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크게 우리 역사의 신화적인 시대인 가야, 위만조선 등 고대사를 다룬 色다른고대사의 비밀, 공민왕 살해사건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 시대의 이면을 파헤친 色다른 고려사의 뒷모습, 우리의 인식과 다른 조선 시대의숨겨진 모습을 찾아가는 色다른 조선사의 풍경, 우리 역사의 전환점을 되돌아보는 色다른 근현대사의 갈림길 등 4부, 43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여기에 100컷이 넘는 올컬러 사진 자료들은 역사의 현장을 직접 가보는 듯한 느낌을 줄 것이다.
■ 저자 홍하상
단국대학교 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학교단과갑오농민봉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연구의 성과를 전문 연구자 중심에서 벗어나 대중과 함께 나누려고 노력해 왔다. 이 과정에서고정관념이나 편견 없이 역사 현상과 자료를 분석하여 그 뒤에 숨은 의미를 해석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1·2』『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전환기를 이끈 17인의 명암』 『주제로 보는 한국사(고대편, 조선편)』 등의 책을 펴냈다.
■차례
책머리에 - 역사의 상식을 깨는 질문과 숨겨진 진실들
색다른 고대사의 비밀
영산강 유역 대형 독무덤의미스터리 | 근초고왕의 마한 정복설과 백제의 가야 지배설의 진위
위만은 고조선인인가 중국인인가 |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의 허상
서동요의 주인공 선화공주는 과연 누구의 딸인가 | 무왕의 익산천도설 진위와 조작된 설화
대가야의 왕들은 왜 높은 산에 묻혔을까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상징하는 독특한 고분 양식
김수로왕의 부인 허왕후는 정말 인도 사람이었을까 | 허왕후의 출신지론과 가야와 왜의 관계
비류와 온조는 진자 형제였을까 | 백제 시조 형제신화의 탄생과 그 배경
주몽은 정말 하늘의 아들이었나 | 고구려 건국신화에 담겨있는 왕권 신성화 이데올로기
백제는 어떻게 요서지역에 진출했을까 | 백제 대륙진출설의 역사적 당위성
칠지도는 하사품인가 진상품인가| 칠지도 해석 논쟁과 백제의 전성기
장수왕은 왜 거대한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을까 | 선왕의 능비에 숨겨진 정치적 야망
신라는 왜평양을 차지하지 못했나 | 불완전한 삼국통일의 진실과 역사 속 평양의 운명
통일신라 시대 경주의 인구가 정말 100만 명이었을까 |동아시아 무역의 중심국가였던 통일신라
색다른 고려사의 뒷모습
궁예는 왜 미륵불을 자처했나| 왕권 신격화를 위한 상징 조작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적이고 삼국유사는 민족주의적인가 | 한국 고대사 연구의 기본인 두 역사서의 재발견
고려 시대에는 정말로 재혼한 왕비가 있었을까 | 고려 시대의 혼인 풍속과 여성관
고려인들은 왜 크고 못생긴 불상을 만들었을까 |신라 불상보다 못생긴 고려 불상의 의미
고려는 왜 서울을 세 곳이나 두었을까 | 풍수지리설과 현실정치의 상관관계
무신집권기의농민봉기는 과연 반왕조적 투쟁이었나 | 퇴행적인 삼국부흥운동의 성격
무신집권자들은 왜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을까 | 성공한 쿠데타와불완전한 정권
누가 살리타이를 사살했나 | 고려 대몽항전의 진실과 김윤후의 행적
고려의 왕자들은 왜 승려가 되었을까 | 고려왕실의 잉여권력 처리법
고려 시대에는 세곡을 어떻게 개경까지 운반했을까 | 조창과 조운을 통해 본 고려 시대의 물류시스템
누가공민왕을 죽였을까 | 치밀하게 계획된 공민왕 살해사건
색다른 조선사의 풍경
무학이 과연 한양천도를주도했을까 | 한양천도에 숨겨진 태조 이성계의 계획
조선의 건국 세력은 왜 불교를 배척했을까 | 정치적 의도가 깔린 조선의 억불정책
강화도의 팔만대장경은 어떻게 해인사로 옮겨졌을까 | 수로와 육로를 이용한 조선의 물류 경로
신문고는 정말로 백성을 위한 것이었을까| 정적 제거에 이용된 민본정치의 상징
세종은 왜 용비어천가를 지었을까 | 최초의 한글 작품에 숨어 있는 진실
남이 장군은 정말비극적으로 죽은 영웅일까 | 죽은 자를 둘러싼 산 자들의 역사 만들기
조선 시대에는 왜 서원이 많았을까 | 붕당정치의 기반이 왰던 교육의산실
정여립은 정말 반란을 도모했을까 | 역모와 당쟁의 희생양, 정여립
거북선은 과연 무적의 군함인가 | 명장 이순신과 거북선의비밀
장길산은 과연 의적인가 | 소설 속의 의적과 역사 속의 도적
조선 시대의 돈은 누가 그렇게 많이 만들었을까 | 조선 정부의화폐 주조 및 유통의 목적
홍경래의 난은 차별에 대한 항거인가, 역성혁명인가 | 이상세계 건설을 앞세운 대중 선동
연암 박지원은정말 신분해방론자였을까 | 『양반전』에 숨겨진 사대부 지식인의 계급의식
색다른 근현대사의 갈림길
공노비 해산은 신분제 해체를위한 것이었나 | 국가재정과 노비 해산의 상관관계
수많은 농민들이 왜 동학교도가 되었을까 | 새로운 세상에의 열망과 현실의 간극
판소리와 탈춤은 처음부터 민중예술이었나 | 판소리와 탈춤으로 알아본 민중문화의 주도자들
대한제국의 중립화론 외교정책은 실현가능성이 있었나 | 국제정세 속에 빛바랜 대한제국의 정치선언
3·1운동은 어떻게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을까 | 한국인의 국가관과 3·1운동의상관관계
일제는 왜 조선의 궁궐을 파괴했을까 | 일제에 의해 파괴된 국가의 상징
평양은 어떻게 아름다운 계획도시로 탈바꿈했을까 |평양 재건과 주체사상의 함수관계
참고문헌
색다른 우리역사
색다른 고대사의 비밀
위만은 고조선인인가 중국인인가
-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의 허상
한국인에게는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신화가 철옹성처럼 자리 잡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민족적 우월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신화는 역사적 실체와 동떨어진 몰역사적인 인식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중국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당나라는 외국인에게 자유로운 출입국만이 아니라 정착의 권리까지 주었다. 세계의 최강국이었던 로마제국이나 원제국 역시 그러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역사 무대에 등장한 대부분 나라들도 외국인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고대부터 조선왕조의 쇄국정책 이전까지 그러했다. 당시에는 국경 개념이 그다지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한반도에는 삼국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이미 마한으로 대변되는 한(韓)이란 세력이 거주하고 있었다. 뒤이어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중국계 유이민이 옮겨왔는데, 이는 1~2세기의 한반도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는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진한(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진나라의 망명한 사람들로서 고역을 피하여 한국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는 기사에서 확인된다.
이들보다 앞서 “일찍이 조선의 유민들이 이곳에 와서 산곡 간에 헤어져 여섯 촌락을 이루었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조 기사에서 보듯이, 고조선 유민들도 이미 경주지역에 정착해 있었다. 이들이 바로 신라와 가야의 전신이 되는 진한과 변한(弁韓)을 형성한 것이다. 여기에 만주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부여족의 일부도 압록강 북안과 한반도 내로 이주해 오는데, 이 집단이 바로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주도 세력이었다.
앞서 『후한서』가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듯이, 중국계 이주민은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부터 시작해 계속해서 요동반도와 한반도로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결론적으로 말해 위만집단 역시 이들 중국계 이주민 가운데 한 세력이었다. 위만은 고조선에 망명해 그 서쪽 변경에서 세력을 키워 기원전 194년 경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위만의 고조선은 그 손자 우거왕 때까지 이어져 오다가 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 108년에 멸망했다. 흔히 이 기간동안 존속했던 조선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한 시기는 한나라의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유방은 원활한 지방통치를 위해 휘하의 인물을 제후로 임명했는데, 연왕(燕王)에 임명된 노관(盧?)은 유씨 성이 아니면서도 제후에 봉해진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자 노관은 흉노로 망명해 버렸는데, 그 혼란 중에 지금의 북경이 그 중심지였던 연나라 사람들 상당수가 고조선으로 망명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위만이었다.
이런 인물인 위만의 출신지가 중요한 역사적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바로 일제 식민사가들에 의해서였는데, 이들은 ‘단군 조선’은 조직된 신화로 치부해 버리고 중국인의 식민정권인위만조선, 이를 이은 한사군이 바로 한국사의 시작이라고 규정해 버렸다.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듯이 한국은 애초부터 중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해방 후 남한 학계에서는 위만이 중국인이라는 식민사가들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첫째, 위만이 관리로 있던 당시 연나라의 종족 구성이 다양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가 망명할 때 조선족의 습속이던 북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조선옷)을 입었다는 점이다. 셋째, 한 글자로 된 중국식 기호가 아니라 조선이란 나라 이름을 답습한 동시에, 위만 정권 하에도 여전히 토착인, 즉 조선인 가운데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 많았다는 점이다. 남북한 학계에서는 위만이 조선인이기 때문에 위만조선도 당연히 한국사의 영역이라고 규정한다.
색다른 고려사의 뒷모습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적이고 삼국유사는 민족주의적인가
- 한국 고대사 연구의 기본인 두 역사서의 재발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한국 고대사 연구는 거의 불가능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관점에 따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평가하는 데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한마디로 『삼국유사』는 민족주의적인 데 반해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적인 역사서라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과연 사대주의적인 역사서인가? 잘 알려진 대로 『삼국사기』는 1145년(인종 23년)에 간행되었는데, 현재 전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이 책에는 책임편찬자인 김부식(1075~1151)의 역사관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이 책의 역사관 가운데 중요한 것이 사대주의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31개의 사론이 실려 있는데, 그중 선행한 중국의 역사서에 있는 사론을 토대로 작성된 것들이 상당수이다.
『삼국사기』의 사대주의적 측면은 사실을 서술하는 데 있어서도 관철되고 있다. 가령 『삼국사기』 잡지(雜志)제사조의 기사를 보면 “(고구려) 풍속에는 음사가 많아 영성 및 일ㆍ기자ㆍ가한 등의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라는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을 인용했다. 그런데 같은 기록이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 고구려조에는 “그 풍속에는 음사가 많아 영성신ㆍ일신ㆍ가한신ㆍ기사진을 섬긴다”로 되어 있다. 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 『신당서』는 『구당서』의 기사를 축약해 게재하면서도 유독 기자신을 가한신 앞에 위치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구당서』에 표기된 것처럼 가한신은 기자신보다 먼저 기록되어야 한다. 가한신은 고구려의 시조신임이 분명하고 기자신은 평양의 지역신이기 때문이다.
사대 등 명분론에 입각해 편찬된 『신당서』를 인용한 것은 명분론에 근거한 기록을 중요시했다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이처럼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 중화주의자, 즉 사대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러나 김부식은 한국인에게 고유한 전통과 유산을 인식하게 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했다는 점을 분명히 서술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바로 『삼국사기』의 자주적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 영양왕 때 수나라 군사의 침입을 을지문덕이 무찌른 사실이나 신라의 김유신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위압적인 자세에 결전의 태세를 취한 사실 등을 기록한 점 역시 『삼국사기』가 사대적인 역사서라는 평가의 부당함을 말해주는 사례일 것이다.
『삼국사기』가 편찬된 지 140여 년이 지난 1281년(충렬왕 7년)에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한 것 자체가 바로 김부식의 역사관과 역사편찬 체제에 대한 나름의 반발이었다. 『삼국사기』가 지나친 합리성만 추구해서 당시 민간에 널리 퍼져 있던 단군신화와 같은 전승신화들을 모두 배제했으며, 또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남아 있던 『구삼국사』 등의 내용을 합리적이지 못하다 하여 지나치게 개서(改書)했다는 반발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것이다. 일연은 김부식의 역사 편찬 태도에 불만을 갖고 김부식이 사장시킨 단군조선, 위만조선, 낙랑국, 북대방, 남대방, 가야 등에 관한 사항들을 『삼국유사』에 수록했다.
또한 김부식이 ‘기전체’라는 정사 체제를 유지한 데 비해, 일연은 ‘유사’라는 비정형화된 체제를 채택하다 보니 『삼국유사』는 보다 자유롭게 기술될 수 있었다. 『삼국유사』 체제는 『삼국사기』와 달리 주제별로 편성되어 있어, 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기술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삼국유사』가 『삼국사기』보다 재미있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비정형화된 체제와 자유로운 서술방식 때문이다.
『삼국유사』 역시 사대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ㆍ부여ㆍ고구려로 이어지는 단군계의 국가활동보다 기자조선ㆍ위만조선ㆍ한사군ㆍ삼한으로 연결되는 중국계의 국가활동이 더 큰 비중으로 다뤄지고 있다. 특히 마한은 기자조선의 후예가, 진한은 진나라 유민이 세운 것으로 기술하여 삼한의 주도 세력을 중국계로 파악하는 데서 일연의 사대주의자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또한 모든 사실을 기록하는 데에서 그가 신봉한 중국 측 기록을 주요 자료로 삼고, 국내 자료는 이를 보완 설명하는 주석으로 처리하는 정도로 이용한 것에서도 그의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색다른 조선사의 풍경
거북선은 과연 무적의 군함인가
- 명장 이순신과 거북선의 비밀
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타격을 거의 입지 않은 채 20일도 안 되어 서울에 입성했고, 계속해서 평양을 거쳐 함경도까지 북상했다. 이 같은 육지의 참패와는 달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옥포ㆍ당포ㆍ당항포ㆍ부산포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특히 한산도에서는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이순신의 수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수ㆍ륙으로 협공하려는 일본군의 작전을 봉쇄해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이순신의 빛나는 전공은 바로 거북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통념이다.
“거북선은 나는 것처럼 빨랐다”라는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자 기사는 거북선의 재질이 철이 아니었음을 시사해 준다. 동력이 아니라 노를 젓는 무동력선의 재질이 쇠일 경우 나는 것처럼 빠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당시 기술로는 바닷물의 염기에 철이 부식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즉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닌 목선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거북선이 최초의 철갑선이 아니었다고 해서 그 진가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당시 기록들에 따르면 거북선은 조선군에게는 불패의 신화를 남긴 무적의 군함이었지만, 왜군에겐 도저히 격파할 수 없는 불사조였다.
그런데 『선조실록』에는 거북선의 또 다른 이미지, 즉 거북선은 불패의 신화를 남긴 무적의 군함이라는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기록이 보인다. 『선조실록』 39년 12월 24일조에 보이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참모였던 나대용의 증언이 그것이다.
거북선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射手)와 격군(格軍)의 숫자가 판옥선(板屋船)의 125명보다 적지 않고 활쏘기에도 불편하기 때문에 각 영(營)에 한 척씩만을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다. 신이 늘 격군을 줄일 방도를 생각하다가 기해 연간에 감독할 때, 판옥선도 아니고 거북선도 아닌 다른 모양의 배를 만들었는데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았으므로 이름을 창선(槍船)이라 하였다. 격군 42명을 나누어 태우고 바다에 나아가 노를 젓게 하였더니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고 활쏘기의 편리함도 판옥선보다 나았다.
거북선이 실제로 전투에 동원된 것은 모두 세 차례였다. 그것도 임진왜란 초기 전투에만 투입되었다. 당시 거북선은 모두 3척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실제 전투에 동원된 것은 2척에 불과했다. 참고로 전라좌수군의 주전함인 판옥선은 24척이었다. 거북선은 실제 전투에서 그다지 전공(戰功)을 세우지 못했을 분만 아니라 판옥선에 탑승한 군사들에 비해 그 사상자가 훨씬 많았다.
그러면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이룩한 불패 신화의 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사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인들은 단지 섬나라 사람이란 것 외에는 바다에 대해 거의 몰랐을 뿐만 아니라, 해전을 치러본 경험도 없었다. 때문에 일본 수군은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일본 수군은 그 이름과 소속만 달랐을 뿐 육군과 전투기능상의 차이가 없었다. 또한 침략전쟁의 기획자인 풍신수길은 임진왜란 전의 구주(九州)정벌 때처럼 조선침략 전에서도 수군에게는 수송업무의 감독과 운송선의 보호 외에 임무를 주지 않았다. 즉 그는 해상전투가 있을 것이라고 사전에 예상조차 못한 것이다.
조선 수군의 연전연승의 또 다른 동력은 바로 군함과 화력의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일본선의 배 밑바닥은 V자 형으로 원양항해에는 유리하지만 전투시 급히 방향을 바꾸기 어려웠던 반면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은 배 밑바닥이 U자여서 기동력이 뛰어났다. 또 일본 수군은 배에 뛰어올라 싸우는 육박전에 능했지만 조선 수군은 군함에 대포는 물론 여러 대형 총통(銃筒)과 완구(碗口) 등 각종 철포까지 적재했고, 신기전(神機箭)ㆍ화전(火箭) 등의 궁전(弓箭) 등을 보유해 화력에서도 일본 수군을 압도했다. 이것이 바로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연전연승하는 불패의 신화를 이루게 한 것이다. 물론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전략가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색다른 근현대사의 갈림길
3?1운동은 어떻게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을까
- 한국인의 국가관과 3ㆍ1운동의 상관관계
일제하 전국의 모든 사회계층이 참여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항일운동은 3ㆍ1운동이 유일하다. 그런데 3ㆍ1 운동은 고종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919년 1월 22일 오전 6시 덕수궁에서 고종이 세상을 떠났다. 고종은 당시 건강이 비교적 좋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고종의 죽음을 두고 일제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와 궁녀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즉 일제가 한일합병이 한국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문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고자 고종에게 승인을 강요하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독살했다는 소문이 그것이다. 온 국민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
3ㆍ1운동의 준비는 1918년 말부터 시작되었다. 흔히 3ㆍ1운동의 배경으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든다. 그러나 이보다는 일제의 무단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반발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일제의 부당한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ㆍ열사들이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서자, 총독부는 강력한 무단정치를 감행하여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는 한편, 민족 고유문화의 말살, 경제적 침탈 강화로 한국인의 정당한 저항의지 기반을 없애버리려 했다. 그러자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지하로 숨어 비밀리에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종의 국장일은 3월 3일이었다. 전국에서 국장 참배객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민족대표들은 이 같은 많은 인원을 고려하여 항일운동의 거사일을 택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국장 당일의 봉기는 불경스런 일로 간주되었고, 국장 전날인 3월 2일은 일요일이어서 기독교 지도자들이 찬성할 리 없었다. 따라서 결국 3월 1일이 거사일로 결정된 것이다.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곳은 서울뿐 아니라 평양, 의주, 원산 등 이북지방에서도 전개되었다. 이 만세 시위는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으며, 적어도 1200회 이상, 참가인원도 100만 명을 넘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조선인들에겐 국왕이 곧 국가였다. 한국인들은 한일합병으로 국권은 상실했지만 그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비록 허수아비로 전락했지만 국가의 상징인 국왕, 즉 고종이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망국의 정신적 지주이자 국가의 상징인 국왕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제 한국인은 국권 상실이란 현실을 절실하게 받아들였다. 그것도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상실감과 분노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런 한국인의 국왕관이 그들로 하여금 거족적인 항일운동에 나서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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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이유 역시 국가의 상징인 순종의 죽음이라는 매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순종의 죽음은 4월 26일 발표되었다. 순종의 죽음으로 전국이 들끓자 일제는 3ㆍ1 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유언비어와 불온한 행동을 감시하는 등 철저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삼엄한 경계에서도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일에 대규모의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3ㆍ1운동과는 달리 그 참여자절대 다수가 학생이었지만, 순종의 죽음을 계기로 3ㆍ1운동이래 가장 큰 규모의 학생 중심의 항일운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학생 수는 서울에서 210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되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