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칸집단의 패권형성사

Rise of The Vulcans

   
제임스 만(역자 : 권택기 외)
ǻ
박영률출판사
   
22000
2005�� 08��



■ 책 소개
최근 30∼40년간 미국대외정책의 중심에 서 왔던 6인방(체니, 럼스펠드, 파월, 라이스, 월포위츠, 아미티지), 이른바 불카누스들의 삶을 통해 미국 대외정책의현대사를 총망라한 역사서이다.

 


30년간 외교전문기자로 활동해온 저자는 여섯 명의 핵심인사들이 살아 온 길을 추적함으로써부시의 대외정책팀인 불카누스들의 신념과 세계관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미국이 어떻게 베트남 전쟁의 패배 후유증을 극복했으며, 이후 군사력 증강을통해 어떻게 냉전에서 승리했는지, 그리고 냉전 이후 초강대국 미국의 비전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와 사담후세인에게 집착하여 전쟁을 일으킨 이유나 북한에 대한 ‘악의적인 무시’와 ‘방치외교’를 고수해 온 이유를 이해하는 단초를제공한다.


■ 저자 제임스 만
존스홉킨스대학국제대학원(SAIS)의 상주작가(writer-in-residence)로, 오랫동안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기사를 쓰면서 외교 분야 전문기자로활동했다. 2005년 지금도 뉴 리퍼블릭, 애틀랜틱 먼쓰리, 워싱턴포스트지에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Beijing Jeep』『AboutFace: A History of America"s Curious Relationship with China, from Nixon toClinton』등이 있다.


■ 역자 권택기·정인석
권택기는 서강대학교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국회 입법보좌관,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 기획실장 등을 맡았다.


정인석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KBS에 몸담고 있다. 사회부, 외교안보팀,기동취재부, 법조팀, 9시뉴스 편집팀 등에 있었다. 2004년부터 존스홉킨스대학 국제대학원(SAIS)에서 객원연구원으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였다.


■ 차례
추천사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편지
옮긴이의 말 
서론


1.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그리고 럼스펠드 
2. 피후견인 폴 월포위츠 
3.병사 파월과 수병 아미티지 
4. 대소 데탕트와 헨리 키신저 
5. 페르시아만으로
6. 전이
7. 보수주의자들의 카멜롯
8. 독재와 민주주의
9. 아마겟돈 
10. 스캔들과 그 여파
11. 새 공화당 대통령과 새 대외정책팀 
12.군사력의 사용
13. 제국의 소멸과 비전의 탄생 
14. 추방된 불카누스들 
15. 불카누스의 아젠다 
16. 선거운동
17. 누가 펜타곤을 이끌 것인가? 
18. 경고와 징후들 
19. 역사는 오늘 시작된다
20. 새로운 전략
21. 이라크 전쟁 속으로


결론
찾아보기





불칸집단의 패권형성사


서론
1999~2000년 대선 기간 부시의 대외정책 보좌관들(부통령 후보인 딕 체니를 비롯해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 폴 월포위츠, 리처드 아미티지 등)은 스스로를 ‘불카누스(Vulcans : 로마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이자 금속을 녹이는 대장장이 신의 이름)’라고 칭했다. 이들이 사용한 ‘불카누스’라는 단어는 부시의 대외정책 팀이 유권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힘과 강인함, 신축성, 지속성의 이미지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부시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이들 대부분을 새 행정부의 요직에 앉혔는데. 이들의 스타일은 임기 초반부터, 안정을 유지하는 데 주력해온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와 달랐다. 새 정부는 특히 앞으로 적대 세력들을 다룰 때 냉전시대의 핵심 독트린이었던 ‘봉쇄와 억제’ 정책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미국은 기꺼이 ‘선제공격’을 통해 전쟁을 시작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어떤 세력에도 ‘도전 받지 않는 미국(unchallengeable America)이라는 이 새로운 세계관은 과거 30년 이상 공화당 행정부를 거치면서 진화해 온 개념과 이상의 결정판이었다. 이들의 사상적 기원은 레이건 행정부, 그리고 이보다 훨씬 이전인 포드 행정부 때의 사건들 - 특히 베트남전 패배와 닉슨과 헨리 키신저의 대소 데탕트 추구에 대한 대응 - 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1970년대 초에서 2003년 사이 미국의 힘은 베트남전 패배 직후의 최저점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군사력을 보유한 최고점까지 점진적으로 부상해왔다. 그리고 불카누스들은 이 시기, 일련의 사건과 정책 결정 과정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들은 미국이 쇠퇴기에 있다는 주장들을 일축하면서, 미국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어야 하며, 미국의 가치와 이상을 해외에 확산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불카누스들과 이들이 걸어온 길을 통해 우리는 미국의 변화 과정과 함께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역할이 출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여섯 명의 핵심인사들(체니, 럼스펠드, 파월, 아미티지, 월포위츠, 라이스)이 살아 온 길을 추적함으로써 부시의 대외정책팀인 불카누스들의 신념과 세계관을 살펴보는 데 있다. 이는 미국이 왜, 그리고 어떻게 부시 행정부가 보여줬던 방식으로 대외정책을 집행하게 됐는지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모든 불카누스들은 하나같이 미국 군사력의 중요성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힘과 이상이 대체로 세계에 유익한 것이라고 믿었고 미국의 능력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세계관을 보여왔다. 부시 행정부가 분열돼 있다고 특징짓는 것은 불카누스들의 이러한 공통점들을 간과하는 것이다. 한편 부시는 불카누스들이 대외정책을 둘러싸고 이견을 보일 때마다 이들의 관리자이자 정책 결정권자, 그리고 최종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대통령으로서의 이 권한은 그 자체만으로 가공할 만한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또한 행정부의 전반적인 정치적 방향성을 제시해 왔는데, 이 역할 또한 대외정책 수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그리고 럼스펠드
1971년 4월, 사상자 수가 한국전을 추월하고, 대학 캠퍼스와 주요 도시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소요사태가 발생하는 등 베트남전은 고비를 맞고 있었다. 그리고 이 즈음 닉슨과 헨리 키신저의 입장에서 봤을 때 럼스펠드는 점차 골치아픈 반전 옹호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럼스펠드를 비롯한 베트남 정책에 불만을 품은 행정부 내 관리들은 행정부가 보다 신속하게 베트남전을 끝내지 못하는 데 대해 비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사실 럼스펠드는 단지 베트남 주둔 미국의 감축 일정을 제시하라고 모호하게 주장해 왔을 뿐이었다. 당시 그는 닉슨 행정부 내의 중도 자유주의자였다. 국내정책 담당 보좌관을 맡고 있던 럼스펠드로서는 전쟁에 이기는 것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다. 그는 베트남전을 행정부를 지배해 온 헨리 키신저의 위상에 도전할 수 있는 이슈로 바라보았다(이후 럼스펠드는 포드 행정부 때 보다 매파적 입장에서 키신저에게 다시 한 번 도전해 더욱 큰 성공을 거뒀다).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럼스펠드는 1962년 시카고 북부 근교 지역의 공화당 예비선거에 뛰어들어 승리했고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경제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온건한 입장을 견지했다. 또한 대외정책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1968년 가을 전국을 누비며 닉슨의 선거운동을 도운 럼스펠드는 닉슨 행정부 출범 석 달 뒤 빈곤퇴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연방기구인 경제기회국의 국장 자리와 대통령 고문직에 올랐다. 그때 보좌관으로 채용한 이가 바로 당시 대학원생인 리처드 체니였다. 체니는 닉슨과 포드 행정부에서 7년 동안 럼스펠드의 문지기이자 최고 관리자 역할을 수행했다.


1971년과 1972년 럼스펠드는 백악관 상근 고문으로 있다가 같은 해 가을 물가위원회를 맡았다. 그리고 다음해 닉슨이 제안한 NATO 대사 자리에 올랐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을 때 럼스펠드는 추문으로 얼룩진 닉슨의 백악관에서 벗어나 먼 유럽에서 안전하게 머물고 있었다.


피후견인 폴 월포위츠
미국인들은 흔히 1960년대의 미국사회를 좌파 지성이 지배한 시대로 생각한다. 그러나 21세기 초입 베트남전 시대의 신좌파 운동은 오래 전에 이미 무덤 속으로 사라진 반면, 1960년대 당시 주목받지 못했던 보수주의 학생운동은 꽃봉오리를 활짝 터뜨리고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 이론이 미국의 대외정책과 만나는 지성의 소용돌이 속에 부시 행정부의 국방 부장관인 폴 D. 월포위츠가 자리하고 있다.


월포위츠의 스승 중 한 명인 레오 스트라우스는 현대 보수주의 운동의 상징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오늘날 그의 영향력은 대외정책을 포함해 공공정책 분야에서 일하는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특히 막강하다. 스트라우스가 쓴 책의 핵심 개념은 유럽과 미국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도덕적 관용 정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스트라우스의 사상은 미국의 대외정책과 관련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첫째, 스트라우스는 ‘폭정’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특별히 강한 결단력과 확고한 신념을 가진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둘째, 스트라우스의 생각은 냉전시기, 강하고 투철한 반공정신에 대한 몇 가지 지적 토대를 제공했다. 스트라우스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거나 다른 문화적 가치와 민감성을 고려해야 할 필요성에 제약받지 않았다. 스트라우스주의자들의 가장 큰 정치적 이정표 가운데 하나는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명명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생활방식의 존엄성에 대한 배타적 태도이자 우리 방식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명백한 모욕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적 상대주의에 대한 레이건의 거부는 스트라우스주의자들이 갈채를 보냈던 핵심 부분이었다.


월포위츠가 미국의 대외정책에 관해 제기했던 몇 가지 주제들, 즉 폭정의 종식과 악에 대한 비난 강조, 독재체제는 민주주의 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된다는 개념,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 정보기관들이 독재자의 정교한 속임수에 농락당할 수 있다는 믿음 등은 명백히 스트라우스적 사고를 함축하고 있었다. 월포위츠는 이러한 개념들을 먼저 냉전 당시 소련에 적용한 후, 몇 년 뒤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에 적용했다.


19660년대 소련의 군사력은 너무 막강해서 당시 어느 누구도 미국이 향후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미국의 적수가 전혀 없는 부시 행정부에 와서 월포위츠는  이 개념들을 현대화했다. 월포위츠가 대학원 시절 참여한 연구모임에서 만난 애치슨과 니츠(냉전이 시작될 무렵 트루먼 행정부에서 각각 국무장관과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을 역임)는 냉전시기 봉쇄정책의 설계자들로, 소련에 대한 비타협적인 정책을 옹호해온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월포위츠는 더 이상 봉쇄나 억제의 낡은 접근법을 지지하지 않았다. 대신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 즉 예방전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대소 데탕트와 헨리 키신저
닉슨이 물러난 뒤 2년 반 동안의 포드 대통령 재임 기간, 행정부 최고위 관리들 사이의 역학관계에도 큰 변화가 일었다. 미국의 중국 개방과 대소 데탕트 정책의 설계자로 폭넓게 인식되던 헨리 키신저는 미국 대외정책 분야에 대한 독점 권한을 상실했다. 나아가 모든 키신저 정책의 시금석이었던 새로운 대소관계 구축 시도는 거세게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와 함께 미국의 대외정책과 관련해 미국이 왜 소련과 거래를 하거나 타협해야 하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새로운 사고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로널드 럼스펠드와 딕 체니가 자리잡고 있었다.


대통령 취임 한 달 뒤 포드는 NATO 대사로 있던 럼스펠드를 백악관 비서실장 자리에, 딕 체니는 비서실 차장 자리에 선임했다. 포드 행정부 전 기간에 걸쳐 럼스펠드와 체니의 쌍두마차는 긴밀히 협조관계를 구축하며 행정부 내부의 일들을 지배했다. 먼저 1974년 말과 1975년 초 럼스펠드와 체니는 하원 소수당 원내 대표와 부통령 시절부터 포드를 보좌해 온 측근들을 밀어냄으로써 백악관 직원들과 국내 정책 분야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확립했다. 급기야 1975년 말과 1976년 럼스펠드는 키신저의 데탕트 정책과 소련에 대한 군비통제 정책에 대해 정면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 시기 키신저의 쇠퇴는 일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1975년 초 백악관에 뿌리를 내린 포드 대통령은 1976년 대통령 선거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일 대외정책을 온전히 키신저의 손에 놔둔다면 포드는 대통령답지 못하다는 인상과 함께 리처드 닉슨의 정책을 물려받았다는 인상을 줄 위험성이 있었다. 행정부의 다른 인사들은 키신저가 너무 많은 권한을 갖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고, 점차 정부 밖 인사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얘기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더구나 미국의 베트남 철수가 마무리돼 갈 무렵, 포드의 백악관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럼스펠드였다.


베트남전 패배는 의회로 하여금 미국의 해외 역할과 국방예산을 축소하고 미국의 정보기관을 제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이 앞으로는 결코 비슷한 패배를 경험해선 안 되며, 보다 더 적극적으로 미국의 가치를 해외로 확산시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공산주의 정권들과 그렇게 쉽게 타협하려해선 안 된다는 감정들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우파들이 훨씬 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공화당 내부에서는 포드 행정부에 대한 레이건의 도전이 점차 구체화되었다. 의회에서는 데탕트 정책에 대한 헨리 잭슨 의원의 도전이 갈수록 거세졌다. 1975년 여름, 결국 포드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 포드는 개각조치를 단행했는데 가장 큰 수혜자는 국방장관으로 임명된 럼스펠드와 백악관 비서실장이 된 딕 체니였다. 럼스펠드는 이 시기 데탕트 정책을 막고 미국의 소련정책을 강경화하기 위해 어느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키신저는 행정부에서 두 직책을 겸임하며 누렸던 주도적인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헨리 키신저와 데탕트 정책의 무력화는 미국 대외관계의 일대 전환점을 의미했다. 미국 대외정책을 둘러싼 논쟁의 초점 역시 급속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됐다. 키신저는 베트남전 패배 이후 모스크바와의 타협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는 1970년대 중반의 정치적인 분위기에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의회는 국방예산 삭감과 함께 미국 정보기관들의 활동에 대한 전례없는 조사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럼스펠드, 체니, 월포위츠 그리고 공화당의 보수주의 우파들과 민주당의 신보수주의자들은 키신저의 암울한 비전을 거부했다. 이들의 시각에서 볼 때 미국은 결코 쇠퇴기에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에 근거한 비전을 채택하거나 소련과 새로운 타협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포드 행정부 시절에 출현한 이 같은 철학적 분열상은 20세기 말을 지나 21세기 초까지 지속됐다.


보수주의자들의 카멜롯
레이건 행정부의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월포위츠는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적인 사안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기존 질서에 대해 가장 과감한 도전에 나선 것은 1971년과 1972년 리처드 닉슨과 헨리 키신저의 첫 베이징 방문 이래 타협정책을 추진해 온 중국 문제였다. 미국이 중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과장하고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리고 미국이 소련과 전쟁을 할 때 중국은 미국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사실 미국보다는 중국이 소련의 침공을 두려워해야 할 더 큰 이유가 있으므로 중국이 미국의 도움을 더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근본적인 전제는 미국이 세계의 어느 강대국과도 타협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월포위츠는 헨리 키신저의 대외정책 - 데탕트와 중국 문호 개방, 그리고 안정적 세력 균형 - 의 토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레이건은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조치들을 통해 베트남 전쟁의 유산을 극복하고 군사력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미국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레이건팀이 추진한 대외정책의 첫 걸음은 군을 지원하는 데 전례없는 규모로 예산을 할애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콜린 파월은 최고위 민간 지도자들과 군 지도부를 연결하는 대리인이자 중재자로서 양쪽에서 모두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전체적으로 그는 1977년에서 1986년 사이 국방장관이나 부장관의 군사보좌관으로 일하며, 펜타곤에서 모두 다섯 개의 다른 직책을 경험했다. 파월은 이 기간 국방장관 와인버거의 또 다른 핵심참모인 리처드 아미티지와 함께 일했다. 동아시아 담당 부차관보 아미티지는 지역전문가로 행정부에 영입돼 1983년 초 펜타곤의 주요 정책부서 중 한 곳인 국제안보담당 차관보로 승진했다.


레이건은 1985년 연두교서에서 “자유의 전사들에 대한 지원은 자위권 행사다.”라고 선언하였다. ‘자유의 전사’라는 용어의 선택은 레이건의 정책이 무엇보다 소련에 대한 반대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호도하기 위해 ‘자유’의 의미를 너무 단순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건의 새 독트린은 베트남전 이후 미국 군사력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해 온 정책이 원대한 행보를 내디딘 것이었다. 첫째, 1970년대 후반 미국은 페르시아만에서 전쟁을 수행할 기반 시설과 군사력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둘째, 레이건 행정부는 출범 초기 전례없는 국방예산의 인상을 추진했다. 이제 미국은 전 세계의 대리전쟁에 관여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미티지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반소련, 반공산주의 저항단체에 대한 다양한 지원들을 조직화했다.


럼스펠드는 과거 공화당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으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건 행정부 첫 2년 동안 대외정책에서 거의 배제됐었다. 그러나 닉슨 행정부 시절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한 조지 슐츠가 국무장관이 되자 럼스펠드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중동특사로 임명된 럼스펠드는 곧바로 중동의 수도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며, 미국의 새 외교 창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럼스펠드가 찾은 나라 중 한 곳은 이라크였다. 이라크는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의 전쟁 이후 미국과 외교관계가 없었다. 당시 이라크는 1980년에 발발해 8년간 지속되었던 이란과의 전쟁 중에 있었다. 이란 왕정이 몰락한 이후 미국의 중동정책은 무엇보다 이란을 봉쇄하고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가 중동 전체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럼스펠드의 바그다드 여행은 그 정책을 반영한 것이었다.


1983년 12월 19일과 20일, 럼스펠드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이라크의 부수상 타리크 아지즈,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과 회담을 했다. 그는 이란과 시리아의 힘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과 이라크의 폭넓은 협력관계를 구축하려고 했었다. 후세인과 아지즈는 럼스펠드에게 미국이 전 세계 동맹국과 우방들에게 이란에 대한 무기 판매를 중단하도록 말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럼스펠드는 후세인에게 미국은 이미 다른 국가들에게 이란에 무기를 수출하지 말 것을 권고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다. 1년 반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레이건 행정부 일각에서는 이란에 대한 은밀한 무기 판매 가능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럼스펠드가 사담 후세인과 회담할 무렵, 미국 정보는 이미 이라크가 이란과 전쟁하면서 화학무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정보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럼스펠드가 1983년 회담을 할 당시, 미국은 중동지역에서 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고, 후세인의 화학무기 사용은 그와의 거래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럼스펠드의 이라크 방문은 미국이 이라크와의 관계를 한층 강화하기 위한 기초작업이었다. 바그다드 방문 1년이 채 안 된 1984년 11월 26일, 레이건 행정부는 백악관에서 공식행사를 갖고 이라크와의 외교관계를 완전히 회복시켰다. 그러나 그 무렵 럼스펠드는 더 이상 레이건의 중동특사가 아니었다. 그는 결코 이길 가망이 없는 대의명분에 시간을 낭비하거나 관여할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중동협상은 소모적이고 실패를 거듭하기 일쑤였다. 1984년 5월 18일, 그는 중동특사를 맡은 지 불과 6개월 만에 사임하고 G. D. 썰(G. D. Searle & Co. : 세계적인 제약회사)의 CEO 자리로 돌아갔다.


새 공화당 대통령과 새 대외정책팀
조지 부시는 공화당의 후보 지명전에서 승리한 뒤 가을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마이클 듀카키스를 물리쳤다. 대외정책과 관련해 1988년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선거가 아니라 레이건 행정부에서 부시 행정부로의 권력 이양이었다. 새 부시 행정부의 출범 초기 변화는 거의 적대적인 정권 교체였다. 레이건의 보수주의 추종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즉각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다.


국방장관이 된 체니, 정책담당 국방차관이 된 월포위츠가 펜타곤을 차지하면서 레이건 행정부에서 부시 행정부로의 변화가 단순히 보수적인 대외정책의 온건노선으로의 일방적 변화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의 첫 출발 때부터 34세의 콘돌리자 라이스는 내부 역할자였다. 행정부 출범 몇 주 뒤, 부시의 새로운 소련정책의 핵심 내용을 담은 메모를 국가안보 보좌관 스코우크로프트에게 작성해 준 인물도 라이스였다. 그녀는 고르바초프와 포괄적인 타협을 모색하기에 앞서 NATO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군비통제에 집중하며 동유럽과의 관계 구축에 나설 것을 강조했다. 그녀는 현실적이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단호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압도적으로 백인 남성들이 많은 소련과 군비 통제 분야에서 흑인 여성인 라이스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1989년 봄, 라이스뿐만 아니라 펜타곤의 월포위츠도 자신의 참모들과 함께 소련에 대한 방위정책을 재검토하고 있었다. 펜타곤의 연구 결과 역시 소련의 실제 변화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너무 시기가 이르기 때문에 미국이 고르바초프를 다루는 데 보다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신 월포위츠는 지나치게 소련에 치중한 정책에서 탈피하려고 했다. 미국의 페르시아만 정책을 재검토하는 연구에서 초점은 페르시아만 내부의 어떤 국가, 즉 이라크와 같은 나라들에 의한 유전 장악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한편 1989년 초 레이건의 국가안보 보좌관을 마친 파월은 미군 사령부의 사령관이 된 지 6개월 만에 부시 행정부 시기 합참의장이 되었다. 그는 1986년 골드워터-니콜라스 법에 의해 군 내부와 민간 지도자들 사이에서 어떤 전임자들보다 훨씬 강력한 위상을 갖는 합참의장으로 취임했다.


1989년 11월 10일, 몇 주간의 소동이 있은 뒤, 동독인들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다. 이후 6주간에 걸쳐, 고르바초프와 소련 지도부의 묵인 아래 동유럽 전역에 민주혁명이 확산되었다. 이제 워싱턴의 회의론자들조차 소련이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들에 대해 더 이상 논쟁하지 않았다. 그리고 체니와 파월은 국방예산과 소련에 맞서기 위해 해외에 주둔하던 미군 병력들을 어떻게 할지를 결정해야 할 임무를 떠안게 됐다. 두 사람은 함께 새로운 시대 미국의 역할을 재정의하고, 펜타곤이 얼마나 많은 군사력을 유지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언제 그 군사력을 행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을 수립해야만 했다.


제국의 소멸과 비전의 탄생
탈냉전 세계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개념들은 1989년에서 1992년까지 3년간에 걸쳐 서서히 발전해 갔다. 이 기간 동유럽과 소련의 변화로 과거 냉전시대의 독트린이 쓸모 없게 되면서, 펜타곤은 미국이 왜 군사력을 보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들을 점차 혁신적으로 바꿔나갔다. 이 드라마의 핵심 인물인 딕 체니와 콜린 파월, 그리고 월포위츠는 미국의 군사계획을 이끌어 갈 새로운 원칙과 논리들을 제시하고자 노력해 나갔다.


1991년 가을, 펜타곤은 기로에 서 있었다. 가을 무렵, 소련연방은 해체 과정에 들어갔다. 미국의 군사계획과 전략은 40년 이상 소련의 위협을 전제로 수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위협이 사라지면서 이제 펜타곤은 새로운 시대에 미국의 군사적 사고를 이끌어갈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냉전 이후 미국의 군사력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근거와 관련된 연구는 몇 달 뒤 지난 반세기 동안의 가장 중요한 대외정책 문서 중 하나가 발표되면서 그 절정에 올랐다. 월포위츠가 보좌관 잘마이 카릴자드와 함께 작성한 이 문건은 “세계질서가 궁극적으로 미국에 의해 지탱되는” 미래를 상정하고 있었다. 냉전시대 미국이 의존했던 집단안보 개념은 더 이상 미국의 전략적 사고의 핵심이 아니었다. 제안된 새 전략은 대량살상무기 확산에 따른 미국에 대한 잠재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이 공격적인 군사행동의 가능성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2년마다 재작성되는 ‘국방계획 지침’의 초안이 된 이 문서는 “핵과 생화학무기에 의한 임박한 공격에 대한 선제 공격”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러한 점에서 펜타곤의 1992년 전략은 2001년 9월 11일 이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정책들을 예고하고 있었다.


1992년 3월 언론에 유출돼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비전을 공론화시킨 것은 바로 이 문서의 초안이었다. 초안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제안은 미국이 잠재적인 경쟁자의 출현을 적극적으로 막아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초안은 이와 관련해 미국이 부분적으로 “선진 산업국가들”의 이익을 고려하고, 한편으로 필적할 수 없는 군사력을 보유함으로써 이들 국가들이 미국의 지도력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펜타곤이 제안한 전략에 대한 초기의 언론 보도가 미국 내외에서 엄청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부시의 백악관은 소동을 조속히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이를 위해 재작성된 문서는 우선 먼저 자극적인 용어 “동맹의 도전 억지(keep-the-allies-down)”를 순화하고, 동시에 미국의 “항구적인 군사적 우위”라는 보다 폭넓은 개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정된 미국 전략의 비전 역시 상당 부분 초안과 같은 개념을 그대로 채택하고 있었다. 최종적인 펜타곤의 국방계획 지침은 크게 미국 전략의 포괄적 천명과 즉각적인 함의 등 두 부분으로 구성됐다. 두 번째 부분은 펜타곤이 개발해야 할 군사력 분야와 앞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는 긴급대책 계획들을 상세하고 다루고 있었다.


1993년 클린턴 행정부는 취임 초 국방 이슈를 재검토한 뒤 체니와 파월, 월포위츠의 주도로 만들어진 냉전 후 군사 구조의 전반적인 틀을 그대로 보존했다. 미국의 국방예산은 어느 정당의 행정부에서도 결코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1992년 국방계획 지침 이후 10년간에 걸쳐 미국의 방위비 지출이 미국 다음 15개 국가의 방위비를 합한 것보다 많을 정도로, 미국은 이 비전에 실질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경고와 징후들
2001년 1월 20일, 조지 W. 부시가 미국의 4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3월 초, 부시 행정부의 정책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날아온 남한 대통령 김대중과의 회담에서 부시는 북한과 대화를 서두르지 않을 것이며, 그들과 맺는 협정들의 유용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 “우리는 미래 어느 시점에서 북한과 대화화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하면서도 어떤 협정이든지 북한이 약속하는 것에 대한 “확실한 검증”이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정책의 이와 같은 급선회는 대외정책과 관련한 새 행정부의 스타일과 최우선 전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 주었다. 불카누스들은 미국에 이익이 되지 않을 경우, 협정 체결을 선호하지 않았다.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협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거나 잔학한 정권의 권력 유지를 돋는다면, 협정은 차라리 없는 게 나았다. 자신들의 전임자들과 비교할 때 이들은 훨씬 더 체제(또는 김정일과 같은 지도자 개인)의 반민주성이나 억압성 등 도덕적인 판단에 대외정책의 기초를 두려고 했다. 2003년 8월 미국은 북한은 물론 중국, 러시아, 일본, 남한 등이 참석하는 6자 회담을 시작하면서도 여전히 합의를 서두르지 않았다.


한편 2001년 봄부터 여름까지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 조직이 미국에 대한 새로운 대규모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하는 등 테러 가능성이 나타났으나 이에 주목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 국토안보와 관련된 새 행정부의 정책 입안 노력은 매우 더디게 진행됐다. 불카누스들은 미국이 베트남전의 터널을 탈출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소련의 붕괴를 진두지휘하고 1991년 걸프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때문에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다시 돌아왔을 때 이들은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알 카에다와 같이 국적없는 무정형의 테러조직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새로운 전략
1970년대와 1980년대 많은 불카누스들은 소련에 맞서기 위한 미국의 보다 많은 노력을 주창해 왔다. 그러나 당시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미국의 핵심적 전략인 봉쇄 독트린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모든 불카누스들이 냉전의 틀과 함께 그 한계를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002년 초, 충격적인 9.11테러 이후 이들의 관심은 미국 대외정책의 주요 원칙에 대해 보다 폭넓고 항구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2001년 12월 부시 행정부는 탄도요격미사일 조약(ABM 조약 - Anti Ballistic Missile Treaty : 탄도탄 요격 미사일의 개발을 제한하는 조약) 탈퇴선언을 시작으로 냉전시기의 규칙과 한계들을 폐기해나갔다. 불카누스들은 점차 공격적인 군사행동에 초점을 맞춘 전략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런 보다 큰 틀의 개념적 변화에 중심 역할을 한 인물은 콘돌리자 라이스였다. 그녀는 국가 이익과 힘의 균형외교에 기초한 강력한 대외정책을 신봉했다.


아프간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2001년 11월, 부시 행정부 관리들의 발언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됐다. 고위 관리들은 점차 알 카에다의 대량살상무기 획득 가능성을 경고하기 시작했다.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행정부의 새로운 강조는 훨씬 더 원대한 전략을 수행하겠다는 초기 신호탄이었다. 드디어 2002년 1월 29일,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통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잠재적으로 테러리스트들에게 이를 공급할 수 있는 국가그룹인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명명하고 이와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해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처럼 부시 행정부는 5개월이 채 안 되는 기간 테러와의 전쟁의 초점을 9.11 공격을 저지른 범죄자들에 대한 보복에서, 테러리스트들의 대량살상무기 획득을 저지하는 것으로, 그리고 특정 국가들이 테러리스트들에게 대량살상무기를 공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점차 변화시켜 나갔다.


2002년 초부터 부시 행정부는 군사전략의 근본적인 변화를 시사해 왔는데, 그해 9월, 전적으로 새로운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 NSS) 보고서를 발표하여 미국의 대외관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보고서는 불카누스가 제시해 온 새 비전의 3대 핵심 요소를 반영하고 있었다. 첫째는 선제공격론의 옹호였다. 둘째, 도전 받지 않는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이라는 개념을 채택했다. 셋째, 초강대국 미국이 앞으로 해외에서 민주주의 가치의 증진을 추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파들은 행정부의 새로운 선제 공격 독트린이 어떻게 적용될지를 보여줄 준비를 했다. 목표는 바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한 전력과 함께 미국의 힘과 이익에 적대적이며, 장기간의 억압통치를 통해 민주주의 이상을 훼손해 온 정권이었다. 이제 이라크를 처리할 시간이 된 것이었다.


결론
불카누스들의 이라크 침공 결정에는 이들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사실상의 모든 핵심 요소들이 집약돼 있었다. 이것은 불카누스들이 과거 30년 동안 발전시켜 온 대외정책의 사상과 주제들을 반영하고 있다. 첫째는 이들이 베트남전 패배 이후 지속적으로 구축해 온 미국 군사력의 중심 역할과 효율성에 대한 믿음이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30년에 걸쳐 미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막강해졌는지, 그리고 미국이 대외정책의 주요 수단으로 그 군사력에 얼마나 의존하게 됐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었다. 둘째,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전 세계에서 ‘선(good)을 확산시키는 세력이라는 불카누스들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었다. 불카누스들은 전쟁과 침공이 이라크가 중동 전 지역에 민주주의를 확산하기 위한 노력의 첫 단계일 뿐이라고 묘사했다.


셋째, 이라크 침공 결정은 미국의 능력에 대한 불카누스들의 대단히 낙관적인 평가를 반영하고 있었다. 30년간에 걸쳐 이들은 미국이 쇠락하지 않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보다 국제 문제를 위해 훨씬 많은 힘을 비축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넷째, 불카누스들의 이라크 침공 결정은 다른 국가들과 협정을 맺거나 타협을 꺼리는 자신들의 기질을 대변하고 있었다. 불카누스들 가운데 가장 타협적이라는 콜린 파월조차 주요 동맹국들의 일부(유엔 안보리의 주요 국가들과 함께)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침공을 승인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라크 전쟁은 1992년 재작성한 뒤 1993년 딕 체니의 이름으로 발표된 수정 보고서를 통해 언급한 “미래의 안보 환경을 구축할” 필요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전형적인 사례를 이라크에 대한 전쟁과 중동의 민주화를 추구하면서 보여주었다. 이는 곧 중동 전 지역의 정치와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1968년에서 2003년까지 35년간에 걸쳐 불카누스는 하나의 집단으로서 미국의 분위기와 신념을 반영해 왔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더 많은 국방예산과 보다 야심찬 전략, 그리고 펜타곤에 유리한 입장들을 선호해 왔다. 불카누스들은 심지어 공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조차 국가안보 관련 부서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해 왔다. 간단히 말해서 35년에 걸쳐 불카누스들은 도전받지 않는 미국의 군사력을 추구해 온 이들의 세대를 대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미국인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이들을 권력에서 끌어내릴 정도는 아니었다. 불카누스들이 세계를 다뤄나갈 때 이들은 미국, 즉 미국 정부와 국가안보 조직, 그리고 미국의 정치적 신념과 선택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몇 년 간에 걸쳐 현대 역사가들은 1989년 냉전이라는 한 시대가 끝나고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는 식으로 세계사의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러나 이 그림 속에는 이들 역사가들의 설명과는 전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 그것은 1989년보다 20년 전에 시작돼, 그 뒤 적어도 15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시대였다. 그것은 도전 받지 않는 미국의 힘을 추구하는 역사였고, 바로 불카누스들의 부상에 관한 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