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는 패배하고도 영웅이 되었고, 조조는 성공하고도 오명을 얻었다. 무측천은 남성우월주의의전통 문화를 거슬렸기에 끌어내려졌고, 해서는 곧았기에 부러졌다. 소신을 다했던 옹정제는, 그러나 독재자였다. 위대했으나 위인으로 남지 못했던인물들, 시대의 억압과 한계에 도전했으나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패배를 안고 무대 뒤로 사라진 인물들, 길게는 천년이 넘도록 오해와 망각 속에갇혀 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저자 이중톈이 새롭게 담았다.
저자는 길게는 천년이 넘도록 오해와 망각 속에 갇혀 있던, 위대했으나 위인으로 남지 못했던불쌍한 5인의 인물들을 애정의 갖고 그려 나갔다. 그들을 너무 선하게도 너무 악하게도 그리지 않았으며, ‘역시 그들도 인간이었을 뿐이다’는 기본관점 아래 각종 사건 속에서 벌어지는 선악의 심리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국가나 인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소명을 위해 세상과대결했던 개인들의 이야기, 집단이나 도덕의 이름으로도, 승리나 패배라는 결과로도 단죄해버릴 수 없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이야기, 영웅과 범부사이를 오가며 승리나 패배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 위에서 주저앉지 않았던 독특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이중톈의 날카롭지만 유머러스한 필치 앞에그 면모가 공개된다.
■ 저자 이중톈(易中天)
사학자이자 방송학자, 역사학자이다. 1981년 우한대학교를 졸업하고 문학 석사 학위 취득과 동시에 이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는 샤먼대학교 인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오랫동안 문학, 예술, 미학, 심리학, 인류학, 역사학 등 다양한분야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문심조룡 미학사상 논고』『예술교육학』등의 저서가 있다. 일찍이 출간된 ‘이중텐 수필체 학술 저작 : 중국 문화시리즈’로 『중국인에 대한 한담』『중국 남녀 엿보기』『중국 도시 중국 사람』『품인록』『제국의 슬픔』이 있으며, 중국 독자들로부터 폭넓은 사랑을받고 있다. 2006년 CCTV의 <백가강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삼국지를 대중들에게 강의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중국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 역자 박주은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중국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지난 일은 연기처럼 사라지지않는다』『천안문광장 비망록』『가로로 사과를 쪼개다』『회사에서 가르쳐주지 않지만 회사가 원하는 인재 되기』 등이 있다.
■ 차례
저자 서문
제1장 항우(項羽)
귀족과 건달
항우의결점
한신의 잘못
유방의 장점
항우의 최후
제2장 조조(曹操)
유능한 신하가 될것인가, 간웅이 될 것인가
천재와 둔재
관용과 복수
몇 건의 모살 사건
무정하지만은 않은 호걸
사랑스러운간웅
제3장 무측천(武則天)
범상치 않은 여인
꼬리가 길어 슬픈 양
피로 물든 황관
불과 얼음
진퇴양난
제4장 해서(海瑞)
수차례 파직 당한 관리
시대와 불화한 인물
치유 불가능한 왕국
이룰 수 없는 과업
제5장 옹정제(雍正帝)
아버지와 아들
형제
임금과 신하
친구
황제
제국
승자는 누구인가
부록 문화와 사람
역자 후기
품인록
해서(海瑞)
수차례 파직 당한 관리
해서는 청렴한 관리였다. 그러나 그는 청렴보다 파관(罷官)으로 더 유명하다. 해서는 일생 동안 정덕(正德), 가정(嘉靖), 융경(隆慶), 만력(萬曆) 등 네 황제를 거쳤다. 가정 32년(1554) 12월 10일에 복건(福建) 연평부(延平府) 남평현(南平縣)의 교유(敎諭, 하급 학관)를 지낸 이후로 만력 15년(1587) 10월 14일에 남경(南京) 도찰원(都察院) 우도어사(右都御史)를 지내다 병사할 때까지, 반평생 가까이 관계에 머무르며 수도 없이 파면을 당하거나 스스로 사직을 청했다. 남경에서 우도어사로 있던 2년 동안에만 일곱 번이나 스스로 낙향을 청했고, 가장 오래 관직 없이 지낸 기간은 16년에 이른다. 이런 시간을 모두 합치면 그가 벼슬길에 오른 33년 가운데 절반의 세월을 파직 상태로 보낸 셈이다. 그러나 그는 파직되고 나서 늘 복직되었으며, 복직된 후 직위는 갈수록 높아졌다. 해서의 관직 생애는 파란만장했다. 그가 정말 좋은 관리이기는 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좋은 관리였다면 왜 그토록 파직을 당했을까? 나쁜 관리였다면 왜 복직된 후 점점 더 품계가 올라갔을까? 황제와 다른 관리들은 대체 그를 좋아했을까, 싫어했을까?
중국의 일반 백성들에게 해서는 당연히 좋은 관리였다. 백성들의 기준은 청렴이다. 해서의 청렴함은 명백하고도 유명한 사실이다. 만년에 지낸 우도어사는 정2품 관직이었지만 그가 남긴 재산이 자신의 장례비를 충당하기에도 모자라 동료 관원들로부터 돈을 걷어야 할 정도였다. 관직에 있었던 사람이 죽어서 장례 치를 돈조차 없었다면, 그가 얼마나 청렴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더 대단한 사실은 해서가 평생토록 그런 수준의 청렴함을 유지하고 살았다는 점이다. 지현 시절, 그는 관부 후원에서 직접 기른 채소들을 주로 먹었고 술과 고기는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사치라면 노모에게(그는 효자였다) 고기 두 근을 사다 올리는 정도였다.
그는 순무로 부임하자마자 『독무헌약(督撫憲約)』을 반포하고, 각지의 부, 주, 현 관아는 순무 행렬을 성 밖까지 나와 맞이하지 못하도록 했다. 연회 접대도 금지시켰다. 조정의 고관들을 대접할 때는 어느 정도 체면을 고려하여 닭과 생선, 돼지고기는 허용했지만 거위 고기와 황주는 올릴 수 없었고, 접대에 드는 모든 비용도 규정을 초과할 수 없었다. 규정이란 물가가 높은 지역에서는 문은(紋銀, 말굽은) 3전, 물가가 낮은 지역은 2전을 초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초와 장작 등을 마련하는 데 드는 돈도 포함되었다. 기녀를 배석시키거나 식사 후 벌이는 여흥, 오락 등도 모두 금지시켰다.
당연히 백성들은 이런 관리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반면 다른 관원들은 싫어했다. 관원들은 비록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해서와 함께 일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오죽하면 해서가 응천 순무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응천 십부의 관원들이 온통 울상을 지었을까. 관원들은 전근을 자청하는가 하면, 심지어 스스로 사직을 하겠다는 이까지 있었다. 이것은 해서의 청렴함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가 관료 사회에서 고립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해서는 확실히 관가의 규율에 순응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행동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원칙에 대한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의 원칙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사서오경(四書五經)에 쓰인 도덕 준칙이었고, 다른 하나는 홍무제(洪武帝, 주원장)가 제정한 정책 법령이었다. 이 두 원칙 속에는 탐욕이나 부패, 권력을 통한 사익 추구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아첨이나 뇌물, 접대 같은 말도 없었다. 성인과 선조들이 해도 된다고 말한 일이 아니면 할 수 없었고, 성현들이 하면 안 된다고 못 박은 일이라면 더더욱 할 수 없었다. 해서는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그대로 따를 수가 없었고 따를 생각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너무 고지식하게 굴지 말고,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 할 땐 잘 보이도록 노력도 하고, 뇌물을 써야 할 땐 뇌물도 좀 쓰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지만 해서는 도리어 그 사람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모든 지방관이 다 뇌물을 쓰면 아무도 승진하지 못하겠고, 모든 지방관이 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면 아무도 강등을 당하지 않겠구려?"
해서가 순안 현령이던 시절, 호종헌(胡宗憲)은 절강 총독이었는데 총독과 지현은 품계도 다르고 권력도 천양지차였다. 더구나 호종헌은 당시 조정에서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엄숭과 같은 도당이었던 탓에 경내의 모든 관민이 그를 두려워하며 함부로 어찌하지 못했다. 하지만 해서만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마냥 겁이 없었다. 순안에 온 호종헌의 아들이 거들먹거리며 위세를 부리다 역참에서 베푼 대접을 문제 삼으며 역승(驛丞)을 묶어 매를 쳤다. 해서는 곧바로 호종헌 아들 일행을 체포하여 총독아문(總督衙門)으로 압송하라고 명령하고, 그들이 지니고 있던 은자 천 냥도 모조리 몰수했다. 그리고 호종헌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뛰었다. "총독 대인은 청렴하고 백성을 아끼기로 이름이 높은 분인데, 이 자는 품행이 비루한 데다 호대인의 공자를 운운하며 거짓말까지 일삼으니 필시 행낭에 지니고 있던 돈도 부당하게 얻었을 것입니다." 호종헌은 붙잡힌 자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았지만 무어라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이를 부드득 갈았다.
엄숭의 도당이었던 언무경(懋卿)도 해서에게 된통 당했다. 언무경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흠차대신으로 절강 지역의 소금 업무를 순시하러 가기 전, 각 관아에 다음과 같은 통령(通令)을 보냈다. "나는 본성이 소박하여 지나친 환대는 좋아하지 않으니, 음식은 간소하게 준비하고 호화로운 사치로 경비를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짐직 이런 통문을 보낸 이유는 청렴하고 겸손하다는 명예를 사기 위함이었을 뿐, 실제로는 가는 곳마다 사치에 낭비를 부려가며 지역민들의 고혈을 짜냈다. 이에 해서는 언무경에게 품첩(稟帖)을 올렸다. 품첩 안에는 언무경이 보낸 통문의 우너문이 그대로 적혀 있었고, 그 아래 흠차대신께서 행차하신 곳에서 벌어진 일이 통문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르더라는 사실을 여과 없이 지적했다. 품첩을 읽어 본 언무경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지만 결국 엄주를 피해 다른 곳으로 돌아서 갔다.
해서의 이런 행동에 언무경은 물론 엄주 지부도 크게 놀랐다. 엄주 지부는 해서에게 괜한 분란을 일으킨다며 벼락같이 호통을 쳤지만 해서는 그 호통을 묵묵히 듣기만 하고 아무런 변명이나 해명 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그런데 해서의 조치로 아무런 분란도 일어나지 않자 지부 대인은 감격하며 말했다. "순안 백성들이 고통을 면한 것은 다 그대 덕분이오!"
그러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결론이었다. 흠차대신의 기까지 죽일 정도로 강직한 해서가 어찌 관가의 보복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해서는 흥국(興國) 통판(通判)으로 승진하여 순안현의 신임 지현과 업무 교대를 하던 중 도읍에 있던 원순(袁淳)으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원순 역시 엄숭의 도당으로 언무경과도 친한 사이였다. 그는 순염어사(巡鹽御史)로 절강 지역을 순시하던 중 해서의 푸대접을 받고 해서와 크게 싸운 일이 있었다. 그 후 분수를 모르고 오만불손하다는 이유로 해서를 탄핵한 것이다. 물론 해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게다가 그때는 이미 엄숭도 면직되고 언무경도 충군(充軍)된 상태였지만 조정 대신들은 엄숭이 가졌던 권력과 이익을 나눠 갖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해서와 같은 일개 거인 출신의, 권력도 미미한 정7품 관원 따위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한때 해서의 상관이자 이부시랑을 지냈던 주형이 이부상서에게 적극 호소한 끝에 해서는 면직이 되고 나서 바로 흥국 지현으로 승직할 수 있었다. 1년 반이 지난 후 북경으로 가 호부 운남사 주사로 승진했다. 품계는 정6품이었다.
호부 주사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고, 별로 높지도 낮지도 않은 직위였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기만 해도 이력은 저절로 쌓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서는 한가하게 시간만 축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천하를 위한 남다른 사명감을 가진 유생으로서 마땅히 조정의 현실에 대해 고견을 표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바로 황제에게 창끝을 겨누었다.
가정 45년 2월, 직위는 낮으나 우국충정이 깊은 이 정6품 관원은 가정제에게 직언천하제일사소(直言天下第一事疏)를 올렸다. 해서는 가정제가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 하고 비판을 꺼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상주문 첫머리에 황제의 자격은 신하와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언로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밝힌 뒤 곧바로 가정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냈다. 이런 상주문은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 신하들의 간언은 대체로 구체적인 일에 대한 것인데, 해서의 간언은 사람을 겨냥한 것이었고 그것도 영락없이 꾸짖는 말투였다. 이 상소는 즉각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해서의 강직함도 천하에 명성을 떨쳐, 위로는 구중궁권에서 아래로는 사해에 이르기까지, 해 주사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가정제도 그 상소를 읽어보았다. 그는 이때까지 그런 상주문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호기심에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러나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 그는 그 자리에서 상주문을 내던지고 "당장 그 자를 잡아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러나 해서는 이 일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고, 태감이나 궁녀까지도 이 일로 감동받아 해서를 가슴 깊이 존경했다. 환관 황금(黃錦)도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차분히 진언했다. "폐하, 부디 노하지 마시옵소서. 해서란 자는 상소를 올리기 전에 미리 관을 짜두고 가족들과도 이별의 말을 나누는 등 사후의 일까지 대비했다 합니다. 그 자는 도망갈 뜻도 없는 줄 아옵니다."
가정제는 그 말을 듣고 긴 탄식을 내뱉으며 다시 상주문을 집어 들고 찬찬히 읽어보았다. 사실 가정제도 속으로는 해서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그는 해서를 은나라 말의 충신 비간(比干)으로 여겼으나, 그렇다고 스스로를 은나라 말의 폭군 주왕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해서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은 이미 연로한 데다 병까지 깊어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정제는 해서를 체포하라고 명령하고 금의위에 넘겨 심문한 뒤 사형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해서의 사형 집행을 계속 미루더니 다시 동창(東廠)에 가두고 했다. 그리고 열 달 뒤 가정제는 숨을 거두었다.
해서는 새로이 융경제가 등극한 뒤에야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는 더 큰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는 금방 복직되었고 또 금방 승진했다. 이부의 어느 관원도 감히 그에게 반대하지 못했고, 그의 품성을 타박하는 이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짧은 시간 내에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응천 순무까지 올랐지만 또 다시 탄핵을 받아 사직했다.
해서의 세 번째 파관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내각과 이부에서는 해서를 품계는 높지만 실권이 없는 자리에 앉혀 묘당에 있는 살아 있는 화석처럼 만들고 싶어 했다. 그것이 해서 자신에게나 다른 모두에게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정신은 가상하지만 이를 본받거나 제창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책임감과 사명감이 강했던 해서는 일 없이 녹봉이나 챙기는 자리를 원치 않았다. 해서는 자신처럼 국가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하는 관원은 퇴출돼야 한다는 내용의 상주문을 올렸다. 그의 이런 행동에 내각과 이부에서는 소리를 질러도 꿈적하지 않고, 구워삶으려 해도 삶아지지 않고, 죽여도 죽지 않는 이 골칫덩이를 대체 어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 시기의 해서는 바르고 정직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므로, 어느 누구도 그를 어찌하지 못했다. 퇴출시킬 수 없다면 결원이나 채우는 자리에 앉히는 게 낫다 싶어, 소주의 응천 순무로 임명했다.
소주에 도착한 해서는 강한 결심으로 풍속 개선을 밀어붙였다. 그의 대담한 기세에 수많은 탐관오리들과 악덕 토호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지역 관리들은 붉은색 대문을 검은색으로 바꿔 칠해 소박한 척했고, 소주 안의 가가호호는 온통 초상이라도 치르는 듯한 분위기였다. 해서가 엄격하고도 거침없이 정책을 시행해나가자 전국의 관료 사회가 온통 술렁였다. 사람들은 괴팍하다 싶을 정도로 엄격한 해서의 조치에 공분을 금치 못했다. 중앙과 지방의 관원들은 해서의 관할지로 갈 때마다 마치 적국으로 들어가는 심정이었다. 관원들은 마치 호송 중인 죄인처럼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장부에 기록해야 했다. 관가에서는 당연히 이런 기괴한 순행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해서의 탄핵을 주장하는 상주문이 어전에 줄을 이었다.
시대와 불화한 인물
다른 두 파관 사건과 달리 이번 파관은 별 동정을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두 사건은 호종헌, 언무경, 가정제처럼 어느 개인을 상대로 한 싸움이었지만, 이번 사건은 관료 사회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 뒤에 막강한 방패막이 존재하고 있었다. 뿌리 깊고 견고한 관가의 전통, 그리고 이리저리 가지가 얽혀 있는 문인 관료 집단이 바로 그것이었다. 반면 해서는 혼자였다. 그의 무기는 공허한 도덕적 신조가 고작이었으나 그마저도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인 장식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또 명성이라는 정치적 자본이 있었으나 일단 관료 사회 전체에 미움을 사고 나니 그마저도 가치가 없어졌다. 그런데도 혼자 관료 사회를 전체를 상대로 싸움을 벌였으니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해서와 관료 사회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관계였다. 그래서 이번 대결에서는 과거 그를 지지했던 사람과 청렴하기로 이름 높은 다른 관리들까지 적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해서 혼자 고립되고 말았다. 그는 어째서 관료 사회와 어울릴 수 없었을까?
도덕은 영원히 필요하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도덕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고상한 도덕이란 이상일 뿐이다. 모든 사람에게 고상한 도덕을 요구할 수 없다면, 사회에서 범죄나 부도덕을 저지르는 사람을 법과 제도로 예방하면 된다. 법제와 도덕은 상호보완적이다. 법과 제도는 악을 예방하는 역할을 하고, 도덕은 선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법과 제도는 무엇을 또는 어떻게 하면 안 된다고 규정하고, 도덕은 무엇을 혹은 어떻게 하기를 요구한다. 역사 속에서 이런 이치를 깨달은 몇 안 되는 황제들은 유가의 도덕을 제창하면서도 동시에 법가의 제도로 범죄를 예방했다. 명대의 개국 황제인 주원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일련의 반부패 법령과 조치를 마련해놓았지만, 이는 공허한 도덕 이념과 사회적 이상으로 그 밑을 떠받쳤을 뿐 인정에 부합하지 않았고 제대로 시행되지도 못했다. 홍무 연간에 존재했던 법령들을 해서 시대의 사람들은 이미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해서만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태조인 홍무제는 명나라의 개국 군주 아닌가? 군주는 허언을 하지 않는 법이다. 군주가 이런 법령을 만들었고 그 법령이 성인의 이상에 부합한다면, 이를 결연히 집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박봉에도 불구하고 아무 원망 없이 그런 법령을 몸소 실천함과 동시에, 용감한 투사처럼 일체의 부패 행위에도 맞서 싸웠다.
해서는 정말 순진했다. 공자의 주장은 이상일 뿐이며, 명나라도 개국한 지 무려 200년이나 지났다는 사실을 그는 고려하지 않았다. 홍무제가 심혈을 기울여 제정한 그 법령은 200년 전의, 그것도 일개 종이쪼가리일 뿐이었다. 게다가 관료 사회의 가장 큰 폐단은 부패가 아니라 그보다 더 위험한 파벌 투쟁이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해서는 여러 차례 파벌 싸움에 말려들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다. 그는 파벌 싸움의 피해자이면서도 수혜자였다. 그의 승진과 파직은, 단 한 번 황제에게 미움을 샀을 때 빼고는 모두 파벌 싸움과 관련되어 있었다. 흥국 지현에서 호부 주사로 승진한 첫 번째 승직도 엄숭이 실각하고 반대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덕분이었고, 두 번째 승직은 반(反)엄숭파인 서계의 추천 덕분이었다. 장거정(張居正)이 집권하자 비(非)장거정 도당이었던 해서는 파관되었다. 그가 세 번째로 복위했을 때는 장거정이 죽은 뒤 조정에서 장거정의 죄를 묻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해서는 자신의 승직과 파관이 정국의 변화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이 모든 과정이 다만 선과 악의 투쟁으로만 비쳤다. 자신이 중요된 것은 정의가 신장된 결과이며, 자신이 파직된 것은 악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선악 이원론의 관점으로만 시비와 행동을 판단했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 파벌이며 자신이 그들과 어떤 관계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선이면 지지하고 악이면 반대했다.
해서가 응천 순무로 부임하자마자 서계는 칼을 빼들었다. 서계는 줄곧 해서를 지지한 인물이었다. 해서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했다. 서계는 실권을 잡은 후 엄숭 일당을 몰아내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무사(巫師)를 벌하고, 염세(鹽稅)를 40만 냥이나 감면하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했다. 백성들도 이에 호응했고 해서도 지지했다. 이때 서계는 해서에게 정인군자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가 응천 순무로 부임한 뒤부터는 서계에 대한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 부임지에 도착해보니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지역의 토호, 향신들이 온통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경작자는 토지가 없었고 국가는 세수의 대상이 없었다. 토호들이 점유한 토지는 농민들로부터 빼앗은 것이었기에 농민들은 그 땅을 되찾고 싶어 했다. 그러던 중 황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해 청천(靑天)이 부임한다는 소식에 가난한 농민들이 하나둘 고발장을 들고 오고 시작했다. 송강부 화정현에서만 1만여 명에 달하는 고소인이 몰려들었다. 송강부 화정현은 서계의 고향이었다. 서계야말로 농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땅을 빼앗아 점유하고 있어 농민들이 가장 증오하는 지주였다. 그들 일가가 점유한 토지가 무려 24만 무(畝)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토지를 겸병하고도 납세마저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공익(나라)을 훼손하고 타인(농민)에게 해를 끼치는 서계 일가의 이기적인 행태에 청렴하고 정직한 해서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서계에 대해 그동안 품어왔던 이미지도 바닥으로 추락했다. 사실 서계 일가의 악행은 서계의 동생과 조카들이 저지른 것이다. 서계는 몇 번이나 동생들을 말렸지만 소용이 없어 그냥 그들의 행위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해서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서계의 맏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열 명 남짓한 노비들은 충군으로 보내졌고, 서계의 셋째 아들은 관직을 박탈당했다. 수천 명에 이르는 가노(家奴)들은 80~90%가 해산되었고, 약탈한 토지는 반 가까이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고공은 서계의 정적으로 서계의 손에 조정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 서계가 퇴임한 후 조정에 복귀한 그는 채국희를 소주 지부로 보낸 뒤 송강으로 전임시켰다. 손에 칼자루도 쥐었겠다, 보복을 아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해서는 마음이 복잡했다. 자신의 은인이 저지른 일을 목도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엄연한 사실과 원칙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해서는 사안에 대응할 뿐 사람에 대응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기풍 단속이지 인사 숙청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지주들로부터 전답을 환수하여 농민들에게 반환하는 일 자체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서계에게도 이 일에 능동적으로 동참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서계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한사코 전답 반환을 거부했다.
그러나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서계를 보호하고자 했던 해서의 가상한 노력은 결국 서계에 대한 배신이 되어버렸다.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가에서, 서계를 배반한 해서는 어느새 고공과 같은 무리로 인식되었다. 그렇다고 고공 일파가 해서를 반긴 것도 아니었다. 해서는 고공에게도 단단히 미움을 산 적이 있었다.
해서는 이때 장거정에게도 미움을 샀다. 서계의 천거로 내각 대신이 된 장거정은 원래 서계 일파로, 조정에 들어온 후 줄곧 서계의 편에 섰다. 서계는 퇴임한 후 고공의 보복이 두려워 장거정과 연락을 지속하고 있었는데, 마침 해서가 전답 반환을 추진하자 해서에게 좋은 말로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는 해서가 얼마나 원칙 중심적인지, 고공이 얼마나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 결과, 서계의 체면을 지키지 못했음은 물론 그를 보호하려 했다가 자신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구겨졌다. 믿었던 해서에 대한 장거정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해서가 파관을 당한 후 그를 복직시키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번번이 장거정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해서는 이렇게 서계, 고공, 장거정 모두에게 척을 지고 말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조정의 실세였으므로 이 세 사람과 척을 졌다는 것은 관료 사회 전체와 척을 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룰 수 없는 과업
장거정과 해서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장거정은 정치가 무엇인지도 알고 가진 능력과 권력도 막강했지만, 해서는 정치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감정적으로 처리하려 했다. 무엇보다 장거정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도덕 수준이 해서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해서는 시종일관 겉과 속이 일치했지만 장거정은 말 따로 행동 따로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대대적인 비판에 직면하게 된 것은 이런 언행 불일치 때문이 아니었다.
어린 만력제는 장거정을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두려워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장거정이 만력제의 도덕적 모범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황제에 대한 장거정의 교육은 대단히 엄격했다. 장거정은 임금이라면 반드시 인애와 관용, 검소함과 근면함이라는 태도를 갖추어야 하고, 충동과 욕구에 함부로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누차 강조했다. 이런 장거정의 감독 아래, 어린 황제는 놀지도 못하고 게으름을 피울 새도 없이 과중한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심지어 예술에 대한 취미마저 박탈당했다.
하지만 장거정 자신은 어떠했는가? 한 밀고자는 장거정의 생활이 화려하고 사치스럽다고 폭로했다. 비록 폭로이기는 했지만 사실과 정확히 일치했다. 만력제는 그 자리에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어린 황제는 자신의 지난 삶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장거정이 국정을 맡은 지난 10년, 천자는 만력제 자신임에도 그가 누리는 몫은 지극히 초라했다. 궁녀에게 몇 푼 하사하려 해도 그럴 돈이 없는 형편이란, 차라리 수백 년 후 중국의 한 시골 간부의 주머니 사정과 비슷하다 할만 했다. 그렇게도 도덕군자인 체했던 장거정이 황제의 사욕을 억누르면서도 자신의 사욕은 부풀려 채우고 있었다니, 천벌을 받을 죄가 아니겠는가!
만력제는 분노 끝에 상심이, 상심 끝에 낙심이 밀려들었다. 장거정조차 그런 사람이라면 대체 누굴 믿어야 할까?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이 있긴 있을까? 세상 사람들의 도덕 수준이 이토록 형편없다면 의례와 도덕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해서의 복직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만력제와 신시행은 해서를 다시 불러들이며 모종의 희망을 품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전국의 상하 관원을 통틀어 해서만큼 정직하고 청렴한 관원은 없었다. 그들은 이런 해서가 상징적 모범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이에 신시행은 해서에게 편지를 썼다. "유공(維公)께서 오랫동안 고향에 머물러 계셔서 조정의 상황을 잘 모르고 계실 줄 압니다. 청명한 조정에는 유공과 같은 청렴한 관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말의 속뜻은 아무 일도 일으키지 마시고, 와서 그냥 상징적 장식물 역할만 해주시면 됩니다가 된다.
그러나 해서는 세 번째 복직을 앞두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번에 다시 조정에 나가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지난 수년간의 파면 경험을 돌이켜보건대 자신의 앞날을 낙관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해서는 해서였다. 그는 큰 희망 없이 관직에 복귀하고서도 또 다시 풍속 개선의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또 다시 황제에게 칼끝을 겨누었다. 그는 청렴은 황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며, 궁 안에 과연 그 많은 원녀(궁녀)와 광부(환관)들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물론 탐관오리에 대해서도 포화를 멈추지 않았다.
해서는 이 상소로 또 다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해서의 탄핵을 주장하는 상주문이 또 다시 수없이 어전으로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해서를 공격하는 수법도 새로워졌다. 해서가 위선자라는 것이었다. 겉과 속이 같고 언행이 일치하는 도덕군자 해서를 위선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코미디였다. 이는 이 시기의 도덕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졌는지를 반영하고 있다.
해서에 대한 공격과 방어가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만력제가 입을 열었다. "해서는 수차례 천거되었기에 짐이 특별히 등용했다. 근래에 뇌물을 착복한 관리를 중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등 경솔한 언행으로 정체(政體)를 어그러뜨리고 짐을 공격했으나 짐은 너그러이 이해하노라." 그리고는 당분간 직무를 보류시켜야 한다는 이부의 생각에 동의하며, "이런 국면에 해서에게 직무를 맡기기는 적절치 않으나 퇴폐적인 기풍을 바로잡은 공로가 있으므로(도덕적 상징물 역할은 잘 했으므로) 종전의 직무를 유지케 하라"고 지시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웃기는 결론이다. 고매하고 절개 있는 사람이 퇴폐적인 기풍을 바로잡은 공로가 있음에도 직무를 맡기기에 적절치 않다면, 부패한 개망나니라야 중임을 맡길 수 있다는 뜻인가? 보아 하니, 황제 폐하 자신도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대한 희망을 버린 듯하다.
해서는 황제 폐하의 지시에 깊이 상심했다. 이는 자신이 제국의 노리개였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예로부터 나라를 바로세우는 근본으로 여겨졌던 강상(綱常, 삼강과 오륜)의 윤리와 인의도덕마저 제국의 노리개로 전락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연달아 일곱 번이나 사직을 청했지만 황제는 매번 윤허하지 않았다. 이는 산 채로 죽어 있으라는 요구나 매한가지였다. 이미 칠순 나이에 접어든 해서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얼마 후 그는 부임지에서 쓸쓸히 죽었다.
해서는 임종하는 그 순간까지 제대로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해서는 이상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상은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크게는 두보의 말대로 "위로는 요순의 도를 실현하고 아래로는 순박한 풍속을 이루는" 것이었고, 작게는 관료 사회의 부패를 척결하겠다는 것뿐이었다. 부패는 국가에도 개인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왜 정부와 황제는 부패를 방조하는 것인지 해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부패를 척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권력은 스스로 확장하려는 속성이 있으므로 권력을 제때 제어하지 않으면 악성 팽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자면 권력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권력은 소멸시킬 수 없고, 다만 제한할 수 있다. 권력은 어떤 대가를 불사하고라도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런데 무슨 수로 권력을 제한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상호 견제를 통해 권력을 부분적으로 제한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방법도 어디까지나 황제의 권력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그러니까 권력을 제한하는 것조차 무제한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런 무제한의 최고 권력인 군권이 바로 모든 부패의 근원이었다. 전제정치 자체가 가장 큰 부패이고 가장 큰 죄악이었다. 이런 제도 하에서 도덕에만 의지해 부패를 척결한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할뿐더러 백성들만 도적 떼로 내몰기 십상이다. 도덕 원칙은 독립적 사고를 요구하는데 전제정치는 절대복종을 요구하고, 도덕 원칙은 자유로운 선택을 요구하는데 전제정치는 전적인 종속을 요구한다. 종속과 복종만 아는 사람이 어떻게 도덕적인 양심과 책임을 알겠는가? 가장 부도덕한 사회에서 도덕을 사회제도의 근거로 표방하고 있었으니 이보다 황당한 일이 또 있을까?
해서는 1515년에 태어나 1587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나이 계산법으로 74년을 살았다. 해서가 세상을 떠나자 남경의 백성들은 마치 자신들의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분주히 장례 소식을 알렸다. 출상하던 날, 많은 점포들이 문을 닫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해서와는 아무런 연고도, 일면식도 없는 보통 민중들이 하나둘 장송에 참여했다. 흰옷을 입고 흰 모자를 쓰고 눈물을 흘리며 장송하는 행렬이 무려 백여 리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선량하고 강직하고 청렴했던 이 관리에게 가장 진실한 마음으로 애도와 감사의 뜻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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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는 청렴하고 완고했던 관리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것은 해서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바란 것은 부패 척결과 도덕의 부흥이었다. 그러나 부패와 도덕의 타락이 그 시대의 제도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상, 해서 같은 인물이 1만 명이 나온다 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긴, 그런 제도에서는 해서 같은 인물이 1만 명씩이나 나올 리도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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