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잭 웨더포드(역자 : 정영목)
ǻ
사계절
   
13000
2005�� 03��



■ 책 소개
칭기스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이룩한 몽골 제국은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펴고, 보편적인 알파벳을 고안하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지폐를 유통시키는 등 일관된보편주의를 보여주었다. 몽골은 이데올로기적 해법보다는 실용적인 해법을 찾았고, 이를 다른 나라로 퍼뜨렸다.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보편적문화와 세계 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 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 동안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공화국, 선거, 공립학교, 우편제도, 대포, 주판, 나침반 등 유럽이 만들었을 것이라 당연시했던 문명들이 사실은몽골 제국의 창조물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칭기스 칸이 어떻게 유럽을 오랜 잠에서 흔들어 깨웠고, 어떻게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근대 세계체제를 형성했는지, 그 진실을 밝히고 있다. 

■ 저자 잭웨더포드 
미국 미네소타 주의 매칼래스터(Macalester) 대학 인류학과 교수이다. 지은 책으로는 IndianGivers, Native Roots, Savages and Civilization, The History of Money 등이 있다. 부족민연구 전문가인 그는 중국, 중동, 유럽을 연결하는 비단길과 세계 교역의 역사에서 부족민이 차지하는 역할을 연구하던 중,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이세계사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 책을 위해 8년 동안 몽골의 옛 중심지들을 답사했고, 베이징의 자금성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거쳐 이스탄불의 토프카피 궁전에 이르는 길을 따라다니며, 고고학적 발굴 현장과 도서관을 찾아보고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기도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98년 칭기스 칸의 고향 부르칸 칼둔을방문했다. 그는 800년 동안 금지된 구역이었던 그곳에 대한 현지 답사를 통해, 그동안 풀지 못한 의문들을 풀 수 있었다. 칭기스 칸의 성장기반이었던 곳은 예상 외로 초원이 아니라 숲으로 가득 찬 곳이었고, 그러한 환경은 칭기스 칸의 전쟁 전술에까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800년 전의 칭기스 칸을 좀더 생생히 체험하기 위해, 계절을 바꾸어그의 고향을 방문했으며, 칭기스 칸이 유목민 생활을 했음을 감안하여 그의 이동 경로를 추측해 ‘이동의 고고학’ 탐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워싱턴 포스트지에 실린 한 서평은 필자의 피와 땀이 담긴 이 책을 호머의 『일리아드』에 비견하기도 했다. 


이 책의 집필을 마친 그는 NPR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칭기스 칸은 몇몇 종교 지도자를 제외하고,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인물이다.


■ 역자 정영목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번역학과 겸임교수로재직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신의 가면: 서양신화』『마르크스 평전』『마하트마 간디』『서재 결혼 시키기』『파라오의 역사』『호치민』『트로이전쟁』『술탄 살라딘』『하느님이 여자였던 시절』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사라진 정복자 


[1부] 초원의 공포정치:1162~1206 
1장 핏덩어리 
2장 세 개의 강 
3장 칸들의 전쟁


[2부] 몽골 세계전쟁:1211~1261 
4장 황금 칸에게 침을 뱉다 
5장 슐탄과 칸의 대결 
6장 유럽 원정대 
7장왕비들의 싸움 


[3부] 세계 인식의 대전환:1262~1962 
8장 쿠발라이 칸의 새로운 몽골 제국 
9장 팍스 몽골리카 
10장 환상의 제국


맺음말 - 영원한 푸른 하늘, 칭기스 칸 


미주 
용어해설 
참고문헌 
감사의 말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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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1부 초원의 공포정치: 1162~1206
핏덩어리

몽골의 헨티 산맥. 아시아인 역법에 따르면 말의 해인 1162년 봄이었다. 납치되어온 젊은 여자 후엘룬은 멀리 오논 강을 굽어보는 헐벗고 외진 작은 언덕에서 첫 아이를 낳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 아니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메르키트 부족의 칠레두라는 다른 젊은 전사의 부인이었다. 예수게이는 초원에서 부인을 얻는 흔한 방법을 택했다. 약탈혼이었다. 그러나 후엘룬에게 납치범의 지위보다 더 곤혹스러웠던 점은 그에게 이미 아내 또는 첩 소치겔이 있고 둘 사이에 아들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자주 되풀이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후엘룬의 첫 아기는 오른손에 뭔가 신비하고 불길한 것을 쥐고 세상에 태어났다. 젊은 어머니가 깜짝 놀라 손가락을 하나씩 살펴보니 손가락 마디뼈만한 크기의 크고 검은 핏덩어리가 드러났다. 예수게이는 후엘룬을 납치한 직후 타타르와 싸우러 나갔다가 테무진 우게라는 이름의 전사를 죽였다. 아들이 태어난 직후에 돌아온 예수게이는 아이의 이름을 테무진이라고 지었다.


그의 나이 불과 9세 때 아버지는 테무진의 신부를 구하러 아이와 함께 떠났다. 가는 도중에 어느 집에 묵었는데, 그 집 가장에게는 테무진보다 나이가 약간 더 많은 딸 부르테가 있었다. 두 아이는 서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두 아버지는 아이들을 혼인시키기로 결정했다. 예수게이는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타타르족이 잔치를 하던 야영지를 지나게 되었다. 누군가 그를 알아보고 몰래 독을 먹였다. 예수게이는 두 아내와 열 살이 안 된 자식 일곱 명을 세상에 남기고 죽었다. 남편은 죽고 다른 남자들은 데려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엘룬은 이제 가족 외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후엘룬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다섯 자식 모두를 구했다.


테무진은 자다란 씨족의 자무카라는 이름의 몇 살 연상의 소년과 두 번이나 영원한 형제 관계를 맺자고 맹세했으며, 몽골 전통에 따라 의형제가 되었다. 그러나 테무진은 배다른 형 벡테르와는 친밀한 유대를 나누지 못했고, 두 소년이 사춘기에 이르면서 형제간의 경쟁은 더 심해졌다. 몽골 유목민의 가족생활은 엄격한 위계질서의 지배를 받았고, 벡테르는 집안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남성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친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미망인 누구에게나 성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테무진과 동생 카사르는 벡테르를 활로 쏘아 배다른 형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금기를 어겼기 때문에 가족을 위험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1178년 16세의 테무진은 약혼녀 부르테를 데려오러 나섰다. 신부는 함께 살게 되는 남편 부모에게 옷을 선물로 가져가는 것이 관습이었다. 아버지가 없었던 테무진은 아버지의 친구 토그릴, 흔히 옹 칸이라고 알려진 자에게 옷을 줌으로써 그를 아버지로 인정하고, 아울러 가족을 보호해주기만을 바랐다.


2부 몽골 세계전쟁 : 1211~1261
황금 칸에게 침을 뱉다

칭기스 칸이 48세가 되고 그의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 지 4년이 흐른 1210년, 주르첸(여진족의 금나라) 대표단이 몽골 야영지에 도착하여 새로운 황금 칸이 즉위했음을 알리면서 칭기스 칸의 몽골이 속국으로서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주르첸은 만주의 숲 출신 부족으로 초원지대의 모든 부족에 대해 주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과거 옹 칸이 그들에게 신종의 의무를 약속했기 때문에, 칭기스 칸에게도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재확인하고 싶어했다. 칭기스 칸은 주르첸을 신뢰하지 않았고, 땅에 머리를 찧는 고두(叩頭)를 어떻게 하는지 잘 알았지만 50에 가까워진 칭기스 칸은 고두를 할 생각이 없었다. 칭기스 칸은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라는 명령을 받자 남쪽을 향해 침을 뱉었다고 한다. 1211년 칭기스 칸은 주르첸을 침공하겠다고 결정했다.


몽골군의 이동과 대형은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이 점에서 이들은 다른 모든 전통적인 문명의 부대와 분명하게 달랐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몽골군은 모두 기병으로만 이루어졌다. 두 번째 특징은 에비의 많은 말들 외에는 따로 병참부나 거추장스러운 보급 대열이 없었다. 그들은 불을 피우거나 음식을 조리하느라 멈추는 일 없이 열흘 동안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며, 고기와 요구르트 같은 제품의 식사를 꾸준히 했기에 주르첸 병사들보다 훨씬 건강하고 튼튼했다. 주르첸 원정에서는 주르첸이 몽골군을 이기고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중국인 주민의 믿음을 부숨으로써 주르첸을 손에 넣었다.


현대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던 무슬림 위구르 백성은 카라 키타이의 쿠출룩에게 박해를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칭기스 칸에게 의지하여 억압적인 왕을 타도하려 했다. 칭기스 칸은 장군 제베에게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아시아를 가로질러 무슬림을 보호하도록 했다. 그들은 쿠출룩을 참수형에 처했다. 이로서 칭기스 칸은 새로운 백성을 얻고 박해받는 종교의 옹호자라는 평판을 얻는 동시에, 중국인과 무슬림 사이의 비단길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3부 세계 인식의 대전환: 1262~1962
쿠발라이 칸의 새로운 몽골 제국

쿠빌라이 칸의 천재성은 그의 군대가 아무리 크고 그의 무기가 아무리 세련되었다 해도 단지 힘만으로는 중국 전체를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서 엿볼 수 있다. 그는 할아버지가 야만적인 힘으로 이루지 못했던 과업, 즉 중국 전체를 정복하고 통일하는 과업을 대중정치를 통해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중국인보다 더 중국인처럼 보임으로써 중국을 통제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는 몽골의 연호를 중국식으로 번역한 연호를 채택했고, 1271년 ‘위대한 기원’ 또는 ‘위대한 시작’ 정도의 의미를 가진 대원(大元)으로 정했다.


쿠빌라이는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분명하고 강력한 법전을 중심으로 민간 행정을 짜나갔다. 전체적으로 쿠빌라이의 법과 처벌 체계는 송나라의 체계보다 일관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온건하고 온정적이었다. 또한 그는 제국 전역의 교역 속도를 높이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폐의 사용을 급격하게 확대했다. 마르코 폴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폐가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몽골은 넓은 범위의 문학적 노력을 허용했으며, 작가들이 학자 출신의 관료가 선호하는 고전적인 양식보다는 민중이 쓰는 구어로 글을 쓰도록 장려했다. 쿠빌라이는 덧없는 대중적 인기를 얻으려는 단기적인 전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대륙문명의 충성을 얻어내기 위해 거의 20년에 걸쳐 장기적인 전략을 일관되게 체계적으로 추진해나갔다.


몽골은 계속 송나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했고, 1276년 몽골군은 마침내 송나라 수도 항저우를 점령했다. 쿠빌라이는 육지로 닿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을 장악하게 되자 새로 정복할 땅을 찾아 바다로 눈을 돌렸다. 1268년 쿠빌라이는 일본에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거절했다. 1274년 쿠빌라이는 약 900척의 함대를 모아 2만 3천명에 이르는 고려와 중국 보병을 태우고 하카타 만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날 밤 침공군이 모두 배에 타고 있을 때 무시무시한 가을태풍이 바다를 가로질렀다. 이 태풍으로 침공군 1만 3천명이 죽음을 당했다. 1281년 5월 말 고려 함대가 출항했으나 바다는 육지와 달랐고 더위, 질병과 또 다시 몰아친 태풍으로 10만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팍스 몽골리카
‘몽골 평화’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훗날 서구 학자들은 국제적으로 평화와 번영이 확대되어 가는 엄청난 변화를 인정하여 14세기를 ‘팍스 몽골리카’ 또는 ‘팍스 타타리카’라고 명명했다. 이제 몽골 칸들은 무기의 힘으로 얻지 못했던 상업적, 외교적 연결통로를 얻으려 했다. 대칸 자리를 둘러싸고 가족 내의 경쟁하는 지파들 사이에 정치적 불화가 생겼음에도 경제적, 상업적 체제는 쉬지 않고 가동되었다. 이런 움직임으로 몽골이 전쟁할 때 쓰는 길은 점차 상업적 간선으로 바뀌어갔다.


역사상 대부분의 제국은 정복한 땅에 자신의 문명을 강요했다. 그러나 몽골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가벼운 몸으로 왔다. 몽골은 대규모의 사람들을 움직이고 전쟁을 목적으로 새로운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몽골 평화 기간에도 똑같은 관행을 유지하여 유목민 사회의 이동 원칙을 생활과 문화가 매우 보수적인 지역에 적용했다. 몽골 제국에서는 주요한 도시 하나가 전체를 지배한 적이 없었다. 제국 내에서 물자와 사람은 늘 이곳저곳으로 이동했다.


몽골은 농민이 자기 땅의 기후, 토양, 배수 방식에 가장 적합한 작물을 심으라고 장려했고, 이렇게 되자 다양한 작물이 나오고 생산성도 높아졌다. 또한 타브리즈 근처에 치료소를 설립하여 동서양의 의학지식을 모두 활용했다. 몽골 정복 제국이 교역 제국으로 점점 확장되면서 제국 전체에서 똑같은 원리에 따라 계산되고 순조롭게 기능하는 역법을 갖추는 일이 점차 중요해졌다. 몽골인은 관측소를 세웠고, 필요한 계산을 빠르고 능률적으로 하기 위해 주판을 이용했다. 또한 쿠빌라이 칸은 중국식 관행에 맞추어 송 왕조만이 아니라 주르첸과 키타이 왕국의 역사까지 완전하게 편찬하라고 명령했다. 이 작업은 거의 80년이 걸려 1340년대에야 완성되었다.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 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 동안 근대세계 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문화에는 원래 몽골이 강조했던 자유교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