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한국사

   
김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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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북스
   
14000
2007�� 12��



■ 책 소개
이 책은 우리 역사를 바꾼중요한 순간을 14명의 영웅들 간의 라이벌 대결을 중심으로 살펴본 책이다. 오천년 역사에 존재하는 수많은 라이벌 대결 중에서, 역사의 중요한순간을 만든 인물들의 대결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흥미진진한 영웅들의 삶과 숙명적인 대결을 통해 오늘날에도 유효한 지혜를 제시하고, 그들에대한 오해나 간과된 역사적 사실을 추적한다.

 


라이벌 관계의 성격에 따라 네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며 역사 속 그들에 대한 오해나간과된 역사적 사실은 없는지 추적한다. 1부는 김춘추 vs. 연개소문과 같은 갈등 관계를, 2부는 견훤 vs. 왕건, 대원군 vs. 명성황후와같이 왕조나 국명이 바뀌는 시대적 변환기에 맞선 인물들을, 3부 이황 vs. 이이와 같은 동반자 관계를, 마지막 4부는 성삼문 vs. 신숙주,이순신 vs. 원균과 같은 영웅 중심의 역사 서술과 오해 속에 잘못 알려진 사실과 인물들을 재조명한다. 


이 책은 대결 속에서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지, 승자의 선택은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역사속에서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등 역사 속 인물들의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영웅 대 악인, 승자 대패자로 대표되는 우리의 이분법적인 역사 읽기를 반성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역사와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라이벌 관계의 핵심인 ‘경쟁과 대결 구도’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고, 그들의 각기다른 선택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알아본다. 나아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오늘날에 적용하여 갈등과 경쟁의 해법으로 활용할수 있는지를 모색하고 있다.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부터 영웅과 시대에 대한 관점과 해석까지 제공하는 책이다.


■ 저자 김갑동
공주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졸업한 후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원광대학교 국사교육과를 거쳐, 현재 대전대학교 인문학부 역사문화학과의 교수와대전대학교 박물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중국산책』『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우리 역사 속 왜』『주제별로 본 한국역사』등이 있다.


■ 차례
서문 - 인물을 알면 역사가 보인다 
과거를 넘어 미래로 - 역사의한계성 
역사 읽기와 ‘인지상정’ - 인물사 탐구의 장단점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라이벌들 
1장 미완에그친 시대적 요구 - 삼국 통일인가 반도 통일인가 : 남북국의 성립과 김춘추 vs. 연개소문 
2장 애정과 존경이 빠진 사제지간 : 조선후기의 붕당정치와 송시열 vs. 윤증 
3장 무엇이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는가 : 일제의 침략과 이완용 vs. 민영환 
4장 신념가와야심가, 조국의 운명은 : 남북분단과 김구 vs 이승만 


한 시대가 저무는 자리, 승자는 누구인가
5장 혼란을 잠재우고 새 시대를 열다 : 고려의 건국과 견훤 vs. 왕건 
6장 지킬 것인가 바꿀 것인가 : 고려의멸망과 최영 vs. 이성계 
7장 집안싸움에 고래 등 터지다? : 구한말의 쇄국 • 개화 정책과 대원군 vs. 명성황후


같은 신념 같은 길, 역사 속 동반자들
8장 궁극적으로는 하나인 길을 걷다 : 한국 불교사의 전개와 원효 vs. 의상 
9장 사상가와 실천가, 진정한동학同學의 모범을 보이다 : 한국 유학사의 전개와 이황 vs. 이이 
10장 빼앗긴 땅, 정신만은 지키리라 : 일제 강점기의 식민사학과신채호 vs. 백남운 


딜레마에 빠진 라이벌들, 역사에 질문을 던지다
11장 큰 적을 잊고 눈앞의 복수전에 급급하니 : 삼국시대와 성왕 vs. 진흥왕 
12장 반란의 또 다른 이름‘개혁’ : 고려 중기의 모순과 묘청 vs. 김부식 
13장 충신도 변절자도 아니라면 : 조선 초기의 유교정치와 성삼문 vs. 신숙주
14장 위인은 ‘인간’이 아닌 ‘신’이 되어야 하는가 : 임진왜란과 이순신 vs. 원균 


시대별 왕계표 & 




라이벌 한국사


애정과 존경이 빠진 사제지간 : 조선 후기의 붕당정치와 송시열 vs. 윤증
인조반정 이후 정계는 서인 세력이 주도했다. 그러나 숙종 초기에 서인 내에서 노론과 소론의 분열이 생겨 이후 약 100여 년 동안이나 양측은 여러 면에서 대립과 갈등을 표출했다. 그런데 이러한 노론과 소론의 분열은 송시열(1607~1689)과 윤증(1629~1714)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회니시비에서 노소당론으로
이 양자 사이에는 당시의 정치적?사회적?학문적 시각의 차이가 내재되어 있었는데, 이를 흔히 "회니시비(懷尼是非)"라 한다. 이 용어는 송시열이 현재의 대전 시내 동쪽에 있는 회덕현(懷德縣)에 살았고 윤증이 현재의 논산군 노성면에 해당하는 니성현(尼城縣)에 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회니시비의 시원은 효종 4년 황산서원에서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송시열이 윤휴의 학문적 태도를 두고 의견 대립을 보인 데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현종 즉위년에 벌어진 예송논쟁으로 확대되었다. 먼저 윤선거는 학문과 사상에서 비판의 자유를 주장하여 윤휴를 두둔했으며 예송논쟁에서도 윤선거 부자는 송시열에게 동조하지 않고 윤휴를 될 수 있는 대로 옹호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윤선거의 강도(江都) 수난과 탈출 사건을 들고 나와 윤선거와 윤증을 공격했다. 이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로 피신해 있던 윤선거가 성이 함락 당하자 평민으로 가장해 탈출한 사건을 말한다. 송시열의 주장에 따르면 첫째, 윤선거는 강화도에 있을 때 본래는 친구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해 성을 끝까지 사수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친구인 권순장, 김익겸, 이돈오 등은 성이 함락되던 날 약속대로 죽었고 그 때문에 그의 처도 죽었는데 윤선거 홀로 생존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적의 대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어 구차하게 살아남았다는 것이고, 셋째 봉림대군의 사신 일행에 붙어 이름을 개명하고 노비로 위장해 몸만 빠져 나왔으니 그 구차하고 낭패하나 모양이 누구보다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선거와 윤증의 주장은 달랐다. 당시 남문을 지키던 권순장과 김익겸은 정승이었던 김상용이 분신자살하자 적과의 교전도 없었는데 따라 죽은 것이고 자신이 집을 떠난 후 처가 죽은 것도 적에게 욕을 당하느니 자결하겠다고 결심하고 스스로 행한 일이라 했다. 또 윤선거가 미복으로 강도를 탈출한 것은 성중이 이미 적과의 교전을 면했으므로 남한산성에 포위된 아버지 윤황을 만나러 가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양측의 주장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윤선거가 강도에서 당한 수난과 탈출 과정은 사실이었다. 이 때문에 윤선거는 등과(登科)도 단념하고 재취도 하지 않았으며 재야에서 남은 평생을 학문에 전념하면서 자숙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강도에서의 일을 철천지한으로 여겼다.


회니시비가 절정에 이른 것은 송시열의 윤선거 비문 찬술과 윤증의 배사론(倍師論) 명분이었다. 송시열은 윤선거 생전에는 그와 회니시비를 벌였으나 절교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윤선거가 현종 10년(1669)에 죽자 제문을 보내 조문했다. 윤증도 박세채가 작성한 행장과 자신이 만든 연보를 가지고 송시열에게 가서 아버지 윤선거의 묘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평소 윤선거 부자를 탐탁지 않게 여긴 송시열은 성실하지 못한 비명을 지어 보냈다. 즉 윤선거의 덕을 기리는 구절에서 "망연하여 할 말을 알 수 없다" 했고, 비문 끝에는 "나는 다만 기술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我述不作)"라고 쓴 것이다. 이에 윤증은 4, 5년 간 장문을 보내거나 직접 찾아가 개찬을 청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요지는 한 군데도 고치지 않고 글자 몇 개만 고쳐주었을 뿐이다.


송시열이 이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윤선거가 죽자 그래도 옛날의 정리를 생각하여 그를 칭송하는 제문을 보냈건만 자신이 평소 가장 미워하던 윤휴의 제문을 윤증이 거절하지 않고 받은 데서 기분이 상한 것이다. 둘째 이유는 윤증이 비명을 요청할 때 가지고 간 『기유의서(己酉疑書)』 때문이었다. 『기유의서』는 윤선거가 죽기 4년 전에 쓴 것으로 그 내용은 윤휴허목 등이 혹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같은 사류이므로 이들을 너무 배척하지 말고 차차 등용하여 쓰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송시열에게 충고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보내지 않았으나 윤증이 비명을 작성할 때 참고하라고 송시열에게 숨김없이 내놓았고, 이것이 송시열의 비위를 더욱 건드리고 말았다.


송시열과 윤증의 사제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배사론의 시비가 된 것은 바로 『신유의서(辛酉疑書)』였다. 이것은 숙종 13년(1687) 경신환국 다음해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쓴 것이다. 내용은 첫째 송시열의 학문은 근본이 주자학이라 하나 그 기질이 편벽되어 주자가 말하는 실학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고, 둘째 그가 내세우는 존명벌청(尊明伐淸)의 의리는 그 방법을 말로만 내세우고 실익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증은 이 의서를 박세채에게 먼저 보였는데 박세채가 이를 보내지 말 것을 권고했고 윤증은 그에 따랐다. 그런데 박세채의 사위이자 송시열의 손자인 송순석이 이 글을 몰래 가져다가 송시열에게 보여주었다. 송시열은 크게 노했으며, 이때부터 양인은 절의(絶義)한 것 같다. 다시 노소 분당이 분명해진 것이다.


윤증의 배사론은 또한 『가례원류(家禮源流)』라는 책의 찬자 시비와 그 간행 문제에서도 발생했다. 이 책은 윤증의 스승인 유계가 김장생에게서 배운 예학을 발전시켜 지은 것으로 윤선거의 도움도 받았다. 그러나 유계 생전에는 이를 완성치 못하고 초고본만 남긴 채 제자인 윤증에게 교정과 간행을 부탁했다. 그런데 윤증은 이 책이 윤선거와의 공동 저작이며 김장생의 『가례집람(家禮輯覽)』과 큰 차이가 없다 하여 간행하지 않았다. 결국 책은 윤증 사후에 간행되었지만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는 윤증이 스승의 유언을 저버리고 윤선거와의 공편이라는 간사한 말을 했다고 공격한 것이다.


회니시비의 논점과 명분론을 더욱 격화해 노소당론으로 끌고 간 것은 송시열이 제기한 삼전도(三田渡) 비문(병자호란에서 청나라가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비)의 시비와 효종의 세실(世室) 건립 문제 및 태조 존호가상(尊號加上) 문제였다. 첫째, 삼전도 비문은 송시열을 조정에 천거해 출세케 한 이경석이 지은 것인데, 송시열은 숭명의리(崇明義理)에 입각해 이경석을 비판했다. 이에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들은 어차피 군신이 청에 항복한 이상 그 비문은 누구든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로 송시열을 공격했다.


둘째, 태조의 존호가상 문제는 송시열이 태조의 개국 300년을 즈음하여 위화도 회군의 의의를 찬양하면서 의를 밝히고 윤리를 바르게 했다는 뜻의 "소의정륜(昭義正倫)"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자고 주장한 데서 비롯되었다. 윤증과 가까운 당인들은 이에 반대하면서 위화도 회군은 태도가 "화가위국(化家爲國 : 집안이 변해 나라가 된다)"하기 위해 단행한 것이지 숭명의리 때문에 단행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셋째, 효종의 세실 건립 문제는 효종이 북벌의 대의를 세웠다 하여 그를 종묘에 불천주로 모시자는 주장이었다. 원래 불천주는 공덕이 특출한 사람을 4대가 지난 후에 논의하여 정하는 것이지만 2대가 지나지 않은 숙종 대에 효종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효종을 들고 나온 것이므로 감히 반대하는 이가 없었으나 윤증 일파였던 박세채는 곤란하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합의를 보아 이를 실천에 옮겼고 소론은 이를 불만스럽게 여겼다.


잘못된 관계가 남긴 것
이렇듯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론과 윤증을 영수로 한 소론은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며 대립했다. 송시열은 학문적으로는 주자 절대주의자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숭명반청 의리를 고집했다. 반면 윤증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현실에 입각한 정치를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 차이가 결국 스승과 제자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의견 차이는 현실적인 정책 대립은 아니었고 명분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일반 백성의 생활과 직결된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영?정조 시대에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 학자들은 백성들 속에서 생활하면서 그들의 생활 개선과 현실적인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학문을 부르짖었으니 이것이 바로 실학이었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가 이렇게까지 악화된 것은 윤증보다도 송시열 쪽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송시열은 윤선거의 강화도 사건을 비판했는데, 그런 논리로 따진다면 숭명반청을 내세운 송시열이야말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하던 날 죽었어야 했다. 자신은 살았으면서 강화도에서 죽지 않은 윤선거를 비난하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다.


스승을 배반했다는 배사론만 해도 그렇다. 아무리 스승이라지만 자신의 생활철학이나 학문을 제자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자신과 다른 견해나 생활철학을 용납하지 못했다는 것은 지나친 아집과 관용의 결핍을 보여줄 뿐 큰 스승의 태도가 아니다. 제자도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때 조심스러워야 함은 물론이지만 말이다. 또한 자신의 스승은 아니었지만 송시열이 그를 천거해준 이경석을 비난한 것도 확대 해석하면 배사론의 논리로 비판할 수 있다.


윤선거의 묘비명 찬술 부분은 어떤가. 윤증 부자가 진정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묘비명 찬술을 거절했어야 한다. 그러나 찬술을 해놓고 그를 은근히 비난한 것은 옳은 학자의 태도가 아니다. 아울러 그의 숭명반청 의리도 명이 이미 멸망한 입장에서 지나치게 과거에 집착한 논리 아닌가. 지식이라면 과거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모순을 타파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 하리라.


요컨대 송시열은 조선의 대학자였으며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일관되게 주장한 절의파였다. 예를 들어 『주자가례』에 입각한 행동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숭명반청 의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아집과 학문적 편견이라는 단점을 보여주었다. 윤증의 경우도 평생 세속에 아랑곳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한 학자였지만 스승을 대하는 태도가 좀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웠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양자는 대학자였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바람직하지 못한 사제지간의 상을 남겨주었다는 측면에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더욱이 그들 사이에 오고간 논쟁이 백성들의 고통이나 이해와는 관련이 없는 명분 싸움이었으니 말이다.



위인은 "인간"이 아닌 "신"이 되어야 하는가 : 임진왜란과 이순신 vs. 원균
임란 초를 제외하고 왜군이 고전을 면치 못한 데는 조선 수준의 활약으로 인한 왜적의 진격로?수송로 차단이 큰 역할을 했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을 중심으로 한 함대의 우수성, 대형 화기 사용에 의한 함포의 우위 등에 힘입어 이러한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위와 같은 조건을 잘 이용한 이순신(1545~1598)의 탁월한 전략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이순신은 우리에게 영웅으로서 추앙되는데, 그에 반해 그를 모함했다는 원균(1540~1597)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진다.


그는 "위대한 동양의 해군 사령관"이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작전에 차질을 빚은 왜군은 명나라가 원군을 조선에 파견하자 더욱 곤경에 처했다.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왜군은 물러갔다. 그런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었고 왜군은 재차 침입했으니 이가 곧 정유재란이다. 이에 이순신은 적을 격멸할 기회가 왔음을 직감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원균의 모함과 적장 요시라의 간계에 휘말려 그는 옥에 갇히게 된다. 고니시의 부하로 이중간첩이나 요시라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가토가 어느 날 어느 시에 바다를 건너올 것이므로 수군을 시켜 잡으라는 정보를 주었다. 조정에서는 이 정보를 믿고 이순신에게 이를 잡으라 했다. 이순신은 이것이 적의 간계인 줄 알고 망설이다 출정했으나 가토는 이미 서생포에 들어온 뒤였다. 그러자 원균은 장계를 올려 이순신이 국명을 어겼다고 모함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체포해 극형에 처하려 했다. 이 일로 이순신은 죽음 직전에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 들어가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한다. 이때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한편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은 칠천량해전에서 적의 유인전술에 휘말려 대부분의 선박을 잃고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 비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대책이 논의되었으나 아무도 선뜻 안을 내놓지 못했다. 병조판서 이항복이 이순신을 통제사에 임명하는 길밖에 없음을 말했을 뿐이다. 이에 다른 방도가 없던 선조는 그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다.


재임명된 그가 군사를 수습해보니 남은 병사는 120여 명이요, 병선은 고작 13척에 불과했다. 그러나 호남의 지리적 여건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울돌목(명량)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왜적을 대파했다. 133척의 적군과 대결해 31척을 부수는 대전과를 올린 것이다. 그는 수군의 본영을 고금도로 옮기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시키는 등 다음 전투에 대비했다. 이렇게 하여 군세를 회복한 그는 마침내 퇴각하려고 모여 있던 적선 500척을 공격했다. 이것이 1598년 11월의 노량해전으로 왜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배를 잃었다. 그러나 선두에서 수건을 지휘하던 이순신은 적의 유탄을 맞아 54세의 나이로 장렬히 전사한다. 그는 죽으면서도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까 염려해 자신이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고 당부했다 한다.


이순신은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명나라의 수군 제독이던 진린은 이순신이 천지를 다스릴 만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고 하늘의 해만큼이나 큰 공이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영국 해전사 연구가로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 a. Ballard)는 객관적인 면에서 다음과 같이 그를 높이 평가했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할 줄 알고 해군 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 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 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든 그가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그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서는 넬슨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 (…) 영국인에게 넬슨과 어깨를 견줄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한 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 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 사령관임이 틀림없다.


조선의 명장 원균, 그의 가려진 공로
이러한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한 점 등으로 우리에게 흔히 간사한 악인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는 이순신이라는 영웅을 중심에 둔 시각에서 나온 원균에 대한 과소평가 내지 오해라는 주장에 있는데, 지금부터 그에 대해 살펴보겠다.


원균은 중종 35년(1540) 고려 태조 때 삼한공신이던 원극유의 후손으로 원주 원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성년이 되어 그는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로 봉직하다가 여진족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때문에 그는 부령부사로 특진되었고 후에 종성으로 옮겨 병사 이일의 휘하에서 시전부락을 격파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 뒤 1592년 경상우수사가 되어 임진왜란을 맞는다.


임란 초 왜적의 기습 작전으로 조선군은 미처 대항도 못하고 흩어졌다. 경상좌수영의 군들도 수사 박홍 이하 전 장병이 도주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주했다. 이 같은 상황은 원균의 경상우수영도 마찬가지여서 그의 휘하에는 몇 안 되는 장병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원균은 조정에 장계를 올리는 한편 이순신에게도 공문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가 불리하여 경상우수영이 함락되었다.


얼마 뒤 조정의 지시와 원균의 요청으로 전라좌우도의 수군이 출동하여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그리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합동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러한 합동 작전 속에서 원균은 제몫을 충실히 해냈다. 예컨대 옥포해전을 기술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순신이 드디어 원병을 내어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을 만났는데 원균이 이운용과 우치적으로 선봉을 잡았다. 옥포에 이르러 적선 30척이 있는지라 진격하여 크게 무찌르니 남은 적이 뭍으로 올라 달아났다고 되어 있다. 즉 옥포해전에서의 승리는 원균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랬기에 선조가 평양의 행재소에서 남방에 파견한 선전관 민종신에게 전황을 묻자 민종신은 원균이 적선 30여 척을 공파하였다 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적어도 옥포해전은 원균이 주장이고 이순신이 객장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임란 가운데 3대첩의 하나인 한산도해전에서도 원균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이형석의 『임진전란사』를 보면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거느리는 함선들은 경상우수사 원균의 배 7척과 힘을 합하여 좌우 양 옆에서 더욱 포위를 압축하여 대함 20척과 중함 17척, 소함 5척 등을 격파하고 불질렀다라고 나온다.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여 적의 교두보를 직접 공격한 것으로 평가되는 부산포해전에 대해서도 선조는 원균 이억기는 이순신과 더불어 같이 공을 세운 사람이라 하여 3인의 공을 다 같이 높이 평가했다.


1593년으로 접어들면서 조선의 연합 수군은 웅천을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왜군은 직접적인 교전을 피해 육지에 웅거함으로써 전황은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그런데 이때 수군 승리의 포상 과정에서 원균과 이순신의 공로 다툼이 심해 불화가 발생했다. 이런 불화는 1593년 8월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자 더욱 깊어져 원균은 1594년 12월 충청병사로 전임되었으며 얼마 뒤 전라병사가 되었다.

1596년 정유년에 왜군이 재차 침략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수사로 재기용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던 중 이순신이 서울로 잡혀오자 1597년 1월 원균은 경상우도수사 겸 경상도통제사가 되어 삼도의 수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때 원균은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공격함으로써 안골포의 적을 쳐서 부산에 이르는 길을 트고 이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정 일각에서는 수군이 먼저 움직여 적을 바다에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수군 선공의 주장이 채택되어 원균은 도원수 권율의 강제적인 명령으로 칠천량에서 왜적과 싸우게 되었다. 이때 왜군은 조선 점령을 위해서는 수군을 격파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이전보다 훨씬 증강된 600여 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이었다. 반면 우리 수군의 배는 134척뿐이었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진격만을 강요했고, 결국 원균은 대패하여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전사했다. 그는 사후 1604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1등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원릉군에 추봉되었다.


무엇이 그들을 영웅과 악인으로 만들었는가
이상에서 보았듯 원균이 결코 간신이나 악인이 아니었으며, 이순신에게도 결점이 있었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우선 원균이 임란 초기에 싸우지도 않고 도망갔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원균은 당시 적의 기습을 받아 장수들이 도피하고 병사들이 모두 도망함으로써 무군지장(無軍之將)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는 도망한 것이 아니라 기습을 당한 즉시 우군에 속보를 발하는 동시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청하고, 한편으로는 흩어진 군사를 다시 수습하여 전열을 정비했다는 것이다. 또한 원균은 옥포해전을 비롯한 곳곳의 싸움에서 반드시 선두에 서서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라 하고 있다.


둘째,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내용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원균에 의한 일방적인 모함이라 볼 수 없으며 같은 무장, 같은 수사끼리 있을 수 있는 쟁공(爭功)이라는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에도 그 같은 상황을 전하고 있다. 즉 처음에 원균이 이순신의 원병을 청하여 적을 격파했을 때 연명(聯名)으로 상주할 것을 바라니 이순신이 "천천히 하자" 해놓고 밤이 되어 원균이 군사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으며 적을 격파하는 데도 공이 없었음을 자세히 갖추어 보고하니 원균이 듣고 크게 감정을 가졌다. 이로부터 이들은 각각 따로 보고를 올렸고 양인의 간격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라고 나온다.


또한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이순신은 잡혀가 사형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정탁의 변호로 사형을 면하고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라는 통설은 근거 없는 와전으로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압송하여 조산한 뒤 그를 돌려보내 군공을 세워 죄를 갚게 했다. 그리고 이순신 대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것이 아니라 경상우도수 군절도사 겸 경상도통제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칠천량해전의 패전도 다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균은 자기의 작전 계획과 건의가 묵살당하고 당시의 도원수 권율의 장벌(杖罰)까지 받는 반강제적인 상황에서 안골포의 적을 그대로 둔 채 오합지졸을 거느리고 진격을 감행했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왜군에게 격파되어 전사했다는 것이다.


결국 인조반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서인 세력이 자신들의 정적들이 높이 평가하던 원균을 깎아내리고 이순신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선조실록』을 수정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것은 『선조수정실록』이 이순신과 같은 덕수 이씨인 이식이 중심이 되어 편찬된 데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게다가 이순신도 인간이었으니 자신의 공을 내세운 면이 있었을 것이고 단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순신이 원균을 모함하여 "원균이 조정을 속인다. 12세밖에 안 된 아들이 군공이 있다고 보고한다"라 하니 원균이 "내 아들의 나이 이미 18세에 궁마의 재주가 있다" 하면서 추궁해 이순신이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라는 『선조실록』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대립은 보통의 인간관계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원균은 이순신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였으며, 무과에도 먼저 합격했다. 그런데도 이순신보다 늦게 경상우수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의 지휘를 받아야 하지 않았던가.


원균이 후일 그렇게 역적으로 평가절하된 것은 이순신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후손이 절손되다시피 한 점, 그리고 그에 관한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점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반면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남겨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수 있었으며, 죽마고우 유성룡의 『징비록』도 이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대립적인 평가는 지난날 박정희 정권에 의해 지나치게 이순신이 성웅(聖雄)시된 데 대한 반작용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요컨대 임진왜란의 진행 과정에서 이순신의 활약이 뛰어났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훌륭한 인품과 탁월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음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그가 성인(聖人)이나 신인(神人)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인간적인 면이나 단점이 있었다. 원균에 대해서도 칠천량해전에서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는 있지만 그를 역적이나 졸장부로 치부하는 것은 곤란하다. 선인과 악인, 영웅과 졸장부 등의 이분법을 벗어날 때 우리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