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황하와 장성의 중국사

   
니시노 히로요시(역자: 김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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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북서
   
13000
2007�� 11��



■ 책 소개
북방 이민족은 압도적인 기마술로 중원을유린했으며, 그 침공 시기는 황하가 얼어붙는 계절에 집중되었다. 황하와 장성은 이민족의 말이 넘어야 할 장벽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 책은시대별 자료를 바탕으로 말, 황하, 장성이라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통해 중국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돕는다.

 


이 책의 1장에서는 중국사에서 말이 차지하는 의미와 그 특징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다. 말의기동력을 앞세워 민첩하게 유격전, 기동전을 전개하는 유목민족의 침입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중국 역사의 축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습격 과정에서 큰 의미와 역할을 한 것이 황하이다. 황하는 중국인들에게 때로는은혜를 베풀고 때로는 재앙을 가져오기도 했다. 또한 황하의 결빙 시기는 이민족의 침입과 습격이 용이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내용을 다룬 것이제2장이다.


제3장에서는 습격을 막는 구조물인 만리장성에 대해 설명한다. 국내의 전쟁에서 승리하여권력을 잡은 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더불어 외부의 습격을 막아 국가와 백성을 지켜내야만 했다. 이 책에서는 여러 시대별 자료를 바탕으로장성이 당시 중국 왕조에게 얼마나 큰 버팀목이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만리장성을 마치 왕조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시위성 장벽쯤으로생각하는 장성의 무용론에 쐐기를 박는다.


■ 저자 니시노 히로요시
도쿄도립대학 중국문학과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게이오대학 교수를 거쳐 2006년까지 토호쿠공익문과대학 교수를 지냈다. 주요 저서와 역서로는『한비자(韓非子)』『사기(史記)』『십팔사략(十八史略)』『중국에서 본 것, 들은 것』『신역 장자(新譯 莊子)』『인물중국5천년』 등이 있다.


■ 역자 김석희
세종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대학원을 거쳐 일본 오사카외국어대학 언어사회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세종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강사로 일하고 있으며, 「한일,연대21」의 실무 및 번역요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위대한 역경 : 현명한 사람은 넘어질 때마다 무언가를 집고서 일어난다』 등이있고 「민족주의의 레트릭과 김사량 평가」 등의 연구 논문을 썼다.


■ 차례
글을 시작하며 


서장 - 말과 장성의 공방사 
장성, 남쪽으로 내려오다| 이민족은 천고마비의 계절에 습격해온다 | 기마민족의 말 길들이는 방법 | 재갈과 등자 | 오랑캐로 오랑캐를 다스리다 | 이민족 왕조도 장성을보수했다 | 전차와 기마, 누가 더 셀까? | 독안에 든 쥐 | 황하, 동결기에 건너다 | 겨울의 홍수, 능신 | 남선북마와 자연 재해 |격동의 혼란기 | 칭기즈 칸의 시대 | 장성의 은혜 


제1장 작은 말 
유럽과는 대조적인 몽골의 말 | 풀과물을 찾아서 | 파미르 고원 | 한혈마와 스키타이 | 스텝과 사막 | 국력을 소진한 대완국 원정 | 치중에 의존한 군대의 말로 | 칭기즈 칸을천재로 만든 것 | 나폴레옹의 패배 | 작은 말의 이점 | 무릉에서 발굴된 청동 마상 | 몽골 인과 말 | 말의 크기 | 말의 분류법과서러브레드 | 등자의 개발과 보급 | 기사도와 중장기병 | 마상경기와 전쟁 연습 | 유럽도 일본도, 정복할 수 없었다 | 기마민족의 기본 전법| 칼가 강 전투 | 무조건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 공략은 철두철미하게 | 기마군단은 최소설이 합리적이다 | 교만한 흉노,한나라의 굴욕 | 한혈마 이야기 | 한혈마의 노래 | 한혈마의 실상 | 역사서 속의 한혈마 | 죽어서도 외톨이가 된 한 무제


제2장 얼어붙은 황하를 말이 건너다 
대원정의 빌미 |말을 쉬게 하는 것이 승리의 관건 | 녹인 은을 부어 처형하다 | 사마르칸트 함락되다 | 충직한 두 장수 | 치밀한 물공격 | 황하에서 강을알다 | 종이 한 장의 차이가 승패를 가르다 | 오고타이의 죽음이 유럽을 구원하다 | 황하의 개략과 동결 부분 | 하루의 오차가 생사를 가르다| 세심한 도하 작전 | 능신, 맹위를 떨치다 | 오르도스의 사막화 | 황하의 토사 | 매년 10센티미터 높아진다 | 서문표 이야기 | 토사와홍수 | 황하는 천정천 | 현재의 황하에서는 역사를 알 수 없다 | 황하 유역의 인구 | 오르도스의 나루터 | 단류현상 | 단류현상의 심각한원인 | 풍수기여, 오라 | 고저차 때문에 수운이 발달하지 못해 | 북방인은 수전에 약하다 | 비수 전투 | 수나라의 대운하 | 치수의 방법 |수도 개봉의 설계 | 개봉의 비극


제3장 그래서 장성이 필요했다 
맹강녀의 비극 |사마천도 공사를 비판하다 | 최초의 만리장성 | 시황제를 움직인 이사 | 권력자의 냉엄한 눈 | 선우의 집안싸움 | 모돈전의 의문점 | 진나라는왜 붕괴되었나 | 세 번에 걸친 전기 | 환관 중행설의 분노 | 편지 서식도 흉노가 우위 | 패륜을 저지르는 흉노족 | 말발굽으로 짓밟아 주리라| 명군 문제의 화친 정책 | 평화에서 전쟁으로 | 왕회의 기습작전 | 왕회의 처벌 | 다시 기습작전을 행하다 | 장성의 원점 | 장성을 중시한왕조 | 장성을 경시한 당나라 | 기미 정책 |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 | 안사의 난 | 장성을 가볍게 여긴 대가 | 정복왕조로서의 금과 원 |성조의 현명한 정책 | 영락제, 친정에 나서다 | 토목의 변, 영종이 볼모로 잡히다 | 여자준과 진굉 | 영하진 | 구변진 | 본격적인 장성건설 | 북노남왜 | 명장 척계광 | 명나라 장성의 특징 |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하드리아누스 방벽 | 북쪽 기마군, 쇠퇴일로를 걷다 | 명의장성을 넘다 | 장성, 명나라가 청나라에 건네준 선물





말과 황하와 장성의 중국사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원래 말의 돌파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 땅에 쳐들어오는 북방의 이민족은 반드시 말을 타고 왔기 때문에 말을 멈춰 세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진(秦)나라 시황제 때의 장성은 높이가 겨우 2, 3미터에 불과했지만, 말을 막는 데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현재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은 그 대부분이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명(明)나라 때(1368~1662년)에 이르러, 그것도 16세기가 되어서야 복원된 것이고, 시대가 바뀌면서 공격하는 쪽이나 방어하는 쪽이나 기술이 진보한 결과, 그 높이도 대략 7, 8미터에 달하게 되었다. 명나라 때의 장성은 말이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훌륭한 것으로, 장성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것은 오히려 명대(明代) 이전이었다. 그 당시의 장성은 명대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을 짧게 줄여서 장성이라고들 부른다. 장성은 북방 이민족의 기마부대를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장성만으로 모든 걸 방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성을 지킬 주둔군이 있고 그 주둔군이 장성과 일체가 될 때에만 비로소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따라서 군대가 없을 때의 장성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그것은 장성이 아니라, 단순히 긴 물체에 불과하고 기마부대는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침입할 수 있다. 역사상 장성이 이민족의 침공을 허락한 것은 중국 측이 정치적으로 혼란기이거나 그 밖의 이유로 수비 군사가 적었을 때이다.


최초의 만리장성은 2천 년도 훨씬 전에 만들어졌는데, 그 뒤 많은 왕조가 장성을 보수, 개축, 혹은 증축했다. 명대에 이르러 거의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완성되었는데, 거기에 들인 세월과 노력과 비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작은 말
몽골 말, 또는 몽골 말 계통의 품종은 모두 몸집이 작다. 막북 지방에 사는 이민족은 기원전 흉노 시대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런 작은 말을 길러왔고 이것을 타고 생활을 영위했다. 그 무렵 이미 암말에 수탕나귀를 교미시켜 노새를 낳게 하거나 암컷 노새에 말의 수컷을 교배시켜 변종을 만들어내는 등 가축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배하여 보다 좋은 품종을 만들어내고자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실험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면서도 말을 크게 만들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난 뒤에도 막북 지방의 민족은 말의 대형화를 꾀하지 않았다. 13세기 칭기즈 칸 시대에는 서방 원정을 떠나 정복을 계속해나갔고, 유럽까지 진군하여 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이에 따라 유럽이나 중앙아시아에 흔히 볼 수 있는 몸집도 크고 균형 잡힌 다리를 가진 빠른 말을 쉽게 손에 넣을 기회를 얻었지만, 근본적으로 말을 바꾼다든가 몽골 말의 혈통을 개량한다든가 하는 것은 시도하지 않았다.


왜 막북 지방의 민족은 굳이 작은 말을 고집했을까? 유목민의 입장에서나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몸집이 작은 몽골 말이 우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막북 지역에서는 우선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 작은 말이 생존에 유리하다. 유라시아 대륙의 북부에 펼쳐진 스텝 대초원은 기후나 토질 때문에 수목이나 풀이 크게 자라지 못한다. 풀이나 관목이 자라는 것은 비가 많이 내리는 봄에서 여름 사이다. 이른바 ‘하우형(夏雨形)’ 토지다. 그 외에는 건기라고 하여 건조지대로 바뀌며 풀이 부족해진다. 외몽골의 목초가 가장 풍부할 때는 여름인데, 일년 중 평균 한 달 남짓한 기간이다. 겨울이 가장 길어서 일년 중 절반은 겨울이라 봐도 무방하다.


여름에 풀을 많이 베어 두었다가 겨울에 가축에게 먹이면 될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착민적인 발상이다. 조금씩 풀을 베어 말려두기도 하지만, 이것은 병들거나 어린 가축에게 주기 위한 것이다. 여름에도 외몽골의 하루 평균 기온은 섭씨 10도로 높은 편이 아니라 풀이 별로 자라지 않는다. 연간 평균 기온은 영하 1도이다. 따라서 여름에 초원의 지평선을 바라보면 한 면 가득히 풀이 나 있는 것 같지만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수 없고, 끊임없이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하며 걸어야 한다. 이것이 ‘유목’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외몽골의 유목민에게 있어서 풀과 물을 찾기 위한 싸움과 전쟁은 불가피했다. 싸우는 것이 살아남는 수단이었고, 유목민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전쟁을 위한 훈련을 쌓았으며 수렵으로 단련되었다.


겨울이 오면 몽골 말은 발로 눈을 파고 마른 풀을 뜯어 먹는다. 양이나 염소는 그럴 힘이 없기 때문에 말 뒤를 따라다니면서 남은 풀을 먹는다. 북방의 말은 일년 내내 방목을 하는데 겨울 동안 체중이 20~30퍼센트나 줄어든다. 몽골 말은 밤낮을 바깥에서, 그것도 영하 50도의 혹한도 견뎌내고 살아남는다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몸집이 작은 몽골 말이 환경적으로 추운 지방의 유목생활에 적합했던 것이다.


13세기 칭기즈 칸의 군대는 실제로 중아시아 전역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군대의 일부는 남러시아를 점령하고 유럽 각지를 초토화시켰다. 치중에 완벽하게 의존한 한나라의 대완국 원정과 비교하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몽골군은 가는 곳마다 사냥이나 징발, 약탈을 통해 먹을거리를 조달했다. 하지만 항상 먹을거리를 구했던 것은 아니다.


사막에는 낙타 풀과 억새, 버드나무의 일종인 타마리스크 나무와 키 작은 포플러 나무의 일종인 호양목 등 초목이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몽골 말이라면 소량으로도 견뎌낼 수 있다. 다음 초원에 닿을 때까지, 혹은 징발이나 약탈로 사료를 구할 때까지는 가는 길목에 난 작은 풀이나 관목을 먹게 했다. 하지만 눈앞에 싱싱한 풀이 있다 해도 먹이지 못하는 일이 흔한 것이 전시(戰時)의 행군이다. 단, 말이 지쳤다 싶으면 오랜 시간 휴식을 취하게 했다. 전쟁이 일단락되었을 때는 최대한 오래 쉬게 했다. 그 사이에 말이 필요할 때는 약탈해온 말을 이용했다. 말에 의존하는 원정, 전쟁이고 보니 말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 것이다. 말을 배려하는 방식 또한 유목민답다 할 것이다.


칭기즈 칸이 지휘관으로서의 탁월한 자질과 작전 능력과 조직 활용 능력을 지닌 천재였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칭기즈 칸의 천재성을 완성시켜준 것은 다름 아닌 작은 말이었다. 쿠빌라이 칸, 제베, 수부타이가 대활약을 한 것 역시 작은 말의 공이 컸다.


몽골군이 우수한 전투력을 발휘했던 것은, 유럽의 가장 진화된 말이라고 하는 큰 말에 현혹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고 보기 좋은 말을 징발하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군마로 대체하거나 교배하여 품종을 개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큰 말을 타보고 그 승마감이나 스피드에 감탄했지만, 유목에는 적절하지 않고 따라서 장거리 원정에도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판단을 내린 데는 그들이 선조에게 물려받은 지혜의 힘이 작용했다.


몽골군의 입장에서 볼 때 ‘승리’의 첫 번째 조건은 최악의 상황이 계속되는 장거리 원정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등공신은 바로 작은 말이었다.



얼어붙은 황하를 말이 건너다
오고타이의 죽음이 유럽을 구원하다

1225년, 일단 몽골로 돌아온 칭기즈 칸은 그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제였던 서하 공략을 개시했다. 서하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서 그곳을 멸망시키는 데 2년이 걸렸다. 그러는 사이에 건강을 해친 칭기즈 칸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아마 60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생전에 무너뜨린 나라는 무려 40개국에 달한다.


몽골군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동방의 패권을 손에 쥐게 되자, 1236년에 다시 한 번 유럽 원정길에 올랐다. 총사령관 자리에는 칭기즈 칸의 손자인 바투가 올랐다. 세대교체가 확실하게 마무리 된 것이다.


변함없이 몽골군은 기마병 한 기 한 기가 강하고 전체적인 통제가 잘 이루어졌다. 그 수는 확실치 않지만, 유라시아의 스텝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첫 번째 공략 뒤의 땅을 지키는 의미에서 북러시아부터 공략을 시작했다. 라잔, 모스크바를 시작으로 그 일대의 도시를 연달아 공략하고 키예프도 함락시켰다. 그리고 계속 서진하여 드니에프르 강을 피로 물들이고 남러시아를 정복했다. 그리고 폴란드,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 군대와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다.


몽골군이 더 서진했다면 유럽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1241년 11월, 본국에서 오고타이(태종)가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몽골군은 말머리를 돌려 귀국길에 올랐다.


황하의 개략과 동결 부분
유럽의 하천은 북류하여 발트 해로 흐르든가, 남류하여 아랄 해, 카스피 해, 흑해 등으로 흘러드는데, 몽골군은 강이 얼었을 때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고, 강이 얼지 않았을 때는 양가죽 주머니를 뗏목삼아 신중하게 건넜다.


몽골군을 그렇게 단련시킨 것은 황하였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유럽에는 황하만큼 무서운 강은 없었다. 황하는 흐름이 크고 구불구불하며 전체적으로 봤을 때 동결되는 곳이 정해져 있다. 황하 전체의 흐름을 보면, 그 출발지는 청해성(靑海省)의 바옌카라 산맥의 북쪽 산기슭이다. 바옌카라는 몽골 말로 ‘푸르고 풍요로운 산’이라는 의미이다. 이곳에서부터 청해성, 사천성(四天省), 감숙성(甘肅城), 영하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 내몽골자치구, 산서성(山西城), 하남성(河南城), 산동성(山東城)의 일곱 개 성과 두 개의 자치구를 거쳐 흐르는데, 북류하는 곳은 감숙성의 난주(蘭州) 근처에서 정원(靖遠)까지, 영하회족자치구의 청동협(靑東峽) 앞에서 내몽골자치구의 바얀골까지, 그리고 하류 쪽에 하남성의 개봉(開封)을 지나 하구까지, 이렇게 세 군데가 대표적이다.


황하가 시작되는 지역을 제외하면 황하의 동결 시기는 해마다 다른데, 위에서 언급한 북류 지역은 반드시 동결된다. 특히 영하회족자치구의 은천(銀川) 부근을 지나 오르도스의 북쪽 끝부분에서 내몽골자치구 탁극탁(托克托)의 하구진(河口鎭)까지가 가장 두껍게 언다. 그리고 하남성의 개봉부터는 하류 부분이다. 북쪽에서부터 얼고, 녹을 때는 남쪽에서부터 녹는다.


오르도스 끝 부분은 동류하고 해빙기의 풍향, 풍속, 기온에 따라 문개하거나 무개하기 때문에 몹시 복잡하다. 오르도스 끝 부분은 황하 상류 중에서 가장 하류 부분에 해당하는데, 해발은 약 1천 미터이다.


능신(凌迅)은 오르도스 끝 부분에 들어서기 직전에 구불구불한 협곡 부분에서 비교적 많이 일어난다. 물길이 휘어드는 부분에 얼음 덩어리가 걸리기 쉽기 때문이다. 11월 초에는 얼음 덩어리가 흐르고, 12월 중순에는 동결된다. 난주 부근보다 평균 20일 정도는 빨리 동결되고, 해빙 때는 한 달쯤 늦게 녹는다. 그렇다면 황하의 상류, 중류, 하류의 구분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가리키는가? 중국에서는 이것을 지리적 요소나 흐름의 성격에 따라 나누고 있다.


상류는 발원지에서 오르도스의 탁극탁(하구진)까지를 말하고, 그곳에서 하남의 정주(鄭州)와 가까운 도화욕까지를 중류로 본다. 상류는 길이가 3,472킬로미터인데, 상류의 표고차는 3,496미터, 발원지 부근은 동결된다. 전체적으로 흐름이 빠르고 좁지만, 표고가 높기 때문에 동결 시기는 지역마다 다르다. 난주 근처가 동결되고 그 하류는 낙차가 커서 잘 얼지 않는다. 청동협 부근은 동결되는 해가 있는가 하면, 동결되지 않는 해도 있다.


상류의 유역 면적은 약 38만6,000평방킬로미터이고, 하천 전체 유역 면적의 51퍼센트를 점한다. 중류는 길이가 약 1,206킬로미터, 표고차는 890미터이다. 중류 지역은 협곡과 고저차가 있어서 지금은 거의 얼지 않는다. 유역 면적은 약 34만4,000평방킬로미터, 하천 전체 유역 면적의 46퍼센트에 해당한다. 하류는 약 786킬로미터이고 표고차는 고작 94미터이다. 이 작은 표고차 때문에 흐름이 늦어지고 여름 홍수 때나 능신 때 재해가 일어나곤 한다. 유역 면적은 약 2만2,000평방킬로미터이고, 하천 전체 유역 면적의 약 3퍼센트에 불과하다.


따라서 황하 전체의 공식적인 길이는 5,464킬로미터이다. 여름의 홍수나 능신으로 인해 가장 피해가 큰 곳은 하류이다. 2,500년 동안 1,500회 가까이 제방이 무너졌고 물길은 무려 26번이나 바뀌었다. 황하는 마치 거대한 용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런 극심한 재난을 겪는 데는 강우량의 변화에 의한 경우도 있지만, 삼림 파괴나 그 밖의 인위적인 원인도 적지 않다.


북류하는 부분에서 일어나는 능신은 겨울 홍수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봄이다. 3, 4월 해빙기에 온도가 높은 상류 쪽에서 먼저 얼음이 녹아 작은 얼음 덩어리가 흐르기 시작한다. 이 얼음 덩어리가 보태져서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된다. 이른바 ‘얼음 제방’이다. 위쪽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나 얼음 덩어리가 이 얼음 제방에 막히게 되면 수위가 올라간다. 그리고 제방의 높이를 넘어 넘치게 되는 것이다. 이 얼음 제방의 길이는 보통 1킬로미터 정도인데, 6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것도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예방 조치를 취하고 있어 제방이 수면으로부터 50센티미터 정도 된 것이 최고치였다. 물론 이 수치는 현대의 것으로, 근대 이전에는 동결 상황 자체가 전혀 달라서 동결 기간이 길고 지역도 넓었다. 예를 들어 칭기즈 칸의 군대는 지금은 거의 얼지 않는 중류 지역을 동결된 상태에서 건넌 것이다.



그래서 장성이 필요했다
최초의 만리장성

만리장성의 원래 목적은 말을 멈춰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잊으면 희생이 컸다는 사실, 장성이 허무하게 함락되었다는 점만 가지고 장성을 보게 될 염려가 있다. 하지만 장성의 효용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장성 덕택에 황하 유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해서 명나라 때 대규모 공사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이 완성될 때까지, 실로 1,800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 그 사이에 명멸을 거듭한 나라들이 만리장성을 다시 쌓거나 고치거나 했다. 이들 왕조의 황제들은 커다란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도움도 안 되는 장성을 보수하고 증축하는데 국력을 쏟을 만큼 어수룩한 권력자들이었을까?


중국이 진나라에 의해 통일되기 전까지의 전국시대에 각 제후국이 각각 자국 주변에 장성과 같은 성벽을 둘러쳤다. 물론 판축 공법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마치 황하의 홍수를 막을 때 제방을 쌓지 않고 자국의 영토를 둘러치는 성벽을 만든 것과 똑같은 발상이다. 이 성벽은 다른 제후국의 군대, 특히 그 주력을 이루는 전차를 멈추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처음 이 성벽을 만든 것은 기원전 7세기 무렵, 지금의 하남성 근처의 이민족 국가인 초(楚)나라였다고 한다.


북쪽에 위치한 제후국의 성벽은 다른 제후국의 군대뿐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민족의 기마군단은 워낙 전투력이 강해서 그들을 막아내는 데 골머리를 썩였다. 물론 성벽만으로 모든 적을 막을 순 없었겠지만, 그나마 성벽도 없이 싸우는 것과 성벽을 방어막 삼아 싸우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막북의 동북 즉, 지금의 하남성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에 연(燕)나라가 있었다. 연나라의 서쪽, 지금의 하북성, 산서성, 내몽골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조(趙)나라가 있었다. 또 조나라의 서쪽, 오르도스, 지금의 영하회족자치구, 감숙성, 청해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진(秦)나라가 있었다. 이들 북쪽의 변방에 접하는 연, 조, 진의 삼국은 각각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는 성벽도 쌓아두었다. 최초의 만리장성은 이 성벽을 잊고 수리하여 완성한 것이었다.


시황제가 만든 장성은 지금의 감숙성 임조(臨?)에서 요녕성(遼寧省) 요동(遼東)까지 약 1만 리에 달했다고 『사기(史記)』는 전한다. 시황제는 만리장성에 포함된 북쪽 성벽을 제외하고는, 그때까지 쌓은 성벽은 그 땅의 백성을 동원하여 모조리 무너뜨렸다. 중국이 통일된 이상, 그것은 불필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통일을 저해하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부수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비교적 단기간에 이루어졌다.


장성을 중시한 왕조
판축 공법으로 만든 장성은 앞에 도랑까지 있어서 달려온 말이 도움닫기를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충분히 기마민족의 습격을 막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마민족은 말을 타고 쳐들어오기 때문에 말만 넘어오지 못하게 막으면 그만이었다. 이것이 바로 만리장성 축성의 근본 이유다. 그러나 장성은 길다. 또 끝없이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침입하는 쪽은 장성을 공략할 때, 말이 가진 기동력을 활용하여 때와 장소를 선택할 수 있었다.


장성을 둘러싼 공방의 역사를 보면, 흉노를 비롯한 여러 이민족이 중국 땅으로 쳐들어와 약탈과 살육을 되풀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침공할 때는 장성과 이와 관련된 파수대와 봉화대, 병사의 막사 등 그 부속 시설을 망가뜨렸다. 후퇴할 때를 염두에 둔 것이다. 약탈과 살육에 그치지 않고, 5호 16국 시대(304~439년), 5대 10국 시대(907~960년), 금나라(1115~1234년)를 비롯하여 장성을 넘어온 다수의 이민족이 나라를 세운 일도 있다. 특히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1271~1368년)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1644~1912년)는 중원의 주인으로 군림했다.


한나라(기원전 202~기원후 8년)는 문제 때 오르도스 부근의 장성을 수축하고 무제 때 보수했다. 그리고 흉노와의 굴욕적인 관계를 청산하고자 치열한 싸움을 반복했고, 서쪽으로 판도를 넓혀 새로운 장성을 증축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남아 있는 봉화대를 설치하여 방위선을 넓혀나갔다.

북위(北魏, 386~534년)는 일찍이 흉노에 눌려 지내던 선비족(鮮卑族, 몽골계와 투르크계)이 세운 나라이다. 점차 중국화된 북위는 북쪽의 유연(柔然)과 동북쪽의 거란에 대비하여, 동쪽으로는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赤城縣)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오원현(五原縣, 진나라 때의 구원)에 이르는 2천여 리에 걸쳐 장성을 신축했다. 그리고 지금의 산서성 하곡현(河曲縣)에서 북경의 거용관(居庸關)에 이르는 장성을 수축했다. 동서로 3천여 리에 걸친 대역사였다.


북위의 후예인 북제(北薺, 550~577년)도 유연, 거란, 돌궐 등의 이민족에 대비하여, 지금의 산서성 대동(大同)에서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까지 총 2천여 리에 걸쳐 대규모 수축을 두 번이나 단행했다. 그리고 황로령(黃?嶺)에서 사우수(社于戍)에 이르는 400리 사이에 36개의 망루를 만들었다.


수나라(581~618년)도 586년, 607년, 608년 세 번에 걸쳐 대규모 장성 수축을 했다. 한 번에 15만 명에서 20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요나라(916~1125년)는 동호(東胡)계의 거란족이 세운 나라이다. 요나라는 지금의 만주리(滿洲里)의 북쪽에 동서로 가로지르는 장성을 쌓았다. 평균 높이가 1.5미터 정도로 낮기 때문에 역사에서 자주 거론되지는 않지만, 현재의 영토로 말하면, 몽골, 러시아, 중국에 걸친 상당히 긴 장성이었다.


여진족(훗날의 만주족)이 세운 금(金)나라도 몽골의 침공을 막기 위해 대규모의 장성 수축을 단행했는데, 특히 동북부 지역에 1천리, 섬서성에서 흑룡강성(黑龍江省)에 이르는 3천여 리를 증축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장성 최고의 백미는 명나라 때 만들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장성 건설이다. 중국 측과 이민족 간의 공방전도 교묘해졌고, 그에 따라 건축 기술도 진보했다. 도시 인근 지역이 전략적으로 강화되었는데, 특히 북경 부근은 견고하기 이를 데 없다.


장성도 점차 견고해져 갔지만, 그에 비례하여 이민족의 중국에 대한 공격과 지배 방식도 후대로 갈수록 점점 더 노련해졌다. 흉노보다는 선비가, 선비보다는 거란이, 그리고 몽골보다는 만주족이 한 수 높은 지배 방식으로 중국을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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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강력한 기마군단을 이끌던 이민족도 중국 땅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문화적인 생활에 젖어들자 중행설이 예언한 대로 기마의 힘이 쇠퇴했다. 매일 훈련과 실전을 거듭하는 북쪽과 서쪽의 새로운 기마민족의 침공에 대해 기마로 맞설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그들도 기존의 장성을 보수하거나 증축하여 기마의 침공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