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함께 국어의 역사를 통해서 근대민족국가의 형성 모습을 살펴본다. 언어/국어의 체계화에 개입하는 국가권력을 실상을 드러내고,근대민족국가의 지평 안에서 이데올로기화되고 언어 권력화 된 국어의 모습과 권력과 무관해 보이게끔 위장하며 권력화 되는 양태들을 다양한 사례를통해서 밝히고 있다.
■ 저자 고길섶
1964년 부안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했다. ‘문화연대’편집위원장을 지냈고, 현재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 문화연구 및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우리 시대의 언어게임』(1995)『문화비평과 미시정치』(1998) 『소수문화들의 정치학』(2000) 『어느 소수자의 사유』(2004)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2005)가있다.
■ 차례
1부 해방공간에서 겨울공화국까지
1945년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삐라 공방전’_삐라가뿌려준 새로운 상상력
1945~1948년 미군정이 실시한 ‘문화정치’_뒤바뀐 말, 뒤바뀐 역사
1948년 제주 4?3항쟁과 그후유증_실어증에 걸린 사람들
1948년 ‘국가보안법’ 제정과 반공이데올로기 형성_반공하는 삶
1970년대 국가보안법의 엄격한적용_막걸리 국가보안법
1970년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_전태일이 발견한 말과 세상
1970년대를 울리고 웃긴저항시들_‘오적’이 만들어낸 ‘겨울 공화국’
2부 근대의 탄생 설화
1940년대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민족’쟁탈전_‘민족’을 찾아서
1957년 완성된 ‘조선말 큰사전’편찬사업_가난한 모국어의 탄생
해방 이후 진행된 우리말 ‘표준화 통일’ 작업_근대 지식의 총체, 국어사전
한국전쟁 이후 일어난여성 3인칭대명사 논쟁_‘그녀’로 태어난 근대의 여성
해방 이후 최현배의 한글 풀어쓰기 실험_한글에 불어닥친 ‘서구식 과학화’ 바람
1945~1970년대 유행어와 그 의미_정치와 일상을 가로질러 흐른 유행어
3부 국어 만들기, 역사 만들기
1945년 공용어로 선포된 영어의 보급과 확산_‘‘콩글리시’의 탄생
1945~1948년미군정이 실시한 ‘문맹 퇴치’_‘미군정의 조선 문맹 퇴치기
1945년 미군정이 발표한 ‘한자 폐지’ 정책_‘끝나지 않은 논쟁, 한자폐지론
이승만?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한글전용법’_‘독재자들의 한글 사랑
오락가락 문자정책의 영향과 폐단_‘‘한글세대’ 만들기
1949년 이승만이 일으킨 ‘한글 간소화 파동’_‘맞춤법 신화를 파괴하라!
1963년 표결로 마무리된 ‘말본(문법) 파동’_‘통일문법의 파시즘
1970년대 전개된 ‘국어순화운동’_‘바른말 고운말 이데올로기
스물한 통의 역사 진정서
삐라가 뿌려준 새로운 상상력
‘삐라 하면 떠오르는 추억 한 가지, 삐라 주워서 신고하기. 그러나 우리 현대사, 특히 해방 정국에서 삐라가 한 역할은 실로 컸다. 당시 삐라는 대한민국 건국을 둘러싸고 좌우익이 벌인 첨예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산물이자, 정세 정보를 공유하게 해준 유용한 소통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삐라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다. 민주주의, 진보, 노동계급, 공산주의, 선거, 정부, 대통령‥‥‥ 등등이 모두 이때 삐라를 통해 일상어로 데뷔한 말들이다.
1945년 8월 15일, 직장인? 상인? 농민 할 것 없이 조선 사람들은 일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전날, ‘중대 발표’가 있을 거라는 예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 곳곳에는 “금앨 정오 중대 방송 1억 국민 필청(必廳)”이라고 씌어진 벽보가 나붙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혹 미국이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여 한반도 전체가 전쟁터로 변하는 건 아닐까. 일본이 최후 발악을 하거나, 혹시 항복을?
이날 정오, 사람들은 라디오 앞으로 모여들어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잡음이 심해서 방송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차마 ‘항복’이라는 말을 분명하게 내보낼 수 없어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단순한 기술적 문제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랬을까? 사람들은 방송을 듣고도 일본의 항복을 확신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강한 어조로 일본의 전승을 독려하던 평소와 달리, 잡음과 함께 들려오는 떨리는 음성에서 무언가 중대한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챘다. 기세등등하던 일본 사람들도 풀이 잔뜩 죽어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기대를 품었다.
일본의 항복 사실이 서울에 확실히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인 오후 1시 무렵부터였다. 항복을 알리는 벽고가 경성일보사 앞에 나붙었고, 경성부 근처에서 10여 명의 조선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만세”를 부르며 삐라를 뿌렸다. 가로 18~18.5센티미터, 세로 17.3~17.8센티미터 크기의 빨간 종이에는, 철필로 급히 휘갈겨 쓴 글씨로 ‘조선 노동자 동맹 선언’이라는 제목 아래, “1. 조선 독립 만세 2. 노동자계급 해방 만세 3. 신정부지지 만세”라고 적혀 있었다. 제목을 빼고는 모두 한자로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신정부’란 그로부터 이틀 뒤인 8월 17일 여운형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하는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가리키는 것 같다(여운형 등은 해방 전에 이미 일제의 패망을 감지하고, 총독부와 협상을 벌이며 건준 결성에 착수한 상태였다.). 해방은 이렇게 삐라와 함께 왔다.
거리마다 전신주와 벽보판에는 각종 삐라들이 나붙었고, 미군 비행기가 나타나 삐라를 뿌리고 사라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삐라 줍기에 바빴다. 해방 직후, 삐라는 숨가쁘게 돌아가는 정세를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각 정치 세력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데 삐라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이 언어폭력의 장면들은 짜증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흥분을 일으키기도 하며, 동시에 묘한 재미도 제공한다. 그래서 삐라 속에 담긴 언어폭력은 그 작성자의 의도만큼 대중들에게 ‘심각한’ 호소력을 갖지는 못했을 것 같다.
당시 사람들은 작성자의 절박함과는 거리를 둔 채 삐라를 읽었을 것이다. 내용에 동조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되레 욕을 퍼부으며 “누가 나라 망치는지 모르겠네.”라고 냉소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전 민족의 이름으로”라고 비장하게 선언하는 삐라를 보며, 그 ‘전 민족’에서 자기 이름은 빼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갖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변변한 언론매체가 별로 없던 시절, 각종 언어폭력으로 도배질한 삐라들이 일반대중을 정치적 담론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삐라를 보고 그대로 믿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호기심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다. 이 과정에서 전에는 듣도 보지도 못한 단어들을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막걸리 국가보안법
“술이 왠수”라는 말은 만고의 진리다. 특히 술 마시다가 내뱉은 말 때문에 ‘북괴 찬양고무와 동조’라는 무시무시한 죄명을 뒤집어쓴 이들한테는, ‘막걸리 국보법’의 성립 단계는 이러하다. “김일성보다 더한 놈”은 “그 곳에서 살아보겠다.”는 속마음의 표현이고, 더 나아가 “북한을 선전한 것”으로 둔갑한다. 요컨대, 국가보안법은 박정희 정권이 지배체제 유지 및 재생산을 위해 촘촘히 짜놓은 ‘일상 감시망’이었다. 개인의 자율성과 존엄성, 표현의 자유 등은 모두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폐기처분됐다.
막걸리 한 잔 마시다가, 말 한 마디 잘못해서 잡혀가는 시절이 있었다. 이름하여 ‘막걸리 국가보안법’(또는 ‘막걸리 반공법’)이 판을 치던 시대의 이야기다. 술김에 흥분하여 또는 농담으로 나라꼴을 한탄하거나 통치자를 욕하다, 재수 없이 걸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경찰이나 기관원들에게 잡혀갔다. 그때 덮어씌운 죄목이 국가보안법이었거, 그래서 ‘막걸리 국가보안법’이란 말이 나왔다. 그러나 막걸리 취한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이었다.
그러나 막걸리 국가보안법은 극소수의 ‘범법자’ 처벌보다는, 전체 국민을 감시하는 효과적인 감시 도구로서 더 큰 존재 가치가 있었다. 그 처벌 내용이나 경중과는 무관하게 국민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단어 하나하나를 일일이 점검하고 감시했다는 점에서, 국가보안법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국민들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눌 자유를 유린했다. 국민들은 ‘입을 잘못 놀리지 않기 위해’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했다.
당시 비판적 지식인들은 어쩌면 반독재투쟁을 위한 연막술이거나 보호책으로 반공산주의를 내세웠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공공연하게 ‘반공’과 ‘승공’을 입에 담았다. 이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이다. 독재정권을 상대로 오랜 싸움을 벌이며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 막걸리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 사례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7일에 주한 미국사령관 하지가 선포한 ‘군정포고1호’로 시작된 야간통행금지 조치가 1982년 1월 5일 폐지된 것처럼, 시대의 어둠도 점차 걷히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까지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그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또 설령 국가보안법이 폐지된다 하더라도, 반공이데올로기에 푹 젖어 있던 사람들의 몸과 정신은 쉽사리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빨갱이’라는 말이 파시즘적인 태도를 일컫는 말로 남아 있는 한,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정치와 일상을 가로질러 흐른 유행어
어깨(깡패), 급행료, 날치기, 치맛바람, 형광등, 똘마니……지금도 심심치 않게 듣는 이 말들이 모두 1950년대산 유행어들이다. 유행어는 단순히 시대와 세태의 반영물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꼬집고, 풍자하고, 추종하며, 그것에 저항한다. 유행어는 정말 ‘못 말리는’ 것이어서,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유행어가 있는가 하면, 바로 옆에서 그것에 저항하는 유행어가 설치고 다닌다. 유행어는 현실 반영이자 ‘간섭’이며, 대중이 지닌 언어 능력의 창조이자 실험이다.
해방 이후 쏟아져 나온 유행어들은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가늠해볼 수 있는 ‘힌트’를 준다. 흔히 유행어는 시대와 세태를 반영한다고 하는데, 유행어에는 단순히 반영물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정치와 일상을 가로지르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현실에 간섭한다. 그 간섭 방식은 풍자, 냉소, 비꼼, 꼬집은, 저항, 추종, 말장난, 불신, 욕설, 비유, 유희, 익살 등등 복잡하고 미세하다. 이것들을 관통하는 가장 큰 요소는 ‘재미’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재미가 없는 말은 생명력을 얻지 못하며, 풍자와 저항의 역설적 효과도 생산하지 못한다. 1980년대에 유행한 ‘대머리’(전두환)와 ‘노가리’(노태우)를 떠올려보라. 그 말에는 저항하는 재미가 담겨 있다.
이처럼 유행어는 그것이 아무리 비장한 저항적 담화 속에서 소통된다 할지라도, 인간적 감성과 독특한 말맛을 내뿜는다. 유행어가 반드시 정치적 참여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 담화 속에서 광범위하게 소통된다. 다만 그 강도가 강하든 약하든지 간에, 또는 거의 무관해 보일지라도 유행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소들이 뒤섞이며 만들어지고 소통된다.
해방공간을 지나 정부가 수립되면서 유행어의 생산 방식은 확연히 달라진다. 부정부패와 민중 탄압을 일삼는 지배권력에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부패한 집권자와 위정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고발하는 말들이 많았다. ‘귀하신 몸’이나 ‘사사오입’ ‘가죽잠바’ 따위들이 그러하다. 거기에는 빈정거림, 뒤통수치기, 꼬집기 등이 있다. 그러나 야당 세력을 뺀 일반대중들에게 그것은 현실정치에 대한 직접적 개입이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온 풍자와 유희였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권뿐 아니라 대중들의 삶 속에서 직접 파생된 유행어들이 많았다. ‘자유부인’ ‘오촌오빠’ ‘사바사바’ ‘스타일 버렸다’ 따위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발생지가 다르다고 해서 정치와 일상의 경계가 명확히 그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중들은 정치권에서 발생한 말도 일상생활에서 자유자재로 활용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유행어는 시대 흐름의 물결이었고, 그 물결에는 재미와 풍자와 해학이 담겨 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답답하고 분노가 일어도 항상 재미와 풍자와 해학이 저항과 함께 함으로써 민중들은 자기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김지하는 도둑놈에 분노하여 「오적」을 쓰면서도 “이런 싸가지 없는 놈들”이라며 낄낄거렸고, 저항하는 민중들도 함께 웃었다. 유행어는 비록 우회적인 풍자의 성격을 지녔지만, 삶과 현실을 밀고 나가는 적극적인 참여자였던 것이다. ‘나는 당신의 정신적 남편’이나 ‘객고 푼다’ 같은 말들이 이를 보여준다. 유행어를 단순히 세태나 현실의 ‘반영’으로만 볼 수 없다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사람들이 유행어를 소통시키는 것은 현실의 반영이자 동시에 ‘간섭’이다.
그런데 이러한 간섭 행위가 부당하게도 ‘언어 혼란’ ‘혼탁’ 따위로 비난받기도 했다. 주로 국어순화론자들이 내놓는 이런 비난은 정말 말이란 것이 뭔지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바르고 고운 말’이라는 패러다임은 유행어와 결코 동참할 수 없다. 국어학이나 사회언어학 또는 언어사회학도 유행어에 고운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삶과 결부되며 생산 ?소통되는 언어는 관념적인 표준어를 고집하지 않는다. 삶의 결에 따라 언어의 결도 달라지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 유행어는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준다. 유행어는 권위적이고 획일적인 국어사전을 비웃는다. 유행어는 기존 언어체계를 정면으로 공격한다. 말의 쓰임, 감각, 분위기, 맥락, 분포, 의미를 뒤집어놓는다. 통사론적인 구조마저 건드린다. ‘되민증’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처럼.
유행어는 대중들이 지닌 언어 능력의 창조이자 실험이다. 그 실험에서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는 것도 있지만, 오래 지속되는 것도 있다. 유행어들은 정치와 일상을 가로질러 끊임없이 실험되며, 특정한 정세와 미세한 말맛이 격렬하게 부딪히며, 언어적 ?사회적 변형을 꾀하는 데 참여해왔다. 따라서 유행어는 언어를 혼탁하게 하는 이단자 또는 사생아가 아닌, 언어의 정당한 흐름인 것이다. 말은 사회와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굽이치며 흘러간다.
바른말 고운말 이데올로기
공람, 위계, 감안, 불연, 급사, 잔여‥‥‥. 이 말들의 공통점은 1970년대 국어순화운동으로 일상어에서 사라진 일본말투 혹은 한자말이라는 것이다. 순화운동이 본격 시행된 것은 1976년이었다. 이 운동의 대상은 영어?일본말?한자말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투리?잘못된 발음?틀린 맞춤법?비어?폭언 등 언어생활 전반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국어순화론자들이 말하는 ‘언어 오염’은 기실 사람들이 권력, 추궁, 욕망 등을 표현할 때 쓰는 일종의 ‘전략’이다. 문제는 ‘순화’라는 말로 대중의 욕망을 방해하고, 억압하려 한 지배집단에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 이른바 ‘국어순화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학교에서는 ‘우리말을 사랑하자’ ‘고운 말을 쓰자’ 따위의 구호들이 단골 주훈으로 등장했다. 국어순화운동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벤또’라는 말을 쓸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국어순화운동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동시에 이 운동을 계기로, 우리말은 ‘국어’라는 새로운 지배이데올로기로 다시 태어났다. 해방 직후에는 일본말을 없애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당시에는 ‘국어 순화’라 하지 않고 ‘국어 정화’라고 하여, 일본말 찌꺼기를 말소하고 순 우리말을 되찾는 데 주력했다. 그리하여 ‘스시’를 ‘초밥’으로, ‘오뎅’을 ‘꼬치안주’로, ‘우동’을 ‘가락국수 등으로 고쳐 대중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냉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말들은 차츰 자연스런 우리말로 자리잡았다.
영어와 일본어 외에 국어순화운동의 중요 대상은 한자말이었다.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사용한 말이기는 하나, 특권적이고 어려운 한자말은 쉬운 순 우리말로 고쳐 쓰자는 것이었다. 이는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우리말 도로찾기’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국한문혼용론자들은 한자말을 국어순화운동의 대상에 적극적으로 포함시키지 않고, 오히려 국민학교 때부터 한자 교육을 시행하여 조어력을 풍부하게 하자고 했지만 국어순화운동을 주도한 쪽은 한글전용론자들이었으므로, 한자말은 당연히 순화 대상이 되었다. 또한 국어 순화 자체의 목적이, 일상생활에서 통용되는 말들을 쉽게 고쳐서 모두 알아듣고 사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려운 한자말을 쉬운 우리말로 고치자는 것은 설득력이 있었고 대중적 지지도 받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익숙한 말까지 지나치게 고쳐놓아 언론들의 냉소를 받기도 했다.
물론 곱고 바른 말을 쓰자는데, 어느 누가 반대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국어순화론자들의 문제의식이 지극히 추상적이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들은 ‘품위’ ‘인격’ ‘교양’ ‘정서’ 따위들을 동원하여 국민들을 ‘순화’시키려 했으나, 말들이 현실적으로 사용될 때 형성되는 의미와 권력 생산, 현실 왜곡의 전략적인 수행 방식은 고려하지 않았다. 사회적 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채 순수한 언어적 현실만을 고집하고, 더 나아가 그 언어적 현실마저 왜곡시켜온 국어순화론자들은, ‘올바른 언어생활’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순응하는 국민으로 길들이는 데 기여해왔다.
언어란 사회적 현실과 환경, 욕망과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해방 이후 정치적 부패, 사회적 냉소, 한국전쟁 등의 난리는 사람들의 입을 거칠게 만들었다. ‘공갈 치지 마’ ‘생긴 대로 노네’ ‘그 새끼가 쇼 하고 있어’ ‘통반장 다 해 처먹어라’ ‘여러가지 하고 자빠졌네’ ‘병신도 갑을병’ 따위의 표현들이 과연 이 말들을 하는 사람의 ‘인격’과 일치된다고 할 수 있을까? 국어순화론자들이 행한 중대한 오류는, 언어를 ‘품위 있는 말’과 ‘비천한 말’로 분리한 것이다. 이른바 품위 있는 말들은 표준어라는 선의 지위를, 비천한 말은 금해야 하는 속된 말로서 악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사투리 등 ‘비천한’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저급하다는 이데올로기가 암암리에 유포되었다. ‘언어는 그 사람의 인격을 표시한다.’는 말은 때로는 허구이다.
우리말 도로찾기가 한창이던 해방공간에서,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그리고 국어순화운동이 번졌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말이 ‘오염’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국어의 위기도 그 성격과 형태를 달리 하면서 항상 존재해왔다. 어쩌면 ‘오염’이라고 정의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지식인, 대중, 지배계급, 민중, 개인이 각자의 정서나 입장, 지위, 환경에 따라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강도를 다르게 설정하는 것은 일종의 삶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략에 따라 사용 논리와 의미체계를 각각 다르게 설정하면서, 언어적인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는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언어 속에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미학적?감성적?이데올로기적 층위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중은 그러한 흐름 속에서 언어의 사용을 욕망하고 전략화한다. 우리가 ‘진솔한 말’이라고 할 때, 그것이 반드시 ‘우리말’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정서와 감정 구조가 말 속에 개입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솔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언어란 이미 ‘우리말’이라는 경계를 넘어 언어 일반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는 대중의 언어적 욕망과 전략을 방해하고, 배제하고, 억압하고, 멸시하고, 박탈하고, 관념화하는 지배집단의 지배 전략에 있었다. 국어순화론자들과 역대 집권자들이 수행한 국어순화운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언어의 위기는 대중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만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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