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열전 : 황제

   
샹관핑(역자: 차효진)
ǻ
달과소
   
20000
2008�� 01��



■ 책 소개
이 책은 중국 역대 황제 583명에 대한철저한 고증으로 성스러운 제왕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한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남김없이 드러내어 중국 황실 2천 년사 속 황제들을 돌이켜보고 있는책이다. 

 


저자는 제왕의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투쟁이 모두 격렬하고 잔혹했으며 권신들이나 무장 세력,황후나 귀빈들 모두가 시기가 무르익으면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일을 터트렸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태후나 왕후, 비빈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죽음에이른 황제들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고 분석한다. 또한 저자는 대부분의 황제들이 모두 탐욕이 넘치고 사치스러웠다고 지적하며, 또한 거의 모든황제들이 근친상간까지 서슴지 않아 그 음란함이 극에 달했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황제들은 불멸의 꿈을 버리지 못했었는데, 21명의 당나라 황제 중에 이 불멸의 약을만들다가, 선약으로 죽은 사람만 해도 다섯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우둔한 군주가 제위에 오를 때마다 믿는 구석이 있어 두려움을 모르던황제의 친척과 외척들은 항상 위를 기만하고 아래를 능멸하며 나쁜 짓을 일삼았고 "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이세민의 생각을 실천한 사람은 그수많은 황제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중국 황제사를 정리하고 있다. 

■ 저자 샹관핑
섬서성기산인으로 난주대 중문과 한어어문학교를 졸업했다. 중앙당학교 정법을 전공했으며 감수성 잡문학회회원으로 잡지사『홍기』『민주와법제』『해방군일보』『중국청년일보』 등에 각 분야의 글 100여 편을 발표했다. 저작으로 『제왕종횡』이 있다.


■ 역자 차효진


■ 차례
서문 


1. 선정을 베푼 제왕들 
부모형제라도 공정하게 법을시행한 제왕 
간언을 잘 받아들인 제왕 
근검절약을 실천한 제왕 
탐관오리를 엄히 처벌한 제왕 
사람을 잘 알아보고 쓰는제왕 


2. 놀기에 바쁜 제왕 
술을 목숨처럼 여기는 제왕
천성이 잔인한 제왕 
사치가 끝이 없는 제왕 
궁녀가 많았던 제왕 
방탕한 생활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제왕
장례가 호화스러운 제왕 
놀기에 정신 팔려 본업을 잊어버린 제왕 


3. 제왕의 운명 
가장 오래 재임한 제왕
재임이 짧았던 제왕 
노년에 즉위한 제왕 
어릴 때 즉위한 제왕 
폐위되어 권좌에서 축출된 제왕 
선황제를폐위시키고 제위에 오른 제왕 
포로가 된 제왕 
나라가 망하여 투항하는 제왕 
행방을 알 수 없는 제왕 


4. 엉뚱하게 죽은 제왕들 
후비에게 죽은 제왕
친척과 환관에 의해 죽은 제왕 
정변에 놀라 죽은 제왕 
독살로 죽은 제왕 
강요에 못 이겨 자살한 제왕 
선약으로죽음에 이른 제왕 


후기 
역대 중국황제 연표





중국사 열전 : 황제


부모형제라도 공정하게 법을 시행한 제왕
‘형법은 군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제왕의 친척과 외척은 종종 법률의 구속을 받지 않는 특수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우둔한 군주가 제위에 오를 때마다 믿는 구석이 있어 두려움을 모르던 황제의 친척과 외척들은 항상 위를 기만하고 아래를 능멸하며 나쁜 짓을 일삼았다. 그 결과 왕조에게 끊임없는 분란과 화를 가져왔고, 심지어 제왕 본인에게도 커다란 비극을 초래했다. 황제가 그의 일가족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왕조의 성패와도 관계가 있었다. 현명한 제왕들은 황제 일가의 위법 행위에 대해 차별을 두지 않고 엄중하게 처벌했다. 중국 역사상 수많은 제왕들이 대의를 위해서 사사로운 정을 따르지 않는 미담을 남겼다.


황제 일가에는 제왕과 가장 가까운 태자와 공주, 부마 등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위법 행위에 대해 감히 법률로써 통제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황제가 법률을 수호하고 유지하는 데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총명한 제왕들은 이 점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치세에 악영향을 끼치거나 방해하는 친족들에게 엄격히 법을 집행해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명태조 주원장의 친척들에 대한 결연한 자세는 역대 제왕 중 가장 유명하다. 주원장은 31년간의 통치 기간에 경제를 회복시키고 국방의 실력을 증강하는 등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많은 조치를 취했다. 그 중 정부의 세수를 늘리기 위해 민간이 차를 판매하고 거두어들이는 것을 금지하고 차 밭의 경영권을 관방 혹은 전문 중개상인에게 부여했다. “차 밭을 사적으로 경영하는 죄를 범하는 자는 변방으로 보내거나 사형에 처할 것이다.”『명사(明史), 80권』 차를 전매한 목적은 주로 서북부 소수 민족의 말을 얻기 위함이었다. 당시 서북 지역에서 생활하던 소수 민족들은 집집마다 말을 많이 길렀는데, 그들은 차 마시기를 좋아했다.  주원장은 차를 이들의 말과 교환하여 당시 부족했던 군대에서 사용할 말을 충당하고자 했다. 또 하나는 소수 민족의 민심을 얻기 위함이었으니 결국은 나라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것이었다. ‘중원으로 들어오는 말이 적은데 무엇으로 적을 제압한단 말인가?’『명사(明史), 80권』 이는 명나라 초기의 중요한 국책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까닭에 명 왕조는 서북부의 변경 지역에 많은 세관을 설치하여 전문적으로 차 잎을 밀수하는 불법 상인들을 체포했다. 하지만 변경 지역은 차에 대한 수요가 많기 때문에 이윤이 높았고, 그래서 차를 정부가 전매한 뒤로도 민간의 암거래는 끊이질 않았다. 상황이 이러자 말의 교역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주원장은 여러 차례 전교를 내려 사적인 차의 암거래를 금한다.


이때, 주원장의 4번째 딸 안경공주의 남편 부마 구양륜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차를 밀매하는 사건이 발각된다. ‘서기 1397년, 구양륜은 빈번히 개인 밀매업자를 파견해 이득을 취했지만 담당 지역 대리는 감히 부마를 추궁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하교(현 난주) 순찰사의 담당 관리를 모독하고 행패를 부렸다. 순찰사와 관리는 구양륜과 주보의 행동에 화가 나서 그들의 밀매 사건을 주원장에게 보고했다. 화가 난 주원장은 황후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구양륜과 주보 등 관련자들을 모두 참수했다.’『명사(明史), 121권』 이 사건은 조정과 재야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또한 주원장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한 친인척들은 이후로 행동거지를 극히 조심했으며, 이 사건 이후 차의 불법매매는 막을 내렸다.


사람을 잘 알아보고 쓰는 제왕
출신에 의해 사람을 선택하고 쓰는 것은 인재를 억눌러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왕조 시대의 커다란 폐단이다. 이 때문에 우매한 제왕은 많은 인재를 잃었다. 그러나 현명한 제왕들은 필요하다면 가문과 출신을 따지지 않고 대담하게 기용하여 역사에 미담을 남겼다.


한무제 유절도 사람을 쓰는 방면에서 칭찬할 만하다. 기원전 140년, 유절은 즉위하자 옛일을 본받아 현재를 다스리는 도와 천하의 인재를 초빙하는 것에 대해 대신들에게 물으며 인재 초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유절이 더욱 뛰어난 것은 재능 있는 사람은 출신 가문에 상관없이 기꺼이 받아들여 임용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많은 재능을 가진, 그러나 출신이 낮은 사람들이 중용되었다. 위청, 곽거병, 김일제 등이 바로 그들이다.


위청은 평양 후 위오와 노비 정계의 사생아이다. 계모의 다른 아들들은 항상 위청을 멸시하고 모욕했다. 이에 견디다 못한 위청은 누나 위자부와 함께 황제 유절의 누나였던 평양공주 집으로 가 노비가 되었다. 어느 날 유절이 누나인 평양공주의 집을 지나가다 젊고 예쁜 위자부를 보고 반하여 그녀를 후궁으로 들였다. 위자부가 입궁하자 황후 진아교는 이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질투하기 시작했다. 유절과 내외종 사촌누이인 진아교(유절의 고모 관요공주 유표의 딸)는 아직 아이가 없었다. 위자부가 입궁해 곧바로 임신하자 진황후는 몹시 화가 치밀었고, 동시에 위자부의 동생 위청도 미워하게 되었다. 이에 진황후는 사람을 보내 위청을 죽이라고 한다. 대장공주 유표는 사람을 시켜 위청을 잡아들인다. 위청의 친구 공손오는 이 소식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위청을 구출한다.


진황후의 칼에서 벗어난 위청은 곧 유절에게 기용된다. 유심히 위청을 보아오던 유절은 그의 성품이 소박하고 성실하여 나중에 큰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건장감 시중으로 삼았고 머지않아 태중대부에 임명한다. 위청은 유절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았고, 후에 전한 왕조의 유명한 장군이 되었다. 당시 북방의 흉노는 계속해서 한나라를 침입했는데, 비범했던 위청은 흉노를 토벌하는 전쟁에 헌신한다. 위청의 지략은 실전에서 끊임없이 향상되었다. 기원전 129년, 젊은 위청은 유절에 의해 거기장군으로 승진되었다. 이후 흉노를 토벌하는 전쟁에서 멀리 변새 지방까지 진격하여 흉노를 섬멸시켰다. 변방의 오랜 골칫거리가 그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위청의 생질 곽거병도 노비였다.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익숙했던 그는 후에 외삼촌을 따라 흉노를 토벌하는 전쟁에 참가한다. 그 결과 18세 때 관군후에 봉해졌고, 2년 후 위청과 함께 흉노의 주 세력을 격파하여 그 공로로 표기장군에 오른다. 이때부터 위청과 곽거병 두 사람은 한군 최고의 통솔자가 되었다. 유절이 곽거병의 공을 높이 사 그를 위해 관저를 지어주려 하자 곽거병이 말하길 “흉노가 아직 소멸되지 않았기에 아직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계속되던 흉노의 침입으로 골치를 썩던 한 왕조는 위청과 곽거병 이 두 사람의 용기와 계략으로 위기를 넘기고 크게 발전하게 된다.


노비 출신의 젊은이를 대담하게 장군으로 임용하고 전군을 통솔하게 한 것은 유절이 사람을 쓰는 데 식견과 기백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가 당시의 편협한 사고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채용했기에 위청과 곽거병은 중국 역사상 가장 젊고, 공로가 가장 큰 장군이 되었다.


위청, 곽거병이 유절의 신임을 얻은 것이 친척 관계라서였다면, 유절이 투항한 흉노의 휴도왕의 태자 김일제를 중용한 일은 그가 사람을 쓰는 데 있어 비범했음을 엿볼 수 있다. 기원전 121년, 흉노 휴도왕은 혼야왕에 의해 죽고 혼야왕은 휴도왕의 열네 살 난 아들을 데리고 한 왕조에 투항했다. 태자는 한실의 노비가 되어 궁에서 말을 키우는 일을 했다. 유절은 그가 기르는 말이 살찌고 튼튼해지는 것을 보고 그를 부마도위 광록대부에 임명했고, 외출 때는 대담하게 그에게 마차를 몰게 했다. 대신들이 이를 불안히 여기며 말하길 “폐하, 어찌하여 오랑캐를 중요시 여기십니까?” 그러나 유절은 대신들의 반대를 뿌리치며 오히려 태자를 더욱 편애했다. 김일제는 점점 더 유절의 신임을 얻게 되었지만 아들을 포함한 주위에는 매우 엄격했다. 유절의 신뢰를 제멋대로 이용하지 않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유절에게 충성하여 한실의 흥성을 위해 큰 공로를 세웠다.


기원전 87년, 유절의 병이 심각해진다. 당시 태자 유불릉은 겨우 8살이었는데, 태자가 어린 것을 고려하여 유절은 김일제, 곽광(대장군 곽거병 동생), 상관걸로 하여금 어린 제(帝)를 보좌하게 했다. 유절의 이런 신임에 김일제는 여러 번 불가를 표시한다. 그는 간절하게 말하길 “신은 외나라 사람으로 곽광만 못하옵니다.” 유절이 다른 사람을 선택하길 권했으나 유절은 단호히 불허하며 김일제를 거기 장군에 봉하며 태자를 보좌하도록 했다. 유절은 귀순한 외족을 가장 신임한 황제로 싫어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중국의 역대 제왕 중 이러한 일은 아주 드문 일이다.


후에 사마천은 유절을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은 사람을 얻는 것으로 번성했다. 곽이 공업을 이루었고, 후세는 아무도 이에 미치지 못하는구나.”『사기(史記), 11권』 이러한 평가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공정하다. 인재를 알아보고 잘 쓴 제왕은 이들 뿐만은 아니다. 많은 제왕들이 예리한 안목으로 사람을 볼 줄 알았고 사람을 쓰는 식견과 패기는 후세에 많은 본보기를 만들었다.


천성이 잔인한 제왕
역대 제왕들 중에는 잔인한 폭군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승냥이처럼 잔인한 성격을 가졌으며 너무나도 악독했다. 인간성이 심각하게 비뚤어져 변태되어 버린 이들은 늘 타인의 생명을 한낮 초목처럼 여겼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들이 사용했던 형벌의 가혹함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두려움에 떨리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악랄한 폭군들은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형구들을 만들어 그것을 이용해 자신들의 정적이나 혹은 무고한 백성들을 해치는 데 사용했다. 특히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은, 그러한 형구들을 이용해 사람을 해치는 이유가 철저히 자신들의 왜곡된 즐거움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후세에게 더욱 욕을 먹는 살인마들은 종종 호기심에서 살인의 동기를 찾았다. 『사기(史記)』와 진나라의 황보밀이 쓴 『제왕세기』에서는 상 왕조의 마지막 황제 주가 그러한 인간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어느 겨울, 따뜻한 옷을 꽁꽁 껴입은 주와 그가 총애했던 왕비 달기는 한 사람이 맨발바람으로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살기가 발동한 주는 사람을 시켜 그를 잡아오게 한 다음 맨발로 얼음 위를 왜 그렇게 잘 걷는지 모르겠다며 그의 발 뼈를 부수게 했다. 그는 요리사가 곰발바닥 요리를 푹 삶지 않았다며 그 자리에서 그를 죽여 버렸고, 태아가 뱃속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며 임산부의 배를 갈라서 꺼내 보기도 했다. 또한 뼈의 골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 위해 대신 조섭의 허벅지를 칼로 도려내 보았고, 사람을 죽인 후 범에게 먹이기도 했다.


주왕이 이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였지만 달기는 더욱 자극적인 것을 원했다. 악마보다 잔인했던 주는 여러 가지 새로운 수단을 생각해내서 그와 달기의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그는 무고한 사람더러 뜨겁게 달군 큰 다리미를 맨손으로 들고 있게 했는데, 순식간에 그 사람의 손이 문드러졌다. 더 이상 만족스러운 방법이 생각나지 않던 주는 하나라 걸왕이 만든 포락(구리 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그 아래 이글거리는 숯불을 피워 놓은 후 구리 기둥 위를 죄인들로 하여금 맨발로 걸어가게 하는 형벌) 형구를 사용해 죄인 아닌 죄인들이 그 위를 걷다가 떨어져 타죽게 했다. ‘동으로 된 둥근 기둥에 기름을 바른 뒤 뜨거운 목탄 위에 눕혀놓고 죄가 있는 자들을 걷게 했다. 발이 미끄러워서 불 속에 떨어지면 주와 달기는 서로를 쳐다보며 좋아했는데, 이를 포락지형(?烙之刑)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주왕은 미친 듯이 날뛰며 살인을 일삼았는데, 대신들과 친척들까지도 그의 손길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대신 구후의 딸은 주의 왕비 중 하나였지만 주의 총애를 잃자 아버지와 함께 죽탕이 되도록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 ‘구후에게 참한 딸이 있어 주에게 들어갔지만, 곧 싫증이 난 주왕은 그녀를 죽이고 구후를 칼로 썰어 다져죽였다.’『사기(史記), 3권』 대신 희창이 그의 폭정에 불만을 보이자 주는 희창을 옥에 가두고 희창의 아들 희고를 죽여서 그 고기로 육탕을 만들어 희창에게 먹였다. 주의 삼촌 비간이 그의 만행을 보다 못해 몇 마디 충언을 고한 적이 있었다. 웬일인지 주는 그의 말을 들으며 화를 참고 있었지만 달기가 곁에서 이간질을 하며 말했다. “제가 듣기로 성인의 심장은 구멍이 7개나 나 있다고 하더군요.” 이 말에 주는 바로 사람을 시켜 비간의 심장을 후벼 파냈다.


인간의 도를 넘어선 그의 만행은 마침내 자신을 폭발의 화산구로 끌고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주가 희고를 죽인 지 몇 년이 흘러, 희고의 동생 희발이 세력이 강해진 주 부락의 수령이 되었다. 희발은 목야전투에서 주의 군대를 대파했다. 살인마귀 황제 주는 녹대까지 쫓겨 갔다가 거기서 보옥의(寶玉衣)를 입고 스스로 불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주무왕이 된 희발은 그의 시체를 참수하여 백기에 걸어 놓았다. 물론 달기 또한 같은 운명이었다.


장례가 호화스러운 황제
생로병사는 인류가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그 사실은 존귀하기 그지없는 황제들에게도 어김없이 닥쳤다. ‘설령 천년이 된 철 문간이 있다 한들 결국에는 무덤 하나만 필요할 뿐이다.’ 많은 부귀영화를 누렸던 황제들은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아낌없이 천하의 재물을 쏟아 부었으며, 무고한 군사와 백성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능묘를 짓게 했다. 또한 후궁과 비빈들에게 순장을 강요했다. 역사는 이렇듯 호화스러운 장례를 치르고 수많은 죄악을 저지른 황제들을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황제들은 등극한 다음날부터 많은 재물과 인부들을 동원하여 극도로 호화롭고 방대한 자신의 능묘를 짓기 시작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안사(安死)』편에 따르면, ‘황제들은 자신의 능묘 건설을 특히 중시했는데, 그 무덤은 높이가 산과 같고 나무는 숲을 이루었으며, 궁궐 대청과 대전 앞 계단을 만들었는데 규모가 마치 도읍과도 같았다.’ 다시 말해 황제들은 자신의 능묘를 생전에 거하던 궁궐과 같은 규모로 짓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백성의 피와 땀으로 쌓아 올려진 구릉과도 같은 황릉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수많은 제왕들 중에서 명나라 만력제 주익균의 능묘 정릉은 가장 많은 비용을 들여 후세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명나라는 홍희제 주고치의 헌릉 이후 검소한 절차를 규정했다. 그러나 가정제 주후총의 영릉부터 사치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극도로 재물을 밝히고 탐욕스러웠던 주익균은 자신의 능묘를 위해 중국 역사상 최대의 재물을 투입했다. 『명사(明史), 20권』에 기록되길, ‘서기 1583년, 즉위한 지 10년째로 향년 21세였던 주익균은 예부와 공부의 관리들을 데리고 친히 창평현 천수산으로 가 자신에게 길한 땅을 택한 후 수릉을 짓기 시작했다. 이후 1년간 다시 두 차례나 천수산으로 가서 능묘 터를 친히 살펴보았으며, 을축년에는 수궁을 지었다.’


서기 1585년, 주익균은 친정을 시작하자 태후의 승인을 받아 수릉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주익균은 사중 혜세양과 어사 서정으로 하여금 능묘 공사를 철저히 순시할 것을 명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각지에 재난이 끊이지 않아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빈곤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황제는 대량의 노동력을 징발하여 능묘 건설에 동원했다. 그리하여 정릉이 위치한 공사장에는 매일 건설에 참여하는 장인과 군사들이 3만여 명에 달했고, 이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매일 수만의 사람들이 능묘 건설을 위해 채석을 하고 벽돌을 구웠다. 정릉에 사용된 석재는 저 멀리 하남과 하북의 준화, 그리고 근교 방산 등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당시 길이 3장(丈), 폭 1장, 두께 5척의 거대한 암석 하나를 옮기는 데만 2만 명 이상의 인부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능묘 건설에 전문적으로 사용된 수공 벽돌과 금 벽돌은 산동과 강소 등 운하와 가까운 주현에서 책임지고 만들어 냈다. 벽돌의 질에 대한 주익균의 요구는 매우 까다로워, 두들겼을 때 맑은 소리가 나고, 부러뜨렸을 때 구멍이 없어야 겨우 합격할 수 있었다. 또한 금 벽돌의 제조에는 더욱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소요되는데 연달아 약 130일이 걸려야 겨우 가마에서 꺼낼 수 있었다. 이렇게 6년간의 공사 기간을 거친 정릉은 서기 1590년, 백성들이 내뱉는 고통의 탄식이 천지를 뒤흔드는 가운데 드디어 완공되었다. 그 비용은 800여만 냥에 달했다. 이 비용은 당시 전국의 두 해 토지세 총수입에 맞먹는 것이었다.


정릉은 투입된 막대한 비용만큼 지하 궁전의 내부도 호화의 극치였다. 지하 궁전의 앞, 중간, 뒤쪽 궁전 깊이는 67미터, 총 면적은 1,200평방미터에 달했다. 내부는 모두 한백옥, 청엽석, 화반석 등 최고급 석재들을 정교하게 쌓아 만들었고, 거기에 다시 금 벽돌로 바닥을 깔아 매우 웅대하고 화려한 장관을 이루었다. 함께 매장된 금은보석들 역시 그 수가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금실로 엮어 만든 금관과 매우 정교하여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봉황 관은 보는 이마다 탄성을 금치 못하는 것들이었다.


노년에 즉위한 제왕
어린 나이에 즉위한 황제들이 대부분 황족으로 태어나 운명에 의해 황위에 오른 것이라면, 50~60세가 되어서야 등극한 제왕들은 대부분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꿈을 실현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황족으로 태어난 운 좋은 어린 제왕들과 달리, 황족의 피는커녕 빈민으로 태어나 맨손으로 천하를 누볐으며, 나중에 성공하면 황제가 되고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모험을 감행해 승리한 사람들이다.


이런 제왕들만 모아 비교해 보면, 그들은 대부분 출신이 비천하다는 분명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은 황제가 되기 전에 험난한 전락 속에서 죽고 죽이는 싸움을 거쳐 앞선 왕조의 장군이나 공신이 되었다. 그리하여 공훈과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 분봉을 받거나 지역을 책임지는 군정 장관이 된 다음, 기회를 잡아 스스로 주인이 되어 독립을 하면 그때부터 제왕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오십대국 중 전촉, 후촉, 초, 남평, 북한 왕조의 개국자들이 바로 이런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다.


십국 중 하나였던 전촉의 시조 왕건은 ‘어릴 때에 의지할 곳이 없어 소를 잡는 백정 노릇을 하거나 도둑질, 또는 소금을 암거래하는 밀매꾼 등을 일삼고 살았다. 고향에서는 그를 적왕팔(賊王八)이라고  불렀다.’『신오대사(新五代史), 제63권』 결국 그곳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었던 왕건은 고향을 떠나 충무군에 투신하여 나중에 부대의 관원으로 승진했다. 황소의 봉기군이 장안까지 쳐들어와 당 희종 이현이 사천으로 몽진하게 되자 왕건도 진휘 등과 함께 그를 따랐다. 이현은 반갑게 맞이하며 그들을 수가오도에 봉하고 대환관 전령자에게 돌보도록 했는데, 전령자가 그들을 양자로 삼았다. 나중에 장안으로 돌아온 이현은 왕건을 신책군통수에 임명하여 궁궐의 수비를 맡겨 그때부터 왕건은 출세하기 시작했다.


서기 885년, 이현은 역모로 인해 다시 장안을 떠나 봉상으로 피난을 갔다. 이듬해에는 흥원으로 어가를 옮겼는데, 왕건을 청도사로 임명해 당나라의 전국 옥새를 들고 함께 길을 떠났다. 당도라는 역관에 이르렀을 때 이창부의 반군이 어가가 지나야 하는 절벽 길을 불태워 길이 거의 끊겨버릴 지경이 되었다. ‘왕건은 이현이 탄 말고삐를 잡고 불길을 뚫고 건너갔다. 그날 밤 산 속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는데, 이현은 왕건의 다리를 베고 잠을 잤다. 잠에서 깬 이현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며, 그 자리에서 용포를 벗어 주었다.’『자치통감(資治通鑑), 제256권』


서기 891년, 영평군 절도사이던 왕건은 신임 서천절도사 위소도와 함께 조정의 명령에 불복한 원래의 서천절도사 진경선을 토벌하러 떠났다. 위소도가 몇 차례 공격에 나섰으나 반란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성과를 얻지 못한다. 그러자 왕건은 이를 이용해 실권을 잡기로 마음먹는다. “이런 편벽한 곳은 자네가 있을 곳이 못되네. 아무리 공격해도 별 소득이 없으니 자네는 차라리 장안으로 돌아가 폐하를 보좌해 중원을 안정시키는 것이 어떨까 하네” 하고 말했다. 위소도도 전전긍긍했다. 왕건은 몰래 동천의 장수 당우통을 시켜 위소도의 심복인 낙보를 군량을 훔쳤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죽여 버렸다. 이 같은 상황에 매우 두려웠던 위소도는 병을 핑계로 왕건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날로 슬그머니 돌아갔다.


위소도가 돌아가고 토벌대의 실권을 장악한 왕건은 서천 지역과 다른 지역 간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런 다음 바로 출병하여 성도를 공격했다. 서기 893년, 반란군 수괴 진경선과 그의 동생 전령자는 모두 왕건에게 죽는다. 조정에서는 왕건에게 겸교사도, 성도윤, 검남서천절도부대사지절도사, 관내관찰처치운남팔국초무 등의 관직을 하사했다. 그리하여 사천 경내와 섬서, 한중의 일부 지역이 왕건의 통치 관할을 받게 된다.


서기 907년 9월, 주온이 당나라를 멸망시키자 56세의 왕건은 성도에서 제위에 올라 자립하고 국호를 촉이라고 지었다. 초기에는 ‘간언을 잘 받아들였으며, 관리를 잘 선발해 각자의 능력에 맞게 쓸 줄 알았고 검소함까지 겸비했다. 그는 비록 배우지 못했지만 지식인들을 중시했다. 당시 당나라의 많은 선비들이 촉나라에 피난을 와 있었는데, 그들과 자주 담론을 즐겼으며, 그들을 예로써 대하고 임용했다.’『자치통감, 266권』 그러나 통치 후기에는 날이 갈수록 어리석게 변해갔다. 특히 의심이 많아 무고한 살육을 자주 저질렀다. 한때 그와 전장을 누비던 부하 장수들 대부분을 온갖 핑계를 붙여 제거해 버렸다.


서기 918년, 16년간 제위에 있었던 72세의 왕건이 병으로 죽자 그의 11번째 아들 왕연이 제위를 물려받는다. 촉나라는 삼국시대 가장 황음무도하기로 이름난 왕연의 손에서 7년간 이어지다 후당에게 멸망된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제왕
궁궐에서는 제왕들이 평생에 걸친 일거일동을 모두 상세하게 기록해 둔다. 설사 여러 이유로 황제의 자리에서 밀려나 폐위되거나 살해되더라도 황궁을 떠나는 과정과 그 사후의 일들을 모두 사서에 기록으로 남긴다. 그러나 권력쟁탈이 아주 심했던 시기에는 예외도 있었다. 일부 제왕들은 야심가와 가까운 친척들에 의해 자리에서 밀려난 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도 확인할 길이 없으며, 사서의 그 어디에도 그들의 행방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후세에 해명하기 어려운 의문으로만 남아 맴돌고 있다.


행방이 묘연한 제왕들 중 일부는 악행을 일삼다 결국 권력을 잡은 신하에 의해 폐위된 후 소리 없이 사라진다. 한 창읍왕 유하와 삼국시대의 위나라의 제왕 조방이 바로 제왕의 자리에서 추락한 후 행방이 묘연해진 황제들이다.


기원전 74년, 한 왕조 여덟 번째 황제였던 22살의 소제 유불릉이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자, 그의 조카였던 유하는 조정의 권세를 잡고 있던 대사마 겸 대장군 곽광에 의해 옹립되어 운 좋게 황제로 즉위한다. 배운 것이 없어 무식했던 유하는 애초부터 왕이 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그는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방탕했다. ‘왕으로 있던 창읍에서부터 생활이 방종하고 행동을 가려서 할 줄 몰랐다. 무제 유철의 국상 중에도 그는 사냥하며 놀고 있었다. 또한 많이 돌아 다녔으며 반나절도 안 걸려 2십리를 달렸다. 왕길, 공수 등의 신하들은 유하가 배움을 게을리 하고 나돌아 다니는 것에 대해 간언을 올려 말렸지만 유하는 여전히 멋대로 노닐기만 했다.’『자치통감, 24권』


정식으로 제위에 오르자 유하의 악행은 전보다 더해 갔다. ‘창읍왕은 즉위하자 음란한 생활을 거리낌 없이 했다. 날이 갈수록 교만해졌고 간언을 올려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다. 가까운 신하들과 술을 마시거나 호랑이 싸움을 구경했고, 호랑이 가죽으로 장식한 마차를 타고 깃발을 휘날리며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등 하는 행위가 모두 도를 넘는 것들이었다.’ 『자치통감, 24권』 더욱 황당한 것은 선제의 후궁들을 불러들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음란한 짓을 벌이는 것이었다. 대신들은 향락에 빠져 국정을 방치하는 그를 수차례 만류했으나 한 마디도 들으려하지 않았다. 유하의 이런 행동들은 대신들의 강력한 불만을 사게 되고, 특히 그를 황제로 옹립했던 곽광은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 곽광은 대사농직으로 있던 전연년과 상의하여 상관태후(유불릉의 황후로 곽광의 외손녀)에게 상주하고 유하를 폐위시키기로 결심했다. 곽광은 승상, 어사, 장군, 열후 등의 대신들을 미앙궁에 소집하여 황제 폐위를 상의했다. 곽광의 위세에 눌린 신하들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때 전연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보검을 손에 들고 곽광의 발언에 맞장구를 치며 유하는 황제가 될 위인이 아니라고 소리치자, 그때서야 신하들은 동의를 표시했다. 곽광은 이러한 사실을 황태후에게 알려 동의를 얻은 후, 유하가 왕으로 있을 때부터 그를 지켜온 2백여 명의 심복들을 일망타진한다.

유하는 상관태후 앞에 끌려갔다. 병사들이 궁궐의 출입문을 모두 지켜 섰고, 상관태후는 성대한 옷차림으로 휘장 건너편에 앉아 뭇 신하들이 차례대로 입조하자 유하를 불러 조서를 받도록 했다. 곽광 등 신하들이 입조한 가운데 상서령이 유하의 악행들을 나열하며 그가 황제에 오른 지 단 27일 만에 1,127건의 황당무계한 악행을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상서령이 유하를 응당 폐위시켜야 한다며 조서 낭독을 마치자 상관태후가 동의를 표했고, 이어서 곽광이 황태후를 배웅해 드리고 나서 유하의 손을 휘어잡은 채로 어전을 나와 금마문을 나섰다. 이때서야 유하는 비로소 깨달았는지 “나는 어리석어서 나라의 일을 맡지 말아야 하네”라고 말했다. 그는 얼마 앉아 있지도 못한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창읍의 저택까지 압송되었다. 유하가 폐위되자 옥에 갇혀 있던 그의 2백여 심복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그 후 유하는 더 이상 소식이 묘연해졌다.


친척과 환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제왕
중국의 역대 왕조에는 우매할 정도로 외척과 환관들을 중요시한 제왕들이 있었다. 이들은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고 국정을 어지럽히며 온갖 나쁜 짓을 일삼았고, 심지어 황제를 손 안의 노리개처럼 다루며 가지고 논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로 인해 적지 않은 제왕들은 그 권력이 비대해질 대로 커진 외척이나 환관들에 의해 망했다.


외척이 여자를 통해서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면, 환관은 아부를 통해 총애를 받았다. ‘주야로 황제를 모셨으니 버릇없이 굴면 권력이 없어지고 습관이 되면 의심하지 않는다. 고로 아둔한 군주는 그 친밀함에 익숙해져 재앙으로 바뀌는 것을 소홀히 한다. 환관들을 줄곧 옆에서 수행하여 제왕을 죽이려 한다면 쉽게 목적을 달성한다. 그리하여 환관을 신임하고 총애하는 제왕일수록 황당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신당서(新唐書), 207권』


북위의 태무제 탁발도와 아들 난안왕 탁발여가 바로 이 쓰디쓴 과일을 삼켰다. 서기 423년, 탁발도는 아버지 명원제 탁발사를 이어 북위의 세 번째 황제가 되었다. 북위의 제왕 중에서 탁발도는 비교적 많은 성과를 이루어낸 제왕이다. 재위 29년 동안 북위 왕조는 도무제 탁발규, 명원제 탁발사에 이어 비교적 번성한 시대를 구가했다. 이 기간 동안 북위는 잇따라 하, 북연, 북량 등을 멸하고 1세기 반에 걸친 북방의 분열을 종식시켰다. 당시 북위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는 남쪽에 위치한 유송 왕조뿐이었다. 탁발도가 북방을 통일한 공적은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아무리 총명한 제왕이라도 실수가 있을 수 있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죽음을 부르는 실수였다. ‘탁발도의 비극은 환관 종애를 너무 총애한데서 시작되었다. 늘 옆에서 시중을 들었던 종애는 성격이 난폭하고 불법을 일삼았다. 이와 같은 자는 일찍이 파면해야 했지만 탁발도는 한사코 그를 총애했다.’『위서(魏書), 94권』 결국 그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태자 탁발황이 종애의 첫 사냥감이 되었다.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게 되자 종애는 태자 탁발황과 그의 친구 급사중, 후도성, 시랑 임평성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했다. 종애의 참언에 탁발도는 태자 주위의 많은 사람을 죽였다. ‘위나라 황제가 노하여 도성을 죽여 거리에 내걸었고, 동궁의 많은 관리들은 앉아서 죽음을 맞이했다. 태자도 이 일에 충격을 받아 얼마 후 우울증으로 죽었다. 막상 탁발황이 죽자 그는 늘 아들을 그리워했고, 머지않아 태자의 죽음이 종애의 음모였음을 알게 된 탁발도는 몹시 후회한다. 서서히 태자의 무죄가 드러나자 종애는 죽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먼저 선수를 친다. 결국 종애는 황제를 시해했다.’『자치통감, 126권』 서기 452년 2월, 막 45세가 된 탁발도는 환관의 손에 의해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탁발도를 시해한 종애는 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제위를 계승한 탁발여에게도 중용된다.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을까? 이유는 이러했다. 탁발도가 죽은 후 누가 제위를 계승할 것인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교활한 종애는 탁발도의 6번째 아들인 탁발여와 모의하여 그를 내궁으로 들인 다음 혁련황후의 명의를 빌어 30여 명의 환관들을 동원하여 탁발도의 나머지 아들들을 하나하나 죽였다. 그리고는 탁발여를 옹립하여 즉위시켰다. 탁발여는 즉위하자마자 종애의 공에 보답하기 위해 그를 대사마 겸 대장군, 태사, 그리고 비밀문서를 관리하는 풍익왕에 봉한다. 종애의 도움으로 황제가 된 탁발여는 대신들이 불복할까 두려워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풀어 인심을 사려했다. 하지만 한 달 사이에 창고의 재산은 바닥을 드러냈다.’『자치통감, 26권』


종애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더해 갔고, 조정 안팎은 그를 점점 더 두려워하게 되었다. 마침내 탁발여도 종애의 독단이 심상치 않자 자신의 권력마저 빼앗아갈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생각 끝에 그의 권력을 제한하고 약화시키려 하지만 종애는 길길이 날뛰며 분노했다. 그리고 자신이 옹립한 황제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종애는 탁발여가 밤에 사찰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는 기회를 틈타 가주 등을 보내 시해하고 이 일을 비밀에 부쳤다. 하지만 금위군 낭중 유니는 이를 눈치 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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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경험은 야심이 부풀어 올라 온갖 악행으로 인심을 잃게 되면 그 끝도 멀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종애도 마찬가지였다. 1년 사이에 연이어 두 명의 황제를 시해한 종애의 끝도 이미 코앞에 닥쳐 있었다. 탁발여가 죽자 문무백관들은 누구를 황제로 세워야 할지 근심했다. 이때 상수 육려와 원하는 유니 등과 의논하여 탁발여의 조카 탁발영을 즉위시켰다. 이와 동시에 종애를 없앨 계획을 세운다. 며칠 후 그들의 사전 계획에 따라 12살의 황제 탁발영을 모시고 사찰에 제사를 드리러 간다. 이때 유니가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외친다. “종애는 남안왕(탁발여)를 시해한 대역무도한 반역자이다.” 사전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삽시에 몰려들어 종애를 잡았다. 탁발영은 그 자리에서 종애의 3족을 멸하도록 어명을 내렸다. 이렇게 종애와 그의 가족들은 한꺼번에 주살되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