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는 고대 역사가들의 기록에서 발굴한 로마 황제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이야기한다.음모와 배신, 광기와 살육, 허영과 탐욕, 사랑과 믿음 사이에서 로마 황제들이 무엇을 꿈꾸고 노력했는지를 알아본다. 영웅의 역사를 연 폭군마리우스에서 세계 최초의 기독교 황제 콘스탄티누스까지, 로마의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인물들의 내밀한 사생활과 심리를 한 편의 이야기로흥미진진하게 풀어내고 있다.
■ 저자 이바르 리스너
독일의 베를린, 괴팅겐,에어랑겐 대학과, 프랑스의 리옹, 소르본 대학에서 언어, 역사, 민속학,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유럽을 비롯해 영연방, 태평양제도, 동아시아의미답지역, 북만주, 북극의 해안 지역 등을 17년 간 여행한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의 주간 화보잡지「파리 마치」 제작에 참여하고,독일의 「크리스탈」지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7년에 사망한 그는 『서양 - 위대한 창조자들의 역사』『옛 사람들은 이렇게살았다』『선사시대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다』『위대한 문화의 수수께끼』 등의 저서를 남겼다.
■ 역자
김지영 -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국제회의 동시통역사 및 독일어 강사,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안미라 - 서강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통역번역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같은 대학원 박사 학위 과정에 입학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공역)를 번역했고,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행하는 계간지「코리아나」번역 팀에서 일하고 있다. 유네스코 산하 UNICA 소속 한국영상예술협회(KVAA)에서 번역과 통역도담당하고 있다.
■ 차례
들어가는 말 - 로마 황제는 누구인가
1. 신화로 남은 로마의 영웅들
01 영웅의 역사를연 라이벌 폭군들 - 마리우스와 술라
02 세상을 지배하는 두 가지 원리 -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03 로마의 가장 위대한 웅변가- 키케로
04 행운과 불행은 늘 함께한다 - 폼페이우스
05 모든 사람이 사랑한 남자 - 카이사르
06 행운이란 무엇인가- 카이사르
07 남자는 어떻게 길들여지는가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08 사랑이란 무엇인가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09 불멸의 기술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2. 희망의 황제들, 절망의 황제들
10 내 연기가볼만했소? - 아우구스투스
11 황제로 살아남는 법 - 티베리우스
12 인간 세계에 태어난 신 - 칼리굴라
13 불행한인간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 클라우디우스
14 로마는 무엇을 원하는가 1 - 네로
15 가장 유명한 황제가 되는 기술 - 네로
16 행복은 어떻게 오는가 - 세네카
17 사람의 마음을 몰랐던 황제 - 갈바
18 관대함이란 무엇인가 - 베스파시아누스
19 로마는 무엇을 원하는가 2 - 티투스
3. 로마를 위한 황제, 황제를 위한 로마
20평화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 트라야누스
21 위대한 황제도 눈물을 흘린다 - 하드리아누스
22 마음의 평온은 어디에서 오는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23 로마인을 사냥한 헤라클레스 - 코모두스
24 권력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25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 카라칼라
26 그들은 꽃에 질식해 죽음을 맞았다 - 엘라가발루스
27 로마의 적은누구인가 -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4. 혼돈을 만든 황제, 세계를 만든 황제
28 누가로마를 이끌 것인가 - 막시미누스 트락스
29 그 많던 로마의 영웅은 다 어디로 갔는가 -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랍스, 갈루스,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30 클레오파트라가 되고 싶었던 여왕 - 제노비아와 아우렐리아누스
31 나는 로마를 위해 악역을 맡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32 믿음! 승리를 위해 필요한 단 하나 - 콘스탄티누스
33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황제 - 콘스탄티누스
주요 인물과 사건
찾아보기(인명)
로마 황제의 발견
세상을 지배하는 두 가지 원리 -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전쟁 영웅 폼페이우스
기원전 106년에 명성 높은 두 명의 사내가 태어났다. 로마의 가장 잘 알려진 연설가이자 변호사인 키케로와 평민 출신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이다. 폼페이우스는 10월 29일 생으로 그의 별자리는 천칭자리였다. 그래서인지 행운과 불행이 저울로 잰 듯 균등하게 그를 따랐다. 폼페이우스의 흉상을 보면 독일의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극히 평범한 사람’ 혹은 ‘부지런한 파수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절대로 그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용감한 군인이었으나 특출하게 유능한 전술가는 아니었다. 그는 항상 보통 사람 이상의 신중함을 보였고 확신이 들 때에만 최종적으로 공격을 결정했다. 폼페이우스는 사리사욕이 없어 정직하고, 정이 많으면서도 냉담하고, 조금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었다. 유연하지 못한 것은 사실 사생활에서만 그랬다. 전쟁터에서는 탁월한 승마 솜씨와 뛰어난 검술을 보여주었다. 폼페이우스는 거칠고 난폭한 성격의 마리우스와 비교하면 덜 투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리우스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둘 다 형편없는 정치가라는 점이다. 마리우스는 우리에게 좀 더 이성적이고 열정적으로 보이는 반면 폼페이우스는 조금 지루하고 단조롭다. 그는 위엄이 있고 격식을 차리지만 순박해 보인다.
폼페이우스는 전쟁터에서는 인기가 많았지만 도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로마 밖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했고 사람들의 부탁을 전부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평범한 시민들과의 접촉을 피했고 가능한 한 공공집회 장소였던 포룸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에너지를 자신의 계획에 집중시키기 위해서라도 남의 일에 얽매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럼에도 폼페이우스는 화술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인격까지 사랑했다. 비록 현존하고 있는 그의 조각상을 보면 그다지 매력적인 것 같지 않지만 상당한 미남이었다고 전해진다.
로마의 갑부 크라수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외모 자체가 이미 돈을 상징했다. 크라수스라는 이름은 ‘뚱뚱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여기에다 ‘부’를 뜻하는 ‘다이비즈(디베스)’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뚱뚱한 부자’였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와 먼 조상들도 이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많은 돈을 물려받아 부자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분명 뚱뚱하지는 않았다. 그는 대식가도 아니었고 맛있는 것을 먹고 즐기는 미식가도 아니었다. 그는 폼페이우스보다 9살이 많았으며 그다지 총명하지 않았고 문학적 소양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군인으로서도 빵점이었다. 그러나 크라수스만큼 적극적이고 고집이 센 사람은 당대에 없었을 것이다.
크라수스는 대투자가였으며, 소위 돈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술라가 몰수한 물건들을 헐값에 사들였다. 건설업에 손을 댔으며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을 지으면서도 비용은 최대한 적게 들도록 신중을 기했다. 그는 약아빠진 은행업자였다. 로마에서 돈이 필요한 사람은 원로원이든 심판관이든 모두 크라수스에게 갔다. 크라수스는 원래 다른 사람들의 법률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법정을 돈으로 매수하여 승소한 후 변호를 의뢰한 고객에게 돈을 받아냈다. 크라수스의 이름이 새겨진 유언장은 기본적으로 위조된 것이라고 보면 되었다. 그러나 특이한 성격의 크라수스는 실제로는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았다.
크라수스의 재산은 그가 죽기 직전 1.7억 세스테르티우스(데나리우스의 4분의 1의 가치를 지닌 동화 단위. 데나리우스는 로마의 은화 단위로 1데나리우스는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음)에 달했으며, 그는 당대 로마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사교성이 뛰어났던 크라수스는 인맥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관심을 둔 로마 시민에게는 직접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넸다. 그는 몹시 상냥했고 사람을 좋아했으며 하루 종일 나서서 온갖 사람들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돈이 걸린 일이라면 아무리 지루하고 인내심이 필요한 사업이라도 상업적 기지를 발휘해서 끝까지 성공시키는 것이 크라수스의 장기였다. 그는 모든 일을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아마도 청력이 좋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로마인의 반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줬지만 자신이 상환금을 정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렇게 하여 로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는 정치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날까지도 그렇지만 사업가에게 정계와의 유착관계는 언젠가 꼭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크라수스는 그에게 유용한 사람, 돈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돈을 빌려주었다.
이러했던 크라수스도 점차 정치적인 욕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치적인 이상이나 노선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권력에 대한 욕심을 품었고 자신의 부, 인맥 그리고 계략에 바탕을 둔 가장 저항이 작은 길을 선택했다. 크라수스는 항상 폼페이우스를 시샘했으나 이러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크라수스는 훌륭한 장사꾼이자 로마의 걸어 다니는 은행이었지만 폼페이우스가 로마 안에 머물고 있을 때만 폼페이우스를 능가할 수 있었다. 로마의 총사령관이었던 폼페이우스는 로마 밖에서 언제나 많은 업적을 세웠기 때문에 로마에 있지 않아도 크라수스보다 더 많은 명성과 권력을 누렸다.
관대함이란 무엇인가 - 베스파시아누스
로마의 역사에는 예수가 태어난 작은 나라가 불쑥불쑥 등장한다. 유대에 널리 확산된 새로운 사상, 즉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데 대한 죄책감을 극복하고 갖게 된 메시아사상은 로마에 위협적이었다. 당시 오리엔트에서는 유대가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수에토니우스는 전한다.
유대인들과 그들의 신이 세계 모든 민족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은 66년부터 팔레스타인의 카에사리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타종교에 대한 증오와 공격의 강도를 점점 높여갔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오래 전부터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온 세계를 정복하리라는 예언을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신적인 정복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로지 실질적 영토의 정복만을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로마와 모든 로마인들 그리고 친로마적인 사람들에게 적대적이었다.
67년,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 58세의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군대의 총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 티투스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유대인들과의 전투에 데려갔다. 그는 갈릴레아(갈릴리)와 사마리아를 점령했다. 그리고 게네사렛 호수(갈릴리 호)에서도 싸웠다. 타보르 산과 요타파타 요새도 로마가 정복했다. 티투스는 그곳 성벽 위에 올라간 최초의 로마인이 되었다.
요타파타는 요세프 벤 마타디아스(천지창조부터 시작하여 66년까지 유대인의 역사를 20권으로 정리한 『유대고대사』의 저자. 이후 요세푸스)라는 제사장이 지키고 있었다. 이곳이 정복당한 후에도 요세푸스는 아무런 동요 없이 로마 진영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로마군에 즉시 체포되어 베스파시아누스 앞에 섰는데, 이 자리에서 아주 중요한 예언을 했다. “당신은 나를 포로로 잡아갈 것이지만 일 년 후 황제가 된 다음 나를 놓아줄 것이다.”
청결하고 모범적인 황제
69년 여름, 가장 위대한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졌다. 베스파시아누스는 7월 1일에 알렉산드리아에 주둔하던 로마군으로부터, 7월 3일에는 유대에 있는 군대로부터 황제로 추대되었다. 사람들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예수가 행했던 것 같은 기적을 기대했다. 이집트에서 소경과 앉은뱅이가 황제에게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찾아왔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런 기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이들을 의관에게 넘겼다. 그러나 친구들은 베스파시아누스를 부추겼다. 그리고 그가 이 둘을 치료하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역사는 전한다. 예수는 “거짓 선지자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이 기적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황제에 대한 존경심은 점점 커졌다.
이 황제에 대해서는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전한다. 그는 로마 군대를 엄격하게 통제했고 황제의 권한이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합법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임명법에 따라 황제의 권한이 부여되었고, 이 법을 새긴 동판이 훗날 로마에서 발견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제2의 아우구스투스’였지만 아우구스투스보다 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연약한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기 때문에 당시 젊은 남자들의 여성스러운 면을 경멸했다. 포마드 향이 나는 젊은이를 향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네도 그냥 마늘 냄새가 났으면 좋겠네.”
네로 통치기의 화재로 인해 여전히 많은 곳이 폐허로 남아 있었던 로마를 베스파시아누스가 재건했다. 그는 직접 첫 번째 화재의 잔해를 치우기 위해 삽을 들었다. 토지를 소유하고도 건물을 짓지 않은 사람들은 건물을 짓고자 하는 사람에게 토지를 몰수당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포룸 근처에 평화의 신전을 세웠고, 네로의 황금궁전이 있던 도심 복판에는 훗날 콜로세움이라 불리게 될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을 세웠다.
황제는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로마를 새롭게 하기 위해 원로원이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노예와 불륜관계를 맺은 모든 여자들은 그 남자 노예의 주인에게 노예로 예속되어야 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로마는 이처럼 모범적인 황제를 만났다. 황제는 청결한 것을 좋아했다. 이것은 이전 황제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일이었다. 로마 시민들의 환호와 놀라움은 끝이 없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복수하지도 않았다. 그는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을 즐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전 황제들과 달리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못했고 궁전 앞에 보초병조차 세우지 않았다. 그는 원형극장에서 맹수들의 싸움은 즐겼지만 사람들의 결투는 싫어했다. 그리고 사형선고를 내려야 할 때면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심지어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가식적인 칭찬과 아첨에 별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자기 신발도 스스로 벗었다. 황제가 스스로 신을 벗는다는 것은 궁궐 안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유머는 나의 힘
황제는 자신을 두고 농담하는 것조차 허용했고 자기를 비판하는 자를 처형하지 않았다. 견유학파(키니코스학파)의 데메트리우스는 재판을 받고 황제를 ‘개’라고 모욕했으나 처벌받지 않았다. 견유학파라는 이름은 이 철학자들이 연구하던 아테네의 키노사르게스(Kynosarges)라는 학당에서 유래했다.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모든 문명을 비판한 견유학파의 또 다른 어원 키온(Kyon)이 그리스어로 ‘개(dog)’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견유학파는 소위 ‘개똥철학’을 하는 학파였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데메트리우스를 처벌하지 않은 것은 ‘너는 개똥철학을 하는 철학자이니 마음껏 짖어라’라는 마음에서였다. 큰 소리로 짖기만 하는 개는 절대로 사람을 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그를 처벌할 필요가 없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구두쇠였다. 황제가 되자마자 이전 황제들이 저질러놓은 일들 때문에 로마시가 파산하지 않도록 8백억 세르테르티우스나 지불해야 했으니, 그가 인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황제는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과 속주들의 납부금을 올렸다. 또한 약삭빠른 사기꾼도 놀랄 만큼 훌륭하게 사업을 했다. 황제는 아내 카이니스를 시켜 흔하지 않은 물건들을 사들였다가 그 물건이 희귀해지면 큰 차액을 남기고 되팔았다. 그는 돈으로 직책을 살 수 있게 해주었고 보석금을 받고 죄수를 석방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은 황제를 ‘참치를 갖고 있는 행상인’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인색하고 이기적인 상인이라는 뜻이다.
로마의 카니발이라 할 수 있는 사투르날리아가 열리면 마임 연기자 파보르가 황제의 행동과 말투를 흉내 냈다. 축제 때는 언제나 그랬다. 이때는 황제의 장례식 장면도 공연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자신의 장례식에 돈이 얼마나 들었냐고 묻자 연기는 1천만 세스테르티우스가 들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황제는 “나에게 10만 세스테르티우스만 주었어도 나를 티베르 강가에 버릴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돈 버는 재주는 세관원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분명했다.
당시 사람의 오줌은 가죽 제품을 만들 때 꼭 필요한 재료였다. 그래서 황제는 배뇨 세금을 거둬들였다. 아들 티투스가 이 세금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자 황제는 금화의 냄새를 맡으며 이렇게 말했다. “배뇨 세금으로 거둬들인 돈이라 냄새가 나니?” 아들은 아니라고 답했다. 바로 이 장면에서 ‘Pecunia non olet(돈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이 탄생했다. 어떻게 벌어들였든 간에 돈은 돈일뿐이라는 말이다. 그렇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생명이 위태로운 매우 큰 병에 걸렸을 때에도 농담을 했다. “아이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신이 되겠구나.”
황제는 중간 키에 건강했지만 외모가 아름답지는 않았다. 얼굴은 항상 소화 장애가 있는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자마자 편지를 읽고 관청의 보고를 받았으며 옷을 입으면서 친구들을 맞이했다. 그는 계속 일을 하거나 외출을 하고 점심때는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나면 냉수 목욕을 즐겼다. 훗날 그가 장 질환을 앓은 것은 너무 차가운 물로 자주 목욕을 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69세의 베스파시아누스는 심각한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국정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를 찾아오는 사절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재판과 판결을 감시했다. 그는 그렇게 누워 있다가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누운 채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는 없다.” 그는 부축하고 있던 신하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담은 마지막 입김을 내뱉고 세상을 떠났다. 정직한 시민이자 사비니족 땅의 아들이자 에트리루아인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69년하고도 7달과 7일을 살았다.
로마인을 사냥한 헤라클레스 - 코모두스
아버지를 배반한 아들
로마는 다섯 명의 훌륭한 군주를 거쳤다. 그러나 역사는 이성과 절제로부터 휴식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마치 역사가 암흑기를 거쳐야만 다시 순환할 수 있듯이 독재와 살인은 또 하나의 행복한 시대를 낳기 위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인이 아닌 로마인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교훈을 남겨주었다. 그런 그가 아들에게는 어떻게 했을까? 아버지의 교훈이 가장 절실했던 사람은 누구보다 바로 그의 아들이 아니었을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그가 입양 제도를 따르지 않은 최초의 황제였다는 사실이다. 로마 황제들의 2세는 대부분 대제국을 책임지기에 자질이 부족했다. 따라서 입양은 황제의 세습을 위한 훌륭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동시대의 가장 훌륭하고 이름 높은 스승들이 아들 코모두스를 가르치도록 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코모두스는 4년 동안 아버지 옆에서 통치를 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때 이미 아들의 무능함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죽었다. 이제 코모두스는 홀로 자신의 큰 군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코모두스에게는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을 제압한 후 그 지역을 평정함으로써 게르만 전쟁에 마침표를 찍는 과제만 남았다. 그러나 젊은 황제는 곧 온갖 좋지 못한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코모두스 옆에는 연극배우와 질 나쁜 젊은이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황제에게 그 미개 지역에서의 전쟁이 극히 위험하다고 말하고 도나우 강 너머의 끔찍한 풍설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결국 코모두스는 게르만족과 매우 관대한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는 선왕이 많은 노력을 들여 차지한 새로운 지방들을 포기했다. 코모두스는 전쟁을 쉽게 그만두었다. 이것은 선친의 정책과는 완전히 달랐다. 코모두스는 아우렐리우스의 오래된 지인들이 충고한 것과는 달리 전쟁에서 후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모두스 황제는 승전행렬과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황제 중 한 명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골칫덩어리 아들은 대로마제국의 모든 보물을 탕진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밤에는 술집과 홍등가를 넘나들었고, 낮에는 범죄자와 그들의 공범자들을 세계 곳곳으로 보내 로마의 속주를 통치하게 했다. 원로원은 그를 증오했지만 그 앞에서는 허리를 굽혀 언제나 그렇듯 아첨을 떨었다. 코모두스 황제는 사람들이 자신을 경멸한다는 것을 느낄수록 더 많은 피를 보려고 했다.
곧 반대파 사람들이 모여 황제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코모두스의 누이인 루킬라, 콰드라투스 그리고 근위대장인 파테르누스가 주범들이었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라는 사람이 암살을 단행하기로 했다. 183년 어느 저녁이었다. 코모두스는 막 원형극장의 좁고 어두운 문을 통과해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폼페이아누스가 칼을 들고 나타나 황제에게 “이 칼은 원로원에서 보낸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보 같은 폼페이아누스는 암살에 성공하지 못하고 붙잡혔다. 폼페이아누스뿐 아니라 콰드라투스와 그 외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황제의 누이인 루킬라는 카프리 섬으로 추방되고 거기에서 죽임을 당했다.
코모두스는 점점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공개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코모두스는 더 이상 사신도 접대하지 않았고 서신도 읽지 않았다. 모든 것은 먼저 아첨꾼 페레니스의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페레니스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누구도 궁전을 드나들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국정 운영은 페레니스가 도맡았고 황제는 오직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다. 코모두스는 모든 연회장을 쫓아다녔고 술에 취해 궁 안에서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수시로 온천을 즐기며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3백 명의 첩들과 향락을 즐겼다. 그 외에도 코모두스는 3백 명의 어린 소년들을 사들여 자신의 기분에 따라 한 명씩 골라냈다.
로마는 칼리굴라, 네로, 비텔리우스, 도미티아누스가 살았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황제의 광기를 참아야 했고 비정상적인 행동에 시달렸다. 황제는 제사를 지낼 때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아레나에서 직접 싸우는 일도 있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가차없이 죽였고 약탈과 범법 행위를 밥먹듯이 했다. 그는 자신의 아내인 크리스피나도 죽였다. 황제의 첩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온갖 희한한 짓을 따라해야 했다. 코모두스는 원로원 의원들과 부유한 여성들,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까지도 제거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충신이었던 페레니스까지 역적으로 몰아세웠다. 군인들은 그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황제에게 총애를 받은 새로운 인물은 클레안데르였다. 그는 사오테루스와 마찬가지로 소아시아의 노예 출신이었다. 클레안데르는 선임자보다 훨씬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야만 했다. 근위대장은 수시로 바뀌었고 속주 지방의 관직은 돈으로만 얻을 수 있었다. 돈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궁 안에서 음모 사슬이 얽히고설켜 이제는 아무도 그것을 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황제는 계속해서 새로운 속죄양을 필요로 했다.
로마의 헤라클레스
기근이 들고 식량난이 닥쳤다. 로마에는 폭동이 일어났다. 클레안데르는 군중들에게 붙잡혀 돌에 맞아 죽었다. 궁 안에 있는 어떤 사람도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다. 클레안데르와 코모두스의 첩들 중 몇 몇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까지도 모두 처형되었다. 율리아누스와 레길루스가 클레안데르의 후계자로 임명되었으나 그들도 곧 죽임을 당했다. 사형집행은 끊이지 않았다. 원로원 의원, 공무원, 궁중 신하와 그 친척들이 피바다를 이뤘다.
황제의 광기와 장난에는 한계가 없었다. 원로원은 이런 황제를 비웃었다. 그들은 황제에게 피우스(경건한 자)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코모두스는 펠릭스, 즉 행운아라는 별명도 얻었다. 경건한 행운아 코모두스는 이제 새로운 희생양을 만들기 위해 자작극을 꾸몄다. 사람들은 고통과 공포의 황제를 로마의 헤라클레스라 불렀다. 코모두스의 조각상들은 하나같이 헤라클레스처럼 사자 털가죽을 두르고 몽둥이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브리타니쿠스(네로에게 독살 당한 의붓형제)라 불렀다. 코모두스는 라누비움 원형극장에서 수많은 야생 동물들을 죽였다. 과대망상에 빠진 황제의 꿈은 로마를 콜로니아 코모디아나(코모두스의 식민지)로 개명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크리스티나로 이름을 바꾼 코모두스의 정부 마르키아가 그에게 이런 생각을 심어주었다. 원로원 의원은 곧바로 이 제안에 동의했다. 황제를 멸시하고 조롱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원로원 의원은 코모두스 황제를 아예 신으로 떠받들었다.
코모두스는 계속해서 헤라클레스 흉내를 냈다. 그는 여자 옷을 두르고 사자와 사슬에 묶인 사람들을 나무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황제는 절름발이들을 뱀으로 변장시키고 화살로 쏴죽이기도 했다. 아니면 공개석상에 검투사로 등장해 자신이 죽인 적들의 수를 영원히 칭송하게 했다. 황제는 별의별 사람들에게 상스러운 별명을 지어주고 이름을 불러대며 키스를 했다. 궁전을 산책하다 근위대장 율리아누스를 수영장에 던져버린 사건도 있었다. 코모두스는 그가 군중 앞에서 발가벗은 채로 춤을 추게 했다.
로마는 코모두스의 놀이터였다. 어느 날 코모두스 황제는 도시를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근위대장 라이타스가 마지막 순간에 황제를 설득하고 그의 계획을 뒤로 물렸다. 라이타스는 로마에게 위협이자 고통인 코모두스 황제를 제거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마르키아와 치밀한 음로를 꾸몄다. 처음에는 황제에게 독약을 먹였지만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지 않자 이번에는 황제의 경기 파트너였던 나르키수스를 동원했다. 그는 황제를 목 졸라 죽였다.
?
로마 시민들은 갈고리를 달라고 소리쳤다. 코모두스 황제의 시신을 갈고리에 매단 다음 티베르 강을 따라 질질 끌고 다닐 작정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황제의 시신은 하드리아누스 선왕의 영묘에 안치되었다. 곳곳에 이 위험천만한 미치광이 황제의 조각상들이 서 있었고, 사방에 검투사이자 ‘영웅’인 코모두스 황제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코모두스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찢어버렸다. 코모두스는 긍정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남긴 것이 없는 황제였다. 그는 어떤 건축물도 세우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들의 건축물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게 했다. 이제 그 이름도 모든 건축물에서 지워졌다. 코모두스 황제가 남긴 것은 심술궂은 얼굴에,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그 위에 금가루를 뿌린 극악무도한 괴물에 대한 끔찍한 기억뿐이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