단이 산처럼 쌓여 있으니 속히 출병하시면 모두 대왕의 것입니다. 그러나 늦으면 모두 진왕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과연 솔깃해진 야율아보기는 왕처직을 돕기로 하고 이존욱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술률평은 경솔하게 군사를 움직이지 말라며 단호히 반대했다. “우리는 서쪽에 말과 양이 풍부해 가난한 자가 없습니다. 어찌 군대를 이끌고 멀리 나아가 위험을 자초하는 것입니까? 진왕의 군사는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는데 나중에 위험에 빠지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미녀와 비단 생각에 빠져 있던 야율아보기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출병을 강행했다. 출병의 결과는 술률평의 짐작을 벗어나지 않았다. 야율아보기가 출병하자 이존욱은 친히 오천의 철기군을 거느리고 신성(현 심양)에서 거란의 선봉을 맞았다. 이존욱이 뽕나무 숲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공격하자 야율아보기의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설까지 내려 거란의 인마는 추위와 굶주림에 태반이 죽고 말았다. 물론 야율아보기는 술률평의 충고를 떠올리며 탄식했다고 한다.
야율아보기가 죽고 술률평은 한때 섭정을 하며 전권을 휘둘렀으나 가혹한 정치로 인해 내분이 잦아 말년에는 몹시 불우했다. 기원 953년, 네 명의 황제를 거친 이 노인은 75세의 나이
로 병사했다.
중책을 맡아 나라를 일으킨 여걸들 - 섭정을 한 후비(1)
황제가 죽고 그 다음 황위 계승자의 나이가 어려 나라를 통치할 수 없을 때는 보통 어린 황제의 어머니가 대신 조정대사의 처리를 도와주었다. 남존여비 사회에서 여인이 조정의 일을 볼 때는 대신들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피하기 위해 특별히 황제의 어좌 뒤에 발을 쳤다. 그들은 이 발 뒤에 앉아서만 조정의 사무를 볼 수 있었는데, 이런 까닭에 태후들이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보는 것을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고 했다. 정무를 볼 만한 능력이 있는 후비는 대부분이 수완이 좋은 여성들이다. 그들은 황제의 생전에 보고 들으면서 조정대사의 처리에 대한 경험을 조금씩 쌓아갔다. 이로 인해 부군이 돌연 세상을 떠나거나 병으로 인해 조정을 살필 수 없으면 정치 경험이 있는 후비들이 왕조의 실질적 통치자가 되곤 했다. 수렴청정을 한 후비들 중에는 정치적 야심이 너무 커 사람들의 원성을 사는 일을 적지 않게 저지르기도 했지만, 일부 후비들은 왕조의 안정과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61세까지 6명의 황제를 거친 동진의 강제 사마악의 황후 저산자는 거의 40년을 섭정했다. 어린 황제가 즉위하거나 왕조에 위기가 닥쳐오면 그녀는 위엄과 명망으로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갔다. 중국 역사상 그녀는 섭정 후비 중에 사리판단이 정확했던 대표적인 여인으로 꼽힌다. 그녀는 하남 양적이 고향으로 관료 가문에서 태어난 규수였다. 그녀의 부친 저부는 거기장군으로 있다가 소준(蘇峻)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향정후에 봉해진다. 그 직후 낭야왕 사마악이 왕비를 선발했는데 이때 저산자가 낙점을 받는다. 그리고 서기 342년, 사마악이 황제에 즉위하자 그녀는 황후로 책봉된다.
사마악이 즉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당시 두 살에 불과했던 큰 아들 사마담이 목제로 즉위한다. 이에 사도 채모 등은 저태후가 섭정할 것을 상주한다. 그러나 그녀는 섭정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가 비록 어리나 대신들이 잘 보필한다면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신들이 뜻을 굽히지 않자 저태후도 결국 그들의 뜻을 따르게 된다.
이렇게 저태후는 태극전에 특별히 마련한 흰 비단 휘장 뒤에서 두 살 난 사마담을 가슴에 안고 조정의 일을 처리했다. 사마담이 15세의 성인이 되자 저태후는 그에게 전권을 돌려주고자 한다. 그리고 손수 한 편의 글을 적어 이를 대신들에게 알렸다. ‘지난 날 황제께서 너무 어려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섭정을 해 왔다. 이제 황제께서 이미 장성했으니 스스로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 그대들은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마음을 다해 돕도록 하라’『진서(晋書) 32권』
사마담의 친정 기간에 중원과 북방 일대에서는 여러 왕조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었는데, 후조, 전연, 전진 등이 끊임없이 혼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남 지방에 위치한 동진왕조는 큰 영향이 미치지 않아 평안했다. 나라 안에서는 낭야 태수이자 서주자사인 사마소의 사위 환온이 서기 347년에 기회를 틈타 성한왕조를 단번에 멸망시킨다. 하지만 동진은 저태후의 섭정과 대신들의 노력으로 큰 영향을 받지 않고 평안했다.
서기 361년, 저태후가 숭덕궁으로 옮겨 간 지 5년 후, 19세의 사마담이 병사한다. 이에 저태후는 당시 21살이었던 성제 사마연의 아들 사마비를 옹립하여 황위를 계승시킨다. 그가 바로 애제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황제가 된 사마비는 저태후와 대신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는 도가 사상에 빠져 식사도 거른 채 늘 불로장생의 선약만을 복용했고, 결국 약에 중독되어 조정을 살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신들은 저태후에게 다시 섭정해 줄 것을 청했고, 사마비는 재위 4년 만에 약 중독으로 죽고 만다.
사마비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저태후는 그의 동생 사마혁에게 황위를 계승하기 한다. 사마혁이 즉위했지만 아직은 저태후가 조정을 이끌고 있었는데, 당시 전진과 전연을 정벌하고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온은 사마혁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황제를 옹립하고자 했다. 환온은 자신의 명성과 실력이라면 사마혁을 폐위시키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만큼이나 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는 저태후가 명목을 세워줘야 했고, 그녀를 통해서만 황제를 폐위시킬 수 있었다. 환온은 저태후의 태도를 시험해 보기로 한다.
서기 371년 겨울 어느 날, 저태후는 불당에서 예를 드리고 있었다. 이때 내시가 뛰어 들어와 급한 상주(上奏)가 있으니 빨리 처리해 달라고 청한다. 상주문을 들고 문에 기대어 몇 줄을 읽은 그녀는 환온이 사마혁을 폐위시키도록 압박한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던 저태후는 아무런 동요 없이 그에게 답장을 써 준다. 조서를 받은 환온은 처음에는 저태후가 반대하는 것인 줄 알고 낯빛이 변했지만 곧 태후의 뜻을 알게 된다. 환온의 야심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저태후는 지금 그에게 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다를 바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특히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환온의 계획을 저지하는 것은 왕조에 더 큰 혼란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 그녀는 한 발 양보하여 대혼란을 피하기로 한다. 환온은 저태후의 이름을 빌어 사마혁을 폐위시켜 해서공으로 봉하고 그를 오현의 서채리로 보냈다. 그리고 원제 사마예의 막내아들로 이미 나이가 50살이 넘은 사마욱을 옹립한다.
나이 50세의 이 꼭두각시 황제는 오직 환온의 뜻에 의해서만 행동했다. 야심을 가득 차 있던 환온은 이런 황제가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반대 세력을 대거 숙청하여 조정에서 쫓아냈고, 사마욱은 단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렇게 암울한 황제 노릇을 하던 사마욱은 채 2년도 되지 않아 숨을 거두고 그의 13살 난 아들 사마창명이 효무제로 즉위한다.
사마욱은 숨을 거두기 전에 환온을 불러 태자를 세우는 일에 대해 상의한 적이 있는데, 사마욱이 죽으면 자신이 그 뒤를 잇기를 꿈꿔왔던 환온은 태자를 세운다는 말에 화가 났다. 환온은 “네가 죽으면 네 아들이 과연 황제 노릇을 할 수 있는지 봐라”며 위협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환온은 얼마 후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자 대신들은 나이가 어린 사마창명이 걱정되어 저태후에게 섭정을 요구했다. 비록 일부 대신들은 저태후가 사마창명의 사촌 형수가 되므로 섭정이 적절치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저태후는 망설임 끝에 다시 섭정을 하게 된다. 2년 후 저태후는 또다시 황제가 다 자랐다는 이유로 사마창명에게 대권을 돌려준다.
저태후의 마지막 섭정 주에 동진은 큰 위기를 만난다. 북방에 웅거하고 있던 전진왕조가 부견의 통치하에 크게 강성해져 줄곧 동진을 노렸던 것이다. 서기 384년, 부견은 보명 60만, 기병 27만을 이끌고 동진을 한 입에 집어삼킬 준비를 했다. 동진의 생사존망이 달리 이 중요한 순간에 저태후는 사안을 중용하여 겨우 8만의 병력으로 전진의 군대를 전멸시켰다. 이것이 바로 중국 역사상 최대로 일컬어지는 그 유명한 비수전투이다.
비수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61세의 저태후는 현양전에서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40여 년간을 섭정했던 저태후는 강함과 유연함을 겸비하여 변화에 잘 대처했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여 동진의 난관들을 하나하나 극복했다. 수없이 많은 섭정 후비들 중에서 저태후의 수완은 단연 남달랐다고, 정사를 처리함에 있어 과감하고 생활이 검소하여 훗날 사람들에게 ‘여정치가’라 불리며 칭송되었다.
망한 나라의 공주로 원수의 후비가 되다 - 황족 출신의 후비(1)
후비 중에는 훌륭한 집안의 규수 이외에도 황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황제나 왕의 딸들이 있었다. 황제의 공주가 후에 다른 왕조의 후비가 되는 것은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하나는 아버지의 왕조가 멸망하여 다른 왕조의 후궁으로 들어가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비슷한 수준의 결혼을 고려해 다른 왕조의 황제나 황자들과 결혼하게 되는 경우이다. 옛말에 ‘황제의 딸은 근심 없이 결혼한다’는 말이 있지만, 내쟁이 극심했던 후궁이었기에 설령 공주 신분의 후비일지라도 끝도 없는 고통과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현존하는 왕조와 다른 왕조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적대심이 아주 강했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약육강식의 투쟁이 끝없이 이어졌다. 제왕들은 공존하고 있던 다른 왕조를 삼키려는 꿈을 늘 갖고 있었다. 상대를 격파하고 승리자가 되는 것에 그들은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영토와 백성들뿐만 아니라 그 왕조의 공주를 포함한 아름다운 미인들도 이러한 정복욕에 부채질했다.
공주의 신분으로 후비가 된 여성 중에 가장 황당했던 인물이 송나라 시대에 있었다. 송나라 전폐제 유자업의 귀빈(송대에는 귀빈의 지위가 황후 바로 아래였다) 유영미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는데, 신채공주 유영미는 유자업의 친고모였다. 그녀는 문제 유의륭의 열 번째 딸이고 유자업은 유의륭의 친손자였다. 본래 유영미는 유자업의 황후 하령완의 오빠인 하매와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으나 천하의 패륜아였던 유자업은 강제로 고모를 범해 자신의 후비로 삼았다.
유씨와 하씨 집안은 매우 각별한 관계였는데, 유자업, 하령완, 유영미가 모두 친인척이었고, 또한 하황후의 어머니는 무제 유유의 작은 딸로 예장강장공주로 봉해진 유흔남이었고 아버지 하우는 유명한 장군이었다. 따라서 유자업의 부친 유의륭과 유영미, 그리고 하황후와 그녀의 오빠 하매는 모두 외사촌 남매지간이었다. 이렇게 두 집안은 친척끼리 사돈을 맺은 복잡한 관계였다. 유자업은 고모부의 여동생인 하령완을 황후로 맞은 것이다.
친인척은 물론 남매지간, 심지어 모자(유자업 부친 효무제 유준은 생모와 추악한 일을 저질렀다)끼리도 근친상간을 저질렀던 당시의 송나라 황실에서는 이러한 일이 이미 괴이하거나 놀랄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나쁜 영향을 받아서인지 즉위 당시 16살이었던 유자업 역시 향락에 빠져 있었다. 그는 특히 변태적인 색욕을 부리기로 유명한 황제였다. 그는 이미 결혼한 고모 유영미를 고모부 하매의 손에서 빼앗기 위해 주도면밀한 계략을 꾸몄다. ‘그는 먼저 고모 유영미를 궁에 들어오게 한 후 며칠 후 고모가 갑자기 죽었다고 알렸다. 하매가 의심할 것을 염려한 유자업은 몰래 궁녀 한 명을 살해해 그 시체를 관에 넣어 하매의 집으로 보내 성대한 장례를 치르게 했다.’『송사(宋史), 41권』 이미 유자업의 심보를 알아차린 하매였지만 그의 폭위가 두려워 감히 관을 열어보지 못하고 그대로 매장했다. 그러나 도둑이 제 발 저린 유자업은 하매가 그의 악행을 폭로할 것이 두려워 그를 제거하기로 했고, 하매 역시 유자업을 증오하며 그를 없앨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결국 하매가 손을 쓰기 전에 유자업이 선수를 쳐 그를 살해한다.
당시 이 사건은 『위서(魏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유자업은 고모를 범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성을 사씨로 바꾸게 하고는 그녀를 귀빈으로 봉했다. 그리고 자신의 악행을 숨기기 위해 고모와 외모가 비슷한 여자가 새로 후궁에 들어온 것처럼 꾸몄다.’ 그 후로도 유자업의 악행은 계속되다가 일 년도 안 되어 내란이 일어나 살해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송나라 후궁에서는 인륜을 저버린 행각들이 계속되었다.
권력을 탐하여 인격을 잃고 늑대처럼 잔인해지다 - 잔인했던 후비
후궁의 수많은 궁녀들 가운데 후비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이 때문에 갖은 방법으로 후비가 된 여인들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또 권력과 사욕 앞에서 하나둘씩 이성을 잃고 악랄하게 변해갔다. 어떤 후비들은 질투심 때문에 부군이 다른 여성들과 함께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잔인하게 그들을 박해했고, 일부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너무나 강해 위협이 된다고 여기면 극단적인 수단으로 그들을 제거했다. 장엄하고 화려한 후궁에서는 참혹하여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이러한 비극들이 계속되었다.
질투심이 강하고 사납기로 유명했던 조돈의 황후 이봉낭은 하남의 안양 사람으로 부친 이도는 절도사를 지내다 태위를 역임했다. 조돈은 주보인 조구의 주선으로 이봉낭을 왕비로 받아들이고 후에 영국, 정국 부인으로 봉한다. 서기 1168년, 23세의 이봉낭은 후에 영종이 되는 아들 조확을 낳았고, 3년 후 조돈이 황태자로 책립되자 그녀 역시 태자비가 되었다.
태자비가 된 이봉낭은 고종 조구와 효종 조선의 사이를 부추겨 이간질을 시켰다. 그러나 일이 탄로나 결국 조구와 조선의 노여움을 샀다. 조구는 그녀를 태자비로 세운 것에 대해 후회하며 다시 한 번 이간질을 한다면 황태자비 자리를 폐위시키겠다고 경고했다. 그녀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조구는 비록 이봉낭이 눈에 거슬렸지만 태자비 자리에서 내쫓아내지는 않았다. 서기 1189년, 63세의 조선이 조돈에게 제위를 양위하자 이봉낭은 황후가 된다.
황후의 자리에 올랐지만 이간질하는 습관만은 여전했다. 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야심도 커져만 갔다. 얼마 후 연회에 참가한 이봉낭은 태상황 조선에게 아들 조광을 황태자로 책립해 달라고 요구했다. 조선은 조돈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태자책봉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며 그녀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그녀는 매우 불쾌해하며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다. “첩이 육례를 치르고 가왕을 직접 낳았는데 왜 안 된다는 것인가요?”『송사(宋史), 243권』 그 속뜻은, 가왕 조확은 자신이 직접 낳았지만 태상황 조선은 고조의 양자가 아니냐는 뜻이었다. 자신의 약점을 들춰내자 조선은 화가 나 노발대발 했다. 연회가 끝난 후, 이봉낭은 조확을 데리고 조돈에게 달려가 울면서 하소연했다.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지 않는 것은 조선이 다른 뜻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태상황 조선은 조던을 폐하려는 뜻도 있다고 이간질시켰다. 이때부터 조돈은 부친과 대립하고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조선이 병중에 있는 동안에도 병을 핑계로 문안을 가지 않았고, 심지어 조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복상을 거절했다. 장례를 치를 방법이 없자 조정에서는 소동이 일어났다. 결국 조여우, 한탁주 등은 태황태후와 상의하여 조돈의 병을 이유로 황위를 조태자에게 넘기고 조확의 주관으로 조선의 장례를 치렀다.
이간질뿐만 아니라 그녀는 질투도 아주 심했다. 그녀는 아예 조돈이 다른 여인들을 가까이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한번은 조돈이 겨우 궁녀의 손을 만졌다는 이유로 처참한 사건을 일으킨다. 하루는 한 궁녀가 조돈의 손을 씻겨 주는데 대야를 받치고 있는 가늘고 하얀 손이 매우 예뻐 조돈은 그 궁녀를 마음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안 이봉낭은 이튿날 이 궁녀를 불러들여 그녀의 두 손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이를 조돈에게 보인다며 피가 흐르는 잘린 손을 상자에 담아 보냈다. 물론 피가 흥건한 상자 속의 두 손을 본 조돈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러한 사건은 더 있다. 조돈의 귀비 황씨는 일찍이 궁에 입궁하여 화이군 부인이 되었다. 조돈은 즉위하자 황씨를 귀비로 올리는데, 이로 인해 이봉낭의 질투심이 발동했다. 서기 1191년 겨울, 조돈이 교외로 행차를 나가자 이봉낭은 그가 없는 틈을 타 황귀비를 살해했다. 궁으로 돌아온 조돈은 황귀비의 죽음을 듣고 병석에 누워버렸다.
조돈의 병이 악화되어 정사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게 되자 이봉낭이 대신 조정의 일을 맡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녀는 처갓집을 위해 제멋대로 권력을 남용하며 사욕을 채웠다. ‘황후는 친지 26명에게 은혜를 베풀고 신하 172명을 이씨의 식객으로 삼았다.’ 이러한 그녀의 행위는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샀다. 이봉낭은 죽은 뒤 아들 조확에 의해 자의(慈懿)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후세 사람들은 잔인하고 악랄했던 그녀에게 실로 적합한 시호가 아닐 수 없다고 비꼬았다.
후비로 살다 황제가 죽자 평민의 삶으로 돌아가다 - 재가하는 후비
왕조 시대의 여인들은 한 남자와 평생을 같이해야 한다는 봉건예법에 따라 출가 후에는 남편의 어떠한 학대에도 이혼을 제기할 수 없었다. 또한 남편이 죽어도 평생 수절할지언정 마음대로 재혼할 수 없었다. 보통 여인들의 사정이 이러한데 후비들은 신분상의 특성상 더더욱 자유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그녀들은 황제가 죽으면 나이에 관계없이 다른 사람과 재혼할 수 없었다.
후한 말기, 소제 유변은 동탁에게 폐위되어 죽기 전 부인 당희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당신은 후비로서 절대 다른 남자와 혼인하면 아니 되오.” 유변이 볼 때 자신의 부인이 다른 남자와 재혼한다는 것은 자신뿐만 아닐 당희 자신에게도 큰 굴욕이 아닐 수 없었다. 유변이 죽자 그녀의 아버지 당모는 젊은 딸이 수절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재가시키려 했지만 당희는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후에 장안을 점령한 동탁의 부장 이각이 혼인하자고 당희를 협박했으나 그 역시 거절당했다. 그리하여 당희는 평생을 고독과 적막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당희와 같은 후비가 있는 반면 이와 상반된 후비들도 있었다.
어렵게 후궁에 들어와 영광을 누려오다가 왕조의 몰락으로 부군이 쫓겨나거나 살해되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보통 남자의 아내가 된 경우도 있었다. 이같이 평범한 여인에서 특별한 계층으로, 그리고 다시 특별한 계층에서 평범한 신분의 여성이 된 후비들의 인생 역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우했다. 왕조가 무너지면 황제 본인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도 대부분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다행히 화를 피한 후비들도 결국에는 굴욕적인 결말을 맺었다. 재가한 후비들은 후비의 신분에서 보통 남자의 아내가 되기도 했다.
황제가 사망하고 다시 재가하는 후비 중에 청나라 태종 황태극의 효장문황후 박이제길특 포목포태는 다소 특이한 경우이다. 그녀의 고모 박이제길특 철철도 태종의 황후였고 언니인 박이제길특 해란주 역시 그의 침비였다. 고모와 질녀가 한 황제의 황후가 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그녀는 남편이 죽자 다른 사람도 아닌 시동생에게 재가하는데 이것도 아주 드문 일이다.
태종은 즉위하기 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박이제길특씨의 고모, 즉 후일의 효단문 황후를 후비로 삼고, 즉위 1년 전에는 13세의 박이제길특씨를 맞는다. 서기 1636년, 황태극은 박이제길특씨를 영복궁장비로 봉했고, 그 2년 후에는 후에 순치제로 등극하는 복림을 얻는다. 서기 1643년, 황태극이 죽자 복림이 제위를 계승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려 덕망이 높았던 그의 숙부 예친왕 다이곤이 제위를 계승하리라 여겼다. 또한 형의 지위를 동생이 승계하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았다. 다이곤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되지 않고 6살의 어린 복림이 등극하게 된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만약 다이곤이 황제가 되고자 했으면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후에 건륭제 역시 “만약 예친왕이 다른 생각을 했다면 모든 군권이 그의 손에 있었는데 어찌 그 일이 가능하지 않겠는가?”『청사고(淸史稿), 218권』
복림은 황제로 즉위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 다이곤이 숙부의 신분으로 섭정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황태후가 된 박이제길특씨는 다이곤의 섭정이 걱정되었다. 특히 다이곤이 이자성을 쫓아내고 북경을 점령하자 그의 세력은 더욱 커져, 안팎으로 다이곤은 알지만 황제를 아는 자는 드물었다. 그런데 얼마 후 다이곤과 박이제길특씨는 묘한 관계로 발전하더니 급기야 같이 동거를 시작했다.
신분이 황태후였던 박이제길특씨는 아들이 황제이기에 다이곤과의 관계를 사양해야 했으나 결국 다이곤의 진심어린 사랑을 받아들인다. 다이곤도 비록 형수와의 사랑으로 동거를 시작했으나 그도 명분이 서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리하여 다이곤은 그의 절친한 학사 범문정을 내세워 다소 이상한 논리로 이를 타개했다. “황태후는 이미 홀로 오래 살아왔다. 황상께서 나를 아버지로 생각한다면 부모가 서로 따로 살 필요가 없다.” 다이곤의 권력에 두려움을 느낀 대신들은 이구동성으로 동의했다. 복림도 “태후께서 홀로 오랫동안 지내셔 짐이 비록 황제이지만 어머니의 정신적인 슬픔만은 어찌할 수 없다. 마침 숙부께서 홀몸으로 그 신분과 용모가 모두 중국 제일이다”라는 조서를 내리기에 이른다. 박이제길특씨도 재가를 원했던 바 그 뜻에 동의했다. 이리하여 박이제길특씨와 시동생 다이곤은 혼인하기에 이른다. 후에 박이제길특씨가 다이곤과 혼인한 일이 황실의 명예를 훼손할까 염려되었던 건륭제 홍력은 기윤의 건의에 따라 다시는 이 일을 거론하지 말도록 했다.
이들이 결혼한 몇 년 후 다이곤은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박이제길특씨는 장수했다. 강희제 현엽은 할머니를 매우 존경하여 태황태후로 존했고, 그녀도 비록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손자 현엽을 격려했다. “네 조상은 항상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무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람으로 정치를 하고 하늘의 뜻을 받들어 옳고 그름을 결정해야 한다.” 『청사고(淸史稿), 214권』 또한 글로 남긴 훈계도 여러 차례였다. ‘예로부터 어려울 때일수록 천자는 높은 뜻에 따라 정성껏 백성들을 돌봐야 모두가 따른다고 했다. 깊은 생각으로 국가의 도를 얻으면 모두가 행복하게 된다. 너는 어질고 자애로우니 항상 태도를 신중히 하고 말을 삼가고 부지런히 정사를 돌봐 돌아가신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도록 하여라.’ 겉으로는 조정의 일을 관여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정치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박이제길특씨는 1687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서화와 장기에 능하구나 - 다재다능한 후비
교육이 아직 발달되지 않고 보편화되지 않았던 왕조 시대였지만 관료 출신 집안의 후비들은 어렸을 때부터 일반 여성들이 받을 수 없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일찍부터 받아온 교육과 타고난 재능이 더해져 일부 후비들은 뚜렷한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어떤 후비는 서예나 회화에 정통했으며, 어떤 이는 기악이나 작곡에 능했고, 또 어떤 이는 공예 설계와 제작 등에 능숙했다. 이렇게 문화적 소양이 높았던 여성들은 중국의 전통 문화 번영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예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역사상 유명한 서예의 대가 중에는 후비들이 끼어 있다. 그녀들은 서예에 대한 열정으로 개인의 특징과 풍격을 갖춘 작품들을 후세에 남겼다.
기질이 명석하고 예민하며 정세에 정통했던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황후 홍길랍씨는 뛰어난 솜씨로 민족의 복식 개혁을 위해 중요한 공헌을 했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정통한 몽고인의 모자에는 챙이 없어 작전 때나 사냥할 때 눈이 부셔 조준하는 데 불편했고 화살의 정확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황후에게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한다. 총명했던 홍길랍씨는 고민 끝에 구식 모자 위에 챙을 꿰매어 새로운 모자를 만들어냈다.
개선된 모자를 쓰고 나니 활쏘기의 효과가 매우 좋았다. 쿠빌라이는 시험 삼아 써보고 매우 기뻐하며 널리 보급하라고 명했다. 이 성공에 자극받아 그녀는 몽고족의 의복 개선에 도전한다. 두루마기를 많이 입어 말에 올라 활을 쏠 때 매우 불편했던 몽고의 복식을 섬세하게 관찰한 그녀는 새로운 복식을 만들었는데, 앞은 옷섶이 없는 치마이고 뒤는 앞보다 길며 깃과 소매가 없이 두 개의 단추 고리가 있는 옷이었다. 이 옷은 활을 쏠 때나 말을 탈 때 아주 편리해 사람들이 다투어 모방하기 시작했고 전국으로 급속히 보급되었다. 뿐만 아니라 폐품을 이용해 새로운 것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녀는 대량으로 폐기된 활시위들을 뜯어 거기에 생사를 누여 견직물로 박음질하여 옷을 만들었다. 완성된 옷은 비단보다 질기고 조밀했다. 또한 당시 선휘원에는 많은 자질구레한 양피들이 가득했는데 줄곧 무용지물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녀는 방치된 조각들을 꿰매 융단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폐품을 재활용해 훌륭한 생필품을 만들어 대신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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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랍씨는 손재주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두뇌도 명석하고 사리분별도 정확했다. 서기 1276년, 원나라가 남송을 멸하자 쿠빌라이는 큰 연회를 베푸는데, 사람들은 모두 좋아했지만 오직 황후만이 즐거워하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내가 지금 강남을 평정하여 이제부터 전쟁을 할 필요가 없어 모두들 매우 기뻐하는데 황후께서는 즐거운 표정이 아닙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자 그녀는 무릎을 꿇더니 “예로부터 천년을 유지한 나라는 없다고 들었으니 우리도 자손들에게 그것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잠시 후 쿠빌라이는 송나라 황실의 골동품과 보물들을 전시해 놓고 황후에게 무엇이든 맘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했다. 그러나 홍길랍씨는 “송나라 황실은 이 보물들을 자손들에게 남겨주길 바랐지만 그 자손들이 이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내가 지금 이것들을 가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며 거절했다. 이는 내가 이 보물을 취해 자손들에게 물려준다 해도 그들 역시 지켜낼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사서에는 그녀를 ‘개국 초기의 정치를 바로 잡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