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 - 크로노스 총서 15

The Age of Napoleon

   
앨리스테어 혼(역자 : 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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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문화사
   
8000
2006�� 05��



■ 책 소개
정복자 혹은 독재자로서 뛰어난군사적 능력이나 정복과 패배의 역사로만 알려진 나폴레옹은 당시 프랑스, 특히 파리를 세계에서 제일가는 도시와 나라로 키우기 위해 애쓴 인물이기도하다.

 


이 책은 『나폴레옹 법전』과 같이 법과 과학 분야에서 이룬 업적, 사회평등 개념과 특권의폐지 등 나폴레옹이 시도한 정책들을 살핀다. 외국과의 전투에서 약탈한 보물로 루브르 박물관을 장식하고, 운하와 개선문을 건설하는 등 파리를예술과 문화의 최고 중심지로 만든 과정도 다루었다. 가구, 드레스 스타일, 문학, 연극, 오페라, 미술, 그리고 서민의 삶 등의 역사를 정리하는방식을 취해 나폴레옹의 일대기는 물론 당대의 역사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 저자 앨리스테어 혼(AlistairHorne)
영어권 국가에서 가장 훌륭한 역사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울프슨 역사상과 호손던 상 등 세계적인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로 2003년 프랑스와 영국 간의 관계에 기여한 공로로 기사작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영광의 대가』『파리의함락』『나폴레옹: 유럽의 지도자 1805∼1807』『야만적인 평화의 전쟁: 알제리 1954∼1962』『아우스터리츠에서 얼마나 멀까? 나폴레옹1805∼1815』『파리의 일곱 시대』 등이 있다.


■ 역자 한은경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6년 현재 서울대 언어교육원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번역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메디치가 이야기』『논리와 추리의 기호학』『기호의 제국』『도시로 읽는 세계사』『최후의 템플 기사단』『제인 오스틴 북클럽』 등이있다.


■ 차례
옮긴이의말/연보/지도


서론
Chapter 1 권력에의 의지
Chapter 2 모든 세대는 다음을꿈꾼다
Chapter 3 운명은 여자다
Chapter 4 영광을 좇아서
Chapter 5 최고의 설계사
Chapter 6칙령으로 지정된 양식(樣式)
Chapter 7 제국의 오락
Chapter 8 낭만주의 이미지
Chapter 9쇠퇴
Chapter 10 라신 가의 카자흐 기병


에필로그: 한 시대의 종말


참고문헌/찾아보기




나폴레옹의 시대


권력에의 의지
나폴레옹은 1785년 브리엔의 혹독한 사관학교에서 16세에 소위로 임관하였다. 8년 후인 1793년에는 영국군을 쫓아내는 승리를 거두는 등 무훈을 세우면서 겨우 24세의 나이에 소장이라는 눈부신 지위에 오르고 이탈리아 국경군의 포병장군이 되었다.


1792년 이후 프랑스는 적국들인 제1회 동맹과 교전상태였는데, 동맹국들은 유럽 전역을 위협하는 혁명의 방향을 바꾸고 프랑스를 이전으로 복구시키겠다는 투지에 불탔다. 전쟁의 운세는 오락가락했다. 혁명군은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지휘관들마저 무능했고, 동맹국 역시 이해관계가 제각각이고 무기력했다. 총과 장비의 보조도 형편없었다.


1793년 라자르 카르노의 천재적인 조직력을 바탕으로 부활한 프랑스군은 최초의 승리에 고무되어 유럽의 모든 ‘억압받는 국가들’에게 혁명을 거행한다는 명분 아래 벨기에를 휩쓸고 네덜란드를 위협했다. 프랑스의 새로운 군대는 제대로 장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확장된 데다가 부패하고 무능한 집정부에서 원조도 받지 못해 결국 라인 강 건너 오스트리아로부터 잇달아 패배를 당하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오스트리아로부터 주도권을 탈환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간 나폴레옹은 며칠 만에 휘하의 군대를 완전히 변형시키고 그 후 18개월 동안 최소 자원으로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1797년 10월 패배한 오스트리아에게 프랑스와의 평화조약을 강요함으로써 제1회 동맹과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승리를 거둔 이 젊은 장군은 프랑스의 우상이 되어 명성을 날리며 파리로 개선한다.


지난 1790년에 헌법의회는 고귀한 이상을 선언했다. “프랑스 국가는 정복의 의도가 담긴 전쟁은 그 어느 것이라도 용납하지 않으며, 누구의 자유라도 방해할 수 있는 데에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업적으로 한껏 우쭐해진 집정부는 혁명을 유지하고 프랑스 국경선을 확보하는 방어 위주의 전쟁에서 탈피하여 팽창과 번영을 위한 전쟁의 유혹을 받게 된다.


나폴레옹은 동양무역에서 영국제국의 요지인 이집트와 지중해 동부에서 전투를 벌여 영국 해군을 공격할 계획을 집정부에 전한다. 그는 단번에 영국과 인도 내 영국제국 간의 생명선을 끊고 알렉산드르 대왕처럼 프랑스의 소유지를 다시 획득하고 인도를 정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작전은 군사적으로 나폴레옹에게 있어 최악의 전투였다.


이후 벌어진 육지전에서 나폴레옹은 연승을 거두었고, 본국 집정부가 정치적으로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여 흔들리고 있을 때 11월 9일 쿠데타를 일으키고 집정부의 통치를 끝장냈다. 자신은 “공화국이 위험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권력에서 물러나겠다”라고 선언, 스스로 제1통령 자리에 올랐다. 루이 14세의 최전성기보다 더 독재권력을 휘두르는 임기 10년의 직위였다.


나폴레옹은 정치력을 굳히고 오스트리아를 징벌하려고 또다시 전쟁길에 나섰다. 공격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고 전쟁의 패자들은 평화조약에서 처벌을 받았다. 그는 종신통령직에 올랐고, 국민투표는 3천5백만 대 8천이라는 절대적인 표로 그를 지지했다. 나폴레옹은 개선장군으로 파리에 돌아와 전쟁으로 고통받는 국가에 평화를 가져온 지도자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절대권력을 손에 넣자마자 위에서 아래까지 철저하게 프랑스 사회의 대변혁을 추구했다. 나폴레옹은 국내문제에서 무엇보다(또한 가장 유명하다) 1789년의 주동자들에 의해 자유를 구속당한 종교를 다시 풀어주기로 했다. 9개월 동안 비밀리에 협상이 오간 끝에 1801년 7월 정교협약이 이루어져 프랑스는 다시 로마 카톨릭교회의 품 안에 들어왔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국가수장으로서 주교 임명권을 보유했고, 주교들은 그 앞에서 서약했다. 정교협약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프랑스인 대다수의 종교’로 재확립되었으며, 동시에 교회의 영적인 권력과 세속적인 권력이 구별되었다. 한편 공포정치가 몰락한 후 무능하고 부패한 집정부가 들어서면서 프랑스는 도덕?군사?정치적으로 진공상태에 빠졌는데, 이제 나폴레옹이 그 자리를 매끄럽게 채워나가게 되었다.


운명은 여자다
1804년 12월 2일 대관식이 끝난 후 파리 시민들은 콩코르드 광장에 특별히 준비된 네 개의 무도장에서 밤새도록 춤을 추었다. 국외에서는 비판의 소리가 거셌다. 빈에서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 나머지 <에로이카>에서 그의 이름을 지웠다.


당시 새로운 나폴레옹 1세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었을까? 그는 로마의 황제들과 샤를마뉴, 성로마제국의 황제들에게 비견될 정도의 권력을 쥐고 있었고, 자신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육체적으로나 지성적으로 최정상의 위치였다. 그는 행동을 향한 본능 덕택에 하나를 정복하면 또 다른 것을 정복하는 쳇바퀴에 올라탈 수 있었다. 전술과 전략 면에서는 적당한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보기 드문 능력도 지녔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능력이 “프랑스인의 기질”에는 어울리지 않는 특징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내가 모든 일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덕목 덕택이었다.”


그는 개인적인 관계에서 무엇보다 자기 이익을 우선시했다. 다소 매력적이지 못한 이 특성이 나폴레옹의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인들과의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마르몽에게 말했다. “운명은 여자다. 여자가 나에게 더 많이 해줄수록 나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는 여성의 역할이 침대와 가족교회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민법전』에 이 여성관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 여성의 권리 대다수가 제거되었다. 그는 자신의 애정생활도 당연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사랑의 열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여성들을 경멸하는 것 같았어도 자신의 열정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의 직업적인 삶까지 영향을 주었다. 물론 조제핀과의 관계가 특히 그러했다. 전쟁이 있건 없건 간에 조제핀은 이 유럽의 최강자에게 몇 년 동안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쇠퇴
나폴레옹의 대륙체제로 러시아는 상업적으로 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더욱이 어쩔 수 없이 모였던 동맹군의 관계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소원해졌다. 나폴레옹은 목을 죄는 듯한 영국 해군을 쳐부수기 위해 스페인과도 결탁한다. 그것이 지금껏 그가 저지른 최대 군사 실수였다. 유럽의 왕들은 모두 나폴레옹의 친척이나 연고자, 기회주의자 들로 구성되었다. 제2차 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산맥의 히틀러처럼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이 고안해낸 산악지대의 게릴라 전법에 패배한다. 결국 프랑스는 병사 25만 명을 잃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이 후계자를 낳지 못하자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딸, 19세의 대공녀 마리 루이즈를 새로운 황후로 맞이했다. 1811년 3월 20일, 황자의 후계자가 태어났다. 나폴레옹 2세이자 불행한 짧은 삶을 살았던 아이글론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로마왕이라 불렀다.


1811년 6월 9일, 노트르담에서 로마왕의 장엄한 세례식이 열린 이후 스페인에서는 소모전이 지속되었고, 오스트리아와의 휴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승전이나 휴전 소식에 군사들의 사기는 점차 높아졌지만 곧 위축되었다. 1810년에는탈주병의 수가 하루에 무려 천 명 이상이었다. 탈주병의 가족들은 벌금으로 총 1억7천만 프랑을 지급해야 했지만 징용을 피하는 기발한 방법은 날로 다양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상류층은 화려한 궁정무도회를 일삼았다.


이 번쩍이는 도시 바닥에는불안이 깊이 깔려 있었다. 기본적인 인간미도 갖추지 못한 황제의 기분을 달래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도시의 재건축에 대한 그의 웅대한 계획도 1805년 이후 지연되었다. 주요 도로는 여전히 더럽고 비위생적이었으며, 샹젤리제 서쪽으로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계획 역시 여러 사건이 이어지면서 아무런 진전도 보이지 못했다. 1805년 이후에는 처음으로 대형 경제위기가 닥치고 식량이 크게 부족해졌다.


1810년 봉쇄와 나폴레옹의 대처의 결과로 미국수출이 10분의 1로 하락했다. 은행 스물여섯 군데가 문을 닫으면서 파산자가 속출했다. 월급은 3분의 1 수준으로 하락하고 의회 위원회는 “노동계층의 고통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하다”라고 선언했다. 흉년이 든 후 폭력을 수반한 러다이즘Luddism : 산업혁명 이후 기계파괴운동이 일어나 1812년 2월 초까지 이어졌다.


1811년 3월 세금을 계속 올렸는데도 불구하고 국가수입이 5천만 프랑이나 부족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을 위해 전사한 병사들의 월급 연체금 지불까지 거부하는 황제칙령을 통과시켜야만 했다. 1811~1812년의 기근은 다시 찾아온 경제위기보다 더 심각하였다. 1811년의 수확은 긍정적으로 보였지만 폭풍우가 계속되면서 흉작으로 이어졌다. 무능한 행정가들은 잉여분을 없애다가 덜미를 잡혔다. 파리에서는 쌀과 채소 값이 갑자기 급등하면서 첫 신호를 알렸다. 혁명 이후 최초의 사태였다. 1811년부터 1813년까지 나폴레옹은 식량공급에 대한 회의를 14회 이상이나 주재하고 여러 칙령을 발표했다.


6월 23일 나폴레옹은 니만 강을 건너 러시아로 들어갔다. 1812년 겨울의 전망은 암울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공격에는 굶주리고 불만에 찬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린다는 부가적인 동기도 있었다. 나폴레옹이라는 ‘별’이 떨어질 때의 마지막 운처럼 1812년의 수확은 좋았지만 그는 1810년에 이미 경고가 내렸음을 인식해야 했다. 이제 그는 처음으로 전투에서 역전패를 당하게 된다. 풍작으로 빵값이 거의 15퍼센트나 하락한 덕에 라이프치히의 결정적인 패배라는 우울한 소식이 상쇄되었다.


1812년의 운명적인 전투가 진행될 당시 혁명의 수도에 응집한 프랑스 국가가 전쟁을 영광시하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군대는 늘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 외 국민들은 그를 거의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공포스러운 비밀경찰의 힘에 점차 기대게 되었다.


라신 가의 카자흐 기병
나폴레옹의 제국이 와해되면서 프랑스는 천천히 생기를 찾았고, 메테르니히와 캐슬레이가 이끄는 적군과 돌아온 부르봉 왕조와 함께 새 체제를 대표하는 불사조 탈레랑은 지속적인 평화협정을 맺으러 빈에 모였다. 전해에 제시된 것보다 훨씬 심하긴 해도 20세기의 기준으로는 여전히 관대한 조약이었다. 1815년 11월 서명된 조약서에서 프랑스는 신생중립국 벨기에를 제외하고 과거의 국경선을 대부분 유지할 수 있었다.


루이 18세의 귀국으로 프랑스는 과거의 정치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프랑스는 전쟁보상금으로 7억 프랑을 내야 했지만 결국 2억6천5백만 프랑으로 삭감되었다. 1871년과 1919년의 승리자들이 요구하게 될 가혹한 보상과 대조적으로, 프랑스는 재정적인 보상을 가볍게 피해갈 수 있었다. 동맹국은 빠르게 파리에서 철군했다.


프랑스에게 1815년과 1816년은 몹시 괴로운 시기였다. 기근과 결핍이 만연하고 시골에는 ‘백색공포’가 있었다. 1944년 해방 뒤의 숙청에 비교될 정도였다. 왕당파의 뜨내기 정상배들은 오래된 숙원을 풀었다. 님 지역에서는 신교도 여성들이 종교를 이유로 태형을 당했다. “누구보다 용감한 자”라는 별명의 네이 원수는 다른 이들의 기를 꺾기 위해 처형되고 나폴레옹의 장군 몇 명도 그 뒤를 이었다. 새로운 체제에서 명예로운 요직을 차지하게 된 이들도 있었다.


1945년 독일과 일본의 운명과는 판이하게 사악한 체제를 전멸하고 새로 시작하기로 결심한 동맹군들은 ‘반나폴레옹주의’를 강요하지 않았다. 프랑스 사회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무엇보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유물인 『민법전』이라는 뛰어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파리는 이름에 걸맞게 빠른 회복을 하면서 겉으로나마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다. 정부 주식의 값이 다시 오르고 관광객들은 파리 시민이 튈르리 궁에서 활기를 되찾는 모습을 목격했다. 워털루 이후 환하게 빛나는 파리라는 방패에 검은 구멍이 하나 있었다. 바로 루브르의 운명이었다. 1810년 황제의 거대한 나신상을 조각했던 카노바가 바티칸 대사의 자격으로 되돌아와 “훔친 물건을 모아둔 대형 동굴”에서 약탈된 예술작품을 회수했다. 루브르에서 작품이 계속 빠져나가고 작품을 실은우마차는 로마까지 지친 행보를 이어갔다.


1815년 말 파리에서 몰락한 황제를 가장 잘 기념하는 유물로 바스티유의 코끼리가 있었다. 나무가 썩고 채색석고는 빛이 바래가면서 이 코끼리는 수천 마리의 쥐들과 빅토르 위고의 개구쟁이 가브로슈(『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불쌍한 어린이)의 소굴로 전락했다. 이 코끼리는 나폴레옹 제국의 사치와 몰락을 봉인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