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역자: 한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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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엔리브로
   
17500
2007�� 09��



■ 책 소개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현재까지 스테디셀러로자리 잡고 있는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가 "왜 지금 고대 로마인가"라는 화두를 시작으로, 로마의 천 년여 간의 역사를 한 권의 책에담았다. 이탈리아 한켠의 황폐한 언덕에서 출발하여 팍스로마나를 이룩한 로마제국의 흥망성쇠 및 그 역사를 만든 주연들의 이야기를 로마인과 현재의동시대인 사이를 넘나들며 때로는 장엄하게 때로는 냉철한 비평적 서술 방식으로 정리하고 있다. 

 


저자는 천여 년의 찬란한 역사를 통해 보여준 로마인의 관용과 포용 등의 삶의 가치관,개방적인 시스템 구축, 전통과 정체성을 강화하며 이룬 자기 개혁과 같은 삶의 방식을 짧은 호흡으로 장엄하게 또는 간결한 비평으로 서술하여 오늘을사는 우리에게 삶의 좌표를 제시해 주고 있다. 


이 책은 한 권으로 읽는 로마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고대의 로마와 현대를 비교하며논했기 때문에 이 한 권으로 로마를 조망할 수 있어 로마에 대한 이야기가 한 권 속에 다 들어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 저자 시오노 나나미
가쿠슈인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1964년에 이탈리아에 건너가 로마 역사 연구에 천착해 왔다. 1968년부터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르네상스의 여인들』『체사레 보르자혹은 우아한 냉혹』『바다의 도시 이야기』『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신의 대리인』『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그리고 그의 필생의 역작인 『로마인이야기』가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으로 1993년 신조학예상, 1999년 시바 료타로 상을 받았다. 그밖에 에세이로 『침묵하는소수』『살로메 유모 이야기』『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이탈리아에서 보내온 편지』(1 2) 『사랑의 풍경』등이 있다.


■ 역자 한성례
세종대 일문과를 졸업하고 1986년「시와 의식」 신인상을 수상했다. 1984년 허난설헌 문학상을 수상했으며,『안도현 시선집』『최영미 시선집』등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호평을 받았다.2007년 현재 시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실험실의 미인』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세계가 만일100명의 마을이라면』『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은하철도의 밤』『자살보다 섹스』『내 남편 역도산』『먹는 여자』『요약 세계문학전집』 『돌에서헤엄치는 물고기』 『생명의 허들』『8월의 길 위에 버리다』 등이 있다.


■ 차례
시작하며 


1장 왜 지금 "고대 로마"인가 
역사는 인간이다 |왜 르네상스인은 고대 로마에 관심을 가졌을까 |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아는 최고의 힌트 | 다시 로마사의 시대 | 전무후무한 "보편 제국" |실패와 고난의 로마사 | 시행착오가 로마를 만들었다 | 로마의 "커다란 혼미" | 최상의 품격을 지닌 남자들 


2장 로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가 "창조적 천재"인 이유 | 건국 신화 | 강에 흘려보낸 쌍둥이 | 로물루스의 "삼권분립" | 로마는 왜 "빈 땅"이었을까 | 혈기왕성한 젊은이 집단 | "사비니 족 여인들 강탈" | 놀랄 만한 화평 제안 | "제국의 원점"은 여기에 있다 | 로마군은 왜 강했을까 |"직접세"였던 병역의 의무 | 왕들의 프로필 | 오만왕 타르퀴니우스 | 피로 물든 즉위극 | 스캔들은 왜 일어날까 | 왕의 추방 | 소년기의마지막 


3장 공화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보"의혁명 | 왕에서 집정관으로 | 공화정의 열쇠를 쥔 원로원 | 노블레스 오블리주 | 아버지들이여, 신참자들이여 | 젊은이들은 왜 "저항세력"이 되었을까 | 전쟁의 연속 | 왼손잡이 무키우스 | 공화정의 약점 | 평민들의 불만 | 건국 최초의 "스트라이크" | "거부권"이야말로권력 중의 권력이다 | 왜 계급 대립은 해소할 수 없었을까 | 칼을 버리고 괭이를 쥔 독재관 | 로마인들의 "의리와 인정" | 카이사르는 왜"오른팔"을 잃었을까 | 아테네의 개혁, 로마의 개혁 | 카밀루스의 예언 | "숲의 주민들"의 침입 | 로마, 불타다 | 수렁에서 재출발 |재기를 위한 우선순위 |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의 놀라운 내용 | 원로원 개방 | 융화의 신전 


4장 조직의 로마 
이탈리아 반도 통일 | 아테네는 왜망했을까 | 로마인이 얻은 "역사의 교훈" | 조직의 로마 | 왜 로마인에게 "신상필벌"은 필요하지 않았을까 | 두 가지 네트워크 | 라틴동맹은 왜 실패했을까 | 보수도 철저하면 혁신에 이른다 | 로마 연합이란 | 이전의 적에게도 시민권을 준 "로마의 지혜" | 콜로니아 없이는동맹 불가 | 왜 로마인은 가도를 만들었을까 | 왜 패자는 승자를 원망할까 | 운명 공동체의 필요성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 조직의로마를 뒤흔든 남자 


5장 한니발의 도전 
카르타고는 "평화국가"인가 |"자위전쟁"으로 시작된 포에니전쟁 | 세부 속에 역사의 묘미가 있다 | 육지의 로마, 바다의 카르타고 | "로마의 상식"에 대한 반대 명제 |칸나에전투 | 한니발은 왜 강했을까 | 왜 로마군은 바꿀 수 없었을까 | 로마군의 전력은 주로 중장비 보병 | "자기다움"을 빼 버린 개혁은무의미하다 | 조직의 로마에 대한 자각 | 한니발의 오판 | 지도자의 조건 | 스키피오의 등장 | 한니발의 "불길한 예언" 


6장 승자의 혼미 
급성장의 주름살 | 강대해진 원로원| 혼미는 왜 생겼을까 | "새로운 현실"의 아픔 | 자작농의 몰락 | 공동화되는 공화정 | 기사 계급의 대두 | 좁히기 어려운 틈 | 로마연합의 "균열"은 왜 생겼을까 | 그라쿠스 형제 | 실업 대책 | 이리하여 비극은 일어났다 | "내란 시대"의 시작 | "국경 자유화"를 시도한가이우스의 개혁 | 쇄국주의 | "비장의 무기"를 휘두른 원로원 | 무기 없는 예언자는 실패한다 |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 생각지 못한 부작용| 동맹자 전쟁 | "제국"의 이정표 | 또 하나의 "재앙" | 유혈의 연속 | "정치적 인간" 술라 | 술라 개혁의 맹점이란


7장 "창조적인 천재" 카이사르 
종신 독재관 |술라는 정치를 몰랐다 | 진정한 개혁이란 재구축이다 | 카이사르 식 "평화 선언" | 갈리아에서 온 원로원 의원 | 속주도 역시 로마이다 |"일석삼조"의 식민 도시 건설 | 코스모폴리스 | 집권과 분권 | 공격의 시대에서 방비의 시대로 | 갈리아 문제는 게르만 문제였다 | 카이사르가유럽을 만들었다 | 왜 카이사르는 "관용"을 내걸었을까 | 카이사르의 죽음 


8장 "팍스로마나"의 길 
"국가"는 누구의 것인가 |로마의 사명 | 로마 역사상 최대의 "명배우" | "아우구스투스"의 신중한 계책 | 황제로 가는 "카드" | 전군 최고 사령권 | 아우구스투스의"작은 소원" | "황제"의 탄생 | 카이사르 암살의 교훈 | 황제라는 존재 | "안의 평화"와 "밖의 평화" | 세금 체계의 확립 | 상속세의"발명" | 로마의 소비세 | "빵과 서커스"의 거짓말 | 로마에는 왜 공립학교나 공립병원이 없었을까 | 로마군단의 감축 | "보조 병사"제도에 숨겨진 지혜 | 운명 공동체의 길 | 로마 방위 체제의 구축 | 황제에게 부여된 말 


9장 로마에서 오늘의 우리를 돌아본다 
"구조 조정"의명인들 | "게르마니아 철퇴"의 결단 | 왜 로마인은 "법"을 찾은 것일까 | 로마에 성문법이 없었던 이유 | 역사와 전통을 무시한 개혁은실패한다 | 개혁은 "과거의 부정"이 아니다 | 왜 "선의"가 해악을 초래할까 | 로마사상 손꼽히는 논전 | 원로원의 "선의" | 카산드라의비극 | 개혁자는 고독하다 | "맡기는" 것에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영웅이 탄생한다 | 오해받아 온 로마사 | 로마사가 여러분의 인생에서"이정표"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특별 부록 - 저자에게 듣는 로마 영웅들의 성적 
옮긴이의말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조직의 로마
이탈리아 반도 통일

기원전 367년에 완성된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을 통해 대략 1세기에 걸친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해소돼 갔다. 원로원 의원을 시작으로 모든 국가 요직을 평민 출신에게도 개방함으로써 귀족과 평민이라는 계급 차이는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능력과 실적만 있으면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관점을 달리하면 평민을 엘리트 계급에 혼합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계급 대립 사태란 일어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는 귀족과 평민 사이에 결혼마저도 합법화했다. 그 결과 귀족과 평민을 갈라놓았던 벽이 점점 더 낮아져 갔다. 어떤 사회에나 반드시 있게 마련인 계급 대립을 이러한 ‘혼합 방식’으로 해소한 곳은 로마뿐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선택이 얼마나 옳았는가는 훗날의 로마사에서 명확해진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이 제정된 지 약 100년 후인 기원전 270년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다.


조직의 로마
평민 중에서도 뛰어난 인재를 모으고, 원로원 중심의 통치 체제 내에서 그 인재를 활용해 나간 로마의 방식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조직력’이라는 한마디로 집약된다. 회사 경영에서도 한 사람이 통치하는 기업에 비해 ‘적당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타입의 기업은 분명히 화려하지도 않고 발전 속도도 느릴 것이다. 하지만 회사 전체가 하나로 뭉쳐 목표를 향해 전진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러한 조직이야말로 확실하게 목표 달성을 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이런 방식이라면 사장이나 관리직이 교체된다 하여도 그로 인해 조직이 받게 되는 타격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로마는 후자 타입이었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제정 후 1세기 동안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다. 그러나 그 통일의 진도는 결코 선명하지도 않고 속도감도 없었다. ‘천하 통일’을 말하면 우리는 흔히 영웅을 떠올리지만, 그 시대의 로마에는 눈에 띄는 영웅이 탄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로마는 ‘강한 조직’으로 존재했다. 이 조직력으로 로마는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었다.


예컨대 이 시대 로마 전쟁사에서는 명장으로 지중해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인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천재적이진 않지만 견실하게 지휘를 할 수 있는 인재들이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군단 인솔은 1년 임기로 정해진 집정관의 역할이었다. 군단을 지휘하려면 자질도 필요하지만 실전 경험도 중요하다. 그렇게 보면 한 해에 한 번씩 ‘신인’을 등용할 기회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군단 지휘관 층이 두터워지는 셈이다. 예컨대 전쟁터에서 집정관이 쓰러졌다고 해도 로마 원로원은 경험자 가운데 즉시 후임 지휘관을 뽑을 수 있는 이점을 누릴 수 있다.

 

두 가지 네트워크
로마의 조직력은 공화정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이후의 로마에는 같은 시대의 다른 나라가 가지지 않은 두 가지 큰 ‘무기’가 있었다. 하나는 물건이나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네트워크로서의 도로망, 그리고 또 하나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 간 네트워크로서의 ‘로마 연합’. 이 두 가지 네트워크의 힘으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패자가 되었고, 얼마 후에는 지중해 세계의 패자도 된다. 그런데 사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는 로마가 주변국을 누르고 커진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했다. “패자마저도 자신들에게 동화시킨다는 그들의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기여한 것은 없다.” 로마인은 자신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던 적에 대해서도 분노하면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으며, 또한 노예로도 만들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예전의 적을 자신들이 이끄는 ‘로마 연합’의 일원으로 포함시켜 나갔다.


로마 연합이란
로마 연합은 크게 다섯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제1요소는 연합의 중심인 로마이다. 제2요소는 한때 라틴 동맹에 속해 있던 나라들, 즉 켈트 족 습격 충격 때 일단 로마에서 등을 돌렸다가 다시 로마 군대의 발밑에 엎드린 나라들이다. 배반 국가들에게 징벌을 내리는 대신 로마는 그들에게 완전한 형태의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말하자면 로마 본국 사람들과 완전히 똑같은 참정권과 재산권을 보증해 준 것이다.


제3요소는 ‘무니키피아(municipia)’라는 나라들로, 로마 내에서 자치가 허용된 나라들이었다. 로마에서는 무니키피아에 속하는 사람들을 ‘준로마 시민’으로 취급하기로 한다. 무니키피아 거주자에게 로마 시민권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보통의 생활에서 그들은 로마인과 똑같은 법적 권리를 인정받았다. 로마인과의 결혼도 자유로웠다.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투표권과 피선거권뿐이었다.


이전의 적에게도 시민권을 준 ‘로마의 지혜’
로마 연합의 제4요소는 라틴어로 ‘소키(socii)’라는 동맹국이었다. 이곳에는 로마 연합이 생긴 뒤에도 로마와 전투를 했던 제국이 포함된다. 이들 소키는 로마에서 완전한 자치가 허용되어 있었고, 로마는 그들에게 동화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로마 연합의 일원인 이상 조건은 이었다. 그것은 ‘만약 로마 연합이 전쟁을 일으키면 동맹국으로서 병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 의무만 완수하면 소키는 로마에게 세금이나 공납금을 낼 필요가 없었다고 하니, 이 또한 관대한 조건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소키의 지배 계급에 대해 로마 시민권의 취득을 적극적으로 권한 것이다. 로마 시민권을 취득하라는 것은 로마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로마의 국정에 참가해 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경우에 자국 시민권을 버릴 필요가 없었으므로 소위 이중국적이 되었지만 로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콜로니아 없이는 동맹 불가
로마 연합을 구성하는 마지막 요소는 ‘콜로니아(colonia)’였다. 콜로니아는 근현대의 식민지와는 정취가 다르다. 나는 콜로니아를 ‘식민 도시’라고 번역한다.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 근대 유럽 제국의 식민지는 현지 노동자에게 일을 시키고 수탈하기 위한 곳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콜로니아는 그런 경제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아무리 궁리를 하고 지혜를 짰다고 해도 동맹은 동맹인지라 그들이 배반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로마인이 생각한 것은 전략상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땅에 ‘쐐기’를 박듯 로마인을 배치해 가는 것이었다. 즉 일단의 로마 시민을 그곳으로 이주시켜 그들이 살면서 방위하는 마을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콜로니아뿐 아니라 당시 이탈리아의 마을은 모두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따라서 만약 주변 동맹국이 불온한 움직임을 시작했더라도 중요 거점은 콜로니아라는 형태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동맹국들은 경거망동을 할 수 없었다. 만일 배반한다 하더라도 로마 시민이 살고 있는 ‘콜로니아’에서 보루 역할을 맡아 가로막았다. 그렇게 적의 발목을 묶어 놓고 있는 동안에 수도 로마에서 군단이 출격하는 것이다. ‘콜로니아’ 중에는 로마 시민이 아닌 동맹국 사람들이 이주한 ‘라틴 식민 도시’라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이 라틴 식민 도시도 목적은 같았다.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식민지에 이주하여 로마와 이해를 일치시키는 것이 자신들에게도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왜 로마인은 가도를 만들었을까
로마 연합이 로마 방위의 소프트웨어였다고 한다면 하드웨어로서 기능한 것은 도로망이었다. 계획하여 가도를 부설한 것은 로마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가도를 단순히 물자나 사람을 수송하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유기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생각을 해내고, 게다가 가도를 네트워크화하면 비약적인 효과를 올릴 수 있다고 깨달은 것은 전적으로 로마인의 발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가도 부설은 기원전 312년, 당시 산악 민족인 삼니움 족과의 전쟁이 한창일 때 시작된다. 최초로 착공한 것은 지금도 이탈리아에 남아 있는 ‘아피아 가도’이다. 아피아 가도는 그때까지 지구상에 존재한 가도와 목적을 전혀 달리했다. 왜냐하면 이 가도의 가장 큰 목적은 로마 연합을 강화하고 보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자신들이 제패한 땅에 일부러 병력을 주둔시키지 않았다. 힘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동화를 통해 동맹국과 관계를 강화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전쟁이나 분쟁이 일어났을 때 기지에서 급파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당시 로마군 주둔지는 수도 로마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1초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로마 가도라는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다. 역사상 유명한 로마 가도의 첫 번째 목적은 군용 가도였다.


왜 패자는 승자를 원망할까
가도 부설에는 또 하나의 큰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나 물건의 이동을 통해 ‘패자의 동화’ 노선을 더욱더 추진해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군용 가도로서의 기능성을 첫 번째 목적으로 생각한다면, 가도는 수도인 로마를 기점으로 해서 일직선에 가까운 코스를 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로마 가도가 부설된 경로를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그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정략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에는 반드시 그 마을 중앙으로 가도가 통과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패자가 승자에게 불만을 느끼는 경우는 보편적으로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승자에게 자치권을 빼앗기는 경우다. 이에 대해 로마는 이미 지방자치제인 무니키피아 및 동맹국에 대해 내부 자치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대책을 세워 해결함으로써 그러한 불만이 쌓일 위험을 최소한으로 억제했다. 또 다른 이유는 경제상의 곤궁이다. 만약 패자인 자신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아무리 정치적 자유가 주어진다 해도 불만은 쌓일 수밖에 없다.


로마의 가도 부설은 이러한 경제적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일 수도 있다. 로마와 동맹국 사이에 물류가 증가해 가면 요즘 말하는 광역 경제권 형식의 연결이 이루어지게 되어 저절로 현지 경제도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로마인 측에서 보면 다소 우회한다 해도 마을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형태로 가도를 부설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운명 공동체의 필요성
또한 가도를 통해 운반되는 것은 물자만이 아니다. 로마인의 문화나 풍습도 다른 지방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것도 동맹 강화를 위해서 꼭 필요했다. 승자가 승자로서 계속 존재하려면 단순히 무력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 존경받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로마 연합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로마와 동맹국, 다른 말로 하면 승자와 패자가 운명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하다고 로마인은 깨닫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로만 우호를 주창해서는 의미가 없고 물심양면으로 교류가 있을 때에 비로소 승자와 패자는 융합해 간다.


로마에서 오늘의 우리를 돌아본다
‘구조 조정’의 명인들

기원전 753년 건국부터 시작해 대략 8세기에 걸친 로마의 역사를 이야기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새삼 통감한 것은 로마인이 ‘구조 조정’에 아주 뛰어난 민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말하는 구조 조정이란 현대 사회에서 이뤄지고 있는 사업의 축소나 폐쇄, 인원 축소라는 소극적인 개량 방법이 아니다. 이 말의 본래 의미인 재편성이나 재구축이 여러 차례에 걸쳐 성공했기 때문에 로마는 1,000년이란 긴 역사를 가질 수 있었다. 같은 지중해 세계에 속하는 그리스가 문화나 정치, 경제에서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어도 그 빛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책에서 거론한 범위 내에서 로마인이 행한 정치 개혁 중에 가장 큰 것만도 3회나 된다. 최초로 이루어진 개혁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이행이다. 기원전 509년 루키우스 유니우스 부르투스 등에 의해 제7대 왕 ‘오만왕 타르퀴니우스’가 추방당한 이후에는 한 명의 왕을 대신해 집정관을 매년 두 명씩 선출하고, 이 두 명의 집정관이 정치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두 번째는 기원전 390년에 일어난 ‘켈트 족 습격 충격’을 계기로 이루어진 공화정 체제 내부의 개혁이다. 귀족과 평민의 계급투쟁이 종지부를 찍고 로마의 부흥을 완수하기 위해 정부의 요직을 평민에게 개방하는 결단을 내린 것도 이때이다. 그리고 세 번째의 개혁은 제정으로의 이행이었다. 카이사르가 그 설계도를 만들고 아우구스투스가 그대로 돌을 쌓아올림으로써 로마제국이 건설돼, 500년 동안 계속된 공화정도 과거의 것이 되었다.


로마가 실행한 개혁은 물론 여기서 거론한 세 가지뿐만이 아니다. 기원전 494년부터 시작된 호민관 제도, 포에니전쟁 후의 ‘혼미의 시대’에 그라쿠스 형제나 마리우스나 술라가 행한 여러 개혁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말하자면 로마인에게 정치 시스템이란 로마 가도를 보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항상 보수 유지하는 것’이었다.


철학적 사고에 의해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인이나 일신교의 절대신을 믿는 유대교나 기독교 신자와 달리 로마인은 이런 종류의 ‘절대’에는 친숙하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시스템이라도 인간이 만든 것은 반드시 결함이 숨겨져 있다는 현실적임 감각을 그들은 항상 지니고 있었다.


왜 로마인은 ‘법’을 찾은 것일까
‘시스템이란 끊임없이 보수, 개정해 나가는 것’이라는 로마인의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법률에 대한 그들의 태도일 것이다. 로마인이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법에 따라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려고 한 것은 로마인 특유의 정신세계인 ‘패자도 동화시킨다’는 특징과 많은 관계가 있다. 왕정 시대부터 로마인은 다양한 민족이나 부족을 로마에 불러들여 그 안에서 공생했다. 거기에는 풍습의 차이에서 오는 문화적 마찰도 있었을 것이고, 믿는 신이 달라 갈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로마는 ‘법’이라는 규칙을 필요로 했고, 그 필요성은 다문화, 다민족의 로마제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더 커진다. ‘로마의 법’이란 인종이나 종교 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고 평등한 권리를 보증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따라 ‘공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에 성문법이 없었던 이유
로마인이 만들어 낸 ‘법치국가’라는 모델은 현대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지만 로마에는 제대로 조문화된 법률, 즉 성문법의 체계가 없었다. 로마에서는 법률이 시대에 맞지 않게 되면 전부터 있던 법률 조문을 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을 정해 대항하는 방법이 채택되고 있었다.


법률 조문 수정이라는 형태로 대응하면 아무래도 과거에 끌려가 버린다. 더구나 그 법률이 오래 사용되었다면 그만큼 큰 폭으로 바꾸지 않고 가능하면 최소한도의 개정에 그치려는 것이 인간의 심성이다. 이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법률을 만든다면 과거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해 거기에 적응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 내고, 이 새로운 법에 호환이 안 되는 옛 법은 자동적으로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로마의 정치 개혁을 되돌아보면 로마 사람들의 구조 조정이 로마법의 개정과 같은 정신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이행, 혹은 평민에 대한 문호 개방, 나아가 카이사르의 개혁 등 그들은 모두 기존의 시스템을 전폐하고 만든 개정은 아니었다. 과거와의 정합성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것을 하지 못하면 개혁은 단순히 ‘개량’으로 끝나 버리고 이렇다 할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이 같은 대단한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라는 ‘국가’는 오래 계속될 수가 있었다.


개혁은 ‘과거의 부정’이 아니다
되돌아보면 로마의 개혁은 대담하면서도 당시까지 이어온 전통을 밟아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로물루스가 창시한 왕정이 왕과 원로원 그리고 시민회의 세 기둥이었던 것을 루키우스 브루투스는 집정관과 원로원과 시민회라는 공화정으로 재구축했다. 브루투스는 로마에 이제는 왕이라는 카드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원로원이나 시민회라는 카드는 한꺼번에 버리지 않았다. 이 두 장의 카드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개혁이란 오래된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내세우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성공한 개혁은 자신들의 현재의 모습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유효한 것을 골라내어 그것이 최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게 재구축해 나가는 작업이 아닐까?


왜 ‘선의’가 해악을 초래할까
그러면 대체 왜 개혁은 재구축해야 할까? 그 답은 카이사르의 다음 말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는 아무리 나쁜 사례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시작된 원래의 계기는 훌륭한 것이었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자칫하면 종래의 체제를 ‘나쁜 것’ ‘부정해야 할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 쉽다. 그래서 예로부터 내려온 이전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이 개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떠한 정치 시스템이든 처음부터 국민을 불행에 빠뜨리려고 생각하고 만들어진 것은 없다. 당초의 동기는 ‘훌륭한 것’, 즉 선이었을 것이고, 사실 그 시스템으로 잘돼 가던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 같은 시스템이 유지돼 온 것이다. 그러나 그 선(플러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악(마이너스)으로 바뀌어 간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카이사르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선에서 악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원인은 시스템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외부 환경 변화에 있다고 본다. 예컨대 시스템 자체는 옛날과 같이 운영되고 있어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격변해 버리면 그 효과도 역방향이 되어 버린다.


그 가장 좋은 예가 공화정 말기의 원로원일 것이다. 아직 로마의 판도가 이탈리아 반도 안쪽에 머물러 있던 시대의 원로원은 로마의 두뇌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맡고 있었다. 원로원에는 많은 인재가 있었고, 거기에서 적재적소의 방침으로 집정관이나 그 외의 요직에 인재를 보냄으로써 로마의 정치는 기능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에니전쟁 이후의 상황 변화가 그것을 바꾸어 버렸다. 이미 지중해 전역에 퍼진 로마의 통치를 원로원은 담당할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것이 한 세기 반에 걸친 ‘혼미의 시대’의 진상이다. 즉 시스템이 나빠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시스템의 운영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시스템과 외부와의 조화가 나빠졌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낡은 통치 시스템을 전부 부정해 버리면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알 수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우선 자신들이 놓여 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 현재 시스템의 어느 부분이 현상에 적합하지 않게 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렇게 해 나가는 중에 비로소 ‘버려야 할 카드’와 ‘남겨야 할 카드’를 찾아낼 수 있다고 본다.


카산드라의 비극
포에니전쟁 종결 이후 1세기 반에 걸쳐 계속된 ‘승자의 혼미’는 카이사르의 등장에 의해 간신히 수습되기 시작한다. 로마뿐 아니라 어떤 국가나 어떤 시대에도 개혁은 결코 회의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나타나 스스로가 믿는 바에 따라 개혁을 단행하지 않는 한 체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하지 않고 지내는 동안 국력은 쇠미해져 갈 뿐이다.


그렇긴 해도 개혁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개혁이든 그에 따라 손해 보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타난다. 이른바 기득권층의 존재이다. ‘얘기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이상이지만 그것만으로 성공한 적은 거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시 카이사르의 말을 인용하면,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 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혁에 의해 기득권이 없어지는 것에 정신을 쏟고 있는 사람에게 개혁의 의의를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의 반대에 귀를 기울여 버리면 어떻게 될까? 결국 어떤 개혁도 대폭 수정이 돼 소폭의 개량으로 끝나 버릴 것이 뻔하다. 따라서 개혁을 하려면 결국 힘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인물이 술라였고 카이사르였다.


유럽에서는 아무리 올바른 주장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을 ‘카산드라’라고 한다. 고대 트로이의 왕녀였던 카산드라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대로 가다가는 트로이는 멸망한다”며 사람들에게 예언하고 다녔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예언은 맞아떨어져 트로이는 멸망한다.


나 같은 문필가나 평론가라면 카산드라가 되더라도 체념하고 말겠지만, 정치가는 카산드라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자신이 옳다고 믿으며 지금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일을 실행하지 않으면 정치가로서의 가치는 전무하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군사를 인솔해 루비콘 강을 건너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것을 단행했기 때문에 로마의 국가 체제 개혁도 실행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의 지혜를 모은 개혁은 이상으로서는 아름다워도 현실적인 방책이 아닌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개혁자는 고독하다
이런 내 의견에 대해 ‘그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생각이다’, ‘독재자를 허용하려는 것인가?’ 등의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나는 무심코 ‘카이사르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라고 생각한다. 카이사르라면 분명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좋지만 민주주의를 지켜도 나라가 멸망한다면 소용없지 않은가?”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아직 민주주의는 다른 정치 제도에 비해 훨씬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의 신일 수는 없다. 정치의 목적이 최대 다수의 평화와 번영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민주주의는 그것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상황에 맞추어 수단을 골라 쓰는 것이 오히려 건전한 태도가 아닐까? 적어도 로마의 역사는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덧붙이자면 독재자를 무조건 민의를 무시하는 존재라고 잘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독재자라도 여론을 완전히 무시하고 정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어렵다. 역시 자신이 생각하는 정책을 현실로 나타내고자 할 때 주위의 협력을 얻지 못하면 효과를 거둘 수가 없다. 새로운 시대를 만들 정도의 대개혁은 누구에게든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자는 고독하고, 고독하기 때문에 지지자를 필요로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연기를 해서라도 원로원을 아군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독재자는 민중을 무시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은 꼭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어중간하게 권력을 잡고 있는 정치가 쪽이 민의 같은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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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는 모두 독재자로 분류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있었던 덕분에 최종적으로 이득을 본 것은 로마 시민이었으며 속주의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