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여인들

   
손경희
ǻ
글항아리
   
13000
2008�� 01��



■ 책소개
조선시대 테마사 중 여성 인물 이야기류에 해당하는 책. 조선왕조실록 세종~성종 연간(조선전기)의 기록에 등장하는33명의 하층민 여성들이 연루된 사건과 그들의 삶을 재구성했다. 한 인물에 한 장을 할애해 총 33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장의 중간 중간 당시의시대상을 예리하게 짚어내는 <깊이읽기&& 8꼭지를 삽입했다.

 


조선시대 여성사와 관련된 책들은 대개 왕비와 후궁을 다루는 ‘왕실 엿보기’와 일탈적 삶의표상으로 분류되는 ‘기생 이야기’로 양분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런 두 흐름 뒤에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같은 현모양처 이야기들이 뒤따른다. 이런책들의 공통점은 사회의 상층부에 위치한, 관련 기록이 풍부한 여성들을 다뤘다는 점이다.


반면 사회의 밑바닥에서 힘들게 살아간 여성들에 대한 책은 흔치 않다. 계집종, 천첩,무녀, 비구니 등으로 나뉘는 하층민 여성들의 일반적인 삶의 형태를 우리가 모르지는 않지만 그들 개개인이 사회와 갈등하고 타협하면서 살아가는내밀한 개인사에 대한 지식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지은이 손경희는 이 책에서 과감하게 하층민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조선이 버린 여인들의삶을, 주류에 의해 배제된 소수의 잔재를 되살려내고 있다.


저자 손경희
1969년 밀양에서 태어났다. 밀양여고를 나와 계명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경북대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사를 전공해‘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주군 서면수리조합의 운영과 토지 소유의 변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대학 강단에서 한국사 교양 강의를맡았고 ‘한국 역사 속의 여성’을 강의하면서 여성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원시사회부터 근대까지 여성들의 삶과 문화가 어떻게변해왔는지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이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음을 실감했고 좀더 깊이 있는 연구의 필요성을 느껴 2년 전부터는 조선왕조실록을 원문으로읽기 시작했다. 실록에 기록된 여성들의 삶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여성상과 매우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면서 실록 읽기에 푹빠져들었다. 앞으로도 저자는 실록이라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의 주변부로 평가되고 분류되어온 여성들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하는 작업을 해나갈계획이다.


■ 차례
머리말 - 조선왕조실록과의 만남


1 판관에게 강간당한 사노비 무심 
2 비단 사기꾼 일당에게 살해된 백이
3꿈에 남자를 봤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고읍지 
깊이읽기 - 조선의 형벌 제도와 노비
노비는 움직이기만 해도 잡아넣었다


4 상중에 아이를 낳은 옥루아 
5 배다른 남매를 결혼시키려 한 소근 
6홍행, 꽃의 고단함이 여기에 있다 
깊이읽기 - 기생들의 남성관과 현실 인식 
“돈 많은 남자가 으뜸이라” 


7 여장 남자를 사랑한 비구니 중비
8 두 남자 사이에서 억울하게 죽은 근비
9다섯 번 버림받은 아름다운 연경비 
깊이읽기 - 관아를 이탈한 기생들 
도망간 기생을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 


10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 아강지 
11 세 명의 왕자에게 사랑받은 초요갱
12 아들의 아비를 밝혀야만 했던 재춘 
13 음흉한 중의 아이를 밴 과부 연비
깊이읽기 - 여성에 대한 봉쇄는 어떻게이뤄졌는가 
남성의 집단 이기주의와 성리학적 윤리 & 


14 재산 다툼에서 매 맞아 죽은 서가이 
15 아들에게 청부살인을 시킨흔비
16 간부를 보호하고 능지처참 당한 정인 
17 첩의 몸으로 궁녀가 되려 했던 각신 
18 두 재상이 목숨 걸고 다퉜던철비 
19 두 남자와 동시에 간통한 동백
20 판서의 비호를 받은 무녀 진주 
21 남편을 조롱하고 본처를 학대한 첩 경비
깊이읽기 - 강상 윤리란 무엇인가 
신분질서 확립 위한 건국 엘리트들의 고뇌 


22 난봉꾼의 첩으로 살아야 했던 소근소사 
23 주지와 주지의 간통, 비구니 해민
24 아들에게 간통 현장을 들켜버린 강덕 
25 호적에 종으로 올려진 첩의 딸 사덕
26 아내의 계집종에서 남편의 첩이 된약비 
깊이읽기 - 조선 양반들의 은밀한 뒷거래 
선물 받아 일가친척에 첩까지 먹고살아


27 공주의 남편에게 강간당한 가섭 
28 집을 빼앗으려는 남편을 고소한 경이
깊이읽기 - 양반들의 노비 재산 침탈 실태 
지방관의 보호 아래 빼앗고 되팔아 차익 챙겨 


29 본처의 학대로 살해당할 뻔한 덕금 
30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간통한 여인 파독
31 태자를 폐위시킨 미모의 여인 어리
32 여자가 사랑한 여자 소쌍 
33 간통한 남자를 잔인하게 죽인 막비 
깊이읽기- 족보의 정치학 
부끄러운 조상들의 흔적 없애기 


에필로그 -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여성을 이해하는 것
참고문헌




조선이 버린 여자들


두 남자 사이에서 억울하게 죽은 근비
1479년(성종 10) 7월 12일, 장마 열흘째였다. 관료들이 모두 궁궐로 출근한 시간이었는데도 주위가 어둑어둑했다. 사정전(思政殿) 앞의 회화 나무 위로 건물 내부의 빛이 빠져나와 젖은 줄기가 약간씩 반짝였다. 조용한 바깥 풍경과는 달리 내부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 일어난 살인 사건 처벌을 두고 신하들이 두 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격앙된 목소리들이 천정에 가 닿을 정도였다. 논의는 좌승부지 김계창(金季昌)이 형조의 계본(啓本)을 들고 와서 다음과 같이 아뢰면서 시작됐다.


“박종손(朴綜孫)이 차경남(車敬南)과 근비(斤非)가 함께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 경남의 목을 졸라 죽였습니다. 둘은 모두 근비의 간부이니, 박종손은 사형에 처하고 근비는 장을 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좌승지 김승경이 말을 받았다. “천한 신분에 어찌 정식 혼인을 하겠습니까? 마땅히 먼저 간통한 자를 본남편으로 삼는 것입니다. 근비가 참여하여 본남편을 죽였으니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라고 김계창을 나무라듯 말했다.


김계창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목소리는 왕을 향해 얼굴은 김승경을 향해 “부모에게 고하지 않고 서로 정으로써 간통했으니 간부가 아니고서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도승지 홍귀달은 “평소 박종손은 근비에게 차경남을 죽이겠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알고서도 구하지 않았으니 주의(注意)의 법으로 논한다면 근비는 죽여야 합니다”라고 재반박했다. 유부승지 채수(蔡壽)도 “근비는 평소 박종손에게 차경남이 유부남이라 평생을 의탁하여 종신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로 볼 때 함께 죽인 것입니다”라고 거들었다.


성종은 신하들이 싸우는 것을 물끄러미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을 옮겨 형조의 계본을 찬찬히 살펴봤다. 논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성종은 말들을 모두 멀리 물리치고 이 사건을 자기식으로 해석했다. 어떤 사건을 파악할 때 성종의 최우선 관심이 있었다. 그것이 강상에 관계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성종은 혼잣말로 ‘이것은 지아비를 죽인 것이야’라고 되뇌었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차경남은 계손(季孫)의 중매로 근비를 만났으니 간부라고 할 수 없다. 또 박종손이 살인을 예고했을 때 근비는 한마디의 말로도 중지함이 없었고, 목을 조르는 걸 뻔히 보고도 좌시했으므로 그 마음이 참혹하다. 지정살본부(知情殺本夫)로 개율하라.”


죄목을 지아비 살인으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왕이 처음 보고받을 때부터 이렇게 사건을 강하게 규정짓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럴 경우 애초의 결정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었다. 두 남녀는 이날 사형선고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근비는 갓 스무 살이 된 여종이었다. 매끈한 다리와 잘록한 허리를 가진 약간 서구적인 미모의 여자였다. 종이 예쁘면 주인의 첩이 되는 게 보통이었지만 근비의 주인 민효원(閔孝源)은 이미 판관과 군수를 지낸 육십 노인이었다. 근비는 다른 집 노비에 비해 비교적 연애와 혼인의 길이 열려 있는 편이었다. 이 점을 노리고 근비에게 흑심을 품는 동네 남자들이 많았다. 하루는 박중손(朴仲孫)이 근비를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그는 민효원과 거래하는 어물전의 주인인데, ‘물 좋은 민어가 들어왔으니 어서 가져가라’고 근비를 불렀다. 그녀는 투덜거렸다. 주인 효원은 민어라면 환장하는 늙은이였다. 근비는 민어의 대가리만 끊어서 가져올 생각이었다. 저녁상에 찜을 해서 올리고 나머지는 내일 받아 매운탕으로 끓이면 되겠거니 생각하자 발걸음이 약간 가벼워졌다.


집에 도착하니 중손이 문을 열어줬다. 민어를 보여달라고 하자 아직 손질이 덜 끝났다며 방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방에 이불이 있어 근비가 쭈뼛거리자 중손은 괜찮으니 들어가서 다리를 좀 쉬라고 사람좋게 얘기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슬며시 밀고 들어왔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소리를 지르려 했으니 입은 어느 새 막혀 있었다. 남자는 굶주린 짐승처럼 난폭하게 그 자리에서 근비를 강간했다.


그는 일을 마치자 자신을 차경남이라고 소개했다. 다정하게 말을 걸며 평소에 너를 예쁘게 봐오다가 날을 잡은 거라면서 박중손에게는 죄가 없다고 했다. 이미 나에게 시집온 것이나 다름없고, 비록 내가 결혼한 몸이지만 첩으로 들일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돈을 몇 푼 쥐어주고 휭하니 나가버렸다. 근비는 박중손에게 따질 힘도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그는 웃으면서 근비에게 “내가 중매를 선 것”이라며 뻔뻔하게 얘기했다.


근비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며칠 후 근방에 사는 박종손이라는 머슴에게 또 강간을 당한 것이다. 그는 흉악한 사람이었다. 이미 근비와 경남이 몰래 사통한 것을 알고 접근했다. 그는 근비에게서 욕심을 채우고 “그 놈을 죽여 너와 살겠다”는 말을 했다. 며칠 사이에 두 명의 남자에게 번갈아 변을 당하고 나니 여자의 신세가 억울했다. 그래서 박종손의 말이 진짜 현실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살인 사건에 대한 심리가 다시 열렸다. 지난번에 근비에게 장형을 내려야 한다던 좌부승지 김계창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성종의 명령대로 죄명을 바꾼 문서가 들려 있었다.


“박종손이 매일 근비와 더불어 ‘차경남이를 죽이고 너에게 장가들어 같이 살자고 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밤 차경남과 근비가 함께 있는데 종손이 들어와서 새끼로 목을 조르고 근비가 말렸는데 종손이 위협하자 바로 그쳤습니다. 큰소리를 쳐서 밖에 들리도록 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성종이 듣고 싶던 얘기였다. 왕은 반가워서 “죽일 때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은 참여한 것이니 사형을 시키는 것이 옳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형조참판 이극균(李克均)과 참의 이육(李陸)이 나섰다. 그들은 “해친다는 말에 겁을 내서 그런 것이니 극형에 처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까 합니다”라며 성종을 진정시켰다.


그러자 좌우에서 ‘죽여야 한다’ ‘죽일 수 없다’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또다시 성종이 어탁을 쳤다. 그는 앞서의 견해를 다시 한번 반복하면서 근비의 경우 “춘추필법으로 단정하여 교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동의를 구했다.


논의는 근비에 대한 정상참작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한번 간통한 남자와 짜고서 남편을 살해했다고는 보기 힘들다”는 이육의 의견과 “비록 음행을 하는 여자일지라도 남자와 간통할 때에는 반드시 말을 통하는 자(중매)가 있게 마련인데, 어찌 이것을 가지고 본남편이라고 결정하겠느냐”는 이극돈의 견해가 그러했다. 당시 양반의 집안에서 부리는 계집종은 반드시 주인이 허락해야 시집을 갈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남편 되는 사람이 아내가 주인집에 일하러 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아야 비로소 본남편의 자격을 갖췄다. 이것이 당시 노비들의 삶의 실태였다.


근비에 대한 변호는 봇물처럼 쏟아졌다. 죽여야 한다는 의견은 열에 한둘이었다. 만약 다수결 투표를 한다면 근비는 압도적인 표를 얻어 사형을 면하게 될 판이었다. 그러나 때는 조선시대였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결정권은 오직 임금만이 쥐고 있었다. 신하의 백 마디 말은 왕의 한 마디 말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시대였다. 성종은 마침내 좌우 대신들을 모두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여 말했다.


“근비의 죄는 강상에 관계되는데, 만약 사형을 감하면 일반 백성들 가운데 간부를 사랑하는 자가 모두 그 본남편을 죽이고자 할 것이니, 옳겠는가? 이런 풍습을 자라나게 할 수 없으니, 본남편을 죽이려고 꾀한 율로 처단하라.”


결국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근비는 남편을 살해하려는 모의에 적극 가담한 자로 최종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에 해당하는 벌은 능지처참이었다. 성종은 능지처참 대신 큰 칼로 목을 치는 참형에 처하게 했다. 얼마 후 근비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왜 성종은 이 사건을 끝까지 강상 범죄로 밀어붙였을까. 성종은 평소 그렇게 앞뒤 없이 단죄하는 군주는 아니었다. 그날 근비를 논하는 자리에서 김계창이 또 하나의 사건을 말했다. 상의원(尙衣院) 능라장(綾羅匠)인 윤생이 출납하는 때를 틈타서 실을 몰래 훔쳤고, 내부(內附)의 재물을 도둑질한 것이니 죽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성종은 “도로 넣을 때에 숨겨두었다가 넣지 아니한 것은 문을 열고 훔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또 보통 사람의 마음은 이욕(利慾)이 항상 앞서므로 재물을 보면 가지고 싶은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결장 100대에 처하라”라고 명했다.


왜 이러한 합리성을 근비의 본남편 여부를 판단하고, 살해에 가담하지 않은 정황에는 적용하지 못했을까. 여성에 관해선 성종 같은 합리적인 군주도 파쇼의 논리로 대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여자가 사랑한 여자 소쌍
소쌍(召雙)은 약간 남자다운 용모를 지녔다. 그리 예쁘거나 귀염성 있는 얼굴도 아니었다. 어쩌다 옆 얼굴을 보면 턱 선이 매력적인 정도였다. 하지만 일찍부터 궁궐에 들어와 생활해온 덕에 몸에 궁중 법도가 익어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세자궁에 근무한 지도 오래돼 새로운 세자빈인 봉씨(奉氏)에게 많은 정보를 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단지 낯선 궁궐을 익히기 위해 봉씨가 소쌍을 자주 찾아왔다. 소쌍은 지엄한 세자빈이 자신을 찾아주자 늘 고마웠다. 세자빈 봉씨도 점차 소쌍에게 의지해갔다. 세자빈은 늘 혼자였다. 세자는 봉씨에게 관심이 없었다. 봉씨는 처음에는 소쌍에게 장난삼아 몸을 툭툭 건드려보기도 하고, 가슴을 만지기도 했다. 소쌍은 세자빈에게 지나친 장난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청했다. 그러나 세자빈은 소쌍의 반응에 더 재미를 느꼈다. 오히려 거부하는 소쌍을 보며 짜릿함을 느꼈다. 소쌍은 무서웠다. 세자빈의 스킨십이 나날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세자빈은 소쌍을 남자처럼 생각해 온몸을 희롱하였다.


세자빈은 소쌍을 사랑해 한시도 떠나지 못하게 했다. 500명이 넘는 궁녀들이 머무는 궁궐에 곧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은 곧 세자에게도 알려졌다. 소쌍이 궁궐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데 세자가 다가와 갑자기 물었다. 소쌍은 어떨결에 그렇다고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세자의 표정은 파래졌다.


평소 세자빈은 소쌍에게 사랑 고백을 자주했다. 세자빈은 “나는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나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구나”하며 소쌍이 잠시라도 곁을 떠나면 원망하고 성을 내었다. 세자빈의 집요한 사랑에 소쌍은 두려워지기도 했다. 소쌍은 성격이 서글서글해 세자빈뿐만 아니라 주변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권승휘(權承徽)의 사비 단지(端之)와 서로 좋아해 함께 자기도 했다. 봉씨는 소쌍을 질투해 사비 석가이(石加伊)를 시켜 항상 그 뒤를 따르게 해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일들은 시아버지인 세종에게도 알려졌다. 세종은 왕비와 함께 소쌍을 불러서 그 진상을 물었다. 소쌍은 부들부들 떨면서 아뢰었다.


“지난해 동짓날에 세자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세자빈께서 같이 잘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소인은 거절하였으나 세자빈께서 윽박질러 할 수 없이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였습니다. 이후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궁궐이라는 지엄한 공간에서 세자빈이 이루어질 수 없는 동성간의 사랑을 나누었던 것이다. 당시 세종도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세종은 시녀와 종비(從婢)등이 사사로이 서로 좋아해 동침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세종은 뜻밖에도 자신의 며느리가 동성애자란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즉시 세자빈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세자빈은 단지 놀이가 지나칠 뿐이지 잠자리를 같이한 것은 아니라고 고했다. 이러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봉씨는 몇몇 증거에 발목 잡혀 결국 처벌을 받게 되었다.


세종은 어이가 없었다. 세자빈을 간택할 때 그렇게 신중을 기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자신을 책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문종이 되는 세자는 여자 복이 없었다. 첫 번째 부인은 남자를 지나치게 밝혔다. 1444년(세종 9)세종은 세자의 나이가 14세에 불과하지만 왕실의 후사를 잇는 일이 중대하므로 빨리 배필을 맞이할 생각을 가졌다. 김구덕(金九德)의 손녀딸인 김씨를 간택해 세자빈으로 삼았다. 그러나 세자는 학문을 좋아할 뿐 여자에 별 관심이 없었다.


세종은 대대로 명가의 딸인 김씨를 간택해서 세자빈을 삼았다. 명문 출신이지만 남편의 사랑이 그리운 김씨는 사랑을 얻기 위해 각종 비책을 사용했다. 세자빈이 이렇게도 무리수를 두어서 세자의 사랑을 받으려고 한 것은 자신의 가문을 일으킬 아들을 낳기 위해서였다. 결국 1942년(세종 11) 7월 20일 종묘에 고하고 김씨를 폐빈시켰다.


김씨가 폐빈된 그해 봉씨를 세자빈으로 삼았다. 봉씨는 봉여(奉礪)의 딸이었다. 조선시대의 국혼은 대게 왕비와 세자빈을 뽑는 것을 말하는데, 그 대상은 사실상 사대부 가문 중에서도 당대의 명문 가문으로 한정됐다. 그중에서 열다섯 살 안팎의 딸을 데리고 있는 가문을 헤아려보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왕비를 간택할 때는 금혼령이 전국에 반포돼 처녀들의 결혼을 일시적으로 금지했다. 금혼령을 내린 후 명문 가문의 규수 가운데 부덕과 집안, 미모, 세 가지를 갖춘 처녀를 최종적으로 한 명 뽑았다.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으로 이루어졌으며 최종 단계인 삼간택에는 세명이 후보로 올라간다. 세 명 중 한 명이 왕비나 세자빈으로 낙점되면 나머지 둘은 결혼하지 못하고 평생을 혼자 살거나 후궁이 되기도 했다. 최종 간택에서 낙점받은 처녀는 그날부터 별궁에 들어와 일정 기간 동안 궁중 예절과 왕비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예의범절 교육을 마치면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왕비나 세자빈이 되었다. 혼례가 끝난 후 왕비의 친가에 각종 은전이 내려지는데, 왕비의 아버지는 부원군에 봉해지고 어머니는 부부인으로 봉해졌으며 왕비의 본향은 행정 단위로 승격시켜주었다.


이렇게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봉씨는 뜻밖에도 세자와 금슬이 좋지 않았다. 세종이 왕비와 함께 세자에게 세자빈에게 따뜻하게 대하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침실의 일까지 부모가 간섭할 순 없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도 자식이 없었다. 세종은 후사를 걱정해 사대부가의 딸들로 세 명의 후궁을 뽑아 승휘(承徽 - 세자궁에 딸린 종사품 내명부의 품계로 여관女官에게 주었다.)로 삼았다. 세 명의 승휘를 뽑은 뒤 세자의 사랑을 독차지 하지 못하자 원망과 앙심을 품었다. 드디어 권승휘가 임신을 하자 봉씨는 더욱 분개하고 원망하였다. 봉씨의 울음소리가 궁궐 먼 곳까지 드렸다. 세종이 왕비와 같이 봉씨를 불러서 타일렀다.


이후 봉씨는 몇 가지 사건을 통해 세종의 인심을 더 잃어버렸다. 한가지는 권승휘가 임신한 후 봉씨도 아이를 가졌다고 밝힌 것이다. 세종을 비롯한 궁중의 많은 어른이 모두 기뻐했다. 세종은 봉씨가 혹 놀라 아이가 잘못될까 염려해 중궁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했다. 중궁에서 거처한 지 한 달 남짓 되자 봉씨가 “낙태를 하였다”고 말했다. 봉씨는 자기 뱃속에서 “단단한 물건이 형체를 이루어 나왔는데 지금 이불 속에 있다”고 했다. 세종은 늙은 궁궐 여종으로 하여금 가서 이를 보게 했다. 그러나 이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임신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봉씨는 늘 외로웠다. 여자로서 즐거움을 알아버린 상황에서 남편이 늘 곁에 없었다. 오히려 세자가 자신의 외로움을 해결해주지 못하자 궁궐 여종인 소쌍과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봉씨가 처음부터 동성애 성향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남편의 무심함이 그녀로 하여금 계집종과 관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궁궐은 너무 조용하고 가라앉아 있어 봉씨는 힘들었다. 그 힘겨움을 술로 해결했다. 봉씨는 세자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 집착을 드러냈다. 봉씨는 여러 번 투기 때문에 몸소 궁인을 구타해 혹 어떤 때는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기도 했다. 한 남자를 사랑하고픈 여자의 집착은 무서웠다.


술과 음식으로도 해소되지 못했던 외로움은 결국 봉씨로 하여금 여자를 탐하게 만들었다. 여종과 세자빈의 동성애는 조정에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세종은 투기가 심하고 동성애까지 벌이는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첫 며느리를 폐빈시킨 아픔을 또다시 겪어야 했다. 이외에는 봉씨의 잘못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녀는 환관들의 주머니와 자루를 손수 만들었다. 이로 인해 세자의 생신에 바쳐야 할 물건들을 만들 여가가 없어지자, 지난해 생신에는 전에 바쳤던 오래된 물건들을 새로 마련한 것처럼 속이고 바쳤다. 세자는 먹다 남은 음식물을 그 어버이에게 보내므로 이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세자에게 절대로 아뢰지 말도록 하고 보냈다. 이미 마음이 멀어진 세자와 그의 아버지는 며느리의 모 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종은 연이은 며느리들의 일탈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세종은 황희?우의정 노한(盧?)?찬성 신개(申槪)를 불러서 봉씨 문제를 의논했다. 모두 세자빈을 폐하도록 요구했다. 결국 세종도 봉씨를 폐하도록 명했다. 결국 봉씨는 평민이 됐고 소쌍은 죽임을 당했다. 그녀가 원치 않았지만, 여자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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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