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와 2부에서는 어떤 문화 환경 속에서 강인한 전사들이 탄생했고, 명장들은 어떤 위대한리더십을 발휘했는지 알아본다. 아시리아 전사, 페르시아 기병, 그리스 보병, 훈족, 몽골족, 테미스토클레스, 알렉산드로스, 아이젠하워 등 이들의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집단끼리의 협력이 중요하며 이를 이끌 위대한 리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3부와 4부에서는 전쟁사에서 만나는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한다. 인류의 절반을차지하는 여성들은 후방에서 지원하거나 나이팅게일처럼 전장에서 간호 임무를 수행했으며, 현대전에서는 직접 전투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린데만과티저드 같은 과학자들이 동원돼 대전략을 수립하는가 하면, 정규 전사들이 패배하거나 부족한 상황에서는 게릴라 또는 의병들이 나서서 싸웠다. 러셀같은 종군기자들은 뉴스를 취재하기 위해 전장에서 전사들처럼 사선을 넘나들었다. 또한 적에게 잡혀 온갖 학대를 받은 수많은 포로들, 전쟁에반대하는 비폭력주의자들 모두 전쟁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간략하게나마 포괄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 저자 정토웅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30년넘게 생도들의 전쟁사 교육을 맡고 있다.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캔자스주립대학교 역사학과에서 군사사학 분야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사 101장면』『20세기결전 30장면』『세계전쟁사』(공저) 『한국전쟁사』(공저) 『군사사상사』(공저)『The Korean War at Fifty』(공저)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제1부 전사들
1. 고대 최고의 아시리아 전사들
2. 춘추전국시대 중국 장수들
3. 페르시아 제국을 지킨 기병들
4. 페르시아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보병들
5.무적의 로마군단
6. 신의 채찍 아틸라의 훈족
7. 이슬람 노예병사 맘루크
8. 신의 도리깨 칭기즈칸의 몽골족
9.검은 나폴레옹 샤카의 줄루족
10. 봉건시대 일본의 사무라이들
11. 유럽 근해를 지배한 바이킹 뱃사람들
12. 조국이없는 카자크 기병
13. 프랑스 외인부대
14. 사람들과 함께 참전한 동물들
15. 하늘을 난 전사들
제2부 명장들
1. 아테네 해군을 건설한테미스토클레스
2. 세계 최고의 군사적 천재 알렉산드로스 대왕
3. 지연전의 명장 파비우스
4. 미국의 두 명장 패튼과아이젠하워
제3부 여성들
1. 아마존 여전사들
2.스파르타 어머니들
3. 크림전쟁에 나타난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
4. 현대전에서 여성들
제4부 그 밖의 사람들
1. 전쟁 포로들
2.전장을 취재한 종군기자들
3. 영국의 두 과학자문위원 티저드와 린데만
4. 전쟁상인들
5. 게릴라, 의병들
6.비폭력 평화주의자들
참고문헌
역사 속의 戰士들
신의 채찍 아틸라의 훈족
5세기 중엽 유럽은 ‘신의 채찍’에 의한 폭풍에 휩싸여 공포에 떨었다. 아틸라는 스스로를 ‘신의 채찍’ 또는 ‘신이 내린 재앙’이라고 부르고 다녔으며 휘하의 훈족을 거느리고 로마 제국과 주변의 게르만 국가들을 침략해 닥치는 대로 유린했다. 역사상 서양인들이 동양인들로부터 침략을 받고 공포에 떤 일은 몇 차례 없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훈족의 침략은 가장 거셌다.
훈족은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에 거주한 투르크계의 유목기마민족으로서 수세기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한 민족이다. 중국에서 기원전 2세기에 한나라를 침략했다가 실패하고 서쪽으로 쫓겨난 바 있는 흉노족은 훈족의 일부로 알려져 있다. 훈족은 기원후 3, 4세기경에 초원 지대를 벗어나 유럽 지역을 침략했다. 극심한 가뭄 등의 이상기후로 말미암아 식량난을 겪고 약탈을 위한 민족 대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훈족의 침입은 로마 제국의 변경 지대에서 살고 있던 게르만족에 압박을 가하고 연쇄적으로 민족 이동과 충돌을 일으켰다.
375년 훈족은 흑해 북안에서 동고트족을 무찌르고 그 지역을 약탈했으며 이어 도나우 강 하류의 서고트족에 이르렀다. 서고트족 일부는 훈족에 쫓겨 동로마로 이동했는데, 세계사에서는 흔히 이를 게르만 민족 대이동의 발단으로 보고 있다. 훈족은 오늘날 헝가리를 침략하고 루아 왕은 그 지역 일대를 지배했다. 그 후 훈족은 루아의 조카였던 아틸라 왕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아틸라는 주변의 게르만 여러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흑해 북안에서 라인 강에 이르기까지 대제국을 건설했다.
훈족은 거칠고 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았다. 또한 생존 환경적으로 싸움에 익숙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단련될 수밖에 없었고, 거의 말과 한 몸이 될 정도로 가까이 지냄으로써 기마술에서는 그들을 따를 민족이 거의 없었다. 다만 조직력이 약한 것이 흠이었으나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우뚝 솟은 사람이 아틸라였다.
아틸라는 여러 개로 나뉜 부족들을 하나의 훈족 왕국으로 결속시켰다. 부족 연합 체제 대신에 중앙정부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리더십 때문이었다. 그의 뛰어난 전투 실력만으로 권력을 잡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신하들과 외국 사절들에게는 금은으로 만든 술잔을 제공하고 자신은 목기로 만든 잔을 사용했으며 식기도 나무접시를 사용했다. 검소하고 금욕적이고 소박한 모습의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지도자는 과연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심지어는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사람에게도 아량을 베풀 정도로 통이 크고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서 부하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그는 강국이 되려면 발전된 나라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보좌관들을 주로 외국인들로 구성하고 그들로부터 외교와 군사 문제에 관한 조언을 듣고 통치했다. 아틸라는 어느 한 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울 때 반드시 인접한 다른 나라들과 동맹 관계를 맺고 난 뒤에 실행을 한 전략가였다. 그리고 헝가리에 정착했을 때는 기병에 추가하여 보병을 창설했다. 이렇게 조직과 전략 전술을 제대로 갖춘 막강한 군대는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훈족 군대의 기동력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기병이 속도를 낼 때는 하루 600킬로미터를 주파했다. 각 병사들의 동작도 매우 민첩했다. 어느 순간에 흩어졌나 싶으면 벌써 다시 모여 전투를 개시했다. 그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전격전을 수행했고 보병 위주의 유럽 군대는 속수무책이었다.
훈족의 주 무기는 활이었고 활 솜씨는 뛰어났다. 활은 대초원 지대의 산물인 뿔과 나무를 포개어 만든 것으로 길이가 짧았지만 강력한 힘을 지녔다. 그들은 활 이외에도 철제 칼을 보유했다. 훈족은 스스로 철제 칼을 만들 만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유럽인들로부터 약탈하거나 물물교환으로 구해 사용했다. 그밖에 그물과 올가미를 지니고 다녔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격용 장비를 갖고 다니면서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가벼운 차림을 했으며, 결코 유럽 병사들처럼 무거운 갑옷과 방패를 지니지 않았다.
443년에 훈족의 왕이 된 아틸라는 사실 명장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의 전투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독불장군들이 많은데다 거칠고 사나워 다루기 어려운 훈족들을 통합시켜서 10년이나 잘 거느리고 다녔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뛰어난 지도자였음에 틀림없다. 또한 그는 변방 민족들로부터 공물을 받음으로써 위세를 떨쳤다. 심지어 동로마 제국 황제들도 아틸라에게 사절단을 보내 공물을 바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틸라는 440~447년에 주로 발칸 반도에서 약탈을 했다. 그러나 심한 저항에 부딪치고 약탈거리가 줄어들자 더 서쪽을 넘보기 시작했다. 451년에는 아틸라는 뗏목을 타고 라인 강을 건너 오늘날 프랑스의 샹파뉴 지방까지 진출했다. 이때 서고트족과 로마군은 힘을 합해 결사적으로 맞섰고 결국 서유럽을 지켜냈다. 그러자 아틸라는 다시 방향을 틀어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침략했다. 방비가 허술한 곳, 그리고 전리품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곳만 찾아다닌 그에게 당시 이탈리아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 그리고 그 무렵에 아틸라는 다른 이름 있는 정복자들처럼 로마를 정복하고 싶은 욕심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틸라가 롬바르디아 지방을 휩쓸고 있을 때 교황 레오1세가 서로마 제국의 두 장관을 동반하고 직접 아틸라 진영을 찾아왔다. 그들의 목적은 아틸라에게 공물을 바치고 로마를 공격하지 말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때 아틸라는 막사에 느긋하게 누운 채 교황을 맞이할 정도로 도도한 자세를 취했다. 여기서 이루어진 구체적인 협상 내용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고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 만남 후에 아틸라가 철수했다는 것이다.
무방비 상태에 있는 이탈리아를 그대로 두고 떠난 데는 단순히 아틸라가 교황의 요청을 들어서도, 공물에 만족해서도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른 많은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무렵 그의 군대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쳐 있었다. 장기간의 원정을 치르면서 피로가 극에 달했고 군대 내에는 전염병이 돌고 보급 사정은 날로 악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이탈리아는 기근을 치른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인지라 농경지에 마초가 귀하여 말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했다.
그런데다가 동로마 제국 군대가 도나우 강을 건너 헝가리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틸라는 생활 터전에 남겨 놓고 온 양떼와 소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아틸라는 헝가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2년이 채 못 된 453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틸라의 죽음으로 훈족의 제국은 곧 붕괴되었다. 말들도 너무 혹사당한 나머지 엄청난 숫자가 죽었기에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로부터 과거의 용감한 병사들과 튼튼한 말들을 물려받지 못했고 결국은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유럽 일대를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파괴하고 다녔던 ‘신의 채찍’ 아틸라는 정복한 세계를 지배할 만한 정치적, 문화적 기반이 전혀 없었다. 힘으로 정복하긴 했지만 그는 정복한 어느 문명국가에서도 군주 행세 한 번 해보지 못했다. 그는 단지 유목민의 생활방식을 유지해 나가는 수단으로서 약탈 전쟁을 했을 뿐, 그가 이룬 제국을 존속시킬 만한 기틀을 잡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훈족은 다시 분열됐고, 도나우 강 하류 지방으로 후퇴했다. 그 후 훈족은 다른 민족에게 흡수?동화되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조국이 없는 카자크 기병대
카자크(Kazak) 기병대는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 초원 지대에서 국적 없이 자기들끼리의 군사 사회를 이루어 독립적으로 살았던 특별한 전사들이었다. 오늘날 영어권 지역에서는 흔히 그들을 코사크(Cossack) 기병대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철저한 평등 사회를 건설해 군주도 없고 가족이나 사유재산도 없이 말 그대로 자유롭게 떠돌아다닌 자유인들이었다. 카자크는 원래 ‘모험’, ‘자유인’이란 터키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카자크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의 시조는 두 계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14, 15세기에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큰 나라들 사이의 변경 지역에서 살았던 타타르족(남러시아와 시베리아에 걸쳐 살았던 북방 터키계 민족)과 슬라브족 혼합 집단이다. 이들은 거주지에서 다른 유목민들의 침입을 막고 국경을 지켜주는 역할을 맡았다. 말하자면 신세를 지고 있는 나라의 국경 수비대와 같은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그들은 그 대가로 변경 지역에 있는 땅을 경작하고 자기들끼리 본국 법과는 관계없이 완전한 자유인으로 살았다. 카자크의 다른 계통으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도망 나온 농노들이 있다. 이들 도망자들은 변경 지대에서도 러시아 법이 미치기 어려운 가장 먼 곳에 모여 자치적으로 군사 조직을 만들어 자유롭게 살았다.
16, 17세기에 카자크는 주로 우크라이나 지방의 돈, 야이크, 그레벤, 볼가, 자포로제, 드네프르 강 유역 등 6개 지역에 모여 집단생활을 했다. 이들은 이슬람 지역과 러시아 정교회 지역을 넘나들면서 약탈을 일삼았다. 이들 카자크족은 처음에는 폴란드군 편에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러시아에 의지해서 마치 러시아군에 편입한 것처럼 활동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카자크 기병대를 국경 수비대로 활용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의 용맹성을 인정해 러시아 영토를 확장시키는 전위대로 이용했다. 카자크족도 폴란드 치하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자치권을 얻고 더 좋은 세상을 누린 것처럼 보였다.
카자크는 러시아 보호 아래에서 점차 세력권을 키워 나갔고 시베리아를 개척하는 데도 앞장섰다. 그러나 러시아가 가만 놔둘 리 없었기 때문에 한없이 세력을 키울 수는 없었다. 러시아는 카자크에 대하여 계속적인 이민 흡수 정책을 폈고 카자크에 대한 개입을 점차 강화해 나갔다.
카자크족은 러시아의 간섭으로 자치권에 위기를 맞을 때마다 봉기를 일으켰다. 17, 18세기에 봉기를 일으킨 유명한 지도자들 가운데는 스텐카라진, 콘드라티 불라빈, 예멜리안 푸가초프 등이 있다. 하지만 모든 봉기들이 다 실패했고 카자크는 결국 자치권을 잃고 말았다. 러시아는 교묘한 방법으로 카자크를 복속시켜 나갔다. 각 카자크 집단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의회 활동에 대해서는 자치권을 인정했으나 사실 이 자치권은 유명무실했다. 러시아는 카자크 사회의 최고 권력자인 수장에 대한 임명권을 갖고 사실상 간접 통치를 했다. 또한 카자크 관리들에게 특권을 주는 방법으로 카자크 사회의 전통을 무너뜨렸다. 관리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임대할 수 있는 권리, 즉 지주권을 부여받았다. 그렇게 하여 카자크 사회가 전통적으로 유지해온 평등사상과 토지공동소유제도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러시아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이득은 카자크 기병대를 군사적으로 잘 활용한 점이다. 러시아는 카자크 대원들은 마치 농노들을 부려 먹듯 강제로 징집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다양한 카자크 집단들에 대해서 마치 자유상비군 집단처럼 대해 주었다. 카자크 전사들은 개별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고 각 집단별로 떨어진 동원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이런 방법으로 러시아는 병력을 모으는 데 애쓰지 않고도 잘 준비되어 있는 카자크 연대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러시아는 비용을 덜 들이면서 카자크 기병대의 전통적인 용맹성도 이용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았다. 나폴레옹전쟁, 크림전쟁,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의 카자크 연대는 러시아군 가운데서도 최정예 부대로서 명성을 떨쳤다.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은 그들은 황제 근위대로 발탁되기도 했다.
카자크 집단은 러시아 군내에 분산되어 편입된 다른 유순한 변경 민족들과 달리 독자적인 부대를 유지했다. 카자크 기병대의 군사적 능력이 워낙 빼어났기에 러시아는 그들에게 약간의 특혜를 주고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카자크 기병대의 용맹성과 잔학성은 유럽인들에게 과거 초원 지대를 누비던 무서운 기마민족들, 훈족이나 몽골족과 똑같은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1812년 나폴레옹도 카자크 기병대에게 호되게 당했다. 카자크 기병대는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군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그들은 깊은 눈 속에 빠져 탈진한 상태에 놓인 적들이 확실한 항복 의사를 표시했을 때도 인정사정없이 잔인하게 학살했다.
클라우제비츠의 관찰에 의하면 카자크는 약자에게 잔인하고 용감한 자 앞에서는 겁쟁이였다고 한다. 이런 속성은 어쩌면 모든 용병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전투란 곧 생존을 위한 생활 수단이고 그들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조국이 없는 카자크 집단은 러시아를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싸웠던 것이며, 그래서 비겁하게 행동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19, 20세기에 러시아는 주로 폭도를 진압하는 작전에서 카자크 기병대를 이용했다. 화약 무기가 판을 치는 시대였음에도 폭도 토벌과 같은 작전에서는 기병이 효과적이었다. 러시아혁명과 내전 중에 카자크 기병대도 내부 분열이 일어났고 그들 가운데는 백군에 가담한 자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내전에서 볼셰비크가 승리하는 바람에 카자크 집단은 영원히 해체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카자크 기병대가 소생하는 독?소전쟁에서 싸웠지만 이때 카자크 기병대는 단지 용맹성을 상징하는 이름만 가진 부대에 불과했고 과거처럼 군사 자치권을 가진 전통적인 카자크 기병대와는 전혀 다른 부대였다.
스파르타 어머니들
신화가 아닌 실제 역사적인 전쟁들에 대해서는 주로 전사들의 어머니와 아내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그 가운데서도 스파르타 어머니들의 이야기는 매우 특별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전쟁을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말하자면 전쟁이 사회 형성 과정의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사회 모습인 도시국가는 기본적으로 전사들이 모인 공동체로 전사들은 모두 시민들이었다. 전쟁 때는 시민 전사들이 모여 군대를 구성해 싸우면서 도시국가의 건재를 당당히 표현했다. 시민 전사의 개념은 도시국가의 건설에서 으뜸 원리였던 시민 위주 정치를 유지시키는 데 아주 중요한 기능을 했다. 여기서 시민이란 노예가 아닌 남자를 뜻했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여자들은 어떠한 역할을 했을까?
천재적인 정치가였던 페리클레스가 통치한 그리스 황금시대에도 여성들의 사회적 지휘는 형편없었고 어떤 형태로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여성은 가정 밖의 일에 참여해서는 안 되고 남자들 일에 절대 참견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페리클레스는 말했다. “여성에게 최대의 명예는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남자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 여성들은 어떠한 여건에서도 전쟁에 나가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서는 아마존 여전사와 같은 전투원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더라도 그리스 남성들이 허락할 리가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그리스 여성들의 역할과 정체성은 크게 두 가지 일반적인 유형으로 나누어졌다.
첫째, 아테네를 비롯한 대부분의 도시국가에서 나타난 가장 보편적인 현상으로 전쟁에 나간 자식과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한없이 울고 서러워하며 지내는 유형이다. 모성애로부터 나오는 눈물과 애도 그리고 고통을 겪으며 지내는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남성들의 고유 영역인 전쟁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수동적이었다.
둘째, 스파르타 어머니들처럼 결코 눈물과 슬픈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 유형이다. 그들은 자식이 전쟁에 출정할 때 말하기를 ‘돌아올 때는 반드시 방패를 들고 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방패 위에 누워서 돌아오라’고 했다. 즉, 승리 아니면 죽음을 택하라는 것이다. 스파르타 어머니들은 자기 아들이 비겁하게 살아 돌아오는 것보다 오히려 조국과 조상을 위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기를 좋아했다. 어느 어머니는 자식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 소식을 전달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첫마디가 자식이 스파르타인답게 죽었느냐는 질문이었다고 한다. 세상에 그렇게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사람은 없다고 대답하자, 그 어머니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제 아들은 기품 있고 용감한 전사였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에는 제 자식보다 더 용감한 전사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처참한 전투에서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아들을 돌멩이로 쳐 죽인 어머니가 있었다고 한다. 아들의 비겁함을 용서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여인에 대해 많은 스파르타인들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당연한 처벌을 내렸다고 여기는 풍토였다. 스파르타 어머니들은 죽어 돌아온 자식을 묻으면서도 운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행운을 가진 것처럼 말했다. “나는 스파르타를 위하여 죽을 자식을 낳았고 이제야 바로 그 꿈을 이루었노라.”
스파르타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튼튼하고 잘 생긴 아이는 기르고 허약하게 생긴 아이는 타이게투스 산에 내버렸다. 약한 아이는 본인이나 나라를 위해서 살려두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긴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것이 아니라 나라의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좋은 아이만 기른다는 개념이었다. 같은 이유로 건강하고 훌륭한 시민을 낳기 위해서라면 특별히 부탁하는 사람에게 아내를 빌려 주기도 했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리쿠르구스 왕 시절에 대대적 개혁을 단행하면서 강국을 만들었다. 그는 주조한 돈을 폐기하고 금전대차 관계를 없애 시민들에게 배금주의와 검소한 생활방식을 요구했다. 그리고 모두 사적인 욕심을 버리고 꿀벌처럼 일하면서 오직 나라만을 위해 왕을 중심으로 공동생활을 하도록 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었다. 스파르타 남자들은 7살부터 30살까지 병영 생활을 하고 군사 훈련과 신체 단련에 열중했다. 스파르타 교육의 중심은 고통과 결핍을 극복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애국심 그리고 체력을 갖춘 군인을 기르는 데 있었다.
여성들에게도 엄격한 체력 단련을 시켰는데, 그것은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남자들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있을지도 모를 헬로트(스파르타 농도)들의 반란을 제압할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이 여성의 지위를 한결 높였다. 젊은 처녀들은 남자들처럼 경주, 레슬링, 창 던지기 등으로 몸을 단련했다. 그들은 국가적 행사 때 남자들처럼 몸을 노출시키고 행렬 속에 끼었으며, 남자들과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스파르타 사회에서는 여자들이 나체를 드러내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순박한 기질을 보이며 건강의 가치를 가르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남자들의 행동이 바르지 않을 때는 여자들이 야유를 하며 질책했다.
왕과 국가 원로들이 모두 참석한 행사장에 초대를 받은 이웃 나라에서 온 귀부인이 스파르타 여성들의 활발한 모습을 보고 스파르타 왕비에게 말하기를 “그리스 세계에서 남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여성은 스파르타 여성들뿐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왕비는 대답했다. “그럼요, 남자들을 길러내는 것은 우리뿐이니까요.”
스파르타 여성들은 본인들이 전사들은 아니지만 바로 그들을 길러낸다는 점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그들은 남편에게도 무조건 복종만 한 것이 아니고 맘에 들지 않을 때는 괄괄한 성미를 보였다. 집안일에 대해서 대부분을 좌지우지하는 남자들이 하는 중대한 공적인 일에도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스파르타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엄격했다. 그들에게는 모성애보다 애국심이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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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에게 엄격하기 그지없는 스파르타의 어머니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말로만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나올 수 없다. 평소에 습관과 훈련을 통해 시민들 사이에 충성심이 굳게 뿌리를 내렸던 스파르타와 같은 사회에서 독특하게 출현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스파르타 어머니들의 정신은 어느 정도 이어져 왔다. 오늘날 세계 많은 나라 역사에서 훌륭한 군인은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를 자주 접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