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이즈미 수상의 5번째 신사참배로 다시 문제가 불거지면서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또 다시화제가 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고이즈미 수상의 참배에 한국이나 중국 정부가 반대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는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과연 그런것일까?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이 옳은 것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
1956년 후쿠시마 현에서 태어나, 도쿄대학 교양학부 프랑스과를 졸업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철학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도쿄대학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교수로 있다. 20세기 서구철학을 공부했고, 정치·사회·역사 등 여러 문제를연구하고 있다. 명석한 논리와 비판적 사고를 하는 지식인으로서 일본사회에 정평이 나 있다. 반전, 반차별, 반식민지주의를 내걸고 등장한 NPO전야(前夜)의 공동대표로서 잡지 「전야(前夜)」를 창간했다. 「전야」는 파국전야로 가고 있는 일본을 다시 해방전야로 나아가게 하려는 노력의일환이다. 다카하시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전후책임론』 『교육과 국가』 『기억의 에티카』 『역사/수정주의』 등이 있고, 한국에는 『일본의전후책임을 묻는다』(역사비평사, 2000) 등이 번역되어 있다.
■ 역자 현대송(玄大松)
1961년부산에서 태어나, 부산해양고등학교를 나온 뒤 7년 간 항해사로 승선 근무했다. 뒤늦게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경대학 대학원법학정치학연구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경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한일 간의 역사 연구를 토대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정립하는 데 일조할 생각이다. 2004년 제3회 이우에(井植)기념 아시아태평양연구상 수상.
■ 차례
한국어판 발간에 부쳐
들어가며
1장 감정의 문제 : 추도와 현창 사이
격렬한 유족 감정
다양한 감정의 대립
야스쿠니와 피의 이미지
감격의 눈물 좌담회
오리쿠치 시노부가 본 초혼제
야스쿠니신사가 부여한 것
억압되는 비애감정
전사자와 그 유족에게 영예를
감정의 연금술
성전·영령·현창
충분한 상(喪)을 위해
전사의 대환희
2장 역사인식의 문제 : 전후책임론의 저편에
공동체와 그 타자
A급 전범 합사 문제
도쿄재판에서 심판받지 않은 것들
중국의 정치적 양보
분사는 가능한가
희생양과 면책의 논리
전쟁책임론이 간과한 것
대만리번-극히 일부의 예로서
지켜야 할 나라와 식민지 제국
영령이란 이름의 수인
3장 종교의 문제 :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의함정
다시 한번 감정의 문제에
정교분리 문제
수상의 사적 참배
존재하지 않는 합헌 판결
개헌이냐 비종교화냐
야스쿠니신사의 특수법인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교법인은 아닐지라도
신사 비종교론
제교분리의 효과
기독교인에 의한 참여의 논리
불교인에 의한 참여의 논리
비종교라는 위장
4장 문화의 문제 : 죽은 자와 산 자의 정치
전통으로서의 야스쿠니
에토 준의 문화론
야스쿠니를 지탱하는 정치적 의지
야스쿠니는 일본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가
특별히 죽은 자들
5장 국립 추도시설의 문제 : 물어야 할것은 무엇인가
감정의 응어리에 대한 해결책
부전과 평화의 시설인가
결여된 역사의식
추도 대상의 자격
각국의 추도 시설
고대 그리스의 장송 연설
개인이 하는 추도, 집단이 하는 추도, 국가가 하는 추도
전쟁을 부정하는시설을 위해
정치가 그것을 결정한다
맺으며
저자 후기
역자 후기를대신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감정의 문제 : 추도와 현창 사이
야스쿠니 문제를 어렵게 하고 있는 최대 요인 중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감정의 문제다. 특히 그 중심에는 ‘유족 감정의 문제가 있다. 남편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合祀)되어 있는 이와이 마스코는 2002년 4월 15일에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한 통의 진술서를 제출했다. 그보다 약 8개월 전인 2001년 8월 13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이 취임이래 첫 번째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한 데에 대해 일본인과 한국인 총 639명의 원고가 수상 참배의 위헌 확인, 참배 금지, 원고의 종교적 인격권의 침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야스쿠니 문제에는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감정이 뒤엉켜 존재하고 있다. 유족의 감정조차 결코 하나같지 않고 다양하다. 마치 큰 바위처럼 하나 같은 일본측의 유족 감정과,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같은 아시아 측의 유족 감정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일본측에도 야스쿠니 참배 위헌소송의 원고단에 참가하고 있는 다수의 유족을 비롯해 ‘반(反)야스쿠니’ 유족이 존재한다. 또한 대만의 타이얄족 중에도 야스쿠니 참배 위헌소송에서 야스쿠니신사를 지지하는 ‘보조 참가자’의 일원이 된 첸메이린 등의 예도 있다.
이와이 마스코의 진술서에는 전후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도 ‘야스쿠니의 아내’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격렬한 ‘유족 감정’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런 유족 감정은 과연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까지의 시기, 야스쿠니신사에서는 수천 혹은 수만 단위로 대량의 전사자를 합사하는 임시대제가 되풀이되었다. 그들은 전쟁이 없었으면 일생 동안 고향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일이 없었을 저변의 민초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들이나 가족이 전사한 바람에 국비로 도쿄에 초대되어 ‘명예로운 유족’으로 찬양 받고, 게다가 ‘천자님’인 천황까지 아주 가깝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나 천자님을 위해 아들이나 남편을 바치는 것을 성스러운 행위라고 믿게 함으로써, 야스쿠니 신앙은 당시 일본인의 삶과 죽음 전체에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을 종교라고 부른다면, 야스쿠니 신앙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종교다. 또한 ‘국가신도’라는 개념의 내실을 어떻게 규정하든, 그것은 천자 즉 나라를 신으로 하는 종교이자, 천황 바로 그 사람에 다름 아닌 국가를 신으로 하는 종교였다. 국가를 위해 살고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일본인의 국가교는, 거의 한 세대를 거친 후에 ‘홀로 키운 사랑스런 외아들을 나라에 바친 명예로운 어머니의 감격의 눈물 좌담회’와 “초혼의식을 배견하고”의 세계에 연결되고 있다.
그럼 왜 국가는 그런 의미 부여를 제공하는 것일까? 왜 국가는 국민의 전사를 ‘명예의 전사’로 현창하고, 그 유족으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에 목이 메게 하는 의미를 제공하려고 하는 것일까? 청일전쟁과 대만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장병에게는 최고의 명예가 주어졌고, 국민에게 감사받을 뿐만 아니라 작위ㆍ훈장을 수여받고 장려금까지 받았다. 이에 비해 전사자는 작위훈장이나 장려금을 받을 수도, 국민에게 환영받을 수도, 개선장병과 같은 영광을 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것은 부조리하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전사자와 그 유족에게도 가능한 만큼의 명예와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왜? 목숨을 버려서 싸운 전사자가 개선한 장병보다 국가에 대한 공헌에서 결코 뒤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청일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동아시아의 정세는 긴박해지고 있어서 언제 또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전쟁이 시작되면 무엇에 의지해서 나라를 지킬 것인가. 그것은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병사의 정신일 수밖에 없고 그 정신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지키는 요체(要諦)다. 그리고 그 정신을 기르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영광을 전사자와 그 유족에게 돌려 전쟁터에서 쓰러지는 것, 즉 전사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끼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국의 수도 도쿄에 전국에 있는 전사자의 유족을 초대해서, 명치천황 스스로가 제주가 되어 사자의 공적을 칭송하고 그 혼을 현창하는 칙어를 내리는 것이야말로, 전사자와 그 유족에게 최대의 영예를 돌리는 것, 그리고 국민에게 전쟁터에서 쓰러지는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추도하는 것은 남겨진 자가 사자를 그리며 슬퍼하는 것, 뒤에 남아 애도하는 것, 즉 불쌍히 여겨 슬퍼하는 것이다. 애도한다는 것은 아프다는 것, 상실의 아픔을 공유하려는 것이며, 따라서 추도라는 것은 비애의 감정 안에서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야스쿠니 제사는 그런 감정에 잠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슬픔이나 아픔의 공유, 즉 추도나 애도가 아니라 전사를 기리어 칭찬하고 미화하면서 공적이라 내세워, 뒤따라야 할 모범이라고 하는 것, 즉 현창인 것이다. 야스쿠니신사는 이런 의미에서 결코 전몰자 추도시설이 아니라 현창 시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역사인식의 문제 : 전후책임론의 저편에
‘감정의 문제’에서 그 핵심은 전사의 슬픔을 기쁨으로 180도 전환시키는 감정의 연금술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곧바로 다음 문제가 나타난다. 바로 역사인식의 문제다. 우선, 일본 국민의 바깥에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생긴 대규모 사망자나 피해자가 존재한다. 이들 사망자나 피해자와의 관계를 도외시하고 일본 국민만의 추도공동체나 애도공동체에 머문다면, 그 추도나 애도 행위 자체가 밖으로부터의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야스쿠니 문제에서 역사인식이 거론되는 것은 이른바 A급전범 합사 문제 때문이다. A급전범이란,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제판)에서 평화에 대한 죄, 즉 침략전쟁을 주도한 죄로 기소된 28명을 일컫는 말이다. 이 가운데 사망ㆍ정신이상으로 인한 면소자 3명을 제외한 25명의 피고 전원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7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들은 분명히 전사자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야스쿠니신사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전사자라고는 할 수 없는 B, C급 전범도 합사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의 A급전범 합사는 왜 비판의 대상이 되는가? 그것은 우선, 그들을 ‘영웅=호국의 신’으로 현창하는 것은 그들이 주도한 전쟁을 침략전쟁이 아닌 정의의 전쟁으로 정당화하는 것과 연결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1980년대 들어 신국가주의 노선을 추구한 나카소네 수상이 ‘전후정치의 총결산’을 외치며 등장하자,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강하게 경계하는 한국과 중국 정부의 허용 한도를 넘어버린 것이다. 일본의 A급전범에 대해서도 개개 판결의 타당성을 둘러싼 논의는 가능하지만, 국민을 전쟁에 동원해 아시아 각국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책임을 불문에 부쳐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A급전범 분사론은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역사의식을 심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방해한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 전쟁책임 문제를 중시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반대다. 그것은 전쟁책임 문제를 축소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역사인식 문제를 더욱 은폐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지금, 만일 A급전범이 분사되었다고 하자.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일본수상이 야스쿠니신사에 공식 참배한다. 한국 정부나 중국 정부에서는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다. 일본수상은, 예를 들어 고이즈미 수상이라면, ‘오늘날 일본의 평화와 번영의 초석’이 된 영령들의 귀중한 희생을 찬양한 다음, A급전범 합사가 세상에 알려진 뒤 끊어졌던 천황의 신사 참배가 부활한다. 수상의 공식 참배 지지자들의 최종목적은, 무엇보다도 천황의 참배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전쟁책임’이라는 말이나 ‘전쟁책임론’이라는 관점 바로 그 자체가 역사인식의 심화를 막고 있다는 것이다. 야스쿠니신사는 1869년에 도쿄초혼사로 창건되어, 1879년 ‘야스쿠니신사’라고 이름을 바꾼 뒤 근대 일본이 행한 모든 전쟁에 관계하고 있다. 과거 일본제국은 전쟁의 승리로 많은 식민지를 획득하면서 일대 식민지 제국을 쌓아 올렸다. 야스쿠니신사의 역사를 생각할 때, 전쟁은 대만ㆍ조선ㆍ사할린ㆍ남양군도ㆍ만주국 등의 식민지 지배를 가능하게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야스쿠니신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아시아태평양전쟁기의 영령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사했다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들이 지키려고 한 나라는 그 이전의 많은 전쟁에 의해 구축된 식민지 제국에 다름 아니며, 그 자체가 일본군의 아시아 침략의 산물이었다.
야스쿠니신사가 공표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2001년 10월 현재 조선 출신 합사자가 21,181명, 대만 출신 합사자가 28,863명이다. 이것만으로도 약 5만 명의 식민지 출신자가 야스쿠니신사에 ‘호국의 신’으로 모셔져 있는 것이다. 이들 합사자의 대부분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조선과 대만에서 일본군인ㆍ군속으로 전시에 동원된 사람들이다. 요컨대 야스쿠니신사에는 조선과 대만에 대한 식민지 지배와 탄압의 가해자로서 전사한 일본인과, 일본인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였던 조선인과 대만인이 완전히 동격의 ‘호국의 신’으로 합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식민지 지배의 피해를 실감하고 있는 한국과 대만의 유족에게 굴욕적이지 않을 리가 없다.
「아사히신문」(1978년 4월16일) 보도에 따르면, 1977년 여름 야스쿠니신사가 일본을 방문한 어떤 대만인에게 대만 출신 군인ㆍ군속 전몰자 27,800명의 합사 통지서를 유족에게 배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신사의 의도와는 반대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식민지 출신자의 합사가 문제가 되었다. 1979년 2월 대만 다카사고족의 유족대표단 7명이 일본을 방문하여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에 대해 합사 철회는 요구했지만, 야스쿠니신사 측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부했다.
전사한 시점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사후에 다시 일본인이 아닌 것으로 될 수는 없다. 일본의 군인으로, 죽으면 야스쿠니에 혼령이 모셔질 거라는 마음으로 싸우다 죽었기 때문에, 유족의 요구만으로 철회할 수는 없다. 내지인과 똑같이 전쟁에 협력하게 해달라고 해서 일본인으로 싸움에 참가한 이상, 야스쿠니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당연하다. 대만에서도 대부분의 유족은 합사에 감사하고 있다.
이는 식민지 지배자가 피지배자에 대해 가지는 독선과 오만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2001년 6월, 한국의 유족 55명이 도쿄 지방재판소에 ‘합사 폐지’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재판의 소장(訴狀)에는 친족의 영혼이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주모자 및 적극 참가자와 함께’ 침략국의 ‘호국 영령’으로 모셔져 있는 현상은 참기 어려운 굴욕이라고 적혀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식민지에서 반강제적으로 전쟁에 동원되어 전후 오랫동안 전사통지도, 유족 반환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유족이 모르는 사이에 일방적으로 합사된 사람들의 합사 철회를 거부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런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를 가해자와 함께 뒤섞어서 일본의 신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문화의 문제 : 죽은 자와 산 자의 정치
이제 지금부터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야스쿠니를 ‘문화’의 문제로 접근하는 논의다. 이런 논의는 일본인과 중국인ㆍ한국인의 사생관(死生觀)의 차이로 심화된다. “일본은 과거를 물에 흘려보내고, 한국인은 과거의 한(恨)을 언제까지라도 품고 있다”, “중국문화는 사망자를 용서하지 않는 문화지만, 일본문화는 사망자를 용서하는 문화다”라고도 한다. 결국 이런 문화의 차이를 강조해 각국의 문화를 모두 같이 존중해야 한다는 일종의 문화다원주의나 문화상대주의에 기대어 A급전범을 용서하고,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과거를 물에 흘려보내는 일본문화의 권리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문화론적 야스쿠니론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것으로, 에토 준의 논고 「산 자의 시선과 죽은 자의 시선」에 근거해 얘기를 하겠다. ‘일본문화’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에토에 따르면, 비행기 사고 때 일본인은 유체(遺體)의 단 한 점이라도 철저하게 수집해 극진하게 장례를 치르려고 하지만, 미국은 스페이스 셔틀의 사고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유체를 찾으려는 시도가 전혀 없다. 일본의 국토, 일본인이 보는 풍경, 일본인의 일상생활 모두에 나타나고 있는 죽은 자와의 공생감, 이것이야말로 ‘일본문화의 근원’이며 ‘일본이란 국가의 특성 바로 그 자체’의 근원에 있는 ‘대단히 중요한 감각’이다. 따라서 수상이나 천황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도 바로 이런 ‘일본문화의 근원’에서 근거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에토가 말하는 것처럼 죽은 자와의 공생감이 일본문화의 근원에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해도 근본적인 의문은 남는다. 첫째, 죽은 자와의 공생감이 왜 야스쿠니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 그 필연성이 너무나 불분명하고 근거가 없다. 이는 에토가 말하는 문화론을 초월한 국가의 정치적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둘째, 왜 야스쿠니는 군인ㆍ군속을 제외한 민간인 전사자는 제사지내지 않는가? 이 역시 국가의 정치적 의지다. 셋째, 전사자와의 교감을 말한다면, 왜 야스쿠니는 적 측 전사자의 영혼은 모시지 않는가? 실은 에토도 이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이 혼란스러운 모습은 어찌 된 것인가?
야스쿠니가 적(敵)으로 죽은 자를 제사지내지 않는 것은 외국의 경우뿐만이 아니다. 자국의 전사자라도 적으로 죽은 자라면 제사지내지 않는 것이 야스쿠니다. 에토는 야스쿠니가 내전에서 죽은 자를 모시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려, “국내의 전사자면, 청원해서 지금부터 제사지내게 하면 된다”라고 한다. 열심히 ‘청원’하면 “제사를 지내줄지도 모른다”라니, 얼마나 정치적인 제사인가? 죽은 자의 혼과 산 자의 혼의 왕래, 사자와의 공생감, 진혼 등의 문화적 감각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지 않은가? 어쨌든 1869년의 도쿄초혼사 창건에서부터 오늘까지 거의 140년간, 일찍이 국가기관이었던 시대나 패전 후에 종교법인이 된 후나, 야스쿠니신사에 천황의 군대에 대적하다 적으로 죽은 자가 제사지내진 예는 단 한 번도 없다. 야스쿠니신사가 이렇게 적으로 죽은 자를 배제하는 것은 그야말로 ‘문화’를 넘어선 국가의 정치적 의지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야스쿠니신사 경내에는 진영사라는 것이 있어서 이것이 “야스쿠니신사 본전에 안치되지 않은 사람의 영혼과 세계 각국의 모든 전사자와 전쟁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영”을 제사지내고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고 설명될 때도 있다. 그러나 이 작은 사당은 1965년 7월 ‘일본군인ㆍ군속만의 신사가 아닌가?’라는 비판을 받았을 때 급조된 것이며, 방문하는 사람도 없는 어둑어둑한 한구석에 남몰래 세워져 있다. 좀더 본질적인 것은, 진영사의 ‘영’은 제신수에 계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영사에 ‘영을 모신다’고 말해도, 본전의 합사와 동격은 될 수 없다. 야스쿠니신사의 제신은 단순히 전쟁에서 죽은 자가 아니다. 일본의 정치적 의지에 따라 뽑힌 특수한 전사자인 것이다.
국립 추도시설의 문제 :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수상이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면, A급전범 합사 때문에 반드시 한국과 중국 등으로부터 반발을 받는다. 정치적 판단으로 A급전범을 분사하려 해도, 야스쿠니신사와 유족의 반대로 실현할 수 없다. 수상의 참배는 정교분리 위반이라 해서 잇달아 소송이 일어난다. 그런데 정교분리 그 자체를 폐기하는 헌법 개정은 논의에서 빠진다. 종교법인인 채로는 헌법 문제에 걸리기 때문에 야스쿠니신사를 비종교적인 특수법인으로 하려고 하면, 야스쿠니신사는 이미 야스쿠니신사가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곤란을 자각하면서도 여전히 국가적인 전몰자 추도에 매달린다면, 남겨진 선택지는 한정된다. 그래서 ‘국내외의 사람들이 감정의 응어리 없이 추도의 정성을 바칠’수 있는, 종교적인 색채가 전혀 없는 ‘무종교의 국립 전몰자 추도시설’을 새로 건설한다는 것이다. 수상의 의향에 따라 2001년 12월 24일 후쿠다 야스오 내각관방장관의 사적 자문기관으로 ‘추도ㆍ평화기원을 위한 기념비 등 시설 본연의 모습을 생각하는 간담회(이하 추도간담회)가 설치되고, 약 1년 뒤 보고서가 제출된 것이다.
그럼 애당초 왜 새로운 국립 추도시설이 필요한 것인가? 보고서에 따르면 새로운 시설은 ‘일본국 헌법에 따라, 다시금 정부의 행위로 전쟁의 참화가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결의하고, 일본과 세계의 항구적인 평화를 희구하게 된’ 일본에서, ‘추도와 평화 기원을 불가분의 일체라고’ 생각하는 시설이자, 전쟁의 참화를 깊이 깨달아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새롭게 한 다음에 평화를 기원하는 시설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 시설을 세운다면 야스쿠니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이런 조치에 따라 A급전범 문제는 한국이나 중국과의 사이에서 해소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A급전범 문제의 ‘정치적 결착’은 보다 본질적인 역사인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야스쿠니신사는 지금도 예전 일본의 전쟁과 식민지 지배가 모두 옳았다는 역사관에 입각해 있다. 한편 추도간담회 보고서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이 점에 관해 시종일관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추도간담회 보고서에는 침략이란 단어도 식민지 지배란 단어도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잘못된 국가 정책의 국내외 모든 희생자는 ‘명치유신 이후 일본이 관련된 대외 분쟁(전쟁ㆍ사변)의 사망자’라고 중성화되어 있다. ‘과거의 역사로부터 배운 교훈을 초석으로 해서’라고 말하면서도, 과거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전혀 충분하지 않다. 이런 애매한 역사의식으로 일본군과 피(被)침략국의 전사자를 함께 추도한다면,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열화’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국립 추도시설은 ‘제2의 야스쿠니’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과거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역사인식이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처리되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전후에 대해서 그리고 특히 앞으로, 자위대의 전투 행위가 항상 일본이나 국제사회의 평화를 위협하는 정의롭지 못한 적에 대한 정의의 무력 행사가 되고, 이 활동으로 목숨을 잃는 일본 측 죽은 자만이 추도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명백하게 ‘야스쿠니의 논리’가 부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평화헌법’이 알리바이로서 교묘하게 이용되어 야스쿠니 논리의 부활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전후 일본은 전쟁을 포기했기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은 이론상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자위대의 무력 행사는 “일본의 평화와 독립을 지키고, 국가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며, “국제평화를 위한 활동”이므로, 항상 정당하다는 것이다.
나는 추도나 애도에 대해서 반드시 개인주의의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가족이나 친족에 의한 위령 행위는 이미 집단적인 것이며, 그것들을 부정해야 할 이유는 눈에 띄지 않는다. 나는 집단적인 추도나 애도 행위가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추도나 애도가 개인을 넘어서 집단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그것이 정치성을 띠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정치성은 집단적 추도나 애도가 국가적 추도나 애도가 되었을 때, 어떤 중대한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군대를 갖춘 국가는 현대 세계에서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전쟁 수행 주체이므로, 전쟁을 할 수 있는 집단으로서의 국가가 전사자를 추도할 때, 그 추도가 국민을 새로운 전쟁에 준비시키는 현창 행위가 되는 것은 필연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아, ‘국립 추도시설’을 허용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시설에서의 추도가 결코 현창이 되지 않도록, 국가가 그 추도를 새로운 전쟁에 연결시키는 회로를 완전히 끊는 것이다. 또한 ‘부전의 맹세’가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과거의 전쟁에 관해 국가가 확실하게 책임을 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 그것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국가는 패전 후 반세기 이상이 지나서도 전쟁책임에 대한 명확한 역사인식을 확립하지 못했고, 1990년대 이후에 제기된 전후 보상 문제에 대해서도 시종일관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치안유지법에 의한 탄압 피해자의 명예회복도 되지 않았고, 수상이 되풀이하는 야스쿠니신사 참배 바로 그 자체가 국내외로부터 일본 정부의 전쟁책임 인식을 의심받게 하고 있다.
문제는 어떤 국립 추도시설을 만드는가가 아니다. 시설은 시설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정치다. 국립 추도시설이 아무리 명확한 반전ㆍ평화의 의지와 전쟁책임 인식을 토대로 만들어져도, 거기에 관여하는 나라의 정치가 전쟁과 민족주의로 향하게 되면, 언제라도 쉽게 ‘제2의 야스쿠니’가 되어 새로운 전쟁에 국민을 동원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일본의 경우, 국가가 전쟁책임을 확실히 지고 헌법 9조를 현실화해서 실질적으로 군사력을 폐기할 필요가 있다. 즉 국가에 전쟁책임을 지게하고 장래의 전쟁을 없애기 위해 먼저 해야 할 것은, 국립 추도시설의 건설이 아니라 일본의 정치적 현실 그 자체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