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조선왕조의 각종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시대별 준천 과정을 살펴본다.사료를 통해 드러난 준천의 논의와 그 실천 과정에서 지배 세력이 민을 파악하는 정치, 행정 방식과 준천 사업의 정당화를 위해 동원했던 위민담론의 시대별 변화를 비교· 분석하였다. 또한 현재의 청계천 복원사업이 처음 태동되었던 순간부터 청계천 살리기의 과정들을 구체적으로 그려냈다.각 과정에 대한 신문 기사를 함께 실어 사업을 진행하는 입장뿐만 아니라 당시의 여론 방향도 함께 살펴본다.
■ 저자 조광권
1947년 서울 출생. 고려대 법학과를졸업하고,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도시행정학 석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대문구청장, 서울시보사환경국장, 교통국장, 공보관 등을 역임했고, 청계천 복원 시민위원회 상임 부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2005년 현재 서울특별시 교통연수원장,서울시립대학 도시행정과 도시과학대학원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차례
머리말
추천사
이 책을 읽기 전에
제1장 개천에서 청계천까지
제2장 "개천"을 통해 본 조선의 치세관
제3장조선왕조 준천의 배경이 된 정치사상
제4장 조선의 준천에서 배운다
제5장 청계천 살리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제6장 21세기청계천, 이상과 현실 사이
제7장 다시 흐르는 청계천
에필로그 - 몽유청계천도
청계천에서 역사와 정치를 본다
제1장 개천에서 청계천까지
1960년대 대학 시절 내 기억 속의 청계천은 술 취한 객기로 질러대는 우리들의 오줌발을 받아주던 흐르는 물줄기로, 즐비하게 늘어선 빈대떡집들 거리의 풍경 안에 있었다. 세월을 더 거슬러 조선시대에는 청계천변이 서울 사람들의 흥겨운 놀이의 장이었다. 정월대보름날 답교놀이(다리밟기)가 가장 서했던 곳은 청계천의 다리 중 하나이던 수표교였고 연 날리기에도 인기 장소였다.
그러나 청계천의 낭만은 시대와 함께 사라지고 고단한 생활의 흔적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갔다. 6.25전쟁 이후에는 피난민과 월남민들의 판자촌이 세워졌고, 제방 위로는 고물상의 행렬이 이어졌다. 60년대, 4.19의 도화선이 되었던 고려대생 피습사건이 일어난 곳도 청계천변이었다. 개천이 복개된 1970년대에는 대규모 상업, 경제의 중심지로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고 수많은 성공신화와 아울러 근대 도시화 과정의 찌꺼기까지 안고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 도성을 건설할 때, 개천은 도로와 건물의 배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개천(開川, 청계천이 불리던 옛 이름)은 도성 내부를 정확히 양분했기 때문에 서울의 설계에 기본적인 제약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궁궐과 종묘사직, 주요 관청이 모두 개천 이북에 들어서고, 이남으로는 중하층민 지대가 들어서면서 개천을 기준으로 상하 이원적인 공간질서가 만들어졌다. 개천은 동서로, 지천은 대개 남북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에 물길의 흐름에 따라 대로는 동서방향, 중로는 남북 방향이라는 서울의 특징적인 도로망이 만들어졌고 이는 현재 강북 도심 지역의 도로망에 그대로 남아 있다.
개천은 지리적 구분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선이 되었다. 오늘날 한강이 강남, 강북을 나누듯 조선의 개천은 한양의 남북을 나누어 서로 다른 풍속을 낳았다. 개천 북쪽은 이른바 우대(북촌)로 권력을 쥔 양반이 남쪽은 아래대(남촌)로 몰락한 양반이나 장인, 상인들의 터전이었다. 또한 북촌은 노론 세도가들이, 남촌에는 소론 이하 중인층이 거주했다.
조선 시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서울 유입 인구는 점점 늘어났는데, 일단 서울에 온 사람들은 천변에 모여 살았던 것 같다. 이들은 천변 도로를 침범해 집을 짓곤 했는데, 영조는 준천과 석축 공사를 한 후 천변 곳곳을 택지로 만들어 유민(流民)들이 거주하게 했다. 개천변의 시전에는 돈이 오가고 호사스런 살림이 펼쳐졌지만, 다리 아래 그늘진 곳은 거지들의 생활터전이었다. 높고 낮은 곳, 어둡고 밝은 곳이 공존했던 개천의 풍경이다.
제2장 개천을 통해 본 조선의 치세관
조선 시대 개천은 도성의 중심부를 관류하며 오랜 세월동안 역사와 문화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개천의 준천(濬川) 문제는 당시에도 중요한 민생 현안의 하나였고, 정치적 지배 세력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초기의 태종ㆍ세종, 후기의 영ㆍ정조 대에 활발한 논의와 실천이 있었는데, 그 논의의 핵심은 언제나 민생 보호(위민 ; 爲民)인가, 민생 침해(노민 : 勞民)인가 하는 문제였다. 민생을 위한 준천이 백성의 노역을 부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세대 개천은 우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말라 있는 건천(乾川)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모두 개천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큰비가 오면 매번 홍수피해가 뒤따랐다. 결국 대규모의 민력 동원에 대한 부담으로 미루어지던 개천 준설 공사는 태종 11년에 이르러 이행되었다. 공사를 관장할 개천도감이 설치되고 태종은 공사에 동원되는 역군(役軍)들의 처우에도 세심하게 배려했다.
공사는 종래의 자연 하천에서 일부 구간의 하상을 파내 폭을 넓히고, 제방을 쌓고 나무나 흙으로 되어 있던 다리를 석교로 교체하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대대적인 공사를 했으나 다음해부터 다시 개천은 범람하고 수해가 이어졌다. 지천과 세천은 그대로 두고 주로 개천 본류에 대한 정비였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태종 자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백성을 너무 자주 동원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재위 중에는 다시 공역(工役)을 일으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태종 때의 개천 공사는 도성의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한 기본 대책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때 만들어진 개천은 6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청계천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의 중심부를 관류하며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아아, 개천을 준설하는 일은 다른 토목 공사와는 전혀 비교도 안 된다. 첫째도 백성을 위함이요, 둘째도 백성을 위함이니 그저 한번 지나가는 명령으로 시행하는 것뿐이라면 어찌 마음속으로 근심하겠는가. 이와 같은 큰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처음에는 명령하여 너희들을 위하고자 했으나 말을 떼지 못하고 시행하여 너희들을 위하고자 했으나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위는 영조가 방민들에게 준천에 앞서 유시한 내용이다. 조선 초기의 준천은 새 도읍의 면모 일신, 풍수설에 따른 명당에 대한 욕구 등 여타 동기가 혼재되어 있는데 반해, 영조의 준천 시행 동기는 수환 예방을 위한 순수한 치수 사업이었다. 이로서 영조는 여러 명분론에 묶여서 300여 년이나 시행되지 못한 민생 현안인 준천을 이행하고 도시로 몰려든 유민 구호 사업과 안정적 주거지 확보 사업의 효과를 실현했다.
영조는 개천 공사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담은 『준천사실』(濬川事實)이란 기록을 남겨 후대에 개천 준설 때 지평의 표준을 삼도록 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영조는 공사 결정전에 8년 동안 하천 주변 백성들의 민생을 두루 고려하고 지역 대표자들의 의견을 모으고 공사의 타당성을 따진 뒤에 20만 명을 ??참여??시켜 공사를 벌였다. 조선 영조대의 위민 사상이 오늘날 서구의 사상의 유입으로만 알았던 민주주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는 대목이다.
제3장 조선왕조 준천의 배경이 된 정치사상
개천의 준천이라는 공통된 민생 문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내용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 왔다. 정치, 행정 방식, 준천 사업의 정당화를 위해 동원된 위민 담론의 차이들은 그 시대를 이끌어간 사상적 흐름에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민본정치사상의 세 주체인 천(天:정당성의 근거)ㆍ군(君:지배 주체)ㆍ민(民:피지배계층) 관계의 변화에 관한 의미 변화가 역사 속의 준천 과정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건국 초기인 태종과 세종시대는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고 정권 교체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쇄신할 현실주의적 정치관이 대세를 이뤘다. 때문에 정도전과 하륜 등 관학파는 적극적인 수재예방과 개천관리로 민심을 다독거려 정권을 수성(守城)해야 했다. 결국 대규모 청계천 보수 사업이 이어졌다.
반면 관학파의 권력화와 부패?귀족화 현상에 반발해 지방 향촌을 중심으로 성장한 조선중기 사림파의 집권시기는 대의 명분을 중시하는 주류사상 때문에 위정자의 치수관리가 뒷전으로 밀렸다. 지나친 명분 논리가 전개되는 시대와 현실적 민생 문제인 준천이 소홀해지는 시기가 거의 일치하고 있음은 현대 정치에서도 주목해 볼 만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어 영?정조 시대에 재차 대규모 준천사업이 있었는데, 이는 민생문제 해결을 기치로 한 실학파의 민본정치사상이 정치의 중심에 부상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영조 스스로 자신의 치적이라 내세웠듯이 탕평과 균역, 준천을 그 시대의 대표적 개혁 사업으로 볼 수 있는데, 균역과 준천 사업 모두 그 이면에는 서민 위주의 민본사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제4장 조선의 준천에서 배운다
유교의 민본주의 정치사상은 조선왕조 500년을 지배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 정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근 100여 년 동안 유교에 대한 평가는 식민사관, 근대화론,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주로 비판만 받아 왔다. 그러나 준천 사업의 변화의 예에서만 보더라도 시대와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해온 복잡하고 다면적인 정치사상이었던 유교의 민본주의는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 대상이며 그 속에는 발전적인 민주주의의 미래상을 그리는 열쇠가 들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조의 준천에 나타난 민본 사유와 그 시대의 정치사상적 배경인 실학의 민본정치사상이 통치 권력으로부터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점에서 현재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민주주의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가 봉건적 질곡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확보했다는 진보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통한 다수결 논리의 지나친 정치성, 외적 강제인 법에 의지하여 이해관계의 조정과 공공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제 우리 안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민주주의 정치, 행정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에서 본성에 근거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관계인 가족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민본사상의 유교 공동체 윤리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 정치 사회의 체질과 생리에 더 잘 맞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제5장 청계천 살리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보게, 청계천에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맑은 물이 흐르게 하면 어떨까?”
노교수는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후배 교수에게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이 엉뚱한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 선선했다.
“좋죠. 청계천을 복원하는 건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노교수는 귀가 번쩍 뜨였다. 방금 시원스럽게 대답을 해준 사람은 캐나다에서 ‘물 처리’를 전공하고 돌아온 이 방면 전문가였던 것이다.
이 순간은 역사적인 청계천 복원 사업의 장을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자리에서 의기투합한 연세대 사학과의 이희덕 교수와 환경공학과 노수홍 교수는 곧바로 끊임없이 청계천에 대한 구상을 키워나갔다.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낸 후, 엄청난 교통량을 감당하는 고가도로와 도로를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대부분 시민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소설가 박경리 선생을 가세시켰다. 계속해서 하천 복원에 따른 구조적ㆍ환경적ㆍ생태적 부분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심포지엄을 열고, 나아가 경제적 효과, 사업성, 역사적 유물의 복원, 서울의 고유 문화를 회복하는 방안과 필요성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면서 참여자들은 더 많아졌고, ‘청계천 살리기 연구회’가 출범하였다.
유일하게 해방 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청계천을 어떻게 고민하고 있었던 2001년 당시 서울 시장 후보였던 이명박의 선거 캠프는 이들의 얘기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의 심포지엄에서 청계천 복원 문제를 정치와 연계해서 현실화시키자는 제안을 하였고, 동의를 얻었다. 곧 이명박 캠프에서는 청계천 복원 사업이 중요한 정책으로 채택되어 선거의 방향마저 새롭게 바뀌고 결국 이 공약은 이명박 후보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언론의 관심은 선거와 함께 날로 고조되었고, 시민 여론도 점점 긍정적인 쪽으로 돌아섰다. 양재천 살리기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도 하나의 힘이 되었다. 청계고가는 많은 차량 통행으로 발생하는 배기가스를 지붕처럼 품고 있어 도심 공해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 청계천 복원 논의가 활성화되는 배경에는 이러한 청계천에 대한 부정적 인상과 서울의 열악한 환경 조건이 자리잡고 있었다. 도심 공원과 녹지 공간이 턱없이 부족한 도시인 서울에서 시민들은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제6장 21세기 청계천, 이상과 현실 사이
이명박 서울시장의 당선과 동시에 청계천 복원 사업에 시동이 걸렸다. 이 때부터 청계천 복원 사업은 서울시의 중요한 정책 사업으로 서울시 내부에 청계천 사업을 전담할 추진 본부를 만들어 실제 정책을 집행하게 하고, 시정개발연구원에 각 분야 전문 연구원을 위촉, 청계천 복원 지원연구단을 구성했으며, 120여 명 규모의 민관 합동 시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추진 주체의 이러한 구성은 기존의 정부나 서울시 행정과 매우 구별되는 것이었다. 위원 선정 작업에서 조례 제정에 이르기까지 민간 전문가들과 시민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준비위원들이 직접 만들었던 과정은 그 사실만 가지고도 큰 의의를 지닌다.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작되자 신중을 당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시장의 강력한 추진력은 기대와 염려를 동시에 불러왔고 청계천 일대에 벌써부터 투기의 조짐이 나타나기도 했다 시장은 이러한 우려에 대해 청계천 복원이 강북 경제 활성화를 촉진시킬 것이며 외국인 투자를 적극 유치하겠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청계천 상가 상인들의 이해를 구하는 일은 간단치 않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시민을 대표하는 시민 위원회에서 강조하는 ‘복원’의 입장과 서울시의 ‘개발’ 측면의 입장이 부딪히면서 반대하는 여론을 잠재우고 설득하는 과정에 지대한 역할을 해 오던 천군만마와 같은 시민위원회와의 갈등이 터지는 내부적인 문제마저 발생하였다.
교통, 상인, 쓰레기, 시민 여론 등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삐걱거리고 있었고 처음의 청사진과 조금씩 다르게 진행되는 현실을 맞게된 시민위원회 주축 멤버들도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은 지금 하지 않으면, 청계천 복원의 꿈은 또다시 기약 없이 표류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청계천은 흘러야 했다. 이런 시점에 청계천 복원 사업의 타당성과 우리 세대에 반드시 해야 할 사업이라는 것을 역설한 박경리 선생의 기사는 들끓던 여론을 사업 추진이라는 큰 물줄기로 다시 모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표면으로 떠올라 요동치던 불안감 대신, 그 밑에 숨죽이고 있던 ‘복원에 대한 염원’을 다시 끌어올린 것이다.
제7장 다시 흐르는 청계천
2003년 7월 1일, 청계천 복원 사업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서울과 한국의 개발 시대의 상징이었던 청계고가의 철거는 친환경적 시대, 사람들의 삶의 질이 우선시되는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우려했던 교통, 쓰레기 문제 등은 시민들의 협조와 첨단 공법(다이아몬드 소 공법 : 다이아몬드 칼날 톱이 철근과 콘크리트를 두부 모처럼 자르는 공법)으로 폐기물의 양은 예상보다 적었고, 단시일 내에 끝냄으로서 체감 소음이나 먼지 공해도 크지 않아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공사기간이 단축됨에 따라 영업 방해에 대한 반발이 높았던 상인들과의 문제도 조금씩 풀릴 조짐이 보였다. 청계천 상가 일대를 빼곡이 메우고 있던 노점상 3,000여 명의 생계 대책 요구 투쟁은 거세져갔지만, 서울시는 이들에 대해 더욱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불법을 용인하면 또 다른 불법이 양산될 뿐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동대문운동장에 풍물시장을 마련하여 또 한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역사 복원에 대한 문제는 여러 난제 중에 가장 논란을 많이 샀다. 공사 중 조선 시대의 석축 등이 발굴되고 이들의 훼손이 쟁점이 되면서 복원 논쟁이 가열되었지만 문화재청은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16개 역사학회까지 나서 역사 복원의 의지를 밝힌 성명서를 발표하자 서울시는 광교, 수표교의 복원 방침을 확고히 했다. 치수의 안정성과 관련한 논란에서 ‘청계천 유적’ 사적 지정 예고까지의 과정은 여러 진통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참여와 문제 제기의 과정 속에서 발전된 결론이 나왔다는 데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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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청계천 개발의 논란은 정치, 사회 가치관에 따라 모습을 달리해 왔다. 몇 가지 불편과 각계각층간의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개발의 상징이었던 고가도로를 걷어 내고 맑은 물을 흐르는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다. 앞으로 청계천이 어떤 모습이 될까를 묻는다면, 결국은 그 시대의 국민, 바로 우리 시민들 수준만큼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