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혁명가와 혁명적 지식인들의 노력과 시도를 당장의 상황에서 성공했다거나 실패했다고주장하기보다는, 긴 역사적 흐름에서 바라보고 평가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고 있는 최소한의 "선"은 그들을 포함한 많은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비단 역사적 사실에 대한 암기가 아니라,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우리 자신에 대한 일종의 성찰일 수 있다. 이 책은 그 성찰을 위한 하나의 지침서로, “현실의 모순을 예민하게 파악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고,대안을 제시했던 선배 혁명가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역사는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는 신념을 일깨운다.
■ 저자 박상철 외
박상철 - 1961년 광주 출생.1981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입학한 후 서양사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1988년 동대학원 서양사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해 러시아 혁명사에 관심을갖고 「1917년 뻬로드그라드 노동자 및 병사 대표 소비예뜨의 형성」이란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3년 박사 과정에 입학하여「스톨리핀 개혁 정책의 성격: 정치 체제의 개편과 관련해(1906~1991)」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 논문을 수정해 『스톨리핀과 그의시대(1906~1911): 체제 변혁기의 보수적 개혁』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2005년 2월부터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에 재직하고있다.
■ 차례
머리말
1. 검투사 노예에서 자유의투사로 되살아난 ‘스파르타쿠스’ 이야기 - 김덕수
2. 에티엔 마르셀과 14세기 ‘파리의 혁명’ - 성백용
3. 혁명의 신학자토마스 뮌처 - 황대현
4. 평등주의자 그라쿠스 바뵈프 - 박윤덕
5. 윌리엄 모리스의 사회주의와 유토피아 - 송충기
6.‘노동자 황제’ 아우구스트 베벨 - 고재백
7. 로자 룩셈부르크, 한 혁명가의 ‘가지 않은 길’ - 문수현
8. 정통마르크스주의의 고독한 수호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 이채욱
9. 마르토프, 사회주의의 햄릿? - 박상철
10. 혁명가 이네사아르만드 - 기계형
11. 혁명가 스탈린, 독재자 스탈린 - 김남섭
12. 안토니오 그람시와 감옥 속의 민주주의 - 장문석
13. 두루티의 아나키즘 혁명 125일 - 황보영조
14. 말콤 엑스, 블랙 무슬림에서 국제주의 혁명가로 - 안효상
15.칠레의 고독한 ‘구원자’ 살바도르 아옌데 - 박구병
꿈은 소멸하지 않는다
평등주의자 그라쿠스 바뵈프
고대 로마의 개혁자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 그라쿠스(Gracchus)라고 개명한 프랑스아 노엘 바뵈프는 1797년 5월 28일 단두대에서 37세의 나이로 길지 않은 인생을 마쳤다. 그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의 마지막 불꽃이 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역사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바뵈프는 “프랑스 혁명에서 민중의 대의에 헌신한 정치가들 가운데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생존권의 확보와 소유권 및 경제적 자유의 유지 사이에서 야기되는 모순을 극복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바뵈프는 부르주아 혁명에 맞선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던 것이다.
가난한 가정의 장남으로서 바뵈프는 열두 살의 나이에 피카르디 운하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임금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끊임없이 군대식의 체벌을 가했던 권위주의적인 아버지는 “가난한 살림에 입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서, 그리고 아들을 엄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바뵈프를 막노동판에 내보냈다. 이후 5년 동안 바뵈프는 책과 펜을 잡아보지 못하고 고된 노동의 나날들을 보냈다. 토목 인부로서의 체험은 소년 바뵈프의 의식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가장 즉각적인 것은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최소한의 수고로 먹을거리를 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사춘기 소년에게 이 얼마나 가혹한 진실인가! 이 점에서 피카르디 운하는 바뵈프에게 첫 번째 ‘인생 학교’였다고 할 것이다.
열일곱 살 때 바뵈프는 아름다운 글씨체 덕분에 봉건 법무사의도제로 들어가 토지 대장 갱신과 봉건 법서기의 일을 배울 수 있었다. 새로운 일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남루한 옷차림을 창피하게 생각했던 청년 바뵈프는 1년의 견습 기간을 보내고 나서도 고작 3리브르의 월급을 받으면서 토지 대장을 정리하는 일을 했다. 또한 이 시기에 바뵈프는 봉건 법무사에게 필수적인 토지 측량 기술도 습득해서 차차 봉건 법무사로서 주변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자신의 사무실을 개설하고 나서 고객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직업인으로서 바뵈프는 정직하고 합리적으로 일처리를 잘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뵈프는 21살 때인 1781년 6월, 브라크몽 가문의 일을 맡으면서 처음으로 루아에서 자신의 사무실을 열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브라크몽 부인의 시종인 마리 랑글레와 결혼했고, 1792년 8월까지 루아에 거주하면서 봉건 법무사로 명성을 쌓아갔다.
1785년 바뵈프는 그 지역의 대영주를 비롯해 적어도 13명의 영주를 위해 일을 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 연간 임대료가 120리브르에 달하는 큰 집을 빌려서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보장해 주었던 봉건 법무사로서의 성공도 바뵈프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바뵈프는 봉건법에 관한 수많은 저작을 섭렵하며 직업상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갈고 닦는 데 정진하는 한편, 계몽 사상가들의 저서를 탐독하며 ‘철학자 같이’ 진지한 사색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스스로 “내가 귀족 계급이 저지르는 가증스러운 횡령의 비밀을 발견했던 것은 영주 문서고의 먼지 속에서였다”라고 말했듯이, 봉건 법무사라는 직업은 바뵈프에게 특권적인 지배계급의 탐욕과 그에 희생당하는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 및 불만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그가 직접 보고 겪은 피카르디 농촌은 혁명기 동안 봉건제 폐지, 간접세 철폐, 곡가 통제, 공유지 분배 등 다양한 요구를 제기했던 강력한 농민 운동의 무대가 될 만큼, 여러 가지 모순이 중첩되어 있던 지방이었다.
피카르디 지방의 지주들은 지대 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쟁기와 가축을 보유한 부농에게 토지를 임대하고 일정액의 지대를 화폐로 받는 정액 소작제(bail a ferme)를 선호했다. 그 결과 대지주에 의한 토지 겸병뿐만 아니라, 대차지농의 수중에 임대차 경작지가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고, 피카르디 지방의 농민층은 소수(10퍼센트 미만)의 부농과 대다수(70~80퍼센트)의 영세농으로 분화되었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은 다른 지역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충분한 생계 자원을 확보하지 못한 빈농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나마 남아 있던 작은 땅뙈기마저 팔아치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농민들의 빈곤은 혁명 직전 물가고와 실업 사태로 말미암아 더욱 악화되었다. 곡물을 직접 생산하는 생산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던 대다수의 소농들은 도시의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곡물을 사먹어야 했기 때문에 곡가 상승은 그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다. 농민들을 더욱 화나게 만드는 것은 시장에서 비싼 값을 주고 사먹어야 하는 곡식 가운데 상당량은 빚을 갚고 세금과 지대를 납부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수확 직후 자신들이 싼 값에 내다팔 수밖에 없었던 곡식이라는 점이었다.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오르지 않고, 실업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대다수 농촌 주민들의 처지였다. 특히 피카르디 지방에서는 1786년의 영불 통상 조약의 결과로 영국 제품에 시장을 빼앗긴 섬유 부문에서 대규모 실업 사태가 발생함으로써 민중의 생활은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봉건 법무사로서 농민들과 접촉하면서 암울한 피카르디 농촌의 상황을 목도한 바뵈프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사회의 가장 우선적인 가치로 ‘생존권’과 ‘완벽한 평등’이라는 개념을 설정했다. 또한 바뵈프는 임금 생활자의 수를 증가시키고 임금의 하락을 가져오는 소유의 집중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비롯되었다고 보고, 평등의 확립만이 인간의 ‘생존권’을 완벽하게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모든 법 중에서 제일의 법은 위대한 평등의 법이다.”
전문 직업인으로서 생활의 안정을 찾은 바뵈프는 봉건 법무사로서의 경험과 독서를 통해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루소가 디종 아카데미의 콩쿠르에서 입상해서 명성을 얻었듯이, 바뵈프도 콩쿠르에 참여해 자신의 소신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아라스 아카데미의 서기인 드 포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의견을 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이러한 과정의 산물이 바로 『영구적인 토지조사』였다. 봉건 법무사와 측량 기사의 기술적 활동을 종합, 정리하기 위해 구상되었던 이 작품은 바뵈프와 혁명을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혁명가 이네사 아르만드
이네사 아르만드는 스톨리핀의 반동적 탄압 조치에 의해 유형을 떠나기 직전까지 지하의 선동가이자 조직가로 활동했고, 1917년 4월 레닌 일행과 함께 ‘봉인 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그로 귀환하기 전까지 해외에서 조직된 수많은 회의와 당대회에서 레닌의 노회한 전략을 실행에 옮기도록 도왔던 레닌의 공식 대변가이자 비밀을 나눈 동지였다. 또한 이네사 아르만드는 수많은 여성 노동자와 여성 농민들과 깊은 유대를 맺었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서 1919년 8월에 설립된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여성부(Zhenotdel)의 초대 장관을 지냈으며, 가정과 작업장, 그리고 사회에서 부당하게 취급받던 여성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헌신했던 점에서 콜론타이의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공적인 삶의 다른 한편에서 그녀는 수차례의 체포, 투옥, 망명으로 점철되는 험난하고 짧은 생애의 한가운데서 다섯 자녀와 친밀한 애정으로 연결되어 있던 어머니였으며, 전통적인 부르주아 가족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가족상을 만들었던 두 남자의 아내였다. 아네사 아르만드는 선택을 요구하는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혁명이라는 대의와 가족이라는 두 개의 전선 사이에서 오롯이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개척한 용기 있는 혁명가였다.
1897년부터 이네사 아르만드는 매춘 여성을 위한 박애주의 자선 모임인 ‘여성 문제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00년에는 회장으로 선출되어 매춘 여성을 위한 일요 학교를 열고, 여성 문제를 광범위하게 논의할 수 있는 여성 신문 간행도 시도했다. 그러나 이네사 아르만드 자신이 고백하듯이 이러한 수많은 부조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삶은 결코 개선되지 않았다.
소수의 교육받은 남성 엘리트층 중심의 담론 안에서 표현되기 시작했던 여성 문제는 러시아의 억압적 정치 현실과 맞물리면서 그 해결과 사회적 실천을 둘러싸고 첨예한 노선 차이를 야기했다. 어떤 이들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 일컬을 수 있는 보다 온건한 노선을 택했고, 어떤 이들은 혁명 운동과 연결되었다. 특히 1874년 이후 농민 사회주의의 이상을 전하고 농민을 계몽하기 위해 농촌으로 들어갔다가 체포된 젊은 활동가들 중 15퍼센트가 여성이었던 데서 나타나듯이, 수많은 여성들이 때로는 인민주의자로서, 때로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혁명 운동에 참여했다.
19세기 말, 매춘은 제정 러시아의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사회적 불안정 상태의 소산이었는데, 특히 여성 노동자와 하녀들은 매우 낮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여성들은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른 수단을 찾아야 했으며, 그렇게 해서 도시로 몰려드는 소녀들이 늘어나면서 매춘도 만연했다. 1890년, 모스크바에는 105개의 사창가와 1,178명의 등록된 매춘 여성이 있었다. 노동 여성들은 보통 등록하지 않고 매춘을 했으므로 실제 비율은 더 높았을 것이다. 이네사는 시골에서 상경한 어린 여성 노동자를 포주들로부터 보호하는 방법을 논의하고, 매춘여성등록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매춘 여성들의 재활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1903년은 이네사 아르만드의 인생에서 매우 중대한 전환점이 된 시기다. 이네사는 정치적 실천의 무기로 마르크스주의를 선택했으며, 전통적인 가족 관계나 결혼 관계를 깨기로 결단을 내렸다. 이 시기에 이네사는 ‘여성운명개선회’ 활동을 위해 자녀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지내고 있었으며, 남편 알렉산드르도 1901년 모스크바 두마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모스크바 주 젬스트보(러시아의 지방자치기관)의 업무 때문에 주로 엘디기노 영지에 머물렀다.
1904년 5월부터 1907년 초겨울 메젠으로 유형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네사는 모스크바 지역에 기반을 둔 사민당 지하 선동가로서 활동했다. 사민당 선동가들을 위한 대출 도서관을 운영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경찰의 감시 하에서도 푸슈키노 주변 지역 방직 공장들에 공식적인 당조직을 결성해 노동자들을 위한 선동 활동을 펼쳤다. 1906년 여름 그녀는 모스크바 레포르토보 구역의 사민당 선동 총책으로서 선동가를 훈련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작업과 함께, 문맹의 임시 노동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던 이 지역 노동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주장들을 이해하기 쉽게 반복해서 설명해 주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이네사 아르만드의 서클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그녀의 열정과 낙관주의를 회상하곤 했다. 스톨리핀의 반동적 억압 정책 아래서 1907년 4월부터 7월까지 아르만드는 연이어 세 번 체포되었다.
1909년 봄 해외 망명을 결심하고 난 후의 이네사의 행동이 매우 눈에 띈다. 30대 중반에 들어선 그녀의 마지막 대안은 브뤼셀 누벨 대학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여성에게 자유로운 입학을 허용하는 이 대학에서 그녀가 경제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것은 사민당이 특히 경제 이론과 정치 사상을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생각에 여성들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토론이나 논쟁에 대한 훈련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고, 자신감이 결여되었다고 보았다. 이네사는 6년간의 당 사업을 경험하면서 이론 능력의 중요성과 자신이 받은 교육의 결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콜론타이나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이론가가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남성 동료들이 자신의 언어 능력이나 조작가로서의 능력을 인정하듯, 자신을 신중한 동료로 받아들여 주기를 원했다. 학위 과정은 보통 2년이 걸렸으나, 이네사는 10개월 만에 학업을 끝내고 시험을 보기로 결심했고 성공적으로 통과했다.
그후 이네사 아르만드의 행보는 더욱 단호해진다. 그녀는 1910년 8월 28일 코펜하겐에서 개최된 ‘제2차 여성사회주의자회의’가 끝난 후 ‘제2인터내셔널 8차대회’에 참석했다. 이네사는 큰 시누이 안나와 함께 참석했는데, 러시아 대표로는 사민당의 레닌, 콜론타이, 플레하노프,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마르토프, 루나차르스키, 트로츠키 등과 사회혁명당 대표 7명을 이끄는 지도자 체르노프가 참석했다. 코펜하겐 대회를 기회로 이네사는 그동안의 방황을 결말지었다. 이네사는 1910년 9월 파리로 옮겨 당 조직 사업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칠레의 고독한 "구원자" 살바도르 아옌데
북쪽의 사막에서 남쪽의 극지까지 다양한 기후대를 지닌, 지구상에서 가장 긴 나라 칠레는 19세기 말 이래 민주주의의 모범 사례로 꼽혀왔다. 의회 제도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노동 운동과 여러 정당의 활동이 보장되었으며, 대중의 선거 참여 비율이 꽤 높았다. 대공황으로 촉발된 경제 위기가 정치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칠레에서는 1932년에 마르마두케 그로베 대령을 비롯한 급진적인 군인들을 주축으로 열이틀짜리 ‘사회주의 공화국’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 뒤 1973년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기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다당제와 선거 정치가 유지되었다.
20세기 초반부터 1980년대까지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좌파 정당들은 대체로 유권자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으나 칠레의 경우는 사뭇 달랐으며 그 중심에 살바도르 아옌데와 사회당이 존재했다. 아옌데의 집권과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의 실험은 칠레의 민주주의 전통이 탄생시킨 작품이었다. 그러나 인민연합 강령을 토대로 각종 사회 개혁을 추진하면서 칠레의 대안적인 발전을 모색한 아옌데의 짧은 혁명은 1973년 9월 11일 미국계 기업인 국제전신전화(ITT)와 미 중앙정보국(CIA)의 조직적인 지원에 힘입어 칠레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 때문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이 과정에서 아옌데 자신도 피살되고 말았다.
가문의 영향으로 정치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학생 조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의학도 아옌데는 가난한 이들의 참혹한 생활 환경을 목격하고, 마르크스와 레닌, 트로츠키의 저작을 접하면서 빈곤과 질병의 관계나 사회 정의에 대한 신념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런 성향과 활동 때문에 그는 카를로스 이바녜스의 독재 시절에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32년 ‘사회주의 공화국’이 무너진 뒤 다시 한 번 수감된 아옌데는 변호사였지만 별다른 재산 없이 청렴하고 정직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 변혁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요주의 인물’로서 발파라이소의 몇몇 병원에서 일자리를 거부당한 아옌데는 병리학 조수로 일하면서 빈민들의 시신을 부검하기도 했다. 시신 부검은 고되고 지루한 일이었지만 이를 통해 아옌데는 빈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확인하면서 만연한 빈곤과 결핍의 치유책으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한층 더 고조시킬 수 있었다.
아옌데는 인민전선이 해체된 뒤 1970년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칠레 좌파의 대표 주자로 활약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탄탄하게 구축했다. 그는 네 차례에 걸쳐 상원의원에 선출되었다. 고향인 발파라이소에서 당선된 1961년의 경우를 제외하곤 전혀 연고가 없는 지역에서 후보로 출마해 매번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전국적인 지명도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발판으로 1952년, 1958년, 1964년 세 차례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아옌데는 1952년에 불과 5.45퍼센트의 지지율에서 1958년에 사회당과 공산당이 연합한 인민행동전선의 후보로 나서 28.9퍼센트까지 지지율을 끌어올렸지만 우파 후보인 호르헤 알렉산드리에게 아쉽게 패배했다.
아옌데는 1970년 11월 5일 취임 연설에서 “마침내 더 이상의 경제적 착취와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이 없는 날이 왔다”라고 선언하면서 “칠레의 길은 인민연합의 강령에 나타난 대로 민주주의와 다원주의, 그리고 자유를 통해 사회주의에 이르는 길”이라고 언급했다. 1971년 5월 21일 의회에서 행한 첫 번째 연례 연설에서 아옌데는 “다양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사회주의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 제도적 통로를 수립”하겠다고 밝히면서 칠레가 걷고 있는 전인미답의 과정을 “사회주의 사회로 향하는 제2의 이행 모델”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정치적?사회적 투쟁이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필수적인 원칙으로 “합법성, 제도적 발전, 정치적 자유, 폭력의 예방,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제시했다.
아옌데는 각하나 최고 지도자같이 웅장한 칭호를 거부하고 ‘대통령 동지’로 불리길 원했다. 이는 단지 상징적인 수사가 아니라 대다수 칠레 정치인들이 지니고 있던 정치적?사회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아옌데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언행일치의 정치인으로서 인민연합 강령을 체계적으로 실행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옌데는 선거 캠페인에서는 좌파 색채의 프로그램을 제시하다가 집권 뒤엔 보수적인 정책으로 일관한 2000년대의 이른바 ‘중도 좌파’ 정치인들과 크게 달랐다.
아옌데는 선거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자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초유의 기록을 남김으로써 라틴아메리카 좌파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서 거둔 선거의 승리가 사회주의를 향한 새로운 제도와 법적 질서의 수립을 보증하지는 않았다. 아옌데 정부를 축출한 뒤 정치적 정당성의 부재를 외국의 원조와 경제 성장 정책으로 덮으려던 피노체트는 아옌데 정부가 추진한 정책을 철저하게 뒤엎었다. 그런 탓에 제도와 정책의 차원에서 아옌데의 유산을 찾기란 쉽지 않다. 쿠바의 혁명 세력과는 달리 의회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체제, 특히 반대파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적대적인 언론 매체가 건재한 상황에서 아옌데의 운신의 폭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쿠데타 발발 이전에도 아옌데가 추구한 평화롭고 합법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입법부 내의 반대나 사법부의 판결에 의해 제동이 걸리곤 했다.
제도적 접근에 회의를 품은 이들에게 아옌데의 비극적인 최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가 건재한 가운데 평화로운 사회주의의 실현이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신념을 강화시켜 준 반면 교사였다. 이들에게 미완성으로 끝난 ‘칠레의 길’은 변혁 운동 세력이 기득권층의 정치적?군사적 저항을 좌절시키고 경제 정책에서 지속적인 진전을 이루기 위해선 무엇보다 국가 권력의 확실한 장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특히 아옌데는 군부라는 실질적인 적대 세력을 어떻게 중립화시킬지에 대해 뚜렷한 복안을 갖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누군가의 지적대로 사회주의로 향하는 길을 모색했다면 입법부와 사법부에 대한 통제 수위를 높이며 아울러 군부와의 일대 격돌을 예견하고 이를 면밀하게 준비했어야 하지 않을까? 아옌데 정부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가장 높았을 때인 집권 초기에 군부에 대해 과감한 조치를 취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
긍정적인 유산이든 타산지석이든 간에 아옌데의 집권은 무엇보다 좌파 세력이 중간 계급과 연대함으로써 정치적?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는 것과 위기 관리를 통해 극단적인 대립으로 정세를 악화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각인시켜 주었다. 또한 대다수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채 집권할 경우라면 좌파 세력은 언젠가 닥칠 격렬한 대립과 충돌의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초법적인 방식을 포함해서 필요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막강한 쿠데타 세력에 맞서 아옌데가 선택한 것은 패배가 자명한 가운데 몸소 총을 들고 고독한 결전을 벌이는 일이었다.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옌데의 장렬한 최후 때문에 후속 세대는 인민연합 정부의 실책을 떠올리기보다는 그의 용기와 순수성을 신비롭게 기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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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