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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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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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08��



■ 책 소개
"해방"과 "광복", "위안부"와"공창", "일제시대"와 일제강점기" 등과 같은 역사용어들은 같은 뜻인가 싶으면서도 서로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사람들을 더욱혼동에 빠뜨리게 만들기 일쑤다. 책은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잘못 쓰이거나 경우에 따라 다르게 쓰이는 역사용어들의 올바른 쓰임을 풀이했다. 계간「역사비평」 2005년 겨울호 특집에서 시작하여 2006년 여름호까지 연재된 칼럼 40편을 묶은 책으로 이이화, 서중석 등 사학자 35인이참여하여 40여 개의 용어와 용어군을 일반 독자들의 시선에 맞추어 대중적으로 서술했다.

 


책은 우리가 무심코 쓰는 역사용어의 진실과 현실을 둘러싼 논쟁, 그리고 그 대안을 모색한40편의 글을 통해 올바른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가 관용적으로 써온 잘못된 용어 혹은 의미가 탈색되었거나 제대로 알지못하고 쓰는 역사용어를 엄선하여, 그 대안은 무엇인지, 꼭 알아야 할 역사용어 개념은 어떤 것이 있는지, 어떤 용어들이 논쟁 중에 있는지를자세하게 설명했다. 또한 남과 북 모두의 연구를 수합하여 남북의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처럼 역사학계의 학문적 연구 성과를대중에게 널리 알린 글도 수록되었다.

■ 편저자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 차례
들어가는 글 - 역사용어를 바로 써야 하는이유 _ 한정숙


1. 삼국시대에서 사국시대로 _ 김태식
2. 통일신라시대에서 남북국시대로 _송기호
3. 백성, 평민, 민중 _ 정창렬
4. 신사유람단을 1881년 일본시찰단으로 _ 이이화
5. 기존 개화파 용어에 대한비판 _ 주진오
6. 광무개혁을 둘러싼 논쟁 _ 왕현종
7. 조규와 조약, 무엇이 다른가? _ 김민규
8. 을사조약이 아니라한일외교권위탁조약안이다 _ 이상찬
9. 한국병합인가, 한일합방조약인가? _ 이태진
10. 한말, 개항기, 개화기, 애국계몽기 _이윤상
11. 왜정시대,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 _ 김정인
12. "위안부", 정신대, 공창, 성노예 _ 강정숙
13.친일과 협력 _ 이기훈
14. 민족자본의 개념을 다시 돌아본다 _ 전우용
15. 독립운동인가, 민족해방운동인가? _이기훈
16. 무정부주의와 아나키즘 _ 류시현
17.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_ 류시현
18.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 민족주의,문화민족주의 _ 박찬승
19. 자유민주주의 _ 임대식
20. 해방인가, 광복인가? _ 신주백
21. 반탁은 있었지만, 찬탁은없었다 _ 박태균
22. 소군정은 실재했는가 _ 기광서
23. 중간파인가, 중도파인가, 합작파인가? _ 서중석
24.한국전쟁/6.25를 기억하는 방식: 역사용어와 사유체계의 문제 _ 박명림
25. 정전혐정인가, 휴전협정인가? _ 박태균
26.탈취-노획의 전쟁기록, NARA의 북한 노획문서 컬렉션 _ 정병준
27. "8월종파": 종파, 분파, 당내경쟁 _ 백준기
28.월북과 납북 _ 이신철
29. 동포와 민족 _ 민동택
30. 의사와 열사 _ 은정태
31. 근현대 정치범의 다양한 이름 _최정기
32. 재벌기업과 재벌총수 _ 김기원
33. 양력과 음력 _ 신동원
34. 한의학(漢醫學)과 한의학(韓醫學) _신동원
35. 민족문학, 국민문학, 민족주의문학 _ 하정일
36. "순수문학"이라는 오해 _ 한수영
37. 외국 국가명 표기를바꾸자 _ 김동택
38. 간도, 간도출병 _ 배성준
39. 극동, 동아시아, 동북아시아의 함의 _ 김희교
40. 중국 애국주의의실제: 신중화주의, 중화패권주의, 민족주의 _ 김희교


출전을 밝혀주는 본문의 주
이 책의 집필에 참여하신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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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서 사국시대로” _ 김태식, 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
우리는 보통 한국 고대사를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라는 이름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우리나라의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지탱하고 있었던 시기는 562년부터 660년까지의 98년간이었으므로, 삼국시대를 고집하면 시간적으로 그 이전의 천 년 이상을 버리게 된다. 이는 통일신라시대라고 표현하는 순간에 대동강 이북에서 만주에 이르는 한국 고대의 영토에 대한 기억을 상실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과연 이것을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삼국시대라는 관점은 고려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역사가인 김부식이 1145년에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단 고려시대 사람들의 고대 역사관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려인의 그 인식도 실은 신라인의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이후 삼한과 삼국을 동일시하고 신라가 삼한을 통일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삼한과 삼국을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이다. 또한 우리 역사의 터전에서 명멸했던 고조선, 부여, 가야, 발해 등을 무시하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가야만 보더라도 경상남북도의 낙동강 유역에서 서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남북도의 동부 지역에 이르는 옛 가야 주민의 역사를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그르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 전체의 경험을 시간적?공간적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한백겸(韓百謙)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삼국시대 논리의 허점을 발견해냈다. 즉, 우리 동방은 옛날부터 남북으로 갈라져 있어서, 북쪽에서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사군(四郡)-이부(二府)-고구려로 전개되었고, 남쪽에서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각각 백제, 신라, 가락(가야)으로 계승되었다고 했다. 이 중 가야는 풍부한 부와 기술, 특히 제철 능력에서 나오는 무력과 토기문화의 선진적인 면모로 볼 때, 오랜 기간에 걸친 독자적인 문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가야를 우리는 ‘다른 나라들의 통치를 받던 나라’, ‘약한 나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우리에게 강요된 식민사학의 결과이다. 19세기 말부터 일제의 역사가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신공황후(神功皇后) 삼한 정토 설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왜곡된 사료들을 토대로 하여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주장했다. 즉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고대 왜(倭) 왕권이 가야 지역을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어 남한을 경영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국권을 되찾은 이후 교과서는 바뀌었으나 가야사 부분은 거의 삭제되거나 극도로 축소되었는데, 그것은 일제의 선전에 물들어 스스로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열등감에 빠진 탓이다. 그래서 가야사에 대해서는 거의 거론하지 않으면서 50년이 넘게 흐른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들춰보면, 한국 고대시기의 대부분은 고구려와 백제의 2강과 신라와 가야의 2약이 서로 뒤엉켜 세력 균형을 이루며 전개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삼국시대보다는 사국시대의 용어를 사용해야 하며, 이러한 개념만이 한국 고대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관건이자, 임나일본부설의 망령을 당당하게 물리칠 수 있는 방안이다. 게다가 5세기 초에 전기 가야연맹이 해체될 때에는 수많은 이주민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제철 기술과 단단한 도질 토기인 스에키(須惠器) 제작 기술을 전해주기도 했는데, 일본의 고대 문명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가야는 비록 완성되지 못하고 멸망한 아쉬운 문명이지만, 한국 고대사의 자랑이며 신라가 훗날 통일을 이룰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을사조약이 아니라 한일외교권위탁조약안이다” _ 이상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 외무성에 위탁하고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 사무를 감리하기 위해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조약안이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에 강요되었다. 그렇지만 대한제국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일본은 조약을 성립시킬 수 없었다. 일본에 의해 강요된 이 조약안은 그동안 을사조약, 을사5조약, 을사늑약, 한일협상조약, 제2차 한일협약, 한일신협약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려왔고, ‘강제로 체결’되었다고 서술되어왔다. 이렇게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공식 명칭, 즉 조약 원본의 제목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서울대 규장각)과 일본(외무성 사료관) 두 나라가 가지고 있는 이 조약안의 원본을 보면 첫 페이지 첫 줄이 빈칸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글씨를 쓰지 않아 빈칸으로 남아 있다. 제목을 달지 못한 것이다. 공식 명칭이 없다보니 부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명칭이 달라졌던 것이다.


이 조약안에 대해 일본 측은 ‘한일신협약’ 또는 ‘제2차 한일협약’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왜 일본은 협약을 사용하는 것일까? 협약(Agreement)은 정식조약(Treaty)과 협정(Convention)에 이어 세 번째 등급의 조약이다. 정식 조약은 ① 주권자의 조약 체결 권한 위임, ② 체결 권한을 위임받은 전권대표의 조인, ③ 주권자의 비준이라는 절차를 거쳐야 효력이 발생한다. 그에 비해 협약은 양국 주무대신의 합의와 서명만으로도 효력을 가질 수 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일본은 위탁 조약을 ‘협약’ 등급으로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중요한 주권 일부를 주권자로부터 빼앗아가는 조약을 주무대신의 합의와 서명만으로 체결하는 것이 과연 합법적인가? 게다가 1905년 조약안의 경우 한국 측 대표라고 하는 외부대신 박제순이 조약 체결의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행정 기록이나 위임장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일본 측 대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한일 두 나라의 대표자들은 조약 체결 권한을 위임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05년의 조약안에 대해 때로는 "강제로 체결되었다"라고 쓰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강제이긴 하지만 ‘대한제국 측이 도장을 찍었다. 즉 조인하였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이 도장을 찍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정부 대신들이 좀처럼 도장을 찍으려 하지 않자 드디어 이토의 명령으로 일본인 관리 마에마 교사쿠와 누마노 두 사람이 외부대신의 직인을 훔쳐낸 뒤 이토와 하야시(주한일본공사) 두 사람이 조약안에 외부대신의 직인을 찍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1905년의 조약안은 조인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이 1907년 7월 16일 헤이그 사건 수습 방안(고종이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는 방안)을 고종에게 올렸는데, 그 수습 방안의 첫째가 1905년 11월 7일의 조약에 옥새를 찍어 이를 추인하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를 거부했고, 끝내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내쫓기고 말았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1905년의 조약안은 위임, 조인, 비준의 과정을 어느 것 하나도 거치지 않았다. 즉 체결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강제로 체결되었다"라는 직접적인 표현도 하지 말아야 하고, 그런 의미가 들어 있는 ‘늑약(勒約)’ 등의 표현도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1905년의 조약안의 등급은 그 내용의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협약이 아니라 정식조약이라야 맞는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조인되지 않은 그야말로 ‘안(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1905년 조약안은 잠정적으로 ‘외교권 위탁에 관한 한일조약안(한일외교권위탁조약안)’이나 ‘한일외교감리조약안’으로 부르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무정부주의와 아나키즘” _ 류시현, 고려대 사학과 박사
아나키(anarchy)란 지배자 또는 통치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아나키즘(anarchism)은 일본을 통해 한자 문화권에 수용되면서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로 소개되었고, 오늘날에도 양자는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아나키즘은 정부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나키즘은 정당한 국가란 있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사회 내의 제도들에 대한 모든 정치적?사회적 강제의 폐지를 요구하며, 더 나아가 인간의 인간에 대한 모든 강제적 권위 행사를 부정했다. 따라서 아나키즘이 지향한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이 적정 규모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연대하여 점차 큰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데 있었다. 아나키즘은 이론의 실천 과정에서 테러리즘, 니힐리즘(허무주의)과의 사상적 유사성이 많았고, 양자가 동일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테러리즘은 조직적 역량이 상대적으로 약한 아나키스트가 택한 운동 방식이었다. 또한 인간이 선(善)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아나키즘을 개인의 존재가 강조되는 니힐리즘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식민지라는 상황 속에서 조선의 아나키스트는 테러리즘과 결합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19년 11월에 지린(吉林)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조선의열단’이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을 포함한 혁명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폭력이고, 파괴는 곧 건설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테러는 그 자체가 아니라 민중을 각성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1880년대에 만들어진 ‘무정부주의’라는 번역어는 ‘무정부상태’라는 혼란이 강조된 부정적 의미의 번역어라고 할 수 있다. 천황제 국가인 일본에서 사회주의자와 함께 일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아나키스트는 이른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도전하는 세력이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항한 아나키즘의 목표는 권력을 철폐해서 ‘무정부’ 상황에 놓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분산에 그 주안점이 있었다.


18세기 이후 인류 역사상 국가 단위에서 아나키즘의 이상이 실현된 사례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즘은 인간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전제된 철학이자 이데올로기였으며, 아나키스트는 자신의 열정과 분노로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즉, 아나키즘은 사람 개개인이 스스로의 자율성, 존엄성, 창조성에 근거해 자신의 운명을 가능한 한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계획적으로 조경된 정원도 물론 아름답다. 그렇지만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은 채 꽃은 꽃대로,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끼리, 큰 나무는 큰 나무끼리 어울린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도 존재한다. 개인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강조하는 아나키즘은 오늘날 국가사회주의 붕괴 이후 전일적 체제로 자리잡은 세계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자치, 민주, 환경 등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반탁은 있었지만, 찬탁은 없었다” _ 박태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조교수
찬반탁운동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운동(찬탁)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반탁)을 합친 말이다. 1945년 12월 27일에 결정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이 동아일보에 의해서 ‘신탁통치안’으로 알려지면서 찬성과 반대를 둘러싼 정치적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것을 통칭 ‘찬반탁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반탁운동과 대립했던 ‘찬탁운동’은 반탁운동 진영에서 좌익 정치세력을 비난하기 위해 만든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좌익 정치세력은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으며, 단지 ‘조선 문제에 대한 모스크바 3상협정에 대한 지지’(이하 ‘3상협상 지지’로 약칭)를 주장했다. 이 3상협상의 제3항에 ‘최고 5년을 기한으로 하는 신탁통치의 실시’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3상협상 지지’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는 있지만, 그렇다고 좌익 정치세력이 공개적으로 열강에 의한 신탁통치안을 지지한 예는 없다.


좌익 정치세력이 찬탁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1946년 1월 7일에 있었던 ‘4당 코뮤니케’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반탁운동과 3상협정 지지운동 간의 대립이 점차 심화되자,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그리고 조선인민당의 대표가 모여 3상회의에 대해 힘을 합쳐 대응할 것을 결의했다. 그 결의 내용에 있어, 신탁통치 문제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하여 해결”하도록 한다고 하여,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3상협정안이 곧 신탁통치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동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좌우익의 주요 정당이 참여한 가운데 ‘4당 코뮤니케’가 도출될 수 있었다.


3상협정은 신탁통치안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곧 신탁통치안을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신탁통치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을 제외한다면 조선인이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4당 코뮤니케는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임시정부세력의 방해로 곧 무산되었다. 하지만 3당 코뮤니케는 3상협정안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확인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좌익세력이 신탁통치를 찬성하지 않았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조선공산당의 총비서였던 박헌영이 1946년 1월 5일에 있었던 외국인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3상협정안에 있는 신탁통치안은 제국주의 시대의 침략 의도가 없는 것”이라 주장했고, 이것이 외신에 보도되면서,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우익 정치세력은 박헌영을 비롯해 3상협정을 지지하는 좌익세력을 ‘찬탁운동’ 세력으로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이들을 소련에 국가를 팔아먹는 매국노로 규정했다. 박헌영을 둘러싼 논쟁은 심각한 왜곡과 오해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즉, 반탁운동 주도 우익세력이 3상협정 지지세력을 ‘찬탁운동’ 진영이라고 규정하면서, ‘반탁운동=민족주의=애국운동’, ‘찬탁운동=친소반민족주의=매국운동’이라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 반탁운동에 의해서 전파되기 시작했다.


좌익 정치세력들이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소지는 있었지만 이들이 스스로 신탁통치를 찬성한 사실이 없을뿐더러, 해방 직후 가장 큰 과제였던 친일 잔재 척결 문제에 대해 반대하던 우익의 일부 세력이 반탁운동 진영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반탁운동이 곧 민족주의이며, 애국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 역시 전혀 없다. 오히려 반탁운동은 미국과 소련 간의 협의 사항을 반대하고, 전후의 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의 길을 반대하는 정치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익과 좌익이 정치적 실체를 가지고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좌익과 소련을 비난하면서 그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곧 합의를 통한 통일정보의 수립을 반대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실제로 반탁운동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3상협정안에 있는 신탁통치안을 주장했던 미국은 자신들이 지원하는 우익세력이 반대하는 3상협정안을 계속해서 지지할 수는 없었다. 미국이 계속 주장하는 경우, 3상협정을 지지하는 좌익세력에게 더 유리한 조건이 조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반탁운동에 참여했던 세력이 주류로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후 남한의 모든 교과서는 반탁운동의 해석에 따라 1945년 이후의 정치과정을 해석했으며, 3상협정안의 진실은 50년이 지난 최근에 이르러서야 밝혀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찬반탁운동’은 잘못된 용어이며, ‘3상협정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외국 국가명 표기를 바꾸자” _ 김동택,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우리가 국가의 명칭을 부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해당 국가의 본래 발음을 본떠 한글로 직접 표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자어로 표기된 것을 음역하거나 의역하여 표기하는 것이다.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예를 들어보면, 쿠바, 덴마크, 사모아, 이탈리아, 프랑스와 같은 것들이다.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예를 들어보면 미국(美國), 영국(英國), 중국(中國)과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두 번째 경우이다. 왜냐하면 의역과 음역을 거치는 과정에서 해당 국가들에 대한 이미지가 우리의 마음속에 은연중 새겨져버리는 마술과도 같은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라고 쓰거나 말하는 순간, 실제로는 아무 연관이 없는 ‘아름다운 나라’라는 의미가 마음속에 떠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에는 ‘꽃의 나라’가 된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 국가’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헤게모니 국가에게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경의를 표하게 된다. 설령 그러한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일단 말과 글로 드러나는 순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렇게 받아들일 개연성이 높아진다. 특히 한국의 근현대사와 관련하여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전까지 많은 유학생과 이민자의 아메리칸 드림 속에서, 아메리카, 혹은 유에스에이(U.S.A)는 아름다운 나라로 상상되었을지 모르겠다. 1980년 이후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상상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꾸준하게 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러나 인명이나 지명을 본래 부르는 방식에 따라 한글로 표기한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오랜 관습이나 편의, 그리고 우리 마음속의 지리학에서 아메리카를 미국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문제제기를 못하고 있다. 일찍이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불렀던 대로, 미국이 아메리카나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혹은 유에스에이로 불리기를 기대해본다.


아마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더 오래되고 더 뿌리 깊은 명칭은 ‘중국’일 것이다. 한반도의 역사에서 한자어가 지니는 역사적 특성으로 인해, 그리고 아마도 수백 년 아니, 천 년 이상의 관습 속에서, 혹은 진정한 애정과 흠모의 정신 속에서, 세상의 중심으로서의 중국은 ‘중국(中國)’으로 불려왔다. 하지만 중국어가 고유한 발음체계를 갖고 있는 외국어일 경우, 해당되는 한자어의 인명과 지명은 외국어로 소리나는 대로 표기한다는 원칙을 이제부터라도 따라야 할 것이다. 요즈음에는 모택동을 마오쩌둥으로, 양계초를 량치차오로 부르는 것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유독 중국만은 ‘중국’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런 관습 속에서 중국의 세계의 중심이란 이미지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해서 중국은 ‘쭝궈’로 표기되어야 마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단순한 표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세계와 심상지리, 그리고 역사에 대한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중국이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듯이, 중국이 ‘중국’이 아니라 ‘쭝궈’로 존재하는 그런 세상을 기대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잉글랜드, 러시아, 터키가 더 이상 잉길리, 아라사, 토이기로 불리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불리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것처럼, ‘유에스에이’나 ‘쭝궈’가 더 이상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미국이나 중국이란 표기가 어색해지기를 기대해본다.


“극동, 동아시아, 동북아시아의 함의” _ 김희교, 광운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동쪽 지역을 일컫는 말은 다양하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은 ‘극동’, ‘동아시아’, ‘동북아시아’로 볼 수 있다. 대다수 사람은 이와 같은 지역 정의를 물리적 경계가 분명한 지리적 구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은 지역 구분이 지리적 구분에만 기반하고 있다면, 극동이 있다면 극서가 있어야 할 것이고, 동아시아가 있다면 서아시아뿐만 아니라 북아시아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극서 지역은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북아시아도 잘 쓰이지 않는 지역 범주이다. 이러한 현상에서 알 수 있듯이 결국 지역 정의란 물리적 경계가 분명한 불변적인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그 지역을 구성하는 인자들의 특정한 이해관계와 인식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경계선과 중심 모두가 변할 수밖에 없는 가변적 개념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동쪽 지역은 지역 정의를 둘러싼 정복과 도전의 역사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유럽 중심주의, 문화적?인종적 편견, 그리고 환경결정론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극동(Far East)’이다. 극동은 유럽과 아시아라는 이분법적 권력질서가 더욱 세분화된 지역 분류 속에서 더욱 강조되어 배태돼 있다는 특성을 지닌다. 아시아에서도 변두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동쪽 지역을 일컫는 극동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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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지역을 정의한다는 것은 인간 활동의 결과물이자 동시에 미래를 향한 지향이라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라는 개념은 좀더 분명히 정의하고 사용해야 한다. 더 이상 한?중?일 삼국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럴 필요가 있을 경우는 ‘한?중?일 삼국’으로 사용하면 된다. 실제적으로는 한?중?일 삼국을 의미하면서도 느슨한 문화 개념으로 동남아시아나 동북아시아를 공히 아우르며 은연중에 보다 광범위한 지역을 표상하고자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중심주의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