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인내심이 있었을 망정, 인자한 면모는 찾아보기 힘든 임금이었다. 실록에는철두철미하게 공부를 한 후 그 지식을 바탕으로 신하를 맘껏 휘두른 독선적인 모습이 많이 보인다. 명재상으로 평가받는 황희는 사실 비리혐의가있었고, 박연은 돈을 밝혔으며, 김종서는 고집 세고 꽉 막힌 사람이었다. 지은이는 세종의 위대함을 바로 이 이채로운 사실들에서찾아낸다.
지은이가 보기에 세종은 결함이 있을지언정 능력이 뛰어난 인재들이 마음대로 활개를 칠 공간을만들어주었다. 세종은 성격이나 계급을 상관하지 않고, 그들이 가진 전문가로서의 능력만을 최우선으로 보았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자신의카리스마와 학식으로 적절히 억눌렀던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세종과 여러 신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세종의 업적들을 다시 되짚어 보며, 인내심강하고 때로는 독선적이기 했던 세종의 성격과 리더십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 저자 이한
서울에서 출생, 역사를 전공했다. 한국사를 비롯하여 동서양의 역사에 두루 흥미를 가지고 연구 중이다. 특히 기록을통해 과거를 현재에 복원하는 것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 현재 조선왕조실록을 한 권씩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에 힘쓰고 있다. 비단 우리나라의고전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의 기록까지 두루 살펴보는 것이 취미이며, 중세 이슬람의 역사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폭넓게 연구 중이다. ‘재미있는이야깃거리가 넘치는 보석의 바다’ 역사에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야기를 찾고 있으며, 무엇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재미있고 쉽게 역사에게다가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저서에는 『조선기담』이 있다.
■ 차례
1. 인간, 세종
태종이방원 …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불행한 아들
원경왕후 민씨 … 공평하게 사랑하지 못한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 … 국모가 된 죄
왕자 이도 … 세종대왕의 어린 시절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 두 사람의 형
양녕대군 vs 충녕대군 … 세자 책봉 전쟁
왕위 선위 … 경복궁의 주인이 바뀌던 날
세종과 태종 … 동시대를 다스린 두 사람의 왕
왕이 되지 못한 형들 … 양녕대군과효령대군의 이후
2. 전문가의 시대
황희 … 명재상의 진실
맹사성 … 소를 타고 다니는 재상
허조 … 제3의 정승
안숭선 … 바람의 도승지
장영실 … 조선의 시간을 발견하다
이천 … 양반 출신의 기술자
박연 … 조선의 음악을 만들다
오례의 정리 … 조선의 정체성을 세우다
훈민정음의 창제… 조선 고유의 문자를 만들라
훈민정음 프로젝트 … 성삼문과 신숙주, 젊은 천재 단짝
집현전의 설치 … 지혜로운 자들을 한데모으다
북방 정책 … 나라 북쪽의 경계를 긋다
토론과 독단 … 파저강 정벌과 수령 육기제의 논란
3. 빛이 강할수록 어둠도 짙은 법
세종의건강기록부 … 낫지 않는 눈병, 그리고 임질의 논란
사대주의의 병폐 … 열을 잘 한다 해도 하나를 잘 하지 못한다면
세종의 예스맨… 도승지 조서강과 아첨꾼
세종의 여인들 … 혜빈 양씨와 세종의 비빈들
멧돼지와 귀공자 …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집현전 …세종의 아이들
4. 선량한 독재자의 그림자
세종 승하 …선량한 독재자가 떠나간 후
8공자의 강성 … 메뚜기 왕자들의 번성과 비극
수양대군의 한 … 계유정난에 희생당한 인재들
부서진 세종의 유산 … 조선 시대 최대의 골육상쟁
세종은 조선이다 … 후세의 사람들, 세종의 시대를논하다
나는 조선이다
인간, 세종
왕자 이도 - 세종 대왕의 어린 시절
세종은 정조와 더불어 조선의 왕 중에서 드문 학자 군주였다. 스스로 공부를 좋아했고 쉼없이 노력했으며, 다양한 도전을 시도했고 또 그만큼의 성과를 냈다. 결국 세종은 학문적, 과학적 성과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으니, 만 원짜리 지폐에서의 도안이나 남극의 기지 이름에 쓰인 것도 그렇다.
태종은 슬하의 자식이 29명으로 조선의 왕들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두었다. 물론 효령이나 충녕, 성녕대군은 조강지처인 원경왕후의 자식이니 다른 자식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그래도 세자에 비하면 비교적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증거로 양녕, 곧 세자가 본격적으로 삐뚤어지기 전까지 충녕대군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기대를 걸지 않았던 자식. 태종에게 충녕대군은 그런 자식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명도 막둥이(莫同)라고 지었고, 태종 13년 12월 30일, 태종은 충녕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편하게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해라.”
세종은 셋째 아들이니 왕위를 이을 수 없었고, 종실 출신이니 벼슬로 현달할 수도 없었다. 그런 것쯤이야 참으면 되는 일이지만, 행여 역모에 휩쓸리지 않도록 평생 살얼음 걷듯 조심스럽게 살아야 했다. 결국 욕심도 희망도 없으니, 바라는 것이나 마음껏 하라는 말이다. 아버지로서는 아들을 사랑해서 한 말이겠지만,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아들에게는 더 없이 잔인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충녕에게 아무런 야심이 없었을까? 태종처럼 나라를 이을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며 군사를 이끌어 아버지를 치는, 그런 굉장한 야심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훌륭한 아들로 인정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싶다는 그런 희망은 없었을까?
여덟 살 때부터 아버지와 나라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가며, 또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후계자 교육을 받았던 양녕과는 달리, 충녕은 스스로 공부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충녕대군은 천생 공부벌레였다. 비록 왕위를 계승할 수는 없었지만, 왕족이라는 신분은 마음 놓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세종은 평생동안 모든 일을 할 때 결코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런 성격은 적어도 세종 자신을 만들어내는데 충실하게 작용했다.
세종이 아직 세자가 아닌 충녕대군이었을 때 병이 났지만 계속 책을 읽자, 태종이 걱정한 나머지 환관들을 시켜 책들을 모두 빼앗아버렸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이때 유일하게 『구소수간毆蘇手簡』이라는 책이 남아 있어, 세종은 이 책을 보물처럼 아껴 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세종 5년 12월 23일). 『구소수간』은 본디 구양수와 소동파의 편지 모음집인데, 구양수는 중국의 역사서인 『신당서』의 저자이자 고려에 좋은 책을 건네줘서는 안 된다는 고약한 발언을 했던 사람이고, 소동파는 『적벽부赤壁賦』를 지은 시인이자 미식가로 중국 요리 동파육의 유래가 된 사람이기도 하다. 기실 그 사람들의 편지모음집이라니 특별히 재미있을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세종은 아픈 몸을 이끌면서도 열심히 그 책을 읽었다니, 어쩌면 활자중독증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젊었을 때나 훗날 왕으로 즉위한 이후로나 세종의 성품은 침착하고 과묵했다. 학식은 물론 열의까지도 웬만한 신하들을 능가했으며, 무엇보다도 잠을 줄여 책을 읽고 업무를 보았을 정도로 성실했다. 하지만 이러한 세종의 장점들은 양녕대군이 엇나간 뒤, 그리고 즉위하고 나서야 드러난 것들이고, 그 이전까지는 그저 글공부 좀 열심히 하는 별난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태종이 그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세종은 곧잘 행운아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셋째 아들인 세종은 부모의 기대를 받지 못했지만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는 일을,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일을 스스로 선택했다. 만약 왕족으로서의 안온한 삶에 만족했다면, 혹은 양녕대군처럼 삐뚤어지지 않았더라면, 충녕대군은 학문을 좋아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은 왕족으로서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르며, 원래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충녕대군은 이 같은 사실에 절망하거나 나태해지는 대신 노력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이 차츰 무너져가는 큰형 양녕의 행실과 비교되어 더욱 빛났으며, 결국 유교국가의 원칙이나 다름없는 적자계승원칙을 깨고 첫째와 둘째 형을 제치고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때문에 나라의 세자라는 무거운 짐이 갑자기 어깨 위에 놓였을 때도 망설이지 않고, 방황하지도 않았다. 이처럼 각박한 현실에 굽히지 않고 긍정적으로 스스로의 길을 찾아냈던 것이 세종의 능력이었다. 결국 셋째일 뿐이었던 충녕대군은 오히려 큰형보다도 뛰어난 왕재임을 아버지와 신하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었다. 더하여 이후 수십 년간 조선의 관리들은 부지런한 일벌레 임금 밑에서 감히 농땡이 피울 틈없이 열심히 일했으며, 마침내 조선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졌다.
전문가의 시대
황희 - 명재상의 진실
세종의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황희(黃喜)이다. 세상에 황희 정승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에게는 재미있는 일화들이 남아 있다. 말 못 듣는 짐승에게도 함부로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검은 소 누런 소의 이야기도 그렇고, 노비의 아이들이 수염을 잡아당기고 오줌을 싸거나 심지어 자신을 때리면서 장난을 쳐도 화내지 않는 둥글둥글하고 너그러운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뿐만인가. 노비도 하늘의 백성이니 함부로 부리겠느냐고 말했고, 종들을 함부로 괴롭히거나 때리지 않았으며, 집 뜰의 봉숭아(혹은 감)나무의 열매를 아이들이 모두 따 가버려도 화내지 않으며 웃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싸우는 사람들을 중재하며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 하자, 대체 누가 맞느냐는 부인의 퉁박에 부인의 말도 맞다는 이야길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황희는 무려 27년을 정승으로 있었고, 그중 18년 동안 영의정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까지 오래 정승의 자리에 있던 사람은 조선 역사상 다시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재상의 예로 들어지는 황희는 세종만큼이나 완벽해 보이는 인물이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그에게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게 쉽게 믿어지질 않는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에는 고생에 고생을 거듭하다가, 세종이라는 왕을 만나면서 비로소 자신의 최고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었다. 세종은 아버지뻘인 황희를 극진하게 아꼈고, 부모의 상을 당했어도 계속 일하게 했다. 이후에 황희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은퇴를 하려했지만, 세종은 가마는 물론 궤장(?杖)을 내려주고 며칠에 한 번만 조정에 나와도 된다며 계속 정승의 자리에 남아 있게 했으며, 여든 살이 될 때까지 일하게 했다. 이처럼 세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으며, 청백리로도 이름난 황희가 남의 일을 봐준 허물이 있기 때문에 재상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들었다는 사실을 낯설게 들린다. 흔히 너무도 좋은 사람, 상냥하고 끝없이 무르고 속 좋은 노인으로 알려진 황희이지만, 실록은 이와 꽤 다른 황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리 말해두건대, 이 글은 황희 정승의 나쁜 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황희 정승도 결국 사람이었고, 실수를 할 수 있었다. 그의 잘못을 모른 척 보아 넘기자는 것도 아니다. 세종이 아껴서 그토록 오래 정승자리에 두었다는 것은, 이런 결점을 넘어설 만한 이유가 있어서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세종의 시대에서 황희를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우선 황희는 적자의 자식이 아니었다. 첩, 그것도 노비의 몸에서 태어난 신분이었다. 황희 정승이 서출이었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르지만, 단종실록에서는 황희 스스로가 “정실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그가 조선 후기, 아니 중기에 태어났더라면 일평생 정승은커녕 제대로 된 벼슬자리 하나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태종은 황희를 두고 ‘한 집안사람처럼 지내는 사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태종 시기까지 황희는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폐세자의 문제가 거론되자, 황희는 세자가 나이가 어리고 사냥을 좋아할 뿐이라며 두둔했다. 태종은 결국 이 일로 황희를 귀양보내었는데, 세자를 편들었기 때문이라기보다 황희가 왕과 세자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어물쩍 넘어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몇 년 후 태종은 죽기 직전 황희를 용서하고 조정에 복귀시켰다. 당시 황희는 이미 환갑의 나이였다. 하지만 다시 시작된 황희의 관직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양녕대군을 변호했다는, 바꿔 말하면 세종의 계승에 반대했다는 사실은 그를 평생 옭아매었고, 부정을 저질렀다는 혐의나 자식들의 문제 역시 뒤를 이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눈물까지 흘리면서 황희에게 죄가 없다고 말했다는 이유를 들어 황희의 복직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 시기 황희가 휘말린 사건 중 대표적인 것은 사위 서달의 사건이었다. 세종 9년, 서달이 신창현을 지나다가, 사소한 일로 표운평이라는 아전을 때려죽인 일이 생겼다. 사건 자체야 서달의 잘못이었지만, 황희는 신창현 일대가 고향인 우의정 맹사성에게 사위 서달을 봐달라며, 원고 측을 설득해줄 것을 부탁했다. 맹사성은 이 부탁을 들어서 피해자의 아내를 구슬렸고, 그 외의 여러 관리들의 합작으로 서달이 아닌 다른 사람이 범인인 사건으로 조작되었다. 그런데 정작 사건의 조서를 받은 세종이 어색함을 알아차리고 재조사를 명한 끝에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이 일로 황희와 맹사성은 사이좋게 파직을 당했다. 하지만 고작 열흘 만에 세종은 두 정승을 모두 복직시키는 솜방망이 처벌로 다른 관리들의 불만을 샀다.
그 외에도 황희가 저지른 잘못은 적지 않았다. 교하 일대의 토지를 차지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거나 아들들이 궁궐의 금붙이를 훔쳐 기생에게 선물했던 일로 망신살이 뻗치기도 했다. 언제나 청렴하고 가난하고 너그럽게 살았다던 황희의 이미지가 완전히 깨지는 일화들이다. 어쨌든 황희는 상상했던 것만큼 완벽한 인물은 아니었다. 세종은 어째서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황희를 정승으로 중용했을까?
세종 13년 9월 8일, 세종은 도승지 안숭선과 함께 대화를 나누던 중, 황희와 그 외 재상들의 이야기가 화제로 떠올랐다. 도승지는 요즘의 청와대 비서실장과 같은 관직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안숭선은 일 만들기 좋아한다는 점에서 어딘지 세종을 닮은 인물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4년 가까이 도승지로 지냈고, 때로 세종은 그에게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이 날의 대화에서 안숭선은 황희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평했고, 세종도 여기에 동의했다.
“정사를 의논하는 데 있어 깊이 계교하고 멀리 생각하는 데 황희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세종 시대의 정치는 왕이나 누군가가 절대적인 권위를 발휘하지 않았다. 정권이 약했다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왕과 신하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제시했고, 오랜 논의를 거쳐 그중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골라 결정하는 시스템이었다. 세종이 극단적인 고집을 부리는 경우는 양녕대군이나 불교의 일 정도였고, 나머지는 신하들의 의견을 널리 수용했다. 말하자면 토론식 정치였던 셈인데, 그 단점은 토론의 와중 논의가 엉뚱하게 흘러버릴 위험성이 있는 것이었다. 이때 필요한 것이 토론의 전체를 파악하고 곁가지를 쳐내어 배의 방향을 정하는 추인데, 황희의 재능이야말로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고, 부인의 말도 옳다고 말했다던 황희의 설화는 언제나 난립하는 의견들을 조정했던 그의 일면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황희가 끝없이 무르고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실록에는 그 면면이 자세히 드러나지 않지만, 황희의 묘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평상시에는 너그러웠지만, 큰일을 할 때에는 시시비비를 가려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중 김종서에 대한 처우가 매우 유명한데, 황희는 젊은 시절의 김종서를 대놓고 달달 볶아대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의정이 대놓고 괴롭히는데, 감히 이것을 부당하다고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은 같은 정승이자 언제나 착하기로 유명했던 맹사성이었다.
“김종서는 당대에 크게 될 재목인데 대감은 왜 그리도 구박하십니까?”
맹사성의 점잖은 책망에도 황희는 곤란해하거나 머쓱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유롭게 대답했다.
“내가 종서를 아껴서 사람으로 만들려는 겁니다. 종서의 성격이 고항(高亢)하고 기운이 날래어 일을 과감하게 하니 뒷날 우리의 자리에 있게 되어 모든 일을 신중히 하지 않는다면 일을 허물어뜨릴 염려가 있습니다. 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경계하여 그로 하여금 뜻을 가다듬고 무게 있어 하여, 혹시 일을 당해도 가벼이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지 결코 그에게 곤란을 주려 함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식소록』과 『연려실기술』에 기재되어 있다. 훗날 6진 개척, 고려사 편찬 등 굵직한 성과를 일궈냈던 김종서는 젊은 시절에는 꽤 고집도 있었고 굽힐 줄도 모르는 성품이었다. 사람의 절개가 곧은 것은 장점이지만, 유연하지 않다는 점은 단점이 될 수 있다. 결국 김종서가 잘난 것을 알지만, 제 잘난 맛에 빠졌다가 망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 사소한 실수에도 호되게 야단을 쳤다는 말이다.
이렇게까지 상반된 이야기를 접한다면, 과연 진짜 황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혼란이 일기도 한다. 사실 완벽한 재상이란 없다. 전대의 재상인 하륜, 박순의 경우 세종이 결점을 직접 거론할 정도였다. 게다가 황희 이전에 영의정이었던 유정현은 영의정이면서도 고리대금업으로 백성들을 쥐어짜서 “굶어죽어도 영의정의 곡식은 안 빌리겠다.” 고 백성들이 절규할 정도였으며, 그 외에도 이것저것 나쁜 평가를 들을 사람이었다. 그에 비한다면 황희는 몇 가지 문제가 있긴 했지만, 오랫동안 정승으로 있었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깨끗한 편이었다. 그러나 황희가 비난을 들었던 것은 아들이나 사위, 처남 같은 다른 사람들의 문제였지 본인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데 주목할 만하다.
소헌황후가 승하한 뒤 세종이 고집불통이 되어서 여러 가지 독자적인 정책, 특히 불교 정책을 밀어붙이자, 집현전 학사들마저 파업을 벌였다. 가장 아껴서 기른 이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실의에 빠진 세종을 다독여가며 학자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설득해낸 것이 바로 황희였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황희가 명재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완전무결해서가 아니라, 여러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재상으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세종이 선택했다. 세종은 황희의 결점을 덮어주고 그의 장점을 키워냈으며, 또 그만큼 부려먹었다. 18년간의 영의정 생활은 이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기록으로 남았지만, 이는 세종의 시대 또한 하나의 일면을 보여준다. 당시 사회 자체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역동적으로 움직였지만, 왕과 마찬가지로 재상도 변하지 않으면서 빠르게 격동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기준점 노릇을 했던 것이다.
빛이 강할수록 어둠도 짙은 법
사대주의의 병폐 - 열을 잘 한다 해도 하나를 잘 하지 못한다면
세종대왕의 위대함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던 부분을 들자면 역시 중국과의 외교문제였다. 중국과 한국은 먼 옛날부터 사대의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그런데 세종 시대의 명나라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의 이미지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특이한 나라였다. 갓 세워진 명나라는 초대 황제였던 주원장이 빈농 출신이었고, 나라를 세운 구심세력이 백련교(白蓮敎)라는 종교 단체였다. 그런 만큼 명이라는 나라가 세워졌으되 중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갖추지 않았고, 유목민족이었던 원나라의 잔재를 짙게 물려 받았다. 이것은 명나라 내부에서 법석을 부리는 데에서 끝나지 않았고 조선에까지 악영향을 끼쳤으니, 바로 화자(환관), 궁녀의 진상과 순장제도가 그것이다.
세종도 처음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나마 세종 11년 12월 13일, 중국과의 외교는 상당한 진전을 보이게 된다. 여전히 매와 공녀를 바치는 일은 있었지만, 그래도 이전처럼 마냥 일방적으로 쥐어 짜지는 관계에서는 벗어나려 발버둥 친 것이다. 또 하나 사신들의 무리한 요구를 원천적으로 막을 칙서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명의 황제였던 선덕제(宣德帝)는 어보, 즉 옥새가 있는 칙서에서 요구하는 물품만을 주고, 황제의 명이라면서 바라거나 무리한 요구는 모두 거절하라는 답변이 내려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황제의 칙서가 ‘표를 보고 모두 알았다’라는 말로 시작한다는 데 있다. 조선정부는 이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이미 7월에 황희, 맹사성, 허조, 그리고 당대의 명문으로 유명한 변계량 등이 흥덕사에 모여 의논을 거듭하였다. 표에는 우선 조선에 금과 은이 많이 나지 않아 수십 년간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여기에 더해 사신들의 횡포가 심각하다는 사실 역시 포함하였다. 그 전문은 실록 곳곳에 실려 있다. 특히 사신의 문제가 포함된 것은 창성과 윤봉의 일이 계기였다. 그런데 이들은 황제의 칙서가 나온 뒤에도 공공연히 뇌물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의 관리들이 칙서의 내용을 들어 뇌물의 상납을 거부하자, 창성은 연회장에서 국그릇을 내던지며 난동을 부렸고 폭언을 일삼았다.
세종은 다각도로 사신의 횡포를 막고자 애썼다. 하지만 조선의 사신 길들이기는 결국 실패했다. 세종 14년, 세종은 당시 승정원에서 대언을 맡고 있던 김종서를 불러놓고 한탄했다. 차라리 이전 김종서가 건의한 대로 사신이 원하는 뇌물을 주었더라면 이렇게 사태가 심각해지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 않고 버텼다가 오히려 피해가 더 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은 끊임없는 중국 사신의 욕심에 맞춰주고, 뇌물을 바쳤으며, 여기에 항의하는 조선의 관리들을 오히려 처벌했다. 이때의 외교는 굴욕 그 자체였다. 이상은 저 높은 데 있건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못했던 것이다. 조선은 계속해서 중국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만 해도 가장 먼저 들어온 반대의견의 근거는 ‘중국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때로 조선이 지레 겁을 먹고 움츠리기도 했다.
세종 시대의 외교만큼은 정말로 바닥 점수였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세계사의 흐름과 더불어, 조선과 중국의 국력의 문제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세종에서 조금 앞선 태종 5년, 명나라의 영락제는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베트남 정벌을 강행했다. 징벌 결과는 실패라고 하기에도 성공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으로, 명나라의 대군은 베트남을 정벌하고 왕조를 멸망시켰으며,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중국의 일부로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다. 여하튼 영락제의 무시무시한 정벌이 조선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을 위축시킨 것도 나름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
태종 시대, 그리고 세종 시대 때 조선이 유난히 중국에게 저자세였던 것은 당시 최전성기를 맞아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던 명나라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이 좋지 않다는 판단 때문인 것 같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자칫 상황이 틀어져서 전 국토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뜨리는 것보다는 치욕을 감내하는 길을 선택했던 게 아닐까.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