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례
1. 태조 시대
2. 정종 시대
3. 태종 시대
4. 세종 시대
5. 문종 시대
6. 단종 시대
7. 세조 시대
8. 예종 시대
9. 성종 시대
10. 연산군 시대
11. 중종 시대
12. 인종 시대
13. 명종시대
야사로 보는 조선의 역사 1
태조 시대(1392~1398)
왕씨들의 수난
위화도 회군 이후 최영은 몰락했고, 이에 고려 조정은 이성계의 수중으로 돌아갔다. 회군의 주역이었던 이성계와 조민수는 각각 우시중과 좌시중이 되어 고려조의 황혼을 연출해가고 이었다. 원나라를 섬기던 구세력이 물러난 조정의 외교정책 전환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명나라를 섬겨 연호 홍무를 사용하고, 원나라 의복 대신 명나라 의복을 입도록 했다. 우왕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그 후사 문제가 조정에 닥친 가장 큰 일이었다. 이성계 일파는 기왕에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그 정통성을 부정한 터였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이참에 왕씨 종실 가운데 어리숙한 인물을 추래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민수의 생각은 달랐다. 조민수는 왕위를 우왕의 아들이 승계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이성계 일파와 맞섰다. 여기에는 이성계를 견제하려는 속셈도 숨어 있었다.
이성계는 조정 신하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이 일에 대해서 조민수에게 양보했다. 기실 우왕의 세자 추대를 목은 이색이 동조하여 이성계는 슬그머니 물러선 것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색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우왕의 아들 창왕이 보위에 올랐다. 창왕은 우왕과 이인임의 외종 이림의 딸 근비의 소생이었다. 일설에는 조민수가 자기를 조정에 천거한 이인임에게 보은하기 이해 천왕을 천거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강화도에서 여흥으로 옮겨진 우왕은 절치부심, 환궁할 꿈을 버리지 못했다. 재위 시절 예의판서를 지낸 곽충보에게 은밀히 연통을 넣어 이성계 제거를 간곡히 부탁했다. “그대는 나의 충신이었다. 이성계는 만고의 역적이다. 역적을 제거하여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할 의무가 그대에게 있으니, 내가 환궁할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그대를 다시 만나는 날 그대는 고려 조정의 중추가 되리라.”
곽충보에게 우왕의 뜻을 전한 인물은 최영의 생길 김저였다. 김저는 칼 한 자루를 내밀며 거듭 말했다. “이 칼은 왕이 하사한 것이오. 이 칼로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분부이셨소.” “알겠소이다. 기회를 보아 거사하리다.” 곽충보는 거짓으로 동조했다. 그는 이미 이성계 일파가 되어 있었다. 위화도 회군 때 화원에서 최영을 찾아내 이성계에게 인계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다. 곽충보는 칼을 증거물로 삼아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고했다. 이성계 일파는 흥분하여 우왕을 여흥에서 강릉으로 옮겨 가두고, 창왕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아 강화도로 쫓아버렸다. 그리고 제20대 임금 신종의 7세손인 정창군 요搖를 세워 고려 마지막 임금으로 추대했다. 그가 바로 공양왕이다. 공양왕은 즉위 후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씨라며 모두 처단했다. 이로써 이성계 일파는 한결같이 주장해오던 신우와 창을 제거하고 명분을 세운 것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왕씨의 혈통은 왼쪽 겨드랑 밑에 금비늘 세 조각이 있다고 했다. 우왕이 강릉에서 망나니들에게 목이 베어질 때였다. 우왕이 모인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 왕씨는 본래 용龍의 후손이니라. 왼쪽 겨드랑이 밑에 반드시 세 개의 비늘이 있는데, 그것으로 표적을 삼느니라. 자, 내 왼쪽 겨드랑이 밑을 봐라!” 우왕이 왼쪽 팔을 번쩍 들어 겨드랑이를 보여주었다. 과연 세 조각의 금비늘이 보였다. 크기가 돈짝만했다. “이래도 내가 신돈의 아들이란 말이냐! 성계 일파의 모함이 가소롭구나.”
우왕은 망나니의 칼에 맞아 죽었다. 강화에서 목이 달아난 창왕의 왼쪽 겨드랑이 밑에도 금빛 나는 세 조각의 비늘이 붙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백성들이 슬퍼하며 이성계를 원망했다.
나라가 바뀌면 전조의 풋내기들은 수난을 당하게 마련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왕씨들의 수난과 살벌한 죽음이 이어졌다. 왕씨들은 개성에서 추방당해 서인이 되어 섬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서운 음모가 숨어 이었다. 이성계 일파는 후환이 두려워 이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제 새 나라의 임금이 된 이성계가 그들의 계획을 묵인해준 상태였다.
배 두 척이 강화로 가려고 해안을 떠났다. 그러나 배 밑창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잠수부를 시켜 구멍을 냈던 것이다. 배가 해안에서 멀어질수록 배는 물 속으로 서서히 잠겨들었다. 한순간 배가 기우뚱 크게 요동쳤다. 왕씨들은 서로 붙잡고 아우성쳤다. 배는 이미 바다 한가운데로 나와 있었다. 배가 서서히 물에 잠겨들었다. 한 스님이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왕씨 가운데 아는 얼굴이 있어 손을 흔들었다. 왕씨가 스님을 알아보고 큰 소리로 시를 읊어주었다.
노 젓는 한 소리 바다 밖에
비록 중이 있은들 어이하랴
이 시를 듣고 스님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터뜨렸다. 배는 돛대만 조금 보일 뿐 왕씨들의 모습은 가라앉아 보이지 않았다. 벌겋게 물든 황혼이 핏빛처럼 바다에 번졌다. 중의 통곡소리만이 간간이 이어질 뿐이었다. 왕씨를 바다 속에 빠뜨려 죽인 후 이성계의 꿈에 칠장지복七章之服(국왕이 입는 예복으로서, 천자는 구장지복, 제후는 칠장지복임)을 입은 고려 태조가 나타나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가 삼한을 통합하며 이 백성들에게 공이 있거늘, 네가 내 자손을 멸하였으니 곧 오래 가지 않아 보복이 있을 것이니라. 너는 알아두어라!”
이성계가 식은땀을 흘리며 놀라 깨었다. 곧바로 입직 승지를 불렀다. “내가 고려 태조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어찌하면 좋은가?” “아무래도 은전은 베풀어야 할 것 같나이다.” “방법을 말하라!” “신의 생각으로는 고려 왕실의 선원璿源(왕실의 世?)의 장부에 적혀 있는 한 부분을 사면하시면 어떠할는지요?” “그 부분의 왕씨들을 살려둔다, 그 말이더냐?” “그러하오이다.” “좋은 생각이다. 시행하도록 하라!”
이 뒤부터 왕씨 사냥의 고삐가 늦추어졌다. 한편, 산속이나 외딴 섬에 숨어든 왕씨들은 신분을 숨기고 성姓을 바꾸었다. 대개 전全씨, 옥玉씨 ,전田씨, 용龍씨 등이 왕씨로 알려져 있다.
세종시대(1418~1450)
맹사성의 해학과 공당 문답
황희 못지 않게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이가 고불 맹사성孟思誠이다. 황희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같은 재상으로서 맹사성은 황희와 쌍벽을 이루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청렴했다. 그가 거처하는 집은 겨우 비바람을 막을 정도였다. 나들이 할 때는 소를 타고 다녀 백성들은 그가 재상인 줄을 몰랐다. 집안 살림에는 초연했고, 음률을 사랑하여 퉁소와 피리를 끼고 살았다. 그는 조정에서 주는 녹미祿米 외에는 먹지 않았다. 한번은 아내가 햅쌀밥을 지어 올렸다.
“어디에서 햅쌀을 구해왔소?” “녹미가 묵어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나이다. 이웃집에서 꾸어 밥을 지었나이다.” “허허, 공연한 짓을 했소이다. 벼슬아치가 녹미를 먹는 것은 당연한 일,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시오.” 맹사성은 밥상을 물려 버렸다. 그렇다고 맹사성이 꽁생원은 아니었다. 해학이 넘치는 인간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경자생庚子生이면서 계묘생癸卯生끼리 모인 계에 장난삼아 들어갔다. 소위 갑계, 즉 동갑계에 든 것이다. 자기보다 나이 적은 동갑계에 들어 시치미를 떼었다.
세종이 어느 날 고불에게 나이를 물었다. “경의 나이가 몇이오?” 맹사성은 임금을 속일 수 없었다. “예 전하, 신 경자생이옵나이다.” 이 말을 계모생인 신하가 들었다. 갑계에 금세 소문이 퍼졌다. 즉시 제명되고 한때 웃음거리가 되었다. “고불이 얼마나 젊어지고 싶으면 나이를 네 살이나 속이고 젊은 축에 끼려고 했을까.” 고불은 그 말을 듣고도 오불관언이었다. 오히려 능청을 떨며 받아넘겼다. “어린 사람들이 어른이 놀아주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웬 말이 그렇게 많은가?”
고불은 피리를 가지고 다니며 기분이 내키면 꺼내서 한 곡조씩 붙었다. 집에 있을 때는 항상 대문을 걸어잠근 채 손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다가 공무로 오는 관리는 물리치지 않았다. 관리가 일을 보고 가면 이내 대문이 잠겼다. 관리는 멀리 동구 밖에서 피리 소리를 들으면 고불이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아서, 겨울이면 포단蒲團(부들로 둥글게 틀어만든 방석)에 앉아 피리나 퉁소를 붙었다. 그토록 음률을 즐기고 사랑했던 것이다. 그의 주변에는 피리?퉁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병조판서가 공무로 고불의 집을 찾았다. 마침 소낙비가 내려 고불의 집이 온통 물벼락을 맞고 있었다. 여기조기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병조판서의 의관이 다 젖었다. 고불은 새는 물방울을 피해 앉으며 군시렁거렸다. “하필 손님이 계실 때 소낙비가 쏟아질 게 뭐람.” 병조판서는 마침 사랑채를 크게 짓고 있었다. 집에 들어온 그는 당장 공사를 중단 시켰다.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사랑채가 필요하겠는가.”
고불의 고향은 온양이었다. 어버이를 뵈러 한양에서 온양까지 소를 타고 다녔다. 한번은 양성과 진위 두 고을 수령이 고불이 온양에 내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장호원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이번 기회에 재상의 눈에 들어보려는 수작이었다.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쳤다. 수령이 관졸을 시켜 꾸짖었다. “왠 늙은이냐? 재상 행차를 기다리는데 소를 타고 지나가다니 버릇이 없구나.”
고불이 빙긋 웃고 말했다. “수령들에게 이르게. 온양에 사는 맹고불이라고 말일세.” 관졸이 전하자 두 수령은 기겁을 하여 달아났다. 당장 물고를 낼 것 같아서였다. 어찌나 급히 달아났던지 언덕 밑 깊은 못에 수령의 관인이 떨어진 줄도 몰랐다. 뒤에 그 연못을 인침연印沈淵 이라고 불렀다.
고불이 온양에 들러 어버이를 뵙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도중에 비를 만나 용인의 주막에 들렀다. 행차가 요란스러운 과객이 누상에 앉아 거드름을 피웠다. 고불은 할 수 없이 누상 아래에 앉았다.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자는 영남에서 의정부의 녹사錄事(하급관리) 자리에 응시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 사람이 고불에게 누상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둘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며 장기를 두었다. 둘은 갑자기 친해져 농을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우리 공?당 놀이 한번 할까요?” 영남 나그네가 말했다. “그것이 무슨 놀이오?” “내가 말끝에 공 하고 물으면 노인께서 당 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거 재미있겠소. 내가 연장자이니 먼저 묻겠소.” “그러시지요.”
고불이 먼저 물었다.
“무엇하러 서울에 올라가는 공?”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 당.”
“무슨 벼슬인 공?”
“녹사 지리란 당.”
고불은 한참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내가 시켜주겠 공.”
“에이, 그러지 못할 거 당.”
“그렇지 않을 공.”
“농담이 지나치 당.”
“알아서 하라 공.”
“그리 할게 당.“
두 사람은 비를 피하며 재미있게 지내고 헤어졌다.
며칠 후 맹사성이 의정부에 앉아 있는데 영남의 그 사내가 들어왔다. 고불은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하며 사내에게 물었다. “어떠한 공?” 사내가 깜짝 놀라 고불을 쳐다보고 납짝 엎드렸다. 그리고 엉겁결에 말을 받았다. “죽었지 당.” “핫핫핫…되었지 공.” “대감, 소인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염려놓으시 공.” 그 자리에 있던 신료들이 괴이쩍게 여겨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고불이 그 까닭을 얘기했다. 그러자 의정부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고불은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다. 그 뒤 그 사람은 고불의 추천을 받아 여러 차례 고을 수령을 지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었다. 고불이 아니면 감히 흉내내지 못할 해학이었다. 뒷날 사람들은 두 사람의 희한한 문답을 ‘공당 문답’이라 칭했다.
성종 시대(1469~1494)
임금의 자질
예종이 즉위 후 해를 넘겨 세상을 떠나고, 13세의 어린 임금이 보위에 올랐다. 조선 제9대 성종이다. 성종은 학문에 뜻이 많았다. 아침?낮?저녁 세대에 글을 강론하고, 밤에도 옥당에 입직한 신하를 불러 강론을 청했다. 강론을 마치고는 신하와 편복차림으로 마주앉아 술을 내리면서, 고금의 치란治亂과 민간의 편리한 일, 병폐로운 일 등에 대해 물었다. 따라서 전각안에는 늘 촛불이 켜져 있었다. 혹 입직 신하들이 술에 취하면 어전 촛불을 주어 바래다 주라고 내관에게 일렀다.
성종은 해서楷書에 정통하여, 글씨 모양이 사랑스럽고 단아하며 무게가 있었다. 또 묵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나랏일을 보살피는 여가에 때때로 필묵을 가까이하여 솜씨를 보였다. 성종의 짧은 글씨와 작은 화폭들이 세상에 흩어져, 이것을 얻은 자는 겹겹으로 사서 간직하여 주옥보다 더 귀중하게 여겼다. 이따금 궁인의 상자 속에 들었던 휴지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종이와 필체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 종이 조각에는 단상을 읊은 시가 적혀 있었다.
그윽한 정자는 물을 내려다보고
높은 나무는 잔잔한 물을 굽어본다
준마가 푸른 풀밭에서 우니
봄이 산기슭에 있구나
한적한 봄을 읊은 것 같으나, 고독감이 물씬 배어 있다. 외로움은 이 종이 조각에도 묻어 있다.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은 천 길이나 섰는데
솔바람은 불어 그치지 않네
남간에 기대어 서 있는 무한한 뜻에
고향의 가을이 어렴풋하네
성종은 형 월산대군에 대한 우애가 남달랐다. 형에 대한 애틋한 정을 읊은 시도 보인다.
묻노니 형은 무슨 일로 세월을 보내는가
상상하건대 거문고와 노래겠지
이러한 종이 조각으로 보아 성종은 낙서를 즐긴 듯하다.
뒤에 영의정을 지낸 성희안이 홍문관 정자(정9품)로 있을 때였다. 그가 부친상을 당하여 복제를 마쳤다. 성종은 말단 벼슬아치인 그를 편전 문 밖에까지 불러 위로했다. 그리고 내관을 불러 성희안에게 매 한 마리를 주면서 일렀다.
“그대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공무의 여가를 틈타 이 매로 사냥하여 맛있는 고기를 드리도록 하라!”
성희안이 숙직을 할 때 성종의 부름을 받아 술을 마시며 세상사를 토론했다. 그는 술에 취해 감자와 귤 여남은 개를 소매 속에 넣었다. 내관이 술 취한 희안을 업고 나가다가 소매 속의 감자와 귤이 떨어져 바닥에 흩어졌다. 이튿날이었다. 성종은 감자柑子(홍귤나무의 열매)와 귤 한 쟁반을 옥당(홍문관)에 하사하면서 일렀다. “어젯밤 희안이 감자와 귤을 소매 속에 넣은 것은 노모를 위한 것이므로 과인이 오늘 그것을 내리노라.” 성희안은 성종의 은혜를 마음속 깊이 새겨 죽음으로 갚으려고 했다. 뒷날 그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의 핵심 인물이 되어 폭군 연산을 몰아내는 게 목숨을 걸었다. 성종에 대한 은혜 갚음이었다.
한번은 재상 이영은과 이곤 두 사람이 한 기생을 함께 관계하고 서로 빼앗으려고 추태를 부렸다. 간관이 이를 알고 죄를 논하며 파직시키라고 청했으나, 성종은 응하지 않았다. 양사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두 사람을 파직시키라고 성종에게 압력을 넣었다.
성종이 말했다. “예로부터 사대부들이 아내와 첩을 서로 빼앗는 것은 쇠망해가려는 징조다. 나는 지금 이 나라가 쇠망해가는 세상으로 볼 수 없으므로 대간의 파직하라는 청에 따를 수 없다.” 그리고 이영은과 이곤에게 영을 내렸다. “그대들은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 깊이 반성하라!” 성종은 두 정승을 파직시키지 않고 사직서를 쓰게 만든 것이다. 현명한 판결이었다.
성종은 경연 강론이 끝나면 곡 편전에 나왔다. 6개 부처 승지가 각기 소속 관청의 일을 가지고 해당 관원들과 함께 임금을 뵈었다. 임금은 승지와 관원들과 더불어 나랏일을 의논하고, 옳지 않은 일을 상부하면 물리친 후 다시 의논해오라고 영을 내렸다. 그리고 의견을 꼼꼼히 따져 물었다.
“이것이 정녕 당상관의 의사인가, 해당 관원의 생각인가?” 그리고 의견을 낸 관원의 이름을 기록해놓았다가 반드시 승진에 반영시켰다. 또한 성종은 수령과 변방의 장수들이 그만두거나 부임할 때 한 사람씩 불러, 그 사람의 출신내력과 친족?교우 관계를 물었다. 그리고 군졸을 다스리고 백성을 어루만지고 외적을 방어하는 방법을 물어, 잘하고 있다고 보면 칭찬해주고, 때로는 승진시켜 사기를 북돋워주었다. 또 잘못한다고 판단되면 내쫓고, 그 수령과 변방 장수를 추천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러므로 지방관으로 발령받는 관리가 임무를 감당하기 어렵다 싶으면 병을 핑계삼아 부임하지 않는 예가 종종 있었다.
한번은 성종이 한 수령이 지방을 잘 다스린다는 말을 들었다. 성종은 그 수령을 크게 쓸 수 있는지 알아본 후에, 조정으로 불러 사헌부 소속의 집의(종3품)로 명했다. 3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상소를 번갈아 올려 그 집의의 임명을 거두어들이라고 아우성이었다. 성종은 오히려 그 사람을 이조참의로 한 품계 더 승진시켰다. 3사에서는 또 극력 반대하여 들고일어났으나, 며칠만에 성종은 또 사람을 품계 올려 이조참판(차관급)으로 임명했다. 그제야 3사에서 상소를 중지했다.
“만약 이에 그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정승까지 이르게 될 것이니, 그만 중지하는 것만 못하다.” 그 사람은 후에 정승이 되었고 재능이 출중하여 나라에 큰 도움을 주었다. 성종의 사람 보는 눈에 신하들은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성종이 후원에서 산보를 즐겼다. 그때 까치가 종이 한 장을 물고 가다가 성종 앞에 떨어뜨렸다. 성종이 그 종이를 무심코 보았다. 해변 고을 수령이 좌승지에게 뇌물을 준 물목 단자單子였다. 성종은 그 종이를 소매 속에 넣고 경연에 나가, 여섯 승지를 불러 조용히 말했다. “그대들에게 묻겠노라. 만약 지방의 수령들이 음식물을 그대들에게 선물한다면 예의를 무시하고 받겠는가?” 여러 승지들이 입을 모았다. “전하, 어찌 감히 덥석 받겠나이까?”
그러나 좌승지만은 대답을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신은 덥석 받았나이다. 신은 90세가 되는 노모가 계시온데, 평소에 교분이 두터운 한 수령이 어제 해산물을 신에게 선물하여 그것을 받았나이다. 신에게 죄를 주시옵소서.” 성종은 환하게 웃으며 소매 속에서 그 물목 단지를 꺼냈다. “그대는 옛날 정직한 사람의 유풍을 지녔다고 이를 만하다. 노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도록 하라!” 성종은 뇌물과 성의의 선물을 구별하여 신하들을 단속했다.
성종은 큰 술잔에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묘한 버릇이 있었다. 맑기가 물 같은 옥 술잔이 하나 있었다. 성종은 술이 취하면 신하에게 그 술잔으로 술을 마시게 했다. 어느 날 종친부의 한 종실이 술을 마신 뒤에 그 옥 술잔을 소매 속에 살짝 넣고 일어나 춤을 추다가, 거짓으로 넘어져 술잔이 와장창 깨어져버렸다. 성종의 과한 음주를 간접적으로 깨닫게 한 처사였다. 성종은 종실의 뜻을 알고 죄를 묻지 않았다.
성종은 말년에 왕자 역(후에 중종)을 유별나게 사랑했다. 사헌부에서 이일을 문제삼았다. 지나친 편애로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성종은 사헌부에서 올리는 상소를 읽고 난 후, 사헌부의 장령을 불러 아무 말 없이 한 수의 시를 보여주었다.
세상 사람들이 늦가을 국화를 사랑하나니
이 꽃이 핀 뒤에는 다시 다른 꽃이 없기 때문이다.
장령이 시를 읽고 눈물을 닦았다. 임금의 심약함이 죽음을 끌어들이고 있어서였다. 얼마 후 성종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