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

   
앙드레 모로아(역자 : 신용석)
ǻ
기린원
   
15000
1997�� 08��



■ 책 소개
제1차 세계대전중 연합군사령부에서 영국과의 연락장교로 복무했던 저자가 편찬한 영국사. 영국의 기원을 시작으로 프랑스계 왕조, 백년전쟁과 농민폭동, 장미전쟁 등 중세의영국사를 정리하고, 이후 튜더왕조, 군주정치의 승리, 의회, 민주정치까지 영국사를 실었다. 

 


 저자 앙드레모로아
프랑스의 소설가, 전기(傳記) 작가(1885~1967). 1885년 프랑스의 엘뵈프에서 태어나 루앙에서 중?고교를마치고 『행복론』의 저자며 철학자인 알랭의 제자로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소설 『브랑블 대령의 침묵』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 섬세한 연애 심리묘사로 문명을 떨친 『사랑의 풍토』 등을 잇달아 발표하고 『바이런』,『투르게네프』 등 전기 작가로도 독보적 경지를 개척했다. 1918년에『브람블 대령(Bramble大領)의 침묵』으로 명성을 얻고, 소설?평론?역사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였다.『프랑스사』등 역사학의 명저를 남겼으며『여기에 나의 꿈이 있다』『감정과 풍습』『인생을 잘 사는 기술』 등의 격조 높은 에세이집도 남겼다. 


 역자신용석

차례
제1부 영국의 기원 
제2부 프랑스계 왕조 
제3부 봉건제도의 성쇠 
제4부 튜더왕조 또는 군주정치의승리 
제5부 의회의 승리 
제6부 군주제와 과두제 
제7부 귀족정치에서 민주정치로




영국사


영국의 기원
영국은 대륙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깔레(Calais) 해변에서는 도버(Dover) 절벽이 잘 보이다. 이러한 입지조건이 언제나 침략자를 유혹하게 된다. 수 천년을 두고 영국은 유럽과 하나의 대륙을 이루고 있었고, 템즈강은 라인강의 지류였었다. 유럽과 너무도 가깝기 때문에 영국인의 사상과 관습은 섬나라적일 수만은 없었다. 오히려 섬나라라는 조건은 자연 현상이라기보다 인위적인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도 최초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침략을 당했고, 쉽사리 침략의 제물이 되기도 했다. 그 시대에는 주로 농경과 목축으로 살고 있었으며 후손들도 선원과 상인이라기보다는 토지에서 생활하는 농민과 목자들이었다. 후세에 이르러 강대한 함대를 만들고 완전히 방비된 바다로 둘러싸이자 그들은 안전을 의식하여 침략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고, 수세기 동안 다른 나라에서는 정책의 초점이었던 군비 증강의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안전한 여건 아래에서 정치제도의 개혁을 시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로마인에 의한 征服
로마인의 점령 방식은 어디서나 비슷했다. 그들은 군단을 신속히 이동할 수 있도록 좋은 도로를 건설하고 상주 수비대를 수용할 요새를 구축했다. 지명의 끝이 체스터(chester) 또는 세스터(cester)로 끝나는 대부분의 도시는 로마군 정복시대의 야영지(castra)였던 곳이다. 복무기간을 마치고 제대한 군인들은 브리튼의 소도시 카물로두눔(Camulodunum, 현재의 Colchester), 베를라뮴(Verulamium, 현재의 St. Albans)에 은퇴하기 시작했다. 링컨, 글로세스터(Gloucester, 요크 등 북부의 도시는 당시의 수비대 주둔지에 불과했다. 런던은 로마 시대에 발전한 도시이다. 로마인은 남북을 연결하는 도로를 이 곳으로 통과하게 했고 주요 간선도로의 하나인 워틀링가(Watling Street)도 런던으로부터 체스터에 이르고 있었다. 좋은 항구인 런던은 보급 기지로 사용되었다.


로마인이 본격적으로 건설한 도시에서는 가로가 직각으로 교차하고 욕장(浴場), 신전, 회의장, 공회당 등이 전통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벽화와 모자이크 바닥은 오르페우스나 아폴론의 옛 이야기를 그린 것이었다. 군인과 관리들은 고국 이탈리아의 양식을 습기가 가득 찬 이 곳에 재현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런던이 캘커타를 영국식으로 꾸몄듯 로마제국의 브리튼은 바스(Bath)에 씨믈라(Simla)같은 완전한 로마식 온천장을 건설했다. 이러한 새로운 생활 양식에 켈트인, 적어도 일부 켈트인은 적응했다. 그들이 압박을 의식했더라면 좀더 반항적이었을 것이나 로마의 정책은 지방 고유의 관습을 존중했고, 위신을 유지하면서 토착민이 스스로 그들의 문명을 따르도록 지도했다. 어느 때나 로마의 이주민은 얼마 안되는 상인, 고리대금업자, 사관, 관리들이어서 그들을 압박할 만한 다수가 아니었다. 병사들은 곧 지방민과 동화했다. 로마 병사와 브리튼 여인사이에 출생해서 주둔지 근방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성인이 되는대로 병사가 되었다. 로마 문명은 민족의 확장이 아니라 문명의 확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평화적 진출 방식을 채택하여 크게 성공한 것은 타키투스(Tacitus) 황제(79~85)의 장인 아그리콜라(Agricola) 였다. 아그리콜라는 직접 자신이 사무처리를 했으며 청렴한 사람을 관리로 임명하는 동시에 징세원의 수탈을 감독하고 켈트인에게 로마인의 생활양식을 권장했다. 그는 욕장과 시장을 건립하는 데 원조를 했고 근면한 지방민을 포상하는 대신 나태한 자를 견책하며 명예를 위한 경쟁심을 이용했다. 추장의 아들들은 로마식으로 교육했으며 그들은 점차로 로마의 복장을 하게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켈트인은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론디니움에서는 라틴어가 사용되었으나 아마도 항구 지방에서는 그리스어, 또는 지중해에서 온 선원들이 사용하는 여러 나라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종교도 브리튼의 로마화를 저지하지는 못했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대했던 로마인은 이민족의 신을 받아들였다. 그들이 드루이드교를 박해하고 완전히 소탕한 것은 정치적 위험성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켈트의 군신(軍神) 테우타테스(Teutates)는 로마의 군신 마르스(Mars)와 동격으로 받들어졌다. 그들은 대도시에 황제, 주피터 그리고 미네르바를 위하여 신전을 건립했다. 로마 병사는 미트라(Mithra)를 숭배했고 런던에서는 이시스(Isis)의 신전이 발견되었다. 그리스도교가 3세기부터 브리튼에 알려진 것은 분명하다.


브리튼의 남부와 중부는 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북부의 점령은 아무 진전도 보이지 않았다. 거친 숲이 우거진 소택지(沼澤地) 변두리에는 반야만인인 브리간트족(Brigantes)이 살고 있었고 그 너머 북부 지방에는 켈트의 한 부족인 픽트(Picts)가 있어 이 두 부족은 평화적인 진출에 대해서도 어디까지나 반항적이었다. 타부족과 융화하지 못하는 비협조적인 그들은 로마화한 여러 켈트 도시의 재화를 약탈하기 위해 여러 번 남침했다가 로마 군대의 진격에 밀려 도망치곤 했다. 아그리콜라는 교묘한 해륙 공동작전으로 그들을 격파했으나 로마군이 스코틀랜드에 진격할 때면 언제나 연장된 병첨선(兵站線)이 차단되기 쉬웠으며 브리간트족이 습격할 때마다 수비대는 전멸하곤 했다. 120년에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가 제6 빅트릭스(Ⅵ Victrix) 군단을 거느리고 브리튼을 직접 정복하러 나가게 된 것은 제9 군단의 전멸 때문이었다. 황제 역시 북부의 정복을 단념하고 라인강과 솔웨이(Solway)만 사이에 14개의 보루를 구축한 토벽, 나중에는 석벽으로 개축된 수비대가 상주하는 방위벽으로 연결함으로써 경계선을 강화했다. 요컨대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반도(叛徒)의 정복을 포기하고,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칼레도니아에서도 그들을 방비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얼마 후에 이 ‘현명한’ 정책이 로마제국의 멸망을 가져왔다.



프랑스계 왕조
통치자로서의 헨리 2세 : 司法과 警察

헨리 2세는 유럽의 모든 궁정의 동정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있어, 이러한 정보를 가지고 오는 여행자들은 빈객으로서 환영을 받았다. 이 무렵 섬나라인 영국은 스페인과 독일의 국내 사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헨리 2세의 궁정은 현물 수입을 소비하면서 왕의 영지를 영국과 프랑스로 이동 순행했다. 블롸의 주교 피터(Peter)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왕의 행렬에는 수많은 배우, 세탁부, 술장수, 과자장수, 창녀, 광대 그리고 여러 패거리들이 떼를 지어 따라 다녔다고 한다. 정신(廷臣)들은 타고 다닐 것이 마땅하지 않고 잠자리도 불편하여 설익은 빵과 군내가 나는 신술을 먹어 가면서 갖은 고생을 다했다. 뿐만 아니라 왕의 일정을 미리 알 수 없었던 것이 가장 곤란한 일이었다. 별안간 정신들도 모르게 목적을 변경하고 이른 새벽에 떠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 중에서도 확고한 질서가 탄생하고 있었다. 도처에서 왕의 법정이 영주의 법정을 침범하고 있었다. 헨리 2세의 의도는 왕실 법정의 지방판인 왕의 법정을 전국에 설치하는 데 있었다. 이것은 왕으로서는 절대 필요한 일이었다. 왕실법정이 항상 이동하기 때문에 가난한 소송관계자들이 그 뒤를 쫓아다녀야 했으며, 심지어는 5년 간이나 뒤따르다가 간신히 판결을 얻은 일도 있었다. 1166년 이후에는 왕실 법정이 매년 일정한 일자에 궁정을 출발해서 일정한 코스로 지방을 순회하게 되었다. 이 순회여행은 격식이 굉장했고 법관들도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그들이 떠나기 전에 일정 기일에 교회영주와 일반영주, 각 촌장, 자유민 4명, 각 도읍의 자유민 12명씩을 소집하라는 영장이 주장에게 보내진다. 그 곳에 도착하게 되면 곧 이들로 구성되는 회의를 주재하여 배심원을 임명하도록 한다. 배심원은 가능한 한 기사를 선임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자유민으로 대신했다.


배심원의 선정절차는 비교적 복잡한 것이었다. 해당 주의 유지들이 4명의 기사를 지명하면 그들이 각 헌드레드(hundred, 마을과 주의 중간 규모)에서 10명의 기사를 지명해서 도합 12명이 그 헌드레드의 배심원단을 구성하게 된다. 법관은 이 배심원에게 여러 문제를 위임했다. 그들은 왕실의 소유권 문제, 왕의 배심원을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개인간의 사건, 그리고 유태인에 관계되는 문제 등에 관한 판결을 내리게 되어 있었다. 때로는 법관과 배심원이 동행하여 감옥을 시찰하고 주장의 행정실태를 보고 받기도 했다. 그 외에 해당 지역의 중죄혐의자를 고발할 의무가 있었고 이를 등한히 하면 벌금형을 받았다. 그 후 고발의 의무는 사람 수가 좀더 많은 대배심원에 속하게 되었고, 소배심원은 고소 사건의 진부만 판단하게 되어 피고인의 보호를 강화하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끓는 물과 벌겋게 단 쇠로 집행하는 위험한 시죄법(試罪法)보다, 증거에 의해서 명백히 판단하는 이웃에 함께 사는 배심원의 재판을 받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헨리 2세는 현명하게도 악인으로 알려져 있는 자는 시죄법으로 무죄가 되었더라도 국외추방을 명령했다. 1215년에는 교황이 물과 불로 하는 시죄법을 금지하여 일반화되었다. 격투로 정하는 시죄법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고 1818년에 살인범이 이 시죄법을 요구했을 때 폐지되었다. 헨리 2세가 이러한 개혁을 촉진한 것은, 국민에게 정당한 사법제도를 부여해야 하겠다는 의도에서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봉건법정이 차지하고 있던 벌금을 출납원에서 징수하려는 뜻에서였다. 왕실법관도 반드시 청렴결백하지만은 않았으며, 매수도 용이했었고 법관의 순회는 사법행정을 강화하는 동시에 가혹한 수단으로 왕실의 소득을 늘리는 데 많이 기여했다. 간접적이기는 했으나, 이로 인하여 상식과 관용의 사상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순회법관제도는 얼마 안되어 어디서나 적용되는 동일한 법률, 즉 관습법(Common Law)을 탄생시켰다. 봉건적이며 대중적인 순회법관은 각 지방의 판례를 따라 재판했으므로, 주를 이동하는 법관은 최선의 판례를 채택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습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관습법이라는 용광로 안에서 용해되었던 것이다. 중앙법정은 여러 선례를 기록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앞선 재판의 기록에 따라서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많은 판례를 포함하는 전국적인 법제가 형성되었다. 관습법과 동시에 평형법정(平衡法廷, Equity Court)이라는 보완제도가 생기게 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것은 국왕의 대권에 의해서 판례에 따르는 재판을 하지 않고 그와 반대로 판례의 부족한 점과 부당한 점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평형의 원칙이란 경우에 따라서는 국왕은 정의를 확보하기 위해 관습법의 경직상태를 타개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봉건제도의 성쇠
최초의 資本家

전쟁과 흑사병이 봉건제도의 체계를 붕괴시키는 동안 길드와 동업조합의 체계도 수축되기 시작했다. 14세기까지는 영국의 주요산물인 양모가 플랜더즈 지방으로 수출되어 그 곳에서 몇 종류의 민간용 조포(粗布)는 직조되었으나 고급모직물의 중요한 제조비결은 여전히 브루주와강 지방 직조공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이 공업이 영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플랜더즈의 도시공민이 영주와 분쟁을 일으켰을 때 프랑스 왕이 영주를 지지했기 때문에 플랜더즈의 기술자들은 조국을 떠나야만 했고, 전통과 기술을 가지고 영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던 것이다.


에드워드 3세는 이 신흥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직물의 수입과 양모의 수출을 동시에 금지했다. 이 조치는 플랜더즈의 파멸을 의미하고 있었다. 플랜더즈는 영국 외에서는 다량의 양모를 구입할 수가 없던 것이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되자 에드워드 3세는 플랜더즈의 동맹자를 만족시켜야 할 정치적 이유가 있었으므로 통상금지를 완화했다. 그러나 보호관세만은 부과하도록 했다. 당시 영국의 모직물 수출세는 2%밖에 안 되었는데 양모 수출세는 33%까지 증액해서 결과적으로 부정거래를 장려한 셈이 되었다. 일부 상인들은 털을 깎지 않은 양을 수출함으로써 법망을 피했으나 의회가 이것마저 금지했다. 에드워드 3세의 계획은 성공하여 직조업이 영국의 주도적 공업이 되었다.


브리스틀(Bristol)의 모직물 상인 윌리엄 캐닌지즈(William Canynges)는 전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경영한 또 하나의 새로운 자본가였다. 영국왕 자신이 튜튼 기사단 단장과 덴마크왕에게 충성심 많은 신하 캐닌지즈의 보호를 요청하는 추천장을 냈다. 그는 브리스틀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 에드워드 4세를 빈객으로 초대했다. 그는 800명의 선원을 고용하고 있었고 자비로 100명의 목수와 석공을 시켜서 교회당을 건립하여 고향에 기부했다. 그는 노후에 교단에 들어가서 웨스트베리(Westbury)대학 학장으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 영국의 대상인들은 점차로 대륙 상업계에서도 한자동맹의 지위를 빼앗게 되었다.


기왕에 영국에서 유태인의 자리를 차지한 롬바르디아와 피렌체의 은행가들이 이번에는 영국 은행가에게 자리를 물려 줄 차례가 되었다. 피렌체의 바르디(Bardi)가는 에드워드 3세와의 거래로 파산하고 말았다. 프랑스 전쟁을 위해서 그들로부터 막대한 군비를 차용한 국왕이 소정기일 내에 상환할 것을 정면으로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백년전쟁은 피렌체의 명문들을 파멸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중립국은 교전국에 융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소득이 없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의 영향을 받아서 부유한 길드도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제 길드에는 평등이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의복과 향연이 지나치게 호화롭게 되어 굉장히 부유한 사람이 아니고는 지탱해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과거에는 조합간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장인들은 자연 앞길이 막히게 되어 악질 간부를 배격하는 노동자 길드를 조직하여 자위책을 찾았다. 두 개의 분명한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재정에 관한 수많은 부정사건이 일어났다. 12세기의 상인은 분명히 비난할 데가 없었다. 물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사람도 몇몇 있었겠지만 사업이 간단하고 통제하기 쉬웠기 때문에 부정도 소규모였던 것이다. 대자본주의와 더불어 재력과 권력의 결탁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졌다.



의회의 승리
국왕과 의회의 충돌

제임스 1세와 의회는 서로 통하는 데가 전혀 없었다. 경박하고 악덕으로 가득찬 궁정에는 간통 정도는 얘깃거리도 안 될 정도로 추문이 들끓고 있었으며 나약하고 다감한 국왕은 총신 없이는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정치가로서의 자질보다도 미모로써 선택된 신하들이었다. 국왕은 이러한 무리들과 국사를 의논했는데 추밀원에서 집행하지 않고 야식 후에나 사냥터에서 해치웠다. 즉위 직후에는 자신이 1605년에 솔즈베리 백작으로 서임한 로버트 세실(Robert Cecil)을 비롯해서 엘리자베스시대의 유능한 고문관을 그대로 거느릴 만큼 현명했었다. 그러나 점차로 권세는 서머셋 백작이 된 로버트 카(Robert Carr)로 넘어가고 그 다음에는 미남인 20대의 조지 빌리어즈(George Villiers)로 옮겨갔다. 빌리어즈는 가난한 명문의 출신이었으며 캔터베리 대주교와 그의 일파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서머셋을 축출하기 위해서 국왕에게 추천한 사람이었다. 빌리어즈는 곧 국왕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는 대종관으로부터 시작해서 가터훈작 기사, 남작, 자작, 후작, 해군장관, 5항 총감, 버킹햄 공작이 되어 제임스 1세와 그의 아들 찰스 1세의 총애를 받는 대신이 되었다.


자신의 의무와 실력을 의식하고 있던 의회에 대하여 제임스 1세는 철없이 왕위의 신권설(神權說)과 세습제를 강요할 의도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영국으로서는 신기한 견해였다. 영국에서는 국가의 안전보장이 필요할 때에는 세습제보다도 추밀원의 선정, 그 다음으로는 의회의 결정이 더욱 유력했던 것이다.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제임스 1세는 군주제를 논리 정연하게 수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바로 논리 정연하지 않음으로 해서 원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영국같은 나라에서는 평판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 신학자 국왕의 의견에 따르면 국왕은 왕관을 쓰고 성유를 바르기 때문에 비로소 신성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이미 그 이전에 국왕을 선정했고 장래의 국왕까지 축성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회의 권능은 신의 명령을 무조건 기록하는 것뿐이 되는 셈이었다. 제임스 1세는 ‘국왕은 법이다 (Rex est lex)라는 주의로써 스코틀랜드의 교회와 대항하여 승리했으나 이제는 하원을 격분시키고 말았다.


국왕의 추상적인 제도에 하원은 영국의 관습을 내세워 대항했으나 아직 행정권의 감독까지는 주장하지 않았었다. 대역죄를 제외하고는 대신은 아직 한 번도 의회에 대하여 책임을 진일이 없었다. 즉 대신의 행정활동은 의회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국가통치에 관한 일반원칙 즉 법률은 의회를 통한 왕권만이 발포할 수 있었고 이 법에 대해서는 국왕, 대신, 추밀원이 다같이 준수할 의무가 있는 것이었다. 스튜어트 왕조가 집권하자 절대군주제와 의회의 입법권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론상의 정당성만 가지고 말한다면 절대군주제와 제한군주제는 양쪽 모두 적절한 논리적 근거가 있을 것이다. 왕위와 마찬가지로 의회도 국민의 주권을 대표하고 있었다. 튜더 왕조시대에는 국왕이 하원보다도 민의를 대표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 대립은 실제 문제로서 해결되어야 했다. 정치제도는 언제나 국내의 현존하는 각 세력에게 의사표시의 방식을 마련해 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최후의 결단을 내릴 국가의 최고권력을 구축하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후일에 홉즈(Thomas hobbes)가 말하듯이 국가의 주권은 분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조세부과에 대한 시민의 동의가 필요할 때에만 시민의 자유를 존중하게 된다. 프랑스 국왕이 절대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항구적으로 인두세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권세가 강대했던 것은 그녀가 검소한 생활을 했고 드레이크의 공적과 스페인으로부터의 전리품으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1세는 궁정의 사치와 그의 총신들에게 주는 막대한 하사금품 등으로 낭비하는 국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을 회피했으나 매년 60만 파운드를 소비하고 있었다. 수입은 약 40만 파운드밖에 되지 않았고 그중 15만 파운드는 관례적으로 의회가 생활비로 의결하는 양모와 피혁에 부과하는 정액물품세였다. 차액을 보충하기 위해서 제임스는 여러 가지 궁여지책을 강구했다. 유지들의 증여를 권유했고 의무가 수반되기 때문에 기사가 되기를 거절한 지주를 면제해 주기로 하고 거액의 금전을 강제로 징수했다. 그리고 작위와 국유림의 임목을 팔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국왕이 계승해 온 모든 봉건적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연 20만 파운드의 종신연금의 지불을 승인하는 계약을 의회에 제의했다. 의회는 타협안을 일축했고 국왕은 의회를 해산했다. 1614년의 몇 주일을 제외하고는 1611년부터 1621년까지의 10년 동안이나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귀족정치에서 민주정치로
19세기의 대영제국

아메리카 식민지를 상실한 후 영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식민지의 경제적 가치를 부정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식민지에 대한 무관심과 신중성이 강력한 제해권으로 정복할 수 있었던 식민지를 1802년과 1815년 두 차례에 걸쳐 네덜란드와 프랑스에 반환했다는 놀랄만한 관용성을 설명하고 있다. 프랑스에는 서인도 제도, 뉴펀들랜드의 어업권, 기타 각지의 식민지를, 네덜란드에는 자바(Java), 쿠라상(Curacan), 수리남(Surinam) 지방을 반환했다. 그러나 협상에서는 막연한 직감으로나마 특정 지점은 보유하여 적어도 제국으로서의 골격은 확보했다. 인도와 캐나다는 여전히 영제국의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796년에 네덜란드로부터 탈취한 희망봉은 인도항로의 긴요한 정박지였고 지브롤터, 말타, 이오니아는 지중해를 통제하는 요지였다. 남태평양에서는 18세기 후기부터 오스트레일리어에 유형자에 의한 최초의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이리하여 장래의 영제국의 기초작업은 탄탄하게 추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차 세계에 잔재하고 있는 영토가 자유의사로 통합되어 하나의 자치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을 형성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세기 후반 ‘영국 외무성을 당혹하게 만들기 위해서 신이 창조한 대륙’이라는 말까지 생기게 한 아프리카는 유럽 열강에 의하여 촌단분식(寸斷分食)되었다. 1853-1873년 간에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은 탕가니카(Tanganyika)호 지방을 답사했고 스텐리(H.M. Stanley)는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했다. 아프리카에 새로운 영토가 개발되면 독일, 벨기에, 프랑스, 나중에는 이탈리아까지 서로 다투었다. 영국은 공식적으로는 오랫동안 아프리카의 영토전쟁의 권위에 서 있었다. 로디지어, 나이지리아, 케냐, 우간다 등 영국 식민지의 창설은 세실 로즈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회사, 동아프리카 회사 등 대회사가 성취한 것이었다. 이 구식 특허회사 제도를 다시 채택한 것은 조사와 창립에 드는 비용을 자본주의적 기업가에게 부담시키는 것이 제국 정부로서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기업이 실패하면 그만이고 성공하면 정부가 회사를 대치했다. 이리하여 한 부분씩 성장을 하여 아프리카에 일대 제국이 건설되어 세실 로즈는 영국 영토만을 연결해서 희망봉과 카이로를 연결하는 아프리카 종단철도 건설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이 철도는 단 한 곳에서 독일령 동부아프리카에서 착단되게 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이 지방마저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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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는 동인도회사가 무갈(Mogul) 제국의 붕괴 이후 피동적으로 인도 국내의 정복을 계속하게 되었다. 본국으로부터 부임해 온 동인도회사의 사원들은 무정부상태와 기근과 싸우는 데 최선을 다했다. 1832년에 선거법 개정론자들은 인도에도 이 원칙을 적용하기를 희망하고 1833년에 인도헌장(Indian Charter)을 제정하여 폐하의 신민은 종족, 출생, 피부색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대담한 이론이었으나 이것을 적용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1857년, 고대 로마제국처럼 인도내 치안유지를 맡고 있던 토민군(土民軍)이 폭동을 일으켰다. 폭도에 의한 부녀자의 참혹한 학살이 있은 후 가혹한 진압이 유효하게 진행되었다. 영국 정부는 인도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유럽인 수비대가 75,000명으로 증원되었다. 이제 대정복은 끝이 났으며 미얀마와 동부 국경 지대의 전투를 최후로 1885년에 인도는 완전히 정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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