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학회지와 포럼에서 저자가 발표한 글들, 그리고 KBS에서 제작한 <세계의지성과의 대담&& 프로그램을 비롯한 인터뷰와 좌담회의 녹취록을 수록했다. 냉전 종식 이후 문명권 간의 충돌 내지 대치로 전개되는 새로운세계질서에 있어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명권이 갖는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한다. 특히 중국문화와 서구문화의 관계를 재조명함으로써 모더니티속의 전통을 모색하고,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를 드러내고 있는 서구 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 반론을 제기한다. 또한 서구 문화와 이슬람 문화,유교 문화로 대표되는 중국 문화와 인도 문화 등 주요 문명권 간의 대화 및 상생공간의 창출을 시도한다.
■ 저자 뚜웨이밍
1940년 윈난(雲南)쿤밍(昆明)에서 출생하여, 1968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8년에 미국의 인문예술 및 과학 아카데미에서 원사의영예를 획득했다.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 중국학 종신교수이자 하버드 옌칭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오랫동안 유학, 특히 유가윤리 연구에주력하면서 ‘현대 신유학’의 대표적 학자로 손꼽히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오늘날의 유가윤리』『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인성과자연수양』『유가사상:창조적으로 변화된 인격』『유가 제3기 발전의 방향』『싱가포르의 도전:현대 신유학 윤리와 기업정신』 등이있다.
■ 역자 김태성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외대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6년 현재 호서대 중국어과 겸임교수로 있으며, 중국학 연구공동체인 한성문화연구소대표로 재직 중이다. 또한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과 한국외대, 동덕여대 등에 출강하고 있다.
■ 차례
지은이의 말
1부 세계화 시대, 문명의 대화
1. 대화, 타자의독특한 특성을 이해하는 것
2. 세계화 물결, 중국과 미국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3. 세계화 시대의 문명 대화, 윤리적 지혜와문화적 지혜의 만남
4. 두 가지 화두, 세계화와 다양성의 이해
5. 중국의 부활, 중국의 흥기가 세계에 전하는 메시지
6. 중화 문명과 세계 문명, 주변과 중심·전통과 현대·지방과 세계
2부 신유학의 새로운 사유
7. 오래된 미래 - 유학
8. 유학전통의 현대적 전환, 세계윤리의 기본원칙이 될 수 있는가?
9. 유학의창신, 유학 인문주의의 현대적 의미
10. 동아시아의 흉기, 유교 문명의 현대적·문화적 의의
11. 신유학의 인문주의, 유학인문주의의 생태적 전환
옮긴이의 말
문명들의 대화
1부 세계화 시대, 문명의 대화
대화, 타자의 독특한 특성을 이해하는 것
최근 선생께서는 문명 간의 대화를 얘기하면서 이를 몸소 실천하고 계신데요. 냉전이 종식된 이후의 국제관계에 대해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을 비롯하여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습니다만 선생께서 문명의 대화를 제창하고 실천하시는 배경은 어디에 있나요?
현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자각 여부에 관계없이 자신의 문화심리 또는 문화전통에서 갖가지 서로 다른 문화사상 요소들의 충돌 및 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고대와 현대의 대화, 중국과 서양의 대화를 경험하고 있지만, 대부분 갈등과 충돌이 조성하는 긴장감, 심지어 초조감에 그치고 있지요. 이는 아편전쟁, 특히 중일전쟁과 5.4운동 이후 서양 문화의 충격에 직면해 중화민족의 지식계가 지난 백 년 동안 누대에 걸쳐 부딪쳐온 문제이자, 서양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중국 지식인들이 부딪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대학시절부터 동서문화의 대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93년 헌팅턴이 문명충돌론을 제기했는데 사실 이것은 종교와 철학 등 인문학계에 이미 토론의 열기가 뜨거웠던 주제입니다. 이후 문명 대화의 문제는 학술과 종교의 영역에서 지식계 전체, 심지어 국제정치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현대화란 범속화 또는 세속화 과정으로 신성함에 대한 해체라는 주장이 파생되었습니다.
현대문명은 물질문명이자 도구적 합리성, 실증주의, 과학주의에 속하기 때문에, 인류문명이 종교로부터 철학을 거쳐 다시 과학으로 변화된다는 콩트의 주장과, 현대화는 합리화의 과정이라는 베버의 주장과 유사하지요.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해 인류문명의 발전은 일종의 범속화, 세속화 과정으로, 종교의 힘이 갈수록 축소되고 계몽적 이성이 미신의 어둠을 철저하게 축출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1950년대 이후 학술계에서는 점차 종교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고 갈수록 종교를 더 중시했습니다. 종교의 중요성 뒤에는 문화의 중요성이 감추어져 있었지요.
선생께서 문명의 대화에 관심을 기울이신 게 이른바 문명충돌론에 대한 대응에서 시작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겠군요. 그렇다면 문명의 대화의 본질적인 취지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줄곧 기축시대 문명이 21세기에도 크게 발전할 전망이라면, 그 문명의 중요한 구성 부분인 유학전통은 어째서 20세기 중국에서 그토록 엄청난 압박과 파괴를 당해야 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해왔습니다. 불교, 힌두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들은 21세기에도 계속 발전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는데 왜 중국의 유교와 도교는 그 발판이 더욱 축소되고 있는 것일까요? 이는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제가 알기에, 선생께서는 약 10년 전 세계종교회의가 발기한 전세계윤리제창운동에 참여하셨고 1993년에는 세계종교의회선언, 즉 세계화윤리를 공포하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세계화윤리의 기초로서 문명의 대화는 공동의 가치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지요. 동시에 공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문명의 대화를 전개하기 위한 전제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1948년 야스퍼스가 제시한 개념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기원전에 출현해 이미 2천 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몇 개의 거대 문명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줄곧 일정한 생명력과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가 제시했던, 인류문명의 형성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네 명의 인물은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 예수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마호메트를 추가해야 하겠지요.
이전의 기축시대 문명은 유교 문명에서 생장했건 힌두 문명에서 생장했건, 아니면 기독교 문명이나 이슬람 문명에서 생장했건 간에 생장한 세계와 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의 신앙이나 가치관이 늘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지역에 살고 있든지 뚜렷한 다원화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데다, 각종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갖가지 다양한 가치들이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지요.
지금은 어느 문명에 속하든 간에 다른 문명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기독교 문명에 속한 사람이라 해도, 힌두 문명이나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미래의 기독교 문명의 발전에 어려움이 생길 겁니다. 마찬가지로 유교 문명에 속한 사람들도 다른 문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유교 문명 자체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듭니다. 문명들의 대화는 우리에게 모든 사람들을 진정으로 포용할 수 있는 공동체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입니다.
선생께서 제시하신, 정보화시대에 지혜를 얻는 세 가지 중요한 방법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첫째는 경청의 예술, 둘째는 얼굴을 마주하고 교류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 선인들의 지혜를 중시하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겠지요.
그 가운데 경청의 예술이 제일 어렵습니다. 젊은 세대는 인내심 있게 경청하는 태도가 부족해서 다른 사람의 말이 쉽게 들리지 않습니다.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정보를 장악하려 하기 때문이죠. 정보는 빨리 장악할 수 있겠지만 지혜는 인내심 있는 경청을 필요로 합니다.
두 가지 화두, 세계화와 다양성의 이해
일단 세계화와 지역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의 양분 국면을 벗어나면 우리는 긴밀한 내적 연관관계를 갖는 지구촌을 이루게 된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남과 북, 우리와 그들이라는, 인위적으로 설정된 이분법적 논리를 초월해야만 우리는 인류가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지구’라는 공동체가 개발해낸 풍부하고 다양한 자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종교전통들이 세계 각지 인류의 생활에 진정한 의미를 줄 수 있는 풍부한 자원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들은 앞으로도 인류의 중요한 지혜의 원천으로 작용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종교의 내부에서, 혹은 종교들 사이에 나타나는 충돌이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희망의 세계에 중요한 도전을 던져주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도전은 우리의 지방과 국가 및 지역 공동체의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현실이다.
세계화는 새로운 지식체계를 제공해주었지만 동시에 증거가 필요 없이 자명한 것으로 여겨졌던 전통적 진리를 왜곡하면서 세계화 자체에 대한 신화와 오류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세계화란 정보와 통신 기술의 폭발적 발전, 시장경제의 신속한 확장, 인구의 급격한 변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도시화와 보다 개방된 사회로 발전해가는 기본 추세를 뜻한다.
경제의 세계화로 각국 정부에 대한 거대한 압력을 행사하면서 필연적으로 사회의 개방 정도를 높이게 되는데, 이것은 민주화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하여 국경을 초월한 비정부기구를 대표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시민사회가 갈수록 국가와 지역, 국제사회의 정책결정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중요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일부 공업국가와 개발도상국들은 절대빈곤을 해소하고 평화와 번영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이미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 현재 세계인구의 20%가 총수입의 75%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또 다른 25%는 총수입의 2%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또 전체 인구의 31%가 문맹이고 80%가 주거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10억이 훨씬 넘는 수의 하루 수입이 1달러 미만이고 15억이 청결한 물을 마시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이 세계의 상황이 낙관하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보다 넓은 관점에서 오늘날의 세계화를 바라보아야 한다. 세계화는 절대로 동질화 과정이 아니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비서양 세계가 결국에는 단일한 발전 공식을 따르게 된다는 통념은 지나치게 단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관념은 세계화 추세 속에 나타나는 갖가지 복잡한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다.
다양성과 끊임없이 고양되고 있는 자기정체성을 조성하는 중요한 요인은 세계화가 지역의식과 지역정서, 그 열정과 민감성을 전례 없이 부각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이처럼 강렬한 원초적 유대에 대한 의존의식이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을 각종 세계화 추세의 일환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는 세계화 추세가 가져온 뜻밖의 결과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우리가 반드시 자신의 원초적 유대를 포기하고 세계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은 확실히 현실적이지 못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각종 원초적 유대가 필연적으로 세계정신을 파괴할 것이라는 생각은 해롭기까지 하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인성을 확인하고 나면 우리는 추상적이고 몰개성적인 보편주의에 깜짝 놀랄 것이다. 우리는 다양성이야말로 인류 번영의 필수조건임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
세계 공동체의 도래는 공공의 선이라는 관념을 전제로 한다. 실재하는 것 같지만 허구에 불과한 상상의 지구촌은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라는 단어의 이상적인 정의는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고, 공동의 가치와 실질적인 시민의 도덕을 함께 누리며, 최대한 공익을 실현함으로써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통일체 역시 생활방식의 다양성과 신앙의 차이를 존중해야 하고, 또 이런 다양성의 차이가 타자의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2부 신유학의 새로운 사유
오래된 미래 - 유학
세계 유수 학자들이 동아시아에서 세계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연구를 하고 있는데요. 이 경우 단순히 경제와 정치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문화와 문명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 정치적? 사회적 발전상으로 볼 때 과연 동아시아가 세계에 어떤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또 21세기에 유교 문명을 논하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동아시아, 소위 유교 문화권의 아시아에 새로운 주도권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문화 주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동아시아는 뿌리 깊은 유교 문화의 영향력 아래 있어 왔습니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비전으로서의 유교의 재구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합니다. 그러나 다원론적인 시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새로운 유교적 비전이 21세기의 인류의 생존뿐만 아니라 인류의 번영에 적합한 세계를 만드는 데 똑같이 공헌할 수 있는 다른 비전들과 어떻게 협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유교는 구시대적 유교가 아닌 것 같네요. 자기비판 같은 현대 계몽주의 전통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매우 새로운 형태의 유교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중국에서 유교이념이 해체, 붕괴된 이후 많은 유가 사상가들이 유교전통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유교 전통은 대략 1919년 5.4운동부터 시작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될 때까지 서구적 근대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 30년 동안 유학자들은 자유와 합리성, 인권, 정당한 법 절차, 개인의 존엄성 같은 서구적 가치들을 유교적 사고방식에 봉합시키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지식인들이 정치와 정부 운용 또 여론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한국에서는 공적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져 왔으며, 특히 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받았을 때 의병운동 같은 민족주의 운동과 민중운동의 자극제가 되어 왔습니다. 이런 참여 전통은 최근 들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을 통해서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이런 참여전통의 발전에서 유교가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보시는지요?
잠깐 배경부터 설명할까요? 제가 1980년대에 5개 도시를 대상으로 유교 윤리에 대한 친밀도를 알아보는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조사대상은 서울과 일본의 센다이, 홍콩, 타이페이, 상하이였죠.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장 유교적인 도시는 서울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런지 궁금합니다.
한국 문화의 유교윤리는 양반문화의 전통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식인은 정치에 관심이 많고 사회참여에 적극적이며 문화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로, 그들은 책임감이라는 윤리의식도 배양해야 합니다. 권력과 영향력이 클수록, 정보에 접근하고 교육받을 기회가 많을수록, 사회 전체의 안녕을 위해서 더 큰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는 것이 지식인들에게 요구됩니다. 이런 책임감이 한국 문화와 지식인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 특히 한국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사회의 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힘없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서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정치적 역동성은 자의식이 강하고 헌신적인 학생 및 지식인 계층의 활발한 정치사회적 참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단순히 학원공동체뿐만 아니라 정보와 매스미디어 체계, 모든 지역 계층은 물론이고 환경운동이나 여성운동 같은 사회운동들 역시 한국의 정치적 역동성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들입니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역동성은 참여민주주의라는 비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공자의 후계자인 맹자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이 개념은 국민에 의한이라는 현대적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국민의, 국민을 위한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개념은 현대 정보통신 분야의 발달을 통해 참여민주주의 형태로 발전될 수 있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의지도 충분하며 정치적 구조와 절차 또한 조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유교가 남성우월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시는지요? 어떻게 하면 성적 편견에 기반을 둔 유교적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는 유교적 전통이 스스로의 안위와 생존을 위해 꼭 극복해야 할 시급한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교에도 성적 편견에 기반을 둔 숱한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교 인문주의적 전통 안에서 유교는 가톨릭이나 불교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성별에 따른 구분에 이론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유교 전통 아래서는 능력이 있으면 유교를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집니다. 만약 여성이 뛰어난 유교 고전학자가 된다면 자신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유교 전통을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가족관계라는 측면에는 여전히 유교적 관습에 따른 남녀 간의 역할 구분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역할의 변화는 중국, 특히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두드러집니다. 성역할이 급속히 변화하고 있어 유교인문주의의 특성인 남녀평등은 실현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추세는 유교전통에서는 큰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흉기, 유교 문명의 현대적?문화적 의의
라이샤워는 유학 전통의 영향 아래서 동아시아의 현대성에는 일관된 풍경이 나타나는데 이는 최소한 다음 여섯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①) 시장경제에서 정부의 영도적 지위는 반드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바람직하다. 원칙적으로 정부는 없어서는 안 될 필요악이 아니라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긍정적인 힘으로 간주되고 있다. 정부는 공공의 필요와 민중에 대한 복지의 책임, 사회 전체를 위한 긴장에 순응해야 한다. 때문에 정부는 질서의 창조와 유지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게다가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은, 정부는 법률과 질서의 유지에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적 보장을 해야 하며 민중에게 교육의 기회 또한 보장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② 법률이 사회 안정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구이기는 하지만 단결과 화목은 인애(仁愛)의 교류와 예의를 통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 문명적 행위 방식은 억지로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③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핵심적인 가치들은 가정을 통해 전파된다. 가정 내의 쌍방향적 정위(定位) 관계에는 나이와 성별, 권위, 지위, 등급 등에 따른 차이가 있어 진정한 사람됨을 위한 풍부한 자연환경을 제공한다.
④ 시민사회가 번영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가정보다 상위에, 국가보다 하위에 존재하며 스스로 제작하고 스스로 공연하는 극장이기 때문이 아니다. 시민사회의 내재적 역량은 시민사회와 가정 그리고 국가 간의 동태적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다.
⑤ 교육은 사회의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격의 연마에 있다. 교육은 완정한 인격의 배양에 주력해야 하며 지식과 윤리를 동시에 중시해야 한다.
⑥ 수신(修身)은 제가(齊家)의 바탕이 된다. 따라서 국가의 치리(治理)와 천하태평, 특정사회의 삶의 질은 구성원들의 자기수양 수준에 달려 있다.
물론 이런 사회이상이 동아시아에서 완전하게 실현된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 사회는 늘 유학에 완전히 등을 돌린 채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듯한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관념과 현실 사이의 깊은 골로서 거의 넘을 수 없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유학의 현대성은 현대화가 본질적으로 서구화 또는 미국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사실이 동아시아의 흥기가 구식 모델에서 신식 모델로 대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서양, 특히 미국이 자기의 모습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고, 가르치는 문명인 동시에 배우는 문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내세우고 있다. 유교 동아시아의 흥기가, 현대화가 서로 다른 문화 형식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서양 현대주의가 동아시아 노선의 침식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또 동아시아 노선으로 대체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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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종교의 시각에서 동아시아를 유교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기독교적, 이슬람교적, 불교적이라는 말로 유럽과 중동, 인도, 동남아시아 등의 지역을 지리적?정치적으로 구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모두 유사한 효과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 질서가 슈퍼파워의 횡포를 대신하는 상호배척의 이분법(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직면해, 역사의 종결이나 문명의 충돌, 태평양의 세기 등과 같은 경솔한 결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렵지만 더욱 의미 있는 연구 방향은 세계 공동체 전체가 직면한 정말로 근본적인 윤리 문제들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원적 현대성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의미 있는 깨달음은, 재물과 권력에 미련을 두지 않고도 다 함께 진정한 현대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